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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3의 게시물 표시

나일롱 피정기2

늘어지게 잤다. 마치 묶여있던 매듭이 풀리듯 잠이 쏟아졌다. 어제 오전 내내 자고 일어나 점심 먹고 6시 무렵부터 또 자고, 오늘 오전 내내 또 자고 일어났는데 또 잠이 왔다. 지난번 휴가 때에도 느낀 거지만 선교사에게 휴가는 휴가가 아닌 셈이다. 그 동안 돌아다니면서 피로가 도로 쌓인게지. 오늘 오후에는 농장일 하시는 수녀님이 삼계탕을 끓여 주신다 했다. 그래서 길을 나섰다. 산길을 올라서는데 나중에 나이들면 이런 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작은 밭이나 하나 가꾸면서 내 먹거리나 좀 가꾸는 정도의 소일이나 하면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소망. 하지만 그럴 기회가 올는지도 의문이고 과연 이런 생각을 그때까지 지니고 있을지도 의문이라서 그냥 마음 한 켠에 접어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린 건… 내가 화분 하나도 가꿀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였다. ㅋㅋㅋ 아니나다를까 후덕하신 농장 수녀님은 '닭 한마리 드시지요?'라고 물으시며 한 사발 가득 삼계탕을 내어오셨다. 국물보다 고기가 더 많은 삼계탕… 저대로 두 번 먹다간 호흡곤란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큰 내색 않고 '네에~'하고 받아들었다. 맛있게 먹고(정말 맛있었다) 국물 한 그릇 더 달라 해서 먹었다. 수녀님이 직접 담은 포도주도 두어 잔 들이키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외사촌 수녀님이 돌아갈 때는 산길로 가자 했다. 헉… 얼른 편하게 돌아가서 잘랬더니 기어코 운동을 시킬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 일하시는 통통한 수녀님이 여기 피정을 와서 겨울에 산에 올라갔는데 멧돼지를 만난거라, 그래서 수녀님이 긴장을 해서 검지와 중지를 펴고 다가오면 눈을 콕 찔러야지 생각을 하는데 멧돼지가 먼저 소리를 꿰에에에엑!!!!! 지르고는 도망가 버렸다는거야. 그래서 수녀님이 '내가 그렇게 험상궃게 생겼나' 충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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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다. 지금의 어른들은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길을 걸어가는 세대를 한탄스럽게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런 양상을 단죄하고 말 일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고 아이들이 그러는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어른 세대가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활동을 추구했고 오늘날의 이 세대는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로 그 영역을 찾아낸 것 뿐이다. 결국 바뀌어야 할 것은 도구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근본에 있다. 누구를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을 쥐어준다고 해서 그가 그 스마트폰을 들여다볼리는 만무하다. 그에게 스마트폰은 그저 전화나 문자의 도구일 뿐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현 세대의 문제점은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바로 눈 앞에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을 마주하고도 '소통의 부재'와 '외로움'을 느끼기에 오늘날의 세대들은 자꾸만 스마트폰을 훔쳐보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는 상대를 찾아다니며 그 하나의 해소 방안으로 소셜 네트워크, 그 가운데 오늘날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페이스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문제는 스마트폰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등의 도구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뿌리에 있다. 사람을 만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도구를 줘도 만나지 못한다. 진솔한 관계 정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름 자신에게 특화된 공동체를 만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본인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받아들여지게끔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좋은 신부님이나 수도자가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날아오르기

볼 수 있는 것에서 하느님을 찾지 마세요. 물론 처음엔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묘사한 그림, 그분의 업적을 드러낸 성인들, 그분들의 업적과 그분들이 지시하는 여러 행위들… 처음에는 그것들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해요.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기가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동굴 속에서만 살던 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에도 비할 수 있어요. 하느님은 여러분을 보다 참된 자유에로 이끄시는 분이세요. 여러분이 어디에 종속되고 갇혀 있는 걸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이 감각적인 세상 모두에서 자유로워지세요. 먹고 마시는 일에만 몰두하던 과거에서 그만 일어나세요. 진정한 음식은 따로 준비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진정한 자리는 현세에 있지 않아요. 몸을 일으키세요. 일어나세요. 눈을 들어서 저 높은 창공을 향해 보아요. 여러분은 벌레가 아니라 '새'랍니다. 훨훨 날아갈 곳이 마련되어 있는데 여전히 땅만을 바라보면서 절뚝 거리고 다닌다면 당신의 날개와 창공을 만드신 분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당신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활개를 칠 준비를 하세요. <디지털 시대의 성인>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연중3주 금요일)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는 것이 우리 안에 심겨진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존재합니다. 해야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씨앗을 뿌려야 하고, 햇볕을 쬐어 주어야 하며, 물을 주어야 합니다. 반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씨앗을 파내지 말아야 하고 그늘을 가리우지 말고 말라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뿌려야 합니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커 나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말씀을 뿌리지 않는데도 말씀이 자라나 있기를 바라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던지, 읽던지, 하느님의 영으로 쓰여진 책을 읽던지 무슨 수를 내어야 합니다. 미사에 가도 말씀은 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새로 들어볼 수도 있고, 아니면 교리를 가르치면서도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햇볕도 쬐어야 합니다. 태양은 실로 엄청난 빛입니다. 그 상당한 거리 때문에 우리에게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빛을 쬐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축복의 손길에 우리를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 강도와 형태야 어떠하든 하느님의 빛을 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주로 하느님의 신비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인데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기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도 주어야 합니다. 씨앗은 목을 축여야 합니다. 이 물은 생활의 '실천'을 대표합니다. 제 아무리 말씀을 듣고 제 아무리 기도에 헌신해도 그에 상응하는 생활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씨앗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 세 가지 '기본이 되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씨앗은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릅니다. 결국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행여 씨를 좀 뿌리고

