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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의 게시물 표시

거룩함에 헌신해야 하는 이들

자신이 사제이고 수도자인데도 신앙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세속적인 관심사가 됩니다. 자신이 하는 취미 활동이나 자신이 보는 드라마 이야기를 더 맛깔스럽게 하고 서로 관심있게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을 때로는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손에 쥔 것만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도 많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면에 가득 안고 있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내어주는 것이지요. 내면에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고 세상 것을 향한 욕구가 가득한데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이 그럴 수는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이끌지 않았거나 그들이 잘못된 길에 접어들어서 아직 빛을 올바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요. 헌데 양들을 이끌어야 하는 직무를 맡은 이들, 오로지 주님 안에 봉헌된 삶을 살기로 다짐한 이들이 그러는 것은 분명한 직무유기입니다. 취미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드라마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충분한 휴식을 누리기도 해야 하고 기분 전환을 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육신과 영혼이 지칠 때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원래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그것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원래 해야 하는 일을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일로 바꿔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로서 우리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성화’의 직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보다 더 사랑하고 그분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으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그 ‘거룩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사제로서 미사 경문을 읽는 것이나 수도자로서 때맞춰 성무일도를 바치러 경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 직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

누군가 ‘내가 무엇을 하겠다.’라고 할 때에 그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그가 진실한 마음이 없고 능력도 없다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지요. 그래서 진리와 권능은 일을 이루는 데에 참으로 중요한 두 가지 요소입니다. 우리가 지닌 생명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기계’를 만들 수는 있어도 아직 ‘생명’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있는 생명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수는 있어도 이미 꺼진 생명을 다시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이 생명은 ‘주어진’ 것이고 그 주신 분이 되찾아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창조주, 전능하신 분, 영원하신 분, 주님, 신, 천지신명 등등 부르는 방법이야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보다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이지요.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고 권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지요. 그분의 진실성은 의심할 이유가 없고 그분의 권능도 마찬가지로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덕스러운 것은 우리일 뿐이지요. 우리가 우리 멋대로 그분을 의심하고 내치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훗날 다시 거두어들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다시 돌아갈 때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바라신 대로 좋은 열매가 되어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썩은 열매가 되어 돌아갈 것인지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진실하셔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것을 이룰 능력도 지니고 계십니다. 이를 올바로 믿는 이들은 그분의 약속에 스스로를 내어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이들은 오직 자신의 능력에

2015년 12월 31일 지금

‘마지막’이 아니라 ‘마무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에 ‘마지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끝이 아니라 ‘정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일 뿐입니다. 즉 지구가 자전하면서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루를 정하고 또 지구가 공전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해를 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직 ‘현재’이고 ‘지금’일 뿐입니다. 그 밖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과거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기억일 뿐이며, 미래는 지금 내가 하는 일로 인해서 다가오게 될 결과일 뿐입니다. 방이 더러운 현재를 가지고 있으면 ‘더러웠던 방’이라는 과거를 지니게 되고, 방을 치울 줄을 모르고 오히려 어지럽히기만 하면 ‘더 더러워질 방’이라는 미래가 현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지금의 이 순간에 무언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며 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판으로 지금 무언가를 시도해야 합니다. 다가올 미래가 암울해 보인다면 걱정만 할 게 아니라 그 미래의 암울함이 경감될 수 있도록 지금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지난 한 해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도 많았지요. 그래서 다음 한 해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보다 내적인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렇게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미래, 보다 하느님에게 헌신하고 이웃을 사심없이 사랑하는 그 미래는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빛과 당신의 백성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9-11) 어두컴컴한 곳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면 사물들이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김에 서린 안경을 끼고 있다가 그것을 닦아 내도 같은 체험을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이 흐려져 있다가 빛을 받아들이거나 그 빛을 받아들일 눈을 맑게 해서 사물들을 뚜렷하고 명백하게 구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때로 잘 정돈되고 내용이 좋은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정신적인 차원의 빛으로 조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 멍한 정신일 때에 커피를 한 잔 하거나 잠을 깨는 행동을 해도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납니다. 이처럼 빛을 받아들이거나, 이미 존재하는 빛을 잘 받아들이도록 스스로를 준비할 때에 우리는 우리 안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의 과정은 우리의 영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위의 성경 구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빛이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가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영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그 빛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도 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생기고 싶어하고, 건강하고 싶어하고, 적은 노력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기왕이면 인기가 있고 권력도 쥐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아주 가까이 지나가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영원과 손을 맞잡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볼 눈이 없어서 그분은 빛으로 취급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성가심이요 거북함으로 취급을 당하십니다. 빛이신 분이 당신의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

거룩한 수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 2,38) 여성들의 수다는 여러가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정보도 교환하고 친교도 도모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수다는 또한 ‘복음 선포’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잔뜩 쌓인 것을 풀어놓게 마련입니다. 수다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수다 안에는 전날 본 드라마 이야기,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등등이 오갑니다. 하지만 거룩한 여성들의 수다는 다릅니다. 그들은 그들이 간직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 거룩한 이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굳게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한나처럼 우리의 수다를 거룩하게 이끌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이 태어나신 아기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거룩한 수다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기억되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 생각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제가 강론대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지 말라’고 가르치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저의 이 말에 은근히 기뻐하는 이들입니다. 딱 봐도 술 퍼마시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지요. 여성들과 아이들입니다. 반대의 부류는 기분 나빠하는 부류들입니다. 즉, 술을 과하게 마시고 있는 이들이지요. 제가 그 주제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내내 사람들의 표정에 그러한 경향이 더욱더 드러나게 됩니다. 숨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물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하고 참된 빛을 전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하지만 이로 인해서 두 부류가 갈라지게 됩니다. 즉, 죄에서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부류 하나와, 아직도 죄를 짓고 싶어하는 부류 둘이지요. 정말 간절히 구원을 기다린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여전히 죄를 즐기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성가심’이고 ‘귀찮음’이고 ‘거북함’일 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요? 예수님의 오심이 정말 기쁨이고 빛으로 느껴지나요? 아니면 정반대로 거리낌이 느껴지나요? 바로 이것으로 우리의 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이 당한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즉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은 자신들이 허용한 선 이상을 넘어오면 사정없이 공격을 감행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공격을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빛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휩싸여 있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부드러운 말을

계시의 빛이며 영광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2) 예수님은 아직 그분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보다 참되고 거룩한 것을 향한 계시의 빛, 그리고 이미 하느님을 얻어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분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말하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믿음을 받아들인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합니다. 보다 참되고 거룩한 가치에 눈을 열기는 커녕 ‘신앙’을 지닌다는 것 자체를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립할 줄 모르고 어딘가에 기댄다고 생각을 하지요. 자신들도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기댔으면서도 영원한 주인이신 아버지에게 기대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에게 예수는 영광이기보다는 ‘수치’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고수하는 전통과 율법을 파괴하는 존재로 보였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저주받은 존재들과 어울려 다니고 존경하올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맞서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뵙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을 원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은 그저 성가신 존재이고 수치스러운 존재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훗날 우리가 참된 가치에 눈을 뜨게 될 때, 아니 지상의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날이 다가올 때 과연 우리는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될까요? 우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한 그분 앞에 말이지요.

