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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3의 게시물 표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순2주 목요일 먼저 계시라는 것에 대해서 잠시 배우겠습니다. 우리 종교는 계시 종교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인간들 사이에 서로 부대껴 가며 서로의 법을 정해서 보다 나은 상위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대표적인 것으로는 '불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계시는 창조때부터 자연 안에 숨어 있기도 하고 또 우리 자신 안에 '양심'이라는 모습으로 숨어 있기도 하며 역사의 시초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다가 결국 예수님 때에 와서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완전히 드러난 이 계시를 받아들이기까지 여전히 많은 도움이 필요하였으니 이를 사적 계시라 합니다.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는 유효하고 그 기간이 넘어서면 효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사적 계시들에도 나름의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의 본뜻이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유통기한 따위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여러가지 사적인 계시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내고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보내지는 것이기에 분명히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북쪽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고 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동쪽으로 조금씩 엇나갈 때에 '서쪽으로 조금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고 또 반대로 서쪽으로 엇나갈 때에는 '동쪽으로 조금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북쪽의 방향은 변하지 않지만 동쪽과 서쪽으로의 수정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게 마련이고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진 이에게 '서쪽으로 수정하라'는 지시는 도리어 그를 더 어긋나게 할 수도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죽은 이가 살아나서 경고를 해 주러 간다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먹게 될 것입니다. 하지

만남의 깊이

두 사람이 마주합니다. 첫 만남에서 서로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1단계 - 껍데기 제일 먼저 작용하는 것은 '시각'입니다. 외모를 훑어봅니다. 누구는 아름답고 누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선천적으로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준수하지 못한 외모를 지닌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내면에 더 큰 사랑이 필요한 일이고 그렇게 실천하는 이는 더 큰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외에도 이미 소소한 것에서 우리는 상대를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후각', 즉 그 사람의 냄새도 마찬가지로 큰 역할을 합니다. 향기를 풍기는 사람과 악취를 풍기는 사람은 앞서 표현한 외모가 준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길 수 있습니다. 악취가 나는 데에도 그 앞에 머물 수 있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 '청각'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따라서 우리는 어느새 그를 분별하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좋고 나쁨도 상대와의 관계에 작용을 시작합니다. 기타 '촉각'과 '미각'이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만남에서 이것이 크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오감에 관련된 상대의 인지에는 좋은 것들보다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것들을 극복하고 다가서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에는 받을 만한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피상적인 단계에 속하는 다른 것들로, 돈, 학연, 지연 등등이 속합니다. 2단계 - 내부구조 가장 피상적인 단계의 접촉이 끝나고 나면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그 사람의 내면에 지닌 것들이 드러납니다.