반항하는 의지

5시 반, 휴대폰 벨소리에 눈을 떴다. 외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일어나라구 이 게으름벵이야.'라고 말하는 나의 지성과 '싫어!'라고 반항하는 나의 의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의지는 강했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뭔가를 준비한다고 해서 의지가 쉽사리 굴복하지는 않았다. 나의 지성은 곧 이 전쟁을 감지했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이 나의 의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설명했다. 나의 의지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드는 하지만 뭘 하고 싶어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는 그래서 당장 눈 앞에 편해 보이는 것만 하려고 드는 그런 어린아이였다. 당장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도 이토록 반항하는 의지이거늘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 또 혹자는 자기는 아침에 일찍일찍 잘 일어나니까 괜찮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아니다, 그런 분들에게 의지와의 전쟁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펼쳐진다. 보통 그런 분들은 '겸손'하라는 지성과 싸우는 의지를 발견한다. 그런 의지는 '순명'이라든지 '자기비움'에 약하다. 의지라는 것은 분명 엄청난 힘이다. 그래서 의지를 잘 길들이지 않으면 어디로 튈는지 모르게 된다. 이 어린아이 의지를 잘 구슬려서 하느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리고 자기 스스로를 봉헌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업이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선하다'는 일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순수한 우리의 의지 만으로는 가식적인 일만을 하기 일쑤다. 참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의지가 하느님의 손에 있을 때에야 우리도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항하는 당신의 의지를 잘 구슬리시기를…

보이지 않는 그분의 사랑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세요. 하지만 그 사랑은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지요. 마치 아주 잘 숨겨져 있어서 기를 쓰고 찾아다녀야하는 보물찾기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찾은 보물마저도 신기한 언어로 쓰여져 있어 해독을 해내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도 같아요. 그럼 저는 어떠냐구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하느님은 단 한 번도 당신을 저에게 직접 드러내신 적이 없어요. 다만 저도 '사람들'을 주셨지요. 저를 인도할 사람들 저에게 당신을 가르칠 사람들을 말이예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제가 변화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말보다는 그들의 '사랑'이었어요. 인간의 계산된 관계 속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그 '사랑'… 저마다 제 잇속을 챙길 때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그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이지요. 지금은 어떠냐구요? 하하…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분을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이예요. 사실 내 주변의 모든 것은 그분이 마련하신 것이랍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세요. <디지털 시대의 성인>

영적 빈익빈 부익부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재화로 환산해 보려 하기 때문에 오늘의 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굉장히 의아해합니다. "아니 예수님 같은 분도 빈익빈 부익부의 마인드를 실천하는겐가? 가뜩이나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져서 난리인데 예수님마저?" 돈을 좋아하면서 세상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보면 과연 그러합니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호사업은 대단해서 엄청난 자금을 모아들이고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고 물자를 사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물자를 퍼다 나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입히고 먹이는 그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쳐 버리고 만다면 그 일은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인은 일반 자선 사업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자선 사업가'가 아닙니다. 선교사는 '신앙의 선포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퍼다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선교사는 불행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들의 외적 삶을 돌보면서 점점 더 그 일에 빠져들어 갈 것이고 결국 자신의 근본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수십년을 해외 오지의 선교지에서 일하면서 정작 자신이 왜 그러고 있어야 하는지를 상실하게 된 선교사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단 한 번도 국내를 떠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이 간직한 신앙의 보화를 널리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결과적으로 내어 주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지 '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실제의 옷을 주어 입히면서 실제로 신경써야 하는 것은 그들의 헐벗은 영혼입니다. 아마존 밀림에서 이미 발가벗은 채로 이

볼 수 없는 이유 3가지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경우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2) 볼 수 있는 빛이 없을 때 3) 너무 익숙해져 버렸을 때 첫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장님들은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장님들, 영이 닫힌 이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주로 '죄에 빠진 이들'이고 눈 앞이 가리워진 이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무언가에 가리워져 있어서(주로는 죄책감, 또는 걱정이나 근심) 영이 드나들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 즉 성사의 손길로 다시금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물을 구분해 낼 빛이 없을 때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시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빛이 없으면 사람은 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빛,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제 아무리 뛰어난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도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말씀의 빛,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셋째의 경우가 가장 지독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눈도 있고, 빛도 있는데, 그만 익숙해져 버린 경우입니다. 처음 길을 걸을 때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다가와서 작은 풀꽃에게도 인사를 건네던 사람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서 그저 다 안다고 생각해 버리고 안주하고 마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러한 이들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모든 걸 다 알고 자기들이 모든 빛을 다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빛으로 오신 예수님,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익숙해짐'은 지금 교회 안에 잔뜩 퍼져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그 교회에 대해서 이미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겸손'은 점점 사라져가

