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0월, 2015의 게시물 표시

행복선언

사실 복음에 나오는 행복선언은 여전히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누가 가난해지기를 바라고, 세상 누가 슬퍼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기를 자처하고, 나아가 모욕을 당하고 온갖 사악한 말을 듣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본성 안에는 그런 것을 향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급스런 취미 활동을 하고 더 힘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밥을 먹어도 레스토랑에서 고급진 음식을 먹고 걱정 고민이 하나도 없는 행복한 나날을 일상적으로 보내야 성이 차는 상황에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 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고 새 인간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옛 인간의 상태에 남게 되고 새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 인간은 죄에 얽매인 인간입니다. 죄에 얽매였다고 하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간단한 예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는 그 거짓말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서 진실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거짓말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이 마음 안에 족쇄를 채워서 보다 큰 선을 향한 발걸음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렇게 악의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되면 선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묶인 악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기쁨들은 바로 세상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아닌 세상의 자녀들은 세상의 기쁨을 열렬히 추구합니다. 그것 말고는 남은 기쁨이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천지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모르면 아는 만큼만 하던지 정해진 룰에 따라서만 하던지 할 뿐입니다. 하지만 알게 되면 아는 대로 원하는 방식으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됩니다. 공식만 알면 공식대로만 풀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리를 알면 원리를 이용해서 원하는 공식대로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창고에서 옛 것도 꺼내고 새 것도 꺼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몸담은 종교에 대해서 모르는 채로 자신이 아는 공식만 뇌까리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몇마디 들어보면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 초보들에게는 필요한 말들이기도 하지요. 신앙 초보는 그 공식조차 없으니 열심히 공식이라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움의 깊이를 더하려는 이에게는 원리를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영성생활이라는 것을 껍데기로만 아는 수도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성인의 공식과 저 성인의 공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본인 스스로 영성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영성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살고 있었지요. 그저 껍데기만 봉쇄 수도자였을 뿐입니다. 하늘나라는 공식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원리를 알고 가는 곳입니다. 원리가 무엇이냐구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랑의 공식’을 산출해 내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주일미사를 지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공식 속에 갇혀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를 물을 게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이 있었나 없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에는 사랑이 있을까요? 행여라도 사랑이 없다면 왜 이 글을 쓰는 걸까요? 세상을 보이지 않는 것 투성입니다.

낮은 자리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루카 14,8) 신학생 시절 이 복음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랫자리에 일부러 앉아서 윗자리로 올라간다면 그 역시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해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랫자리로 스스로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음의 신비를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을 ‘이성적으로만’ 생각해서 마치 스스로 성인이라도 된 상태처럼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가 성인이니 모든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다 가능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소박하게 제시하는 진리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좋으니 낮은 곳으로 내려가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성당 뒷자리를 좋아하는 이들은 성당 앞자리에 한 번 앉아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기도손을 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고리타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그렇게 해 보면 미사 중에 기도손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신자를 비롯한 비신자 사람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식사 전에 성호를 크게 긋는 것은 그들로부터 눈총을 받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의욕을 잃고 말지요. 하지만 바로 거기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낮은자리인 셈입니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자리, 그 누구도 쉽게 앉지 않으려고 하는 낮은자리인 셈이지요. 반면 신앙인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대표로 나서서 식사기도를 주관하는 것은 전혀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높은 자리이고 명예로운 자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실 낮은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슬픔과 아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9,1-2) 우리의 기쁨은 찰나적이고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코메디 프로를 보면서 실실 흘리는 미소, 발작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향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아픔과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우리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전히 고집스런 상태로 구원되기를 거부할 때, 또한 아주 영악한 모습으로 구원에서 멀어져 갈때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하기를 잊어 버렸으니까요. 그들은 사랑해야 마땅할 아내를 때리면서도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며, 자신의 악행으로 누군가 고통당하는 것에 동정을 느끼기는 커녕 즐기기까지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아픔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발작적인 쾌락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기쁨은 ‘쾌락’과 깊게 연관된 것입니다. 그들은 봉사하는 기쁨, 나누는 기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웃과 함께 머무르면서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영적인 사정을 나누는 푸근한 시간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오직 세상의 높은 지위, 부귀 영화, 권력과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자신을 드높여서 남들을 아래로 내리깔아 볼 수 있을 때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기쁨이라는 것은 참으로 지독한 것이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아픔과 슬픔을

비겁한 침묵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루카 14,4) 알고 있고 마땅히 대답해야 하는 것을 대답하지 않을 때에 그 침묵은 비겁해집니다. 이 침묵은 경건의 표시도 아니고 그저 자신에게 성가신 일이 다가오지 않게 하기 위한 이기적인 침묵입니다. 자신의 양심 안에 깃들어 있는 진리와 정의를 알면서도 그 양심을 거슬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더 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불의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두 가난한 이를 도와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일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두 병자를 도와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일에 자신이 개입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겁한 침묵을 일상 안에서 많이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굳이 가난한 이와 병자가 아니더라도 일상 안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 엄마로서 아빠로서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않고 소극적이 되고 이기적이 될 때에 같은 침묵을 지키는 셈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이기적인 침묵, 비겁한 침묵은 결국 그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만듭니다. 침묵을 통해서 사랑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포도

나는 동산의 포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나 꺾어 가시려나 저제나 꺾어 가시려나 하지만 매번 주인의 손길은 나를 지나쳤다. 그것도 여러번이나.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아직 나에게 열매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나의 열매들이 익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열매를 키워야 했다. 아직 더 많은 빛을 받고 비를 빨아들이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열매를 키워야 했다. 그리고 나의 열매가 온전히 자라는 그 날에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나의 주인께서 나를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가치로운 노력

한 사람이 신앙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환경은 최악이었지요. 주변에는 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들끓었고 또 심지어는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영혼 깊숙히 존재하는 부르심을 느꼈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분주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가톨릭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나태함 그 자체였고 비록 주일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니고 심지어는 교리교사 활동까지 했지만 그의 신앙은 미적지근함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첫 사람의 발전은 암흑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이었고, 두번째 사람은 거의 발전이 없다시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록 첫번째 사람은 교리교사는 꿈도 꾸지 못해보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에 이르기까지의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느님은 드높이 치하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두번째 사람은 모든 것이 훌륭히 마련되어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래의 두 화살표와 같은 것입니다. 암흑     빛 =================>                                       ==> 한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미빛에 살아가면서도 별다른 것을 하지 않은 셈이지요. 미적지근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고생해보지 않았기에 지금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합니다. 반면 열심히 고생한 이들은 그들이 지닌 신앙의 가치를 정말 소중히 여길 줄 알고 하느님 앞에 감사드릴 줄 압니다. 이것이 제가 이곳에서 체험하는 신앙 체험담입니다.