빛과 어두움

성경은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 인간의 그릇된 내면이 일으키는 결과에 대해서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두움을 보고 그것으로 배워 알게 하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랑만 가득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증오가 넘쳐 흘렀지요. 그 험한 증오의 밭에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 초보들의 큰 착각은 ‘신앙생활 = 하늘나라의 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부님도 괜히 멋있고 수녀님은 성스러워보이고 사람들은 모두 착할 것만 같지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실망할 일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모두가 천사라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색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착한 너희들끼리 잘 살라고 예수님이 만드신 게 아니라 세상이 악하니 너희들을 뽑아 세워 악한 세상을 복음화할 일꾼으로 만들려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 회개할 마음이 없는 죄인, 여전히 악한 뜻을 품은 죄인’들도 모여있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경고를 단단히 해 두셨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의 현실에 놀라고 실망하곤 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자리에 헤로데의 살육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자리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시기와 증오가 있었지요. 성전의 거룩한 가르침에 대사제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는 정반대로 부활이 있었지요. 그것이 우리의 희망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기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마태 2,14-15) 한 사람이 악한 마음을 품으면 세상 끝까지 그 악을 이루기 위해서 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그 악을 온전히 이루고 나서야 안정을 얻지요. 헤로데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자신이 왕으로 엄연히 존재하는데 다른 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지역 일대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여 버리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하고 나서도 안정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상대를 해칠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악에 가득찬 사람을 만나면 그 모든 선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일단 화가 난 아이에게는 사탕을 쥐어 주어도 그 사탕을 던져 버리고 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악한 마음을 지닌 이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온유와 친절로 가꾸어 놓아야 합니다. 악한 이들이 우리를 증오할 이유를 찾을 수 없도록 미리 조심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해도 소용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피난을 간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렸지요.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즉 한 사람이 선한 마음을 품으면 그 선을 온전히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그리고 선한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 곧잘 의욕을 잃고 사라지곤 합니다. 한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천성적으로 순한 성격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진정한 선한 의도는 끊임없는 의지의 결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 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의 흐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 먹을 때에는 단순히 ‘배고픔’ 때문에 그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먹을 것을 고를 때에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이미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음식을 고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음식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나쁜 요소들에 대한 여러 뉴스들을 상기하기도 하고, 또 겉포장지의 화려함을 고르기도 하며, 가격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단순한 행동 안에는 참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것이지요. 현대는 이 복잡함을 더욱 부추깁니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단순한 정보를 거뜬히 넘어서서 정보의 홍수를 일으키고 모든 활동에 있어서 우리의 잠재적인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생각에 골몰하다가 결국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또는 엉망으로 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라 하는데 그 사랑 안에 내포된 수많은 엉뚱한 생각들을 검토하느라 아무런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혜와 분별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지혜와 분별을 ‘의심’과 ‘억측’으로 뒤바꿔 놓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억측하기 시작하면 아예 소설을 쓰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들에게는 천상의 지혜가 있고 그 지혜는 그들의 삶으로 표현되지요.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헌데 세상 사람들은 복잡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 할 것으로 둔갑시켜서 해버리고, 해야 할 것을 교묘하게 피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우리가 하느님과 머무르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지혜가 없고, 영리함만 남게 됩니다.

가정과 공동체

가정은 세상 모든 공동체의 기초가 됩니다. 한 인간은 가정 안에서 성장하며 필요한 것들을 습득하고 기본적인 인간됨을 배우지요. 그래서 가정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가정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바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구성원들을 힘으로 억압하는 가정은 공동체도 비슷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약한 이들은 힘으로 제압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주요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자리에서 비슷한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도 비슷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다른 현명한 통치 수단에 대해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례히 힘이 없을 때에는 찌그러져 있다가 나중에 힘이 생기고 나면 자기보다 힘없는 이들을 내리누르는 형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정은 공동체도 비슷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아내는 틈만 나면 남편에 대해서 궁시렁거리고 남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모습을 보고 성장한 이들은 공동체에 나가서도 장상의 직분을 맡은 이들에 대해서 서슴없이 그런 일을 자행하게 됩니다. 건설적인 비판이나 자신이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활동을 하기보다 늘 주변에서 자기네들끼리 궁시렁거리기만 하는 것이 일이 됩니다. 그러는 동안 가정은 더 엉망이 되곤 하지요.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뭔가 구체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고 저마다 말만 늘어놓기에 실제로는 더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반항을 하면 그 가정은 콩가루집안이 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올바른 모범을 보이지 못했고, 자녀들도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고 참고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그것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공동체로 이어지면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콩가루가 됩니다.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어르신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늘 투덜대고 자녀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가로막기만 하면 그 가정은

간단하게 요약된 그리스도교 가정상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콜로 3,18-21) 1) 아내 -> 남편 ; 순종 2) 남편 -> 아내 ; 사랑 3) 자녀 -> 부모 ; 순종 4) 부모 -> 자녀 ; 사랑 1)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이 마땅한 일입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집안에서 ‘머리’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지체들은 그 머리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내는 가장 우선적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남편 욕을 하고 다니거나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가 잘났거나 못났거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경제력이나 힘을 바탕으로 제압하려고 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3)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를 좋아하십니다. 이는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에도 나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내리사랑이기에 자녀들은 부모를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애정 앞에서 자녀들은 겸손되이 처신해야 합니다. 4) 부모들은 자녀들을 들볶아서는 안됩니다. 부모들이 삶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자녀들을 이리 저리 성가시게 해서는 안되고, 특히 장성한 자녀들 앞에서 삶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부모들은 인내를 지니고 기도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녀들을 마구 들볶으면 그들의 기를 꺾게 됩니다.

