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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4의 게시물 표시

내면 세계의 구현

외면의 세계는 내면이 구현된 것 뿐이다. 아이폰을 예를 들어보자. 만일 누군가가 아이폰을 상상하지 않았더라면 아이폰이 ‘우연히’ 나오는 일은 없다. 그리고 어떤 일이 ‘우연히’ 발생된다 하더라도 그 우연을 잡아내는 내면이 없다면 그 우연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예술도 기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시적인 것들은 비가시적인 우리 내면의 산물인 셈이다. 가시 세계는 변화가 어렵다. 일단 한 번 조성된 것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면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내면이 바뀌면 외적인 것들도 그에 따라서 변화되는 법이다. 우리 나라는 유교 중심의 예의 범절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고 그에 따른 여러 제도들과 문화 양식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내면이 변화고 있다. 그렇게까지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지 않고 보다 자유 분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외적인 세계에 변화를 가하는 중이다. 우리가 어떤 내면을 지니고 있는가로 인해서 외면이 구현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국내외로 일어나는 상황에 개탄을 하지만 그들 역시도 성장하면서 내면이 굳어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의 수많은 어른들도 한때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근본 목적에는 우리의 보다 내면적인 것, 즉 우리의 신앙이 달려있다. 신앙이 빠진 내면탐구는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면 개혁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통해서 참된 의미의 내면의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일 뿐.) 영원을 향해서 마음을 모으면 우리의 외면도 변해가게 된다. 하지만 영원을 잃은 외면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는 걸 보면, 그 역으로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무너져 있고 굳어져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상담

- 신부님, 학생들 중에 자기 집안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애가 있어요. 그냥 ‘인내’를 가지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뭘 더 해줘야 할지 몰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교리교사 모임을 마치고 질문 하라는 말에 한 젊은 남자 교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 아주 작은 꼬마 아이에게는 돌멩이 하나를 들라고 할 수는 있어도, 아주 무거운 이삿짐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교리교사이지 전문 상담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장차 그렇게 될 수는 있습니다. 지금부터 꾸준히 정진하고 학식을 갖추어 나가면 다른 누군가를 인도해 줄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교리교사로서 애정을 갖고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아직 교리교사들이 많이 어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애정의 방향은 흔히 한 곳으로 집중되게 됩니다. 즉, 남자 교사는 맘에 드는 여자아이에게, 여자 교사는 맘에 드는 남자 아이에게 집중되게 되지요. 마음이 그렇게 한 곳으로 가게 되면 수많은 문제들이 동반되게 됩니다. 이미 작녁에 우리 본당에서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한 교사가 교리반 아이와 사귀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함.)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 드리는 것은 교리교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담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모두 저에게 데리고 오라는 것이지요. 함부로 여러분이 상담 하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른 마음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 교사가 남자 학생에게 애틋함을 지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 즉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 밖의 것은 저와 이야기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사에 포도주를 쓰는 이유

- 왜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쓰나요? 성인 견진반 교사가 자기반 학생이 물었다며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 그것은 예수님이 역사 안에 실존하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우리나라에서 활동 하셨더라면 우리는 빵과 포도주 대신에 밥과 김치 그리고 국을 올려 놓고 미사를 드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000년 전 지금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셨습니다. 분명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등장하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은 모든 비유를 당시의 생활을 바탕으로 꺼내셨습니다. 그래서 ‘양’도 ‘포도원’의 비유도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그 지역의 주식은 빵과 포도주였습니다. 그래서 그 빵과 포도주가 오늘날 미사를 드리는데 계속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가톨릭 신자는 예수님이 포도주를 드셨다는 걸 핑계로 자신이 술을 퍼마시는 것을 정당화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드셨고, 술꾼들과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술에 늘 쩔어 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였을 뿐이지요. 저도 지금 거리에 나가면 술집에 있는 신자들이 저에게 인사를 합니다. 저 역시도 술꾼들의 친구이지만 그것이 곧 제가 술에 쩔어 산다는 건 아니지요. 예수님은 절제를 가르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더러 늘 술에 취해 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요. 이제 왜 빵과 포도주를 쓰는지는 이해 하셨지요?

그날에 일어날 일

수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심사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겸손한 이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도리어 의인이 되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일어날 일을 세세하게 기술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이미 수차례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는 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들을 마음이 없는 우리는 최신 패션 소식이 더 솔깃하고, 한국 정세가 더 귀에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거쳐야 할 시험이 있으니 오직 준비한 자만이 건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 누구도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탄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존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들은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이들에게 듣고 배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서 하는 사람의 일이어야 합니다. 단순한 사람의 일이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에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 즉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사제가 가정 방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위해서 상담을 해 줍니다. 하지만 이 사제의 목적은 그 가정이 부유하기에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나중에 거기에서 뭐라도 얻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말을 들으면서 대답을 하지만 그 목적은 그 가족을 기분 좋게 해 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제는 올바른 분별력을 적용 시킵니다. 그 가정이 부유하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가정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침착하고 인내롭게 듣고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해 줍니다. 설령 그 조언이 그 가족을 너무나도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일지라도 하느님이 바라는 방향이 그러하다면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타이틀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길에 걸림돌에 불과합니다.

보이지 않음

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눈이 모든 걸 일순간에 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동전 하나를 아주 교묘하게 손바닥 안에 숨길 수만 있다면 마술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만 인정하려고 들기 때문에 자신의 눈이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이 영적인 것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나타나야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중독에 빠져드는 한 사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외면은 전혀 변화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술이든 쇼핑이든 그 어떤 것이든 한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빼앗아 가기 시작하게 되면 결국 이 사람은 거기에 ‘종속’되고 맙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내면으로는 이미 엄청난 족쇄, 쇠사슬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신경써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의 이런 마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다만 손에 뭔가 쥐어질 때에 비로소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그래서 대부분 배은망덕한 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감을 잡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눈으로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숨겨진 것과 나아가 내적인 것까지 합하게 된다면 우리는 거의 장님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많습니다.

반석

반석이라는 의미는 바닥돌이고 기초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기초는 이리저리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낮은 곳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위를 밟고 설 수 있어야 하지요. 예수님이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러저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겸손(저는 죄인입니다.)과 믿음(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굉장히 낮은 곳에 머물러 있어 다른 것들이 그를 밟고 올라설 수 있었고, 또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았기에 기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반석입니다. 각자의 돌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건물을 구성합니다. 하지만 반석이 없으면 다른 것들이 모두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반석’을 마련하셨고 그 위에 다른 부속물들을 세우셨지요. 우리는 여러가지 다른 종류의 반석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단 하나의 반석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반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낮음과 ‘믿음’이라는 굳건함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역사를 거치면서 이러저러한 미흡함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반석은 함부로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반석의 자리의 본래의 뜻이 손상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석은 낮고 튼튼할 것입니다.

내면과 외면

외적으로 받는 것이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법입니다.  내면은 오직 내적인 움직임으로 변화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수천번을 듣는다고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내면의 결단으로 사랑할 결심을 할 때에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외적인 분별에 치중하고 외면으로 사람을 판단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사람도 메스컴에 오르고 인기를 얻으면 그의 말이 힘이 있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것들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가치들을 너무나 하찮게 취급하고 거의 내다 버리듯이 하고 있지요.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아주 작은 하지만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단순히 외적인 모습과 말마디 만으로 분별하고는 심판해 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들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용서와 연민을 지닌 이들은 그 용서와 연민을 받을 것이고, 가혹한 심판을 가한 이들은 그 마찬가지의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내어주는대로 받는 법입니다.

득과 실

한 청년이 친구의 귀한 보석을 하나 훔쳤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이 청년은 물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잃은 셈입니다. 이 청년은 그 친구가 보는 데에서는 보석을 내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를 잃은 셈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들킬 것 같은 ‘두려움’에 젖어 살게 될 것입니다. 한 청년이 불쌍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돈과 시간을 헌신해서 봉사 활동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이 청년은 돈과 시간을 잃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청년은 내면이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실천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쁨이지요. 오직 실행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이라 외적 상황이 바뀌어도 별다른 상관이 없습니다. 기쁨은 지속적입니다. 아니 영원하지요. 득과 실을 따질 때는 단순히 외적인 결과만 보면 안됩니다. 내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은 어리석음이지만 우리들에게 신앙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랑

사랑은 결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어주는 헌신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고 그 결과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치 정원사의 일과도 같습니다. 정원사는 정원을 돌봅니다. 꽃을 심도록 땅을 준비하기 위해 소용되지 않는 것을 뽑아내지요. 끈기를 가져야 합니다. 물을 주고 심은 것을 돌보아야 하지요. 정원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해충과 장마와 가뭄이 있을 것이고, 나쁜 풀들이 돋아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정원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데살 3,10)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먹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영혼이 가득차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저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지요. 그리고 먹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일은 단순한 세상의 일, 동물들도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일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먹고 살기를 바라기에 당연히 생존을 위해서도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즉 사랑의 행업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사제도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정말 열심히 일하는 듯이 보이는 사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리 저리 분주히 활동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지요. 하지만 그 목적이라는 것이 그런 자신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 만족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앞에서 유명세를 타려는 것이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의 일이 됩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모양새를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이기적이고 하느님의 일에 게으른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욕구가 쓰러질 때에 그가 하던 일도 쓰러지고 맙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지요. 하느님이 일하시게 자신을 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죽더라도 그 일은 남아 있게 됩니다. 왜냐면 그 일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이니까요. 하느님은 그가 죽고 나면 다른 이를 불러다가 같은 일을 시키실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분별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스스로 세뇌를 시키지요. 하지만 실

대부

사무장이 와서 묻습니다. - 신부님 한 엄마가 찾아와서 아이들 세례 등록하려고 하는데요, 대부들이 세례만 받았다고 하네요. 어째야 할까요? - 음… 내가 가서 이야기 해 보지요. 전형적인 원주민 복장의 아줌마가 아이를 업고 앉아 있었습니다. - 자, 잘 들으세요. 이곳 지역 교회는 대부가 견진을 받기를 강하게 권고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대부라는 존재는 단순히 경제적인 원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 인도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이 다음에 견진을 준비할 수 있는가요? 그걸 저에게 약속할 수 있나요? - 그 사람 오루로(멀리 떨어진 도시) 살아서 당장 오기는 힘들어요. - 음,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저는 대부가 어떤 존재인지 거듭 설명해 드릴께요. 그러니 그 다음은 스스로 결정하세요. 대부는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견진을 받거나 적어도 견진을 받을 각오를 다져야 하지요. 술에 만취하지 않고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대부가 되어야 해요. 알아 들으셨지요? 곰곰이 생각하면서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 네. - 좋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대부로 할지 이제 스스로 결정하세요. 하지만 그 뒤의 결정은 온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 아이 신부님, 저에게 잘못을 다 뒤집어 씌우면 어쩌십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저는 잘못을 뒤집어 씌운 게 아니라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인데 본인 스스로 자신이 결정하려는 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아는 셈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저는 어떤 사람이 대부가 되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드렸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세요. 이제 사무원은 당신이 누구를 대부로 정하든지 받아들일 겁니다.