나일롱 피정기

피정을 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핑계로 좀 쉬러 왔다. 신부가 피정 간다는 데 말릴 사람은 없으니까 ㅎㅎ 아침에 대리구장 신부님께 간단히 인사 드렸는데 '피정 갑니다'라고 하니 별 말씀 없으셨다. 뭐 피정이라는 말 뜻 자체는 조용한 곳으로 피해간다는 말이니까 그 말마디 자체의 의미는 제대로 챙기고 있는 듯... 그래도 이런 저런 물리적 소음이 끊기고 나니 나 자신이 조금은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저녁도 먹지 않고 속을 좀 비우니 비로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방 안에 음식이 가득이다. 작은 과자 부스러기부터 시작해서 창문 밖에 '자연 냉동고'라며 주르륵 올려놓은 팩우유들 각종 차와 꿀까지... 배고픔과 싸우려고 왔는데 먹거리가 넘 많다. 결국 우유 한 팩이랑 가져다주신 귤을 몇 개 먹었다. 급하게 온다고 미처 여벌 속옷도 챙기지를 못했다. 외사촌 누나 수녀님이 옷을 세탁해 주겠다고 싹 다 가져가 버리고는 그 동안 잠시 입으라고 준 옷이... 수녀님들 회색 활동 수녀복 ㅋㅋㅋ 덩치에도 맞지 않는 그걸 껴입으려는데 신세가 좀 처량하기도 했다. 수녀님이 농담처럼 그랬다. "이거 사진 찍어놔야 하는데...ㅎㅎ" 큰일나실 말씀을...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마지막 생의 기록인 '노란 수첩'을 읽었다. 데레사 성녀의 임종에 대한 기록을 읽을 무렵엔 나도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책을 몇 권 들고 왔는데... 과연 피정 마칠 때까지 얼마나 읽으려는지 모르겠다. 수녀님이 내일부터 산을 좀 타자고 하신다. 내가 여기 올때부터 '나 좀 굶고 싶으니까 밥은 하루에 한 끼만 주세요.'라고 했더니 그것만으론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등산을 해야 한단다. 아... 나 완전 게으른데... -_-;;; 여기 머물고 계신 '아빠스' 신부님께서 미사는 어떻게? 라고 물으시길래... '다 참례 하겠습

다시 배우는 교리 - 2.강복과 안수

-신부님, 강복은 뭐예요? 그리고 안수도 알고 싶어요. 뜻도 모르고 전에 받았고 시험 전에 자발적으로 가서 받기도 했는데 아직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축복, 강복, 안수… 교회 안에서 참으로 자주 접하면서도 실제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이것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드릴까 합니다. 먼저는 '복'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교회 안에서 '복'은 '은총', '축복', '은혜' 등등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막연히 그저 '좋은 것', 좀 더 부가설명을 하자면,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것들을 벗어난 예외적인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먼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좋은 것을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영양가 풍부한 '밥'을 먹이고 싶어하는데 아이들은 '사탕'을 먹고 싶어합니다. 이 경우에 아이들은 엄마가 사탕을 주기 전까지 '밥'을 '복'이 아니라 도리어 '재앙'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겠다고 악을 쓰며 울부짖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로서는 얼마나 기가 찬 일입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좋은 것에는 일상적인 좋은 것과 특별한 좋은 것이 존재합니다.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좋은 것들은 우리의 눈 앞에는 당장에 그닥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기 일쑤입니다. 일상적인 좋은 것들, 즉 일상적인 은총은 받는 이의 수용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작은 그릇을 들고 있다면 작은 것이 담길 것이고 내가 큰 그릇을 들고 있다면 큰 것이 담기게 됩니다. 하느님

하느님의 종이 해야 하는 일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2)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3)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4)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를 기억하고 돕자고 한국 교회에서 정한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만 되면 그저 막연히 2차 헌금을 낼 생각만 합니다. '돈 조금 더 내서 그거 모아다 주면 되지 내가 여기에서 뭘 더 어쩔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일까요? 오늘 복음의 '이사야서'의 구절을 함께 살펴보면서 진정한 원조의 의미를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고급 요리집에서 거나하게 한 상 받아 먹을 걸, 집에서 초라하게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는 가난할까요? 성경에서 언급되는 '가난'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비워져 있는 상태가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외적인 면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심각하게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고급 요리집에서 수십만원짜리 점심을 한 끼 먹으면서도 집안 사람과 다퉈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사람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제가 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면 아이들이 참으로 신기해하고 좋아하며 신부님 집에서 이런 동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진정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마음이 풍요롭지 못한 모든 이들입니다. 결국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말은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2)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누가 잡혀갔습니까? 과거 사도들과 우리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잡혀 갔고, 일제 식민 시대

일꾼들에게...

