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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아이돌을 향한 사랑

- 신부님, 한국 들어가면 아이돌 가수들 만나나요? 어제 본당 성가대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헌데 그 중에 한 여자애가 한국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정말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년을 마지막으로 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대뜸 저에게 묻는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 얘야, 잘 들어라. 가수들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젊은 친구들은 그 ‘이미지’를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삶은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서 존재하는 거야. 예를 하나 들어볼께. 지금 네가 사는 곳에 네 어머니가 있고 그리고 머나먼 한국땅에 아이돌 가수들이 있어.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이미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땅의 아름답고 이쁘고 멋지게 노래하는 가수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 그리고 반대로 집의 어머니가 작은 심부름을 시키면 싫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거부하고 또 소소하게 일상 안에서 부딪히는 일로 엄마를 미워하곤 하는 일이 일어나. 하지만 그거 아니? 그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은 볼리비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네가 누군지도 몰라. 그리고 네가 그 가수들을 만나볼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을 것 같아? 아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거야. 행여 그 사람들이 오지 탐험으로 이 곳에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분명히 다음과 같은 식일거야. 카메라를 하나 대동하고 나타나서는 이 곳의 가난한 현실을 두고 꾸며낸 장면을 연출하고 그 찍은 것을 들고가서 더 많은 인기를 얻어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겠지. - 하지만 그들 중에 좋은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을 거잖아요. -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그들이 그 일에 헌신하는 시초부터 그들은 사람들의 ‘인기’와 ‘평판’을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어.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노래에 열정을 쏟는 아이돌이 있을까?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들이 얻는 인기는 비단 네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거야. 그러는 동

정의의 주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예레 33,16) 주님이 우리의 정의가 되는 날, 그 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저마다의 정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주님이 정의가 아니라 다른 것을 자신의 정의의 척도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 다른 세력의 대표주자는 돈입니다. 돈이 정의의 척도가 되는 세상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입니다. 부자는 의인이고 가난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조언이면 좋은 것이고 돈을 잃게 만드는 조언이면 피해야 할 조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언제 우리 주님께서 ‘너희들이 세상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것을 누리게 해 주셨고 가능하면 이미 가진 것으로 기뻐하고 살 줄 알라고 가르치셨지 수많은 돈을 벌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 오히려 나자로가 부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가르치셨고, 가난한 과부의 비유에서 적지만 모든 것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두둔하셨으며, 당신부터도 태어나는 날 마땅한 자리가 없어 가축들의 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재산을 믿고 있으며 그 재산이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정의’를 이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진정한 정의는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스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일에 흥분하면서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라고 착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삶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져야 할 정의도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는 겁쟁이였다는 것을 훗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

사랑으로 돌보기

사물에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차는 적절한 때에 관리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빨리 망가지고 녹슬게 됩니다. 동물도 돌봄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밥만 집어 던진다고 사는 게 아니라 동물은 그 수준에서 지각하고 느끼는 것에 합당하게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함께 놀아 주기도 하고 쓰다듬어 주면서 애정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도 돌봄이 필요합니다. 자식이라고 낳아놓고 삼시 세끼 밥 주고 학교에 보낸다고 돌봄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녀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랑 가운데 최고봉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사랑을 주고받다가 실망하고 메마른 가슴을 안고 갈라서고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찾지 않으면 그때부터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사랑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사랑이 없이는 우리의 사랑은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상대의 장점을 사랑한 것이고, 결국은 나 자신을 사랑한 것일 뿐입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상대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모습을 상대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미 사랑은 식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난로의 뜨거운 열과도 같습니다. 그리로 다가서는 모든 것에 열을 전하고 따뜻하게 만들지요. 심지어는 바깥 추운 곳에서 머물다가 들어온 이의 차가운 손도 서서히 녹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이 엇나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이는 그들에게마저도 꾸준한 사랑을 전하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이 녹을 때까지 말이지요.

주님의 굶주림

예수님의 배고픔은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분의 배고픔은 당신의 육신을 제물로 내어바쳐 십자가 상에서 드높이고 나아가 그 몸을 산산조각 내어 매 미사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우리가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지만, 실제로는 그분이 우리를 집어 삼키는 셈이다. 성체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먹히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체를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모시는 이들, 자신의 삶의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서 겉치레 예식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이들이 있으니 예수님의 배고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주님은 배가 고프시다. 주님은 목이 마르시다. 누가 그분을 위로해 드릴 것인가?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목자

목자는 일한 값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을 하고 주인으로부터 그 일한 값을 받는 목자와, 값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하는 목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즉,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을 보살핍니다. 양들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목마름을 채워주며 더우면 서늘한 곳으로 추우면 따뜻한 곳으로 양들을 몰고 갑니다. 행여 잃어버리 양이 있으면 나머지 양들을 잠시 한 곳에 몰아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양들은 목자를 사랑하고 따르고 또 그렇게 일을 잘하는 목자를 둔 주인도 그 목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목자는 성실히 일한 값을 받습니다. 후자는 삯꾼입니다. 그는 수당에 목숨을 겁니다. 더 많은 수당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는 척 하다가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양의 털을 깎아 옷을 해 입고, 양의 젖을 짜서 마시고, 심지어는 양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늑대가 와서 잡아갔다고 둘러대곤 하겠지요. 이 둘의 일하는 방식은 이처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면의 모습도 완전히 다릅니다. 앞의 목동은 내면이 충만하고 사랑으로 가득하고, 뒤의 목동은 언제나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고 주인을 속이려는 마음과 주인에 대한 불평이 입에서 떠나는 날이 없습니다. 목자는 무턱대고 교계제도만을, 사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을 돌볼 의무를 맡은 가장도 목자이고, 학교의 학생들을 데리고 있는 선생님도 목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다른 이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이상은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도 목자가 될 수 있고, 예능인도 목자가 될 수 있으며, 기업인도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주인이 돌아오는 날, 우리는 그분 앞에 어떤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가 우리 입으로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증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양들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영혼의 구성요소

