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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4의 게시물 표시

방탕과 만취, 일상의 근심

과거 석사논문을 쓰면서 ‘놀이’에 대한 윤리신학적 비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놀이는 비생산적인 것이 놀이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무언가를 생산해 내지 않는 직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제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손에 쥐어지는 산물을 생산해 내지 않는다 하여 비생산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 꼬마 아이의 ‘감사합니다’라는 말보다는 누군가가 봉투라도 하나 들고 오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필요도 없는 그 봉투를 받아들고는 뭔가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에게 필요없는 그 봉투는 도리어 내면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이상의 것이 이유 없이 주어질 때에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내면을 파괴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물질은 늘 ‘집착’을 불러오고 무언가에 집착하는 마음은 늘 멍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도한 욕구로 인해서 필요없는 것을 쌓아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내면이 공허(방탕과 만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보니 공허한 근심거리가 자꾸 느는 것이지요.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미사 시간

어제 미사 전례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신부님, 미사를 드리는 시간은 얼마로 규정되어 있나요?” “특별히 규정된 것은 따로 없습니다. 지나치게 짧거나 길지 않으면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미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 구원의 본질적 사건을 그대로 이루어내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미사는 길면 길수록 그 모든 시간이 성화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견뎌내지 못하는 신자들이지요. 신자들이 긴 미사를 참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비오 신부님은 미사를 드리다가 관상에 빠져 들어 미사가 2시간, 또는 3시간씩 걸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신자들은 그 거룩한 순간을 함께 한다는 감격에 그 시간을 침묵으로 함께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본당에서 그러기 시작한다면 당장에 신자들은 투덜거리면서 성당을 빠져 나가겠지요. 미사를 드리는 순간은 우리의 훗날의 구원의 자리를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미사의 모든 순간은 시작부터 끝까지 소중하고 미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도리어 신자들은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지만, 우리들의 인간적인 약점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고보니 이런 농담도 생각이 납니다. 어느 주교님이 자기 본당의 미사가 지나치게 짧다는 투서를 받고 그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주임 신부를 만나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다가 자신이 방문한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네, 미사 시간에 대해서 말들이 좀 있던데…” 그러자 그 신부가 대답합니다. “아, 주교님, 죄송합니다. 그 이상 미사를 짧게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이어트의 영적 이해

여러가지 목적과 종류의 다이어트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목적은 ‘음식을 덜 섭취해서 살을 좀 빼어 좋은 몸매를 유지하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적인 필요에 의해서 식단을 조절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도 음식을 조절할 수는 있지만 대체로는 멀쩡한 사람이 몸매가 좀 불었다는 이유로 평소에 먹던 것에서 음식량을 줄이는 것입니다. 언뜻 외적으로는 교회의 ‘극기’와 비슷해 보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내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극기라는 것은 영혼과 육신 사이에 주도권을 원래의 주인인 영혼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다이어트라는 것은 원래의 주인이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정반대로 육신의 요구를 희생하면서까지도 “마른 나의 몸을 보면서 찬사를 던져 줘!”라고 외치고 있는 내면의 허영심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지요. 의학적인 목적으로 하는 다이어트, 의사의 처방에 따라서 일상생활이 곤란할 정도로 과한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서 시행하는 다이어트는 필요한 것이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이어트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실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살이 찌는가 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고, 마실 술을 다 마시고, 이런 저런 밤모임에 나가서 절제 없이 놀고 하면서도 마른 체형을 원하니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려는 것이 근본 문제인 셈이지요. 결국 다이어트의 왕도는 억지로 음식을 줄이거나 무리를 할 게 아니라, 먼저 무절제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먹고 싶은 걸 왕창 다 먹으면서 그만큼을 다시 빼려고 하니 결국 몸도 마음도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는 요요현상이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구요.

극기

아침에 일어나 샤워기 앞에 서면 고민을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침대에서 금방 나온 따끈한 몸뚱아리가 찬물로 샤워하기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기 순간 온수기를 켤 유혹을 늘 받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도꼭지를 틉니다. 그러면 몸은 거부하지만 이내 그 시원한 물줄기에 도리어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이렇듯 안락을 추구하고 우리의 영혼에 늘 영향을 미쳐 우리의 영혼이 나약해지도록 합니다. 우리가 육의 요구를 끝도 없이 수용하기만 하면 결국 우리는 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영혼이 육신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술만 보면 마시고 싶고, 절제라는 것은 물건너 간 일이 되고 맙니다. 그 밖의 온갖 육신적인 유혹 거리들에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물러지게 되지요. 극도의 고행으로 육신을 상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 이를 인식하면서 육신의 요구를 ‘정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밥을 달라면 당연히 줘야 하지만, 더 맛있는 밥을 달라고 한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영혼을 키우기 위해서는 육신이라는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덩치만 크고 나이만 잔뜩 먹은 어린아이를 내면에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