연중2주 토요일/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2-3) 어딜 가든지 이방인이 된 기분입니다. 사과를 따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밀감을 따려는 군중들과 함께 밀감 밭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요? 나의 생각은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데 마주하는 사람들은 전혀 거기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선교 사제라고 못 먹는다고 불쌍하다고 식사 자리에 초대를 해 주고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지만 사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네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더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드네요. 네, 맞습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진 것이지요. 사람들은 국내 여행도 못하는 판에 혼자서 우주 유랑을 나서려는 꼴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멀리 간 걸까요? 아닙니다. 저는 시작도 하지 못한걸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 위한 첫 걸음마도 떼지 못한 느낌인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 위한 여행…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돈 이야기, 직업 이야기, 경력 이야기, 자리 이야기, 물건 이야기, 권력 이야기, 자기자랑, 잡다한 주변 이야기… 솔직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쳐 버렸습니다. 이제 피정을 갈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가서 기력을 회복하고 이리들과 싸워 이기고 영적 양식에 굶주린 양들에게 밥을 줘야지요. 수확할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데 일꾼들이 자기 영혼도 추스리고 있지 못한 건 아닌지…

복음 선포의 기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디모테오후서 4장 2-5절) 어떤 사람들은 '건전한 가르침 - 거룩한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떤'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하고 때로는 나 역시도 그러하다. 왜냐면 '거룩한 말'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들음이 아닌 것이다.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은 클래식 음악을 권하는 게 낫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서 쌍날칼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꿰찌른다. 그래서 듣는 이에 따라서 일종의 '불편함'을 양산하게 된다. 생각해보시라… 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이제 인형을 그만 가지고 놀아라'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거부 반응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제 아무리 거룩하고 고상한 척 하더라도 결국엔 하느님과 줄다리기는 하는 중인 셈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놓게 될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앞으로 나서는 데에는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지금 여러분이 즐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조만간 특별한 기회를 통해서 그것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거기에 푹 빠져서 그 쓴

담화

여러분이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듯이 저도 여러분 개개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바가 있습니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아는 것은 참으로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코를 만지고는 '코끼리는 뱀과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책은 참으로 방대한 대서사시와 같아서 어느 정도 알았다 싶으면 어느샌가 다른 영역이 드러나게 되고 또 지금도 여러분이 새로이 지니는 '의지'에 따라서 계속 새롭게 쓰여지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에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헌데 그런 상대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전혀 필요한 일이 아닌데도 상대의 결점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이들 말을 퍼뜨리고 덧붙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언제나 뜬소문의 진원지가 됩니다. 사실 이런 이들이 원하는 것은 '관심'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주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몇 번 호기심에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금세 파악하게 되고, 곧 그들을 떠나 버리게 되고 그 동안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던 주변의 '관심'이 사라져버린 그들은 더 장황하고 허황한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고 부풀리기에 급급해집니다. 여러분 근처에 다가와서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거리를 말하는 이들을 만나신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당신의 이야기도 주변에 전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의 맛깔스런 호기심꺼리들을 전해 듣다가는 언젠가는 여러분도 그 희생양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말을 사랑으로 듣되 성모님께서 하신 것처럼 그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잘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말을 해야 할 때가 오면 여러분 내면에 간직한 여러분

성령을 모독하는 자

(연중 3주 월요일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세상의 움직이는 것들을 살펴보면 그 근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는 '중력'의 영향을 받고, 그 사과를 줄에 묶어 빙빙 돌리면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원심력'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힘은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려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힘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이 두 가지 큰 흐름을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물론 가끔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들이 존재하긴 합니다. 교묘하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듯 하느님에게 멀어지게 만드는 이들, 우리를 속여내어 전혀 엉뚱한 길을 걷게 만드는 '속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본 방향은 변할 수 없습니다. 속이는 자의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결국 우리가 어디로 가려고 했던가는 대낮처럼 밝혀집니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제 아무리 짐짓 거룩한 척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욕망이 드러날 때가 다가올 것이며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려고 아무리 자신을 숨겨 두어도 결국 하느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좋은 방법으로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 사람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헌데 예수님을 보고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진리를 왜곡하고 자신의 야욕에 눈이 먼, 그들이야말로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이들은 도리어 예수님의 영, 거룩한 영, 성령을 '더러운 영'이라 모함하려 들었으니 그야말로 근본 방향이 틀어져도 한참 틀어진 이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이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걱정

한국에 나와 있으면서 수많은 신부님들의 수많은 걱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고민과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저마다 제각각인 느낌이었습니다. 과연 교회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 좁은 소견으로 보기에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우리 존재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사라져 버릴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걱정 가운데에는 이런 류의 고민은 좀처럼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현세적인 걱정과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컨대,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나 저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 한 가지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 반대로 어떻게 하면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이 한 마음으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 모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세상 안의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흘러내리는 한 줌의 모래와도 같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세상의 그 어떤 하찮은 것도 영원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 채우시길 바라겠습니다.

하느님의 일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신 분으로 언제나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 하시지는 않고 다만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당신은 당신을 숨기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 숨김은 우리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가장 큰 사랑을 우리 스스로 꺼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의 이 일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저 역시도 하느님을 직접 보거나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느님의 일을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가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하나의 도구를 선택했고 그 도구를 통해서 꾸준히 저를 당신께로 이끄셨습니다. 이 작업은 여러분에게 이어집니다. 결국 여러분이 제가 하는 말이나 적는 글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낀다면 저로서는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그나마 해 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국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사라지게 될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과  잠시동안 그 세상을 차지하도록 허락받은 어둠의 영들은 우리의 소중한 영혼, 영원을 차지할 능력이 있는 영혼을 꾀어내기 위해서 기를 쓰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 또한 하느님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민감한 이들만이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은 감추어져 있고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영을 그들을 위해 내어주곤 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믿을 만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여러분 매달리십시오. 그분은 당신께 매달리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나약합니다. 부족하고 덧없고 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정신 차리기

