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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의 게시물 표시

간직하고 되새기기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준비되지 않은 말은 미숙한 요리와 같습니다. 뜸을 들이지 않은 밥은 서걱서걱 씹히게 되지요. 요리는 제대로 해서 먹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상황들은 우리가 잘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덜 익은 쌀처럼 됩니다. 많은 이가 이런 행동을 곧잘 합니다. 주변의 상황에 즉각 반응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속도’와 ‘효율성’이 중요시되는 오늘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늦게 반응하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고 대화의 자리에서 언제나 먼저 조금이라도 더 말하려고 난리가 납니다. 결국 그러한 설익은 생각과 말들이 서로 나와서 부딪히다보면 결국 마음도 상하고 원래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고, 결국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냥 떠들어대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성모님의 덕목은 ‘간직함과 되새김’입니다. 성모님은 잘 간직할 줄 아셨고, 나아가 그것을 되새길 줄도 아셨습니다. 성모님의 그 덕목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지요.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많은 자리에서 간직하고 되새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상대의 어두움마저도 내 안의 성찰을 거쳐서 타산지석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려주는 분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보여주면 보아야 하는데 보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한다지만 그가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는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눈 앞의 알콜이 너무나 향긋하고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그를 걱정하는 사랑과 애정 따위는 그 알콜의 향긋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누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알콜에게서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라는 것은 그닥 좋은 모양새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은 그래서 늘 ‘새로운 계명’, 한 번도 포장지를 뜯지 않은 계명으로 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주 보이기 쉽게 드러내셨고, 우리 가운데 직접 사셨으며 우리처럼 말씀하시고 밥을 먹고 걸어 다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그분을 못박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같은 말을 하시고 계시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런 예수님은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저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원하지, 지금의 예수님처럼 늘 우리를 조금은 불편하게 해서 우리가 각성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예수님은 성가시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때문에, 대학 때문에, 직장 때문에 바쁜 가운데 예수님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

그리스도의 적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하면 그리스도가 탄생한 듯이 어느 부유한 집안의 못된 아기가 태어나서 사탄 그 자체가 되어 그리스도에 맞서는 무슨 판타지 소설 같은 것을 연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것은 그런 영화 속의 이미지 같은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은 그리스도가 이루시려는 것에 맞서는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셨을까요? 여러가지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고, 사랑을 이루려고 하셨고,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되고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고 행복해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적은 이 모든 것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유다 사도가 예수님 앞에 물은 것처럼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전 안에 머물러 있다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사 생활을 꼬박꼬박 챙겨 한다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찾아오는 이유를 알아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사 생활을 한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 즉 신앙을 실제로 사는 이들이 되어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그리스도의 뜻을 어긋나기까지 나의 뜻을 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더러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걸 흉내내라고 단식이나 몇 번 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이 있을 때에 가난한 이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의 단식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하면서 그보다 더 소중한 자선과 사랑의 행업은 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교회 내에서 성인 행새를 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존재하니 사

아기의 영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2,40) 아이는 혼자 크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웁니다. 부모가 없으면 밥도 혼자 먹지 못하고, 옷도 혼자 챙겨입지 못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여러 정보들도 부모를 통해 얻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학교에 갑니다. 그래서 정신이 큽니다. 여러가지 사회에서 필요한 기초적인 정보를 학습하고 지식을 넓혀 나갑니다. 기본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나면 부모는 자식을 다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키운 건 맞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영’입니다. 부모의 책임 가운데에는 그의 육신이 존재하고 그의 정신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영도 부모의 책임에 속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의 영이 자라도록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실패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대로 실패를 하고, 부유한 이들은 부유한 대로 실패를 합니다. 세상에서는 ‘인성’이라는 표현을 곧잘 씁니다. 내면의 인간적 성숙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지혜’와 ‘하느님의 총애’가 그 역할을 하는 부분이지요. 부모는 아이의 영을 키워내어야 합니다. 그 영이 ‘사랑, 진실, 정의, 관용, 용서, 인내’와 같은 것에 익숙해지도록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버려 둔다든지,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지나치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기만 하면서 결국 아이의 영을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는 그 공허감을 엉뚱한 데에서 채우려고 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는 세상이 모두 자기 발 밑에 있는 줄로만 착각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전자의 문제가 많고, 좀 사는 나라에서는 후자의 문제가 많습니다. 물론 양자가 늘 함께 존재하지요. 세상에 그 어느 부모도 완벽한

예약 주문

이번 휴가를 갔다오고 나면 이제 마지막 여행만이 남겠군요. 바로 복귀입니다. 그때면 제가 가진 것을 처분하고 가야겠지요. 사실 벌써부터 예약 주문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신부님, 지금 입고 계시는 옷 그거 나중에 한국 가실때 저 주세요. - 아! 그거 내가 부탁하려고 한건데!!! 그럼 입고 계시는 바지 저 주세요. 며칠 전 교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직 한참을 더 같이 살아야 할 사람에게서 저들 받을 옷 예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사는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좀 섭섭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것이 아직 탐이 나는 것이 많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주고 가야지요.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데 기꺼이 주고 갈 생각입니다. 아예 지금 달라는 대로 줘버릴까 생각도 합니다. 옷가지야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니까요.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떠날 인생입니다. 그러니 가진 동안 잘 보살피고 쓰다가 떠날 날이면 미련 없이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하느님은 이미 당신의 영혼을 예약 주문 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훗날 하느님에게 돌려드릴 영혼을 함부로 다루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의전행사

중요한 분이 오는 중요한 날에는 늘 의례히 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의전행사라고 하지요. 정말 열심히들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 소위 ‘중요한 분’은 그런 행사를 준비하는 민초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보이기만 할 뿐입니다. 의전행사는 준비하지 않으면 경을 치는 것이고 준비한다고 해서 별다른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늘 하던 것이라 할 뿐이지요. 상대의 존엄함에 맞게 격식을 갖춘다는 생각은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지만, 과연 그 격식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지만 그 영광 안에는 실속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껍데기 영광일 뿐이지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속으로는 그를 증오하고 있는데 겉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된 영광은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 드려야 하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제자들은 너무나도 겸손해서 그들은 물 한 잔에도 감동할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만든 격식, 의전행사는 실은 세상의 우둔한 권력들에게 바치는 찬송가에 불과한 셈이지요. 다정한 미소와 따스한 차 한 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의 진정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력에 속한 이들에게 이런 종류의 영광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는 셈입니다. 무슨 중요한 날이 되어 행사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방문하는 이 중요한 사람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가 아닌가를 말이지요. 만일 마음 속에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없다면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그가 화를 낼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허망하고 의미없는 짓도 참으로 드물 것입니다.

그 시절의 유혹거리들

어린 시절 누군가가 정말 멋진 장난감을 들고 오면 어린이였던 우리들은 한 번 만져보고 싶은 그 유혹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고 백화점에 가서 멋진 장난감을 만나더라도 어린 시절처럼 격한 유혹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어른의 시절에는 어른의 유혹거리가 있게 마련이지요. 이 깨달음을 올바로 거쳐낸 사람은 ‘유혹’의 특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셈이고 세상의 유혹에 맞서서 보다 더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종류의 것들에서 무방비 상태로 유혹에 걸려들지는 않는 셈입니다. 물론 그 수준에 이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대상에 이미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인기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권력의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 것을 내적으로 거부하고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겨버리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꾸준히 마음공부에 힘을 쓴다면, 그 정도가 갈수록 덜해지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아이적의 것들을 극복하듯이 스스로 성장해 있는 자신을 알게 되지요.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

미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의 반대말일 것입니다.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미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코린토 전서 13장을 모두 뒤집으면 미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최고는 악한 의도라고 할 수 있지요. 상대가 저주받기를 원하는 악한 마음... 하지만 그는 모릅니다. 바로 그 미움이 자신을 저주받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미움은 그 자체로 영적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하지요. 마치 장님이 멍청하기까지 한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어느 탁자 모서리에 부딪히고는 아파하면서도 또다시 같은 자리에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부딪히는 모습입니다. 감정적으로 순간 일어나는 반감과 의지가 더해진 미움은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반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정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지요. 미움을 갖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십시오. 나에게 반하는 모든 상황에서 역으로 인내와 사랑을 이끌어내시길 바랍니다.

엉뚱한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엉뚱합니다. 심지어는 신자들에게마저도 엉뚱한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제단에 인사를 드려야 하는가, 감실에 인사를 드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하느님께 온 마음으로 인사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핵심은 잊고 다음과 같이 말하겠지요. ‘그건 이미 압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온 마음으로 인사 드리려면 어디에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 사람과 논쟁하고 있었습니다!’라면서 대놓고 자신의 짜증을 드러낼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하느님에게 온 마음으로 인사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일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느님의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오늘입니다.

마음속 생각

(이미지 출처; 인터넷)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5)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내는 삶과 속으로 지닌 생각이 있습니다. 헌데 때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리지 않기도 합니다. 속으로는 전혀 특정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전혀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도 하지요.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속으로 어둠을 품고 있으면서 반대로 겉으로는 거룩한 척을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실제로 속으로는 세상의 온갖 추악함을 다 품고 다니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을 하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즉, 속으로는 엄청난 보화를 지니고 다니면서 겉으로는 그것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경우이지요. 이들은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들이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외견에 열광합니다. 혹시 어느 배우가 드라마에서 엄청 선한 이미지로 나오면 곧잘 그걸 믿어버리고, 그리고나서 나중에 그 배우의 실제 삶에서 전혀 엉뚱한 모습이 나타나면 실망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선한 이미지를 연기한 것 뿐입니다. 사실 거룩한 척, 선한 척을 하는 연기를 금세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주의깊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의 진솔함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 안에 품고 있던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마음이 아프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허망하고 악한 삶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삶과 모범을 본받아 변화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쪼록 모두들 현명한 결정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꿰찔림

성모님에 대한 성화 가운에데서 성모님의 거룩한 심장을 드러내는 성화가 있습니다. 그 성화에서 성모님의 심장은 아주 심하게 칼에 꿰뚫려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요. 성모님은 7가지의 고통을 지니셨던 분입니다. 물론 그 고통은 당신 자신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당신 아들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것이었지요. 1) 시메온의 아픔을 예견한 예언 2) 이집트 피난 3) 축제에서 예수님을 잃음 4) 십자가를 진 예수님과의 만남 5) 예수님의 죽음 6) 시신을 내림 7) 무덤에 안장 사실 이 일곱개의 숫자는 교회가 거룩한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모은 것이고 실제로 성모님의 고통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불의하고 불경건한 세상과 맞서서 남편을 섬기고 아이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간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정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말하지 않습니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침묵하지요.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나서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두신 분이시지요. 어제 한 교리교사가 찾아왔습니다. 요즘 제 영적지도를 받는 교리교사인데 집안에 부모님이 곧잘 다투신다는 것입니다. 헌데 그동안 저에게 잘 배운 이 교사에게는 벌써 그들의 미숙한 마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다투는 이유가 뭔지,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미 알고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말야. 그러니 우리가 가는 길에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법이야. 그리고 알면서도 표현하기를 삼가하는 것도 배울 필요가 있어. 네가 비록 나에게서 배워서 너의 부모님들의 미숙한 모습이 눈에 보일지라도 함부로 가르치려고 들지 않도록 해. 다만 네 자리에서 잠잠히 머물면서 끊임없이 빛을 비춰주기를 바래. 그런 사람들은 가르치면 도리어 화를 내거든. 그러니 그들이 언젠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자각하는 날,