성모송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데요, 성모송은 뭔가요?” “자, 루카복음 1장 28장을 봅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같은 1장의 42절을 봅시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처럼 성모송은 성경 구절을 기반으로 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걸 설명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이지요. 그리스도론은 예수님이라는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 즉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는 ‘하느님의 어머니’ 즉,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느님보다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모님은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입니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교회는 ‘성경’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그 이전에 수많은 행동과 말씀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핵심을 뽑아낸 것이지요. 제가 오늘 성경강의를 했지만 누군가 이를 역사적으로 기록한다면 성당 안에 창문이 몇 개고, 색깔이 뭐고, 의자 수가 몇 개고, 오늘 온 아이들 중 하나가 잠들고 다른 하나는 누워서 놀고.. 뭐 이런 식의 서술은 전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수많은 것들이고 다만 역사가는 그 안에서 ‘마신부가 성경강의를 무슨 주제로 했다.’ 정도만 기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바탕으로 하지요. 성경 안에는 하느님이 알려 주시고자 하는 계시의 주된 내용이 모두 들어 있지만 여전히 계시는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좋은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

문화와 신앙

오늘 성경강의 마치고는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8월 내내 우르꾸삐냐 성모상 축제 9일기도를 저마다 다른 날짜에 한다고 난리인데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같은 볼리비아 사람에게서 이런 의견이 나온다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결국 이상한 것은 저만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닌 셈이었지요. “문화는 존중합니다. 각 나라마다, 각 지역마다 저마다의 문화가 있지요. 하지만 이 문화는 단순히 좋은 시선으로만 보기는 힘이 듭니다. 오늘 성경강의에서도 배웠듯이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거든요. 돈을 사랑하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요. 물론 신실한 마음으로 성모상을 모시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모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돈’을 위해서 성모상을 모십니다. 즉, 자기 상점에 돈 더 잘 벌게 해 달라고 모시는 경우가 많지요. 이들이 섬기려는 것은 돈이고 결국 자신의 욕구인 셈입니다. 이들이 하는 축제의 양상을 보아도 그러하지요. 성모상을 모셔두고 축복을 받은 다음에는 술판을 벌이고 잔뜩 취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들이 성모님의 겸손과 신앙을 얼마나 본받고 있는지는 의심할 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공적인 자리의 성모상 축복식은 사람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가도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하려는 축복식은 사양하고 오히려 미사 때에 그 작은 성모상을 들고 오라고 가르치곤 하지요. 거듭 말하지만 저는 문화는 존중합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게 분명하지요. 이제 본 질문으로 돌아옵시다. 9일기도를 저마다 하는데 도대체 언제 해야 할까요?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마칩니다.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그들이 하고픈 걸 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원하는 건 하게 마련이니까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내버려두면 되는 셈입니다. 그냥 하고픈 걸 하게들 두고 그것 때문에 마음쓰지 마십시오. 그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니까요.”

충실한 종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종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양식을 주는 것이고 적합한 때에 이루는 것입니다. 즉 이 말에는 두가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양식을 줘야 한다는 것, 때가 되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식이 아닌 엉뚱한 것을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은 하느님의 양식을 줘야 합니다. 돈이나 기타 다른 것들이 아니라 양식, 즉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다리는 먹거리를 줘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혼을 채우는 것이고 사랑이 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줘야 한다는 말은 양식 말고 다른 것을 챙길 때, 혹은 휴식할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일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반드시 양식을 줘야 할 때에는 잊지 않고 양식을 줘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양식을 줘야 할 때에 놀고 먹고 마시고 잠자려고 하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충실한 직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와서 ‘내 멍에’를 매라고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가치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예수님은 가장 균형잡힌 사람이었고 당신 자신이 바로 척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의 필요한 제도와 법규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법규를 중요시 합니다. 법규가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만든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신호등도 지키고, 그 밖의 사회적 제도가 올바르게 운영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필요한 일입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그 나름의 법규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것은 선하고 약한 이를 보호하고 강한 이들이 제멋대로 설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헌데 문제는 보다 더 중요한 법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움, 자비, 신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법규로써 이를 잘 지키는 사람은 사실 외적인 법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인간의 외적 법규는 내적 법규를 어기는 이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요. 서로 정당하고 자비롭고 믿으면서 살아간다면 아마 세상의 모든 법규가 굉장히 단촐해지리라 믿습니다. 복사단 모임을 하면서 모든 복사단들이 시간을 잘 지킨다면 시간 약속 엄수 규정 따위는 필요없는 셈이지요. 세상의 제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우리는 일상 안에서 그것을 위해서 더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내면의 가치, 의로움, 자비, 신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돌덩이들

누군가 성당에 돌덩이를 잔뜩 들고 왔습니다. 볼리비아 코차밤바라는 도시에 ‘우르꾸삐냐’라는 지역에서 성모 발현 기적이 있었는데 그 언덕의 돌덩이들입니다. 사람들의 민간 신앙은 그 언덕의 돌을 가져와서 집에다 모셔다 두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그리스도교 문화 안의 부적인 셈입니다. 그래서 나가서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곳의 문화는 존중하지만 그걸 축복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돌덩이들을 쳐다보면서 ‘덕행’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설명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동의를 했고 미사를 드리는 동안 잠시 제의방에 치워 두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이 사람들은 제 말을 존중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걸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과하게 원하지요. 즉, 여러가지 것들을 무시하고 파괴하면서까지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어떤 영향을 받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들이지요. 탐욕이 도를 넘어서는 경우들입니다. 엉뚱한 믿음 하나 때문에 그 무거운 돌을 이리 저리 지고 나르는 이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닌 엉뚱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성사를 엉망으로 보고, 또 평소의 삶에서도 전혀 괴로워할 이유가 없는 것에도 마음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반면 정말 신경써야 할 ‘선과 사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요. 예수님을 초대할 때에는 마음을 준비해야지 방석 색깔을 신경쓸 필요는 없는 셈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돌덩이들은 우리 스스로 지고 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지고 나가야 하고 가능하다면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돌덩이들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하느님에게로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로마 11,36) 이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요약입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초기 철학자들은 만물에 그 완전한 모습인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고 지상의 모든 것들은 그 ‘이데아’의 모상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이어 나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정 반대의 방향을 제시했지요. 우리가 보고 듣는 사물들이 실제이고 거기에서 우리가 비슷한 것을 서로 묶어 모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온갖 종류의 과학의 아버지가 된 셈이지요. 이어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가 나타나 둘을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즉, 만물은 위에서 나와 지상을 거쳐 다시 위로 돌아간다는 말을 한 것이었지요. 바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철학적으로 고스란히 반복한 셈입니다. 어찌보면 참 재미난 일이지요. 지상의 현인들이 시대를 거쳐서 논쟁한 것을 한 마디로 묶어버린 셈이니까요. 사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분단되어 있고 아직도 싸우는 이유에도 ‘사상’의 역할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여전히 이념적 대립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로 모인다는 의미가 ‘우리 로마 가톨릭이 최고야!’라는 생각이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와 정의와 평화와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다른 엉뚱한 특이한 예식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와 문화 안에서 지니게 된 가톨릭적인 고유한 특색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가치들입니다. 로마 교황은 붉은 색 신을 신을 수도, 검은 색 낡은 구두를 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

열쇠

하느님은 이리 저리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번 열쇠를 주기로 하셨으면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열쇠를 다윗 왕좌에게 맡기셨고, 그리고 다음으로는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다윗 왕좌에서 구세주가 나타났고 그 구세주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 22,22)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9) 베드로에게 맡겨진 열쇠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상의 교회에게 권한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음이 될 것입니다. - 누가 다윗 집안이고 누가 교회인가? 즉, 다윗 집안의 혈통은 어떻게 이어지고 교회의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집안의 혈통은 ‘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다윗 집안의 혈통은 조금 다릅니다. 피는 피이지만 전혀 다른 피로 이어집니다. 바로 ‘신앙’의 피입니다. 아무리 피로 혈통을 이어받아도 신앙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이 혈통은 끊어지게 되고, 반대로 비록 피를 받지 않더라도 신앙의 피를 받으면 이 집안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단순한 ‘예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기필코 이루어지고 맙니다. 하느님은 단 한번도 당신의 약속을 저버리신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약속에 참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약속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단 한번의 예식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꾸준히 약속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예복

- 예복은 세례가 아닙니다. 예복도 입지 않아 쫓겨났다는 성경 구절을 풀이하면서 시작한 말입니다. - 예복은 세례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라시는 것이 희생이나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단순한 세례 ‘예식’은 예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복은 우리의 낮추어진 마음, 겸허한 마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례만 받으면, 첫영성체와 견진만 받으면 일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식일 뿐입니다. 그 예식이 진정한 성사가 되려면 우리가 그 예식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순히 예식을 거행하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세례 증명서만 떼어 가는 셈이지요. 그들은 신앙인의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셈이지요. 행여나 아마존 밀림 지역에서 어느 가족이 선교사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서도 절대자이신 신을 섬기고 자기들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면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해 봅시다. 그럼 그 가족이 죽으면 지옥행인가요? 아닙니다.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가족은 하느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반대로 세례를 받고 모든 성사 생활을 충실히 하고, 주일 미사도 절대로 거르지 않으면서 늘 앙심을 품고 살아가고 탐욕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은 그 세례와 철저한 율법 준수 때문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진정한 예복은 예식이 아니라 우리의 겸허한 마음이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복이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복을 준비하지 않으면 밖으로 쫓겨나 가슴을 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교리교사

“수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하던 교리교사가 냉담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에 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교리교사 모임을 하면서 주제를 꺼냈습니다. 교리교사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이상향을 공유하면서 ‘이 땅의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안내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은 드높이 있지만 아이들은 그 이상에 관심이 없고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들이 좋아하는 걸 찾는 중이지요. 그래서 교리교사는 두 가지를 신경써야 합니다. 첫째로는 우리의 이상을 굳건히 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도 그 모든 일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고 맙니다. 남들에게는 열심히 영원을 찾으라고 하고선 스스로 영원을 저버리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리교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올바른 방향정립입니다. 교리교사생활도 자꾸 하다보면 길이 들게 마련입니다. 처음에나 신앙학교를 준비하는 게 힘들지 몇 년 지나고 나면 마치 전문직의 기술자처럼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행사들’이 아니지요. 문제는 우리의 방향성입니다. 아무리 일을 손쉽게 잘 처리해내는 경력있는 교사라 하더라도 스스로 냉냉한 가슴을 지니고 있다면, 차라리 일을 서투르게 해도 뜨거운 열정으로 하는 신입 교사가 보다 나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성공관’에 사로잡혀 보다 나은 행사를 치뤄내려고 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을 끌어모으고 얼마나 일들이 완벽하게 진행되는가를 보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 생각부터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세상적인 성공이 교회의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차라리 겉으로 드러나는 수량에는 실패한 것 처럼 보이더라도 그 순간에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해 진정으로 마음을 모으고 보다 참된 방향을 위해서 열심히 이끌고 노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욱 성공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효

성찬례(성체성사, 미사)

진정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탐구하는 진지한 개신교 형제들이라면 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례’ 즉 ‘미사’입니다. 왜냐면 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유지한다고 주장하는데 시대 안에서 그 정통성의 뿌리가 갈라지기 이전에도 수많은 성인들은 ‘성찬례’에 대한 강조를 거듭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미사는 그 엄숙함과 거룩함에서 타 예식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곧잘 엄숙하고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미사의 장면, 또는 미사가 드려지는 성전의 장면을 담아내곤 하였지요. 성찬례의 근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우리가 매번 미사 안에서 반복하여 듣게 되는 말이지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미사 안에서 빵을 나눕니다.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몸이라고 선포하신 그 빵을 나누지요. 하지만 단순히 그 빵을 받아먹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세상에 먹히는 빵이 되라고 모범을 보이시며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거룩한 성찬례 이후에 십자가에서 산산 조각이 되어 죄인들을 위해 먹히는 빵이 되셨지요. 가톨릭 신자들의 부족함은 여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성찬례’만 참례하고 그 성찬례의 본질적 가치를 삶 안에서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형제들의 비판은 때로는 정당합니다. (물론 대부분 엉뚱한 비방들이 더 많긴 합니다. 성모님을 숭배한다느니, 우상 숭배를 한다느니 하는 식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즉 예수님의 빵을 보고 그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그 신앙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빵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는 당신의 몸에 대한 가르침,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이 꽤나 많은 분량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제사꾼들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빵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빵이