소출을 내는 민족

단 하나의 사명 뿐이었습니다. '너희는 소출을 내어라' 뭔가 대단한 것을 원한 게 아니라 그저 주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종들은 주인의 재산이 탐이 났고 주인의 자리도 탐이 났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점점 자라나 주인의 사랑을 물리치기 시작했고 결국 주인의 외아들마저 살해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유다 민족은 자신의 특권을 모조리 상실했고 지금의 그 특권,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특권은 이방 민족들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교회에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소출을 제때에 바치고 있을까요? 아니, 소출이 뭔지나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 우리가 내어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덕스러운 삶이었고, 참된 덕은 오직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왜 그리 숫자 증가에 열을 올릴까요? 사제가 많아진다고 교회가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걸 신자가 많다고 교회가 성장한 게 아니라는 걸 언제쯤이면 깨닫게 될까요? 한 사제를 유학을 보내서 머릿 속에 많은 지식을 담아서는 그 교만으로 사람들에게서 동떨어진 존재가 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해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봉사하게 하는 사제가 되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쯤이면 깨닫고 실천하게 될까요?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런 사제들을 내쳐버리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가꾸시는 밭의 일꾼은 '교만과 학식'이 아니라 '겸손과 기도'의 도구로 일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언제쯤이면 알게 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출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제때에 소출을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한 번 그렇게 하신 것처럼 또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소출을 내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사순2주 수요일 꼬마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을 정말 천진난만하게 자신들이 아는 직업들을 다 쏟아 놓습니다. '의사요! 목수요! 신부님이요! 수녀님이요! 선생님이요! 판사요!…' 하지만 이 귀여운 꼬마들이 이 순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외견일 뿐 그들의 진정한 본 모습을 알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의사가 되는 것이 엄청난 학업의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실습 과정들을 거쳐야 하고 결국 사람을 도우러 일하면서 환자와 보호자에게 끊임없이 지탄받기 일쑤인 줄을 안다면  누구든 감히 그런 직업을 바래 왔다고 쉽사리 청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합니다. 오늘 이런 천진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있으니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사실 어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군중들이 따라 다니면서 떠받드는 예수님의 모습이 좋아 보였을 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고 청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버릴 때에야 그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그저 우리 중의 일부의 조금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가능하다는 것을 과연 우리 중의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요?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근본의 방향은 하느님께로 향해 두고는 여전히 세상을 흘끗 흘끗 흘겨보고 있으니 이 어리석음은 언제쯤 그쳐지게 될까요? 하지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의 잔을 나누어 마시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한 긍정의 '네'라는 대답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부름받은 자들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그들이 말하는 것, 그들이 행하는 것

사순2주 화요일 자로 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기준이 되는 '자'는 대체로 정확하며 그 눈금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헌데 문제는 재려는 대상입니다. 이 대상은 이렇게 저렇게 변하기 일쑤입니다. 전에 없던 것도 생기고 생겼던 것도 사라져 버립니다. 헌데 그것을 측정할 '자'를 만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자를 그렇게 쉽게 변화시키려 들지 않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뭐든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이 이리 저리 변해 버린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예수님은 어기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구원에 관계되지 않는 이상) 합당한 권위의 명령에 순명하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절들이 있으니 이어지는 설명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그들의 '행실'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들의 행실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진리'입니다. 그들은 함부로 거짓을 발설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식견이 있고 많은 좋은 것들을 배워 머리로 알고 있고 올바른 것들을 분별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에게 짐을 잔뜩 지우고 정작 자기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부족한 사랑에 두려워하는 자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대전 앞으로 갔을 적에 필히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실 것이다. 눈 먼 장님에게 색을 얼마나 잘 구분하는지를 묻지도 않으실 것이요 벙어리에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내어보라 하지도 않으실 것이며 귀머거리에게 이 소리와 저 소리를 구분해 내라 하지도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 존재로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과연 무엇일까? 모든 이가 각자의 자리에서 똑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 세상은 그것을 '물적 가치'로 규정해 버렸다. 물적 손해가 많으면 큰 일에 속하고, 소소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건 그냥 에피소드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사람마저 숫자로 헤아려졌고 큰 사건과 작은 사건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마귀들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돼지떼에게 마귀가 들어가도록 해서 모두 달음질쳐 물에 빠져 죽도록 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마을에서 물러가 달라고 청한 이유이다. 경제성의 논리에서 모든 것이 비교되고 '우월'이 가려지게 되었다. 배우고 돈을 많이 벌면 능력이 있는 부지런하고 좋은 사람, 못 배우고 돈을 벌지 못하면 능력이 없는 게으르고 나쁜 사람, 이 참으로 간단한 이분법은 온갖 매체를 통해서 암암리에 우리에게 전염되어 우리는 이런 시선을 아주 기본적으로 갖추게 되었고 은연중에 주변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수많은 이들이 서로 출발선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적어도 부모님이 계시고, 기본적인 초중고등 교육을 받고, 4년제 대학이 널린 곳에서 살고 다른 누군가는 부모가 이혼하여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극빈의 경제적 여건에 대학은 그저 상상속의 동물과 같은 존재인 곳에서 산다. 누가 누구를 무엇으로 판단하는 것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올까? 무슨 거창한 소리를 할려고…ㅎㅎ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 혼인을 꿈꾸던 이, 정말 아름다운 신학교 생활을 꿈꾸던 이, 하지만 때로는 단 한 번의 실수는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 한 번의 그릇된 결정이 그 사람이 그렇게 꿈꾸던 것을 앗아가 버린다. 그러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정말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어떻게든 교회에서 혼인 무효화 소송을 통해서라도 혼인의 은총상태를 회복하려는 이들을 보았고, 다른 수도회나 다른 교구를 통해서라도 다시 사제의 길을 걸으려는 이들을 보았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무엇이 우리가 꿈꾸던 것인가? 그것은 교회의 축복인가 하느님의 축복인가? 하느님의 축복은 정도를 벗어난 이에게는 절대로 내리지 않는 것인가? 과연 '정도', 바른 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정도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되살펴보게 된다. 내 인생은 정도, 바른 길인가? 과연 '정도'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마더 데레사의 길을 걸어야 하고, 산 프란치스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살짝 정반대의 방향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정방향이 애매한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그릇된 방향은 없는가? 엇나가는 이들은 없는가? 있다. 하지만 그 구분을 누가 해 내는가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이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이러 가던 그 때에 올바른 일을 한다, 자신은 정도를 걷는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반기지 않던 마을에 불을 내리자던 제자들도 제 딴에는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