하느님의 신비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루카 2,50)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오늘날 우리가 성인들 중에 가장 뛰어난 성인들로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인간이었을 뿐, 천상의 지혜 앞에서는 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잃고 사흘을 고생을 해서 성전에서 찾아 내었는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하는 아들을 보고 얼마나 허탈하고 당황스러웠을까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덕이 높다 한 들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달리 말해서 아무리 우리에게 뛰어난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전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에게 다가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의지를 봉헌하고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일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하게 할 그 무언가는 사실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섭리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맡은 부분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면 됩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어제는 강론 중에 성당의 불을 모두 끄고 초를 하나 들고 신자석에 내려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게 되면 이 작은 불이 소중해집니다. 헌데 성당 안에서 잡담이나 하려는 사람에게 이 불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어둠 속에서도 잡담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주보의 말씀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이불은 너무나도 소중한 불이 됩니다. 그래서 불을 찾고 불 가까이로 다가오려고 하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분이 별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탄이 단순히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는 것이나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찾는 이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중요한 분이고 반드시 필요한 분이 되는 것이지요.” 모쪼록 사람들이 성탄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것을 추구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강해짐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자꾸 먹으면 지겨워지듯이 삶도 그러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에 가득찬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삶을 지겨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곁눈질을 시작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련이 닥칩니다. 괜히 엉뚱한 곳으로 마음을 구부렸다가 된통 당하는 셈이지요. 설령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누구는 반드시 오류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가족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또는 친구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든 저든 우리는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일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처음에 머물렀던 상태를 그리워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바로 어린아이 시절에 아무런 걱정이 없을 때 말입니다.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사실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일으켜 세워 걸어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시련에 단련시켜서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전의 온실 속의 화초로 돌아가기를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더욱 강해져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거뜬히 이겨낼 채비를 갖추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인내를 키우고 하느님에게 감사드릴 줄을 아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로 넘어지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새로운 양식을 주시며 우리의 길을 독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교회

사람이 현실을 모르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지역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전혀 감이 없이 그저 자기 혼자 좋아하는 것을 팔기 시작하는 장사꾼은 얼마 가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됩니다. 장사를 시작하려면 지역 현황을 올바로 조사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모두 똑같지만 각 지역별로 서로 다른 형태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어느 곳이 레지오가 잘 된다고 그것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체성사는 이루어져야 하지만 나머지 활동은 각각의 지역의 특성에 맞게끔 짜여지고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당 사목구 주임은 그 지역에 파고들어 그 지역의 특성을 올바로 잘 이해하고 가장 적합한 사목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리더 양성일 수도 있고, 사회복지일 수도 있고, 기초교육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경우들에 있어서 때로 우리는 ‘원래의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NGO단체가 아니며 학교도 아니며 정치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이고 회개하는 죄인들이며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 핵심, 즉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세상 안에서 아무리 두각을 드러내는 외적 형태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게 마련입니다. 헌데 이런 일들이 오늘날 적지 않은 곳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핵심을 잃어버리고 전통과 관습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또 인간적인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상실한 채로 엉뚱한 일에 연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돈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이 끼어들면서 여러가지 복잡 다단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자들은 길을 잃고 심지어는 사제들조차도 길을 잃기 시작한 셈이지요.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어둠의 영들은 최우선적으로 사제들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 1,21) 예수님이 세상에 온 목적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별로 심각하게 본인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찾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이곳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찾으면 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실제적인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믿고, 또 믿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지요. 믿음은 우리를 색다른 이해의 지평으로 초대해주고 우리가 아는 것들은 더욱 굳건한 믿음의 장을 열어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사실 상식적인 선에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존재했던 한 인물로 인식할 수도 있고, 또다른 누구에게는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의 성찬례 안에서 실존하는 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요. 그런 각자의 인식은 저마다의 믿음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저마다 알게 된 사실로 인해서 믿음이 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존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족하게 마련이고, 이것이 단순한 약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그릇된 선택에서 기인하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가 그릇되이 선택한 것들, 참되고 진실되고 보다 가치로운 것을 버리고 별 의미없는 것들을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 그

임마누엘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 신학교 시절에 같이 ‘성무부’로 들어간 친구가 있었는데 성씨가 ‘임’씨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씨였지요. 그래서 한동안 농담처럼 ‘임마’라고 불리었습니다.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임’은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마누’는 ‘우리’라는 뜻을,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 이름 마지막에는 늘 ‘엘’이 들어가지요.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예수님은 다양한 별명을 지니고 계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물론 그 밖에도 사람의 아들, 메시아(구원자),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이) 등등의 많은 표현들이 있지요. 하지만 임마누엘은 특별히 강생의 신비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집에 주임 신부님이 찾아오기만 해도 난리가 나곤 합니다. 주교님이 오신다면 더하겠지요. 교황님이 오신다면 아마 동네가 난리가 날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구요. 볼리비아에 교황님이 오셨을 때에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는 그 때에 동기 신부들과 10년차 사제 연수를 갔다왔지요. 중요한 분이 함께 계시면 환경도 정리해야 하고 또 몸가짐과 행동거지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주교님 옆에서 쌍욕을 해대는 사람은 없지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지 아닌지를 잘 알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정돈되어 있다면, 즉 그가 평화 중에 머무르고 차분하고 인내롭고 사랑할 줄 안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고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고 입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하느님과 상관 없는 사람인 것이지요. 사실 적지 않은 신자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탄생

어느 왕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던 소박한 가정에서 더군다나 마땅한 자리도 구하지 못해서 어느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룩하다’는 것은 ‘화려하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탄은 화려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화려해졌을 뿐이지요. 사람들은 성탄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더 나은 소득을 얻을 아이템들을 만들다보니 성탄이 엄청 화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탄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박하고 겸손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초라함 속에는 진정한 보물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신원이었고 그분의 거룩한 영이었지요. 그 값진 보물은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초라한 환경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그 보물을 찾아 얻게끔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 보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만일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있었다면 가난하고 초라한 이들은 그에 다가설 수 없었을 테니까요. 부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난하고 초라한 곳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없어서 문제이지요.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부유한 곳에 함부로 다가설 수 없습니다. 입구부터 막혀 있으니까요. 거지는 백화점에 입장하지 못합니다. 입구에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말겠지요. 그러나 부자들은 자기가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난한 곳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부자들을 평생에 겨우 몇 번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그 목적이 굉장히 의심스러운 이들이 적지 않았지요. 우리의 참된 왕의 탄생은 정말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초라함 속에서도 거룩함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당은 크고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생각이 옳은 것일까요? 초라한 성당

희생

희생을 떠올리면서 오직 물질적인 것만을 떠올리는 사람은 참으로 초라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 중에서 가진 것이 물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와 그에 필요한 것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 풍부히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애정, 사랑, 관심 그 밖의 어떤 말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지요. 사실 우리가 남에게 내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내어줄 마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존재합니다. 나의 육체적인 힘, 나의 시간, 공감하는 감정, 그리고 나의 재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가 될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준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방법이 누구를 위해서 어느 순간에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생명은 꾸준히 바쳐질 수도 있고 보다 중요한 사건을 계기로 바쳐질 수도 있습니다. 나의 육신이 정말 하기 싫은 일이 있는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나는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엄마의 설거지를 돕거나 아빠의 구두를 닦는 정도의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정말 하기 힘든 일인 셈이지요. 왜냐하면 나의 의지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의 의지가 원한다면, 즉 나의 마음이 가 있다면 히말라야 산을 오른다 할지라도 쉬운 일인 셈입니다. 참된 희생은 간단히 말하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참된 희생입니다.