대리구 식구들이 형의 서품을 맞이해서 축하식 겸 식사를 한다고 하길래 나도 곁에 꼽사리를 껴서 나가서 얻어먹고 왔다. 배가 그득하다. 아무도 먹으라고 강요한 사람이 없음에도 한국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니 몸이 절로 움직여 결국 과식을 하고 말았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간만에 한국 나왔으니 많이 드셔야지요.' 선교사제를 향한 그의 애정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선교 사제에게 '과식면허'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일단 밥을 많이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자연스럽게 육체가 노곤해지고 잠이 따라 온다. 그렇게 밀려드는 육의 요구에 응답해서 낮잠이라도 한 숨 자고나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없다. 나는 가지치기를 잘 못하는 것 같다. 적지않은 일들이 나의 인간적이고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정신을 차리고 더 큰 틀로 세상을 바라보아야겠다. 사라져 버릴 것들에게서 마음을 떼고 영원할 것들을 위해 시간을 채워 나가야지. 오늘 저녁에 또 약속 있는데… 이 마음 잊지 않고 영원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 다잡아야지.

해외 선교사의 해외 원조 주일에 대한 단상

해외 원조 주일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기본 '돈'과 '재화'를 떠올립니다.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좀 퍼주지 뭐…"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2차 헌금 때에 돈을 좀 챙겨서 주고 그리고 곧 기억에서 잊혀져 버립니다. 진정한 '원조'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그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지원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에게 지팡이를 들어드린다고 하는 건 할머니를 돕는 게 아니라 할머니를 놀리는 꼴이 됩니다. 자칫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가난한 나라들을 향한 '원조'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속에 생각없이 돈을 마구 쥐어줍니다. 그러면 그러한 물질을 다루는 데에 익숙지 못한 이들이 도리어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갑니다. 전기도 없고 텔레비전이 아예 없는 공동체에서는 아이들이 참으로 순박하고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알지만, 전기가 들어오고 문명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도리어 하느님을 잊어갑니다. '이걸 해 주면 될 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들은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머무는 볼리비아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선배 사제들은 이들이 갖지 못한 물질적이고 외적인 부분을 참으로 많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공소 건물을 지어주고, 교회 제도를 정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임이 되면서부터는 이미 어느정도 갖추어진 외견과 제도 속에서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을 벌면 술을 끊고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전에는 소주를 마시다가 돈을 벌면서 고급 양주를 마시게 될 뿐입니다. 이런 이들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의 진정한

더러운 영들의 고백

(연중 2주 목요일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 "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 이렇게 외친 사람은 베드로도 당신의 사랑하던 제자 요한도 아닌 바로 '더러운 영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는 이들, 교리 내용을 소상히 알고, 심지어는 타인에게 충고마저 해 주는 그런 이들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을 전연 신뢰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부터 의심해야 할까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누군가 떠오르며 그 간에 그 사람에게 받은 서러움이 일어나고 그런 감정이 증폭되는 사람은 . . .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스스로'부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더러운 영의 특징은 '갈라놓기'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그를 갈라놓고 이쪽과 저쪽을 갈라 놓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지만 그 영혼이 다시 돌아올 문을 결코 닫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몸담는다 하면서 곧잘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달콤함을 전하는 듯 하면서 '정당하게 미워할 근거'를 마련해 주는 이들, 거짓된 신심으로 이끄는 이들이 교회 안에 산적해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돈에 관해서는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이들,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 역술가들, 타로카드점집에 찾아들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참으로 더러운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 자체를 알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는

병원에서 놀기

여기 있는 생명체 중에 제일 한가한 건, 저 앞의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나 뿐인 것 같다. 사람들은 잔뜩 인상을 쓰고 앉아 있거나 분주히 이리 저리 찾아다니고 환자들은 아픈 몸을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닌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노닥거리는 건 그야말로 나 뿐이다. 아는 신부님께 인사 드리러 왔다. 이리로 오라 하셔서 이리로 왔다. 전에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오더리'로… 간호사들 뒷바라지 하면서 아침이면 환자분들을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다시 침대로 옮기고 간병사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소독용 천을 가위로 자르곤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병원이라는 곳은 병과 고통, 생명을 위한 투쟁이라는 같은 주제 안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곳이다. 살자는 간절한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이다. 환자들은 다가오는 죽음에서 살고자 하고, 보호자들은 환자들을 살리고자 기를 쓰며, 의사와 간호사들, 간병인들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 가운데 나는 마치 잉여 인력이나 된 듯이 별다른 간절함 없이 유유히 병실들을 쏘다녔었다. 병원에 오면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난 단 한 번도 입원을 해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런 병원에 돌아왔다. 그것도 별 목적없이…