자랑스러움과 수치스러움

우리가 행하는 수많은 것들은 기억의 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아름다운 일은 아름다운 일대로 수치스러운 일은 수치스러운 일대로 그 자국을 남기게 되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일은 우리가 행복을 다시 상기하고 유지할 수 있는데에 일조를 하고, 반대로 수치스러운 기억은 우리가 다시 그 수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에 일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의 양심이 올바르게 활동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모르는 이들이 허다하고, 여전히 수치스러운 일을 자신의 자랑스러움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가난한 이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반대로 사치와 허영에 빠져서 고급 술을 마시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축제를 지내는 것을 자랑스러움으로 여기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특히나 아직 내면이 올바로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 시기에 이런 가치들의 형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모습은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인생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어주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이고 있습니다. 힘으로 눌러 이기기만 해서 드높은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는 개별 우상화 작업을 선전하느라 여념이 없지요. 그러는 동안 희생과 사랑, 겸손과 기도의 가치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수치가 되고,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제상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세상. 반면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고급 취미를 가지고 거기에 열정을 쏟는 모습을 자랑거리랍시고 드러내는 현실. 과연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그들을 안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비가시세계

과거 사람들은 이 세상과 영의 세상을 함께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영과 물질의 세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지는 아직 이곳 남미의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활동하는 가시 세계와 영들이 활동하는 비가시 세계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동차 사고가 난 곳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영을 기억하게 합니다. 물질 문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이 연계가 점점 멀어집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물질로만 관리할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요. 그리고는 미신을 믿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미신인 셈이지요. 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있는 미신을 믿습니다. 어떤 음식이 몸에 좋고 어떤 음식이 몸에 나쁘다는 식의 미신입니다. 그러면서 감사히 먹는 것의 소중함과 불만족스럽게 먹는 것의 유해함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지요. 오직 신앙을 진실되이 살아가는 이들만이 여전히 이 연계를 떠올립니다.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도 영혼이 존재하고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훗날 머무르게 될 영원의 나라에 대한 인식을 갈수록 확고히 해 나가지요. 사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영원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서 당신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는 행복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종교는 그저 좋은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목적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은 영과 육의 존재인데도 세상을 오직 육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 모순을 겪는 셈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영적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에서 온다고 착각하면서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고만 하니 결국은 행복도 점점 희석이 되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아니, 반대로 탐욕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느님의

인생들

젊은 시절에 술을 퍼마시고 아내를 구타하고 자녀를 방치하면 결국 노년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슬픔과 외로움 뿐인데 그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남자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성을 유혹하고 어둠의 행실을 따르다보면 결국 가정이 파괴되고 온갖 수모와 수치를 당할 것이 뻔한데 그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소홀히하면서 세상이 정한 성공의 방식에 따라서 열심히 가다보면 결국 마음이 공허해지고 그렇게 벌어들인 것들이 영혼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이 뻔한데도 그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고통을 겪은 이들이 가르치려고 해도 듣지 않고, 지혜로운 자들의 충고도 듣지 않으니 결국은 제 길을 다 걸어서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의 잔을 스스로 준비하고 스스로 마시게 됩니다. 차라리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지금부터 영원의 잔을 준비했더라면 그 결과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 장님이라 그런 과정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까 13,34) 사제로서는 한국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이곳 볼리비아에서 보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작 3년도 안되는 시간을 사제 생활을 한 반면, 이곳에서는 이제 8년째 사제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결실도 있지만 그 이면의 모습도 존재합니다. 제가 전하는 메세지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그 메세지 때문에 저를 증오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일찍부터 배워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차 예고 하셨으니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세지 때문에 그 메세지를 전하는 이들을 증오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지요.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진노의 잔을 앞에 둔 니네베가 그냥 멸망하기를 바랬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사람들은 뉘우치고 회개하기 시작했고 그 고을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공동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뿐이지요. 기회가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기회가 좋으면 좋은 대로 하느님에게 감사드릴 일이고 기회가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뜻을 품고 계시지요.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불행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를 모시고, 그 수많은 회개와 뉘우침의 기회를 저버리고 오히려 반대로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당시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예수님에게 했던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죄’를 체험합니다. 바로 서야 할 것이 엇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자유의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엉뚱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우리의 탐욕이 들어서고, 나눔과 사랑을 배워야 할 자리에 허영과 이기심이 자리잡게 되면 우리는 이미 뒤틀려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살아가지요. 전혀 괜찮은 것이 아닌데도 외적인 모양새가 멀쩡하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자라는 나무는 앞으로 많은 것들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준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잘 준비된 도성과도 같아서 어떤 공격이 밀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적 가치를 심어주는 법을 잊어버렸고(혹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아이들을 그저 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원하는 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지요. 가치를 존중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셈이고 세상은 그만큼 더 삭막해지는 것이지요. 지식은 뛰어나서 박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저마다 되고 싶은 전문직업인이 되어가지만 결정적으로 내면이 어긋나 있어서 아주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교육은 ‘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리책을 10번 반복해서 쓰게 한다고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교육은 모범으로 삶으로 여러번의 도전과 실패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교리교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갖추지 못한 채로 다른 이들 앞에 신앙의 교사로 나서는 이들입니다. 그렇다고 겸손함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교육 방법론과 신앙 지식을 바탕으로 아주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모아서 신앙수업을 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신앙이

수녀원 강론

오늘 수녀원 강론에서는 내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가르쳤습니다. 마침 제대 앞에 자신들의 창시자 복자 수녀님 사진이 있더군요. 나중에 물어보니 수녀님이 복자품을 받은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보시는 액자는 그림과 나무액자와 유리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자체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안에 상징하는 것이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그림 안에 담겨진 복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복자를 떠올리고 그분의 성덕과 카리스마(특징지워진 특별한 은총)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이 액자 자체는 필요에 의해서 소각할 수도 폐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다른 액자가 차지하게 되겠지요. 사실 창시자 수녀님의 모습을 담은 액자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교회 자체는 그러합니다. 교회의 외적 건물에 집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거룩함을 위해서 헌신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할머니들이 묵주를 들고 모여서 열심히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모습이 훨씬 교회적입니다. 성당을 아무리 드높이 짓고 웅장하게 짓는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적인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수녀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녀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수녀회의 존속과 유지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오는 학생들이 하느님에게 더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한 것이지 학교의 존속과 운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살려고, 안락하게 지내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하는 영원의 건축물을 지으려고, 그 재료가 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