가진 것을 꺼내기 마련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 창고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왜 저는 자꾸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유는 이미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돈 생각만 하는 사람은 돈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자존심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은 늘 자존심 걱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타인의 작은 말마디가 민감하게 작용하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으면서 정작 스스로는 ‘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툭하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스스로가 엄청 논리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화를 조장하는 그 자체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논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말없이 일하고, 묵묵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석과 같은 사람이지요. 그들은 걸음걸음마다 평화와 일치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입니다. 행사가 끝나고 저마다 자신이 행한 위대한 일을 드러내는 데에 여념이 없는 반면, 구석에서 묵묵히 설겆이를 위해서 팔을 걷어 부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하지 않으며 자신이 필요한 곳에 머무는 이들입니다. 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주변에 불화를 조장하는 이의 내면은 얼마나 어지러울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그들은 자신이 바라보고 듣는 거의 모든 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계시의 빛이자 영광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2) 계시의 빛이라는 것은 전에는 몰랐던 것을 드러내는 빛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민족들에게는 전에 몰랐던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핵심 가르침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 준비를 갖추고 계시다는 것, 누구나 거기에 응답하면 그 상급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주된 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백성인 이들에게는 ‘영광’이 되십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더욱 찬란히 빛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은 이미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 빛이 더욱 찬란히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타깝게도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작용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 1,23) 영광이 되어야 할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 되어 버리고, 계시의 빛이 되어야 할 다른 민족들에게 예수님은 어리석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합심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조롱했고 박해했고 심지어는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이 두 가지의 방향이 그리스도인들 앞에 상존할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돌아오셔서 모든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때에 복음을 조롱하던 자들은 말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지혜

최고급 고층 아파트에 사는 순이 엄마가 철수엄마에게 놀러 왔습니다. 루이비X의 핸드백과 더불어 손에는 봉지 하나가 들려 있습니다. - 철수 엄마, 이거 봐봐. - 아유~ 이게 뭐예요? 앵두네? - 그래, 요 앞 아파트 앞에서 꾀죄죄한 할머니가 파는건데, 내가 아주 싸게 사 왔지. - 그래요? 얼마에 샀는데요. - 한 봉지에 이천원 하길래, 천 오백원으로 하자고 하고 사오면서는 덤이라고 아예 한주먹을 더 쥐어왔지 뭐야. 오호호호호. 세상은 이러한 아주머니를 ‘영리하다’, ‘똑똑하다’고 표현합니다.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이득을 착복했기 때문에 이 아주머니는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번에는 진우 엄마를 살펴봅시다. (동일 이름의 특정 인물과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ㅋ) - 할머니, 이거 얼마에요? - 한 봉다리에 이천원이여. 우리집 뒷뜰에서 딴 거라 약도 안친거여. 사갈껴? 진우 엄마는 사천원을 다소곳이 내밉니다. 앵두를 파는 할머니의 입에 미소가 번집니다. 그렇게 두 봉지를 사 와서는 이쁘게 씻어서 냉장고에 하나를 넣고 다른 한 봉지를 들고는 이웃에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갑니다. - 할머니 이거 드세요. - 아이고 이게 왠 앵두여? - 요 앞 길에 어느 할머니가 파시는 거예요. 약도 안쳐서 아주 깨끗하데요. 맛 좀 보시라구요. - 아이구, 우리 진우 엄마 덕에 내가 이런 호강을 다 하는구먼. 고마우이. - 뭘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세상은 이런 아주머니를 ‘속없다’, ‘우둔하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뭐든 다 정직하게 사면 도대체 뭐가 남느냐며 빈정댈 것입니다. 거기에다 자기 자식들 먹일 것도 아닌 걸 왜 사고, 또 남의 집에는 뜬금없이 왜 찾아 가느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어리석어 보이는 지혜가 세상의 영리함, 똑똑함보다 수천배 수만배 더 낫다는 것은 훗날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루어지게 될 것

오늘 멀리 시골 본당에서 성탄을 마치고 쉬러 온 후배 신부님과 아침 일찍 세차를 맡기러 갔습니다. 차를 맡기고 돌아오면서 후배 신부님이 이런 저런 선교지의 어려움들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 결국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마련이야. 그런 가운데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심지어는 악한 이들을 통해서마저도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건, 무슨 일을 하건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뿐이야.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 하느님의 뜻을 돕는 쪽에 속하느냐, 아니면 반대로 하느님에게 맞서는 쪽에 속하느냐 하는 것이겠지. 그렇네요. 일리 있네요. 형. 그렇습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요. 그분의 오묘한 섭리는 자신의 때를 기다려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이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거대한 품 속의 자녀들이지요. 물론 우리가 뜻을 함께 할 때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에게 맞서기 시작한다면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필요한 일을 하시겠지만,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기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모두 저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누구 지각있는 이가 있어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달리기

우리는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늘 ‘베드로와 요한’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복음을 주의깊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아닙니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때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입니다. 복음사가는 요한의 자리에 우리 모든 신앙인을,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신앙인을 놓고 싶었던 겁니다. 즉, 우리가 직접 그 장면 안으로 뛰어들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제자가 달려갑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아무래도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더 젊고 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바위라고 불린 교회의 반석입니다. 교회의 ‘기초, 규율, 근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좀 무겁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는 아주 날랩니다. 그 제자는 ‘사랑’을 상징하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랑’이 늘 먼저 도착합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든지 그 자리에는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인은 교회가 분석해서 정의한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을 교회가 뒤늦게 성인으로 선포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셈입니다. 먼저는 사랑이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교회에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와서 보고 확인하고 그 뒤에 다시 사랑이 들어와서 그 확인된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모든 신심 단체는 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위의 과정 없이 제멋대로 설치는 이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사랑만 가득하다고 만사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들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분명한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하느

바오로 사도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 7,57)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완벽한 상태에서 뽑으신 게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저마다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울이라는 청년은 조건으로만 따지만 가장 완벽한 상태였지요. 하지만 그 완벽함이 그에게는 ‘우쭐거림’으로 작용했고 자신이 신봉하는 유대교를 열정적으로 따르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에게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했고 선택하게 했지요. 그리고 그의 열정, 자신의 본래의 종교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눈을 뜨고 나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만큼 열정적인 사도를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로 인해서 우리 모든 이방인들이 복음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바오로의 이전 이름인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청년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줄 몰랐지요. 지금도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은 ‘부당함’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나아가 거기에 동조하기까지 하지요. 하느님은 그의 영혼의 열정을 보셨고 그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 고뇌해야 했고 결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스스로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버린 ‘수인’이 되어 버렸지요.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사실 선택의 여지는 크게 없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자유의지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하느님은 그의 동의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고 그날부터 이전의 열정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열정’으로 일하지만, 때로는 ‘장님’ 상태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자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사도 6,10) 우리의 말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 야, 오늘 영화보러 가자. 이 간단한 말에는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셈입니다. 다른 여러가지 활동들이 있음에도 그것보다는 영화보기를 선호한다는 의도도 들어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한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가 가진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성령을 지닌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혜와 성령을 지닌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말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굉장히 신중해집니다. 아니 거의 입을 다무는 것이 사실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별달리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는 진리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계략도 ‘진리’ 앞에서는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꾸미는 자들, 음흉한 사람들, 거짓말쟁이들은 진리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잃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진리 안에서 사는 자들을 더욱 증오합니다. 자신들의 어두운 마음이 들킬까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지혜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자신이 지닌 지혜와 성령으로 이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들은 자신의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다른 이에게 전해질 때에 자신의 것도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역겨워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묻혀 지내길 바라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중독 상태에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빛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속이면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순교

순교자는 죽음을 당한 날이 그 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순교하는 그 날 하늘 나라에서 새로이 탄생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스테파노 순교자가 몇 월 며칠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성탄이 지나고 그의 하늘나라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기념합니다. 순교라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적지 않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튼튼한 뿌리가 바로 ‘순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단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죽음을 당해 왔고, 바로 그러한 순교의 터전에서 한국 교회가 성장한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생각 속에는 이제는 ‘순교’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박해의 시대는 지나갔고 누구나 원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순교는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순교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순교는 ‘신앙’때문에 자신의 세상에서의 여러가지 이득을 상실할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의 자신이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순교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순교의 형태는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지만 죽음은 그 순교의 최종 결과물이고 실제의 순교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신앙’은 공격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 신앙을 지닌 자들은 엉뚱하고 자신들의 죄스런 의견에 반기를 들며, 그들의 죄스런 자리에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거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앙인을 향해서 반감을 품고 있지요. 결국 참된 신앙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 증오와 악의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하다못해 첫영성체를 가서 식사 전 기도를 배워 온 아이가 집에서 게으른 아빠에게 밥 먹기 전에 함께 기도를 하자고 하면 그 아빠가 벌컥 성질을 내는 것에서부터 이미 ‘순교’는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을

어제 미사 강론때에는 복음을 읽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들 서로 얼굴들이 보이시지요? 빛이 가득하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불을 한 번 꺼 볼까요? 그리고는 성당 안의 불을 모조리 다 꺼버렸습니다. - 자, 이제 뭐가 보이세요. 이 제단의 촛불이 보이시나요? (네에~) 그렇지요. 모든 불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제단의 불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참된 빛은 모든 허황된 빛들이 사라지고 나면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예요. 세상에는 헛된 빛들이 많아요. 부와 권력, 명예와 미모, 성적 유혹과 같은 수많은 것들이 스스로를 빛으로 가장하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진정한 빛을 찾지 못하게 하지요. 그러는 동안 진정한 빛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사로잡혀 진정한 빛을 알아 차리지도 못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모든 불이 꺼질 날이 다가올 거예요. 세상의 빛은 그 특성상 ‘영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든요. 권력도 언젠가는 내려 놓아야 하고, 명예도 그렇고, 돈도 마찬가지이지요. 미모도 점점 사라져가고 몸의 힘도 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죽음’으로 한 사람에게 그 모든 빛들은 사라져버리고 말지요. 그럼 그 때에 과연 우리는 무슨 빛을 지니고 있을까요? 헛된 빛만을 쫓아다니던 사람이 그제서야 참된 빛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그건 마치 소리와 빛이 다른 것과 같아요. 즉 세상의 것들만 찾아온 사람은 눈으로만 물건을 식별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진리를 찾는 사람은 소리로만 사물들을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것만 쫓다가 눈을 상실한 사람이 그제서야 청력을 연습해서 미세한 소리를 듣기는 힘든 것과 같지요. 하느님의 빛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요.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진리의 빛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세상의 유혹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들이 발견한 빛을 놓치지 않아요. 그리고 꿋꿋하게 끝