어딜가나 비슷한 것이 ‘법적인 것’만 나오면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맞니 네가 맞니 하면서 사정없이 서로들 미워하기 시작하지요. 오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사’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저마다 자신이 아는 걸 들이대면서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슬슬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애써 변명하는 모습을 보였구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 미사 왜 드리는지 아십니까? 미사는 간단하게 말해서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나아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드리는 거랍니다. 절대로 잊지 마세요.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더 사랑하기 위해서 드리는 거예요. 오늘 배운 규정들 시간이 가면 다시 잊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절대로 잊지 마세요. 미사는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 위해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알려 드릴께요. 미사에서 실수가 생기면 누구 잘못인지 아세요? 전부 사목자, 집전자 잘못입니다. 한 마디로 본당 신부 탓이지요. 제가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고 제가 신경쓰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니 제 탓입니다. 여러분들이 미사 드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 잘못하는 부분에 가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고치도록 할께요. 여러분들끼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세요. 뭐든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고치도록 노력할께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서로 사랑하세요. 아시겠지요?” 그러니 서로 날을 세우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은 기가 꺾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제가 틀린 말 한 게 아닙니다. 미사에서 뭔가 잘못되면 그건 주임 사제 잘못입니다. 모든 최종 책임자는 주임 사제이니까요.

성모님

- 신부님, 왜 성모님 이야기는 안 해 주세요? 미사를 마치는데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얼른 눈치를 챘습니다. 아마 자기 반 아이들 중에 개신교 아이가 있어서 서로 의견이 달랐을 테지요. - 일부러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으니 그렇지. 하지만 다음 기회가 다시 오면 해 줄께. 아주 일상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을 지닌 아이들은 성모님을 사랑하는데 다른 교회에서는 툭하면 우리가 성모님을 믿는다고, 성모상을 우상처럼 숭배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비판을 들이대니 학생들로서는 서로의 자존심도 있고 해서 아는 선에서 서로들 싸우는 겁니다. 성모님은 다투라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이런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서운하실까요. 성모님은 차라리 예수님의 빛에 가리워 절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더 좋아하셨을 분입니다. 다만 인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 당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모님의 찬가는 그 내용 자체로나 신학적인 구성으로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모님의 찬가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풍부한 영적 보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부분에서 등장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굉장히 지엽적일 뿐입니다. 그 잠깐 잠깐의 등장의 순간마다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차지하는 역할을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만 쏙 뽑아서 성모님을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비판한 그 내용에 대해서 훗날 반드시 그분의 아들 앞에서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변명할 말이 있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때로 성모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의 오류는 명백합니다. 그들은 때로는 우상 숭배의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고, 성모님을 하느님보다 더 위에 계신 분으로 착각하기도 하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이고 성모님이 어머니시니 성모님이 급으로 치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런 신자들의 오류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실 때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되지 않는 것들은 단순히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받아도 우리는 받은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과 축복’은 눈으로도 감각으로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할 때만이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사고가 나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받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님 상태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껏 누리던 모든 것들이 제 스스로의 능력에서 나왔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들의 깨달음은 늘 느려 터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바이올린을 이렇게 잘 연주하니 사람들이 나에게 찬사를 던지는 것이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가 뛰어나서 공부를 뛰어나게 잘 했으니 당연히 좋은 직장을 얻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이런 식의 기본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이 교만은 단순히 남보다 낫다는 수준의 교만이 아니라 ‘하느님? 그게 뭐야? 지금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꺼져버려.’라는 식의 교만입니다. 헌데 그들이 하느님이 절실하게 될 때는 이미 하느님의 손길이 그들에게서 벗어난 때라는 것을 그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르짖고 불러도 그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때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열심히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기회가 있을 때에 부지런히 남을 도우십시오. 그런 모든 기회들이 사라지고 당신에게 일상적으로 주어지던 것들이 그치는 순간 당신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당시의 외침을 들어줄 이가 있을까 의문 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부르짖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사들이고 하느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스스로 내치고서 뒤늦게