자비의 해

오늘은 ‘자비’를 주제로 신학적, 교회법적, 사목적 배경으로 3명의 강연자가 발표를 했습니다. 자비의 신학적 바탕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나아가는 가를 잘 설명했습니다. 헌데 두번째 강의인 교회법적인 면에 들어서자 숨이 턱턱 막히는 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법이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엄밀함과 엄중함 속에서 따져야 할 조건들을 다 따져가면서 올바르게 심판을 하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두번째 발표 후에 의견이나 질문을 말하라고 할 때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법은 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벽은 필요하지요. 양들이 나가는 걸 막고, 이리들이 쳐들어오는 걸 막으니까요. 하지만 벽 밖에서 길을 잃은 양이 신음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듣고 벽 안에서 가만히 계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기꺼이 그 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잃은 양을 구해 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더욱 어두운 곳까지 나가셔서 그 양을 데리고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법을 가르치시는 신부님의 일을 존중합니다. 벽을 보수하고 수리하고 정돈하는 일은 필요하지요. 하지만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밖에서 길을 잃은 양이 신음하고 있다면 기꺼이 나가서 양을 메고 돌아올 수 있는 목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에 있던 강도에게 너 몇 살에 죄를 지었느냐고 물으시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하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도 용서해 돌려보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법을 가르치는 신부님은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범죄는 서로 다른 것이라며 죄는 용서해도 범죄 행위는 합당한 처벌이 필요한 거라고 하셨지요. 물론 신부님의 의중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자비의 해를 맞아서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자 하는 다른 신부님들에게는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괜히 한 번 나서본 것입니다.

일상 스케치

저라고 해서 모든 일에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들어줄 순’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찾아오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얻어가곤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대로 일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은총을 선물하시는 분이십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엄마에게 ‘평화를 회복하라’고 했습니다. 없는 걸 줄 수는 없으니까 먼저 평화로워지라고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도 삶이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삶을 그대로 즐기고 문제에 집중해야 할 때에만 문제에 집중하라고 했지요. 이런 저런 문제를 들어보면 사실 그 이야기하는 내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뿌리는 보다 깊은 곳에 존재합니다.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이고 부모의 문제는 또 그 윗대와 연결되어 있지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파고들면 저마다 그 깊이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의 정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조리 파고들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만 상담자의 지혜와 내담자의 수용 능력이 허용하는 선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바꿀 수는 없고 다만 지금 현재를 건드려 볼 수 있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결심을 바꿀 수 있을 뿐입니다. 이따가 저녁에는 또 반모임이 있습니다. 까먹고 있었네요. 요즘은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힘 닿는데까지 일하고 또 놀 때는 열심히 놀아야지요. 그래야 노는 재미도 있는 법이구요. ㅎㅎㅎ

영광과 고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얻으신 영광을 입으려면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이 기도서를 들고 성당 안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데에 뒤따르는 수난과 고통을 참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깔끔하게 옷을 입고 값비싼 차를 타고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으면서 정작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는 거짓 경건한 가톨릭 신자보다는 비록 묵주밖에 굴리지 못하지만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심있는 가난한 시골 늙은 엄마가 훨씬 더 예수님의 길을 잘 따르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광만을 추구하지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고통은 무조건 나쁘고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필요한 고통마저도 내던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자꾸 길을 어긋납니다. 자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밖에서 길을 찾으니 그 길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지니고 있던 미흡한 신앙마저도 잃고 마음 속에는 온통 탐욕과 거짓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영광에는 반드시 고난이 수반됩니다. 우리는 고난의 길을 통해서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망신과 기쁨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헌데 그것을 듣는 사람은 양편으로 나뉩니다. 한 측은 기뻐하고 다른 한 측은 부끄러워합니다. 말씀은 같은데 그것을 기준으로 양측의 사람이 나뉘는 셈이지요. 예컨대 제가 강론대에서 단골 메뉴로 하는 말인 ‘술을 과하게 먹지 마라’라고 하면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이 나뉩니다. 한 측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는 아내와 자녀들이고, 다른 한 측은 그 말을 듣고 수치스러워하는 남편들입니다. 진리가 다가올 때의 전형적인 두 반응인 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참되게 만날 때에 우리의 내면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참된 것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기뻐하고 우리의 거짓된 것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당황하고 거북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껍데기로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언제나 이 두 가지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더욱 몸담고 있는가에 따라서 반응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것의 비중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전반적인 반응이 이미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반기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는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종교생활에 몸담고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마음을 파고들려고 할 때면 모두 손을 놓고 도망가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직접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서 머무를 때에는 언제라도 환영이지만 조금이라도 다가올 기색이 보이면 당장에라도 신앙생활을 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위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취미처럼 하고 있는 이들이지요. 주일 미사는 꼬박꼬박 나가지

지혜

양파 주머니에 물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양파 주머니에는 물이 담기지 않는 법입니다. 양파 주머니에는 양파를 넣어야지요. 영혼은 세상의 것들을 담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영혼이 저절로 지혜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영혼은 영혼의 지혜를 담아야 성장하는 법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저절로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고 돈이 많고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어리석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을 ‘교만’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 그것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교만에 빠져 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영혼의 것들로 채워져가고 지혜로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아주 어린 때부터 시작을 하면 적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지혜는 곧 사랑이고 완전함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가장 하느님스런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지혜를 얻으려면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을 신중히 골라야 합니다. 참된 하늘의 지혜를 지닌 최고의 스승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야말로 하늘의 지혜를 담은 최고의 도구가 되고 우리 스스로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

일주일 중의 하루 18년 중의 하루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회당장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회당장은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자신의 명성에 신경을 썼으며 형식을 중시하고 있었던 반면, 예수님은 그 고통당하는 여인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에게는 일주일 중의 하루인 날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18년 중의 하루인 구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안식일’의 의미가 회당장에게는 ‘일하지 않는 날’로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본질적인 의미로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선물한 ‘안식’이 회당장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었지만 반대로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요. 과연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어떤 관점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당장 눈 앞의 현실만을 보면 굉장히 편협해질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지만 영원의 시선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신앙 행위들도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의 시선만으로 좁은 사고 안에서 바라보기보다 영원 안에서 그 진정한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미사를 영원 안에서 참례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부담감을 가지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까요? 이런 기초적인 것 외에도 수많은 부분에서 회당장이 지니고 있었던 편협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회당장에게는 고작 6일 중의 하루였지만, 여인과 예수님에게는 18년 중의 하루였습니다.