우리의 영혼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대표적인 그 세가지입니다. 지성은 학습에 연관되어 있고, 감성은 느낌에 연관되어 있고, 의지는 사랑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모른다면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할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운데 손가락을 내미는 것이 무슨 상징인지 모른다면 그걸 두고 화낼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미사 안에서 쓰이는 단어들과 상징들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미사는 반쪽짜리가 되고 말지요. 어린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데 아무리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것이 느껴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불필요한 것을 쓸데없이 배우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쓸모없는 지식과 정보가 너무나 많이 돌아다니고 그러한 것을 모조리 주워담고 있으니 우리의 영혼은 당연히 쓰레기통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느낍니다. 기분이 좋다가 나쁘다가 하고 슬프다가 기뻐 웃기도 합니다. 화를 내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지요. 이런 모든 감정들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가 제 역할을 해야 할 때에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감정은 굉장히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적절한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이 먼저 앞서고 그 뒤에 나머지 것들이 뒤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머리 회전이 빠른 시기는 바로 누군가와 다투고 싸울 때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우리를 가장 명석하게 상대를 비판할 요소를 찾게끔 지성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의지’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귤을 먹을 것인가 사과를 먹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아주 단순한 선택에서부터, 하느님이냐 세상이냐를 선택하는 인간존재의 핵심적인 선택에 직면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선택 앞에서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우리가 보는 사물은 사실 그 사물에 닿은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와 우리의 뇌가 그것이 거기 있는 사물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술’이라는 것은 교묘한 트릭으로 우리가 어떤 사물이 거기 있다고 믿게 하거나 거기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언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전적으로 ‘시각’에만 의지하면 우리는 속게 됩니다. 특히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눈으로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거의 속는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소리는 볼 수 없습니다. 냄새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맛이라는 것은 입 안에 넣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은 서로 영역이 달라서 제 나름의 감각에 가 닿지 않으면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느낄 수 있는 분입니다. 거룩한 것과 영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미사는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미사는 지겨운 예식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가치를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루고 그 사랑을 담뿍 받는 것이지요. 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는 기도의 완성인 셈이고, 기도하는 행위 자체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다른 목적을 지닐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보고, ‘믿음’을 바탕으로 듣고, ‘믿음’을 바탕으로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곤 합니다. 우리가 믿으면 없던 느낌도 생겨나고 우리가 믿으면 존재하는 느낌도 사라지곤 하지요. (아직 이 말은 이해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믿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대로 이루지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산을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닌 셈이지요. 그에게 그 옮겨진 산은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걷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방탕 -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필요한 것을 넘어서서 탐하고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 재물, 명예, 권력 따위를 자신의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추구하려고 마음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 만취 - 세상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쾌락에 흥건히 젖어있는 상태. 술, 쇼핑, 세속적인 만남과 수다 등등. 일상의 근심 - 생활 안에서 다가오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 입시, 취직, 부동산의 구매, 회사, 자녀교육, 정치, 가쉽거리 등등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상태.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우리가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우리의 내면의 숨겨진 욕구를 끌어내어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마음 한 가운데에 두지 않으면 마음이 ‘물러지기’ 시작합니다. 겁이 많아지고 그 겁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더욱 세상에 파고들기 시작하지요. 마치 큰 돌을 들어올릴 때에 벌레들이 빛을 보고는 빛을 향하여 나오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영적 건축

온갖 잡다한 돌들이 널부러진 척박한 땅에 멋진 건물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땅 위를 정돈하는 일입니다. 쓰지 않을 돌들을 치워내고 땅도 평탄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기본을 마련한 뒤에 비로소 세우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신앙을 선물하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먼저는 그의 내면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잡다한 것을 치워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릇된 생각들, 편협한 생각들과 이기적인 마음들, 무엇보다도 죄를 걷어 내어야 합니다. 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라나는 가시덤불 나무와도 같아서 그냥 방치해 두면 땅에 뿌리를 박고 아무것도 들어서지 못하게 가로막게 됩니다. 이러한 청소 작업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스스로 청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잔해들만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청소가 불가능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치우려는 마음이 있는가?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본인의 의지입니다. 설령 본인에게 청소를 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만일 치우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으면 자신을 치워줄 수 있는 분에게 문을 열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마저 없다면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자기는 안된다고, 자기는 그런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이미 늦었다고 제 풀에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에게 규정하는 그 말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일단 청소가 완료되고 나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바탕으로 건물을 세우게 됩니다. 저마다의 노력대로 또 지으려는 분의 의지대로 건물이 들어섭니다. 이 건물은 절대로 외적으로 그 화려함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건물이 견고하고 웅장

