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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시와 서술

시라는 것은
미묘한 문제를 표현하는 좋은 방법인 것도 같다.
하지만 시의 문제점은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시라는 유형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다가서지도 못하게 하는 미묘한 장막도 존재하는 것 같다.

서술하는 글은 주저리주저리 생각을 표현하긴 쉽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 난점은,
분석적인 사람들이 달려들기 쉽다는 거다.
글의 중심 주제는 온데간데 없이,
그 가운데의 말마디들과 표현들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저자의 본의는 사라지고 쓸데없는 논의의 장이 전개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이 좀 굵으면 어떠하리요... ㅋ

성인(聖人)

우리가 아는 성인은 지극히, 그것도 극도로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실제 성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의 한 명일수도 있으며,
친구들 중에도 존재할 수 있다.

성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거룩한 사람,
즉 세상과는 분리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마음 깊이에 '하느님을 향한 열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상정한 기준'이다.
성인은 이래야 한다, 성인은 저래야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그것도 많은 경우에 성인들도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까다로운 기준이고 절차일 뿐이다.
기적이 있어야 하고,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등등등의 수많은 절차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조사과정은 성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예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성인은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성인은 여러분들처럼 선택에 있어서 갈팡질팡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성인들도 그랬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나약했던 성인들도 존재했는지 모른다.
인간의 '나약성'을 죄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나약함 때문에 쉽게 죄에 빠질 수는 있어도,
나약함이 곧 죄는 아니다.
그리고 인간 중에 죄를 단 한번도 짓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존재는 예수님 밖에는 없었다.
고로 성인들도 죄를 짓고 뉘우치는 과정을 수도없이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성인전에서는 삭제되거나,
나와도 과하게 포장되어서 무슨 마귀와의 전쟁을 하는 식으로 묘사되거나,
아니면 축소되어 나오게 마련이다.
성인전은 그들의 성성을 논하는 자리이지,
그들의 나약함과 죄를 구태여 세세하게 기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톨릭 내의 성인들을 묘사하는 흐름은,
우리에게 그릇된 성인관을 심어 놓았고,
결국 '우리가 성인이 된다는 건 웃기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우리 내면…

다 때가 있다.

다 때가 있다.
속이 뒤집어져라 술을 마셔볼 때가 있고,
마음이 절절하게 사랑에 빠져볼 때도 있다.
신앙적이거나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헌신할 때가 있고,
금세 식어 세상에 다시 없는 현실주의자가 될 때도 있다.

그런 시기들을 한바퀴 돌고나면,
삶을 재발견하는 때가 다가오게 된다.

먹고 마시는 단순한 행위에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하며,
죄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저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방향의 선택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들이다.
문제는,
그 첫 '조명'의 시간을 개개인별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인데,
누구는 특별한 도우심으로 얻고,
누구는 수도없이 부딪히다가 안되니 스스로 찾아나서기도 하고,
누구는 어느 순간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키면서 깨닫기도 하고,
누구는 다른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이루기도 한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깨달음의 기회가 많은데,
한편으로 이는 좋은 일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 변명의 여지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면 덜 맞을 것을,
안다고 자부했다가 큰일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을 조명하라.
조금만 현명함을 지니면 내가 '정말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되고,
내가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둘도 없는 보물이게 된다.

오천명을 먹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예수님은 임금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다.

아직도 빵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

성체와 성혈

참 중요한 대축일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님의 몸과 피의 대축일.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본의를 이해하고 있을까?

* 가치알기
먼저, 무언가를 받으려면 그 가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은 것을, 손에 쥔 것을 소홀히 하기 일쑤다.
어린 아이에게 다이아몬드 원석 던져주면 차돌인 줄 알고 가지고 놀다가 흙바닥에 버리고 온다. 마찬가지 일들이 매 미사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 그 자체이신분을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시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분을 세상에 던져버리고 만다. 의미를 깨우쳐보자.

* 성체
살펴볼 것은 '음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우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주님이 주는 음식은 형성 방향이 좀 다르다.
그분의 음식은 우리의 마음과 영 안에 '사랑'을 형성해야 한다.
헌데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잊고 마는가?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뒤로 나온다.
하지만 이 거룩한 음식은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으로 들어가 우리의 사랑을 넘쳐흐르게 해야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심지어는 그 의미를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채로 의무감으로 미사에 나와서 돈내고 빵 사먹듯 봉헌금내고 밀떡 하나 받아물고 가버린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여전히 '나'를 찾으려 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 내가 바람직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여전히 다투고 지낸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모든 이는 조금의 실수와 잘못이 있지만,
당신 스스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오류 덩어리에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이 보기에 하느님의…

기도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듣게된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 들으면,
'뭐야 그게?'라고 할 말마디다.
이해한다.
왜냐면,
신자들조차 '기도하라'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말 그대로 바리사이들의 위선처럼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로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도'는 뭘까?
'대화'란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그렇게 배워오긴 했는데,
이 대화 좀 이상하다.
대화는 쌍방간의 말의 주고받음인데,
'기도'라는 대화는 지 혼자 지껄이는 것 같다.
흠...
여기까지 와서 생각이 막히면 그나마 다행이다.
많은 신자들은 그냥 지껄인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잔뜩 지껄여놓던지
아니면 정해진 형식에 따라서 지껄인다.(성무일도, 로사리오 - 열심한 신자들 보면 좀 화날수도 있겠다 ㅎㅎㅎ)

기도에는 분명 응답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응답을 듣고있고 알고있다.
꼭 목소리로 들려야 응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초짜다.
하느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을 건내신다.
많은 경우에 하느님이 먼저 건네신다.

길가다 거지를 만났다.
분명 하느님이 먼저 말을 건다.
'어이 좀 도와주지를?'
근데 우리는 생깐다.(생깐다는 말은 무시하다의 젊은이들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방금 들린 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해 버리던지,
아니면 벌써 변명거리 찾기에 고심이다.
'에이, 저런 사람들 사실은 다 부잔데 저렇게 나와서 구걸하는거야.'
이런 생각 나도 해봤다. 그래서 안다. ㅎㅎㅎ
이렇게 하느님 목소리를 듣고도 생까고 나서는
저녁에 돌아와 지껄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구절들 일색이다.
지껄이면서 스스로 성인이라도 된 듯이 착각한다.
실제로는 쫌생이, 구두쇠면서... ㅎㅎㅎ

미운 사람 만났다.
'어이, 오늘은 니가 가서 한번 웃어주지?'
하느님이 말 걸었다.
근데 또 생깐다.
변명거리 마구마구 찾는다.

소금과 등불에 대한 비유

소금은 음식을 맛나게 하기 위해, 빛은 밝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각자의 것들은 다 자기 존재의 근본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요.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짠 맛 입니다.