안과 밖

거룩함은 내적인 것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거룩하게 받아들이는 내면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화를 찍을 때 출연 배우가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그 다음날 예수님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형태는 내면과 상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것들이 바로 이 외적인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내적 경건과 거룩함을 찾아야 합니다. 진솔하고 경건한 사람, 하느님을 바라고 그분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쩐답니까 우리는 자주 속고 맙니다. 외적인 활동과 모양새에 속고 마는 것이지요. 어느 수도회 장상이라고 하면 무조건 거룩해 보이고, 반대로 하느님을 믿는 소박한 시골 촌로에게서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신부님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고 집에서 기도 좀 하라고 하는 본인의 어머니는 별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도 탓이 있는 셈입니다.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을 밖에서 찾아 헤메고 다녔으니까요. 그러니 밖의 것으로 사람을 홀리는 이들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된 것입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참된 거룩함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소경

소경이 부르짖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는 도리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일을 자주 합니다. 정말 필요한 만남을 성사시키기보다는 권위와 허례허식에 사로잡혀서 도리어 그것을 가로막고는 하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 당신에게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선물하려고 하시는 분이시지요. 헌데 우리는 중간에 끼어서 이런 저런 조건들 때문에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 때문에 일정한 만남을 유지하는 것 뿐일까요? 이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것에 무관심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관심없고 그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날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소경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경, 보지 못해서 생기는 불편함을 견디고 살아가는 소경에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소경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답, 즉 그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답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소경은 구원의 소식을 듣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은 ‘보아라’, ‘내가 볼 수 있게 해주마’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치로운 것들

모든 시간이 가치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으고 집중한 시간이 가치로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엉뚱한 데에 정신을 판 시간은 허비되는 시간입니다. 모든 가르침이 좋은 게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정말 엉뚱한 가르침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쓸데없는 정보로 넘쳐나고 저마다 자신이 스승이라고 자신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구미에 맞는 스승’을 고르려고 하지 ‘참 스승’을 고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 스승은 우리가 일어나서 걸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싶다고 하지만 정말 눈을 뜨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뜨는 데에는 상당한 책임감이 뒤따르고 그에 상응하는 수난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만 뜨면 다 좋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가치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진실한 가르침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그분의 수난의 가치를 바라보게 되고,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의 오류들에서 벗어나서 보다 참되고 소중한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건강에 대한 가르침, 여행지에 대한 가르침, 정치에 대한 가르침, 역사에 대한 가르침, 미모에 대한 가르침…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부분입니다. 또한 거룩한 분의 가르침을 끌어다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이용해 먹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대세는 교황님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정말 교황님의 가르침이 세상 안에 녹아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보다는 교황님의 인기에 편승하고 싶은 것일때가 많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먼저 화자의 근본 의도를 올바로 밝히고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합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당신에게 머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황님이 하시는 말씀을 모조리 들으려고 기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도 올바로 깨

환상

신앙의 여정은 ‘환상이 깨어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마냥 기쁘고 좋을 줄 알았던 신앙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참으로 상냥하고 친절해 보였던 동료가 나에게 칼을 꽂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믿었던 신부 수녀님의 나약한 모습, 심지어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신앙의 ‘환상’은 깨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이렇게 점점 환상이 깨어지면서 반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환상은 마땅히 깨어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상은 실제하지 않는 것을 우리 멋대로 상상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본질은 드러나야 합니다. 본질은 변함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찬란히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드높이 들리워야 하고 영광은 수난의 뒤로 겸손되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가로막는 수많은 가림막들은 치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똑똑히 보고 배울 수 있고 길을 걸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환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생한 현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는 것이 있다면 껍데기일 뿐입니다. 신앙이 무너졌다고 하는 사람은 그 껍데기가 무너졌다는 것이고 참된 신앙을 지닌 사람은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이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8,1-2) 로마서는 ‘은총과 믿음’의 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온통 말하는 내용이 바로 ‘믿음’을 통해서 양분되는 두 방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어느 종파에서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수용하는 문제는 무슨 자판기 커피 뽑아내는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단이며 그 결단을 통해서 삶은 명확하게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무언가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완전히 새로이 변화하게 됩니다. 믿음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인 이는 더는 죄를 지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은 죄에서 자유로운 행동이 됩니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죽음의 법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미 사람들은 콜라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찌는 듯한 더위에 반해 시원하게 목을 축이는 콜라가 그 탄산과 강한 단맛으로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콜라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무슨 행사만 있으면 반드시 콜라가 있지요. 이런 이들에게 ‘녹차’를 대접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들에게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될 것입니다. 어떤 차든지 설탕을 가득 타서 마시는 이들에게 한국의 녹차는 밍밍하니 아무런 맛도 없고 심지어는 떫떠름 하기까지 한 이상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녹차의 효능을 알고 또 반대로 콜라의 위험성을 알아서 어떻게든 싫지만 녹차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게 된다면 훗날에는 녹차의 다양한 면모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도도 배워서 녹차를 다기로 우려내고 그 향과 빛깔과 맛을 즐기게 되겠지요.

포도밭의 무화과나무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하느님은 무슨 열매를 바라고 계실까요? 어떤 것을 두고 당신의 열매라고 하실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사랑과 의로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영혼을 꽉 채우고 넘쳐 흐를 때에 우리는 잘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열매라는 것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선하게 되고 사랑과 의로움에 가득차게 되는 것은 적지않은 훈련 과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도들을 부르셨고 당신의 모범을 통해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일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일을 교회가 계속 물려받아서 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황님은 형제 사도단, 즉 주교단과 더불어 세상 모든 곳에 당신의 권한을 나눈 사제들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어 가꾸고 보살피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제들은 본당 공동체를 형성해서 열심히 사목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론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분열, 중상, 음모, 다툼과 같은 것들입니다. 한 공동체를 정말 하나의 머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하나의 심장, 성령 안에서 모아 이끌고 나아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

자녀의 신앙

(Q) 요즘 저는 저의 아이들이 냉담중인데 아직 견진도 하지 못했는데 왜? 엄마 종교를 강조 하냐고 묻습니다. 딸아인 기독교가 더 좋은데 왜? 천주교냐고 물으며 엄마 종교를 강요 하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아직 넌 모르지만 성당이 참 좋은 거라고 막연히 얘기합니다. 참 잘살지 못하는 제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어떻게 우리 애들을 이끌어야할지? 외인인 남편은 한 번 더 종교의 자유를 주라고 하니 참 걱정이 됩니다.  (허근우) 종교는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부한다고 거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올바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초월적인 것을 향한 방향성을 말합니다. 물론 이마저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교 껍데기를 지녔다고 신앙을 지닌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진지하게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이 근본적인 방향성을 검토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 진지성이 있어야 어떤 종류의 종교에 참여하든지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이 핵심을 잃고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 종교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신앙을 담아낸 것입니다. 그 안에 신앙이 올바로 담겨 있다면 그 그릇이 이 모양이든 저 모양이든 크게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이라는 그릇이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의 미사와 나머지 성사들은 참으로 소중한 보물들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그만큼 신앙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셈입니다. 그 외에도 일치된 전례와 교계제도, 세계 각국의 형제들이 하나된 모습은 우리가 지닌 종교의 자