악을 조장하는 자

악을 조장하는 자는 자신의 머리 위에다가 종이를 태우는 자와 같습니다. 종이가 타면 그 불꽃과 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앉게 되겠지요. 남에게 해꼬지를 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물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볼리비아에는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아직도 수두룩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대화’를 기피하기 때문이지요. 대화를 하려면 많은 인내와 겸손, 자신을 극기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손쉬운 방법으로 ‘구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내를 때리고 나면 그 순간은 아내가 잠잠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불신’이지요. 함께 살아야 하는 남자에 대한 크나큰 불신이 뿌리깊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있다면 더 최악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에게 일어나는 것을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듯이 받아들입니다. 저는 사목적인 체험 안에서 어린 시절의 부모의 불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선을 행하기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우리는 서로 보듬고 아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선행들이 나의 머리에 화관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찬란히 빛나게 될 것이고 우리의 화관에서는 끊임없는 향기가 솟아나올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악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대화하면서 알게되는 것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진실성에 대해서 말이지요.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가장할 수는 있지만 뼛속까지 숨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빛을 가장한 어둠들이 있고, 드러나지 않는 빛이 있습니다. 어둠이 자기 스스로를 광고해서 빛으로 만들어 놓는 것과는 반대로 빛은 은은하게 자기를 내비치어 사람들이 절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빛이 비치도록 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첫인상은 정말 좋아 보였는데 대화하는 가운데 갈수록 피곤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뭔가 좋은 점을 늘어놓는데 처음에는 호기심에라도 들어줄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침묵을 가장한 겸손과 고집도 있습니다. 의견을 말해야 할 때에는 말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스스로 지혜로운 척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피해를 감수하고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저 잠잠히 머무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그 이야기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결국 자기 중심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 중심인 사람은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지혜로이 이용하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이 참으로 드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별다른 소득 없이 자신들이 아는 정보를 나열하다가 끝나버리고 말지요. 인간관계는 갈수록 피상적이 되어가고 만남 그 자체가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반미사 강론

어제 반미사에 가서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절더러 마시라며 컵에 콜라를 채워서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 여러분 이 컵이 보이지요? 이 컵에 콜라를 담아 대접하려는데 여러분은 정말 더러운 컵을 쓸 건가요? 아니지요? 먼저는 컵을 잘 씻어내야 콜라를 담아서 대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과연 어디로 오실까요? 잘 꾸며진 구유를 통해서 오실까요? 아니지요. 저건 그냥 성탄 분위기 내려고 꾸며 놓은 것이지요. 아기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내려오세요. 헌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면 그분을 모실 수 있을까요? 주교님이 집에 찾아오시는데 여러분들 집을 아주 더러운 모양새 그대로 남겨두실 건가요? 아니지요. 분명히 치울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술에 쩔어 있는 마음, 아내를 때리는 마음, 아이들을 울리는 마음(대표적인 우리동네 3단 콤보 악행… 알콜중독, 가정폭력, 아동학대)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마음에 오실 수가 없어요. 자,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세요. 빛을 향해서 나아가셔야 해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미 우리들의 마음은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굳어져 버린걸요.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영혼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다니고 어른들은 하느님이 없는 삶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요. 그들의 눈에는 ‘돈’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앞에 두고는 부끄러움이 없어 보여요. 그러니 어린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배우기는커녕 돈의 가치를 먼저 배우고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날 때 새하얀 백짓장으로 이 세상에 와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얼마든지 새로운 것들을 적어 넣을 수 있어요. 헌데 과연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적어주고 있을까요? 단순히 아이를 첫영성체반에 보낸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걸까요? 성당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배운 아이가 집에 와 보면 부모들이 맨날

이번 성탄에는...

이번 성탄에는… 이번 성탄에는 마음들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아끼고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고 경찰들은 시민을 보호하고 사제는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수도자는 하느님을 위해 헌신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보살필고 자녀들은 부모를 섬기는 그런 성탄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챙겨주는 그런 성탄절 아기 예수님의 탄생 앞에 가난한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고개를 숙였듯이 이번 성탄에는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서 낮은 자를 섬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원래대로 돌아갈 때에 그때에야 성탄은 비로소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축복 가득한 성탄을 기원합니다. - 마진우 요셉 신부

좋아서 짓는 죄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죄가 좋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펄쩍 뛰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사실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봅시다. 왜 거짓말을 할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참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참말을 하면 두드려 맞던지, 손해를 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즉, 거짓말을 통해서 나 자신에게 더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남편은 왜 그럴까요? 그는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성적 유혹과 그것을 이루는 방식의 결과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지금 그의 시선으로는 다른 여인과 이루는 관계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험담을 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깎아서 자신을 들어높이는 행위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또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기분이 좋기에 그렇게 남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재미난 것은 ‘증오’입니다. 우리는 증오가 좋아서 증오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내를 필요로 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증오’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증오하는 사람들은 증오를 즐기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미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을 하겠지요. 하지만 잠시만 앉아서 이게 왜 그런가를 따져본다면 어렵지 않게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악들은 우리가 좋아서 저지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 방향성 안에는 ‘하느님이 싫어서’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입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미사에서 성가를 멋드러지게 부른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 그 자체로 하느님을 싫어하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의지적인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눈을 주신 분이 모를 것 같습니까?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남몰래 하는 모든 것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가 한 일들에 대해서 그에 합당한 것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아무리 숨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들 모르게 한 행동은 그분의 눈에는 번쩍이는 황금과 같아서 그분은 그를 눈여겨 보시기 시작합니다. 모르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요. 하느님은 아무도 모르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일은 굳건하지요. 어린 아이들은 왜 산꼭대기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지, 그리고 왜 그 바위 안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영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혜인지라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악인을 위해서는 진노의 잔이 마련되고 있고, 의인을 위해서는 커다란 상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고, 의인에게는 영원의 행복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멘.

하느님의 보호막

지구에 오존층만 없어도 태양열이 그대로 내리쬐어 인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죽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받는 상존하는 하느님의 보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악에서 지켜주십니다. 악이 제멋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막아 주시지요. 그런 ‘기본적인’ 보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수도없이 악의 유혹에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호하실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하느님만 향하게 방향 설정을 해 두지 어중간하게 보호를 하시고 결국 우리가 죄를 짓게 놓아 두시는 건,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 게 아니냐고 대들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이 공평하게 작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게 하시지요. 하느님은 이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죄를 짓도록 ‘강요’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은 강요된 죄는 죄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의 몸을 움직여 누군가를 살해한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선택’이 열려 있습니다. 이 땅에서 숨쉬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선택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길들여 가기 시작하지요. 선과 악 사이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조금씩 길들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악으로 오존층을 파괴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의 악으로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부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악은 자유로이 우리의 영혼을 넘나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극악무도함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들은 어찌 인간이 그

미워하는 자들

미워하는 이들이 이유가 있어서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증오’를 즐기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증오를 사랑하고 증오를 좋아해서 먼저 증오하고 그리고나서 그 뒤에 온갖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평화를 모르는 자들이고 언제라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이들입니다. 누군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미워하는 이들은 그들을 미워합니다. 시기, 증오, 폭력, 다툼, 불화와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미워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 끊임없이 문제거리를 발생 시킵니다. 우리는 원한다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원한다면 가장 극악 무도한 사람에게마저도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랑을 한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언젠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게 됩니다. 예컨대 한 성녀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남자는 정말 극악무도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성녀는 그 사실을 알고도 그를 사랑합니다. 그녀는 그가 빛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지상의 생애 마저도 내어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갖은 노력에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성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느님을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한계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단 하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당신 마음대로 조작하지 않으십니다. 그걸 건드리는 순간 모든 사랑이 거짓된 것이 되어 버리고 그 자체로 사랑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자유의지 속에서 인간은 ‘증오’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같이 내면적으로 다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우리는

- 우리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 그래 알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다. 너희들에게 한계를 부여한 것은 실은 내 계획의 일부였다. 너희들의 한계는 그 자체로는 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도구이다. - 우리는 당신을 모릅니다. - 그래 모를 수 밖에.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지 않았더냐? 그래서 너희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거부했습니다. - 그래, 그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니 내 아들의 말을 듣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은 영원을 선물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악을 자행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행한 대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인류는 외적으로 진보해 왔지만 내적으로는 더욱 공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귀 있는 자들은 필요한 말을 듣고 실천해 나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야사

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와서 지내다보면 한국에 와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이었을 법한 일들도 되새겨볼 수 있게됩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선교에도 정사와 야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사는 멋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대구교구에도 볼리비아 선교 ‘정사’가 있습니다.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2101) 빛잡지의 기사 가운데 하나로 잘 정리되어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거기에 적힐 수가 없습니다. 그저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만 채워질 뿐이지요. 제가 강도를 당하고, 개미에 물려 쓰러지고, 이런 저런 일들로 사기를 당하고 하는 그런 야사들, 그리고 선교사 개개인의 특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일들, 현지 사람들과의 충돌과 화해, 선교사의 잘못 등등은 오직 야사로만 전해질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선교사들은 어떠했을까요? 언뜻 우리가 접하는 다큐와 여러가지 책들 속에서 선교사의 모습은 마냥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고 애처롭고 안쓰러워 보이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라고 해서 하느님이 더 완벽함을 선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당시의 서양의 선진 문물을 안고 이역만리 아시아의 초라한 땅에 온 그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교만함’이 드러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명예욕’에 사로잡힌 프로젝트에 매진할 수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 산다는 것을 빌미로 부자 나라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이는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힐 가능성도 다분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야사들은 역사 속에 묻히고 우리는 아름다운 선교사들의 이야기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셈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의 악한 모습에서도 당신이 행하실 선한 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동참한 이들만이 영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일은 지나갑니다. 제아무리 피라미드를 쌓아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공감하기