예수님이 괜찮다 하면 괜찮은 겁니다.
예수님이 걱정 말라 하면 걱정 안해도 되는 거지요.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찾고,
세상 일들 걱정말라 하면 그분 말씀을 좀 믿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고,
일단 내 주변에 좀 쌓아 놓습니다.
그게 재물이든, 명예든 미모든 지식이든 말이죠.
뭐든 나에게 현실적으로 힘을 주겠다 싶은 것들을 좀 재어 놓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짠 맛을 잃어갑니다.
그리스도인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
신앙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버려져 허덕이다가
결국 짖이겨져 버리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지요.
다른 이에게 비출 빛이 없으니...
자랑스럽게 등경 위에 올려 놓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짠 맛,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우리에게 '사랑'하게끔 종용합니다.
이유없는 사랑
받을 걸 기대하지 않는 내어줌.
사실 받을 걸 아예 기대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거라고, '하느님'이 주실 거라고 기대하지요.
하지만 이런 기대를 세상 사람들은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그런 게 어딨어? 라고 생각하면서 그 하느님 믿고 내어주는
그리스도인들을 웃기다며 천하게 바라보지요. ㅎㅎㅎ

저는 압니다.
추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영광은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간직해 온 빛, 황금의 빛이 아니라 신앙의 영롱한 빛이
온 세상에 자랑스럽게 비추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멘!!!

성화

어느 분이 올린 사제 성화의 날 메세지를 읽고는 잠시 생각해본다.
성화, 거룩하게 됨.
거룩하다는 개념은 '분리된다'에서 나온다고 한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느님 가까이 머무는 만큼 거룩하다고 보면 된다.

헌데 분리라고 해서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건, 인간이 되라고 만드신거다.
가장 인간다운 게 가장 거룩한 거다.
뭔 소리냐고?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인간답지 않은 걸 인간답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은 육과 정신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를 골고루 추구하지 않고 하나에 치중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는 몸, 즉 이 세상의 삶만 잘 보살피려고,
잔뜩 모으려고 난리,
누구는 정신적으로 고상해지려고
잔뜩 배우려고 난리,
누구는 영만을 챙기겠노라고
잔뜩 교만해져 난리...

이 세 파트를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서도 안될 것이다.
몸도 챙기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정신도 챙기고,
할 수 있는 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우고, 건전한 사고를 유지하고, 어느 하나에 고립되지 않고...
영도 챙겨야 한다.
하느님 잊지 않고, 늘 기도하고, 많이 사랑하고, 기꺼이 이웃의 고통도 나누고...

거룩하다고 해서
맨날 천날 성경만 파거나, 기도만 한답시고 일상을 전혀 챙기지 않는다면
뭔가 이상한거다.
관상 수도원인 갈멜 수녀원에도 일상의 일을 해야 하고,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하며,
대학 교수도 가정을 보살피고 신심행위에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
노가다 아저씨도 때로는 배워야 하고, 하느님을 기억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많은 사제들은
보다 치중해야 할 영을 제쳐두고는,
너무 몸과 정신만 챙기는 느낌이다.
많이 가지려 들고,
많이 배우려 들어서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받는 걸 많이 봤다.

영적인 부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제 성화의 날,
신자들이 거룩한 사제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사제의 모습은
좀 더 기도하는 사제, 좀 더 영성을 찾는 사제가 일…

죄에 대한 "조금 색다른" 관점

어른은 똥을 싸지 않는다.
(가끔씩 정말 급해서 싸버릴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니까 ㅋ)
아이들만이 똥을 싼다.
똥기저귀 바꾸는 주변에 서 있으면,
분명 냄새도 나고, 모양도 똥인데.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걸 치운다.
때로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인간의 오류, 실수, 잘못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그러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약한 줄 안다.
우리가 아직은 당신 품 안의 어린이이다.
좀 커서 당신 벗이 되어 똥을 그만 싸대고
오히려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일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마냥 어린아이들일 뿐이다.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시고 사랑하려는 하느님에게
우리의 허물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일어나는 시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슬슬 자의식을 지니기 시작하면서,
보란듯이 일부러 똥을 싸재낄 때이다.
하느님 앞에는 육체적인 성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성장이 중요하다.
분명 내면이 자라서 사물을 분별할 때가 되었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이 창조한 것이 최고인 줄 알고,
애기 사탕과 장난감만 찾고,
당신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그러면서 보란 듯이 똥을 싸질러 놓을 때...

헌데 우리 하느님은,
그런 때조차도 당신은 참으신다.
당신이 낳은 아이라서...
아픈 마음을 감싸안고 희망을 갖고
다시 똥을 치워내고 견디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

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 하느님의 인고의 시간은?
이 철모르는 어린 것들이 그걸 모르고,
여전히 똥을 싸대는구나.
아예 똥을 벽에 처바르는구나.
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하는데,
하느님은 모른다, 그분은 늘 참아주신다 하는구나.
어리석기는...

머지않아 그들의 마지막 날이 닥칠 것이다.
의로움 속에서 하느님의 분별과 뜻만을 기다린 이들은
그분과 함께 약속된 나라로 들어가고,
이리저리 똥 처바르고 다닌 덜떨어진 것들은
똥기저귀랑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이다.

악인이 콧대를 높여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하니 이것이 그의…

상전일세...

SEMITOON 작

나이많아 상전일세...
경험많아 상전일세...
지식많아 상전일세...
재물많아 상전일세...
권력많아 상전일세...
인기많아 상전일세...

남자라서 상전일세...
상사라서 상전일세...
신부라서 상전일세...
수녀라서 상전일세...
신자라서 상전일세...

정상이라 상전일세...(장애우를 기억하며)

자네,
훗날 죽고 나거들랑은,
놓아두고 갈 것에 너무 신경쓰지 말게나,
가져갈 수 있는 것에 더욱 신경쓰게나.
그리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 더욱 환해 지려니...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뜻

인간의 의지는 어디까지이고 하느님의 뜻은 어디까지인가?
신앙인들의 흔한 표현 중에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는 표현이 있다.
정말 다 하느님의 뜻인가?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디까지를 원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의지를 발할 수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첫째로,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면,
우리는 로봇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로봇...
그런 극단적인 운명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딱 좋다.
해 봐야 소용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높은 존재, 전능한 존재가 이미 짜 놓은 틀이거늘
내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요,
그 안에서 그 뜻을 이루려고 더 신경쓰는 것도 허무한 일이다.
프로그램은 결코 운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윈도우용 프로그램과 맥용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거다.

그럼,
하느님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관점 또한 조금은 이상하다.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누구는 오렌지를 누구는 사과를 누구는 파인애플을 원한다.
누구는 담배를 태우고 싶어하고 누구는 술을 좋아한다.
누구는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고,
누구는 자기만 잘 살면 된다.
누구는 공산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자본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사회주의, 누구는 민주주의...
서로서로 그 뜻이 갈려 있다.

우리의 원의, 바램에는 그 보다 순수한 방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걸 아는거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두 자유가 상충되고 있다.
자리를 잘 잡아보자.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창조주가 내어준 것이다.
우리의 자유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왜 주셨을까?
우릴 가지고 노실려고?
아니다.
오직 자유만이 참 사랑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로봇으로 느낄 수가 없다.
사…

그대, 그런 사랑 해 보았는가?

SEMITOON작

그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마음 깊이 웃음이 나는 그런 사랑,

그와 함께 있지 않으면서도 그가 느껴지고
그와 있으면서도 그가 그리운 그런 사랑,

그를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
하나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랑,

그렇다,
난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헌데 그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꼬?

그저 내가 자격이 없다고 한탄만 할까?
내가 그 앞에 저지른 잘못에만 집중해야 하나?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나의 한탄과 슬픔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거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라.
그가 당신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저를 만나셨을 때

SEMITOON 작

저를 만나셨을 때...
당신이 어느 회사의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럼 전 당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저를 만나셨을 때...
저와 나눈 대화를 저와 나눈 시간을 상기시켜 주세요.
그럼 어렵지 않게 당신을 떠올릴 거예요.