교양있는 위선자들

교양이 있는 것과 착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상식이 통한다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착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교양은 있지만 전혀 착한 마음은 없고 지극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화려함을 뽐냅니다. 하지만 그 외적인 화려함이 내적인 공허를 감추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지닌 교양 때문에 그것을 바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일쑤입니다. 한바퀴 둘러 말하는 것이지요. - 아, 요번에 차를 한 대 새로 사긴 했는데 할부금 값는 게 만만치 않네. (나 차 새로 샀어 인간들아. 어서 나의 새로운 차를 보면서 경배하렴!) - 시내에 건물을 하나 구하긴 했는데 요즘 세금 문제가 참 쉽지 않더구만. (나 시내에 건물을 가지고 있어 이 천한 것들아. 어서 나의 부유함에 감탄하렴.) -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가긴 했는데 잘 하고 있는지 영 걱정이네요. (내 아들은 미국까지 유학 갔단다 이 미천한 인간들아. 그러니 나의 노력과 성공을 칭송하렴.) 그러나 그들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준 적도 없고, 그들의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의 영광을 들어높이려 애를 쓰지만 그 모든 것은 그들의 외적으로 덧붙여진 화장품 찌꺼기 같은 것들에 불과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탐욕과 이기심, 개인주의, 허영과 교만에 가득한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은 사실 거의 모두가 그런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세력과 교묘한 악의 때문에 차마 말을 못할 뿐이지요. 함부로 대들고 나섰다가는 무슨 풍문을 퍼뜨려 그 맞선 이를 공격하려고 들지 모르니까요. 부자들 중에는 교양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스타X스에 가서 베인띠에 휘핑크림을 추가해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고 로제 와인에 취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

사랑의 순환

대림 첫 주일을 통해서 교회력의 한 해의 첫 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연중의 마지막과 대림의 첫 시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달력은 한 해를 마친다고 졸업을 하거나 행사가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그 간격을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참된 시간은 채워짐의 시간이며 우리는 모두 그 채워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환의 모양도 둥근 모양입니다. 결혼 반지의 둥근 모양도 영원성을 상징하지요. 끊임없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히 이어진다는 의미이지요. 시간이라는 것도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오고 나면 영원히 끝장이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세상을 얼마든지 계획하시고 새로이 시작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영원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영원성은 일상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마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초등학교도 마쳐야 하고, 중학교도 마쳐야 하고, 고등학교도 마쳐야 하고, 대학도, 직장도, 삶도 마쳐야 한다고 배우고 살아가지요. 그러나 실은 그 모든 활동 안에서 ‘영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영원을 찾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사랑’을 찾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거든요.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행복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합니다. 헌데 세상은 사랑 받고자만 하기에 행복해 질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사랑을 내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저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려고 하니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가고 사랑이 순환이 되지 않고 고인 물이 되어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족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나라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몸 안에 피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한 요소가 곳곳에 미치고 아

깨어 기도하기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깨어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뒤의 모든 신앙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깨어나야 하고, 그리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무방비상태입니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누가 와서 칼로 찌르기 직전까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로소 칼이 살을 비집고 들어와서 강력한 고통을 줄 때에야 잠에서 번쩍 깨어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셈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깨어남은 육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 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동안에는 주변 상황을 관찰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지요. 그러나 영신은 다른 문제입니다. 육신이 환히 깨어 있어도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영혼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온갖 유혹과 위협이 다가와도 전혀 깨닫지를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유혹의 달콤함을 자기 스스로 덥석 물게 됩니다. 그것이 어둠의 영의 미끼인 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셈이지요. 쉽게 돈을 번다는 말에 혹하고, 상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얼굴만 반들반들하면 그의 내면에 대한 성찰 없이 관계를 시작하고, 또 부유하고 권력있는 이들의 내적 공허에 대한 고려 없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영적 장님인 셈이지요. 기도에 대해서는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니 기도를 할 리가 없지요. 기도라는 것은 영혼에 밥을 먹이는 것이고 영혼을 튼튼하게 준비시켜 주는 것입니다. 헌데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 밥을 먹지는 않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영혼도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사도 가고 묵주기도도 바칩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을 ‘의무감’에 하

2006년도 범어성당에서 한 고해성사 특강 내용

9일기도 네째날 특강 주제 : 고해성사 강사 : 마진우 요셉 신부님 성사보기를 마다하는 어른들 - 엉덩이가 곪은 어린아이의 비유 사람들은 왜 고해성사 보기를 꺼려할까요? 다음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꼬마아이가 엉덩이에 상처가 났습니다.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내다가 그만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아픈데 겉으로 보기엔 조그만 뾰루지로 보일 뿐입니다. 아이는 나가서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다니다가 엄마를 만나자 투정을 부립니다. ‘엄마~ 궁디 아파 죽겠다.’ ‘와? 함 보자.’ 아이는 엉덩이를 조심조심 까서 엄마에게 상처를 보여줍니다. ‘별거 없는데, 이 뾰루지 때문에 아픈기가?’ 엄마는 무심히 상처를 만져보려고 손을 뻗습니다. 순간 아이가 기겁을 합니다. ‘안된다 안된다!!!! (방방 뛰면서)아프다아~’ ‘야가 와이카노? 함 만지봐야 알 꺼 아이가!!! 일로 온나!!!’ ‘안된다!!! 아프다!!!!’ 엄마는 대충 상태가 어떤지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니 그거 그대로 놔두마 우예 되는지 아나? 궁디가 산만하이 붓는기라. 그라고도 계속 놔두마 니 지금보다 더 아프데이...' 아프다며 만지지 말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은 눈치입니다. 아이는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가 상처를 내보입니다. ‘엄마 살살해래이~ 진짜 아프데이~’ ‘알았다.’ 엄마는 겨우 아이를 구슬러 상처를 살살 만져본 뒤 안에 고름이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순식간에 상처 양쪽을 눌러서 고름을 짜내 버립니다. ‘아얏!’ ‘끝났다 끝났어 인자 괜찮다.’ 아리한 아픔은 남아있지만 전처럼 심한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아이는 금새 환히 웃으며 밖으로 놀러 나갑니다. 고해성사는 치유의 성사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