시너지

흔히들 하는 소리가 있다. ' 너희는 옛날을 몰라서 그런다'면서 시작되는 어른들의 유세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쉽게 놓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지고가는 고통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군대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옛날에는 군대가 몇 년이었는데 요즘은 짧아졌고 환경도 좋아졌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옛날에는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던 수준에 그런 열악한 환경의 군대를 갔기에 그 생활이 견딜만했었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너무나 부요한 환경에서  자유와 그 밖의 편의를 억압당하는 군대에 가야 하기에 고통의 정도 면에서는 과거와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잘 살게 된 환경을 선택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세상에 살아온 것이다. 또한 지금의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컴퓨터가 뭔지도 몰라도 큰 불편없이 생활했던 환경의 어른들이 요즘의 기술 문명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더 복잡한 문화를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명절에 떡이나 얻어 먹기만 해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어른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된 노X페이스를 입지 않으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다. 서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제 어른들은 자녀 세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거두고 그들의 현실로 내려와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바라봐 주어야 하고 감싸 안아야 하며, 우리 젊은이 세대 역시도 어른들의 그 고집스러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감싸 안아야 한다. 두 사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서로서로에게 집중해 있으면 서로의 단점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자 하면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고 서로의 장점을 활용하게 된다. 두 팔이 없는 이와 두 다리가 없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손이 오그라들면 뭔가 다른 걸 손에 쥐지 못합니다. 마음이 오그라들면 뭔가 다른 걸 마음에 담지 못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건 육체적인 것이고 육체가 사그라들면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건 영적인 것이고 영혼이 지속되는 동안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순식간에 치유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그 전능은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앞에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법과 계명'이라는 전통 앞에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이들은 아직도 '법과 계명'을 내세우며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이유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를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습 자체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은 '사랑' 외에는 다른 걸 가르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잘못을 했다면 물론 고쳐주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증오'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그를 감싸안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 그럼 그 사람이 그런 잘못을 계속하게 두라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턱대고 모든 걸 감싸 안는다면 그것 또한 큰 착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모님

다시 배우는 교리 - 1.고해성사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앙, 즉 믿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인지라 사람은 보고 들음을 통해서 자신의 '첫 신앙'을 형성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믿을 바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첫 걸음을 잘못 걷게 되면 그릇된 길로 빠지기가 쉽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인 '교리교육'을 통해서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이들의 길을 인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교리에 '군더더기'들이 많이 붙게 되고 실제로 신앙인들이 궁금해하는 바와 교회가 가르치려고 하는 바에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갓 구구단을 배우려는 아이에게 엄청 복잡한 공식을 알려주는 식이 되어 버렸고, 자연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그 어렵고 딱딱한 교리내용에 머리로는 무언가를 받아들이지만 마음은 이미 멀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 바로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인데, 교리를 배우면서 하느님을 저 하늘 높은 곳에 올려두고 나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시도이지만 신자분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리교육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실제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20대의 청년이 일반적으로 가질만 한 궁금증에 대답해 나가면서 적지않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교리교육을 펼쳐볼 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 궁금증입니다. (다음에 서술될 사항은 가장 기초적인 교리적 상식을 바탕으로 한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내용들이 될 것입니다. 정통적인 교리상의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인터넷 상에 '가톨릭 사전'을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1. 고해성사 - 옛날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소죄와 대죄를 알고 싶어요. 그리고 고해성사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날 모르겠어요. 자세히 말하면 신부님이 자세히 말

먹을 것을 주는 사람

머지 않은 미래에, 도심지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곳을 찾아 피해보지만 현대전에서 숨을 곳을 따로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도시는 황폐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기도 물도 공급되지 않는 도심지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온갖 위용을 자랑하던 도심지의 편의시설들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로 변해 버리고, 인간들의 위선과 허영은 심판을 받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찾아 떠납니다. 참으로 천시되던 이들이 부각됩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농부와 어부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초적인 것을 제공해 주던 그들에게 사람들은 다가가 먹을 것을 구걸하게 됩니다. 제가 설명하는 이 모습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영적인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외적으로 커져가는 교회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무척이나 거대합니다. 신자들의 열성과 신앙이 그 외적인 거대함에 맞물린다면 문제될 건 없습니다. 100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100의 물건을 다루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60의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100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한때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1000의 능력을 지녔던 한국교회였고 그에 발맞추어 외적인 성장도 거듭해 왔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내적인 원동력이 차츰 희미해진다는 느낌입니다. 이 내적인 교회를 올바로 세워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에도 사람들은 내면을 살피기보다는 외적인 것에 집중한다는 느낌입니다. 유럽교회의 실상을 눈 앞에 두고도 여전히 뭔가를 세우고 키우고 확장하며 건설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중에 신자들은 목이 마르다고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이를 읽어낸 이들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

(연중2주 화요일) 주인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은 결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은 자칫 많이들 곡해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진정한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지 교회 안에서 많이들 다투고 있고 많이들 오해합니다. 한동안 그 주도권이 '사제들' 즉 교회권력에 주어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배웠고,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이 주도권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 즉 남미의 선교지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알고 많이 가진 북미와 유럽에서 온 사제들에게 굴종합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그들이 일찍부터 얻은 좋은 기회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조금씩 예전의 그 막연한 존경과 존중을 그만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 간의 본전 생각에 반대 방향의 움직임을 내세웁니다. 즉, 교회 권력의 반대방향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민초들인 '평신도', 실은 '평신도'에게 주도권이 있었다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대의 정의로움인 '민주주의'와도 맞물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정당한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이 아닌 교회의 진정한 권력과 주도권은 교회권력도, 평신도도 아닌,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교회는 독재체제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하느님주의'('주의'라는 말마디를 쓰는 자체가 꺼림칙하지만…)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 그분이야말로 모든 것을 올바르게 분별하시고 가르치시는 분, 교회 권력이 제 아무리 높아도 그분이 가장 약한 이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면 그깟 권력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