수확

가르치는 이에게 가장 보람있는 일은 상대가 듣고 배울 때일 것입니다. 정작 가르치는 건 듣지 않고 선생에게 잘 보인다고 엉뚱한 선물을 들고 오는 것은 크게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가장 보람있는 일은 배우는 이들이 듣고 배운 것을 실천할 때일 것입니다. 이 본당에 머무르면서 정말 오랜 시간을 가르쳤습니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지요. 하지만 매번 느끼는 건 엉뚱한 곳에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 두 마리가 걸려 올라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물을 자주 던지는 동안 저에게 힘이 생겨났으니까요. 그물을 정비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그물을 던지는 기술도 더욱 정교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손해 본 건 없는 셈이지요. 게다가 하느님은 저에게 고깃떼가 있는 곳을 알려 주십니다. 투망 기술도 확보되었고 고깃떼가 있는 곳도 알았으니 이제는 가서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많은 시기를 투자한 곳에서는 정작 별다른 수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긴 예수님도 고향에서만큼은 당신의 본래적인 사명을 다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쉽지는 않았지만 더 핵심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더욱 핵심적인 것을 더욱 간단하고 쉬운 표현으로 가르칠 수 있었지요. 다른 군더더기가 없어진 셈입니다. 왜냐하면 수사학적인 표현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으니까요. 내가 아는 단어의 범위 안에서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그것은 이곳 민중들의 마음에 복음의 메세지가 더 쉽게 전달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준비된 고기, 이미 충분히 무르익은 고깃떼를 거두어 들이는 것 뿐입니다. 열매가 익었으니 수확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일꾼이 늘 부족합니다. 주님에게 청해서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성찬례와 나눔

내일 강의해야 할 주제입니다. 먼저는 성찬례에 집중을 해야 하겠지요. 바로 미사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식사자리’입니다. 하지만 뭔가 뜻깊은 식사자리인 셈이지요. 그러나 식사의 방식은 여느 그리스도인의 조금은 특별한 식사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모여들고 먹기 전에 손을 씻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도움이 되는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음식에 축복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몸에 양분을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나서 서로 다시 할 일을 찾아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서로 모여 안부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서로 모여 안부를 나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나눌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먼저 화목한 것도 중요합니다. 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같이 앉아서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식사, 즉 미사는 이미 한참 전부터 준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였으면 잘 씻어야 합니다. 손에 검댕을 묻히고 중요한 식사 자리에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식탁도 이쁘게 잘 정돈해야지 식탁 위에 소 내장을 얹어둔다거나 쓰레기 더미를 쌓아두고 식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미사를 모시기 전에는 먼저 우리의 내면을 잘 씻어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큰 죄가 있다면 미사 전에 고해성사는 필수이고 나아가 미사 중에 작은 소죄 마저도 참회 예절을 통해서 깨끗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밥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요. 우리는 식사를 모임의 수단으로 쓰기도 하고 친교의 수단으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서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모여오지만 결국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모임의 주최자, 이 식사를 마련한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죽어가는 것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데에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우리 안의 썩은 부분이 도려내어지게 되고 우리는 그만큼 정화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순교’라는 방법으로 한 순간에 자신의 삶을 내어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더는 ‘순교’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다른 종교의 나라에 가서 선동을 하고 죽음을 얻는다고 선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는 일상 안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위치를 내려놓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절제할 때, 나의 선한 의지가 거부당할 때에 우리는 조금씩 죽어가는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리를 하느님의 영이 채워나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지상에서부터 영원의 삶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게 쉽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람있고 가치있는 길이지요. 우리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안다면 그 아는 바대로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여전히 나의 목숨을 살리려고 노력하기에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조금씩 자신을 죽여나가는 사람은 어느 순간에 그 희생과 사랑에 길들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일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7) 옳고 그르다는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요?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것일까요? 1+1=2 위의 수식은 정확한가요? 그렇습니다. 위의 수식은 정확합니다. 올바르게 계산된 수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학적 진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지성 안에서 올바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고 그것이 올바로 묘사되었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일종의 내적 방향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이는 옳은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된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요.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된 일종의 방향성에 기초합니다.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분별은 이 양심에 기본적으로 기초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역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의 척도는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그 내면 안에 방향을 심어 주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은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합당한 일이 올바른 일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어긋나는 일은 아무리 우리 눈에 합당하게 보이더라도 어긋난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를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작업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을 모아서 분별한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분별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양심은 엇나가기도 합니다. 이미 범죄에 몸담은 사람은 작은 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은 성적 윤리나 기본적인 도덕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윤리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쳐도 실제는 다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

우리 개인의 영성사에 있어서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능력’입니다. 힘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 얼마만한 힘이 잠재되어 있는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멀리 뛰기를 해 보거나, 얼마만한 무게를 들어보거나 해서 그것을 증명하는 것 뿐이지요. 헌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의 체험에 있으니 ‘유혹에 얼마나 강한가’하는 체험입니다. 이는 유혹에 다가서지 않으면 굳이 체험할 이유가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적인 훈련만 해도 할 일이 산더미 같지요. 하지만 때로 어리석은 이들이 있어 자기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곤 합니다. 아직 어린아이 주제에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는 계속해서 어두움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 마음의 근본에는 자신에 대한 과신과 더불어 그 어둠에 다가서려는 욕구가 교묘하게 숨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영적 지도자는 그것을 간파하고 그에게 필요한 조언을 전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계속 고집을 피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지요. 그가 ‘직접 체험하게’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좌절하게 되지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예가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배반이지요. 예수님은 적절하게 조언을 했고 베드로는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체험하게 된 것이지요. 자신이 그렇게 내세우던 ‘충실함’이 사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가장 큰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때로 자기 혼자 잘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겠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체험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체험이 그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래야지요. 왜냐하면 때로 너무나 절망적인 체험은 한 사람을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아 세우니까요.