저를 만나셨을 때...
제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묻지 마세요.
그럼 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저를 만나셨을 때...
제가 어떤 걸 사랑하는지 물어 주세요.
그럼 세상이 끝날때까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테니까요.

저를 만나셨을 때...
서로를 옭죄는 관찰자가 아니라
서로 삶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요.

작은 순교

뜨면 지고 차면 기운다...
그게 이 세상의 원리다.
어느것도 완전한 건 없고 지금 있는 자리가 계속될 리도 없다.
가진만큼 버려야 하는건데, 왜 그렇게들 가지려고 하는지는... 이해는 한다.
ㅎㅎㅎ 그 가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겪는 부분 중의 하나니깐.
하지만 어느 때가 되면 슬슬 버리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게 문제인듯...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에는 다 버려야 한다."

왜냐면 싸움이 안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하고 맞짱떠서 이기는 꼴을 못봤다. 그래서 생겨난 방식들이, 1) 무시하기 2) 타협 시도하기 3) 알면서도 고집하기... 뭐 등등이 있는데 뭐 누구든지 한번씩 겪어보는 단계들이다. 1)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거다. 에이, 신이 어딨노? 신이 그런 데 신경쓸 줄 아나? 신은 에너지다... 뭐 이런 표현들이 주를 이룬다. 2)번은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지만 아까운 부류들이다. 이런 거 하면 만족하실거죠? 기도 열심히 할께요 이건 좀 봐주세요... 뭐 이런 마인드들을 가지고 있다. 3)은 쫌 얄미운 존재들이랄까?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대놓고 무시하는 존재들? 아는 만큼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건 이런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지금 소위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들'
버려야된다.
돈, 명예, 자존심, 그릇된 우정,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어떨 때는 우리가 종교라고 믿어왔던 그릇된 종교관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첨부터 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은 1000000000000명 중의 1명에 불과할거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는 조금씩 버리는 훈련을 하는 세대이다. 일상에서의 작은 죽음들이 모여 우리의 순교를 이루게 된다.

죽자... 하루에 하나씩만이라도.
일단 오늘은 야식에 죽었다. ㅋ
맥주 한 캔으로 마무리했다 ㅎㅎㅎ

~데이

한 수녀님께서 오늘이 김대건 성인 축일이라고 한국의 사제들의 사제직 생일이라며 축하를 해 주셨다.

솔직히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마음 속에 문득 드는 생각이, "나는 그런 거 전혀 상관 안하는데..."라는 마음이었지만, 그 축하하는 마음을 잘 받아들이려고 아무말 않고 묵묵하게 감사하다고 했다.

어떤 절기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무슨 기념일, 무슨 생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겠지만 나에게는 점점 더 그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는 무슨 '데이'들이 그렇게나 많던지, 그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다. 발렌타인 데이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아니 화이트 데이까지는 그렇다 치자... 지금은 무슨 짜장면 데이, 빼빼로 데이, 키스 데이, 허그 데이, 뭐 말만 갖다 붙이면 다 데이다. 웃긴데이...

나 개인적으로는 뭔가를 절기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깊이로 분별하는 것이 필요한 듯 싶다. 매일 사랑한다면 데이가 왜 생겨날까? 매일 부모님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따로 어버이의 날이 필요없을 것이다. 매일 태어남을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매일이 생일일 수 있지 않을까?

절기가 생겨난 이유는, 우리 인간이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곧잘 까먹기 일쑤다. 늘 삶의 본질을 흐리는 것들에 둘러싸여 정신을 빼앗긴다. 그래서 교회에도 교회력이 있고, 시간경도 있는거다.

하지만 늘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ㅎㅎㅎ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있다고 믿는다. 아마 한명 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땡~ 하고 종이 쳐서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되지말고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름다움 - 교육의 산물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그림'에 관심이 많다. 중학생 무렵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한 일본 만화의 '이쁘장한 그림들'로 내 눈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란마 2분의 1,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 나디아, 시티헌터... 나는 만화책을 살 때에도 내용보다는 그림체를 위주로 많이 사곤 했다. 그래서 처음 당시의 500원짜리 드래곤볼 만화가 그때그때의 양을 다 채우지 못해 다른 만화들을 슬슬 끼워 넣으면서 접하게 된 '슬램덩크'의 그림체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딴 그림체로 만화를 그린다는거지?"라고 생각했다.
슬램덩크 1화를 보면 그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하게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짱구는 못말려'가 나왔을 때에는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다. 이런 걸로도 먹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에도 깨달은 게 있다. 하나는, '아름답다'는 건 문화적인 교육의 산물이라는 거다. 그림체는 엉망이었지만 엉뚱한 스토리로 재미있어 읽기 시작한 짱구는 못말려를 통해서 '아름답다'는 건 결국 '상대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은 그 형편없는 그림체로 인해서 아름답고 말고가 없다. 하지만 그 그림 안에서도 내용 설정상 소위 '아름다운'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냥 대충 눈 두개 그리고 대사를 '아 아름답다', '아 이쁘다'라고 집어넣으면 그 사람은 이쁜 사람이 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은 실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그때 당시의 문화 수준으로 교육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거다. 옛날의 한국 미녀는 '미녀도'에 나오듯이 눈이 갸름하고 소박한 얼굴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녀'는 서구화의 영향으로 큰 쌍꺼풀에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콧날을 강조해…

그리스도교 철학

플라톤 할아버지는 지금 경험하는 건 허상이고 오리지날이 다른 데 있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그게 아니고 내가 만지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전부라 했다.

플로티누스 아저씨는 그 둘 사이를 절충해서 이데아는 실제로 내려오게 되고,
실제는 이데아로 향하려고 한다고 정리했다.

이 틀만 지니고 있으면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사고유형을 모을 수 있다.

플라톤 할아버지는 신앙적으로 보자면 하느님에게 집중한거고,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세상에 집중한거다.

그리고 플로티누스 아저씨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인간을 향한 모든 방향(계시, 육화 등등)과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한 모든 방향(관상, 구원, 종말)을 모아놓으신거다.

이상 그리스도교 철학
끝.