아픔을 공감하는 데에서 하느님의 자녀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 관점으로 성경 안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살펴보아도 그 구심점을 찾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지체의 구성원 자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 바로 곁의 이웃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제 잇속을 차리는 데에 정신이 없다면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스스로를 주님의 지체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바로 그런 고통의 유발자라면 그것은 더더욱 말할 나위 없지요.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이유는 서로 도와 사랑을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서로 돕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필요하기에 서로 부족함을 선물로 주셨지요. 만일 모두가 완벽했다면 우리가 굳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이유도 없이 나 자신의 완벽함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부족한 존재들이고 그로 인해서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그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채워 가며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의 아픔을 공감하겠다는 것도 사실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범위를 너무 지나치게 크게 잡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이 나를 온통 괴롭혀서 나에게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우리 주변의 이웃들입니다. 특별히 아픈 지체가 있을 때에 때로 필요하다면 그 지체를 위해서 모든 몸이 움직일 필요도 있지만 24시간을 모든 몸이 그 지체에만 붙어 있게 된다면 결국 모든 몸이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곁의 이웃에게서부터 우리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를 아우르는 시선은 오직 하느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까이 있는 이웃은 돌보아 주십시오. 이웃을 돌본다는 것을 ‘돈을 얼마를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축소 시키지 마십시오. 도움은 부자 나라일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모든 것의 근본은 ‘

인간의 전통과 하느님의 전통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1,59-60) 두 권위가 상충될 때에는 보다 상급 권위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법적 공방에서도 지방 법원에서 판결이 난 것이 상급 법원에서 그 결과가 뒤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과 하느님의 명을 받은 이의 작은 충돌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마땅히 아버지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 이 아기의 어머니가 당시로서는 여자의 몸으로 획기적인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지요. 어머니는 하느님이 명하신 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친족들의 전통에 반발하는 셈입니다. 물론 이 에피소드는 이어지는 즈카르야의 선언으로 금세 끝나버리고 말지만, 실제적인 우리의 삶 안에서는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전통은 어딜 가나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들이 만든 전통들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때로는 그 전통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와 상충되기도 합니다. 그 경우에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세 부류라고 할 수 있겠네요. 1)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인간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이들(대부분의 사람들). 2)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전통을 깨려는 이들(이기적인 마음). 3)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는 이들(복음의 요한의 어머니와 같은 이들 - 극소수). 인간의 전통은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이들에 의해서 깨어지기 일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침에 어른들에게 드리던 문안인사는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요. 아이를 낳으면 문간에 내어달던 금줄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신주단지가 원지 모르는 아이들이 수두룩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사이에 평화와 일치, 화목, 신의, 절제, 사랑, 인내가 있기를 바라셨고 이는 여전히 단 하나도 변한 적

정련된 금과 은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3,3) 우리는 모두 정련될 것입니다. 금과 은이 뜨겁고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 더욱 순수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시련과 고난의 불을 통과하여 더욱 순수한 믿음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근육의 힘은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훈련’을 통해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시련과 고난, 고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이 훈련에서 도피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승님의 모범을 따릅니다. 그분은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걸어나가셨습니다. 비록 쓰러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주변에서 내미는 도움의 손길(시몬)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베로니카에게 위로를 받으시고 어머니에게 위로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고난 자체가 상쇄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고난의 짐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억지를 써서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고난들을 마련해 두셨고 그 고난들은 이미 우리가 겪어 나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걱정으로 충분합니다. 내일 일을 오늘 끌어들여 걱정할 필요가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걱정을 만들어서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거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정련되어 훗날 하늘 나라에서 모일 때의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나라에는 더는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더는 분노도, 시기도, 증오도, 악의도 없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약속의 땅을 분명히 선언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기에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걸

작은 추수

저는 말씀의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그 씨앗을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무도 모르게 그 싹을 틔우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결과물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때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는 운동을 다녀와서 커피를 한 잔 타 마시면서 식관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안부를 물었지요. - 지난 번 수술한 데는 좀 괜찮아요? - 네, 신부님. - 하나 가르쳐 줄까요? 돈에는 더러운 돈이 있고 깨끗한 돈이 있어요. 더러운 돈은 이기심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돈이고 깨끗한 돈은 자발적인 봉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러운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 보아야 치료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해요. 오직 깨끗한 돈만이 치유를 돕지요. 지난 번 수술이 잘 된 이유는 바로 거기 있어요. 그러자 이 자매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신부님, 지난 주일 강론은 정말 잘 들었어요. 꼭 필요한 이야기였어요. (지난 강론에 가정 폭력에 대해서 현실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사실 지난 토요일에도 집에서는 제 남편과 시동생의 술판이 벌어졌지요. 헌데 이웃집의 꼬마가 우리집에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서 나에게 다가와서 아빠가 엄마를 때린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얼른 그 집으로 쫓아갔지요. 제 남편과 시동생도 말리려고 따라 왔구요. 가는 도중에 그 자매를 만났고 우리는 모두 그 집으로 갔어요. 그리고 저는 천천히 그 형제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잘 생각해 보라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니 그 아저씨는 멋적은 듯이 수긍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다시 주일에 만나서 혼인 갱신식에 신청 했노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그러자 화들짝 놀라더니 그게 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혼인을 다시 확고히 하는 거라고 했더니, 정말 신청해 버렸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했다고 하니 그럼 어쩔 수 없다며 미사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어요.

변하지 않는 이들

미사 후 첫 상담이 끝나고는 이어 두 번째 상담이 있었지요. - 신부님, 우리집 식구들이 변하지를 않아요. 저는 정말 우리집 식구들이 하느님을 알고 받아들여서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 작업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고 좌절해요. 저는 웃으면서 그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해 주었습니다. - 내가 재미난 사실 하나 알려줄까?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미사때 열심히 강론을 하지만 사람들이 전혀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곤 하지.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낸단다.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는 거야. 그러면 조금은 용기가 나.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아. 적어도 네가 하는 일 안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지금 네가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고 있다는 거잖아. 안그래? 그러면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하느님은 네가 하는 일을 기억하실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나가렴. - 9살 11살의 어린 동생들이 부모님에게 대들고 하면 제가 따로 불러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하느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부모님에게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 녀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좀 무리하게 가르치려고 하기도 해요. - 그래, 이해해. 사실 나도 신자들이 미사 중에 내 말 잘 안 들으면 가서 한대 쥐어박고 싶어. 하지만 잘 들어봐,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란다. 우리가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서 누군가를 하느님 앞에 끌어들일 순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들은 절대로 하느님을 배우지 못한단다. 하느님은 억지로 강요한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지. 오히려 네가 변해야 해. 네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내면으로 변해 나가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눈치를 채게 될거야. 마치 네가 정말 좋은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오듯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가면 사람들이 저절로 너에게 관심을 갖

하느님을 믿지 않는 아이

어제 미사를 마치고 한 여자아이가 상담을 청합니다. - 신부님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그럼 물론이지. 무슨 이야긴데? - 제 견진반 친구 중의 하나가요. 무신론자예요. 예컨대 Whatsapp에서 단체 문자방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친구는 진화론을 주장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창조론을 주장하면서 서로 맞서곤 해요. 나머지 친구들 중에서는 개신교 신자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종종 서로 의견다툼을 하곤 해요. 그래서 안타까워서요. - 그렇구나. 잘 듣거라.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거야. 그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거지. 그 친구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의 이성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있고 실제적인 삶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사람이 머리로만 세상을 따지고 보면 과학에서 하는 말들이 모두 맞는 것처럼 보이거든. 하지만 세상은 과학이 말하는 껍데기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내면의 영혼과 관련된 부분도 있고, 또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안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야. 그 친구에게는 그 부분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자신이 머리로 구축해 놓은 세상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는 거지. 그러니 그런 친구에게 아무리 이것이 옳다고 가르쳐도 소용이 없는 거란다. 그러니 시간을 주도록 해. 아마도 그 친구는 삶의 어느 부분에서 신앙을 강요받은 적이 있을지도 몰라. - 맞아요. 신부님. 신을 믿지 않으면서 견진성사를 받으러 수업은 왜 나오느냐니까 부모님이 억지로 시켜서 나오는거라고 했어요. - 그래. 그러니 네가 가톨릭 신자로서 그 친구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 친구의 따스한 동료가 되어주는 거란다. 그 친구가 힘들과 외로울 때에 곁에 머물러 주는 거야. 그러면 그 친구가 너의 그 따스함을 보고 하느님을 배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하나 더 설명하자면, 진화론과 창조론은 서로 싸워야 하는 영역이 아니야. 진화론도 완성된 게 아니고 창조론 안에 진화론이 들

멍청함

사람이 부주의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실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으로 다시 넘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멍청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넘어진 곳에서 또다시 넘어지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멍청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웃기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지혜를 뽐내면서 그 우쭐함 자체로 다시 넘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교만 자체가 영적 위험일지언데 스스로 지혜롭다고 뻐기다가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면 그 순간 넘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한번 일어난 실수는 거기에서 배우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정말 수많은 상황에서 우리의 멍청함을 스스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빛의 증언자

제가 마냥 즐거운 사진과 생활의 이야기들을 올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슴 먹먹한 사연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성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지요. 사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성당에 멀쩡한 얼굴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속이 다 썩어가는 이들도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갑니다. 겉으로는 품위있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저마다 문제를 한보따리씩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정말 복음 말씀 한 마디를 전하는 사람이 부족한 실정이지요. 영을 추스려주는 사람을 찾기가 정말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사람들은 영적인 도움을 갈구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조언을 구해야 할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유명하다는 이들을 찾아보지만 사실 그들은 여느 복음선포가들과는 달리 '흥미롭게' 가르쳐서 유명해졌을 뿐, 그 내면의 심도가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실망하는 일도 다분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적어도 기본적인 소양이 쌓여 있고 하다못해 성인들의 저서라도 있어서 그러한 것들에 도움을 얻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러한 도움이 전무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정내 폭력과 성추행, 알콜 중독과 약물 중독, 부모의 외도와 자녀들의 불안정이 거의 일상화된 수준입니다.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영적인 보살핌조차도 없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루 또 하루 걸어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나머지는 그분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 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빛이 필요한 세상에 빛의 증언자가 되고자 합니다.