미사의 이유들

1) 미사에 대한 인식 미사가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미사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미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어서 미사를 소홀히 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미사를 본래의 목적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받아들이다가 결국 그 이유들이 사라지면 미사도 소홀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미사를 미사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누가 때려 죽인대도 미사를 나오고 맞아죽을 사람들입니다. 2) 교회적 소속감 미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사에 나오는 이들은 ‘소속감’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때문에 비록 미사에 대한 인식은 없지만 교회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참여와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사에 참례합니다. 적어도 이들은 교회를 통해서라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는 ‘소속감’이 사라지고 나면, 즉 이전까지 참여하던 그룹에서 해방되고 나면 자연 참여 욕구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3) 법적 의무감(구원에 대한 개인적 욕구) 소속감이 없는 이들, 그럼에도 미사에 나오는 이들은 계명에 대한 ‘의무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개인 구원에 대한 욕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미사를 거르면 어떻게든 성사를 보려고 합니다. 율법을 어겼으니 다른 율법으로 메꾸려는 식이지요. 하지만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찾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성사를 거르고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비로소 ‘쉬는 교우’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다른 목적(세속적 목적) 그 밖의 목적으로 미사에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여서 신뢰를 얻으려는 사람, 사람을 대하는 장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람,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오는 사람…

알면 못한다

부부가 되려는 이들은 부부의 의무와 책무를 생각하고 부부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둘의 좋은 감정과 피어나는 사랑 때문에 부부가 되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부부가 된 후에 닥치게 될 이런 저런한 크고 작은 일상적인 어려움을 모두 타진해 본다면 그 어떤 부부도 섣불리 혼인가약을 맺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제가 되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사제가 되려는 것이지 사제의 고독과 인간적 고뇌, 그리고 사목적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고려해 본다면 함부로 사제직을 선택하려는 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고 조금씩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알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숙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부족함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든 사제든 자신의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자신을 되돌아보면 비로소 그림의 윤곽이 잡히는 것입니다. 왜 처음은 그리 달콤했고 그 진행 과정은 그렇게도 무거웠으며 마침내는 웃을 수 있게 되는지를 뒤늦게 깨닫는 것이지요. 물론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도 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하는 선택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첫 이끌림이 우리의 무지 때문에 헛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비록 미약하지만 우리 의지의 작고 미약한 봉헌도 받아들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주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고 맡겨 드리는 것이지요.

조금씩 배워나가기

3살짜리 아이가 고등 수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먼저 ‘수의 개념’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과욕에 사로잡혀 수많은 영성 대가들이 남긴 글들을 통해 ‘방법론’을 터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끌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마치 고등 수학책의 책장을 찢어내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책장을 찢어내어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씨앗을 심자마자 열매를 바라는 마음은 서투르고 성급한 마음입니다. 아직 자라지도 않았는데 얼른 먹고 싶어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이지요. 이제 겨우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룬 듯이 생각하는 철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남의 말만 되풀이하는 앵무새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마치 그들의 지혜가 자신 안에 녹아들어 있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들의 가면은 어렵지 않게 벗겨집니다. 그들에게 ‘시련’이 다가올 때면 그들은 당장 가면을 벗어 던져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 어쩌면 가장 쉬워 보이지만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오히려 내 손 앞의 휴대폰이 나에게는 더 실존적이지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우리는 눈에 띄게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축구 경기가 있을 때에 텔레비전 앞에서는 모두 감독이 되지만 실제 운동장에 나가면 잠시만 뛰어도 헉헉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씩 훈련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물 안 개구리

우리는 한국 교회에 살아서 한국 교회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특색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세계 교회, 만민을 아우르는 교회에 더욱 다가갈 필요가 있지요.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밖에 풀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새가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저 우물 안의 공간과 높이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지요. 그래서 그 안에서 헐떡대고 살아갑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좀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서로 다투곤 하는 셈이지요. 우물을 빠져나오는 길이 꼭 다른 나라로 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다른 우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 우물에서 나오려면 우리의 마음을 드높여야 합니다. 왜냐면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설 때에 비로소 큰 그림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그 길은 하느님이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베풀어 주셨지요. 우리는 모두 공평한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에게 나아갈 공평한 기회이지요. 사제라고 수도자라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우물을 벗어나게 되면 다른 이들을 진정한 의미로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축복의 근원이 되지요.

모두가 하늘나라에 갑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우리가 모두 하늘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 개념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느 곳에 들어가려면, 가령 볼리비아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려면 수속을 밟아야 하고 운송 수단을 통해서 시간이 걸려 겨우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은 곧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그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물론 ‘그 다음’이라는 표현도 웃기는 말이지요. 하늘 나라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일단 모두가 들어가지만 누구는 견디고 누구는 견디지 못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누구는 기뻐 날뛰고 누구는 너무나 큰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이들은 그 안에 머무르고 부담감으로 작용하는 이들은 ‘스스로’ 거기에서 뛰쳐 나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마는 어느 부자의 초대로 우리 볼리비아 동네 아이들을 최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저는 고급 레스토랑도 가보고 동네 시장에서도 먹어봐서 아무 상관없이 그런 곳에 가서도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 큰 부담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뛰쳐 나오고 싶어합니다. 비슷한 일이 하늘 나라에서 벌어집니다. 언제나 선과 진리, 정의 안에서 생활한 이들은 하늘 나라는 그들에게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온갖 선과 진리 그리고 정의가 찬란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어떤 어두움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반대로 악과 거짓, 그리고 불의 안에서 살아온 이들은 그곳은 자신들에게는 너

제자리

사람들이 사제를 찾는 이유는 ‘거룩한 권위와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수도자를 찾는 이유는 ‘겸손한 봉헌의 삶’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평신도를 찾는 이유는 ‘세상 안에서의 모범’ 때문입니다. 헌데 사제가 평신도인 양 세속적이고, 수도자가 사제인 양 권위적이고, 평신도가 수도자인 양 도피적이 되어버리면, 그 본래의 성질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자들이 됩니다. 자신의 역할을 해 내지 못하는 소금은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초는 밝히는 데 쓰고, 가스불은 요리하는 데 쓰고, 연탄불은 방을 덥히는 데 쓰는 겁니다. 초로 요리할 수 없고, 가스불로 방을 덥힐 수 없으며, 연탄불로 밝힐 수 없습니다. 모두 제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신자들이 영적 양식에 허덕이는데 그걸 마련하지 않고 다른 일에 매진하는 사제, 사람들이 기도를 청하고, 겸손한 모범을 청하는데 사목하려고 드는 수도자, 일상 안에서의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고자 하지만 성당으로 도피하는 평신도들… 이들은 뭔가 어긋난 이들입니다.

일시적 유행

의로움을 말한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의로움을 살아갈 때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선교에 대해서 말한다고 선교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선교지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들 안에 하느님을 전할 때에 선교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를 모르니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것을 찾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섣불리 판단하고 말아 버립니다. 교황님의 말이 힘있는 이유는 당신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살아오셨고 살아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고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가르침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정치 현안에 대해서 말을 하고 숨겨진 진실을 밝혀서 SNS상에 배포하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하루에 마주하는 실제적인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내 사랑을 드러낼 때에 내가 진정 ‘의롭고 사랑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에 사람들의 동조를 끌어내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움직임이 우리의 평소 생활에서도 반영되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보물을 남에게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진정한 진리와 정의이신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살아가고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말이지요.

요한복음 10장

목자와 양 예수님은 그 지역의 문화 속에 실존하셨던 분이고 자연 그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대표적인 비유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오늘날에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순박한 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양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을 떠올려 보아도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목자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진실되고 속임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문으로 드나듭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언제나 곁길로 들어섭니다.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빈 틈을 바라보고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같은 것들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식으로 공공연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들은 바로 목자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이상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들을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불만에 이런 다른 길을 찾아 나서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양 하지만 다른 한 편, 양들은 목자가 누군지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부르면 금새 그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피해 달아납니다. 하지만 양들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 아닌 이들을 쉽사리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픈 양들이 있습니다. 올바로 듣지 못하고 올바로 걷지 못하는 양들, 엇나가기 시작하는 양들이고 길을 잃는 양들이지요. 우리는 이런 양 무리를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양이 아니고,

넓은 시야

만일 죽음이 예수님을 집어 삼키지 않았다면 죽음은 여전히 세상에서 득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예수님을 집어삼켰고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는 그분의 뜻은 우리의 단순한 능력으로 재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아예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진리와 선과 정의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진리와 선과 정의가 아닌 일들이 눈 앞에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 항변하듯이 되묻곤 하지요. 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왜 말도 안되는 거짓을 말하는 권력이 난무하고 악한 이들이 득세하는데 하느님은 가만히 있느냐는 식으로 따지고 듭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짧은 시야 때문에 일어나는 우리의 답답함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믿고 기다리면서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이 좋습니다. 사제는 사제의 자리에서 수도자는 수도자의 자리에서 평신도는 자신이 맡은 세상 안의 직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사제가 평신도가 되어 일하려 하고, 수도자는 사제의 역할을 자청하며 평신도는 수도자처럼 지내고자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저마다의 직분을 허락하시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는 자신의 길이 아닌 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고 나서곤 하니 말입니다. 오늘날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마치 유행처럼 번지는 행동관습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참여해야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진정한 의로움은 빌라도의 손씻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찰나를 살아가는 인생들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마냥 내가

마음 주고받기

손에 뭐가 쥐어져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외적인 것, 형태를 갖고 있는 것,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언제나 ‘확인’하려고 든다. 좋은 물건을 사내야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일상적인 희생은 생각지 않고 어머니가 사다 주는 좋은 옷만 반기는 아이들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 결과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잔뜩 지니고 있어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그 물건은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가진 것들이 나누어지는 이유는 좋은 마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나누는 즉시 보상이 따라온다면 그 또한 ‘받을 상을 다 받는 셈’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행을 할 때 꽁꽁 숨겨서 하라고 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서로를 ‘목적’으로 탐색한다. ‘인격’이 아니라 ‘대상’에 불과한 이들이다. 인격은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지만 대상은 이용하고 나면 끝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외로워하고 자살하는 이유는 그들이 ‘대상’으로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명 연예인들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근본에는 ‘인격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들은 곧잘 인격적인 만남을 찾다가 그것을 이용해먹는 이들에게 농락당하고 스캔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참되고 온유한 마음, 서로를 보듬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저 필요한 것만 슬쩍 챙겨가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를 보듬고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내어줄 것은 ‘돈’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뒤따라가게 마련이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돌려 드려야 하고, 그리고 주변의 이웃들, 가장 가까이는 가족부터 돌보아야 한다. 의외로 가장 가

예수님의 인격성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우리 친구를 대하듯이 우리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을 일상적으로 대하듯이 예수님과 마주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단순히 한 종교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라는 시간의 한계와 중동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쉽사리 이겨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곧잘 예수님을 하나의 ‘상징’으로 대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존재했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남기신 이유는 이 ‘인격적 관계’를 보다 실천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셨고, 지금도 당신의 특별한 제자들과 실제로 함께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자고 마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인격적 체험을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공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신학적 표현이 예수님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아주 학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누구든지 만남을 통해서 삶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지요. 앞으로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머무르시고 사셨다는 이 사실은 여전히 ‘신비’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연한 현실을 구체화하고 생활화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체험을 나누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비로소 예수님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방금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단락, 즉 예수님의 인격성을 공부하신 셈입니다.