엠마우스

사무실에서 근무를 서는데 두 젊은 친구가 묻습니다. “엠마우스가 뭐에요?” “엠마우스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한 동네 이름이야. 헌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두 제자가 그리로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 그리고 가르침을 충분히 받고 저녁식사에 참여하는데 그 저녁식사는 예수님이 거행하신 성찬례였던 셈이야. 그래서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그분은 사라지고 없었지. 그래서 그 두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된 거야. 그런 상징적인 의미에서 엠마우스라는 이름을 많이들 차용을 하는거지.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부활 이후에 엠마우스로 가던 제자들의 체험을 되살리기 위해서 ‘엠마우스’라는 이름 하에 여행을 가거나 피정을 하기도 해. (신부님들이 이 날에 부활동안 고생한 걸 보상한다는 의미로 영덕에 회나 대게 먹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ㅋ) 그런 의미로 ‘엠마우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 그리고 여기에도 여러 그룹들이 그 이름을 쓰는 거고 말야. 한번 상상을 해봐. 이 동네의 이름은 사뗄리떼 노르떼(satelite norte: 북쪽 위성도시)야. 그 의미 자체 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 하지만 훗날 사람들이 사뗄리떼 노르떼가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거야. ‘사뗄리떼 노르떼라는 곳은 많은 이들이 희망도 없이 술에 취하고 폭력을 저지르고 이기적으로 살던 곳이었는데 어느날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동네로 바뀐 곳이지.’라고 말야. 그럼 사뗄리떼 노르떼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는 거지. 나는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어. 왜냐면 그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까.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이고 하느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여튼 엠마우스라는 건 그런 의미야. 예수님의 사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배우고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선교사가 된다는

도구가 되기까지

인내, 관용, 온유… 저에게 다가오는 시험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합당한 시련을 허력하셨고 위의 세가지는 각각의 시련에 상응하는 덕목들입니다. 인내는 갑작스런 반응을 조절하게 도와주고, 관용은 너그러니 용서하는 마음을 키워주어 상대가 다가오게 하고 온유는 그렇게 다가온 이를 부드럽게 다루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요. 아마도 예전의 저였다면 태어난 날을 저주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조금 마음이 쓰일 뿐입니다.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체험들은 저에게는 은총의 시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도구를 늘 ‘디자인’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칼이면 더 날카롭도록 다듬으시고 망치면 더욱 강한 힘으로 내리누르도록 하시며, 무엇을 담는 그릇이면 더 많은 것이 담기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그러한 도구들은 모두 다 처음에는 볼품 없는 것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냥 나뭇조각, 돌조각, 쇳조각에 불과한 것들이었지요. 하느님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그것을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재료들의 고통은 상당했겠지요. 어떤 재료들은 자신이 깎이는 느낌이었을 것이고, 또다른 재료들은 자신들의 변형을 느꼈을 것입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 도구들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느님은 그것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도구들의 모양새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물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 망치와 정과 대리석으로 그렇게나 멋들어진 조형물을 만들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군가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면 하느님은 그 순간부터 그를 다듬으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위대한 기술자이시며 영혼의 조각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움

선택

이제 이 거리를 건너면 곧 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때였다. 뭔가에 얻어맞은 듯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은 무심히 내 곁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뚜렷한 소리라 자신의 두 귀로 들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돌아가라!’ 하고 외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5살때였다. 그는 나에게 ‘어른’으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혼한 엄마와 살아가는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 내가 13살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는 나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엄마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우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힘 꽤나 쓰는 친구들, 자기들끼리 세력을 형성해 다른 아이들의 삥을 뜯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그런 삶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나를 포기했고 나 역시 결국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노는 아이들과 늘 가던 피씨방에서 그가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혼자니? 이시간에 학교는 어쩌구?”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뭔 상관이야 X발.” “지금 실수하는 거 아닐까?” 나는 하던 게임을 정지하고 의자를 밀치듯 일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의자가 바닥에 콰당 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깔끔한 정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 반쯤 감은 그의 눈에서는 무언가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다. 여느 동네 깡패가 아니었다. “사람은 가려가면서 시비를 걸어야지. 안그래?” 알 수 없는 그의 힘에 압도되어 나는 시선을 피하고 우물쭈물 쓰러진 의자를 다시 일으켰다. “내가 보기에는 학생 같아 보이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지? 돈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일 하나 하지 않겠나?” “무… 무슨 일인데요?

믿음, 실천, 이성, 회개

교회에서 설명하는 것들은 ‘신앙’, ’믿음’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만일 삼국시대 사람에게 아이폰을 보여 주면서 이것으로 이역만리에 떨어진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에게는 ‘현대화된 지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전기라는 것도 없이 등불을 켜고 사는 사람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개념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교회의 모든 핵심적인 활동과 가르침은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교회의 모든 유산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핵심 관건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내는 삶이 없으면 이 또한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둠의 영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악한 영들이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받아들인 신적 지식을 바탕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한가지 더 덧붙여서 ‘이성’이라는 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에 가진 믿음을 보완해주는 튼튼한 구조물을 구축하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 전에 철학을 먼저 배우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인간의 논리성과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 위에 튼튼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 자꾸 하게 될 테니까 말이지요. 맹목적으로 막연히 믿으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의 삶에 대한 가치와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결과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에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초대를 하는 사람이 실천으로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하기도 하겠지요. 본인 스스로 엉망인

헤어짐

사제로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은 사람이 떠나는 것, 죽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고 우리가 같은 길에 있다면 영원 안에서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잠시의 이별이 슬픈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있고 한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 슬픔을 느끼게 되지요. 설령 그 이별이 잠시라 할지라도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그 잠시의 떨어져 있음이 아닙니다. 참된 슬픔은 한 영혼이 갈 길을 잃고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 영혼은 비로 한 지붕 안에 같이 산다고 할지라도 같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참된 세상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집중을 하면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남아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 안에서 삶을 영위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마음은 서로 갈라져 있고, 탐욕과 시기와 증오와 이기심으로 인해 산산 조각이 나 있습니다. 그저 한 지붕 안에 함께 산다는 것이 일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요. 우리는 같은 길, 하느님을 향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흘리는 눈물보다도 그의 길이 하느님에게서 어긋나 있음에 더욱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그는 육신은 비록 살아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기심과 탐욕을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유함과 탐욕