작은 성탄

하느님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하시는 말씀은 미숙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셨지요. 결국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말씀으로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을 가르치셨지요. 하지만 여전히 미숙한 우리들은 그것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십니다. 당신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방법이었지요.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무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드님은 인간들의 죄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듯 싶었지만 사흘만에 보란듯이 부활하고만 것입니다. 죽음 자체가 무너져버린 것이지요. 이제는 더는 겁을 낼 대상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오직 한 분, 하느님 외에는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죽음을 없애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 그 누구라도 영원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이들에게 더는 죽음의 위협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 사랑 가득한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작은 씨앗이 되어 성모님에게 심겨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얼마나 기쁜 날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말씀이 육신을 취하시어 내려오시기로 약속 받은 날이니까요. 작은 성탄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탄생은 이미 ‘잉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이제 얼굴에서 어두움을 걷어 내시고 기쁨을 살아 가십시오. 아드님이 세상에 빛이 되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희망을 품고 믿음 안에서 서서히 고개를 드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가까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사람들은 하고 싶은 걸 합니다. 마치 자석과도 같아서 끌리는 것을 따라갑니다. 아닌 척 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면의 근본이 원하는 걸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엔 제가 좋아하는 걸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앞엔 여러 가지 예시들이 펼쳐집니다. 실제적인 예를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셈이지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이 나열되고 그들이 이루어낸 것과 실패한 것이 펼쳐집니다. 보고 배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수많은 예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지 못해 그들의 마음은 갈수록 닫혀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걸 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하고 싶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솔직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살피고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향성을 찾아낼 것입니다. 나 자신을 향한 방향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기 일쑤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원죄인 셈이지요.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바로 이 원죄를 부수고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는 저마다의 죄가 시작이 되지요. 하느님의 전능함과 선하심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죄들이 차곡 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마저도 치료제를 마련하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다짐과 더불어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마저도 거부하고 있지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하고 싶을 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가톨릭 신자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지요.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

남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 끌리는 것을 느낍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표현입니다. 사랑을 언제 알 수 있는가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겨움’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가?’를 물을 때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이끌림은 머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서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끌림 중에서도 지금의 배우자를 사랑하는가를 물을 때에 비로소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핑계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숫제 시작도 하지 않고 끝나 버립니다. 뜨거운 냄비마냥 달궈졌다가 식어버리는 사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좋은 시간에도 나쁜 시간에도 꾸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조금 기분이 나쁘다고 토라져버리고 영영 다시 안 볼 것처럼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피상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치유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모든 것의 치유제가 됩니다. 우정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은 그 결과물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로 ‘자녀’이지요.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에는 보다 중대한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냄비 같은 성적 흥분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 쾌락의 부차적인 결과물로 취급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 뒤의 모든 고난을 아무 탓이 없는 그 아이가 짊어지게 되지요. 성경 안에서 남자의 욕정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랭이 같은 자들이 곧잘 저지르는 일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가르침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물론 대학교를 가야 한다거나 높은 수준의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참사랑은 배워야 합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참고 견디고 인내하

인생의 탑

오늘 교리교사 모임에서는 두 명이서 팀을 짜서 신문 한 부로 높고 튼튼한 탑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교사들이 저마다 열심히 탑을 만들었지요. 그 중에는 먼저 만들고 수다를 떠는 교사들도 있었고 나름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만드는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모임에 늦게 도착해서 시작하는 교사들도 있었지요. 시간이 아직 5분 남았을 때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탑을 그대로 두고 모두 자리로 돌아오라고 했지요. 그리고 물어 보았습니다. - 여러분, 이걸 만들면서 제가 뭘 의도한다고 느꼈어요? - 화합의 중요성이요. - 서로 의견을 나누는 거요. - 참아주는 거요. - 뭘 가르치려고 하셨겠지요. - 좋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들이지요. 사실 저 탑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인생이라는 것을 선물 받고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지요. 그리고는 살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중에는 먼저 멋들어진 인생을 구축해 놓고는 쉬는 부류도 있고 가로늦게 시작하는 부류도 있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저 탑을 만들면서 즐겼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잠시 후에 저 탑을 모두 태워 버릴 거라는 사실입니다. (교사들이 호기심에 더욱 귀를 엽니다.) 정말입니다. 저 탑들 이따가 마당에 가지고 가서 다 태워 버릴 거예요. 그럼 이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순간은 소중하게 지나가고 있으니 그 모든 순간을 그 자체로 즐기기를 바라십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문제가 있을 때에도 즐기십시오. 설령 인생이 비록 똑바로 세워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 신문이 불에 태워지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

부탁

어제 미사 마치고 한 자매가 다가와서 부탁이, 엄청 큰 부탁이 하나 있다고 말을 합니다. - 그 ‘엄청 큰’ 부탁이 뭔가요? - 제가 내일 혼배를 하는데요. 제발 부탁인데 사람들에게 축제의 기쁨은 혼배 미사로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그럼 사람들이 혼배를 마치고 축제를 한답시고 와서 마시고는 진탕 취해서 온갖 진상을 부릴 테니까 말예요. 부탁인데 신부님이 미사 마치면서 온 하객들에게 좀 가르치셨으면 좋겠어요. - 하하, 자매님,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미리 알고 조언을 해 드릴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하지만 자매님이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어요. 사람들은 결국 제가 원하는 걸 하게 될 거고 일어나게 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아무리 조언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일순간에 바뀌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 자매님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두셔야 해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이니까요. 아주 간단한 대화였지만 제가 이 자매에게 의도한 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자매가 원하는 청을 들어주어 그 자매를 안심시키는 것이지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니 기꺼이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자매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서 준비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자매는 자신의 그런 부탁으로, 그리고 제가 하는 강론으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요.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기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내가 원하는 세상을 이루려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언제나 부족함이 있고 그 부족함을 끌어안을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미에 맞는 완벽한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늘 부족함이 상존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우리 자신의 마음 뿐입니다. 내가 공기가 되고 나면 모든 사물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

두가지 행복

#1 어제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무실에 출근을 했습니다. 혼배 면담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면담이 끝나고 나니 사무원이 다가와서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신부님, 피곤하실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누가 와서 신부님 찾으면 알려 드릴께요.’ 아주 작은 마음 씀씀이이지만 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친절한 배려이지요. 물론 방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해성사를 보겠다는 이들 때문에 다시 나와야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은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2 성탄 9일기도를 한다고 아이들이 성당에 와 있습니다. 어제는 사탕으로 성탄 장식물을 만드는 날이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만나서는 자기가 정성스럽게 만든 장식물에서 사탕을 하나 뚝 떼어서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4명이서 저에게 사탕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부자인 셈이지요. 저는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아이들을 본당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이웃 사랑에 대해서 가르친 보람을 느끼는 날이었습니다. 비록 제 손에 든 것은 사탕 4개에 불과하지만 그 내적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그 사탕은 세상의 천만금보다도 더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탕이랍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자발적인 봉헌’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이 아닌 이들

어제 저녁 미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복음 안에서 두 구절을 잘 기억합시다. 모두 소리내어 따라하세요. -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들은 무엇이 되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인이 됩니다. 성인들은 죄가 없고 하느님과 함께 머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스스로 성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죄투성이인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되겠어?’ 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변명입니다. 하지만 벌써 잊지는 않으셨지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구절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그들은 가족을 만나도 기도를 하는 것이고 밥을 먹어도 기도 안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야 합니다. 필요한 때에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만 해방되고 나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적인 일들에 몰두하지요. 즉,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찰나적인 것들… 즉 세상, 돈, 명예, 권력, 섹스와 같은 것들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하느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이 때때로 ‘필요’할 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이 필요하게

산 안또니오 로메리오 여행기2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나가려던 시청 구경은 점심 시간이라고 안되겠다고 해서 그냥 있다가 혼자서 동네 산책을 나갔습니다. 동네라고 해 봐야 위아래로 네 다섯 블록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작은 동네입니다. 사람들도 낮 시간에는 다 일하러 나가고 없어서 만날 수 있는 이들도 거의 없었고 그저 우물 퍼로 온 동네 아낙들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을 참 많이 만났지요. 돼지, 닭과 병아리떼, 말, 온갖 새들… 그날 저녁에는 후배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미사 직전에 성당에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조르르 몰려와 안겨듭니다. 그리고 미사 준비하는 청년들도 왔고 수녀님들도 오셨지요. 그래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수녀님과 청년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이 어떤 행사에 대해서 작년에도 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에 대해서 수녀님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곧잘 관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 혼배를 하는 것도 아이가 3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내가 여기 2년 넘게 살고 있는데 그런 관례에서 벗어난 경우는 딱 하나 밖에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작고 협소한 동네이다보니 자신들 안에 형성된 관례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는 모양입니다. 자신들만의 룰이 있고 그것을 깨는 것을 큰 위협으로 간주할테지요. 어제는 아주 조용한 하루였습니다. 일어나서 아침 먹고 쉬고, 점심 먹고 다시 쉬고 하는 일상이었지요. 사실 점심을 먹고 나서려고 했는데 후배 신부님이 좀 더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져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귀찮아서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하느님이 왜 저를 남겨두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두 신부님이 모두 저에게 고해성사를 보았거든요. 오지에서 일하시는 신부님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의 선물을 잔뜩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맑아진 마음으로 더욱 기쁘게 일하실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지요.

불길이 드리워질 것입니다. 이 불은 태우는 불, 불을 거치면 타버리는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타버릴 것들은 이 불을 두려워 합니다. 탈만한 재료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이 불을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타버리지 않을 것들은 끄떡 없습니다. 영원히 남을 존재들, 그 어떤 불에도 굳건히 버텨낼 것들이 존재합니다. 오히려 불을 통해서 그 본래의 빛이 더욱 찬란히 드러날 존재들, 그래서 이들은 어서 불길이 다가오기를, 태워야 할 것들을 태워 버리기를 기다립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몇 번이고 언급된 말입니다. 예수님도 모두가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밖의 성경 구절에서도 태우는 불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구절을 들으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아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묵상해 보십시오. 무엇이 타버릴 것이고 무엇이 남을 것인지 말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행위들 가운데에서 타버릴 것들이 있고 남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 특정한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던 그 마음은 어른이 되면 사라지고 말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우정을 나누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 하지만 영원의 세계로 넘어가면 사라져 버릴 수많은 허황된 활동들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남을 활동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길이 다가옵니다. 그 불은 태울 것은 태우고 남길 것에는 더욱 찬란한 빛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마치 황금이 제련되듯이 군더더기는 모두 태워 버리고 황금은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일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