수용과 거부

어제는 세례 교육을 마치고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 있었습니다. 평일미사인데 주일미사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지요. 대부분은 주일미사도 나오지 않는 어른들이었습니다. 자녀에게 어떻게든 세례는 주고 싶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앉아 있는 신자들이었지요. 얼굴을 보면 다 드러납니다. 미사를 마쳐야 참석표에 도장을 찍어준다고 해서 앉아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덕분에 신앙교육을 실컷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교육을 받아 왔지요.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 분별 기준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어제도 한쪽 구석에 아이들 무리가 있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 얘들아, 거짓말 해도 되니? - 아니요~! - 그럼 남편이 약한 아내를 때려도 되니? - 아니요~! - 도둑질은 해도 되는걸까? - 아니요~!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지식을 지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언뜻 선하고 좋은 것을 선호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혀 정반대의 삶의 규칙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있지요. 성경의 표현으로는 ‘죄의 노예’라고 합니다. 이들은 ‘쾌락’에 묶여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그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지요. 그래서 술이고 마약이고 위험한 성관계고 아무 상관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쾌락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거룩한 것, 첫인상에 지루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사, 성사, 기도, 성경읽기, 신심 활동과 같은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게 되지요. 좀 더 미묘하게 구분을 더하자면 쾌락 때문에 거룩한 것을 외적으로 받아들이는 ‘위선자’들도 존재합니다. 즉, 거짓으로 선을 좋아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선과는 전

교회에 대한 단상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거룩함과는 별 상관없는 일도 있고 거룩함을 흉내내기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세운다고 모두가 십자가의 영성을 따르지는 않으며 성모님을 앞세운다고 그분의 영성을 모두가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 일이 필요해서 일을 시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이 하려는 일에 정당성을 얻으려고 거룩한 표상을 이용해먹는 이도 있습니다. 그 둘을 분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교회의 장상직분을 맡은 이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보루도 존재합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작용하는 성령이지요. 성령은 ‘완전성’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이라는 것은 ‘일의 성취’만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성취 과정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공부를 잘 하게 만드는 도전과제를 이룬다고 성령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공부에 맛들여가도록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것도 포함된다는 뜻이지요. 권위에 대항하려는 모든 저항들이 성령이 역사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 중에는 정말 이기적인 목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상이 늘 옳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명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오류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한 법입니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은 처참히 짓밟으면서 큰 대업을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이기적인 이상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불은 태울 것은 태우고 정련할 것은 정련합니다. 지푸라기나 나무조각이라면 타버리고 말고 은이나 금이라면 정련되는 것이지요.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은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고 그것이 물질인 이상은 하나의 지푸라기에 불과하지요. 결국 최후에 다가올 주님의 불을 거치고 나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 정련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내적 가치들이지요.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같은 복음 삼덕과 그 밖의 모든 가치들은 불을 통해서 정화되고 정련됩니다. 예수님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고 세상에 그 불을 전하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그 불에 자신의 심지를 갖다댈 수 있었지요. 그래서 타는 불이 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불을 전해주는 이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해공작이 만만찮았지요. 어둠의 영들은 합심해서 이 불을 끄려고 작정을 했었고 그렇게 첫 불이었던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 것은 원래 사라져야 할 것에 불과했고 또한 하느님은 한 술 더 떠서 그마저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과 더불어 부활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지금의 육신은 비록 한 줌의 흙으로 변하겠지만 훗날 우리는 새로운 육신을 받게 됩니다. 물론 그 육신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육신은 썩거나 무너지지 않는, 예수님의 불을 거쳐도 전혀 타지 않는 온전한 육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은 이미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불이 온전히 타오르기까지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요. 그리고 그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인 셈입니다.

양성

교회 내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양성’이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 양성은 말하고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믿음도 결국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은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말할 것인가? 말할 것이 있는 사람이 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여기에서 분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시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욕구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꾀어내지만 결국에는 엉뚱한 길로 이끌게 된다. 반면, 다른 누군가, 거룩한 분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그분에게로 이끌어가고 결국 그들을 살리게 된다.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청취자들도 이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골라 들은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바탕으로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실 ‘거룩함에로의 욕구’가 숨어있다. 그래서 화자는 청자를 대할 때에 먼저 그의 욕구가 어디에 기초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부분이 이 거룩한 욕구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양성의 무엇보다도 가장 첫 작업은 ‘가려져 있는 거룩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욕구가 회복되고 나면, 즉 그의 죽은 영이 깨어나고 나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물론 부드러운 음식부터 시작해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외적인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이제서야 영이 일으켜진 사람은 갓난 아기와도 같다. 양성에는 영적인 때(채워지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 편 물리적인 시간(흘러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어떤 음식이든지 먹자 마자 화장실로 가지는 않는다. 소화가 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꾸준함도 필요하다. 최초의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지

복음화와 선교

오늘 회의 중에 한 신부님이 복음화와 선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복음화를 하지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즉, 그 신부님의 말은 우리가 우리 안의 양 떼를 치고 교육하고 우리끼리 놀지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어떻게 복음화와 선교가 서로 갈라질 수 있는 두 단어인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복음화가 곧 선교이고 선교가 곧 복음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외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그 외침을 듣고 교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알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를 만날 때가 있지요.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교회에 다가오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고 더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즉 복음화 된 사람을 만나게 될 때입니다. 그가 지닌 빛과 소금의 짠 맛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물론 결정적인 초대는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그 초대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선교는 이루어진 셈이지요. 이는 마치 고해성사를 보는데 미리 충분한 회개와 결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고해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선교의 구체적인 행위, 즉 남을 초대하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 순간에만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30년 동안 뜸을 들이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와 은총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 5,20-21) 우리의 마음은 마치 흙으로 빚어지고 있는 뚜껑이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넓힐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극도로 좁게 만들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을 것을 골라서 뚜껑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지요. 이 내면의 상황은 어느 한 가지 조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참 다이나믹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서 그릇의 내면이 넓어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좁아지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의 성향, 추구하는 방향, 원의의 강도 등등이 모조리 작용해서 정말 복잡다단한 것을 이루어내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그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어떤 특정의 종교색을 띄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단순히 성경을 들고 다닌다고 신앙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교적을 만들었다고 그것으로 완전한 신자가 된다고 착각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영혼을 통해서 내가 받아들이는 것을 그대로 흡수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사람이 잠시 누군가가 맡겨놓은 담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흡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담배는 스스로 태울 줄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 온전한 흡연자가 되기 위해서는 담배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연기를 한 번 들이켰다고 그 즉시 흡연자가 되지도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내면을 서서히 키우게 됩니다. 신앙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내면이 커지지 않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와 겸손을 통해서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르도록 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가장

자비

어느 공동체에서 무슨 운동을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기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미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것을 굳이 운동을 만들어서 강조할 필요는 없지요. 최근 교황님께서 ‘자비’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말인즉슨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비’가 부족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교회 안에는 이런 저런 부족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완전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지요. 교회는 시작부터 약점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는 점도 늘 존재했지요. 첫번째 공의회가 소집된 이유 역시도 교회의 일종의 약점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새로 들어왔는데 유대 율법을 적용 시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약간의 중재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방향은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여러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문화를 살아가고 다른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신앙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이미 종결된 문제’라는 것은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매번 다시 스스로를 점검하고 좋은 것은 살리고 부족한 것은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교황님의 강조점으로 돌아와서 그동안 교회에는 자비가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냉정한 법규가 판을 쳤지요. 예수님은 충분히 자비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점은 다시 법을 규정하고 그것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법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법의 근본은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법의 테두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단단해지면서 사람을 점점 더 숨막히게 해 온 셈입니다. 교황님은 이 울타리를 부수고 다시 사랑이 숨쉬게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선까지 다시 숨을 쉬게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조여오는 울타리 때문에 숨막혀 하던 적지 않은 이들의 숨통이 다시 트이게 되리라 생각해봅니다.