공짜?

영리를 추구하는 세상 안에서 ‘공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드사에서 행하는 마일리지 제도나 대형 마트의 1+1 따위의 행사는 모두 ‘계획된’ 것입니다. 뭔가 거저 주어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부차적인 소비가 뒤따르고 있다는 셈이지요. 결국 모든 것은 제 값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즉 영리를 추구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최고봉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공짜로 뭔가를 주는 법이 없습니다. 뭔가를 주고 나면 반드시 그 값을 다시 받아냅니다. 그래서 ‘유혹’을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나쁜 수단을 통해서 뭔가를 얻게 되면 단순히 얻기보다는 실제로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상실’은 뒤늦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눈 앞의 달콤한 대상에만 주목을 하지요. 직장에서 유부남인 자신을 꼬시는 여직원은 참으로 달콤한 대상이지만 반드시 그 뒤에는 치뤄야 하는 댓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활 범위 안에는 이러한 유혹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 앞에 드러나는 좋은 것들에 현혹되어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사탄은 반드시 그 값을 받아내고야 맙니다. 때로 시간이 흘러 내가 한 짓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그 값을 받을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나에게 이런 재앙이 떨어지는가 하고 한탄을 하기도 하지요. 물론 모든 재앙이 악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특별히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이상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을 반드시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평소에 괴로움 속에서도 선한 일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이 고스란히 훗날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아주 비참한 모양새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게 되지요. 하지만 함부로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태생소경을 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 적도 있지요. 우

죽은 가르침

복음의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할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복음화를 이룬 사람은 그 사람을 어느 자리에 두든지 거기에서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복음화를 이루어 낼 것이라는 말이지요. 정반대의 비슷한 표현으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나가서도 샌다. 마찬가지로 내면적으로 복음화를 이룬 사람은 어디에 가서든지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헌데 이 ‘복음화’가 ‘운동’이 되는 순간, 많은 경우에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복음화는 진정한 의미의 변화이고 ‘운동’은 내부는 변화되지 않은 채로 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진정한 복음화의 기쁨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적지 않은 이들은 그걸 ‘운동’으로 변질시켜 버리고 죽은 가르침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스승이 달을 가리키면 함께 달을 보자는 말입니다. 하지만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으니 곤란합니다. 모든 사항이 일종의 ‘행동규약’으로 변해버리고 그렇게 ‘운동’으로 변해 버리는 순간 그 본질적인 가르침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황님이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살자는 것이지 문제A는 B로 해결하고 문제C는 D로 해결하자는 구체적인 지침이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적지 않은 곳에서는 수많은 ‘학술회’가 열리고 ‘강연회’가 열리면서 복음화를 ‘운동’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학술회나 강연회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이미 굉장히 학술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행동하기에 굼뜨지만 사고하는 데에는 무척이나 빠릅니다. 그리고 사고를 통해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요. 실제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복음화의 근본은 살아있는 생생한 열정에 있습니다. 우리의 뜨거운 마음과 그 실천이 진정한 복음화를 이루어낸다는 말이지요.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은 좋은 가르침에 환호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환호에 그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실제로 살아내는 이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어제 저녁 성경강의를 마치면서 질문을 받는데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신부님 교회는 Materialismo를 받아 들이나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단어는 ‘유물론, 유물주의’라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단어 만으로는 교회는 당연히 거부한다고 하지만 어떤 의도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남자가 죽으면서 남기는 유산을 교회에 기증하곤 하는데요. 교회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나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바치는 재산 증여를 말하는 것이더군요. 그걸 우리 동네에서는 materialismo라고 표현하나 봅니다. 어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물론 받습니다. 어찌보면 참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네요. 돼지와 소와 닭이 모여 있는데 돼지가 투덜대기 시작했답니다. 왜인고 하니 인간들은 소와 닭은 잘 보살피는데 자기는 엉망으로 다룬다고 말이지요. 자기네도 인간들에게 좋은 고기를 제공하는데 말이지요. 그러자 소와 닭이 입을 모아 말했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우유와 달걀과 같은 것들을 인간들에게 주지만 넌 죽고 나서야만 주니까 그렇지.’ 이처럼 뭔가 내어주시려면 살아있는 동안에 선한 일을 하세요. 죽고 나서 주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기왕이면 아직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하도록 하세요.” 과연 그 아저씨가 알아 들었을까요?

목자와 양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에제34,2-6)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목자일까요? 양떼일까요? 왜냐면 단순히 양떼라면 우리에게 이 성경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단순히 순진하고 귀여운 양 떼일까요? 우리는 분명히 양 떼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우리는 목자들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람도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우리에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책임이 늘 주어지게 마련이니까요. 한 가정의 가장은 그 가족들의 목자이고, 엄마는 아이들의 목자이며, 이웃들에게 우리는 목자이고, 학교 친구들에게 우리는 목자입니다. 목자란 길을 아는 사람이며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목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들만 먹는’ 이 목자들이 자기들만 먹는다고 하느님은 호통을 치십니다. 목자들의 역할은 그야말로 양들을 인도해서 좋은 풀밭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는 것인데 자기들만 먹기에 문제가 됩니다. 목자들은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양들도 먹여야 합니다. 젖은 양들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사제관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 이유는 바로 양들인 신자들이 자신들이 힘들게 벌

우리가 얻어 만나게 될 것들

우리의 인생길은 어디로 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뚜렷한 두 방향이 존재합니다. 선과 악이지요.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들어붙듯이 사람들은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한 힘을 따라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리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가속도를 더하게 되지요. 그리고는 거기에 들어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방향은 언뜻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매일같이 그 방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잠시나마 마치 돈과는 상관 없다는 듯이 살아갈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돈이 모이는 곳에 발을 들이게 되어 있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곳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구요. 이러한 지향성을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은 달콤한 맛과 향을 찾아서 떠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방향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선, 진리, 정의’를 찾아 걸어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보통은 그들이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이고 위험하고 힘든 길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무릅쓰고 걸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좋은 씨앗, 좋은 원동력이 들어있고 그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저마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의 실체를 얻어 만나게 되지요. 하지만 저는 마지막에 웃을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낮아짐의 신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 뻐기는 자들, 자신을 내세우는 자들을 거부하시고 내치십니다. 반면 낮은 자를 들어높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낮아짐은 신비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높아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본능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항의 족속입니다. 그래서 낮아짐은 ‘신비’입니다. 왜냐면 우리 본성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낮아지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쉬우면 누구나 다 이루어 내었겠지요. 낮아지는 것이 어려운 만큼 하느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질수록 더 많은 은총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비가 오면 빗물은 낮은 곳으로 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고루 내리지만 결국 낮은 곳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서든 ‘평화를 빈다’고 인사를 했을 때에 그들이 평화를 받을 만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돌아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언덕에 물을 뿌렸는데 그 물이 다시 내가 서 있는 낮은 자리로 돌아오는 격이지요. 낮아지는 것의 이 많은 은총을 우리는 많은 경우 이해하지 못하고 높아지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합니다. 낮은 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모두 모이게 됩니다.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순간 순간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다는 것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일 때에 비로소 나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살아있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의 순간에 반응하지 않으며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를 살아갑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실제로 느끼는지 모르는 채로 남들이 원하고 남들이 나에게 느끼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의 현재를 대체하기에 결국 나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게 되고 나는 살아있지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우리만이 알 수 있습니다. 남들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을 만한 존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탁할 사람’을 찾아 서로를 탐색합니다. 그리고 믿을 만하다 싶은 이에게 ‘의존’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찾아 헤메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 자신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때로는 아주 악한 의도를 은밀히 숨기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너무나 큰 실망을 하고는 아예 모든 문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삶’을 선물하신, 그리고 선물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의탁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을 ‘없다’고 생각하거나 전혀 엉뚱한 존재로 탈바꿈 시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동 판매기’ 수준의 하느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할 때 기도하고 결과물을 뽑아내는 수준이지요. 우리가 가장 의탁해야 할 분을 가장 의심스러운 존

정신적 재산의 취득과 상실

우리는 재산의 취득과 상실에 대해서 아주 뚜렷한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손에 내 물건을 쥐고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빼앗기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얻을 때에 기분이 좋다가 잃을 때에 기분이 나빠지게 됩니다. 문제는 ‘정신적 재산’입니다. 우리가 직접 손에 쥐게 되는 물적 재산이 아닌 정신적으로 우리가 취득했다고 느끼는 재산들을 말합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찬사를 던지면 우리는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모욕적인 발언을 하면 그 인기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곤 하지요. 여기에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뭔가를 손에 쥐기 전에 우리의 환상으로 부풀려서 결과를 예상해서 얻게 되고 마치 그것이 나의 것인양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면 마치 내 재산을 누가 도둑질이라도 해 간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꿈에서 도둑이 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꿈 속에서 집도 차도 좋은 가방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도둑맞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정말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정말로 감정적으로 분노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깨닫게 되지요. 그 모든 것이 헛된 환상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진 것들은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정신적으로 미리 취득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며 다만 나의 몇 가지 행동을 보고 찬사를 던진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게 되면 다시 우리에게 화를 낼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진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안정적인 삶을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걱정은 실제로 일어나지

믿음의 크기

믿음이 작다, 약하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요? 믿음은 겸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크기는 ‘겸손’의 크기에 비례한다. 반대로 믿음의 크기는 교만의 크기에 반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교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교만은 내 안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쌓은 돈, 지식, 명예, 권력에서 교만이 나오지요. 내가 뭐라도 좀 더 잘났고 더 빼어나다고 느낄 때에 사람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이 클수록 사람에게는 겸손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겸손이 없으면 자연 믿음도 없게 되는 셈이지요. 예수님을 귀찮게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주 잔인한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대놓고 ‘나는 개밥 안준다.’고 말을 하시지요. 하지만 그 여인은 그 모든 과정을 ‘겸손’ 하나로 거쳐내고 결국 예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감탄할 정도로 말이지요. 우리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도 필요없는 지경에 이륵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에는 사실 하느님도 필요 없지요. 뭔가 이상이 있고 불안하고 자리잡혀 있지 않을 때에, 즉 나에게서 굳건하던 토대가 사라져갈 때에 비로소 하느님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믿음이 없다구요? 당연하지요. 당신 안에 지켜야 할 게 너무나 많으니까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하느님이 하나씩 하나씩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실 테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그 순간에마저도 교만할까 걱정입니다.