어느 사순시기의 금요일에...

오전 내내 '그리스도의 수난' 동영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만들어서  이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준비 중이다. 일찍이 이 동네 사람들의 유별스러움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십자가의 길은 반드시 걸어다니면서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랄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일단은 오늘의 취지를 잘 설명해주면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본당에 와서 마치 카펫 속으로 숨겨놓은 더러움이 삐져 나오듯이 사람들과 만나면서 조금씩 이 새 본당의 숨겨져 있던 부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알력다툼. 애써 감추려 하지만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 멈추지 않는 고발… 강론 때면 '사랑'에 대해서 부르짖는다. 하지만 솔직히 나부터 쉽지가 않은 건 사실이다. 촉을 세우고 달려드는 이를 향해서 '사랑'이라니… 오늘은 지난 주임 신부님의 허락으로 우리 본당 운동장에 장비들을 들여놓은 한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내가 한국에 어느 신부님을 아는데…" 듣자하니 인맥 이야기다. 바로 대꾸했다. "저하고 아무 상관 없거든요." 그러자 이 아저씨 작전을 바꾼다. "내가 광산업을 하고… " 듣자하니 재력 이야기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아저씨의 수작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거 저런거 다 필요없으니 속히 운동장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빼내 달라고 부탁했다. 안그럼 누가 여기 함부로 들어와서 물건에 손 대어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네들이 겁내는 건 재산의 손해일테니 말이다. ㅎㅎㅎ 들어오니 다른 신부님이 걱정이다. "형 그러다가 우리 소문 나쁘게 내면 어떡해요?" 허허…