탐욕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진리의 말씀이지만 이를 깨닫는 데에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탐욕을 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재산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필요할 때에 쓰려고 모아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필요한 때라는 것은 언제를 말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재산이 필요해지는 때는 내가 궁핍해지는 때입니다. 즉, 내가 늙고, 병들고, 사고를 당하고 하는 식이지요. 그러한 때에 내가 쌓아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생존’에 대한 욕구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다시 요약 정리하자면 우리는 지상에서의 삶을 위해서 어떻게든 모으고 쌓아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반대편에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지상에서 최대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받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탕으로 사는 삶에는 전혀 다른 맛이 존재합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점은 ‘손해 볼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손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자발적으로 잃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분명히 아는 까닭입니다. 예를 들어서 정말 가난한 가족이 있어서 자신의 사비를 탈탈 털어서 도와 주었다고 합시다. 그럼 이 사람은 세상의 자녀의 관점으로는 멍청하게 가진 걸 다 내어놓은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의 관점으로는 보다 큰 상급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진정한 의

유일한 증거

사람들은 증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뭐든 증거를 대어 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 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과학적이고 합당한 세상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하나의 증거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분 역시 2000년 전에 소위 ‘승천’하셨다고 하고 그 뒤로는 그분에 대해서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기는 사진기도 녹음기도 없어서 그분의 모습과 말씀을 직접 담아놓은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두 간접적인 것들 뿐이지요. 지금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과 ‘교회’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긴 거룩한 책과 예수님이 세우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어져내려오고 있는 교회가 마지막 증거가 될 뿐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사람들은 거부하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을 집성화하는 데에 교회의 열성분자들이 손을 대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도 그 순수성을 잃은 상태일 수 있다고 하고, 또 교회는 저마다의 약점으로 인해서 이리 저리 앓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합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이 있다지만 증명할 길이 없다 하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우리는 그저 각자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보루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성령을 받은 이들은 누구라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지니고 있는 이는 반드시 일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통해서 그의 내면에 들어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속이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 안에 성령이 가득한 것처럼 속이는 자들도 있고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이들도 있지요. 하느님의 양떼이면서도 속

소모되는 자비

우리는 마치 구원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잖아. 언제든지 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실거야.’라는 생각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엄청난 것이라서 그 어떤 죄를 지은 이라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진정으로 뉘우쳤는가 아닌가를 하느님이 생각 외로 보다 진지하게 검토하신다는 것이지요. 잘못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뉘우친 것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그 잘못했다는 표현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사 직전에 와서 지난 주에 미사를 빠졌다고 고해하는 이가 과연 정말 자신의 주일을 거른 행동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는 ‘어쩔 수 없었는 걸 뭐, 성사보면 끝이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에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언제라도 가장 우선적으로 미사를 포기할 사람인 셈이지요. 우리가 하는 적지 않은 고해성사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뉘우칠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든 그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가 엉뚱하게 소모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자비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전해지지 않고 엉뚱하게 뉘우칠 마음이 전혀 없는 이에게 자비가 소모되고 있지요. 물론 하느님의 본질적인 은총은 소모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때가 이르러 가장 필요한 이에게 반드시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를 소홀히 다룬 이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매번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무디어져 간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서히 메말라갈 것이며 세상에 사로잡혀 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신앙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훌륭한 가톨릭 신자라고 착각하고 지낼 것입니다. 환부가

믿음의 형성과정

이번 주일의 제2독서는 믿음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9-10) 이 첫번째 구절에서 ‘믿음의 결과는 구원’이라는 도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4-15) 이 두번째 구절에서 ‘믿음은 들음, 들음은 선포로, 선포는 파견으로 이루어진다.’는 도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마 10,17-18) 이 세번째 구절에서 ‘들음은 모두에게 이루어졌다.’는 도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은 모든 이에게 선포되도록 예정되었고 그것을 들은 이들은 파견을 받았으며 그 말씀을 듣지 못한 이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도록 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해 들은 이는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걸음 더 생각을 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는 모두 파견 받은 이들이고 말씀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일하지 않아 말씀을 전해 듣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받은 말씀은 다른 이에게 전해

거리

눈을 감고 마음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그는 여러분이 최근에 가장 마음을 쓰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의 거리입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천국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지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가장 늦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아니, 오히려 혐오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요. 그렇다면 그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인 셈입니다. 하느님을 떠올리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과 하느님의 거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너무나도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 떨어뜨려 놓은 셈이지요. 천국의 거리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지복직관이라는 것은 저마다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지닌 하느님과의 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애정도에 따라서 받는 사랑의 양은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슬프거나 불행하지 않습니다. 시기도 질투도 없고 저마다 자신이 지닌 사랑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즐길 뿐입니다. 훗날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상은 정말 신비로울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다만 영원과 애정의 거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영원의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되었고, 이미 그 애정의 거리는 지금부터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둔감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물리적인 거리가 중요하게 느껴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가까이에서 떠난다고 하면 슬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사랑한다면 절대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요. 제가 전에 머물던 본당의 철부지 교리교사들은 제가 본당을 떠난다고 했을 때에 심지어는 울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요. 그러니 그 물리적인 거리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마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남 탓 하지 않기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할 기회가 주어지지요. 그 길을 선택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시초부터 우리 각자의 운명을 정해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정해 두신 것은 큰 길입니다. ‘상선벌악’이라는 길이지요. 그 뿐입니다. 거기에 동참하느냐 마느냐, 즉 우리가 선을 행해서 상을 받느냐, 악을 저질러서 벌을 받느냐 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억눌렀다고 핑계댈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우리는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런 핑계거리가 늘어납니다. 죄짓는 것도 유전자 때문이라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그건 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각자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죽음의 문턱에 갔다온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영화처럼 펼쳐졌다는 고백을 하곤 합니다. 그 모든 순간을 통해서 스스로의 양심을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모든 어둠의 행위들은 절대로 외부에서 억지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부의 동의 하에 저질러지는 일들입니다. 때로 지식이 가득찬 이들은 이런 저런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 내어서 ‘그럼 이런 경우에는 어떠하냐? 저런 경우에는 어떠하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특수한 경우들을 다 제쳐두고 그 질문을 하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고 말이지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느라 바쁘기 때문입니다. 한시라도 더 사람들을 깨우쳐야 하고 사람들과 살아야 하고 그들과 어울려서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헌데 사랑이 없는 마음이 차가운 이들은 자신의 차가운 이성을 써서 이런 저런 올무를 엮어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드높은 지성의 탑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