기준점

만일에 세상에 기준점이 없다면 모두는 저마다의 기준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서로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즉, 가치판단의 ‘옳고 그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있어서 선교사로서 많이 깨어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는 다양성에 대한 색다른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상당수 우리가 자라온 문화에서 비롯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나 밥상 예절과 젓가락 예절이 있을 뿐, 남미에서는 젓가락을 쓸 줄도 모르는 거지요. 그리고 남미에서는 전혀 다른 예절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굳건한 기준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하고 악을 저지르면 안되지요. 그리고 남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점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각자의 공간을 형성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결국 하나로 묶이는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누가 말하듯이 자연히 발생한 기준들, 즉 단순히 우리끼리 부딪히다가 찾아낸 기준일 뿐인 걸까요? 하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반의 모두가 컨닝을 하면 컨닝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들 그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요. 즉 우리가 지닌 기준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기보다 그 이전에 우리 내부에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나 진실과 정의, 선을 위한 방향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가장 근원적인 기준점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준점들이 나타나 이를 자꾸 흐리지요. 그 새로운 기준점들은 바로 ‘이기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원래의 핵심 줄기를 상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기준점이 흐트러지는 것이지요. 하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

우리 내면에는 실제 일어나는 것과 실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데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도 있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밥을 먹습니다. 이는 실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밥을 보고 배고픔을 느끼면 그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요. 헌데 내가 밥을 충분히 먹었는데 그가 맛있는 걸 먹는 걸 보고는 나도 먹고 싶어지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나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이 됩니다. 나의 욕구는 이미 잠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무언가를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바로 ‘내 정신’이 그것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가 밥먹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 음식이 내가 이미 먹은 것보다 형편없이 못한 것이라면 나는 다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을 통해서 단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다른 욕망들을 꺼내는 셈이지요. 우리 내면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올바르게 구분할 줄 안다면 우리는 많은 ‘고통’을 예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정신에 달려 있는 셈이지요. 실제로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일은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거나 그대로 견뎌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현대인들의 내적인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걸 나 스스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하늘 무너지기를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어난다면 내가 할 만한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하느님에게 간절히 청하십시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수련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더 많은 기회에 노출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느님은 그가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배움이라는 것은 내면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배움의 기회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이는 이해하지 못할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수많은 제자단 중에서 능력이 보이는 수제자에게 더 많은 과업을 맡기고 더 하찮은 일을 시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제자의 숨은 실력을 드러내게 해 주는 식의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더욱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저 억울할 따름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신경을 써야 하고 괴로워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배우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분명히 의미있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사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하기를 멈추고 오히려 고통이 찾아올 때에 더욱 활짝 마음을 엽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 잘 살았다 아니다를 평가하지는 못합니다. 그의 외면이 번쩍번쩍하다고 해서 그가 잘 산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의 평가일 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내면은 잘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걸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과 하느님이시지요.

성모님의 영성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까 1,51-53) 성모님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성모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모습 속에는 성모님의 영성이 깃들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성모님, 즉 여인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 남성 중심적인 세상에서 성모님의 영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쉽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과’가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뿐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찬가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고귀한 생각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바로 제일 위에 있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교만한 자, 권력 있는 자, 부유한 자를 낮추고, 반대로 비천하고 굶주린 자를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실제로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이 찬가는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기에 ‘희망’의 찬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에 대한 가장 근본에는 성모님의 ‘신앙’, 즉 ‘믿음’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성모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나가게 됩니다. 때로 개신교 신자분들이 천주교를 비난하면서 본당에 성모상이 있고 우리가 곧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송을 바치는 것을 보고서는 우리가 성모님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비난하면서 그분의 아름다운 가치를 무너뜨리려 하는 경우를 보면서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외아들을 구원자로 알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성령을 우리 신앙생활의 동반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존경하고 사랑하지요. 성경 구

반항의 집안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에제 12,2) 하느님의 영광으로 보라고 만들어진 눈은 세상의 화려함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고 만들어진 귀는 세상의 유혹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과연 반항의 집안입니다. 우리는 참되고 올바른 것에 복종하기를 잊어버린 지가 꽤나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눈을 열고 귀를 열면 알 수 있을 것을 반항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그들 앞에서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줍니다. 그들은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할 판에 처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를 그들이 보는 방식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예언자의 행동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꼈을 뿐, 그가 전하려는 진정한 메세지를 듣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느님은 너무나 많은 예시를 전해 주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벌어질 것들을 모두 비춰 주시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기는 커녕 우리는 더 깊이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가르치려고 준비한 이러 저러한 일들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분노하고 서로를 증오하면서 내면의 악을 키워 나가는 중입니다. 아마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하는 말을 알아 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도 모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내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둠과 증오와 불의를 마음껏 표출할 것입니다. 누군가 승리해서 일어나고 누군가는 무너지며 그 반대의 일도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무너져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반항의 집안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예언자들

이 악한 종아

악한 사람 -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고 타인에게 자신에게 입힌 손해를 되갚기를 원하는 사람. 문제는 두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나는 받은 게 없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거나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를 충분히 표출하고 있지요.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정작 우리가 받은 것을 잊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이가 늘 아침마다 엄마가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를 돌봐주고 하는 것을 받다보니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 채로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하나 사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아주 못된 마음이지요. 2) 그는 나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 누군가가 나에게 끼칠 수 있는 손해는 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끼칠 수 있는 손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입은 것과 우리가 체험적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한 대 얻어 맞으면 마치 그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극대인 것으로 과장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렇게까지 나의 온 마음을 빼앗길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악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우리가 받은 걸 잊는 배은망덕한 마음과 상대의 손해를 과장하려는 두 마음이 합쳐져서 악한 종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용서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하는 엄청난 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엄청난 은총에 대한 작은 되갚음일 뿐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나아가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표지판

늘 돌이 떨어지는 곳에 낙석 주의 표지판을 세워 놓으면 그게 나쁜 짓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심을 시키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표지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일이 더러 있곤 합니다. 물론 최고봉은 예수님이었지요. 예수님은 길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었고 반대로는 어둠을 예방하는 길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참됨을 말하는 이를 빈정대기 일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자신이 공격 당했다고 생각하기 일쑤이지요. 술을 너무 자주 많이 마셔서 제발 좀 마시지 말라고 하는 아내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담배 냄새가 나서 코를 움켜쥐는 아이들을 버릇이 없다고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표지판입니다. 당신에게 ‘경고’를 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영적으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표지판들을 두고 우리는 그들을 마땅찮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반기지요. 돈을 어떻게 하면 잘 벌 수 있는가에 대한 강좌에 귀를 기울이는 반면, 하느님을 섬기고 어둠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들에 대해서는 빈정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강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요. 결국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인기’를 얻으려는 게 목적입니다.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표지판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들이지요. 좋은 방향이고 나쁜 방향이고 마구 가리키는 이리 저리 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표지판은 가야할 한 방향을 꾸준히 가리켜야 합니다. 이것도 가리켰다가 저것도 가리켰다가 하다가는 결국 모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신비한 상자

어느 귀인이 지나가는 길에 만나게 된 친구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잘 활용하라며 물건이 든 상자 하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다른 물건들이 잔뜩 있었던 그 친구는 받은 상자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맡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로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겉으로는 이뻐 보이는 상자였기에 한동안은 방 한구석에 장식을 해 두었지요. 하지만 결국 그마저도 잊고 말았습니다. 물건은 창고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고 먼지가 잔뜩 쌓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귀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이제 맡긴 물건을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다행히 친구는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창고를 뒤지고 뒤져 결국 먼지가 자욱한 물건을 꺼내 왔습니다. 귀인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물건인데 그렇게나 소홀히 다루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귀인은 결국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되찾아서는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귀인이 사는 이웃 동네에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귀인이 사람들의 사랑을 잔뜩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듣자하니 그 귀인에게 보물이 든 상자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만 해도 치유가 되고 튼튼해져서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돌아가고 그 귀인에 대해서 온갖 찬사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친구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인의 집에 달음질쳐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소문을 친구에게 말하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귀인은 사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그 물건을 한 번 보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귀인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것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건 바로 그 귀인이 친구에게 맡긴 상자였습니다. - 아니, 이건 자네가 나에게 맡긴 그 상자가 아닌가? - 그렇네. - 그럼 그 보물이라는 것이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겐가? - 그렇지. 친구는 이마를 감쌌습니다. 자신이 어떤 짓을

무시당함

무시당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고귀함을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교만한 이들이 있고 그들은 곧잘 다른 이들을 무시합니다. 낮춰 보는 것이지요.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할 그들을 그 자리보다 낮은 이들로 낮춰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당한 이들은 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잘 이러한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올바른 나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이 될 때면 언제나 이를 느끼지요. 무시당하는 것에 이어서 따라오는 감정은 ‘슬픔, 분노, 앙심’ 따위의 것들입니다. 따라서 무시당하는 것은 많은 기타 악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요. 문제는, 과연 우리가 무시 당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과연 그들의 그런 시선이 우리의 존재를 낮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낮춘다고 낮아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존재인 타인의 시선에 목매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대사제들이 그러하였지요. 그들은 ‘군중’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눈치가 보여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곤 하였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보다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지요. 이들은 사람들의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심지어는 진실과 정의마저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이들은 곧잘 무시당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마 수시 때때로 느낄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 하나를 시키고도 종업원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곧잘 화를 낼 것입니다. 이들은 많은 경우에 화가 난 상태로 지낼 것이고 따라서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함부로 무시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고 하느님을 사랑하

숨어 있는 우리 자신

우리는 과연 ‘객관적’일까요? 우리가 바라보고 분별하는 것들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나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정반대로 우리는 굉장한 ‘주관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한 대상에 대해서 나는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편안하게 주고받는 이야기를 나는 왜 민감하게 반응할까요? 과연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은 객관적인 시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순간 순간 나에게서 나오는 그 알지못할 변덕으로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인간은 생각만큼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역사 안에서 미리 쌓아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개를 보기만 해도 무서워하고 다른 누군가는 개를 겁내지 않고 사랑하며 다가서서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생각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때로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데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양심’이라는 기관은 충분히 동작하고 있습니다. 하면 안되는 게 무엇인지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의 약점 때문에 이루어지는 동작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양심에 어긋나는 동작이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찌꺼기를 가라앉히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있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끌어안아 줄 수 있게 되지요.

빛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이 빛인가요? 두 눈을 밝히는 것이 빛인가요? 우리는 이 가시적인 빛 안에서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빛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른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십니다. 우리는 이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 안에서 걸어가야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빛을 무시하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전혀 다른 것을 ‘빛’이라 생각하고 살아가지요. 재화,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을 빛으로 간주하고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것들은 과연 빛일까요? 그 안에 빛이 포함되어 있다면 빛입니다. 하지만 참된 빛이 없는 세상의 빛들은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참된 재화, 참된 명예, 참된 권력이 아닌 것들은 타버리고만 재처럼 바람에 흩날리게 됩니다. 진정한 빛, 그것은 참되고 정의로운 빛입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진리의 빛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빛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님들입니다.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보아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빛을 보고서도 그것을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을 때, 다른 이에게 인정 받고 싶을 때,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욕구들이지요. 하지만 이 욕구들에 눈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에 빛을 찾으십시오. 빛은 여러분을 이끌어 진정한 기쁨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천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장님들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잊혀져 가는 것을 즐기십시오. 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오히려 빛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필요한 정도만 취하고 나머지로는 하고 싶은 일, 빛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십시오. 조금만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도울 힘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을 도와 준다면서 자신이 점점 빠져들어간다면 그것이 과연 도와주는 것일까요? 결국 둘 다 진창에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가 아닌가, 그럴 힘이 있는가 아닌가도 살펴야 하며, 그리고 상대가 내가 도와줄만한 대상인가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늪에 빠져들어가는 소를 혼자 끌어올리겠다고 고삐에 매인 밧줄을 자기 몸에 묶기 시작하다가는 자신도 그 늪에 빠져들어가 결국 둘 다 죽고 맙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누구든 여러 사람을 만나 사귀면 다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무작위로 만나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좋은 사람이 되어 주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독소’가 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 독소가 자신을 찔러 점점 오염시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무턱대고 ‘친교’라는 핑계를 바탕으로 집어 삼키고 있는 셈이지요. 차라리 우리가 특정한 의도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한다면 오히려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이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알게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헌데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는 의도를 품고 다가서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마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체험은 실제로 겪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불의 뜨거움에 대해서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칠 수 있지만 확실한 방법은 가서 데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함부로 다가가지 않지요.