직분이 그를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그의 직분을 규정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사제라고 해서 그가 사제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제의 일을 할 때에 비로소 사제가 됩니다. 직분의 수여는 외적 표지일 뿐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직분에 포함된 일을 성실히 수행해 내는 것입니다. 의사가 치유하지 않고 돈만 밝히면 그는 의사가 아니라 고리대금업자가 됩니다. 하지만 의사 자격증이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의 아픔을 보살피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면 그는 훌륭한 의사인 셈이지요. 비록 교사 자격증이 없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아직 못배운 이들에게 전해 주려고 노력하면 그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온갖 타이틀을 다 지니고도 자신의 교만이 타인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해주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돌덩이에 불과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장사꾼도 성당을 다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게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성당에 나가고 세례도 받고 교무금도 낼 것입니다. 그렇게 사제의 신임을 얻고 사제가 자신의 가게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리겠지요.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장사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없어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외적인 표지를 입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비록 우리의 선조들 가운데에는 교리 책자도 접하지 못하고 선교사 사제도 만나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에 따라 하늘의 뜻을 두려워할 줄 알고 이웃에게 함부로 해코지를 하지 않고 가능하면 열심히 도우고자 노력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대로 살아가야 하느님의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루카 21,32) 한 세대는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기간을 말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몇십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자의식을 온전히 갖기 시작하고부터 모든 일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한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마음을 들어높이고 하느님을 향해 돌아가려는 갈망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에 집착하는 그만큼 죽음의 위협은 우리를 더욱 찾아들게 되고,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는 만큼 우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더욱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자라나는 이 방향성을 우리는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깨닫는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하는 설명이 무슨 뜻인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의 투명한 유리잔이 하나씩 주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저마다의 선택으로 이루어감에 따라서 그 잔은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채워짐의 물리적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더 빨리 채울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더디게 채울 수도 있습니다. 헌데 그 잔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와는 정반대로 이웃을 향한 증오를 키워 나가고,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키워 나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 안에 주어진 잔을 아주 향기로운 순수한 향액으로 채우던지, 아니면 반대로 지극히 더러운 쓰레기물로 채우던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잔은 그 인간의 선택의 강도에 따라서, 그 나날의 행업에 따라서

예언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다니 7,11-14) 다니엘 예언서의 이 예언은 이미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모두 아우릅니다. 그래서 읽는 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짐승과 뿔들은 어둠의 세력과 그 세력에 힘을 입은 세상의 어둠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세대를 거쳐가며 그들은 마치 이 세상의 지배자인 듯이 처신해 왔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못살게 굴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심과 이성이 없는 ‘짐승’으로, 그리고 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날카롭게 솟아나와 있는 ‘뿔’의 상징으로 대변됩니다. 하지만 그 짐승은 마침내 살해되고 몸이 부서져서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악은 결국 그 악을 응원하고 있던 이들이 죽음으로 그 실체가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을 상징하는 타는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 불은 단순한 실체적 불이 아니라 영적인 불, 즉 자신의 내면 안에서 타오르는 사악한 갈망을 의미하고 거기에 던져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준엄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만 달리 보면 스스로의 죄악으로 고통받는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 나머지 짐승들, 즉 가장 거대한 그 짐승에게 빌붙어 살아가던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기나 그 생명, 즉, 영혼은 존속

쾌략의 문화

사람이 굶주리면 모든 것이 맛있고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배가 부르면 ‘입맛을 자극하는 것’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쾌락에 서서히 중독되어가기 시작하고 더한 쾌락거리를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한국의 지금의 식도락 문화를 마냥 즐기면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쾌락을 탐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있는데 언제나 맑은 날 만이 이루어지기를 탐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력이 강하더라도 그의 삶의 일부에는 언제나 그림자도 깃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 어둠의 시기를 현명하게 수용할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삶의 기쁨을 더욱 기쁘게 즐길 수 있는 법인데 언제나 쾌락으로 삶을 채우니 삶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더욱 자극적인 쾌락을 찾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죄악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제가 한국에 휴가를 가서 잠시 머무는 동안 텔레비전만 틀면 맛깔스런 음식과 그것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도 한 듯이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에 서서히 길들여져 가는 셈이지요. 삶 안에서 다른 쾌락거리가 없으니 그것으로라도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껏 자극된 중추신경은 이제 일상의 밥상을 바라보면서 감사는 커녕 투덜거림을 쏟아놓게 만듭니다. 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모습입니다. 장밋빛깔만 찾아다니는 삶은 참으로 초라한 삶입니다. 때로는 화장실 청소도 하고, 구린 냄새도 맡고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내고 하면서 나중에 샤워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개운함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쾌락의 문화에 젖어들지 않게 되도록 스스로 보호하십시오. 사실 SNS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미 이 문화에 젖어들어 있습니다. 눈을 뜨고 바라보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기를 그치고 언제나 늘 새롭고 참신하고 맛깔스럽고 신기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예수님의 메세지는 강력하고 단호합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행해져야 할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그에 상관있는 사람들은 별달리 경각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지요. 아니, 사실 아예 시작부터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들은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세지는 시원한 냉수와도 같습니다. 정말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 즉 세상의 부당함과 불의함, 거짓과 속임수에 고통 당해 온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예수님의 마지막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오히려 희망의 메세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메세지는 처음부터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상선벌악’ 그것이 전부입니다. 헌데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 선의 결과를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마치 악한 이들이 더 떵떵거리며 살고 모든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고 의로운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로써 신앙인들이 할 일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을 심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엇나간 길을 걷는 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경고를 하고, 반대로 하느님의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어두움에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바로 이 ‘위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을 바탕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속량은 가까이, 하지만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늘 희망과 인내와 끈기를 지니고 그 속량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선이 가득한 마음