공정과 정의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몸을 떠올리면 됩니다. 우리의 몸은 스스로에게 공정하고 정의롭습니다. 그 말이 곧 모든 지체를 동등하게 돌본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나름대로, 눈은 눈대로, 귀는 귀 대로의 쓰임새가 있고 그것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정과 정의의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공정과 정의를 어느 범위에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공정과 정의의 축소된 개념들이 탄생합니다. 소위 한 나라의 공정과 정의가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 공정과 정의는 다른 나라에 부당과 불의가 되는 것이지요. 본격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몸에서 새끼 손가락이 다치면 모든 몸이 온 힘을 다해서 그 다친 손가락을 돌보는 데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다친 손가락이 정상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 도움을 주지요. 그렇게 치료가 되고 나면 새끼 손가락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과 정의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전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지역별로도 갈라지고 단체 간에 갈라지고 결국 개인간에도 서로 갈라지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를 몸에다 비유를 하면 지체들이 서로의 중요성을 부르짖지만 그 누구도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는 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몸에다 비유하자면 오른손은 오른 손대로의 이득을 추구하고 발은 발대로 이득을 추구해서 그 어느 누구도 다친 눈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눈이 점점 썩어 들어가고 결국 전체 몸을 위태롭게 할 것인데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정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이어받지 않고서는 참된 의미의 공정과 정의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시선을 들어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선에서 가장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하게도 그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우리의 희망은 이 땅이 ‘완벽’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깨어진 그릇은 다시 열심히 아교로 붙인다 하더라도 그 부서진 흔적이 남아 있게 마련이니까요.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 선사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아직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노력은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바꾸어 놓겠다는 것은 ‘과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것은 하느님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채로 외적인 것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그 문제는 다시 일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맞서서 그들이 하는 일을 제지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 필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의 악을 선으로 뒤바꾸려는 노력이지요. 집안에서 아내를 패는 남편을 경찰을 불러 제압할 수 있지만 경찰이 가고 나면 다시 아내를 패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경찰은 잠깐 왔다 가는 이들이고 결국 아내는 남편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들은 엉뚱한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여당이 나쁘다고 야당을 지원하여 야당이 여당이 되고나면, 다시 그 여당이 나쁘게 됩니다. 우리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존재할까요?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이 행여 형식적으로 그치고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어긋나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시련을 마주하는 인간

남이 한 못된 짓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내가 한 못된 짓은 금세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 특성입니다. 우리의 눈은 밖으로 나 있고 그래서 언제나 남을 주시하도록 되어 있지요. 물론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스스로를 안쪽으로 살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능은 곧잘 마비되곤 하지요. 양심이라는 것은 무뎌지기 일쑤이고 외부의 강한 자극 앞에서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눈 앞의 맛있는 음식을 보게 되면 훔쳐먹고 싶은 것이 보통인 것이지요. 양심은 이때도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우리의 강한 욕구가 그것을 넘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시기 동안 안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시련의 시간이 다가올 때에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시간은 반드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아울러 마냥 좋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멋대로 상상한 이상향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적절한 시간이 되면 필요한 내면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 시련을 제대로 겪지 못하고 자꾸만 회피해 버리면 ‘영적으로 미숙한 이들’이 되고 맙니다. 외적으로는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내면으로는 너무나도 어리숙한 떼쓰는 아이가 되고 말지요. 그런 사람은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늘 무언가에 집착해 있고 그 나이에 걸맞는 지혜가 없지요. 특히나 욕심이라도 내서 자기 자식들과 싸우기 시작하는 날이면 아주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에 그것을 잘 껴안기 위해서는 의지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결심을 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겁쟁이가 되어 버리고 세상의 힘에 기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 기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치워 버리고 말 것입니다. 돈에 기대다가 돈을 잃고, 가족에 기대다가 가족을 잃고, 건강에 기대다가 건강을 잃고… 이런 식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철

산 안또니오 로메리오 여행기

어제 아침 일찍 나서서 시내에 들러 볼 일을 보고, 오후에 시내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저녁 7시 무렵에 도착을 했습니다. 전기가 없어서 캄캄한 와중에 후배 신부님이 대문을 열기 위해서 쫓아나오더군요. 들어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컴컴한 방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후배 신부님 생일이 얼마 전이라 교리교사들이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고 저도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선배 신부님에게 맛있는 걸 준비해 놓으라고 해서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해 놓았는데 그래도 교리교사들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는지라 모두 함께 식사 자리에 갔습니다. 축하곡을 모두 함께 불러주고는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작에 구운 닭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치즈에 섞인 스파게티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다시 선배 신부님이 준비한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포도주와 함께 말이지요. 참으로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5시간을 운전해 온 몸이 더는 버텨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일찌감치 자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을 무렵… 갑자기 불이 환하게 들어오더군요. 그 바람애 깼습니다. 정전이 끝난 것이지요. 일어난 김에 글 하나 적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컴퓨터에 전원을 연결하려는데 다시 전기가 나가 버렸습니다. 최근 들어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전신주가 쓰러진 것이 이유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선배 신부님이 준비한 미역국을 맛나게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방에 돌아와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특별히 도울 수 있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방해나 되지 않으려면 조용히 방에서 자는 수 밖에요. 모기가 한 마리 귀찮게 하긴 했지만 밤 사이 잠을 설친 덕분에 잘 잤습니다. 동네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리와 곤충소리, 그리고 가끔씩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성탄이 다가오면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폭죽 소리가 전부입니다. 느지막히 일어나 다시 점심을 먹었습니

믿지 못하는 그들

누군가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 우리는 이미 우리 내면에 기준점을 형성해 두고 있습니다. 어디 멀리서 돈을 비싸게 주고 초청한 강사의 말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한마디 더 들으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진심어린 충고는 쉽사리 무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유명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유명한 학자라도 그 내면 안에는 도리어 명예에 대한 욕심이 그득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닐테지만 그의 말은 전혀 권위가 없는 셈입니다. 그는 실상 제가 하는 말을 하나도 지키지 않을 테니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외아드님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준 사랑이라고 부르짖겠지만 실제로는 그의 마음에 이번 강좌를 통해서 얻게 될 소득을 계산하고 있다면 그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지요. 진정한 권위는 삶의 진실성에서 나옵니다. 누군가가 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정직’에 대해서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아이는 엄마 앞에서 듣는 척은 하겠지만 실제로는 엄마의 모습을 이미 많이 지켜봐 왔기 때문에 속으로는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초라한 모습에 학식있다는 자들, 명망 있다는 자들은 그를 비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자신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세리와 창녀들이 고관대직의 사람들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슨 권한이오?

우리의 권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신학교 학장은 신학교 안에서 권위를 지닐 것입니다. 신학생들의 다음 학기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을테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잘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결국 그의 권한은 하늘에서 부여한 것입니다. 하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지 않으면 지금 가진 권한을 행사하기 힘든 것이지요. 다른 모든 주요 직분들도 비슷합니다. 저마다의 한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물론 오늘날에는 세상의 권위들이 민중의 귀를 막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듯한 모습이 드러나기에 안타깝긴 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하지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즉 자기 나름대로는 권력을 지닌 이들은 그분의 권위의 출처를 직감하면서도 그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권한의 최종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에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그분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비겁하고 지극히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과연 이 권한에 관련해서 우리의 일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주변에서 나름 권위를 지니고 말하는 이들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제각각의 권위라 그 분야에서는 힘을 지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전혀 힘을 지니지 못합니다. 예컨대 바이올린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이라도 미용실에 가면 사장님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합니다. 바이올린은 잘 알아도 머리카락을 다듬는 법은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때로 ‘삶의 길’에 대해서 권위를 지닌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합당한지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직감합니다. 이 사람이 이런 저런 좋다는 말들을 조합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의 영이 드높은 존재의 감화를 받아서 말하는지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싶

선물

선물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노력을 해서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버는 것은 수당이라고 하지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물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물을 주는 주체와 수용자에 따라서 선물의 의미는 다양해집니다. 하느님이 주는 선물은 모두 공짜입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생’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에 다가오는 것들을 모두 선물하셨지요. 우리는 자연을 만들지 않았고, 우리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주어진 선물이지요. 하느님이 주는 선물은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고통스러워하기를 바라면서 선물을 주는 부모님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악마도 선물을 줍니다. 하지만 악마의 선물은 그 의도가 뚜렷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궁극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 궁극목적을 알아차려버리면 그 누구도 그 선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악마는 자신의 의도를 철저히 감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원할 때까지 덫을 놓고 기다립니다. 악마는 절대로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교묘하고 음험하게 우리 스스로 그 덫을 덥석 물어 버리도록 음모를 꾸미지요. 받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주어도 그것을 선물로 인지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선물을 준비하고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바로 미사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하느님께로 다가가기 위한 것이 목적이지 물질적 선물만을 즐기라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의 본 의미는 무시하고 선물만 받아 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마의 선물,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마의 유혹거리에 더욱 쉽게 넘어갑니다. 악마의 선물은 눈에 보이고, 즉각적이고, 우리의 오감과 관련되어 있어서 참기 힘든 유혹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늘’ 감사에 넘치게 되지요. 감사할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

무전기를 샀습니다. 물론 제 장난감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본당용으로 샀습니다.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제가 어린 시절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꿈을 이루고 마는 셈이네요. 제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하느님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할 때에는 그것을 좀처럼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통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의 욕구와 뒤섞여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가 간절히 원할 때에 그것을 얻으면 그는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가 운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운전을 해 보겠다고 떼를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빠는 절대로 운전대를 쥐어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누군가의 원을 들어줄 때는 그가 ‘준비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을 때에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식별’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성소’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의 길은 누군가 자기 스스로 간절히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길에 준비되었을 때에 비로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원해서 신학교나 수녀원에 들어간 사람이 결국 그 길을 수용하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성되어 시작하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식별의 과정은 진정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고 우리에게 꾸준하고 충분한 인내심만 있다면 하느님은 필요한 때가 되면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참으로 많습니다. 원하는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때는 하느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해야 하는 것은 ‘하늘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직 그것을 선물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계속됩니다. 완성에 이를 그날까지 말이지요. 그리고 그분이 보시기에 합당한 순간에

치유

치유에 대해서 제가 아는 바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치유를 ‘돈’의 가치로 따집니다. 즉, 무슨 수술비는 얼마, 무슨 수술도구는 얼마, 무슨 검사는 얼마의 비용으로 치유의 가치가 산출되지요. 그래서 흔히 부자들이 더 잘 치유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치유라는 것은 돈의 가치가 아닙니다. 치유는 영적인 가치로 살피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보살핀다고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기능들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인간은 ‘노화’의 과정에 있고, 그 외에도 우리가 섭취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통해서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정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건강은 ‘영적인 건강’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육적으로도 건강하게 마련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과음하지 않으며 자신의 육신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돌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자신이 벌어들인 것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온갖 쾌락에 중독되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요구되고, 나아가 그런 쾌락 이후에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게 되지요. 그런 스트레스들이 결국은 몸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건강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허락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병’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낙원, 즉 파라다이스에 살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몸은 조금씩 망가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고 실제로 몸은 망가져 갑니다. 그렇게 ‘질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질병이 생겼을 때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가늠합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의사’라는 직분으로 사람들을 부르면서 아픈 이들을 돌보게 하셨고, 그 의사들이 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