교회가 과거에 누렸던 영화

우리 교회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교회의 이상향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교회의 과거에 지녔던 영화로움은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청사진을 지니고 어떤 방향으로 가려 하는 것일까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 현대의 시대에 우리가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같은 짐을 들고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면 결국 이 방향도 저 방향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기다리는 교회의 발전상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요? 세상이 가톨릭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뒤덮이면 우리의 사명은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 적어도 그 수가 많이지면 되는 것일까요? 더 많은 성사자의 수로 교회의 현재를 분별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이 숫자 헤아리기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워만 있을 때가 있고  기어다닐 때가 있고 걸어다닐 때가 있으며 몸집이 커질 때가 있고 지식을 습득할 때가 있으며 나아가 지혜를 익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참으로 많이 성장했습니다. 이 성장은 아이의 몸이 자라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고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 보다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것을 영적 성장이라고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몸을 부풀리기보다는 영혼을 보살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물론 아직 세계 각국에 몸이 더 성장해야 하는 초라한 모습의 교회, 여전히 재정적으로 가장 기초적인 생활 필수품도 제공받지 못하는 가난한 교회와 인간의 기본적인 권한이 제한받는 국가가 있어 그들을 위한 활동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이 마련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더 이상 몸의 성장이 아닌 영혼의 성장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인구조사를 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순2주 주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자녀들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에서 나온 자녀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니 바로 본당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세상의 자녀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멸망' 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엇나간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성당에 나오긴 하지만 근본 목적에서 한참 어긋나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 성당에 다닙니다. '자신의 뜻'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어린 아이가 자기가 흙으로 만든 밥이 너무나 맛있어 보여서 그 놀이를 계속 한답시고 집에 마련해 놓은 진짜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변모와 더불어 세상 것만을 챙기려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드러난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묶어 두려고 초막을 지어 바치겠다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에 하늘에서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우리 말을 들으셔야 할 것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느님께 떼를 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혼인법은 복잡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혼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부부는 정말 자신들의 열성이 있지 않은 다음에는 그냥 그대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혼을 했다가 이런 저런 문제로 갈라서서는 서로 다른 짝을 만나서 다시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교회를 찾아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먼저는 "주임 신부님 만나기"라는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교회 안에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 주임 신부님의 방을 두드리기가 얼마나 힘이 들까요? 따로 근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면 괜히 바쁘신 분을 성가시게 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사무실에 문의를 하면 지금은 곤란하다는 말 뿐입니다. 주임 신부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더 가관입니다. 간단한 혼인 문제라 할지라도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이 줄줄이고 때로는 마음도 없는 전남편에게 전화도 해야 합니다. 헌데 문제가 더 복잡한 상황이면 교구청 법원에 가서 이런 저런 데를 찾아가서 소송을 하라고 합니다. 이제 다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어렵사리 찾아온 신자에게 도성과도 같은 '교구청 법원'이라니 마음은 더욱 졸아들기만 하고 전 남편과 처리해야 하는 서류의 양은 더욱 방대해지기만 합니다. 교회로서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경우들을 손쉽게 처리한다면 저마다 혼배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온갖 문제가 있는 가정을 양산할 것이니 아이들이나 주변 인물들과 같은 제2, 제3의 피해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처리 결과를 엄중하게 관리해서 정말 심각하게 결정한 것인지를 확인하자는 절차입니다. 이러한 절차들을 다 거치고 나면 소위 나름 비교적 '순결한 상태'가 되는 것이니 앞으로의 과정들을 허락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양측이 다 안타까워 보입니다. 이제 겨우 하느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겼지만 거대한 벽

베드로 사도의 사목 지침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보석과 같은 구절을 발견합니다. 바로 베드로 사도의 사목 지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내용으로 3가지 뿐입니다. - 자진해서 돌보기(억지로 하지 말기) - 열성으로 하기(부정한 이익을 탐내지 말기) - 모범이 되기(지배하려 하지 말기) 먼저 긍정적인 부분부터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목은 '자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과연 우리가 하는 일들 가운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었던 걸까요? 예컨대 저는 '볼리비아'라는 곳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스페인어는 말할 것도 없었지요. 헌데 이 일을 제가 '자진'해서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장 근본적인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에 내가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가장 근본의 동의가 우리 사제들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니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리고 그분의 대리자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 '순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목자의 가장 으뜸가는 것은 바로 이것, 하느님에게의 순명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합당한 권위를 가진 이에게 순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열성'입니다. 열성이 의미하는 바는, 그 본래의 가치 그대로의 목적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사목자가