사람들은 이런 저런 영적 가르침에는 둔감하다가 늘 ‘돈’과 관련된 가르침에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관심사가 거기에 쏠려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즐기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 불편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해 보이고 뭔가 부자들에 대해서 반감을 잔뜩 지닌 것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으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의 적지 않은 부분에는 부유함을 비난하는 것 같은 표현들이 적잖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본 뜻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 위치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새가 물 속을 날지 않고, 생선이 하늘을 헤엄치고 다니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 저마다의 것들을 놓아 두셨지요.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자신의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의 상황이 다가오면 그들은 도리어 불편해지게 됩니다. 물고기를 물 밖에 내어 놓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새를 물 속에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자신이 가진 능력 속에서 별다른 아쉬움 없이 머무르면 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아쉬움 없이 살아갈 만큼의 풍족함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불확실해보이는 미래를 걱정해서 ‘쌓아놓고 재어 놓으려’ 한다는 데에 있지요. 사람들은 제 능력 안에서 최대치를 활용해 부를 이루고 그것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기심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리는 것이지요. 사랑과 도움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몸이 서로를 위해서 아낌없이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은 손만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고 온 몸을 보살피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심장도 자신을 위한 피만을 보내는 게 아니라 온 몸을 위해서 피를 보내지요. 온 몸의 지체는 저마다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게

게임기와 아이들

어제 성경강의를 하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주변에 우루루 몰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게임기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이 참새마냥 그 아이를 따라다니고 있었지요. “저기 보세요. 저 게임기 하나 때문에 아이들이 거기에 온통 정신이 집중되어 있지요? 저 게임기를 들고 있는 아이는 자신에게 전권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할 거에요. 게임기를 소유한 것으로 다른 아이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요. 그리고 그 맛을 알게 되고 나면 나중에는 다시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더 좋은 무언가를 찾고 싶어하는 욕심에 빠져들게 될 거구요. 그래서 아빠가 다음해 성탄 선물을 좀 못한 걸 해주면 그때부터 아빠에게 앙심을 품기도 하겠지요. 아이들은 뭐든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에요. 그냥 흙 한 무더기만 줘도 그걸 가지고 자기들끼리 이든 저든 만들어서 하루종일 놀 수 있지요. 저만 해도 어린 시절에 땅바닥과 돌만으로 놀곤 했었으니까요. 헌데 저런 값비싼 장난감을 주고 나면 거기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만 쳐다보게 되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더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고 꿈을 꾸지 않게 되지요. 헌데 부모님은 아이들이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게 싫어서 저런 것들을 주어 버리고 말지요. 아이들은 저걸 붙들고 있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잠자코 있으니까요. 아직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게임기는 너무나 강력한 자극이고 거기에 몰두하고 중독되게 되어요. 어머니들, 아이들과 놀아주세요. 바쁘다고 하시지 말고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아이들이 게임을 할 때에는 시간을 정해 주고 그 시간을 지키도록 하세요.”

하느님의 넓은 품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지파라고 해서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충실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이 되어야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길이 외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이르면 하느님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신의 사람들을 당신께로 불러들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한 높낮이가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우리는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는 ‘온유, 친절, 선행, 관용’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선을 추구하는 활동을 공유할 수 있고 같은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전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모두 형제인 것이지요. 그러나 때로 우리는 ‘독선적인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들은 선택된 집단이며 나머지는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외치고 배타적인 선교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교회 안의 풍성한 영적 자양분과 우리 교회의 정통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이 ‘배타성’의 바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세상 모든 이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한 특정 집단을 선택하시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우수한 집단’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위대함은 우리의 나약함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생이 좋고 잘나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불리움 받았고 용서 받고 초대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따지고보면 이스라엘

시기

시기라는 것은 참 지독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것이 ‘ 성화(聖化)’와 관련될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력해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은 하기 싫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러우면서도 그것을 이루기는 싫을 때에 상대를 박해하고 폄하하려는 나쁜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인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하느님 가까이에 머무르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곤 하지요. 시기는 분명한 어둠의 행위입니다. 시기에 사로잡힌 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어 착하고 올바르게 될 수 있는데 자기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선한 상대를 향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한껏 끌어올리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머리가 지끈거릴 수 밖에요. 사람들의 인기는 얻고 싶은데 본인이 착하게 되기는 싫고, 그래서 선택하는 차선책이라는 것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이의 명예를 훼손해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라니 참으로 그 영혼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만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 (루카 1,51)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차별적인 생각은 여러가지 요인에서 기인합니다. 남녀 간의 차이에서, 인종 간의 차이에서, 학식의 차이에서, 재산의 차이에서, 문화 수준의 차이에서, 내적 발전의 차이에서, 신심의 차이에서… 온갖 것들이 서로를 갈라놓는 요인이 되곤 합니다. 선교사로 전혀 다른 문화와 전혀 다른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들을 더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더 우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우위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는 행동은 상대를 깎아 내리는 것이고 상대의 처지를 낮춰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동일한 자녀이고 같은 아버지를 모신 같은 형제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겹겹이 둘러쌓인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그 부분에서 실패를 하고 자신이 설정한 그 장벽 안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자기 스스로는 그 장벽이 자신을 지켜주는 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장벽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자는 가능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 내면에 설정된 자신의 부에 대한 집착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뜻 그들은 가난한 이에게 다가서는 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 내면에 단단히 박혀 있는 이 차별적인 생각은 절대로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 만남 안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결국 그들이 최종적으로, 즉 생을 마감하고 하느님 앞에 이르렀을 때에 최종적으로 느끼게 될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천시하던 이들이 하느님 품에 안겨 있고 자신들은 그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하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시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기뻐 뛰노는 아이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루카 1,44) 아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아이들은 동물들의 아픔에 공감을 합니다. 물론 요즘 같은 세태에는 아이들이 비정상적으로 동물들을 학대하는 지경이지만 그 아이들이 왜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도 또 한 이해할 만 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원래 맑은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맑을 뿐 선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야말로 맑고 순수한 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향기도 악취도 나지 않는 상태이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특히 영적으로 말이지요. 우리가 하는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말은 단순히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달팽이관을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듣고 나면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것, 영적인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설을 들으면 화를 내고 축복하는 말을 들으면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모님의 말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의 감사와 찬미가 들어 있게 마련이고 이를 받아들인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은 그 영적인 충만함에 기뻐 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바이올린 줄이 서로 같은 음색의 줄일 때에 공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모님의 인사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를 기뻐 뛰놀게 하였습니다. 당신의 태중의 하느님이 성모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엘리사벳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했고,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는 그것을 감지하고 기뻐 뛰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요? 구원의 소식을 들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과연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는