“당신은 이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될 것이오!” 과연 이게 복음이 의도하는 기쁜 소식일까요? 그럼 얼마나 벌어야 많이 버는 것일까요? 그 가난한 이가 바라보던 부자보다 훨씬 많이 벌면 되는 것일까요? 그럼 그 부자가 다시 가난한 이가 되어 상황이 역전되어 버리기만 하는 건 아닐까요? 과연 가난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누구를 가난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과연 무엇일까요? 가난은 자신의 현재의 초라함을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상태를 말하지요. 통상적으로는 ‘물질’ 차원에서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돈이 없어 삼시 세끼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들, 몸 하나 누일 곳이 없는 이들, 옷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해 헐벗은 이들을 가난하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진정한 가난은 물질 소유의 여부를 벗어나 확장된 개념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가난한 이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선’이 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선하다는 것’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선의 근원이시고 샘이신 하느님이 늘 필요하지요. 하지만 때로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 없이도 잘 사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들의 착각일 뿐이지만 말이지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단순히 재산의 증식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쁜 소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이 여러분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외아들을 보내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고 여러분에게 영원한 기쁨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다른 기쁜 소식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대형 교회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약속하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기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물질이라는 것은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진 그리

대림 3주

원래 교회가 전례적으로 짜 놓은 구상 대로라면 빛이 점점 밝아오면서 우리는 점점 기쁨에 차오릅니다. 그래서 이 주간부터는 우리는 영적으로 밝은 상태, 즉 이미 우리 안의 어둠을 씻어내고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날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각자 각자 떨어뜨려서 돌보시는 분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개인적 구원’, ‘이기적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열심해서 하늘나라에 가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으로 한 분이신 예수님을 머리로 두는 하나의 교회인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한 지체가 병들고 가난하고 아파하는데 다른 지체가 머리가 지시하는 바를 무시하고 그대로 자기 좋을 대로만 머물러 있는다면, 머리는 아파하는 지체를 보살피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지체를 잘라내고 말 것입니다. 저 혼자 잘난 지체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몸 전체의 모든 양분을 끌어들여 자기 혼자 증식하고 자기 몸뚱아리를 키워나가 결국에는 전체 몸을 죽여 버리는 그 지체는 제거되지 않으면 전체 몸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암세포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이기적인 지체도 머리의 분별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와 더불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왜 힘이 드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남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에게 쓰이지도 않으면서 나의 소유욕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썩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썩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탐욕으로 영적으로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탐욕으로 더럽혀진 더러운 재물이 됩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퍼부어도 자신들의 병에 전혀 차도가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다면 하느님이 그

고해성사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서 마지막에 보아야 하는 것, 반드시 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부님을 찾아서 보아야 하는 것, 1년에 두 번 이상 보면 죽는 줄 아는 것. 아마 이정도 설명이면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유명한 ‘한국교회의 판공’입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남미에는 ‘판공’ 개념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사표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지요. 고해성사는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보는 것입니다. 한국처럼 활동하는 신자수 현황 파악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제도가 아니지요. 한국 신자들은 참으로 고분고분합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신앙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지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해서 자신이 뭐가 필요한지 모르고 그래서 교회 눈치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열심히 잘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손가락 하나 잘못 움직였다고 자신이 뭘 잘못한 줄 아는 너무나도 순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요. 규정에 대해서 묻고 또 묻고, 전례를 로마 교황청보다도 더 완벽하게 해 내고, 그러는 가운데 외적으로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내적으로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이 메말라가는 셈입니다.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고해성사’를 살펴봅시다. 고해성사는 내가 진정 하느님 앞에 죄스러이 느낄 때에 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사제에게 나아가 죄를 고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말씀으로 용서의 선언을 받고 기쁘게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헌데 이 거룩하고도 기쁨이 가득한 행위를 우리는 ‘의무’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지요. 하기도 싫고 억지로 끌려가서 하고 나서도 찜찜한 행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수치’를 동반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치이지요. 죄를 지은 사람은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수치는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좋은 것입니다. 헌데 그 ‘수치’를 경감시키려고 내 목소리를 아는 주임 사제가 아닌 다른 사제를 찾아 헤메는 모습은 결국 그 수치를

성령을 거스르는 죄

유일하게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죄입니다. 사실 이미 설명을 드렸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성령’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성령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역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작은 컵으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비록 성령을 온전히 다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령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지닌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영, 성령이 유일하게 안식처로 찾으시는 곳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바람, 또는 불과 같아서 활동할 때에만 느껴지고 가까이 다가서서 손으로 쥐려 하면 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직접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의 체험을 어떻게 규정할까요? 이 또한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흔히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성령의 활동’을 ‘성령 기도회의 활동’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성령 기도회, 또는 성령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성령의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면인 경우가 많고, 또 많이 꾸며진 경우도 많습니다. 헌데 가톨릭 신앙의 초보자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눈에 띄는 활동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얻어 만나게 되는 것이 ‘성령 기도회’의 주된 활동들인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를 한다고 ‘방언’을 하고, 안수를 하면 쓰러져야 하고, 기도는 음악으로

밥 먹기

밥 먹는 건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책임감 있게 밥을 먹어야 합니다. 밥 먹을 자격 먼저는 밥 먹을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면 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자녀를 먹여 키워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어른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저마다 제 밥벌이를 해야 하지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밥 먹을 준비 밥을 먹을 자격이 있으면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먹기 전에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먹어야 하고, 뒷 정리도 잘 해야 합니다. 잘 준비된 음식을 먹고 싶은데 준비하는 게 귀찮으면 돈을 내고라도 잘 준비된 것을 사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충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밥 먹을 재료 재료를 잘 선별하지 않으면 결국 그 상한 재료가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니 요리할 재료를 잘 준비해야 하고 기한이 지난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워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밥 먹는 방법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합니다.(제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네요.)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씹어 먹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미각은 필요한 데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미각은 음식을 즐기는 데에 쓰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 앞에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을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식사의 시간은 ‘나눔’의 시간입니다. 가톨릭 사제 처럼 혼자 사는 게 아니라면 함께 있는 이와 시간을 나누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음식만을 먹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밥 먹은 후에 식사를 하고 나면 뒷처리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를 이행해야 합니다. 바로 ‘설거지’이지요. 아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맡아 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남편은 그런 보살핌 속에서 대신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겠지요. 하지만 둘 다 같은 상황이라면 저마다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먹고 난 뒤에는 깨끗이 해 두어

신앙의 맛

‘니들이 게맛을 알아?’ 한때 한창 유행하던 광고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게맛을 간직했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였지요. 같은 표현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들이 신앙을 알아?’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정말 이렇게 부르짖기라도 하는 것 같은 부분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부분에서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을 하지만 솔직히 니들이 신앙에 대해서 뭘 안다고 주절거리느냐고 한탄을 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요. 신앙은 뭘까요? 많은 이들은 법적 절차의 산물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세례 교육을 준비해서 세례를 받고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교무금을 잘 내고, 판공을 잘 지키면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한국이나 여기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눈 먼 자를 보게하고, 귀먹은 이를 듣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지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 신부님, 그럼 신앙의 본질을 알면 위의 법적 절차는 필요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신앙의 본질을 알게 된 사람이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해 줄 수 있는 교회의 좋은 수단들을 마다할 리 없습니다. 모든 성사와 전례, 교회에서 가르치는 바들은 모두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 근본 목적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눈을 뜬 사람은 저런 것들을 진실한 마음으로 찾기 시작하지요. 아직도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자들 중에 더욱 많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곤란해 하는 이들이 많지요. 이거다 싶어 하면 아니라 하고, 저거다 싶어 하면 아니라 하니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서울을 가야 한다면 서울을 가는 기차를 타고 그 기차 안에서 밥을 먹든 화장실을 가든 서울에 가겠지만,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고서는 그 안에서 도착할 때까지 기도를

본질을 똑바로 알기

한때 가계 치유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곤 했지요. 오염된 뿌리를 치유한다는 개념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 얼마 못가 제지 당하였습니다. 들으면 언뜻 맞는 말인 것도 같지만 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된 행동이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가계 치유를 한다면서 나서는 이들의 진의가 문제였습니다. 사실 누군가 고해성사만 제대로 잘 봐도 그 은총이 후대를 이어 내려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술을 절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더는 돈으로 다투지 않고 아이들을 잘 돌보면 그 은혜로움이 대를 이어 내려가고 그 가족, 그 가계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만 살아가도 필요한 은총은 다 주어진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안되니 사람들은 늘 ‘차선책’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어긋난 성모 신심, 어긋난 신심행위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정도를 걷기 싫으니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거지요. 슈퍼에 과자는 사러 가고 싶은데 직접 걸어가기는 싫고, 그래서 동생을 시키는데 동생이라고 사러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돈을 더 내고 동생을 꼬시는데 돈은 주기 싫고, 그래서 결국 동생을 협박해서 과자를 사러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동생은 그 일로 인해서 앙심을 품고 반드시 어떤 종류든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거구요. 정도를 걸으면 조용할 일을 우리는 자꾸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해성사로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될 것을 자꾸 엉뚱한 속죄의 길을 찾다 보니 가산도 탕진하고 정작 얻어야 할 속죄도 얻지 못하는 겁니다.

부모의 죄

그날에 그들은 더 이상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오히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은 모두 제 이만 실 것이다. (예레미야 31,29-30) 하느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부모의 죄가 대를 이어 내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죄를 상속받지는 않지만 죄의 결과는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쓰레기를 버린 건 버린 사람의 탓이지만 버려진 쓰레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모의 탓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한 거짓말로 인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나면 자녀들이 고스란히 그 고통을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그 죄를 자녀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자녀로서는 부모의 짐을 묵묵히 나누어 지고 가는 그 모습에 하느님은 상을 준비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역적이면 자녀도 역적의 자녀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의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처단하려니 그 자녀들의 복수가 두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삼족을 멸해서 아주 씨를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 탓에 죄 없는 어린 영혼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고 당연히 그 무죄한 영혼에 대한 책임은 부모의 죄를 전가시켜버린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지요. 타인의 죄가 나에게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죄는 각자 개인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는 분명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를 이어받아 다른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예 어두움을 몰랐다면 어두움에 다가간다는 것도 몰랐을 터이나, 어두움을 알고 난 뒤에는 어두움에 다가가는 유혹도 덩달아 생겨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원죄’의 개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 조상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뛰어난 존재가 되겠다는 교만을 지니고 반역하였을 때, 바로 그