그저 좋은 마음과 선이 가득한 마음은 전혀 다른 두 성질의 것입니다. 아이들은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그릇과도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을 말하자면 ‘악에 기울어질 경향’을 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보통이지요. 사람들은 무엇이 악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을 수 있겠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은 뚜렷한 법적 규정을 어기는 것에서만 비롯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참된 선이신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이 주어져 있지 않을 때에, 마음은 이미 하느님 아닌 것들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4살쯤 되는 한 꼬맹이가 엄마 휴대폰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헌데 엄마가 다시 그 휴대폰을 되찾으려고 하자 아이가 고함을 지르기 시작을 합니다. 엄마를 향한 애정이나 엄마의 소중함은 온데간데 없고 휴대폰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장에 두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그 휴대폰을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있기 위해서 엄마를 상대로 맞서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바로 탐욕의 시작이고 소중한 가치를 저버리는 죄의 시작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악한 의도가 없는 마음이지요. 그리고 이 마음을 통상적으로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느 엄마든지 자기 자식은 착하다고 할 때에 바로 그 통상적인 ‘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선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고 그 찬란한 가치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차를 처음 구입하면 ‘길을 들인다’고 합니다. 어느정도 속도를 내서 저마다의 부품들이 들어맞아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부분이 적절히 마모되어 서로 돌아아게 한다는 것인데, 우리 영혼에도 그러한 길들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난 것은 깎아내고 좋은 것은 더욱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훈련하는 사람은 길든 차처

속이는 자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8) 우리가 본질을 버려두고 차선책을 찾는 이유는 본질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보다 쉬운 방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두고 그래도 이런 저런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 거짓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지니고 다닐 용기가 없고 따라서 진리와 정면으로 상대하게 되는 일을 교묘히 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즉 예수님을 사랑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구미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자를 찾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자를 찾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사람들은 좀 더 현세를 즐기고 싶고 돈을 벌고 싶고 잘 나가고 싶고 쾌락을 즐기고 싶은데 예수님의 메세지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그 메세지의 본질을 느끼게 되고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의 회개를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부담을 느끼게 되고 보다 쉽고 편안한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 믿으세요. 현세적인 축복을 가득히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은 성공하고 여러분은 넘쳐나는 돈으로 부유함을 누릴 것입니다. 가정에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걱정하던 일은 술술 풀리게 됩니다. 다단계 정기 모임에서나 들을 만한 이런 말들을 교회 안에서 찾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다가서고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 주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

가진 자들의 탐욕

가진 자들이 더욱 탐욕스럽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가진 자들은 자신의 수준에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하느님이 손을 들어 그의 교만을 한 번 치시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난리를 피운다. 따뜻한 물을 늘 쓰다가 찬 물만 있는 곳에 가면 가진 자들은 난리가 난다. 하지만 늘 찬 물을 쓰다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 가는 이들은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안다. 고급 승용차를 몰다가 차가 고장이 나면 가진 자들은 온통 불평을 한다. 하지만 늘 걸어 다니거나 기껏해야 버스를 타고 다니던 이가 자기 오토바이라도 하나 구하면 그들은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르게 만드신 이유는 서로 도우라는 당신의 계획이 들어있었다. 지식이 많은 이는 지식이 부족한 이를 돕고, 더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를 돕고, 영성이 뛰어난 이는 영성이 부족한 이를 돕고, 기도할 줄 아는 이는 기도할 줄 모르는 이를 도우라는 당신의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제가 지닌 것으로 교만할 줄만 알았지 서로 돕고 살 줄을 몰랐다. 하느님이 주신 가장 단순한 두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전혀 그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쌓고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든다. 왜냐하면 ‘가졌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격리, 이것이 가진 자들의 표시이다. 자신의 그룹이 아닌 타인의 그룹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들 스스라는 것을 가진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한 번 생각을 해 보라, 없는 자들이 궁핍에 찌들려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반면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진행하는 어둠의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나 세상은 가진 자들이 움직이는 것이고 신문 기사에는 범죄의 기사는 나오지만 가난한 이를 향한 일상적인 경멸이나 은근히 이루어지는 차별의 행위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법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은 잘못 쓰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거스르는 말이 된다. 만일 누군가가 태어나면서부터 위생적으로 안전이 보장된 나라에서 태어나고 보장된 학교 교육을 받으며 비록 재벌은 아니더라도 대학교 졸업장을 딸 정도의 집안에서 자라나고 차를 굴리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면 그는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은 진정으로 당장의 내일의 끼니를 하느님에게 의탁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아무런 수입도 없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가난하고 늙은 노인들, 일찍 남편을 여위고 자식들도 없는 가난한 과부들,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들이나 할 수 있을 만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도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의 소중함을 알고, 어쩌다가 얻게 된 사탕 하나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인 셈이다. 하느님은 나를 볼리비아에 보내셨다. 감사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감사를 배우고 겸손히 살라고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훗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많은 열매를 거두라고 그리 하신 것이라 믿고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서 무엇을 찾는가…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서 과연 거룩함을 찾는 것인가? 사제는 그 둘러싸인 이들의 바람과도 적지 않은 상관이 있다. 주변에 헛바람이 잔뜩 든 사람만이 있으면 사제의 관심사도 자연 그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하느님이 자신의 생활과 상관 없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무슨 소용일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만 사랑할 줄 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할 줄 모르는 이들, 그들이 과연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좀 더 사실을 말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자