졸업반 미사 강론

오늘 학교 졸업반 미사에서 청년들을 보고는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오늘 오후는 무척이나 더웠고 다들 부채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더군요. “덥니?” “예~”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더울 것 같아?” 물론 제가 가장 많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아이들은 누가 가장 더울지 알고 있었지만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신부님이 제일 더워 보이지?” “예~” “하지만 신부님은 부채질을 하지 않아. 신부님은 견딜 수 있으니까, 이 덕을 ‘인내’라고 한단다. 우리는 이처럼 내면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어. 이미 그 씨앗들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들이 싹이 틀거야. 오렌지를 심은 데에서 사과가 날까? 아니야. 오렌지를 심은 곳에서는 오렌지가 날 뿐이지. 마찬가지로 좋은 씨앗을 심은 곳에서는 좋은 열매가, 반대로 나쁜 씨앗을 심은 곳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리게 마련이야. 너희들은 과연 어떤 씨앗을 품고 있니? 참을성이 있고 책임감이 있고 서로 도울 줄 아는 씨앗을 품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만 알고 참을성 없고, 불성실한 씨앗을 품고 있을까? 사실 너희들은 너희들 서로를 잘 알고 있을거야. 누가 겉으로만 이쁜척 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또래집단을 형성하는지 말야.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무던하게 다른 아이들이 청하는 것을 성실히 도와주려는 친구도 알고 있을거야. 이미 너희들에게서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곧 세상에 나가게 되겠지. 너희들에게 지혜를 하나 전해줄께. 신부님이 너희들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좀 더 넓은 시선’을 지니라는 거야.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는 거야. 개들 앞에 소세지를 던져봐. 당장 집어 먹겠지? 왜냐하면 개들은 동물이기 때문이야. 배가 고프면 눈 앞에 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 있지. 하지만 개들은 이 음식이 왜 뜬금없이 여기 있을까? 이 안에 독이 있지는 않을까? 누가 이걸 여기 둔 걸까?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아. 그냥 본능대로 살아갈 뿐이야. 사람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

독신

사제가 혼자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 하라고 하느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11세기 당시 교회의 분별에 의한 결정이었지요. 교회 재산의 세습과 같은 일들을 막기 위해서 단행한 조치인 셈입니다. 이 독신제가 참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내려오면서 자연스레 ‘정결’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인데도 마치 독신은 정결하고 독신이 아니면 정결하지 못하다는 엉뚱한 인식이 우리 안에 내재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성’과 ‘성생활’이라는 것이 감추어지고 금기시되기 시작했지요. 신부도 결국 남자고 수녀도 결국 여자인데 말이지요. 여기서 정결이라는 것을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결’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미친듯한 금욕’이 아니라 한 주인에게 마음을 두고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배우자는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 정결한 것이며 사제나 수도자는 하느님에게 온전한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결인 셈이지요. 성생활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외적인 표지일 뿐입니다. 어느 소녀가 부당하게 강간을 당했다고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건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 소녀는 여전히 정결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제가 하느님 외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고, 수도자가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정결에 정 반대되는 상태이지요. 독신이라는 것은 여전히 ‘필요’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이 필요는 아직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제는 홀로 살면서 아무래도 아내와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에 그만큼을 더 신자들에게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마다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사제들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쏟는 열정만큼 신자들을 돌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이라도 못하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하면서 쉽게 빠져드는 행위들 가운데에는 일반 사람이라도 그러지 말아

혼인

결혼을 하려는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배우자와 한평생 희노애락을 함께 하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처음부터 그런 진지모드로 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눈이 머는 거지요. 눈에 콩깍지가 씌이는 겁니다. 그리고 둘이 열심히 그 이유를 찾습니다. 먼저 함께 살려는 강한 욕구가 있고 그리고 둘이서 열심히 그 이유를 찾는 거지요. 마치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한 사람이 열심히 그를 미워하는 정당한 이유를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그 콩깍지가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이 드러나지요.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찾아 나가는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겠지요. 혼인은 혼인 예식으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혼인 예식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서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니까요. 죽음 이후 영원까지 약속하는 부부는 없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서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결정하는 것일 뿐이지요. 사실 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배우자’라는 이름의 사람과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공상 소설도 그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는 의미있는 것일테니 제 소설도 관심 있으신 분은 흘끔 보실 테지요.