새 술은 새 부대에

(성녀 아녜스 기념일, 연중2주 월요일) 작년 겨울, 인터넷 상에서는 한 동안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현실은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진보와 개혁을 바라는 이들은 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의 바램대로 현실이 이루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들은 어느새 여당이 되고 주류가 되며, 그들의 주변에는 다시금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나타나게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세상의 정치라는 것은 완성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롭다는 건 '한 번도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진정한 새로움은 어제 빨아놓은 걸레로 오늘 상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상을 더럽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이 걸레도 저 걸레도 필요없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새로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수단, 저 수단을 갈아치우며 쓴다고 때로는 성경을, 묵상을, 피정을, 수도원 방문을 한다고 신심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우리 마음을 들어높여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곧 우리의 바램이 될 때에 우리의 신앙은 진정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내어야 합니다. 무엇이 새 술인지도 모른 채로 새 부대만 찾는 모습이 교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리 돌아다니고 저리 돌아다녀보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진정한 새 술을 구하고, 그것을 참된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술은 성령과 주님의 사랑이고, 새 부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새로운 신학 사조를 '새 술'이라고 착각하고 새로운 성전 건물을 '새 부대'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 Q&A 성령을 거스르는 죄

마태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무엇인가요? 성령을 거스른다는 말마디를 살짝 풀면, 성령의 흐름에 거슬러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어디로 움직일까요? 거대한 사랑의 흐름을 이루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은 이 '사랑의 흐름' '하느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거스르는 사람을 말하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포기'를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은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희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포기는 두 가지 방향, 나 자신에 대한 포기와 상대에 대한 포기로 드러납니다. ㅎㅎㅎ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를,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릴 때... 우리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좀 더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이 있는지요? 성령을 거스르는 '특정한 행위', '특정한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려는 모든 행동의 근본 방향을 살피라는 것이지요. 어떤 말을 피한다고, 어떤 행위를 피한다고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반대로 어떤 말을 골라 한다고 어떤 행위를 골라 한다고 영생을 얻지도 못합니다. 한국 신자분들에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외면적인 것에 치중하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여기서도 지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말을 하기

거품

처음 맥주를 따르면 거품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는 맥주를 마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동안 거품을 삼키지 않으면 맥주가 입에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거품이 가라앉고 맥주가 드러납니다. 휴가를 나와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내 마음 속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좀 지나면서부터입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형의 서품식을 위한 것이었고, 이제 그것이 끝나고 나니 비로소 거품이 좀 빠지는 느낌입니다. 내 마음의 소요가 조금은 진정되고 나 자신이 보다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높은 언덕의 고비를 지난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다시 슬슬 들어갈 준비,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형제 사제들과 신자들 생각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한국은 시원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기에는 참 좋습니다. 형님 신부님의 첫미사가 곧 거행이 됩니다. 미사 중에 많은 분들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아멘.

서품식을 앞 둔 두 분을 기억하며...

서품식 전날, 작년에 서품을 받은 동기 신부님들과 저녁을 함께 하고는 늦게 들어온 형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은 자기 동기 신부님들의 걱정거리들을 들고와 나누었다. 1년차 보좌때면 늘 하게되는 '주일학교'와 '교리교사'들 걱정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힘들고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힘들고 잘 안된다. 사방 팔방에서 '공부'하라고 죄어드는 애들을 주일까지 모아다 놓고 '교리'라는 이름의 또 다른 형태의 공부를 시키니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이런 시도도 해 보고, 저런 시도도 해 보게 된다. 내가 보좌 때에는 '가톨릭 스카우트'도 해 보고(지금은 벌써 사라졌단다.) 또 어느 신문 기사에서는 주일학교 교리를 '영어 성경 읽기' 등등으로 세상적인 기대에 발맞추어 운영해 보기도 한다고 했었다. 요즘이라고 상황이 뭐 그리 다르겠는가? 마치 쳇바퀴 돌듯, 이런 걸 시도해보고 안되면 저런 걸 시도해보다가 어느새 보좌 임기가 끝나면 새로운 보좌가 또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굉장히 원론적인 대꾸를 했다. '형, 신부가 열심히 살면 다 된다. 신부가 거룩하게 하느님 가까이 살면 모든 게 바로잡히게 된다. 내가 봤을 때는 이 부분이 소홀해서 그런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메말라 가는데, 그걸 채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거다. 신부가 거룩하면, 가정의 부모들이 거룩해지고, 그러면 절로 신앙교육이 이루어질거다. 미사 거룩하게 집전하고, 강론 열심히 준비하고, 사람들이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게 도와주면, 아마 나머지는 저절로 올바로 서게 될거다.' 많은 신부님들이 세상의 다양한 요구에 발맞추려는 시도를 한다. 참으로 좋은 시도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캐치해서 내어주면 당연히 자기 관심사에 따라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정결과 성(性)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정결'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하지만 그 중의 적지않은 이들이 '성(性)'과 정결을 혼동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성적인 정결', 즉 육체적인 정결이 존재하고 필요합니다. 혼전 순결이라든지 일부 일처제와 같은 교회의 교리는  그 본질적인 지향에 있어서 여전히 소중하고 '유효'합니다. 사제직을 지향하는 이들의 독신 서원이나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이들의 정결 허원 역시도 교회의 합당한 권위가 보존하고 있는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릇되이 사로잡히기 시작한다면, 즉, 정결을 곧 육체적인 순결과 동일시하고 오로지 그 생각에만 사로잡한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한 처녀는 폭력을 당한 감싸주어야 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정결'이 파괴된 부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이들을 마치 '더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거짓 의로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인간의 약점을 전혀 고려치 않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으로 내려오시어 인간의 나약함을 당신 스스로 체험하신 분이시기에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의미에서 독신자들의 육체적 '성性적' 고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보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정결은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정결은 내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합당한 것을 내어바칠 마음의 준비를 할 때에 참으로 정결한 사람이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신은 다른 나라에 있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우리의 고향을 향해 있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고향에서 비롯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육