어느 축복식

“제가 미사에 나오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주일 미사를 마칠 때 즈음 한 무리의 ‘폭주족’이 성당에 난입합니다. 오토바이 택시 회사가 자신의 회사 설립 경축일을 기념해서 축복을 받겠노라고 오토바이들을 다 끌고 성당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미사가 다 끝날 무렵에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퇴장하는데 담당자로 보이는 한 자매가 와서 축복을 부탁하길래 제가 한 말이 위의 내용이었습니다. “미사가 가장 큰 축복이에요. 제가 그때 분명히 말씀 드렸잖아요. 미사에 나와서 축복을 받으라고 말이지요. 헌데 이제 다 끝나고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좋습니다. 일단 기사들을 다 성전 안으로 들여 보내세요. 좀 꾸중을 해야겠네요.” 영대를 벗고 제의를 벗고 다시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을 쓱 둘러보고는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축복을 받으러 오셨나요? 헌데 미사가 다 지나갔는데 어쩌지요? 이는 마치 여러분들이 어느 축제에 뒤늦게 가서 먼저 사람들이 모든 맛있는 걸 다 먹고 남은 음식을 먹겠다고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메인 메뉴는 다 나가고 없고 남은 건 음식 쓰레기들 뿐인 셈이지요. 만일 이것이 축제였다면 여러분은 아마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겁니다. 축복은 축복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기보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비처럼 모든 이에게 내립니다. 헌데 우리가 구멍난 그릇을 가지고 있다면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구멍이 나 있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축복을 부어도 남아있지 못하게 됩니다. 죄는 바로 우리 마음에 구멍을 내는 것이지요.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인사불성이 되고,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을 탐내고 하는 모든 활동은 우리의 마음에 구멍을 내고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받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 일이 보다 중요합니다. “ 그렇게 한참을 설명을 하고 밖으로 나가서 각자의 오토바이 옆에 기다리라고 한 뒤에 일일이 물을 뿌리며 축복을 해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여러분은 볼리비아 사람이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후안시또 삔또’(초등학생부터 받는 학습 장려금 한화 3만원 남짓)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웃는다.) 왜냐면 저는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나라의 법에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 나라에 머물기 때문에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의 대통령)가 정하는 법에 따라서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야 하겠지만 훗날 제가 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저는 더이상 볼리비아의 법에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에서 한국의 법을 따르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 속한 나라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왕으로, 임금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서로 길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두 상반된 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책상 위에 놓여진 동전을 보면서 한 꼬마는 자기 돈이 아닌 그 동전을 집어들고 오락실에 갈 수도 있고 반대로 어머니에게 거기 동전이 흘려져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아이들은 그 동전을 슬쩍해서 주머니에 집어 넣고 거기에 어머니에게 거짓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미 ‘거짓의 법’을 따르기 시작한 셈이지요. 그 아이는 하늘 나라에 속한 아이가 아니게 됩니다. 반대로 거짓의 나라에 속한 아이가 되는 것이지요. 거짓의 나라의 임금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이 ‘악마요!, 사탄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의 나라의 임금은 악마이고 사탄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사람은 악마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 뿐, 실제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용감함과 무모함

용감함과 무모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용감하다는 것은 자신이 대적하는 것의 실체를 알고 다가올 것들을 알면서도 의지를 다해서 그 앞에 나서는 것을 말하고, 무모하다는 것은 자신보다 월등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대놓고 들이미는 것을 말합니다. 용감한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무모한 이들은 무책임합니다. 진정으로 용감한 이들은 나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불의함에 맞서 싸웁니다. 반면 무모함은 실제로 있지도 않는 자신의 힘의 강함을 드러내어 보이려고 합니다. 이 두 성향은 일상 안의 여러 활동에서 드러납니다. 용감한 가장이 있는가 하면, 무모한 가장이 있고, 용감한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무모한 선생님이 있고, 용감한 정치가가 있는가 하면 무모한 정치가도 있습니다. 사제도 수도자도 모두에게 적용시켜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무모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무모함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로 용감한 사람이 되십시오. 용감함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눈멀음과 정화

영적 바라봄을 위해서 현세의 바라봄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길들여져 있는 동안은 거룩한 바라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 안에 모셔진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장님은 두 눈은 분명히 사물들을 바라보면서도 영적으로 그 무엇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잘 가꾸어 나갑니다. 다만 ’거룩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다시말해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로 살아갑니다. 요한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에서 참으로 엉뚱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의 관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예수님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만 전개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눈멀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달리 그들의 구미에 맞게 설명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눈을 열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눈을 닫고 그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훗날 정화의 시기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가서야 똑똑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장님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가 없다면 저마다의 장님 상태에 따라 정화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현세의 삶을 벗어나 은총의 삶으로 건너가는 과정이지요. 그것을 가톨릭 교리에서는 ‘연옥’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묵시 1,7) - 우리는 그분을 찌른 적이 없소. 만난 적이 없는 이를 어떻게 찌른단 말이오? 당신들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라도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분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찌르는 것은 물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에 우리는 그를 찌르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연인들은 서로 구타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려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세상 것을 탐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찌른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바로 그런 죄스런 우리들을 구하러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찌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뉘우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잘못을 범하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사랑 받으셔야 마땅할 그분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찌른 그분을 보면서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다시 뉘우치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찌르는 것을 그만두고 그분을 사랑하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