일장춘몽

어느 성당에서 단체로 동남아의 정글 같은 곳으로 신앙학교를 갔다. 거기에서는 현지 아이들이 우리 한국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함께 놀아주고 간식도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 동네 아이들은 이웃 동네 아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종종 다투곤 했다. 헌데 그 다툼이라는 것이 정도를 넘어서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살벌한 다툼이었다. 우리가 데려온 한국 아이들은 철모르면서 마냥 즐겁게 놀기만 했고, 그 가운데 우리 아이들에게 봉사하던 현지 아이들과 이웃 아이들과의 조용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 아는 것은 동네 아이들과 말이 통하던 통역사인 나 뿐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떠나기 하루 전날, 우리가 머물던 동네의 아이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나무 방패와 칼과 창 등으로 무장으로 하고 이웃 동네로 원정을 갔다. 나도 한 번 동참해 보겠다며 나무로 만든 칼을 들고 뒤를 따라 나섰는데, 어느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이웃동네 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나무창 하나를 던졌다. 바람처럼 지나가며 날라오는 날카로운 나무창이 바람을 가르며 나를 스쳐 벽에 꽂히는 걸 보고는 이 전쟁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고 한국 아이들이 있던 동네로 돌아왔다. 돌아온 마을에서 한국 아이들은 신앙학교의 마지막 밤을 재미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우리 아이들이 먹을 간식(주스)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버무리던 한 친구가 우리동네 사람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동네에 남아있던 아이들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간다. 내가 뒤늦게 따라가 보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일은 치뤄진 듯 했고, 거기엔 벌건 핏자욱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극도의 불안함이 엄습했고 나는 아이들을 데려온 책임 사제에게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짐을 챙겨서 떠나시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신부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는 거의 설득되려던 차에, 우리 동네 아이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분명 옆 동네 아이들에게 뭔가 크게 한 탕을 하고 오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영혼의 고요

귀로 들려오는 소음들을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마음의 소음을 만날 수 있다.
사실 귀로 들려오는 소음은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나를 성가시게 할 뿐,
더 큰 문제는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음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요동치는 생각들의 흐름들이야말로
나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들이다.
좋은 밭이 되고자 한다면 이 소음들을 걷어낼 줄 알아야 한다.

막연히 불안하고 뭔가가 걱정되는 이유는
바로 이 마음의 소음들이 가득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땅을 더 팔 수 있으면,
영적인 정적을 만날 수 있다.

가장 깊은 곳에 머물러 있는 영혼의 고요는
우리가 미사 중에 하는 '주님의 평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너무도 고요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적이 감돌고 있는 영역이다.

여기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그렇게나 걱정하고 마음을 쓰는 그 아무것도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 앞에서 일어나도 실제로는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일어난다고 내가 생각하는 거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실제를 만나게 될 순간이 다가온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때를 대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휴식의 진정한 의미

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여가활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과 영혼에 '틈'을 주어 힘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고로, 쉰다면서 과식이나 술을 진탕 마신다거나, 정신 사나운 영화를 잔뜩 본다거나, 영적으로 공허하게 보내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아니다.
진정한 쉼은, 육체적인 기력을 회복하고, 정신의 안정을 기하며, 영적으로 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미사에 나온 지쳐있는 신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느꼈다. '목자 없는 양들' 쉼없이 달리고는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 갈팡질팡하다보니 똑같은 일을 해도 쉽사리 지쳐 버리고, 그나마 하는 일마저 엉망으로 하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 촛불 하나 켜 두고 있던지, 머리를 시원하게 해 주는 글을 읽던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던지, 무슨 수를 내는 것이 좋다.
잡스런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라... 그들은 당신에게 여가를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을 더 지치게 한다.
텔레비전은 '세뇌도구'다. 가급적 멀리하는 것이 좋다. 책은 잘 선별해서 읽어라. 요즘엔 너도나도 쓸데없는 글들을 너무 많이 적어서, 몇 구절 읽어보면 이걸 계속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감이 온다. 기도는... 잘 해야 된다. ㅎㅎㅎ 뭔 소리냐고?  기도를 하면서 '노동'을 하고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강화시키는 사람이 있다. 진짜 기도는 '하느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걸 하느님이 심부름센터 직원처럼 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정이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마찬가지. 뭐 그 밖에도 실제적인 예를 찾자면 끝이 없겠지만, 오늘은 요까지 하고 나도 좀 쉴란다. ㅎㅎㅎ

돈걱정

재정위원회 회의...
돈에 관련된 회의는 쉽사리 사람 마음을 홀려서
보다 중요한 것에서 마음을 떼어놓게 하는 것 같다.

우리가 본당을 꾸려나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이지
'재정을 확충해서 미래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래의 불안은 이끼처럼 솟아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은
돈을 많이 가지건 적게 가지건 상관없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불안과 걱정은
멈춰있는 바퀴에 피어나는 곰팡이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동안은
불안과 걱정의 곰팡이가 피어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

선택된 민족

스페인어 성경 창세기를 읽으면서 11장을 마치는데, 이런 설명이 나왔다.
창조주 하느님의 세가지 말씀들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은 말씀으로 '축복'하셨으며, 하느님은 말씀으로 '선택'하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이야기이다.
말인즉슨 하느님은 '창조'를 통해 자동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을 마련 하셨지만,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축복'을 통해 인간사에 개입하시고, 나아가 한 백성을 '선택'하고 '사명'을 주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지금 이 성경을 읽고 있는 독자, 그리고 나아가 우리 교회는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왜 선택을 당했을까? 그냥 남들 사는 것 처럼 살면 되지 않는가 하는, 일반적인 신자라면 누구나 가져보는 같은 의문을 제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노래와 같다.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 이지만, 당신을 알게 된 후로 얻어진 자유, 평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네.'
선택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왜 우리는 하느님에게 '선택' 당했을까? 이건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인 것 같다. 누군가는 이 선택을 '쓸데없는 것', '귀찮은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성경의 초대받은 이들이 자신의 소와 결혼과 장례를 더 귀한 것으로 생각해 버린 것처럼... '선택'은 그런 부정적인 게 아니다. 우리가 도구를 선택할 때에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처럼, 선택은 늘 '사명'을 동반한다.
뭔가 가야할 길을 누가 알려주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눈 먼 장님이 운동장 한 구석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촛불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운동장을 샅샅이 뒤져야 하는 것처럼, 운 좋으면 얻어걸릴 것이고, 운 나쁘면 평생을 …

한 방에 훅 가는 인생

콜롬비아 할머니 수녀님 한 분이 좀 많이 안 좋으시다.
가서 안부를 여쭈었더니 어딘가 감염이 된 게
신장까지 퍼졌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제 통증은 없다고 하신다.
지금 진료를 받고, 각종 검사를 받는 중인데,
본당 사회복지 기금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받고,
그 이상이 넘어가면 진료도 그만두시겠다고 하셨다.

'수녀님, 잘 들으세요.
언제라도 진료를 제대로 받기 위해 고국에 돌아가고 싶으시면,
제가 당장이라도 가서 사비로 비행기표 끊어 드릴께요.
그리고 돈 걱정 하지 마세요.
수녀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가진 걸로 어떻게든 도와 드릴테니까요.'
그러면서 이런 일을 위해 준비된 돈도 따로 가지고 있다고
살짝 거짓부렁도 했다.
수녀님들의 치료를 위해 준비된 돈 따위 없다.
하지만 이 수녀님을 위한 거면,
내 월급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참 잘 웃으시는 수녀님인데,
눈에 눈물이 글썽이셨다.
그리고 나도 애써 태연하게 대하려 했지만
착잡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방금도 장례 9일기도를 갔다 왔다.
한 방에 훅 가는 인생인데,
하느님과 관계 잘 맺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망신 당할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여기 눈 앞에 것만 어떻게든 손에 쥐려고 바락바락대는 모습이,
좀 우습게 보이는 한 때였다.
이제 또 새로운 신부님들이 오시는데,
모쪼록 다른 것보다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 지니고 왔으면 좋겠다.