아픈 소리

저마다 우는 소리를 하지만 실제로 아픈 사람이 약을 찾습니다. 거의 99%는 꾀병인 셈이지요. 다들 인생이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름으로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 아픈 사람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해결책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나 얻게 될 것입니다. 말로만 아프다고만 하고 방법을 찾지 않는 이들은 실은 크게 아프지 않은 셈입니다. 실제로 아픈 이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그들은 너무나 아파서 말도 꺼내기 힘든 지경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꽹과리마냥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쉴새없이 경보를 울려대서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할 것입니다. 오히려 묵묵히 아픔을 참아받는 이들을 분별할 줄 아십시오. 그들 가운데에는 실제로 위대한 성인들이 숨어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충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대해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즉 내 안에 하나의 경보 장치가 있어서 상대의 행동을 분별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를 잘 관찰해보면 과연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핵심 기준은 주로는 ‘나의 편의’입니다. 나에게 껄끄러운가 아닌가가 중요시될 뿐, 그 밖의 일에는 무심하게 됩니다. 팔레스티나의 가자 지구에서 몇 명이 죽어 나가도 아무 상관 없다가 국내에서 사건이 터져 연일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그 소식을 올리면 거기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매진하지요. 세상이 멸망해도 무관심할 것 같던 사람이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소식들이 나의 생활 범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언뜻 수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참되고 선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껄끄럽지 않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 직장이 안정되어 있고 가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조용히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왜냐면 문제라는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결국에는 내 삶에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남에게 ‘충고’를 해 주고 싶은 걸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하면 그 불편을 야기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충고를 해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대부분의 케이스는 결과가 그리 좋지 않게 마련입니다. 충고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불편함이 아니라 그가 엇나가는 것이 명확할 때에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주변 사물들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볼 수 있게

욕망

욕망, 즉 바라는 마음에는 총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선한 욕망과 그냥 그대로의 욕망, 그리고 악한 욕망의 세가지 입니다. 먼저 욕망 그 자체가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욕구 그대로의 욕망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냥 배가 고픈 것이지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됩니다. 이성교제를 하고픈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어 남녀를 구분할 줄 알게 되면 사람을 만나 사귀고 싶게 됩니다. 이 또한 정상적인 욕구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우리 육체는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은 적절히 채워주면 조용해집니다. 그 뿐입니다. 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음으로 선한 욕망을 바라보겠습니다. 우리는 ‘선한 욕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바람직하고 선한 욕망이지요.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욕망이고 그것을 여러가지 수단으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그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이미 가꾼 가정 안에서든지 아니면 성소의 길이라던지, 아니면 가난한 이웃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던지 아니면 거룩한 예식에 함께 하려는 마음 등등으로 드러나지요. 마지막으로 ‘악한 욕망’입니다. 이는 가장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니 당연히 이웃들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을 일삼게 되지요. 아내가 있는 남편을 꼬시는 행위(반대도 마찬가지) 남의 것을 빼앗아서 고통스럽게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 등등입니다. 이는 남을 망가뜨리고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나쁜 욕망, 악한 욕망은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수도없는 욕망들이 오고 갑니다. 우리는 그러한 욕망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선하고 좋은 욕망들을 한껏 가져서 그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악한 욕망을 그 뿌리부터 단숨에 끊도록 노력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지요.

모임

늘 좋은 모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좋다가도 나중에는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모임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기에 결국에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욕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모임이 지속되면 반드시 모종의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모임의 구성원이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서로를 바라보기보다 한 방향을 바라보는 모임이라면 가능성이 있지요. 그 방향으로 서로 가진 재주를 나눌 수 있는 모임이라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치 못하는 충돌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처럼 늘 항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결론으로 돌아오건데 그 어떤 모임이든지 분명히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모르고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미리 준비를 갖추고 모임에 참석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일 리더가 이를 알고 있다면 미리 준비를 할 것입니다. 본당의 이런 저런 목적을 지닌 모임들은 반드시 구성원간의 충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면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목적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만일 우리가 하려는 일의 의미가 상실된 모임이라면 모임 자체를 그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예컨대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어머니들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모임이 원래의 취지와 전혀 상관없이 어머니들 계모임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목적을 상실한 셈이 되는 것이지요. 아예 분명하게 어머니들의 ‘친교’ 모임으로 성격을 전환해서 계속 진행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어정쩡하게 아이들을 돌본다면서 아이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놀러 다니는 식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결국 단순한 모임이냐, 함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냐 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고 얼마나

인내

인내는 어떻게 길러지는 걸까요? 인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내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인내할 것이 없는데 인내가 길러질 리는 없지요. 원할 때 먹고 싶은 게 있고, 하고 싶은 게 천지에 널려 하려면 할 수 있는데 ‘인내’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내는 인내할 대상이 늘 필요합니다. 인내의 대상은 다름 아닌 ‘고통’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인내할 대상인 고통이라는 것은 사실 바로 내 마음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예컨대 A라는 물건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것을 마주하게 되고부터 나는 그것이 싫어졌고 그래서 참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인내해야 할 것은 나 밖의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통들도 존재합니다. 내가 아닌 내 주변에서 다가오는 고통들이지요. 육신의 노화나 누군가의 악행등과 같이 주변에서 다가오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실제적으로 나의 육신을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어도 나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쯤해서 인내의 대상이 조금씩 나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내는 내적 고통과 외적 고통을 대상으로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외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난, 여러가지 사건들의 전개에서 다가오는 것이고, 내적인 고통은 내 영혼의 쓰라림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그건 고통을 겪는 사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고통에는 언제나 ‘끝’이 있는 반면, 내적인 고통은 사실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고통을 스스로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품을 넓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고통이 더는 고통이 아니게 되지요. 처음 기타를 치면 코드를 잡는 손가락이 엄청 아프지만 그것을 계속하다보면 덤덤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굳은

전능

전능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함은 모든 것이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다시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지 당신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눈 앞에 있는 컴퓨터를 원한다면 사라지게도, 그리고 다시 나타나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 이미 조성한 세상이 자신의 질서에 따라 흘러가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만일 꼭 필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서 굉장히 멀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작업은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늘 묻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여기에서 많이들 마음이 갈라집니다. 누구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총을 들고 일어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하고, 누구는 정치판을 뒤엎어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구는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너무나도 정신없는 수많은 이론들 속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잘 되고 행복해져서 우리의 그런 행복에 당신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원리이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만의 행복’을 고집하기 시작하면서 서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이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셈이지요.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전능에 힘입어 살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이기심에 물들어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것

사랑은 자유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늘 선한 쪽으로 방향 지워져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향해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한 방향입니다. 그것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방향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미흡한 사랑’, 또는 ‘사랑을 흉내낸 사랑’에 불과합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서 남을 죽여 돈을 빼앗아 반지를 사다주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뿐이지요.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참되고 올바름’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류의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방향만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바로 세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성당에 나와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건 또다른 집착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런 거룩한 체하는 자신의 명예심일 수도 있고, 인간의 ‘괴로움’을 즐기는 그릇된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신앙을 단순한 행위의 축척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해일 수도 있지요. 하느님은 껍데기에 놀아나지 않는 분이십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은 오직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도 온 마음을 다해서 드리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하는 이들도 온 마음을 다해서 한다면 그 안에 하느님이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온전히 알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약한 존재가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스스로 때문에

- 신부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당사자 앞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엔가 당신은 어둠의 침투를 허용하였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당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작은 유혹거리를 덥석 집어 삼킨 게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와서 배가 아프다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할 뿐이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 중에서도 여전히 고집을 놓으려 하지 않으니 피해는 점점 산더미처럼 불어갈 뿐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탐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명예가 조금이나마 신경쓰인적이 없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이 없다면 무너질 것도 없습니다. 쌓지 않았는데 어떻게 무너진단 말입니까? 당신이 마음 아파하는 이유는 많이 쌓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억울하다구요? 아니요, 당신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런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들이 나쁜 건 맞지만 그들의 나쁨을 끌어들인 당신의 소홀함의 죄를 경감시키진 못합니다. 물론 지금의 결과를 예상 했더라면 섣불리 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당신은 현명한 이의 조언을 구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발등에 불이 떨어져 뜨거우니 찾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예방 의학 전문이지 내외상 전문이 아닙니다. 남은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간청하는 것 뿐입니다. 혹시 모르지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어 뭔가를 바꾸어 주실지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억울하다고 주장해 대는 통에 하느님의 자비의 길마저 막고 있으니 말은 다 한 셈입니다. 울고 불고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다른 이들로서는 강건너 불구경일 뿐이니까요. 그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곁에 머무르겠지만 당신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직접 보고 배울 뿐입니다. 자신은 그러지 말

좋은 마음 무너뜨리기

음식에는 파리가 다가오고 꽃에는 벌과 나비가 다가오듯이 저마다의 바램을 가지고 원하는 것에 다가갑니다. 헌데, 좋은 마음에는 ‘이용하려는 자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이용하려는 자들은 자신과 같이 영악한 이들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속이기 쉽고 어리숙한 이들을 선호하지요. 그래서 ‘좋은 마음’을 찾아 다닙니다. 하지만 이 ‘좋은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만 좋고 지혜는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한 이들이 그렇게 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저 ‘순한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지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순수성이 어린 아이의 것이라면 하느님은 어떻게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을 하면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소홀히 하기 시작할 때에는 결국 제 잘못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남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이런 마음을 지닌 이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준비된 작전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저런 것들로 좋은 마음을 지닌 이들의 호감을 산 뒤에 본격적으로 원하는 작업을 시작하지요. 좋은 마음을 지닌 이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좋은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증오를 품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있던 좋은 마음도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사탄은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면서 가장 뒤에서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는 뻔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결국 승기를 잡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덜 떨어진 마음 좋은 이들이 되어 어둠의 밥이 되던가, 아니면 지혜를 탐구하여 스스로 준비하던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물건과 마음

물건은 물건을 좋아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가지가지인 셈이지요. 우리는 한 가지 물건에 평생 마음을 두고 좋아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좋아 했다가 저것을 좋아했다가 뭔가를 간절히 원했다가 가지고 나서는 싫증내다가 하지요. 결국 물건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입니다. 물건을 건넬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건네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좋은 물건을 사다 주면 그게 곧 사랑이 될 거라고 착각을 하니 큰일입니다. 연인이 물건에 슬슬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영심은 날이 갈수록 사랑을 잊어가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건을 사랑하는 이들은 날로 영리해져서 마치 자신은 물건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듯이 연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물건을 사내라는 이론을 펼칩니다. 사제나 선교사도 마찬가지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실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채로 ‘물적 선교’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뭔가를 쥐어주면 좋아할거라고 착각하는 거지요. 이런 저런 기금을 마련해서 행사를 치러내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흐뭇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이들은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돌아갈 뿐입니다. 행여 주임 사제의 명에 따라서 정말 성심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은 이라면 그를 보고는 다가와서 머물 수 있지만 행사 그 자체가 사람을 끌어들이지는 않습니다. 성당에서 영어 성경 과외를 시키고, 아무리 수학을 가르쳐도 그건 결국 다시 세상에 되돌아갈 이들을 잠시 묶어두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진짜배기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하나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마음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믿음이 있고 곧은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간단한 설명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깨달음과 수련이 필요합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고 호락호락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냥 믿는다고 하나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가시 세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 가장 근본의 선택이고, 꾸준한 선택이며, 그 선택에 따라서 기실 모든 세상의 의미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택하는 것이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 만큼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곧은 마음은 언제나 바르고 좋은 것을 찾는 마음입니다. 행여라도 엉뚱한 것을 떠올리지 않는 마음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지요. 즉, 오로지 하느님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분별과 일의 실천에서 오직 하느님만, 그분의 사랑과 정의만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육체적인 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는 일이든, 정신적인 병에 시달리는 사람이든, 뭐든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약하고 올곧음이 없어서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한 셈이지요.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져야 할 일 속에 자신들의 권능을 개입하려 했으니 일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태 17,17)