영원에 대한 처방전

거짓, 분노, 시기, 탐욕, 증오…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어떻게든 정당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선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자신을 한껏 끌어올려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자신들이 하는 모든 어둠의 활동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다보니 ‘위선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권력이나 명예를 얻게 되면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헌데 때로는 이 뒤따름에는 올바른 생각이 점차로 배제되기도 합니다. 맹목적인 추종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을 지니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보살피고 사랑하고 도와 주도록 이 땅에 보내진 것입니다. 모든 합당한 생각은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불완전함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하지만 맹목적인 추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귀를 열고 살아야 합니다. 형제에게서 들리는 올바른 충고에 귀를 열어야 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서 귀를 열지 못하게 되면 ‘독선’이 시작되고 결국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자신이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올바른 충고를 듣지 않고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없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생각 안으로 더욱 파고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완전히 혼자는 아닙니다. 때로는 동료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어떤 동료들을 주변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동료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고르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연합 세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분별하기

누군가 하는 말을 듣고 우리는 분별을 합니다. 헌데 그 분별을 ‘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분별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상대를 진실하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상대의 말이 아무리 진실해도 나의 이득과 관계가 없으면 내쳐버리는 사람들이고, 반대로 상대의 말이 거짓이라도 나의 이득과 관계가 되면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가령 아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느 날인가 식탁 자리에서 ‘정직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 가르침을 신중하게 듣고 자신의 삶을 고치기보다는 그 가르침을 내던져 버리고 아빠 엄마를 내면으로 비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어둠에 감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누군가 음탕하고 사악한 친구가 와서 아빠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필요한지를 도와주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 아이는 기뻐하며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거짓말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더 큰 죄악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얼마나 진정한 가르침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달리 말해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나의 삶의 방향성이 얼마나 올곧은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성’을 바탕으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말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가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성의 바탕은 선을 향한 방향, 즉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요함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고요함은 단순한 외적 침묵만이 아니라 내적인 침묵을 의미합니다. 흥분

위선자

위선자들은 선을 흉내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것을 광고한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그 의로움을 최대한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의인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이다. 그들은 기도하는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며, 자선을 베푸는 척을 할 수는 있지만 가난한 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거부감을 바탕으로 일을 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며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에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겁내는 것은 하느님의 의견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지만 이해관계에 의해서 연합하며 서로서로를 의심하면서도 함께 있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수근대는 어두운 정보들이 새어나가지 않기 위해서 서로를 감시한다. 그들에게 실질적인 고독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여 웃고 떠들고 만취하고 흥청대지만 그 찰나적인 기쁨은 오히려 쾌락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을 올바로 흠숭할 줄 알았더라면 그들의 삶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고 형식과 격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감각이 점점 사라져서 결국 자신의 욕구를 신으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욕구의 상징과도 같은 돈은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돈의 흐름에 민감하며 가난한 이의 고통이나 절망과 같은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전혀 휘둘리지 않다가 오직 돈의 흐름에 마음이 오가게 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하고 안락을 추구한다. 진정한 노동이라는 것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활동에 치중하기만 할 뿐이다. 자신이 보살피는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다만 사람들의 인기를

공소 선교 체험기

공소 선교 첫날 - 화요일 첫영성체 교리교사 회장 남편이 운전을 해서 오후 느지막히 공소에 도착을 했다. 아주 조용한 공간을 기대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공소 마당에 아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음악에 맞추어 춤연습을 하고 있었다. 목요일에 성탄 관련한 행사가 있는데 그 연습을 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숙소로 쓸 방에서는 엠빠나다(남미식 튀김 치즈 공갈빵)를 만들고 있었고 방안은 후끈거렸다. 방안에 짐을 두고는 책 한 권을 들고 밖으로 나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나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인사를 했고 세례에 관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성심껏 대답해주고 다시 책에 몰두하려는데 간식 거리를 만들었다며 아까 만든 엠빠나다를 먹으라고 나를 초대했다. 식탁에 앉아서 엠빠나다를 먹는데 세례 대상자 부모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른 남은 커피를 마시고 공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교리를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의 교리가 끝난 후에도 질문 공세는 이어졌다. 혼배에 관해서, 대부에 관해서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해 대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와서 내일 9시부터 와서 교리를 들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교리교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오라고 했다. 공소 교리교사 한 명이 와서 식사는 어쩔 거냐고 묻길래 그냥 아침은 간단히 먹고 점심은 주면 먹고 저녁은 거의 안먹는다고 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요구르트와 바나나 하나를 준비해주면 내일 아침 대신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다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도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 컴퓨터를 열고 글을 쓰는 중이다. 벌레가 은근히 많다. 모기 쫓는 약을 사 오긴 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다. 밤 사이에 아마 모기의 엄청난 공격을 받을 것 같다. 하나 다행인 것은 크게 덥지는 않다는 거다. 벌써부터 귓가에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일곱시 반인데 아마

행복한 나라

만일 ‘선의’로 가득한 세상이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 만물을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세상이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곳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굶주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마다 능력껏 만들어 낸 것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가장 필요한 사람이 쓰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서는 갈라져 싸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증오와 다툼과 시기라는 것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상대를 위해서 배려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오직 유일한 법이 그곳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법이겠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세상. 거기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 할 것입니다. 상상을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런 ‘유토피아’가 펼쳐질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우리는 일종의 ‘훈련’을 받는 시간을 거치는 것이지요. 온전한 자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사랑’을 훈련하는 훌륭한 학교를 선물받은 셈입니다. 헌데 과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까요?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스바 3,1-2) 사람들은 보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고, 하느님은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그곳을 공

떠남

사람들이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게 슬펐다. 의심하고, 추측하고, 험담하고, 중상하는 게 슬펐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눈을 들어 영원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영원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그것을 ‘우정’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진실한 우정 안에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진실한 우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우정의 가치를 알지 못했고, 저마다 ‘이해관계’를 구축해왔다.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고 필요가 없으면 내던지는 그런 관계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진실로 사랑하는 관계 오직 그 안에서만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된다.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우선적이고 극진한 사랑으로 연결된 세상, 그곳을 ‘천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국의 존재를 믿지 못했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갈라져 자기만의 세상의 구축해 버렸다.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세상의 고통은 잠시일 뿐이다. 심지어는 죽음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원을 감지하지 못했고 지상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 생이 다하고 나면 손에 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쥐던 손을 놓고 떠나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알리고 가르쳐 보았지만 그들은 감사하고 받아들이기는 커녕 자신들의 악을 더해갔고 그들의 투쟁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목마르다 하면서 물은 마시지 않고 배고프다 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으니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 만족할 것인가? 그러니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귀가 순한 백성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들을 찾아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사랑받지 못한 예수님