하느님 앞에 항복

루가복음 18장의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이제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부자청년이 재산마저 버리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면, 예수님은 또 다른 도전거리, 이전보다 더 지키기 힘든 도전거리를 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 해야 완성되고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방향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나'로 집중하려 드는 이 마음을 오롯이 하느님께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일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 스스로 '항복'하기를 원하신다.
부자청년의 의도가 느껴지는가? 그는 하느님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그분 존재 자체를 정복할 순 없더라도 그분이 원하는 것을 꼼꼼히 이루어내어서 그분의 요구조건을 다 채워보고자 하는 스스로의 원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그러한 마음을 읽어내셨고 그에게 또 다른 벽을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과 싸울 처지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들에 불과하다. 루카복음 17장에 좋은 비유가 나온다. 종이 주인을 위해서 뭔가를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숙이는 수 밖에 없다. 그럴때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거다. 종에서 자녀로의 신분전환...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해 달라고 떼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하느님과 거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신앙생활에는 정형화된 형식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어느 어느 규정들을 채우면 '좋은 신자'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다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앞으로가 미친듯이 일에 매달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유함의 책무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적당히 없는 게 좋다. 그래야 가끔 있을 때 좋고, 뭐가 생길 때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이 들고 있으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더 나은 무언가가 없으면 늘 불만이게 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이유로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성경 모임 가서, 사탕 하나씩 쥐어주면 좋아한다. 그 와중에 하나 더 주면 완전 좋아한다. 그 통에 나도 사탕을 선물 받을때면 그 가치를 안다. 나에게 건네는 막대사탕 하나가 이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가치를 지닌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걸 몰랐더라면 이 동네 아이들이 나에게 먹다가 내미는 사탕의 그 아름답고도 소중한 가치를 두고 '뭐야 이 더러운 건?'하면서 내던져 버렸을 거다. 물론 아직도 그 침이 줄줄 흐르는 걸 쉽사리 받아먹을만치 비위가 좋진 않지만, 지금은 '와아, 고마워~ 근데 신부님은 지금 사탕이 크게 먹고싶지 않네'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부유한 나라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다. 인터넷이 얼마나 빠른 줄 몰랐으며 사회의 편의시설이 얼마나 잘 정비된 줄 몰랐었다. 어느 시골을 가도 도로가 다 정비되어 있고, 첩첩산중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휴대폰은 다 터진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고, 음식 종류도 육해공 없는 게 없다.
한국은 기본 전반적으로 부유하고 시작하는 조건들이 비슷하기에,  있는 자들이 있다고 뻐기는 만큼 그만큼 가난한 자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크겠지. 여기도 부자가 있긴 하지만, 부자가 얼마나 부유하게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저 이웃들을 바라보며 다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사는 줄 안다.
가진 게 많다고 콧대를 세우지 말자. '많이 가짐'은 기실 제 능력도 아니다. "에이, 저는 공부 완전 열심히 해서 좋은 연봉의 좋은 직장 얻어서 돈 번 건데요?" 그 시작의 기초를 잘 살펴보시라. 정말 아무것도 없는 0%의 …

기적의 이유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기적의 이유는 '회개'입니다. 모든 기적들은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이루어집니다.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회개'라는 단어가 연상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기적이 아닙니다.
저마다 자신들이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났습니다. 어디서는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어디서는 해무리가 생기고, 어디서는 나무 등걸에서 성모상이 발견되고,  어디서는 구름이 십자가 모양으로 변하고...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그저 신기한 현상이었고, '헤프닝'에 불과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탐욕스런 의도를 지닌 거짓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그것을 접한 이들의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면 '기적'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오직 어둠의 길을 걷기만 하다가 한 친구의 권고나 사제의 충고를 듣고 가던 길을 돌이키면, 그 친구의 권고나 사제의 충고는 그에게 기적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른 모든 능력보다도 이 능력을 주셨습니다. 바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능력'입니다.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를 말하진 않는다는 것, 우리에겐 영원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있다는 것,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맡길 때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것,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 그 사랑을 받는 이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 신앙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겐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친구들이 있고 그것을 선포할 시간과 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선포'의 능력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에…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께요.

어제 공소 미사 갔다가,
시골 사람들에게 준비한 '운명'에 대한 강론을 하면서
우리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께 맡기면
당신께서 우리의 의지를 들고 쓰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은 남미 중에서도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에,
그 중에서도 가난한 동네인 시골에,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걸 맡기고 땅을 부쳐먹고 사는 사람들인걸...
비만 오래 와도 농작물을 모두 망쳐 버리고,
가뭄이 오면 정말 마실 물이 없어 소들이 쓰러져 죽는 판국에...

그래서 내가 장담하듯이 이야기했다.
'여러분들 가운데 당장 내일 먹을 거 떨어지면 저한테 전화 한통만 하세요.
제가 먹을 거 사들고 올께요. 당장 내일 입을 옷이 없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구해올께요. 당장 비를 맞고 자야 한다면 전화하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볼께요. 제 수중에 있는 돈으로 처리하고 안되면 제 고국에 연락해서 이야기할께요. 여기 사람들이 [정말] 먹을 게 없어서 죽어가요. 그럼 어떻게든 도와 주실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한 장담을 지킬 생각이다.
그런 고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네들이 정말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없을 때는 언제라도 도와주시리라고 믿는다. ㅎㅎㅎ 하지만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들은 극히 드물게 일어나고, 또 설령 일어난다 해도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들이다.

글로벌한 시야에서는 좀 더 넓고 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실 당장 죽는 이들은 당장 곁에 있는 이들이 조금만 신경쓰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다. 범위가 확대될수록 기반을 챙겨주는 일에 신경써야 한다.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해주고, 더 나은 교육에 신경쓰며, 의료수준 향상에 신경써야 한다. 그 가운데 나는 사람들의 '영성'수준을 높이는 데 노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시작하는 자선무료병원이 우리 동네에 생겼으면 좋겠다.

비단 볼리비아 뿐만이 아니다. 여러분들 손…

운명

정해져 있는 운명이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있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가 선택을 하듯이 하느님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만일 진정 원한다면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개개인의 운명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방울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고 나면 하늘로 솟아 오르지는 않듯이,
일단 시작된 움직임은 주변의 정황을 따라서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측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운명은 이미 어느정도는 정해진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의 유혹이 있는 곳이면 걸려들게 마련입니다.
인기를 얻으려는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민감하게 마련입니다.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큰 권력가에게 굽신거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적'과 같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순간입니다.
성경은 이 순간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세상에서 마음을 놓고 하느님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던 모든 운명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일단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멀쩡하게 일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신학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정말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평화를 되찾기도 하고,
누군가는 가진 돈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살짝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그들은 늘 확신과 기쁨에 차 있고 두려움이 없으며 평화 중에 머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회개'를 통해서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움

나는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건 하느님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균형과 조화'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이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눈코입의 위치와 비율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훈련되어 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통통한 여자들이 인기가 많았다.
서양 예술사의 그림 안에 나오는 여인들은 체격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뼈다귀를 좋아한다.
칼슘이 부족한 모양이다. ㅋ
(아, 무릎 도가니탕 먹고싶다...)