간밤의 꿈에 ‘차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1차원은 선입니다. 시작점과 끝점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치 실의 양 측을 구부려서 맞댈 수 있듯이 우리는 1차원의 시작점과 끝점을 마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차원이 서로 연결되고 통하게 되는 것이지요. 2차원은 A4지에 비길 수 있습니다. 2차원은 1차원의 선을 나열해서 만들어진 면입니다. 따라서 이 면도 그 시작하는 선이 있고 마치는 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A4용지도 구부려서 접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2차원의 시작점과 끝점도 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3차원은 이 2차원의 면을 나열해서 생기는 ‘공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공간도 경우에 따라 왜곡시켜 시작점과 끝점을 마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 공간의 왜곡 지점이고 그 반대편에는 ‘화이트홀’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웜 홀’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공간을 원하는 대로 우그러뜨릴 능력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그 이론만 이해하고 우주를 관측해서 블랙홀의 존재를 파악할 뿐이지요. 하지만 나름 영화상으로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최근의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지요. 4차원은 무엇일까요? 3차원의 연속된 지점으로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차원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4차원을 우그러뜨릴 수 있으면 우리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시간의 시작점과 끝점을 넘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3차원의 공간의 왜곡부터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소설이 시작되는 셈이니, 이 4차원의 왜곡은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꿈에 누군가에게 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시간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라서 매 순간의 시간에 가장 적합한 것을 배분하시고 그 시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천국은 익숙함으로 가는 곳

저마다 자신에게 익숙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술꾼은 흥청대는 술자리가 익숙하고,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서로 모여 한대씩 물고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장면이 익숙하고, 수다를 즐기는 사람은 카페나 식당에 모여서 이런 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합니다. 자신이 즐기는 것이 남에게도 좋을 리가 없고, 자신이 싫다고 해서 남에게도 싫은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에 익숙해져 온 셈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인 이유는 하느님과 머무는 것을 즐기고 그분이 명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수료했다고 해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첫 단추를 꿰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작한 길을 걸어 나가야 하고 익숙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세상의 질서를 배워 오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뿌리깊은 ‘이기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적인 의미의 사랑도 이 이기성을 바탕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헌데 하느님이 가르치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곳, 서로가 상대의 필요를 살피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무작정 들어간다고 해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서서히 익숙해져가야 하는 곳이 되는 것이고, 바로 지금의 우리가 머무는 이 세상은 그 사랑을 훈련하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는 훈련소와 같은 셈이지요. 지금 만나는 가족들은 나에게 필요한 덕목을 훈련하기 위해서 만나게 되는 가족들인 셈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태 12,50) 먼저는 아버지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분의 뜻을 따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배워 알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분의 권능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이 나에게 실제적인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권능 외에 달리 믿을 구석(돈, 권력, 명예)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분의 권능에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일단 그분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은 그분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실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데에는 상당한 난관들이 있습니다. 의심은 끊이지 않고 유혹의 손길도 그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가도 나가 떨어지는 일이 빈번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믿음에 올바르게 들어서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한 본질의 체험인 셈이지요. 하느님 아닌 것에 희망을 걸고 그리로 나아갔다가 처절하게 실패하고는 다시 본래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이 사람에 따라서는 필요하기도 한 셈입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죄를 통해서 구원을 체험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먼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셈입니다. 그렇게라도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결국 우리 자신들에게 달린 문제라서 때로 우리들 가운데에서는 기왕지사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것 아예 멀리 엇나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올 결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느님의 백성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1마카 4,55) 아무나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임금을 모신 이들을 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성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은 그들의 목적이 뚜렷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진실로 아는 이들입니다. 그분의 권능을 실제로 체험한 이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에게서 나오는 권능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그래서 오직 하나의 행위 밖에는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저마다의 목적으로 서로 한데 모여 살아갑니다. 같은 이데올로기로 모인 백성들이 있고, 같은 나라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들이 있으며, 같은 이윤의 목적으로 모인 사람, 같은 취향으로 모인 사람 등등 참으로 다양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서 그들의 모임을 만들고 그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께 감사드리고 찬양드리는 법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참된 성공은 하느님의 권능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 성공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아직 온전한 실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신 분이시라서 모든 이방 민족이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기다리시고 이를 위해서 당신의 나라의 완성을 미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백성인 우리들의 사명은 뚜렷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약한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분의 권능이 우리에게 드러나고자 우리는 부족한 사람으로 선택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권능은 약하고 모자란 우리에

예수님과 사람들

예수님은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 주변의 모든 이들이 같은 내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 이들은 다른 표현으로 ‘강도들’이자 동시에 강도들을 ‘불러 들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챙기는 이들, 심지어는 거룩한 것을 상하게 하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지요. 이기적이며 계산적인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서 거룩한 것을 이용해 먹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쫓겨나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들이지요. 지상에서는 상징적인 행위로 예수님이 단 한 번 그런 행동을 실천해 보이셨지만, 훗날 예수님께서 왕좌에 앉으실 때에 이들은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되어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될 이들입니다.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백성의 지도자들 이들은 살인자들입니다. 시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없고 자신의 내면에 든 어두운 것을 교묘히 감추고 지내면서 정작 백성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 이들의 위선은 참으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것’을 위해 일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 거룩한 것을 죽일 생각을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명성을 채워넣을 생각을 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지요. 하느님의 뜻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저 자신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명예를 얻고 신과 같은 위치에 이르기를 바라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의 경중에 따라서 더욱 어두운 곳에 위치하게 될 것입니다. 온 백성 그러는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온 백성이 있습니다. 낮추인 마음,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듣는 이들이지요.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까요? 제 잇속을 채우려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비극을 앞에 둔 예수님