부자가 되려는 이유

돈을 번다는 가정을 반은 농담처럼 상상을 해 보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돈을 벌면 무엇이 좋아지는 걸까요? 돈이 없을 때와 돈이 많을 때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돈이 많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에 여유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사고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즉, 내가 먼거리를 가야 할 때에 기차보다는 비행기가 빠르고, 또 비행기 안에서도 1등석을 타고 반쯤 누워서 갈 수 있게 됩니다. 휴대폰을 사도 최신형 휴대폰을 사서 넉넉한 스토리지 공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여러가지 앱들을 돌릴 수 있겠지요. 휴양지를 가는 것도 아예 통째로 그 휴양지를 사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5성호텔에서 머무를 수 있겠지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가져오는 식단을 즐기면서 테라스 밖으로 나가면 바로 바다가 있을 겁니다. 뭐 저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이 정도 상상해 볼 수 있네요. 하지만 이걸 다 모아보면 결국 처음에 제가 정의한 것이 도출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에 여유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재물로 ‘사물’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처신도 조종할 수 있지요. 돈 많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고 자르고 하는 것 정도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절대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세상 모두를 다 가져도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오직 진실함과 신뢰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사안은, 돈이 결국 ‘영원’을 얻어다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돈많은 바보들은 난치병에 걸려서 돈을 엄청 쏟아붓고는 자신의 몸을 냉동고에 장기간 보관하는 수단을 쓴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극한의 저온으로 냉동된 세포를 해동하면서 그 세포가

난잡한 정신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큰 착각이자 만용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없고 다만 우리가 집중하는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헌데 인터넷을 뒤지면서 온갖 정보를 모두 접하려고 하는 사람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산만해지기 시작하고, 자기도 모르게 특정 정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그에 대한 ‘경향’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멍한 정신을 지니게 되고 중독된 상태의 정신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인터넷 상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주워 읽으면서도 계속 마음이 불안하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두고 눈을 감고 스스로의 생각을 곱씹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참된 지혜가 들어있는 책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무턱대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은 단순한 정보의 창고가 아니라 그 안에는 쓰레기통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희망

‘시험’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누구도 시험을 치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을 위한 준비의 시간 동안 놀고 싶기 때문이고, 따라서 시험이라는 것에 부담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한 자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출제 문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가장 합당한 답을 준비한 이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두고 예수님은 경과와 희망을 말씀을 남기십니다. 최후의 날은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의 시간이 될 것이고, 반대로 준비된 이에게는 희망에 가득 차서 비로소 고개를 드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같은 경고를 지금의 시대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 권력의 정점에 이른 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핍박하던 자들아,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의 마지막 순간이 추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곳곳에서 파괴와 멸망의 징조가 너희에게 드러날 것이고 너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끊임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권력과 재물과 명예가 집중된 곳에서 일하던 이들아 너희는 그 날이 다가올 때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그들이 사정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그 피해가 너희에게까지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다 그 날에 돌보아야 할 이들이 잔뜩 있어서 거기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 합당하지 않은 모든 권력들은 무너져 수난의 시기가 다 찰 때까지 고통 당해야 할 것이다. 온갖 권력과 부귀와 명예의 정점에 이른 이들이 하나씩 둘씩 병으로 사고로 죽어 나갔다는 소식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고, 온갖 전쟁과 거대한 인명 사고의 소식들이 너희를 불안하게 할 것이며, 그 밖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추악한 소식들에 너희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너희들이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던 이들 마저도 불안에 떨고 흔들리기

어느 가정 이야기

손목을 긋고 약을 먹는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가정은 불안했습니다. 아빠는 늘 술을 먹고 주사를 피우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못마땅합니다. 최근에는 아빠의 외도 때문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그런 행동은 단순히 외적인 요소의 결과물이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는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맞지만 그 관심과 사랑의 요구 방법은 틀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본인의 평화를 회복하셔야 해요. 본인이 자연스러워야 딸아이에게 그 자연스러움을 체험시킬 수 있고 딸아이가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미 남편에 대한 문제는 이 자매에게 상담을 해 준 적이 있었고 나름으로는 진보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매로서는 전혀 엉뚱한 곳에 불꽃이 튄 셈이지요.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불안해진 이 자매는 딸아이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 딸아이는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이러 저러한 것들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마세요.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내버려두되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것, 심각한 죄가 되는 것만을 애정으로 고쳐주도록 하세요. 딸아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게 두세요. 자신이 바라는 삶과 어머니로서 바라보는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세요. 누구나 생존은 하니까요.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회 구성원이 될까를 걱정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내 딸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세요. 그러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거예요.” 사실 이 가정의 구도를 보면 엄마 아빠에게 잘못의 근본 요인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둘에만 집중을 하고 아이의 내면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른 문제를 숨기는 것이 됩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행위로 부모들의 마음을 조정하려고 들고 있었고 이 부분은 적절하게 수정되어야