마치 냄새가 코에 적응되어서 악취가 악취로 느껴지지 않듯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던 구조가 점점 변해가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이상한 것까지도 아름답다고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다.
수술은 환자를 위한 건데, 요즘은 많이들 수술을 받는다.
자기 얼굴을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의 이 열풍들은 모두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다.
또 세기가 흘러서 우리의 외모가 재평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자연스러움이 더 인정받을 날이 오겠지.
과거 전쟁 직후에는 많이 먹으면 최고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웰빙'을 찾는다.
외모에 대해서도 이 시대가 멀지 않았다.
지금은 무조건 '아름답기'만을 원하지만,
향후에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더 극찬을 받을 시기가 온다.
(두고봐라, 손 하나 안 댄 내 얼굴이 최고의 미남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ㅋ)

'균형과 조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몸과 영의 조화이다.
몸이 아무리 멋져도 그 영이 추하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외적인 건 금방 질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고 속으로는 깡통인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고 싶지는 않을거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잊고 있다.

"이 위선자야, 마음을 먼저 닦아라 네 온 몸이 깨끗해질 것이다.&quo…

참소유

내가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방향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쌍방향이다.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관계'가 아니다.
언뜻 보기에 우리가 쓰는 사물들은 그저 내 손아귀에 내가 쥐고 쓴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방향으로 그들은 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소유는 직접적일 수도 있고,
멀리 돌아서 오는 간접적인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 맘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하지만,
큰 착각이다.
우리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그들은 돌아 돌아서 지독한 재앙으로 우리를 덮친다.
(4대강, 우린 완전 X됐다...)

우리가 가진 돈이라든지, 다른 재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서 쓴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
더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의지가 없으니까,
우리가 우리 의지를 그들에게 덮씌운 것,
그들에게 우리의 의지를 봉헌한 꼴이 된다.
그래서 누가 내 지갑을 훔쳐가면,
그건 내 지갑만 훔친 게 아니라,
내 마음까지도 훔쳐간 꼴이 되고,
우리는 안절부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는 만큼 '책임'을 지니게 된다.
'책임'지지 못할 사물은 가지면 안된다.
'컴퓨터'를 가진 사람은 그만한 책임 속에 가져야 한다.
적어도 고장이 났을 때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 정도는 챙길 줄 아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진솔한 소유의 관계이다.
필요한 순간에만 쓰고 가차없이 버려 버린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바라는 소유가 아니다.
'손에 쥐는 것'이 죄가 아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지닌 것'이 죄이다.
중소기업 사장은 운용할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을 지니고 쓰는 건 죄가 아니다.
문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고 늘 그 이상을 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백성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가난하면서도 속으로 온갖 탐욕을 지닌 사람은 어느 순간 졸부가 되었을…

하느님과의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참으로 높으신 분하고의 첫 대면에 인사말을 뭘로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괜찮아, 하던 대로 해. 난 자연스러운 게 좋으니깐. 반가워. 잘 지냈어?
네, 덕분에... ㅎㅎㅎ 사실 잘 못 지냈어요. 요새 한동안 맘이 붕 떠 있는 것 같아서. -저런, 그거 별로 안 좋은 징조인데.
네에? 왜요? 아니지 참, 지금은 제 상담이 아니라 하느님하고 인터뷰하는 자리예요. -그런가? 그럼 그 문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래 궁금한 게 뭔가?
하하, 수도 없습니다. 뭐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는 없고 몇가지만 여쭈어 볼께요.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어떻게 아냐고 물어요. -그래, 그런 녀석들이 있다는 건 내 익히 알고 있었어.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야. 생각해봐 내가 정말 그네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둘 중 하나일거야. 자기 눈을 의심하던지, 아니면 놀라 까무러치던지. 후자 쪽이 더 가깝겠지. 그리곤 스스로 정신병동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계속 헛소리를 해대다가 다른 이들이 그 사람을 정신병동에 넣던지 둘 중 하나일걸? 하하하. 그래서 난 충격요법은 안쓰려구. 그저 조용할 때 한마디씩 건네지. 그 수신기를 하나씩 맘 속에 넣어 뒀는데. 뭐 요새 스마트폰 다들 들고 다니더만, 그거 사실은 내가 먼저 개발한거야. '양심'이라는거지. 내가 신호 보내면 심장하고 연결되서 작동하는데. 선한 일 하면 기분 좋은 느낌이 들게 만들고 악한 일에는 꺼림칙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놨지. 근데 요새 세상이 너무 영악해져서 거기에 신경쓰지 못하게 다른 데로 주의를 자꾸 돌려서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 뭘 느끼는지도 모르고 세상이 가라는 데로 자꾸만 갈려고 해서 걱정이야. 뭐 어쨌건, 내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다가 내가 있다고 고함 지를 것도 없고 그냥 지켜보는 게 상책이야.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알아서 나를 찾게 되어 있으니까 말야. 그저 내가 있다는 신호만 보내줘.
흥미로운 생…

(동화)양떼

벌판, 한 무리의 양떼가 있었다.
날은 추웠고 양들은 서로서로 모여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풀은 메말랐고 양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어느 양이 질문을 던졌다. '우린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무리 가운데 조금 머리가 뛰어나다는 양이 나름 궁리를 했다. 순번을 짜서 돌아가며 바람을 막고, 남은 풀밭의 풀들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양들 가운데에서 힘이 있다는 양들이 풀을 독차지하려 했고, 힘 없는 양들만 매번 바람 앞에 맞서야 했다. 예견된 일이었다.
주변엔 늘 늑대가 도사리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렸다. 몇몇 양들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을 풀이라고 생각하며 무리에서 떨어져나갔고, 매번 늑대들은 포식을 했다.
지혜 있는 양은 생각했다. '우리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겠구나.  우리에겐 우리를 이끌어 줄 목자가 필요하다.' 사실 예전엔 목자가 있었다. 목자는 늘 길을 알고 있었고, 양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양들은 늘 불평불만이 가득했고, 어느날엔가는 목자를 쫓아내 버렸던 것이다. 나이가 많은 양들은 이걸 알고 있었다. '목자를 찾아야겠구나' 지혜 있는 양은, 무리 가운데에서 다른 지혜있는 양을 찾았다. 똑똑함은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혜가 필요했다. 그들은 작은 무리를 이루어서 목자를 찾으러 나갔다.
사실 목자는 멀리 있지 않았다. 목자는 멀찍이 떨어져서 늘 양 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목자는 따로 떨어져 나온 무리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풀을 나누어주면서 힘을 북돋아 주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모두를 데리고 오너라. 저들은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니 너희가 가서 설득하거라. 저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굶어죽고 말게다.' 지혜 있는 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신의 무리를 끌고 돌아갔다.
지혜 있는 양의 말을 들은 무리는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하지를 못했다. '목자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존재가 있었단 말야?&#…

내가 만드는 나

지금 내가 보는 현실이 진짜라고 어떻게 믿지?
색안경 하나만 껴도 세상은 어두워 보이는데, 누가 자는 동안에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검은 콘텍트 렌즈를 눈에 끼워놓고 가면, 내가 사물을 올바로 보고 있다는 걸 어찌 알까?
결국 우리가 받아들이는 건 우리의 시야, 즉 '생각의 필터'를 통과해서 수용되는 정보들인데, 이 가운데 우리는 많은 것들을 그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때그때의 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필터]를 거쳐내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인 듯.
식당에서 [컵이 깨졌다]라는 단순한 현상에서 주인은 컵이라는 기물 파손에 기분이 상하고, 아이엄마는 컵을 깨뜨린 아이를 걱정하고, 종업원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묵묵히 컵을 치운다.
결국 우리 자신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형성해 간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상대를 오해하고 그들을 심판하기 일쑤라는 걸 우리는 누차 겪으면서도 또다시 새롭게 미움의 탑을 쌓아버린다.
내가 지금 '밉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 미움은 그 사람이 나에게 손수 건넨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나 스스로 내 마음 안에 만들어놓은 무엇이라는 걸 깨닫도록 하자.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원래 그런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결정은 내가 내리는거다.
이거 말이 쉽지 진짜 어려운 일이다. ㅎㅎㅎ