표징

사순1주 수요일 "표징을 보이시오!" 소위 거룩하다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알려진 이들 앞에서 세상 사람들이 내세우는 조건입니다. 교회가 성인품에 올리는 이들에게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도 이런 류의 표징입니다. 알 수 없는 치유, 기이한 현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런 표징을 찾아왔고, 여전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징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런 표징을 본 이들이 일순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릴까요? 사탕 맛에 길들여진 이들이 어느 날 쓴 약이 좋다는 표징을 보고는 그때부터는 쓴 약을 좋아하게 될까요??? 파티마의 기적이 세상을 모두 바꾸었을까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피가 세상을 바꾸었나요? 루르드의 샘물이 모든 걸 뒤바꾸기라도 했나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경고'를 하시니 이 악한 세대가 받게 될 표징은 요나의 표징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악하던 니네베 사람들의 행실 앞에 나선 요나 예언자의 외침, 이들이 받게 될 것은 이 표징 뿐일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부르짖음은 사람들의 속에 들어있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원래 사탕을 좋아했던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싶음에도 쓴 약을 발견할 수 없어서 사탕이나 맛보고 있었던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표징을 요구하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마지막 유혹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여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표징의 유무가 우리 신앙의 핵심을 가르지는 못합니다. 아니, 다르게 표현해서 이미 필요한 표징은 모두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입니다. 다른 표징은 없을 것이니, 여러분은 다만 그분의

보다 나은 것

사순1주 목요일 두 가지 사물 가운데 더 나은 것을 분별해 내는 우리들입니다. 돈에 관해서는 더욱 쉽습니다. 1000달러와 1000볼리비아노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면 당연히 더 가치가 높은 1000달러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더 좋은 것을 찾습니다. 더 큰 집, 더 나은 음식, 더 멋진 옷들을 찾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돈과 사랑, 또는 돈과 신앙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사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아마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렇게 선택을 하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으로 선택하는 것은 '돈'인 경우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사랑이나 신앙 따위는  일단 입에 밥을 넣고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축복'에 관한 개념이 서로 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정한 축복은 단순히 세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더 넓은 집에 사는 것으로, 더 나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더 멋진 옷을 입는 것으로 사람이 진정 행복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때로는 더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더 불행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탐욕도 커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더 나은 것'을 주시려 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인내'를 선물하시려고 '인내를 훈련할 상황'을 주시려 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미약한 마음으로 청한 것은 '안락'이었는데 어느날 그 안락함이 몽땅 사라진다면 우리는 도리어 하느님

한 아들의 바램

"주님의 기도"라고 우리가 부르는 기도의 '명칭'은 우리 구세주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기도라는 엄청난 존경심 속에서 지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기도는 "우리 아버지"라는 지극히 친숙한 명칭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그렇게 엄숙하고 진중한 무엇이기보다 아버지에게 청하는 소박한 한 아들의 바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동양적인 문화의 바탕에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윗분에 대한 지나친 경외보다는 조금 마음을 가볍게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극히 위대한 신과 일상을 공유하는 아버지는 분명히 다릅니다. 범접할 수 없고 지극히 높은 곳에 있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분에 대한 마음과 한 집에서 지내면서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때로는 우리가 엄살을 피우기도 하지만 우리가 잘못할 때에는 우리를 꾸짖어주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갖는 마음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 모시는 분에 대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자하신 우리의 아버지도 '용서'에 관해서 만큼은 지나치리만큼 엄하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계시니,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열쇠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에 대해서는 익히 배운 바가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유심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31-