선교사의 안락

만일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안락’을 추구한다면 어찌 될까요?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문을 꼭 닫아걸고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만 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평판을 신경쓴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국에서는 도대체 그 선교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낼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지 현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국에는 ‘알려진 것만 알려지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은 꽁꽁 숨겨지게 되지요. 선교사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 가서 사진 몇 장을 찍어서 한국에 가서 프레젠테이션으로 보여 주면서 조금 우는 소리를 하면 얼마든지 재정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교 하러고 온 이들입니다. 선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받아 들이기 싫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수단으로 물질적인 것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핵심이 되어 버리고 나면 선교사는 그 정해진 일들 속에서 안락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원래 선교는 ‘불편한’ 것입니다. 선교는 거북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 선하고 순박한 이들의 사랑도 존재합니다. 언제나 양측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도 미리미리 경고해 두신 것처럼 선교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런 풍파 가운데에서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곤히 주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내적 평화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외적인 평화와 안락을 추구하면서 도리어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들이 있으니 걱정입니다. 일하기 싫어하고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한다면 도대체 왜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일까요? 선교지에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자본주의의 본고장

한번은 미국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 산업의 본고장 할리우드가 있는 LA에 갔지요. 그래서 통상적인 관광 코스라고 하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 보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리고 안에는 주제별로 구경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헌데 들어가면서부터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특별 관람권’이라고 해서 돈을 더 얹어주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앞질러서 들어가서 먼저 관람하고 나올 수 있게 되어 있더군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신기한 여러가지 것들이 많았고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인공물’들이었고 돈으로 구축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단 하루 동안에 벌어들이는 것들이 어쩌면 제 본당의 10년 예산(1년 예산도 아니고)을 훨씬 웃돌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이미 체험적으로 누군가에게 자본주의를 교육받고 있었습니다. - 자 잘 봐. 너는 이미 1시간 전부터 줄을 서고 있어. 그리고 거의 들어가기 직전이지. 하지만 돈이 있으면 그런 것 따위는 쉽게 무시할 수 있어. 저 아이들을 봐봐. 특별 관람권으로 자신들이 원할 때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 너희들이 앞으로 뭘 해야 하겠니? - 돈!!!!!!!!!! 돈을 벌어야 해요!!!!!!!!!!!!! - 그래, 옳지 내 아이들. 그렇게 너희들은 돈을 벌어야 하는 거란다. 잊지 말거라. 돈으로 꾸며진 인공의 공원, 제가 있는 곳은 물이 모자라서 가끔은 수도도 나오지 않는데 거기에서는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더위에 지칠까 선풍기에 물을 분사하여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상품들 저런 상품들을 보면서 사달라고 떼를 쓰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합리성’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지만 이미 그 ‘합리성’이라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인 성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발을 딛고 있는

마르코 복음서 강의록

성경 강의 입문과 마르코 복음 1장 삶과 동반하는 성경 성경은 그 자체로 공부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늘 우리의 삶의 단편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결과물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죠. 이런 작업이 없이는 우리는 그저 우리의 지식의 단편을 하나 늘린 셈입니다. 따라서 매번의 성경 공부 뒤에는 매번 얻게 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나의 자리에서 실천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 오는 사람에게 이 공부는 지극히 유익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저 지식을 늘리겠다는 이에게 이 성경 공부는 따분한 시간일 뿐입니다. 사전 준비 매주마다 성경의 각 장을 배우게 되는데 배우기 전에 반드시 성경을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을 하는 이 과정에 일주일 내내 단 한 번도 해당 부분을 읽지 않은 채로 온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 자세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 강좌의 교리교사로서 여러분에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요구하고 싶습니다. "강좌에 오기 전에 반드시 해당 장을 읽고 오십시오." 이 작업을 잘 해 온 분들은 성경 강좌 때에 성경을 들고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1장의 큰 주제의 흐름 준비 - 세례 - 유혹 - 전도 - 제자단 형성 - 구마 - 개인 치유(봉사자) - 다수 치유 - 전도여행 - 나병환자의 치유 준비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그 입구를 잘 정돈해 두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로 방구석을 어지럽혀 두고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그 손님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복음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준비작업으로 구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제시합니다. 이 준비작업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부분입니다. 길은 과연 무엇이고 '곧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땅에 물을 쏟아봅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