155미리 견인 곡사포에서 배우는 삶의 진실

1) 집중하라 핀을 해머로 내려치다가 집중력을 상실하면 동료의 손목이 날아간다. 집중하라. - 집중하지 않으면 곧잘 세상에 정신을 팔리고 결국 우리의 영혼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2) 훈련하라 평소에 근육을 키워두지 않으면 아무리 집중해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훈련하라. - 평소에 하지 않던 기도가 나올 수 없고, 평소에 하지 않던 자선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평소에 하지 않던 단식을 실천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미리미리 훈련해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준비하라 해머 머리가 자루에 올바로 끼워져 있는지 살피지 않으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대갈통이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하라. - 우리가 몸담는 교회는 많은 것들을 올바르게 준비시켜 줍니다. 그러지 않고 나 혼자서 알아서 하느님을 찾겠다고 나서다가 큰 코를 다치기도 하지요. 4) 적응하라 야간 방열에는 고무 망치를 쓰던가 핀에 고무판을 대어야 한다. 주변 환경에 따라 적응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의 모든 것을 준비해도 소용이 없다. - 나와 주변 이웃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늘 하던 것만을 하다 보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겸손한 이들, 교만한 이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겸손’입니다. 이들은 내세울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기댈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겸손이지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느님께 기대는 겸손, 사람을 창조주 앞에 본래의 위치로 가져다놓는 겸손입니다. 그 반대의 사람들은 ‘교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존심’으로도 포장되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교만이지요.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이 교만은 그래서 곧잘 싸움을 일으키곤 합니다. 교만한 자들을 만나보신 적 있으십니까? 자신이 지닌 권력으로, 자신이 지닌 명예로, 자신이 지닌 재산으로, 자신이 지닌 미모, 자신이 지닌 실력으로 콧대를 드높이는 사람. 다가서서 얼마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의 속내는 금방 드러납니다. 그들은 언뜻 겉으로 가식적인 웃음과 친절로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어느 정도 선에서는 철통경계를 하고 그 누구도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반면 겸손한 이들은 모두 친구가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만든 유일 무이한 존재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지만, 나아가 타인도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서 무엇이라도 하나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진정 초라한 것이기에 내세울 것이 별로 없음을 알고 있으며 반대로 타인들이 가진 것은 참으로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들입니다. 겸손한 이들과 머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은 내가 내어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교만한 이들은 무엇을 해줘도 불만입니다. 늘 부족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어서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해 버리는 이들입니다. 교만한 이들에게는 아침의 상쾌한 공기도, 추위도, 더위도, 나무도, 풀도, 일할 수 있는 나의 직장도,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주는 주변의 모든 이들도 그저 불평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행에 가득 차 있고,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으며, 나아가 타인의 행복을 망가뜨릴 준비

마음으로 쓰는 글…

우리에게 알려진 일들보다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람은 인생의 지혜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이지요. 웃는 이의 미소 뒤에는 슬픈 마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척 가식적인 얼굴 뒤에 어리석음과 음흉함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욱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피상적인 세상에서 사는 이들은 피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천부적인 순수함이 유지되지만 결국 그 순수함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늘이 마련한 그 순수함이 깨어지고 나면 사람은 세상과의 만남을 시작하게 되고 그 뒤에 깨어난 자신의 자유의식과 더불어 나아갈 길을 정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커 보이던 어른들이 초라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굴레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비로소 우리 각자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여전히 그 피상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도리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고, 극도의 피상적인 삶을 사는 이가 엄청나게 화려해 보일 수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피상의 세계를 탐내고 진리의 세계를 잊어가는 것이지요. 한때는 많이 아파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하느님은 저마다에게 같은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 기회는 세상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기회는 아닙니다. 그 기회는 ‘영원’을 향한 기회이지요.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똑같은 그 ‘영원’의 기회를 받고 응답한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안타까워할 이유도 실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선택의 결과이니까요. 똑같이 받은 걸 그

그렇더라

둘이 좋다 사랑을 하고 그렇게 만나 결혼을 하고 만날 만날 꿈같은 날을 보내다가 손잡고 같이 떠날 줄 알았는데 사랑이 마냥 꿈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인 줄 알게되고 둘이 사랑하고 아끼는 시간보다 부딪히고 싸우는 시간이 늘어나더라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현실에 타협해 가면서 삶에 지치고 관계에 지치고 미운정 고운정 들어가더니 결국엔 하나가 먼저 떠나고 나머지도 떠나고 처음 만나 천년을 갈 것 같던 약속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니 인간의 허무는 너무나 적나라한 것이라 모아쥐고 글머쥐어도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라 결국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생을 허락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눈을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보메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오직 암흑 뿐이라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수는 없기에 포기하려 하니 정작 내 안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시작하더라 이것인가 싶어 살펴도 하찮은 것이요 저것인가 싶어 살펴도 엉뚱한 것이라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싶은데 또 내 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들어 있기에 그 목소리 들어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그 목소리 들어 가난한 이를 돕고 그 목소리 들어 병자를 방문하니 내 안에 허전하던 것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결국 나는 그분을 얻어 만나니 그분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요 세상 끝날까지 계신 분이라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더라.

죽은 이들 살리기

살아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특징을 드러내지요. 죽은 이는 수동적입니다.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지요.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다가옵니다. 세상이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이리 오라 하면 이리 오는 이들입니다. 새로나온 신상품이 좋다 하면 인터넷을 뒤지고 관련 정보를 찾고 없던 호기심도 발동시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무엇이 건강에 좋다고 하면 또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캐냅니다. 사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필요해서 찾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지요. 반면 자신의 내면에 대해 무지한 편입니다. 툭하면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는데 정작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곧잘 남 탓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를 행한 ‘주체’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날씨 탓이고, 그의 탓이고, 하느님 탓이고 세상 탓입니다. 그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없지요. 즉,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수동적입니다. 신앙생활을 세속생활 하듯이 합니다. 무슨 기도가 좋다고 하면 그걸 해보다가 금세 지쳐 버리고, 또 다른 게 좋다고 하면 그걸 따라다니다가 흥미를 잃고… 이런 식입니다. 정말 하느님에 대해서 그 사랑을 느끼거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다니는 것을 찾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불을 지피는 분이 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릴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이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살려는 이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고 예수님은 영적으로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하지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문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아닙니다. ‘만나고 싶은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 근본 원의가 없으면 예수님이 코앞에 있어도 알

부자와 맞선 복순이네3

부자는 그렇게 원하던 것을 얻어 왔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부인이 따라 들어오면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보 그거 아세요? 복순이네가 돌아왔다는구려?” “뭐야? 그 괘씸한 놈들! 도대체 왜 또 들어온거래? 내가 그놈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봤는데!!!!” “듣자하니 박대감네 일꾼으로 들어왔다던데 당신 오늘 거기 다녀오지 않았수?” “뭐야?!!!!! 제길, 날 봤겠구만. 날 봤을거야. 이게 무슨 창피래 그래. 하지만 거기 재산 담당하시는 분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어. 보라구 나에게 이렇게 재산을 빌려 주시지 않겠나?” “그 참 다행이로군요. 이걸로 우리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볼 수 있겠구려.” 하지만 빌려온 부자의 재산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낭비벽이 심했고, 자식들은 도박에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부자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아내와 자식들의 행태에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박대감네 집에 찾아가야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이번에도 부자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안으로 맞아 들였지요. 부자는 황송해 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순이네는 차를 내오라 하고 부자를 극진한 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으리 송구스러운 일입니다마는… 한 번만 더 출전을 해 주실 수 있으시련지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헌데 지난 번에 내드린 건 어찌 쓰신 건지요?” “이러 저러한 일에 투자를 하다보니 그만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복순이네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의 가정 상황이 어떤지 말이지요.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르는 척 속아 주기로 합니다. “그렇군요. 다시 한 번 빌려 드리지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적은 돈도 아니고 이렇게 아무 보증도 없이 빌려 드리는 건 저희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달리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

어느 세례 상담

오늘은 사무실에 근무를 서는 날입니다. 사무장이 저를 찾습니다. - 신부님, 어떤 자매가 세례 관련해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네요. - 그래요?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한 자매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소 지으면서 다가가서 뭐가 궁금하시냐고 물었습니다. - 내 아이 세례를 주고 싶은데요. 대모가 견진을 받지 않았어요. - 아, 그래요? 내년에 성인 견진이 있으니까 준비하셔서 받으시면 됩니다. - 근데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예요. - 네? 그러면 대부모로 받아들이기 곤란한데요. 왜냐면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대자녀들을 이끄는 사람이 된다는 말인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가톨릭 신앙의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 하지만 우리 아이 고모인데요. - 거듭 말씀드릴께요.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의 친분 관계나 재력과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의 전수자이자 보호자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최소한도로 가톨릭 신앙을 지닌 이어야 해요. 그리고 그 밖의 요구사항도 보는거지요. 견진을 받은 성숙한 신앙인인지, 누구가와 함께 살고 있다면 혼인성사의 은총 안에서 살고 있는지 말이예요. 가톨릭의 규정들은 귀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 안되겠다며 방금 등록한 거 환불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 네, 원하시면 돈 되받아가시면 되어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은 아이의 세례에 대한 책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이라는 거예요. 자매님 본인이 이 세례 여부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단순히 원하는 사람이 대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고를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이 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매님이라는 걸 알아두셔야 해요. 결국 자매는 환불을 받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조금은 짜증이 난 표정이었지요. 그래서 그러시라고 내

어둠이 진리를 만나게 되면

어둠이 진리를 만나게 되면 그 첫 반응은 밀려남입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초가 놓이는 곳마다 어둠이 밀려나고 빛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어둠이 아닙니다. 이 어둠은 인격적 어둠입니다. 어둠 속에 살아온 인격이지요. 그래서 이 어둠은 그 반작용을 시작합니다. 즉 빛을 몰아내려고 하지요. 그래서 빛이 나약하면 어둠에 의해서 제압당하기 쉽습니다. 영적 초보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이지요. 이제 겨우 빛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마치 스스로 위대한 스승이라도 되는 듯이 어둠에 대적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코를 다치곤 합니다. 그래서 어둠에 들어서는 빛은 충분히 강해야 합니다. 촛불의 연약한 빛이 아니라 숯불의 쇠도 녹일 정도로 뜨겁지만 겉으로는 은은한 빛이어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제압당하지 않고 바람으로 인해 더욱 커지는 빛이어야 합니다. 대뜸 너무나 뜨겁고 강한 빛을 들이밀면 이 ‘인격적 어둠’은 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아주 은은한, 하지만 내적으로는 강력한 빛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빛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어둠이 점점 빛에 적응하게 말이지요. 이 작업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고 경우에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 인격적 어둠이 빛을 수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인격적 어둠은, 빛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이 많이 끼어있는 나약하고 연약한 빛이지요. 그래서 서두르면 안됩니다. 조금씩 천천히 밝혀 나가야 합니다. 물론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어둠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셈이지요. 빛을 즐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빛을 바라본 이들, 빛을 체험한 이들, 그리고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