병든 이들

재의 수요일 후 토요일 건강하다는 것이 모든 상태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병이 들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한 인간 존재로서 영이든 육이든 완벽한 존재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우리 모두는 병든 이들임에 틀림이 없거늘 누군가는 자신은 딱히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는지 모르겠다고 크게 병든 게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결국 세상에는 영적으로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의사의 손길에 맡기려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위해서 오셨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병든 상태를 인지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앞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입지를 밝히 드러내게 될 것이니 의사의 치유를 거부하는 고집스런 환자이거나 의사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환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사이신 분은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고 그분이 일단 손을 대면 완치율은 100%를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료사고를 걱정할 일도 없고 그저 우리의 존재를 내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게다가 우리 의사이신 예수님은 인맥도 대단하셔서 이 병원의 최고 공급책인 하느님과 같이 일하고 그분에게서 모든 재료를 다 공급 받으시는데 필요한 은총이며 축복은 물론이고, 때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때에는 아예 새로운 육신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환자들의 고집은 대단해서 아예 병원 근처에도 오지 않거나, 와서도 의사와 실갱이를 하려고 하기 일쑤입니다. 아프니까 살살 해 달라고 하면서 이미 상태가 꽤나 진행된 중증 증세를 드러내 보입니다. 고통 없이 어떻게 그 종양을 덜어내겠습니까? 속은 썩어나는데 그냥 대일밴드 하나만 붙여 줄 수는 없느냐고 징징대는 통에 의사로서는 기가 찰 따름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때로 과감한 수술을 행하시니 그것이 우리 삶 안에서 다가오는 시련들인데 그 고통을

단식

재의 수요일 후 금요일 음식을 끊는 행위로 알려져 있는 단식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꾸준히 에너지를 소비해 가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지극히 느리게나마 죽여 나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을 유지하는 양분의 공급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걸 깨닫는 육신은 우리에게 '배가 고프다'며 비명을 질러 댑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왜 하는 걸까요? 멀쩡히 음식이 있는데 왜 '단식'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누가 누구의 주인인가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종이 아무리 하기 싫어해도 주인의 명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우리 육의 주인은 영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육신을 따라가면 그것은 상하가 뒤바뀐 꼴이 되고 결국 비참한 모습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우리의 육신을 보살피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육신의 지배를 받고 육신을 따라가기 시작한다면 그 꼴은 무척이나 비참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옆길로 새도록 하겠습니다. 소위 '다이어트'를 한다고 육신의 고행을 참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대상에 영을 맡기는 꼴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외모를 꾸미려는 마음, 다른 이에게 못나 보이고 싶지 않다는 허영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식이요법이 건강을 해치는 정도의 비만자들에게 '치료법'으로 주어지지 않는 이상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바라보는 '다이어트'는 자신의 영혼의 빈약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인 셈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주종관계를 새롭게 하는 이 단식, 하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나아가 단식을 하는 행위는 '자선'과 연계되

말씀을 전하는 이의 사명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의 역할이 여러분들을 돌이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가 하는 역할은 속내에 숨긴 것을 더욱 명백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검은 것은 더욱 명백히 검게 드러나고 흰 것은 더욱 명백히 흰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흰 것을 더 희게 만들고 색깔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백제와 같다고나 할까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 외에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야 6장 8-10절)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신 이 말씀을 저는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고 하신 걸까 하고 한동안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감이 옵니다, 결국 마음을 돌이키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설교자의 사명은 다만 그들의 본심을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죽어도 사탕을 먹겠노라고 고집하는 아이, 자기 동생의 사탕마저 반드시 빼앗아 먹겠다고 하는 아이를 힘으로 애써 눌러 보았자 그 마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다음에는 반드시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오십이 되는 육십이 되든 돈욕심을 내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탐욕이 그를 집어삼키고 말지요. 설교자는 다만 그 앞에서 그가 하는 일을 명백히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똥이 더러운 줄 알면