예수님은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예수님은 반대받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숨은 속내를 드러내셨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의 우중충하고 어두운 마음을 드러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한 단체 앞에서 단지 술을 함께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 배척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수근거릴 때에는 자신들과 함께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배척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였고 사랑이었습니다. 거짓과 증오는 예수님을 기피하게 마련입니다. 돈 욕심이 잔뜩 있는데도 아닌 척을 하려면 참 여러가지로 가림막을 잘 쳐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행위를 찬양해야 하고 스스로를 거룩한 의인으로 드러내어야 하지요. 이런 저런 좋은 활동을 최대치로 말하고 실제로 자신이 드러내고 있는 어두움은 감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는 것은 바로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셈이지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고의 선 가까이에 머무를 수 있는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세상의 헛된 것을 쫓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현재를 올바로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분간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요. 자신의 탐욕이 자신의 올바른 분별을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냉혹하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은 순진하고 나약한 이를 바라보면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지 절대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랬었다면 지금 세상 도처의 가난은 존재하지 않았을테지요. 탐욕스런 이들은 자신들의 돈벌이를 할 생각을 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이용해 먹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힘들고 다치

사제 직무 평가제

한때 보좌 신부로 있을 때에 교구 안의 회의에 참석하면 사제 직무 평가제를 하자는 건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제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제를 분별해 내어서 열심히 하는 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것을 더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제는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었지요. 헌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과연 한 사제의 직무를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건축을 잘 하는 사제가 과연 일을 잘 하는 사제일까요? 아니면 특수 기관에 배정을 받아서 수익을 짭짤하게 올리는 사제가 일을 잘 하는 사제일까요? 이런 저런 운동을 일으켜 예비자 수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사제가 일을 잘 하는 사제인 걸까요? 만일 그 사제가 홀로 방에 앉아서 영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미사에 열과 성을 다해서 전혀 다른 의미의 미사를 드리고 있다면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제인 걸까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사제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과연 누가 일을 잘 하는 사제이고 과연 누가 일을 못하는 사제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우리가 바라볼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바라보실 일입니다. 그 사제의 처음과 끝까지 모두 알고 있는 하느님께서 분별하실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본질적인 일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만일 지금 있는 사제가 거룩해지기를 원한다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제의 모난 모습이 보인다면 그를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제가 부족하고 오류가 많다면 그를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신앙 안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수많은 신자들의 기도는 당연히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자극하게 되고 그분이 나서서 보살피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는 가장 완전한 지혜를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물론 행정적인 차원에서 교구장님과 그분을 돕는 이들은 이런 저런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해야

회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1-32) 상처가 크게 나면 우리는 그 상처를 알아보고 조치를 강구합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걸 내버려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여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움직일 기력이 없을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누구라도 크게 다치면 일단 도움을 구하고 치유 받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으로부터 서서히 곪아 들어간다면, 그리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진단할 방법이 없고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러면 안으로부터 커지는 그 무언가는 결국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그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의 부름을 들을 때에 마음 아파하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적 상처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이들, 즉 영적으로 교만한 이들은 그런 회개에로의 초대와 가르침을 우습게 여기고 맙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빠지지 않는다고, 판공 거른 적 없다고,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성인 취급합니다. 미사 직전에 성급하게 고해성사에 들어와서도 지난 주일 미사 빠진 것이나 털어 놓을 줄 알지, 사실 진지하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본 적은 거의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고질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그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권한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교회가 저에게 준 권한은 가르치고(예언직), 거룩한 전례와 성사를 집전하고(사제직), 신자들을 사목하고, 본당을 관리하는(왕직/봉사직) 권한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칩니다. 기본적으로 본당 신자들을 가르치고 기회가 되면 인터넷으로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거룩한 전례와 성사를 집전하는 데에 성실합니다. 주일과 의무축일을 거르지 않고, 일상적인 전례도 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달라는 것을 주고 꾸려는 것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올바른 분별 속에서 실천합니다. 저에게 이 권한을 준 교회의 권한은 그 교회를 이루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의 주님은 단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의 보편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이가 저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고, 모든 교리적 가르침이 일치하며 하나의 공통된 수장(베드로의 수위권) 아래 모인 교회로서 저는 가톨릭 교회를 신뢰하고 그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지만 제자들 각자는 저마다 사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자단은 언제나 거룩한 방향을 모색해 왔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몸이 때로는 열이 나기도 하고, 지체마다 아프기도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서로를 보듬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그 시대적인 흐름 안에서 때로 아프기도 하고 병들기도 했지만 그 궁극적 방향은 변하지 않고 거룩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가톨릭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특성을 유지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합니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에서 당신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물론 이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유명한 예언자들 중의 한 명,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결국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의심을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1,27)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두가지가 상반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나의 실제로 사는 삶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묻는 이 앞에서 ‘모르겠다’고 해버리고 맙니다. 선을 추구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데, 나의 욕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적지 않은 경우에 선과 거룩함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언제나 마음 끌리는 곳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욕구를 선택하게 되지요. 달리 말하면 선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맞선 이들,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이들은 시작부터 좋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을 했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당신도 대답을 기피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도’를 지닌 이들에게는 진리를 던져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터넷 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상당수 됩니다. 언뜻 정의의 사도 같지만 그냥 성질난 사람들도 있고, 제 마음에 안드는 건 무엇이든 배척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신앙’이라던지 ‘영성’과 같은 것은 우스꽝스러운 대상에 불과하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자신의 이성적 사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그들만의 교만한 믿음을 굳게 지니고 있지요. 그러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삶 하나도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핑계와 시늉

결과물은 존재하지 않고 적어도 시도한 것 처럼 보여야 할 때에 핑계가 존재합니다. 죄는 지었는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도 핑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핑계라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을 통해서 다른 것으로 메꾸려는 시도이지요. 즉 자신은 착하지 않은데 착하게 보여야 하고, 성실하지 않은데 성실하게 보이려면 자연스레 핑계가 늘고 말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는 단순히 말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도 핑계가 드러납니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핑계는 ‘시늉’이라고 합니다. 일하지 않는데 일하는 척을 하려면 억지로 다른 일을 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혹은 다른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하기 싫고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일에 골몰하는 척을 하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핑계를 대고 시늉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의 마음은 충만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요. 하지만 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불안합니다. 제 몫의 일은 하지 않는데 득은 득대로 보려고 하니 그는 거짓말쟁이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남편은 집안의 가장의 몫을 하지 않고 그저 늘 피곤한 직장인으로만 살려고 하고, 아내는 아내의 몫을 하지 않고 젊은 날의 먹고 놀고 즐기는 아가씨로 돌아가려고 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몫을 하지 않고 한량이 되려고 하고,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몫을 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사랑 받기만 하려고 하니 집안이 이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제는 양들을 돌보지 않고 관리자와 CEO가 되려고 하고, 수도자는 봉헌생활에 헌신하지 않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본당의 사목자나 NGO활동가가 되려고 하고, 신자들은 목자를 존중하지 않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겠다고 양 우리를 떠나버리고 마니 교회 공동체가