악의 유혹

유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유혹이라는 것은 우리를 등떠미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은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를 성적으로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그런 유혹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일 뿐입니다. 아마 아이들은 벗은 몸의 이성을 보고는 자기 몸과는 다르다는 인식에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기만 할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에게 이미 존재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고픔을 느낀다고 유혹이 되는 게 아닙니다. 유혹은 욕구를 바탕으로 ‘거짓, 그릇됨’을 끼워 넣을 때에 일어납니다. 즉, 먹을 것으로 사람을 꾀어 내어 나쁜 짓을 하게 시킬 때에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이지 단순히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내밀어 먹게 한다고 그것이 유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있을 때에 어둠의 유혹을 사전에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여러가지 욕구들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분별한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단순히 내 욕구를 자극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뒤에 어두움이 숨어 있는 것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것 저것 견줄 겨를도 없이 덥석 물고 맙니다. 마치 물고기가 미끼를 보고 덥석 물듯이 우리 앞에 놓인 유혹거리를 먹어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바늘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를 찌르기 시작하고 어둠을 향해서 당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더욱 더 끌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 가운데 가장 고질적이고 지독한 것이 ‘재물’의 유혹입니다. 물론 다른 유혹들도 만만찮게 나쁜 것이지만 이 재물의 유혹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고 너무나 강렬합니다. 따라서 벗어나기도 가장 힘이 들지요.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티

유대인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포들이 처한 현실에 슬퍼하고 아파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충분히 받은 축복받은 민족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로마서 9장 4절 참조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만 그들 자신의 교만과 아집으로 그리스도, 즉 새로운 계약의 완성이신 진정한 ‘사랑’이신 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제멋대로 엇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유대인’입니다. 그들의 혈통은 그야말로 선택받고 축복받은 혈통이 아닐 수 없고, 유대인이 아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접붙이기 된 가지’이고, 유대인들은 우리들이 따로 얻게 된 자격을 원래부터 혈통 속에 지니고 있었던 ‘원줄기’입니다. 하지만 원줄기가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자 하느님은 다른 줄기를 끌어 들여와서 접붙이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시기에 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원래의 줄기가 돌아오고자 한다면 그 또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의 줄기는 접붙은 가지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역할을 소화해 내게 될 것입니다. 선택된 민족, 축복받은 혈통이 곧 영원한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가장 마음에 잘 품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당신의 나라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하지만 툭하면 학연과 지연을 내세우며 곧잘 으스대곤 하는 우리들이 과연 이를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할는지는 의문입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바람 - 모든 것을 쓸어가는 바람 지진 -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 불 -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불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엘리야에게 나타난 표징들입니다. 주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건네십니다. 주님의 권능은 바람으로도 지진으로도 불로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기원이 엉뚱한 데에 있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불지 모르는 바람, 하지만 모든 것을 쓸어가는 바람,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불은 우리의 세속적 욕구에 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우리를 내맡기고 휘둘려 다닐 때에는 우리 안에 그 어떻 좋은 것도 머물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귀를 기울일 준비를 갖추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아직도 우리 스스로를 강하고 거칠고 뜨거운 욕구에 맡기고 있는 걸까요?

물 위를 걷는 의미

제자들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풍랑에 늘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디 한구석 조용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몸담는 제자들은 늘 시름과 걱정과 고민이 가득합니다. 바로 그 힘든 때에 예수님이 다가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다가가기에 사람들은 도리어 더욱 겁을 냅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예수님이 다가오는 부분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멋지고 화사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을 만나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시라는 사인을 보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주저하고 있는 동안 ‘믿음’이 있는 제자의 상징인 베드로가 선뜻 제안을 합니다. 즉,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던 그 모습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어보겠노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풍랑이 심한데 거기에다 더해서 자신도 그 물 속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는 풍랑 속의 물 위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배에서 나와 예수님을 향해 몇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쉬운 걸음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변의 풍랑은 거세고 베드로를 집어 삼킬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만 빠져버리고 맙니다. 믿음이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호수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도와 주십니다.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고 꺼내어 주시지요. 그리고는 베드로와 함께 나아가셔서 배에 올라 타십니다. 그러자 풍랑, 제자들을 그렇게나 두렵게 했던 풍랑이 그치고 맙니다.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절을 하면서 그분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

오늘 성경 강의에서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 신부님, 신부님이 지혜를 통해서 분별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헌데 또 다른 때는 ‘세상의 지혜’는 결국 쓸모없는 것이라고도 하셨잖아요. 그게 이해가 안되요. “앞에 노란색의 장애물이 있을 때는 왼쪽으로 가시오.” 이게 세상에서 가르치는 지혜이고, “어딜 가는 지를 알고 가는 것” 이게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비길 수 있지. 왜냐면 어딜 가는 지를 알면 노란색 장애물이 앞에 있어도, 뒤에 있어도, 또 파란색 장애물이 있어도, 또 장애물이 없어도, 없다가 나타나도 어딜 가야 하는지 알테니까. 하지만 세상의 지혜만을 지니고 있으면 당장에 ‘파란색’ 장애물이 뒤에 있을 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거지. 하지만 이 설명도 부족해. 나중에는 삶으로 알게 될거야. 즉, 네가 지혜로워지면 저절로 알게 되지. 물론 지혜가 부족하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결과들 때문에 알게 되기도 할거야. 너무 조급해 하지 말도록 해. 아직 갈 길이 머니까 말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오늘 젊은이들 미사에 제가 강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가워요. 여러분 과연 ‘젊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저마다 의견이 나왔습니다. - 어린 거요. 기쁨이요. 사랑이요. -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젊다는 건 ‘힘있음’이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젊음으로 얼마든지 달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요. 여러분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달리기도 하고 뭔가 맘에 드는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고, 이렇게 젊은이들이 모이는 축제에 달려가기도 하고… 여러분들의 젊음은 저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제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의 주체하지 못하는 힘을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이런 유혹에도 빠지고 저런 유혹에도 빠지게 되서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하곤 하지요. 누군가는 섣불리 호기심에 담배에 손을 대었다가 중독이 되고, 또 누군가는 술을, 또 누군가는 일찍부터 성에 관심을 가져 철없는 임신을 하기도 하지요.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답이 있지요.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들어높이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를 데려가지요. 베드로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겁에 질려 있을 적에 베드로는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고 몇 걸음 걸었지요. 물론 빠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약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예수님 앞에 와서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걸 청했지요.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도 하늘 나라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요한 사도는 십자가 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사도입니다. 즉 ‘사랑’이지요.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세 명의 사도를 데리고 산으

보상 없는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마음의 이끌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호’라고 표현하는 게 더 가깝겠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그런 의지적인 선택이 있을 때에 우리는 심지어 ‘고통’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달콤한 사랑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늘 보상이 있는 사랑을 바라고 사랑을 드러낸 만큼 상대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사람보다 물건이나 동물을 더 사랑하게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건은 소비와 소유를 통해서 충분한 보상을 하고, 동물들은 그 자체의 순진성으로 충분한 보상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인간은 신과 인간을 사랑할 때에 가장 온전한 사랑을 얻게 됩니다. 그 밖의 여러가지 것들도 모두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지만 가장 근본에는 하느님과 이웃들이 존재해야 하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전혀 엉뚱한 것에다 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건들에 기타 여러 대상들에 자신의 사랑을 헌신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가리워진 이들에게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에는 보상이 없는가? 아닙니다. 보다 더 큰 보상이 있지요. 하지만 그 보상은 이 현세 안에서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 동안 누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영원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지요. 혹자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참된 사랑도 보상을 기다린다면 결국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질문은 ‘추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적인 삶 안에서 살아가 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

우리의 길은 사랑

과거 십자군 전쟁이 있었을 적에 사람들은 그 전쟁의 정당성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2세께서는 과거의 교회의 오류를 뉘우치고 사죄를 청하셨지요. 우리 교회의 강점은 그 어떤 잘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데에 있었습니다. 역사 안에서 수많은 잘못과 오류들은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것을 수정해 나간 것이지요. 하지만 이 수정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다수결의 원칙으로? 아니면 법적 조항에 빗대어서? 만일에 법 자체가 어긋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똑바로 선 기준점은 부러진 기준점을 많이 모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올바른 기준점이라 함은 올바른 방향을 인지하고 있는 이가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가장 길을 잘 찾게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님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이 되지요. 때로 자신이 길이라고, 마치 자신을 따라오면 뭐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만이 지표가 될 것입니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아직 생경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에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두번째로는 어떤 아저씨가 질문한 내용입니다. - 신부님,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왜 그런 거라요? - 음, 고통은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나의 죄의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스러운 악의 결과물이고, 마지막 하나는 ‘대속’이라는 개념이지요. 첫번째로 나의 죄의 결과는 내가 그릇되이 행한 걸로 얻게 되는 고통이예요. 담배를 핀다던가 술을 과하게 마신다던가 음식을 과하게 먹어 생기는 결과들이지요. 물론 윤리적으로도 마찬가지이구요. 바람을 피우면 언젠가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요. 그건 우리가 당연히 얻게 되는 고통이지요. 둘째로는 자연 재해나 노화 처럼 우리 탓이 없지만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워 나가지요.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서 걷게 되듯이 우리도 고통을 통해서 ‘참는’ 능력을 기르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인내가 커질수록 우리의 내적 활동 영역도 커지게 되지요. 따라서 이 고통은 우리 인생에 반드시 수반되는 고통 중의 하나예요. 세번째 고통은 좀 특이한 것인데요. 이는 대속 개념 이예요. 한 아들이 잘못을 해서 감옥에 가면 엄마가 수고를 들여서 면회를 갈 수 있어요. 엄마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도리어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도 엄마는 아들의 악행으로 인해 고통을 ‘일부러’ 겪습니다. 이 고통은 ‘대속’하는 개념이지요. 엄마가 아들을 찾아 감으로써 아들에게 ‘위로’가 주어지니까요. 바로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수난의 의미가 이런 것이지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님이 죽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셈이니까요. 자, 이제 침대에 누워 있는 아저씨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과연 그 아저씨의 고통은 무엇일까요? 그건 사실 아무도 몰라요. 그게 그 아저씨의 죄의 결과일지, 아니면 자연스레 주어진 고통의 일환일지, 아니면 그 아저씨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지고 있는 것일지 말이지요. 다만 우리로서는 병자를 위로해야 해요. 그게 우

인간존재

때로 하느님을 마음에 품지 않은 인간들의 생각은 얼마나 꼬여 있고 어리석은지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영원을 살 듯이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간을 살다가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생애 동안 일어나는 일들에 웃고 울고 하면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 착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더욱 큰 그림의 일부분으로 그 그림에 동참할 수도 있고 반대로 쓰여지지 않고 그저 버려지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영원의 가치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안목을 넓혀야 한다. 영원을 두고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많은 오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더욱 가치로운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삿대질을 해 가며 서로를 비난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그 모든 시간들은 우리에게 허락된 하느님의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잊고서 말이다.