영적 성숙

조막만한 아이에게 뭘 쥐어주면 어떻게 하는가?
-입에 넣는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이에게 뭔가를 주면 어떻게 하는가? -분간 않고 영을 물들인다.
그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밝고 맑고 거룩한' 것에 길들 필요가 있음에도,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수용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 이것이 옳다 하면 일단은 수용하고 본다. 생각은 나중이다. 누구는 우파에 몸담아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누구는 좌파에 몸담아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나 받아들인다. 그리고 조금 현명하다 하는 이들은 우파고 좌파고를 떠나서  나름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하면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꼴이다.
"그럼 세상에서 떠나 살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 수 밖에 없다. 미성숙한 동안에는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넘어질 수 밖에 없고, 때로는 넘어져 봐야 배우기도 한다. 불이 뜨거운 줄 모르면 한 번만 데어보면 다시는 가지 않는다.
하지만 영적으로 어느정도 크기 시작하면, 스스로 분별하기 시작하고, 알아서 세상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차원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거룩한 생각'을 많이 퍼뜨리자. 내가 맡은 사람 최소 2명씩만 물들이기 시작해도,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도와주자. 언젠가는 모조리 사라져버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떼게 도와주자. 이런 힘을 모으고 싶다.

교회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

사제는 기본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형제다.
(물론 최근의 제도교회의 경향으로 보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제도는 보통은 제도의 친구다. 왜냐하면 한 제도가 무너지면 다른 제도도 위태해지니까 당연한거다. 그래서 국가가 전복되면 제도교회는 위험해지지만 '하느님의 교회'는 죽지 않는다. 아, 상당히 위험한 수준의 발언이다. ㅎㅎㅎ) 하지만 언젠가는 이 가난한 이들과 교회가 부딪히게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 편인줄 알았다. 뭐 대체로 그랬다. 하지만 제자들이 뻘소리를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중하기도 했다. 말을 안 듣는 고을에 불을 내리려는 제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거부하던 베드로, 누가 더 으뜸인가를 다투던 제자단, 풍랑에 두려워하던 그들... 예수님은 그런 순간들에 제자들을 다그쳤다.
다행히 교회는 아직 가난한 이들을 그렇게 배려하지 않아, 이 최악의 순간이 아직은 멀리 유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현재가 더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언젠가 교회가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 보다  지금처럼 제도걱정을 하기보다는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의 삶을 보살펴가다가 보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 있다.
그것은 근본 세상의 방향과 영의 방향의 충돌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상 안에서 부딪히는 것들은 이 근본 충돌의 작은 표출들이다. 단순화 시킨 예를 들어보면, "성당을 갈까? 놀러를 갈까?" 양측으로 이유가 100가지씩 나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도 잘못되었다. 제대로 질문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섬길까? 나를 섬길까?"
예를 들어, 1년에 한 번 첩첩산중 시골에 사시는 시부모 만나러 가기 싫어서  주일엔 성당에 꼭 가야 한다, 안가면 성사봐야 한다는 며느리는 성당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꼴이다.
하느님을 보다 본격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언젠가는 교회가 사랑하던 '물질적으로 가…

소박한 삶

하루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미미하다.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오후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좀 쉬다가 씻고 잠자리에 든다.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은 크게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특수한 상황(감옥, 군대, 신학교?)에 있는 사람은 제외하자.
이 삶의 순환 고리 가운데 일들이 일어난다. 어찌보면 생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 지극히 미미한 사건들이다. 누군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언가 확 바뀌는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어딘가에 이민을 가거나 아주 멀리 여행을 가서 환경을 180도로 바꾸지 않는 이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상이 반복된다.
헌데 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벌어지긴 한다. 예컨대 어느 집에 놀러갔다가 화병을 깨었는데 그게 국보급이라 수억을 호가하는 화병이었다. 젠장... 화병 하나 깨었을 뿐인데... 사실은 그렇다. 화병 하나 깨었을 뿐이다. 문제는 그 화병에 한 사람의 '생각과 집착'이 엄청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 주인은 그 화병이 '화병'이 아니다. 그 주인에게 그 화병은 자신이 생을 던져 이루어놓은 재물과 권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사실 그 화병과 똑같이 생긴 모조품을 거기다 가져다 놓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해 놓으면, 그 주인은 그 화병이 그대로 있다고 믿고 몇 년이고 그냥 지낼거다.
우리의 삶은 단순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삶의 곳곳에 '의미'를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삶이 복잡 다단해지는 느낌이다.
'전례'가 조금 틀렸다(사실 전례가 틀린 건 아니고, 전례 예식 중에 구체적인 사물이 조금 뒤바뀌었다고, 뭐가 부족하다고)고 화내는 신부님들 본 적 있는가? 이 경우에 그 사제들은 이 '전례'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과 위신을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생각과 집착'을 거기다 새겨놓은 셈이다. 물론 '…

인터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 소개 좀 부탁 드립니다. -네, 저는 볼리비아에서 일하는 마진우 요셉 신부라고 합니다.
소개가 간단하네요. -그런 셈이죠.
뭐 더 소개하실 게 없나요? -딱히 하고픈 마음이 없네요. 줄줄이 이력을 소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네 알겠습니다. 볼리비아에서 어떤 일을 하시죠?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뭐, 별다를 건 없습니다. 신부가 하는 일이지요. 미사 드리고, 성사 집전하고, 장례도 가고 교회 내의 모임도 이끌고 본당 관리도 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한국 신부님들이 하는 일과는 다른 게 있지 않을까요? -다르다면... 먼 시골 공소에 가는 거,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조금은 낮다는 거, 그리고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등등이 있겠네요. 그 가운데 제일 힘든 걸 꼽으라면 제일 마지막,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어려움이겠지요.
언어 때문에 많이 힘드셨나봐요. -네, 사제가 하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그들과 대화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말을 못하니 참 답답하지요. 5개월 정도의 어학코스를 초반에 받기는 하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 하나의 언어를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스터는 둘째치고 하다못해 자신의 의사라도 제대로 표현했으면 싶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아요. 결국 살아가면서 부딪혀 가면서 조금씩 배워 나가는거죠. 지금 4년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안들리는 대화가 부지기수예요.
문화의 차이는 어떤거죠? -사람 사는게 다 똑같긴 하죠. 하지만 간간이 부딪히게 되는 문화의 차이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 음식은 뭐든 주는대로 잘 먹어서 큰 문제는 없지만, 음식 문화도 굉장히 달라요. 한국은 정말 다양한 조리법이 있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굽고, 끓이고, 튀기고... 뭐 이 정도가 전부예요. 전통 조리법이 있긴 하지만 한국처럼 다양하진 않죠. 그리고 기본 짜고 달…