인간의 의지

사실 가나에서 일어난 이 기적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 남다른 모습이란 다름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면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놀라움이었겠지요. 예수님은 분명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기적들을 일으키고 있어으리라 생각합니다. 측은한 마음에 누군가를 치유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밀리에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다만 이 가나 기적이 중요하게 된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공생활', 즉 예수님의 공적인 삶에서 기록된 첫 번째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을 드릴 당시에 성모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포도주를 사 오던지, 무슨 수를 내어야지 아들에게 가서 그 일을 보고하는 이유는 어머니께서 이미 아들의 그런 능력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는 아직 오지 않았었습니다. 원래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계획되었던 하느님의 외아들의 그 시간, 당신이 첫 기적을 일으켜야 할 시간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분별이 그 시간이 여전히 멀었다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계셨더라면 이 첫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이 순진무구한 청원은 하느님의 계획을 바꾸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바뀌어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첫 번째의 공적인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의지는 하느님의 시간과 계획을 바꿉니다. 어제까지 어두움과 우울함과 슬픔에 싸여 있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선'을 위해서 쓸 수 없던 이가, 오늘 아침 밝은 햇빛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내세우는 순간부터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미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지를 더욱더

네 죄를 용서받았다.

(연중1주 금요일) 복음서에서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려고 하신 복음, 즉 '기쁜소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잘 다른 것들에 치중을 하며 예수님의 '기쁜 소식'의 본질을 왜곡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 이들 보셨을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라면서 이런 저런 규정들을 더욱 더 들이대는 사람들,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라고 하면 그 신앙인이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의 본질'보다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혹시 덜 가르치지 않았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 이들은 '기쁜 소식'을 어둡고 무거운 소식으로 뒤바꾸어 버리는 장본인들입니다. 자, 그럼 신앙의 본질, 즉 예수님이 전하려 했던 기쁜 소식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5) 예수님은 갇혀있는 우리들을 풀어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이 억압이면 거기서 풀어주고, 그것이 현실적인 제약이면 거기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도움을 외로운 이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이 해방에도 우선순위가 있으니 당연히 그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우리들을 그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흠도 티도 없이 씻어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이 작업이 우선이었습니다. '죄의 용서', '영혼의 구원', '진정한 해방', '죽음에서의 자유', '부활' 이렇게 똑같은 의미를 지녔지만 여러가지 말로 바뀔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써먹는 사람들

(연중 1주간 목요일, 성 안또니오 아빠스 기념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에게 덧붙여진 이런 저런 용도들이 보입니다. 재력이 있는 사람, 미모가 있는 사람, 재주가 있는 사람, 등등등… 우리는 이런 '무언가를 가진' 사람을 보면 우리의 기호에 따라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됩니다. 재력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사람은 분명 그와의 친분을 통해 혹시 모를 재력을 얻어 누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미모가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사람은 그의 미모를 더 누리고 감상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재주를 통해서 뭔가 이득을 보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부여하신 것은 단순히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주를 통해서 그에게 다가선 후에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라는 것임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덧붙여진 그러한 것들에 집중하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은 내버리기가 쉽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력'에 이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다가갔고 예수님은 당신의 측은한 마음에 그를 고쳐 주십니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지켜야 할 바를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주만을 '훔쳐'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드러나게 다니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 있었던 더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만남'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요? 분명히 반성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력, 외모, 재주, 학업 등등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들입니다. 우리는 '

동기신부

동기신부님들을 만났다. 나를 포함해서 마침 멀리서 모인 동기 신부님들의 환영, 그리고 축일을 맞이한 신부님의 축일축하라는 이유였다. 내가 해산물이 먹고 싶다해서 마련된 자리에서 함께 술을 한 잔 걸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간만에 적지 않은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치 신학교 시절을 되감기라도 해 놓은 듯이 신학생 시절 늘 그랬던 서로간의 시덥잖은 농담들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저런 소식들을 나누고 때로는 저마다 지금 처해있는 삶의 자리에서의 고충들이 나왔다. 들으면서 "아, 이런 고민들 하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듣는 데에 주력했다. 무슨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 선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들도 아니어서 그저 열심히 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에게 집중해서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그 '걱정'이라는 것에서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라고 하든지 가고, 무엇을 하라고 하든지 하며, 주는 대로 받고, 가진 것에서 최선을 다하면, 사실 한 사람의 사제가 세상 안에서 지닐 가능성이 있는 현세적 걱정거리들의 상당수가 사라질 것 같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6,7) 이 구절이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어느 자리에 있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보람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평화가 우리들과 함께 할 것이다. 나는 사제직이 참으로 축복받은 직분이라고 생각하며, 사제가 사제로서의 능력을 펼칠 때에 그 힘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기 신부님들이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