악마의 유혹

사순1주 주일 오늘은 악마의 유혹을 잘 살펴봅시다. 1단계 빵 - 재물 먼저는 빵이 등장합니다. 빵은 우리의 현세 생명을 상징하고 소위 말하는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것들을 대표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먹고 사는 일을 우선시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신앙을 내던지기 일쑤입니다. 학업 전선과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신앙은 그저 인생의 양념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네, 현세를 자신의 전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시간이 남아돌 때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가한 주제로 다가올 뿐입니다. 당장 먹고 살 고민이 눈앞에 있는데 '신앙' 따위를 고민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은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위해서라면 양심을 속이는 일은 심심찮게 행합니다. 몇 푼 더 벌 수 있다면 거짓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해집시다. 과연 우리는 없을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충분히 잘 살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굶어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성실히 일하는 이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십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더 벌려는 이유는 우리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위기를 넘깁니다. 2단계 세계의 모든 나라 - 권력과 명예 빵보다 더 강한 유혹이 있으니 그것은 권력과 명예입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 그들에게서 얻어지는 찬사와 명예는 당장의 빵을 먹지 않고서라도 한 인간이 추구하게 되는 더욱 강력한 차원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힘 있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서 기를 쓰는 사람들, '높은 분'이라는 칭송을 받고 그들을 조종하는 위치에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재의 수요일 후 목요일 세상을 통해서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주로 쓰는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드러내기"이다. 이 종류는 참으로 다양한데,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남편, 내가 가진 자식들, 내가 가진 명예, 내가 가진 특정 상품, 내가 가진 학벌, 내가 가진 지식, 내가 가진 취미, 내가 가진 재능… 뭐 손으로 꼽자면 수도 없이 나올 수도 있다. 이들은 이러한 것들이 나 자신을 규정하는 듯이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안달을 한다. 이든 저든 대상화하고 객관화해서 '나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이 대상에 들어간다. 심지어는 이런 것도 있다. 내가 바치는 기도, 내가 드리는 정성, 내가 가진 덕목, 내가 지닌 열성, 내가 지닌 신심, 내가 지닌 체험… 이 또한 앞서의 것들의 업그레이드판일 뿐, 결국은 똑같은 이야기이다. 나 자신은 '내가 가진' 시리즈 중의 하나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은 나 자신일 뿐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고유한 모습 그대로의 나 자신이 바로 나이다. 그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가진 소유물'로 더 꾸미거나 더 천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라는 그 자체로 하느님 앞에 소중할 뿐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나'를 '내가 가진 것'으로 꾸며 보려고 기를 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3-25) 자신을 버리라는 말,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우리가 소유하려는 나 자신에게 부속된 모든 것을 버리고

내 마음 분별하기

자, 누가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구. "자, 우리는 좀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형제들의 요구를 잘 수용하는 거룩한 이들이 됩시다." 이 말을 같은 그룹 안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들으면서 나의 마음이 은근히 아려오기 시작한다면, 그건 두 가지 경우일 수 있어. 첫째는 그 형제가 하는 말에 따라서 살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이미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에게 오른쪽으로 가야한다는 말은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든. 누가 오른쪽으로 가자 할 때에 그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왼쪽으로 가던지, 왼쪽으로 가려하기 때문이야. 다른 하나의 경우로는 이든 저든 그 형제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인데, 그건 그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 설령 그 형제가 하는 말대로 살지 않더라도 그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이미 우리 마음 안에서 그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까닭이야. 이는 또 정반대의 사실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데, 바로 형제들을 어둠의 길로 초대하는 사람들에 관해서야. 불의한 길을 함께 걷자고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그들의 의견에 찬동하는 것이 그들과 나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지. 그럴 경우에는 반대하는 것이 옳지만, 그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잘 선택을 해야 해. 그저 상대가 틀렸다고 역정을 내고 짜증을 부리면 그런 '방법' 자체의 그릇됨으로 우리는 '사랑'에 역행하는 셈이니까. 이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을거야. 형제가 하는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서 내 마음을 살펴보라구.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려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내가 옳은 말에 대해서 반발심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재의 수요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위 '거룩한' 이들은  실제로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룩함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직 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누군가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누군가는 오랜 시간 성당에 앉아 있다고, 누군가는 성경을 필사하고, 또 누군가는 평일미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오직 하느님이 지니고 계신 것이고, 따라서 진정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이들입니다. 높은 권좌에 앉아서 아래를 다스리는 사람보다는 산골에서 밭을 매는 할머니가 더 거룩할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 한 사람은 진정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고유한 거룩함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서 '거룩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행하는 이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실은 하느님이 선물하는 거룩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의 칭송이 더 듣고 싶은 부류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함을 숨기고 오직 하느님 앞에 찬양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6) 