메뉴얼은 없다

우리는 뭔가를 따르고 싶어하고 남기고 싶어한다.
'전통'이자 '매뉴얼'이다. 누군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달한 그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면 적어도 엇나가지는 않을거라는 믿음. 하지만 목적지 자체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길 중간에 큰 돌이 놓여 있을 수도, 없던 강이 생겨날 수도 있다. '변수'가 있는 것이다.
메뉴얼은 이 변수를 가정하지 않는다. 변수는 너무나도 많고 다양해서 어떻게 정해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건, 몇 번 버스를 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거장의 어느 위치에 내려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향해서, 어떤 표지판에 좌회전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까지 상세하게 알려줄 순 없다.
우리 인생에는 정확한 메뉴얼이 없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누군가가 '이게 메뉴얼이다'라고 만들어놓은 길을 가려 한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인기있는 이유다. 누군가는 정말 재능이 있어 하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안정'을 찾아서 택한다. 하지만 그 안정이 진짜인지 한번 쯤은 의심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한 '현세적 안정', 그건 엄청난 '허상'이다. 숨겨놓고 알려주지 않은 변수가 엄청나다. 그래서 병이라도 생기거나 직장에 문제가 생기면, 그런 이들은 숨이 막혀 죽으려 한다.
신앙은 근본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참고할 수 있는 예시가 '예수님' 뿐이라서, 오직 그분만이 '부활'하셨다고 하시니, 그것만 믿고 따르기가 너무 불안하다. 그것이 사람들이 신앙보다는 '제도나 재물'에 더 기대게 되는 이유다. 그래서 그 둘, '제도와 재물'은 친하다.
인생에는 메뉴얼이 없고, 더욱이 신앙생활에 메뉴얼은 없다. 지 팔은 지가 흔드는거고, 지 십자가는 지가 찾아서 메고 가는거다. 이런 불확실한 인생과 신앙에서, 우리가 할 일은 '능력치…

좋은 도구

좋은 도구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도구를 선택할 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을 택한다. 그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 밖의 것들을 다 옵션에 불과하다. 자동차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 옵션이 붙는거다. 온갖 음향장비와 스피커, 그리고 화려한 장식이 붙었는데, 정작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면, 우리는 그걸 '차 모양 오디오'라 부르지 차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느님은 왜 우리를 만드셨을까를 알아야, 우리는 그분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럴려고 우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분의 도구이고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의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한 가지 조건은, '우리 뜻의 포기'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고 하느님이 원하는 걸 하는거다. '하느님이 나에게 뭘 원해요?' 그건 미안하지만 답변할 수 없다. 뭉뚱그려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사랑'이라고 하는데, 각자에게 그 사랑이 어떤 형태이어야 할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사제에게 사랑은, '하느님의 종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화가에게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좋게 이끄는 것'이다. 기술자에게 사랑은, '자신이 가진 기술로 사람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것'이다. 공직자에게 사랑은, '정의와 공정으로 자신의 일을 하여 나라를 이끌고 국민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뭐 이 밖에도 끝이 없다.
좋은 도구가 되도록 노력하자. '내가 원하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내가 있는 자리에서 찾도록 하자. 그럼 멋진 하느님의 세상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세상이 되어, 모두가 행복하게 함박 웃음을 웃으리라.

다름과 같음

나해 연중14주 주일강론(2012년 7월 8일)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특히 외적인 면이 그렇습니다.
얼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사는 집도 다르고, 생활 수준도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같습니다.
내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다름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차별'을 좋아합니다.
나와 너는 달라, 나는 너보다 많이 알고 너보다 많이 가졌어 그래서 나는 너보다 나아.
그래서 세상은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같음에 집중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나와 너는 같아. 우리는 모두 형제야.
 네가 부족하니 내가 도와주면 되고,
 내가 부족하니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이렇게 세상은 하나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보면 역사 안에 나타난 한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다름'을 찾았고
자신들보다 못한 점을 찾아 무시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려 들었고,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에게서 멀어져갔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안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못 가진 이들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은 우리의 십자가이고 우리는 그 십자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같은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아멘.


자녀교육과 안정

세상에는 몇 가지 잘 먹히는 주제들이 있다. 사람들이 누구나 관심갖는 것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 '돈', '명성(혹은 인기)', '출세와 권력'과 같은 것들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키운다. 우리 어머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누구누구 엄마, 요새 학교 근처에서 XX학원이 유행이라던데..."라면서 말을 시작하는 아줌마들의 최대 관심사는 뭘까? 더 나은 학업환경? 아이들의 미래 성취? 아니다 그 마음의 근본에는 자녀를 통한 자신의 신분상승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소위 '성공' 함으로써 내가 얻게 될 부와 명성... 
진짜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면 '아이가 뭘 원하는지'에 좀 더 집중하면서 그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철든 부모가 얼마나 될까? 그렇다, 이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 나 역시도 아이가 없기에 쉽게 생각하는거다. 막상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가 자기는 그림이 좋다고 할 때, 그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이상향을 찾아 주고 싶으면서도 그 아이가 '먹고 살게 할 걱정'도 해야 하는 게 부모 마음일거다. 거기에다가 과거 자신이 연애소설책을 파면서 글 좀 끄적인걸로 자신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산 기억도 섞이면서 지레 자기 아이가 가진 꿈도 쓸데없는 공상이라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버리고 그저 '노말'한 안전한 길(공무원 시험, 의사, 교사, 변호사, 대기업 사원 등등...)을 찾아주려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사실 사람은 어떻게든 먹고 살게 되어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먹고산다. 마음이 튼튼하고 늘 성실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다못해 노가다를 해서라도 하루 밥벌이는 해 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노가다로 완전 성공할지도 모른다. 헌데, 요즘 아이들은 자기 길이 아닌 길을 걸으려니…

죄는 없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죄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사는 병자를 위해,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왔다고 한다.
오늘 새벽 미사를 드리면서 '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단한 강론을 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죄는 이런 개념이다. 어제 분명 호주머니에 집어넣어놔서, 사탕이 아직 주머니에 남아 녹아있는 느낌과 같은 거다. 그래서 섣불리 주머니에 손을 못 집어넣는 상태다. 주머니에서 꺼낼 게 많은데... 집어 넣을 것도 많은데...
하지만 그 사탕이 이미 사라지고 없다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엄마가 옷을 빨아 두었다면? 우리는 그동안 바보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다.
죄는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개념의 죄는 없다. 왜냐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바지를 늘 빨아 주시니깐... 빨았는지 안 빨았는지 의심 스러우면 예수님께 물어보고 빨았다는 확답을 사제의 입을 통해서 들으면 된다. 그게 '고해성사'의 개념이다.
예수님은 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신다. 예수님은 의사이고 예수님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어린양, 그분의 피 한 방울은 너무나 강력한 세제라 세상의 모든 죄를 빨고도 남는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진짜 죄는 뭔지 아는가? 그것은 하느님에 반목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어느 소위 거룩하다는 사제가 초대송, 독서기도, 아침기도, 3시경, 6시경, 9시경, 저녁기도, 끝기도를 모조리 바치고 남은 시간에 로사리오 기도를 바쳐도, 본당 신자들을 만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나는 너희하고는 달라, 난 죄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내면으로 심판하고 무시한다면, 바로 그가 죄인이다.
진짜 죄는 우리의 마음의 방향, 우리가 사랑으로 향해 있는가, 사람들의 심판자로 서 있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아무도 심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