꿈과 현실 그리고 참된 이상

누구나 그래요. 처음엔 꿈을 꾸죠. 그리고 그 꿈 안에서의 이상향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예요. 예를 들어 신부가 되려는 사람도 그렇지요. 처음 그가 꿈꾸는 사제상은 참으로 아름다워요.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서 동기들을 만나고 그들과 맞부딪히고 또 사제가 되어 현실을 만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른 삶을 꿈꿔 보지요. 하지만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즉, 결혼한 사람도 사제의 삶에 대해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기는 매한가지지요. 결국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살아내야 하는 거예요. 그건 ‘내’가 선택한 삶이 되어야 하는 거죠.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이 세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삶은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근본 방향은 분명히 존재하지요. 하느님을 향한 영원과 이 세상을 향한 집착 둘 뿐이예요. 그리고 그 방향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의 직분을 선택하는 거예요. 사제도 신자도 마찬가지예요. 사제라고 하느님을 향해서만 간다는 법도 없고 세상 안에 살아가는 이라고 늘 세상만 바라보지도 않아요. 자신 안에 근본 방향이 늘 존재하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선택하세요. 그분께로 나아가야지요. 왜냐면 그 분만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영원’을 선물하시니까요.

때가 참

한 달에 한 번 있는 한국 신자 모임에서 교리시간 전에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하니 한 신자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요즘 큰 사고들이 터지는 거지요?” 저는 주저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때가 찼으니까요.” 그리고는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자기들의 ‘때’가 있지요. 마치 열매가 다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듯이 세상 일도 점점 채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때가 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일어난 그 시점에서부터 일어난 게 아니라 이미 시작되고 있었지요. 사건 사고들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한국에는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고 결국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큰 사고들만 바라볼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도 바라보아야 하지요. 우리에게서도 열매들은 익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말과 행동을 하면 그러한 것들은 결국 때가 차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고, 반대로 선한 말과 행동을 하면 그러한 것들도 때가 차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면 진행 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메꾸는 선한 행위를 통해서 악의 열매를 선의 열매로 바꿀 수도, 또 그 반대로 선한 삶을 살다가 악행을 저질러서 악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요. 사실 다른 사건 사고들보다 우리들의 삶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때가 차는 순간’ 모든 것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인도

- 저요 남편 때문에 힘들어요. 그만 헤어지고 싶어요. - 그래? 왜 그러는데. -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겼나봐요. 요즘 부쩍 이유도 없이 늦게 들어오고 이상한 향수 냄새도 나고 그래요. - 뭐얏? 그럼 안되지. 아이도 있는 가정의 남자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그냥 헤어져 버려!!!! 이혼해!!!!! 이런 상황 많이들 겪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상담의 수준은 단순히 눈 앞의 상담자에게 촛점을 맞춰서 그를 응원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런 조언을 통해서 상황은 더욱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근간은 ‘하느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적 사랑’에 근거한 충고를 해주기 쉽상이고 그렇게 일은 더욱 틀어져만 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도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올바른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인도 악인도 모두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부어진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리시려는 분이십니다. 끊어지고 분리되는 것은 죽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눈 앞의 당사자도, 그 마음이 떠나가는 남편도, 그 둘의 아이도 온전히 걱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필요한 일이라면 그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그 여인네도 고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사는 진정한 방법을 조언해야 합니다. 물론 각각의 케이스로 그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사랑’,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이거 좀 들어보세요. 제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아 글쎄 저 좀 지켜 보라니까요? 제가 하는 말 들리시죠? 제가 말이죠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헌데 일이 왜 이따위로 되는거죠? 아 대답 좀 하세요 제발. 억울해 죽겠다구요!! 왜 선한 이들이 이렇게 당하고 살아야 하는거죠? 왜 악인들은 득세하나요?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냐구요? 들어봐요 좀!!! 당신도 생각이 있을 거잖아요? 제가 겪는 일이 보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보이지 않으세요? 왜 그렇게 아무 말도 않으시는 거예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는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고 요것도 조것도 다 원한단 말이예요. 왜 제 이 청을 듣지 않으시는 거죠? 절더러 어쩌라구요? 제가 뭘 어쩌길 바라시는 거예요? 하느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오 17,5)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돈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알아차리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 줄 알지요. 학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어디에서 어떻게 자료를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지요. 공부를 거듭하면 할수록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어디를 살펴보면 되는지를 알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경험이 축적될수록 더욱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지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눈이 밝은 이들은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싸이가 강남 스타일을 통해서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듯이 원한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그것을 증진시켜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를 살펴본다면 그 움직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은 더욱 더 한 곳으로 집중되게 되어 있지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곳에다 여러분들의 길을 맡길 수 있습니다. 저요? 저는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분은 돈도,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추구하지 않으셨고 다만 ‘하느님’을 추구하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에게 나아가고 싶으니 예수님을 인도자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각자 저마다의 인도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대로 그 인도자를 선택하지요. 재력가의 자서전을 사다 보는 사람이 있고, 교수의 책을 사다보는 사람도 있고, 유명 연예인의 책을 사다보는 사람도 있고, 정치인의 저서를 사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는 동안 ‘성경’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길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를 따라가지는 않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하느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들입니다. 진리, 평화, 기쁨, 행복, 희망, 믿음, 온유, 절제, 선의, 사랑… 바로 하느님이 심으신 것이지요. 반면 질투, 이기심, 탐욕, 나태, 음란, 분노, 증오, 악의, 절망, 슬픔…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목을 받아들여 가꿀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이 원치 않은 것을 받아들여 가꿀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려고 하는 이는 ‘숲을 이룬 나무’에 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는 ‘분재’에 비길 수 있습니다. 숲을 이룬 나무는 그 종류가 정말 다양하고 그 숲에 들어가면 모든 나무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모두 소중한 나무들이며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지요. 반대로 분재가 되는 나무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자기 혼자 받기를 원하고 그 모든 관심에서 조금만 틀어져도 죽어 버리고 말지요. 철저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무일 뿐입니다. 인간이 자기만의 왕국을 꿈꾸기 시작할 때에 그 인간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심지 않은 초목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함께 사는 나라, 모두가 진정한 의미로 행복해지는 나라를 꿈꾸기 시작할 때에 하느님은 그에게 당신의 초목을 심으실 것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어떤 초목이 자라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요? 한번쯤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듣기 싫은 말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마태 15,12) 어느 발언을 듣고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에 꾸준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동으로 드러냅니다. 가령 술을 과하게 마시는 사람에게는 ‘과도한 알콜 섭취는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라는 말이 거슬리게 들리고, 담배를 태우는 사람에게는 ‘담배는 자신의 몸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다.’라는 말이 거슬리게 들립니다. 그리고 이웃의 여인을 탐내는 사람에게는 ‘다른 이웃의 여인을 마음에 품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하는 말이 거슬리지요. 만일 어린 아이에게 같은 말을 했더라면 그 어린 아이는 술도 담배도 다른 여인도 생각하지 않기에 그 말들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저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불편해 했습니다. 즉 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즉, 그 말은 그들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하기를 고집한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말들을 ‘거슬리게’ 듣고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그 말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 불편할까요? 반대로 ‘돈이 최고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들리시나요? ‘사람이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는거지.’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고 다니시나요? 우리는 우리가 즐겨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듣기 꺼려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

우리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기억하지만 많은 경우에 ‘베드로’도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을 쉽게 잊습니다. 왜냐면 그는 좀 걷다가 빠져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는 믿음이 약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믿는자’였고 ‘시도’하는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를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셨지요. 우리는 섣불리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섣불리 나서서 무안을 당하느니 차라리 가만히 앉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을 받고 물 위를 걸어갑니다. 비록 걸어가다 빠지지만 예수님이 다가와 구해주시지요. 어쩌면 베드로는 그것마저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가 온전히 ‘인지’하지는 못했겠지만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것을 보장하고 있었겠지요.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습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러한 약한 믿음이라도 있을까요?

거짓된 예언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예레 28,15) 희망의 때에 희망을 전하고 회개의 때에 회개를 전해야 합니다. 진실한 예언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에 이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것을 예언합니다. 거짓 예언자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주인은 ‘자신의 배’입니다.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는 일이면 거짓 예언자들은 능히 그것을 합니다. 예언을 통해서 세속적인 안정을 누리고 부와 명예를 얻는 식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예언은 거짓된 것입니다. 진정한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예언을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아무리 싫어도 가야 하고 하느님이 원하시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멈추어야 합니다. 기쁨에 들떠있는 이들에게 재앙을 경고하기도 해야 하고 슬픔 가운데에서 희망을 힘있게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에 한껏 귀를 열고 그들이 기다리는 ‘달콤한 말’들만을 전해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달콤한 말’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어둠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하느님에게로 이끌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 ‘먹을 것’이라는 것은 당신의 빵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의 평소의 언행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상징을 드러내시는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이 주고 싶으신 것은 ‘영적 양식’이었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걱정을 합니다. 저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있는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을 하고 고민을 하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까요. 제자들은 그 수많은 군중을 먹일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가져오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가져가는 행위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홀로 싸매고 고민만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부터 말했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기적이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빵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다시 다잡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양식’을 위한 예시를 기적으로 드러내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양식, 영적인 양식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의해서 예수님에게 봉헌된 것들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고 결국 수많은 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남은 것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열 두 광주리는 잘 ‘보관’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열 두 광주리는 다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보관되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만나를 보관해 두려고 했을 때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모두 썩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총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히 따라나오는 것이 ‘선교’입니다. 골방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는 공동

빵의 기적의 구성

주님의 뜻(사명)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작은 의지의 봉헌) 자리잡기(기틀 마련) 받아들임, 들어올림, 찬미(봉헌) 빵을 나눔(빵을 나눔) 배불리 먹음(충만) 남은 조각(선교) 정리해 놓고 보면 굉장히 익숙한 것이 다가옵니다. 다름아닌 ‘미사’이지요. 빵의 기적은 바로 ‘거룩한 미사’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명을 부여받고 거기에 우리의 작은 자유의지를 더해 한 곳에 기틀을 마련하고 받아들임과 들어올림과 찬미라는 봉헌 행위를 통해서 빵을 나누고 모두가 은총을 충만히 받게 됩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나뉘어진 조각들은 세계 곳곳에 모든 이에게 미칠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한 성찬례, 즉 ‘미사’입니다. 미사는 단순한 예식이 아닙니다. 미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우리의 의지를 거룩한 하느님의 의지에 더해서 엄청난 은총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며,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그 은총에 배부르게끔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사는 너무 격식화 되어 그저 한 습관이 되어 버렸기에 ‘우리의 의지’의 봉헌이 빠져 버렸고, 그로인해 스스로 ‘배부르지’ 않으며, 나아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다시 마음을 돌이켜 살펴야 합니다. 미사의 능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근본 목적

간혹 젊은 처자가 부유한 늙은 노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가십란에 오르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당장 의심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분명 노인의 재산이 탐이 났겠거니 생각하는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보다 근본 목적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공부를 사랑하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목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공부를 사랑하게 되면 모르겠지만 원래의 목적이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목적을 찾아본다면 아마 우리는 많은 ‘다른 이유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사제와 수도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모두 그럴듯한 대답을 하겠지만 실제로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근본 목적으로 삼지 않는 모든 일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성경의 표현처럼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모든 일들 마저도 그 의미와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걸까요?

정직

정직은 큰 재산입니다. 물론 속여서 조금 더 벌 수는 있다는 것도 세상 안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 더 번 것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부정직으로 벌어들인 돈,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벌어들인 돈은 결국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게 마련입니다.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일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많은 일을 한 듯이 너스레를 떨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거지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내공’이 쌓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직장 안에서도 나름의 윤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수익’을 최고로 삼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그 어느 사장도 수익보다 위험이 느껴지면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은 비록 세상적인 영리함은 지니지 못하겠지만 그 가치를 훗날 반드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이득에 영리한 사장이라도 모조리 잇속에만 눈에 밝은 사람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사업체가 얼마나 갈지도 의문입니다. 정직은 큰 재산입니다. 묵묵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해 내는 사람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내공’을 쌓게 됩니다. 그 내공이라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태도는 훗날 커다란 자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