성령을 모독하는 자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10) 사람의 아들도 결국은 외적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을 요리 조리 살펴보고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거슬러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배라서 풍랑을 만나 시달리고 힘겨운 일을 겪으면서 이만 저만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데 그 와중에 거대한 견인선이 다가와서 우리를 도와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장은 스스로 분별하기에 그 견인선이 아무래도 미심쩍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냥 견인선을 돌려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입니다. 반면, 선장은 나침반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장은 그 나침반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항로를 정해 버립니다. 자신에게 경험이 많노라고 우기면서 말이지요. 결국 배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에서부터 지침을 주는 성령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자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선과 악의 분별을 뒤섞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것을 무시하고 악한 것을 선호하는 것을 말하지요. 가야 할 방향으로 가지 않고 내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설정의 중심에는 나침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거슬러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부족하거나 받아들인 정보가 잘못된 것이면 그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고 그를 거부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지침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스스로 어둠을 향해서 가겠노라고 정하는 것과도 같지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증명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살아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믿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실제로 살아 생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해 낼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간혹 성체의 기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접하는 이가 ‘이건 거짓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끝인 거지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육적인 면이 지금에 와서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살아 있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살아있는 예수님을 볼 때에는 다름 아닌 그분의 ‘영’을 지닌 이를 만날때입니다. 그분의 영, 즉 살아있는 성령을 마주할 때이지요. 예수님의 영을 지닌 이를 여러분이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거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은 ‘지혜’를 지니고 있고 이 지혜는 사람들이 그 영을 지닌 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을 열심히 하면 그분의 영을 지닌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무턱대고 돈을 쥐어 준다고 예수님의 영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에게 돈을 주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과연 예수님의 영, ‘성령’을 지닌 이는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을까요? 허무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뚜렷한 징표는 없습니다. 보다 명확하게 말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같은 영을 지닌 사람들 뿐입니다. 미술 선생이 잘 만든 음악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감각에 의지하는 이가 영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이를 분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음악은 오직 음악을

체험

여러분 간단하게나마 분명히 말해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진보와 후퇴는 제 값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선함, 거룩함,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과 반대로 악함, 세속화, 미완성을 위해 뒷걸음치는 한 걸음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많은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체험도 체험 나름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체험하고 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복귀의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서 쓰레기같은 체험을 굳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중한 체험, 값진 체험을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영혼의 순수성을 간직한 이는 복됩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 물들지 않았음을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면서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진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영혼들을 꾀어 내어 엉뚱한 체험을 시키려는 이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뜨려져야 합당한 이들입니다.

증언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루카 12,8-9)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대뜸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지르면 그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고백은 단순히 ‘입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은 삶으로 그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아름다운 말로 예수님에 관해 멋들어진 강연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괴팍하게 굴고 자녀들을 멋대로 다룬다면 그는 전혀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정반대로 사람들 앞에 내세울 지식은 없지만 늘 상냥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그들의 필요를 보살피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다해서 한다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되지요.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고 빠질 때마다 미사 전에 꼭 성사를 보고, 판공을 빠지지 않고 성사표를 반드시 내고, 교무금을 절대로 늦지 않게 내고 한다고 우리의 의로움이 채워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러한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이전에 의로움, 선함, 사랑을 먼저 더 챙겨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증언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마음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십시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바탕으로 진정 예수님을 입술로도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지혜를 열어 주시기를.

고통

고통이 다가올 때 우리는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조물도 고통을 피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우리는 십자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통이라는 것은 단순히 의미없는 것,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다가오는 고통에는 모두 의미가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고통을 막연히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아내와 신앙이 없는 남편이 함께 살 때, 그리고 그 와중에 남편이 아내의 신앙을 핍박할 때에 우리는 ‘갈라서라’고 쉽게 조언해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남편의 몫까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결혼생활을 전혀 해 보지 못한 어느 사제의 생각없는 조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고통을 단순히 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통에는 그 안에 내재된 의미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고통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불필요한 고통이 존재합니다. 즉, 고통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이 존재하지요.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스스로 고통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욕심을 내는 사람도 그렇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 어둠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고통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고통들입니다. 내가 미리 끊어버릴 수 있었던 고통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그런 어두움들을 선택했고 결국 그런 고통들이 나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둠과 잘못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도 결국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은 진실이 다가올 때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지

비밀스런 대화

비밀스럽게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2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이 공개적으로 알아서는 안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로 일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비밀스런 만남과 대화를 주선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조심스레 찾아온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안에 든 공격성과 어둠을 눈치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지요. 사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주선할 때에 대뜸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전준비를 충분히 합니다. 즉, 미리 우리의 마음을 사 두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나서 때가 이르렀다 싶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값비싼 물건을 사주면서 마음을 사고, 칭찬을 잔뜩 해서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또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치장을 해서 다가오고 하는 동안 마음이 서서히 상대에게 빼앗기게 되고 그래서 그와의 비밀스런 만남과 대화를 즐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미 마음은 그에게 넘어가 있는 셈이 됩니다. 남은 것은 음모가 가득 든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목적을 얻는 것이지요. 마음을 사려는 뇌물을 주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건네는 것을 바탕으로 원하는 것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루카 16,14)

장례

장례가 있었습니다. 22살 먹은 청년이 사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늦게 온 친지들이 이제 점심을 시작하고 있어서 먹으라고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충혈된 눈으로 다가와서 묻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어요?”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아.” 청년은 자신이 생각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의아해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아. 저기 있는 건 그의 육신이야. 하지만 그의 영혼은 죽지 않아. 나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장례식에 오는 게 아니야.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라고 장례식에 오는거야. 조금 있다가 설명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릴 수 있도록 해.” 그리고 친지들이 식사를 끝내었습니다. 식을 시작했지요. “아까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죽음’이 뭐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했지요. 저는 죽은 이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여러분을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계속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 합당한 것을 받게 되지요. 우리의 영혼은 풍선과 같아서 거기에 뭘 집어 넣는가에 따라서 그 무게로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늘로 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 풍선을 쥐고 있는 손을 놓는 것일 뿐이지요. 지상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각각의 풍선은 저마다 채운 것을 바탕으로 땅으로 혹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시기, 증오, 분노, 탐욕, 더러운 욕구 등을 채운 풍선은 당연히 땅으로 꺼지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겸손, 인내, 희망, 사랑과 같은 것을 채운 풍선은 영원한 나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거기 모인 가족들이 듣고 또 들으라고 설명을 했지요. 하지만 사실 얼굴에 다 나타납니다. 누가 듣고 누가 듣지 않는지 말이지요. 몇몇 술에 쩔은 남자들은 조롱하는 눈빛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