남 이야기

살아오면서 '남 이야기'를 하고 또 듣게 된다. '누구는 이렇다더라 누구는 저렇다더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쉽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 이런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직접 당사자에게 들어본 결과 전혀 다른 내용을 알고 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 이야기'를 즐겨 한다. 특히나 한국의 가톨릭 안에서 이 '남 이야기'는 참으로 맛깔스러운 이유가 '성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제나 수도자의 환속 소식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교회 내의 소식에 우리는 짐짓 점잖은 척 행동하며 최대한 귀를 기울인다. 소위 열심하다는 신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일반이다. 이들은 사실상 교회 내의 모든 소문의 진원지나 다름이 없다. 이들은 가까이 지내는 사제와 수도자의 구미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들의 환심을 산 뒤에 그들이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인 다음 2차 정보를 양산해낸다. 객관적인 진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자신의 작은 주석만 붙여주면 제3자를 속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제나 수도자분들은 자신의 근처에 다가오는 양의 탈을 한 이리와 같은 이런 이들을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 식사 초대를 하거나 선물을 보내오면서 자리를 만들어 뜬금없이 이런 저런 일들을 물어오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남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정당한 직분을 지닌 사람이 그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 고로 주임 사제나 주교님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어쩔 수 없이 '남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듣게 된다. 하지만 경험해 본 분들은 알리라. 이런 자리의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를 듣되 최대한 분별있게 들어야 한다. 가능하면 양측 모두의 이야기를 다 듣도록 노력하고 그게 아니면 아예 머릿 속에 그 자리를 만들어 두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전통

연중5주 화요일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전통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인간의 전통은 언젠가는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의 가장 근본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 하느님의 법의 근간입니다. 인간의 전통은 하느님의 이러한 뜻을 잘 이루어내기 위해서 그때의 상황과 문화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차를 쓰던 시절에는 마차를 수리하는 방법이 필요했고,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동차를 수리하는 방법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차를 쓰는 시대에 생기지도 않은 자동차를 수리하는 방법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자동차가 나온 시대에 있지도 않은 마차를 수리하는 방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고장나면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인간들이 만든 전통을 꼼꼼하게 챙기느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에 관해서 점점 잊어가는 느낌입니다. 무언가를 이루는 방법에 치중해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근본 이유를 잊어버리는 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전통을 지키려는 많은 이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학교 시절 '대침묵'이라는 규정이 있었고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 신학생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위해서  또한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 시간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지키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을 얼마만한 증오와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릅니다. 이는 명백히 하느님의 법인 '사랑'을 어기는 행위였음에도, 정작 나 자신은 대침묵을 잘 지킨다는 생각 속에서 오직 다른 친구들을 비난하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상태였는지요. 하지만 나는 그 당시 그걸 깨달을 능력이 없었고, 한동안 그런 마음을 지니

율법에서의 자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는 엄연한 현실이며 다만 오늘날에는 그 명칭과 유형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기본 '법', '규정', '법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오늘날의 '율법'은 새로운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먼저 '법', '법칙'이라는 것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법은 왜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착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바로 후자입니다. 법은 의롭지 못한 이들을 '규제'하기 위해서 나타났고 나아가서 의로운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점은 '불의한 이들' 때문이니 그들이 사라지는 날에는 '법'도 그 운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법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산다고 그 사람이 자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법은 다만 그의 죄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명백한 죄인인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한 사람을 진정 의롭게 만드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법 위에 존재하며 단순히 죄를 드러내는 법을 넘어서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합니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도착해서 교사피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가르치고 성사와 미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난 뒤에 교사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에 다리를 꼬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체가 뭔지도 모르고 와서 받아먹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