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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3의 게시물 표시

부활과 죽음

부활에 대한 희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상응한다. 즉 부활을 더 크게 희망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드는 셈이다. 결국 '죽음'이란 우리에게 있어 좋은 척도가 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곱씹어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 막연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현세의 모든 일을 허겁지겁 처리해 나간다. 하지만 이미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무덤덤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먼저 모범을 보인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 걸어간 오솔길을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 앞에서 코웃음을 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우리의 온 존재를 들어높일 때가 다가올 것이다.

오늘도 한 걸음...

가만히 앉아서 내가 만나게 될 신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본당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 들, 결국 마지막 선택은 각자에게 달린 셈이다. 사제는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줄 뿐이다. 하지만 결국 내 모든 일은 마치 '실패'처럼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재물을 탐하고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리라. 하지만 하느님만이 아시는 때가 되면 내가 심어놓은 씨앗들이 싹이 터서 그들 마음 안에 뿌리 내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보다 참된 길을 찾아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리라.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크게 슬퍼할 일도, 또 크게 기뻐할 일도 없는 셈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이고 그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경쓸 수 있는 보다 본질적인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보이다.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끊어 버려야 하고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할 수 있고 실천해 나갈 수 있다.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한다. 사제는 더 사제 다워야 하고, 수도자는 더 수도자 다워야 하며,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성화'를 찾아야 한다. 육체의 고난은 쉬이 지나가 버리고 보다 신경써야 할 것은 마음의 진정한 평화이다. 폭풍우 속에서도 곤히 잠들어 계시는 주님의 마음처럼 우리 역시도 일상사의 온갖 풍파 중에서도 잠들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지긋지긋한 벗인 육신의 요구들을 어느 정도 끊었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하느님의 시련이, 그리고는 악마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 걸음마를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할 공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 스스로 훌러내려가는 셈이니 말이다. 오늘 또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나는 걸어가야 한다. 언제나 내 목표를 뚜렷이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걸어야 한다. 비록 다리가 성하지

잘 산다는 것

"잘 산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오늘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잘 산다는 건 뭘까요? 한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뭔가를 이루면 잘 사는 걸까요? 하지만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그의 위업인걸요. 잘 산다는 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요. 아예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런지. 뭔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지. 세우고 쌓아봐야 부질없는 짓이니 오히려 반대로 그런 쓸데없는 욕구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든 저든 모종의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면 되는 것인지… 만일에 교회 안에서 그 답을 찾자면 이런 말을 들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뭔가 뚜렷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지요.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누군가는 십자군 전쟁을 치른걸요. 이 질문의 답은  아마 평생을 두고 찾아야 하는 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고 어느새 살아갈 나날보다 살아버린 나날이 많아지게 되면 슬슬 내려놓는 것들이 많아지겠지요. 어쩌면 지금부터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구요. 이런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그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으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 하나가 내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육신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니, 우리의 모든 활동은 '허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테지요. 그래서 '허무'해 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할 듯 싶은데,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 그 실마리를 쥐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제자들이,

영적 무감각

방금 일어난 일... 부활 주일을 마감하면서 볼리비아에 사는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고기 파티를 하고 있었다. "쾅쾅쾅!!!"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십니까?" 밖으로 나가보니 차가 한 대 있고, 그 안에 한 소녀가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신부님, 축복 좀 해주세요. 얘가 마귀를 봤데요." "네? 무슨 말이죠?" "얘가 자기 방에서 놀래서는 마귀를 봤다고 하면서 미친듯이 놀래는 거예요." 감이 왔다. 애는 정말 마귀를 본 셈이고,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성수를 들고와서 영대를 걸치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잘 들으세요. 어둠의 영은 그냥 다가오지 않아요. 분명 가족들 가운데 어둠의 영을 불러들인 사람이 있을 거예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낙태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저는 여러분들을 모르지만 분명히 가족 구성원 안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신부님, 이 애가 자는 방도 좀 축복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허... 참..." 결국 따라 나섰다. 고기 파티 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트럭을 몰고 그 차를 따라서 그 집으로 갔다. 그리고 먼저 방을 축복했다. 그리고 돌아와 그 소녀에게 설명을 했다. "얘야, 잘 들어, 나는 가톨릭 사제이고 요셉 신부라고 해. 방금 전에 네 방을 축복했어.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네 방으로 가자꾸나." 그리고는 여전히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그리고 방 안에 아이를 앉혀두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잘 봐. 신부님이 네가 보는 앞에서 다시 방을 축복할께. 네가 꼭 봐야해." 그러면서 방을 축복했다. 아이는 두려움에 떨다가 방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말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다시 말씀 드릴께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