수도자 이야기를 하려다 자기 주제를 반성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엉뚱한 글…

수도자 이야기를 하려다 자기 주제를 반성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엉뚱한 글… 간혹 신앙생활에 조금 다가서다 보면 ‘수도자’가 되겠다는 원의를 품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 온전히 봉헌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가장 기초적인 원의가 생겨나는 셈이지요. 헌데 이 소박한 원의는 머지않아 이런 저런 시련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수도원을 찾고 들어가는 것이 큰일입니다. 어떤 성소를 택해야 하고 어느 루트로 신청을 해야 하는지 등등이 현실적인 고민거리로 다가오지요. 물론 이 단계를 쉽게 건너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미 본당에 상주하고 있는 수녀님들에게 엄청난 주목과 사랑을 받으면서 교리교사생활이나 청년회 생활을 하다가 그냥 그 수녀회로 들어가는 경우이지요. 크게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수녀회가 전부인 줄 알고  그냥 하느님과 가까이 머무르고 싶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면 두 번째 현실이 다가오게 됩니다. 세속의 때를 벗는 과정이 시작이 되는데 이 과정이 영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푸념을 하게 되고, 또… 이 글을 쓰다가 이건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간단하게 하면, 수도생활이라는 게 ‘달빛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수도자는 특별한 자기 봉헌으로 신앙의 투사가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상의 밋밋함에 궁시렁거리고 투덜거리고 장상 욕이나 하라고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고 더욱 시련과 어려움에 다가서기 위해서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헌데 오늘날의 수도원은 오히려 더 많은 편의와 안락을 제공하면서 도리어 수도생활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제 할 일이나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교 사제로서 늘 기쁘고 활기차게 현지

지혜와 삶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9) 지혜는 ‘삶의 증거’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누구나 자신이 인내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내는 그가 힘든 상황을 겪을 때에 드러내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성가심에도 대뜸 화를 내면서 자신은 인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한 구역 모임에 참여해서 내가 입을 열려고만 하면 자신이 더 많은 말을 해대는 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만일 할아버지가 정말 그렇게 교리 지식이 해박하고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 말대로 치노(중국사람의 스페인어 표현, 동양사람을 다 그렇게 부름)이고 스페인어를 잘 하지도 못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볼리비아 사람이고 스페인어를 기본으로 쓰지요. 그리고 여전히 활력이 있고 말할 기력이 있어요. 헌데 저는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할아버지도 당신이 지니신 믿음을 드러내야 하겠지요. 저는 제 조국의 안락한 환경을 버리고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지금 할아버지가 저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지요. 헌데 할아버지는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하는데 왜 저는 미사 때에 할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할아버지, 신앙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은 삶으로 드러내는 거지요. 만일 할아버지에게 진정으로 믿음이 있다면 이미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제가 할 일을 계속 하겠으니 할아버지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할아버지는 심심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남에게 과시하려고 혈안이 된 사람에 불과했지요. 헌데 그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구역 모임에 나와서 온갖 썰을

너 사랑 하였느냐?

하느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실 것, 아니, 하느님이 이미 알고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너 사랑 하였느냐?” 라는 질문이다. 전지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가 배운 학식을 늘어놓는 것이나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가 세상에서 지녔던 것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분 앞에서 그러한 것은 티끌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신 유일한 한 가지는 오직 ‘사랑’ 뿐이다. 우리는 사랑의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온 것이다. “너 사랑 하였느냐? 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였느냐?” 우리는 이 질문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매일의 매순간에 이를 실천해야 한다. 사랑이면 모든 것을 하고 사랑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

포장된 배설물

우리는 똥, 배설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똥’은 누구나 꺼려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아주 예쁜 포장 상자를 하나 구해서 그 똥을 그 안에 담고 절대로 냄새가 새어나지 않게 잘 묶어 길가에다 내어 놓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사람들은 그 외면의 예쁜 포장을 바라보면서 그 똥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포장을 열기까지는 절대로 그 내용물의 진실을 알 수 없겠지요. 그러다가 포장을 열면 그 상자에 다가서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마가 우리에게 하는 짓입니다. ‘죽음’을 ‘쾌락’이라는 포장지에 감싸서 내어놓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다가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진탕 퍼마시고 마약에 손대고 여러가지 범죄적인 행위에 다가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쾌락’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운 포장지에 혹해서 다가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포장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든 것을 받아들이면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이 포장된 배설물들이 주로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똥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포장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다가서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끊임없이 구원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똥 묻은 우리의 옷을 빨아 주시기까지 합니다. 헌데 우리는 또 멍청하게 같은 오류를 반복할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육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나면 두 가지가 동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한 편으로는 더 죄 지을 육신이 사라지게 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속죄할 기회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상태에 접어들게 됩니다. 모쪼록 그 순간에 여전히 구원을 바라는 영혼의 상태를 지니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느님의 평화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7) 어제는 구역미사를 하면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말로 시작을 했지요. “여러분은 누구를 만났을 때에 편안함을 느낍니까? 그가 돈이 많으면 편안함을 느끼나요? 그렇지 않지요. 돈이 많고 적고, 학식이 많고 적고는 언제나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이를 품어 안을 줄 아는 사람인가? 그가 인내심이 있고 사랑이 있고 포용성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편안한 부자도 있고 불편한 부자도 있는 법입니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가가 그에게 다가서는 느낌을 규정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평화의 주님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제인 저에게 다가오는 것도 섣불리 하지 못합니다. 제가 가진 사제로서의 본당 주임신부로서의 권위가 도리어 여러분을 밀쳐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지극히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지요. 누구든지 다가와서 바라보고 미소짓고 쓰다듬게 할 수 있도록 지극히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을 가득히 품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우리의 주님은 진정한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필리피서는 이런 평화를 한층 더 격상시킵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라는 표현으로 말이지요. 하느님의 참된 평화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사랑이고 가장 겸손된 표현이며 가장 온유한 만남이지요. 누구든지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내면에는 참된 평화가 넘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 그 참된 안식의 상태는 우리를 지켜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느끼게 되면 그것을 더 찾고 얻으려고 하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맛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더욱 얻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속에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