예수님은 인간의 비극을 앞에 두고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의외로 냉정하게 비춰지는 모습도 적잖이 보여지곤 합니다. 타인의 불운을 앞에 두고서도 그렇고 또 심지어는 본인에게 다가온 슬픈 운명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카 13,1-5)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루카 23,28)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의 방향성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에 집중해서 정작 우리 본인들이 가고 있는 길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현실입니다. 누군가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암에 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해도 그가 몇 날 며칠 몇 시에 세상을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이 됩니다. 타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종교적인 색채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끼워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을 나도 마음에 들어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위 성직자와 친분을 쌓고 싶어합니다. 굳이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도 소위 ‘거룩해 보이는 사람’과 연관을 맺고 싶어하고 다른 이들을 만날 때에 그와의 친분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뭔가 중요한 인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결국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본인이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누군가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그와의 친분을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거룩한 이가 지닌 영성을 배워 알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되는 것이지요. 때로 마주하게 되는 묵주기도 단 수를 자랑하는 사람도 실은 본인이 전혀 거룩한 사람이 아닌 셈입니다. 진정 겸손한 이라면 본인이 바치는 기도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친분을 쌓고 스스로 변화되는 삶을 통해서 그가 얼마만큼 기도하는 사람인지는 절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울며 겨자먹기로 바치는 묵주기도 수라도 주변에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사람인 셈이지요. 종교적인 색채는 유명 배우라도 연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삶이 그리로 방향지워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서 아무리 거룩한 척 연기를 하는 교리교사라도 술자리에 가서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린다면 그의 거룩한 연기는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공격의 시기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3-44) 때가 이르면 사탄은 우리를 향해 공격을 시도해 올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다 힘 센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야말로 최적의 공격 시기인 셈이지요. 그리고 나의 주변에 유혹이라는 이름의 공격 축대를 쌓고는 둘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 즉 내 영혼과 그에 귀속된 소중한 가치들을 하나씩 꺼내어 내동댕이치게 될 것입니다. 즉 유혹에 잠겨든 영혼은 내면에 더는 소중한 가치들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 안에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있던 ‘굳건하던 것들’, 즉 신앙, 사랑, 희망과 같은 것들이 모조리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단 한마디의 말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은 몇번이나 우리에게 다가오셨지만 우리는 매번 그분을 거절하고 만 것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의 기회들, 우리에게 다가오는 회개의 초대들을 우리는 과감히 무시하고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신앙 물 좀 먹었다는 이들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다보면 소위 신앙 ‘경력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 생활이 수십년이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신영세자들의 입문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그 중에 진실한 이들은 사실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헛바람이 잔뜩 든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 생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온 동네를 싸다니면서 자신의 거룩함을 광고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집에서는 설거지 하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모든 종교 모임에 참석하고,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교구 공식 행사에 나서서 얼굴을 팔고 다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세를 얻어서 신앙 입문자들의 대부 대모 역할을 도맡아서 하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그렇게 그들은 신앙의 초보들에게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라 각종 신앙의 팁을 전수하면서 사람들을 엉뚱한 신앙으로 몰고 가고는 합니다. 자신이 하는 율법적인 기도 방식을 광고하고 자신의 기도 방식이 최고라고 추켜 세우며 신영세자들의 기를 죽이고 그들의 갓 피어나는 신앙의 새싹을 짓밟기가 일쑤이며, 나아가 교무금을 적게 내는 법, 주임 신부님의 환심을 사서 친하게 지내고 교회 안의 여러 의무에서 제외되는 법 등등 한창 뜨겁게 타오르는 그들의 신앙 앞에 온갖 각종 엉뚱한 신앙의 방향을 그들에게 제시하곤 합니다. 그런 이들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은 ‘이적’이 일어난다는 이상한 곳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온천지를 싸다니면서 사람들이 혹할 만한 요소들을 찾다가 결국 자신들이 그런 요소들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2티모 4,3) 그들이 맺는 열매로 그들을

목표와 장애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주변의 작은 것들에 한눈을 파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행여 장애물을 만날지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장애물을 통해서 다리의 힘을 기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더욱 추진력을 얻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성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변 사물들의 가치가 올바로 보이게 됩니다. 목표에 부합하는 것들은 더욱 소중히 여기고 반대로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세상적으로 아무리 가치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내려놓을 줄 압니다. 돈을 수억원을 벌고 나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길과는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을 하찮은 일로 취급을 하고, 반대로 아무리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참으로 소중한 일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를 보살피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를 오해하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시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사전에 다 예견하신 것이라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경우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나게 되면 상당히 놀라게 됩니다. 더군다나 빛의 자녀들로서는 하느님의 가치 안에서 삶을 영위해 온 이들이기 때문에 그런 이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이 정말 이해하기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들은 그런 시련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던 인내와 사랑을 더욱 키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의 끝은 ‘끈기’에 상당히 좌우가 됩니다. 운좋게 삶의 여정의 마지막에 회개의 은총을 얻는 이가 아닌 다음에는 모두 일찌감치 이 길을 시작하게 되고 마지막까지 항구하게 참아 견디는 이가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정을 일찍 시작했다고 손해볼 것은

공기와 은총

사람이 평소에는 공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코에 문제가 있거나 숨이 차거나 물 속에 잠수하거나 해서 공기가 부족하게 되면 그제서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그 관심조차 없던 공기가 실은 우리의 생명의 가장 기본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하느님’과 그분의 선하심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호흡’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호흡이 중지가 될 때, 즉 스스로의 그릇된 선택, 즉 죄악으로 인해서 더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지 못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여기에서 더 웃긴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그분을 통해서 찾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탐해서 많은 것들을 누리려 하고 즐기려고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영혼을 채우려고 해 보지만 그러한 것들 따위로 영혼의 근본적인 갈망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허감을 더한 쾌락으로 채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지 탄산음료를 마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목을 축일 수는 있어도 결국 목이 더욱 타게 됩니다. 진정한 생수를 찾아 목을 축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비로소 안정이 되고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안정을 얻기 위해서 돈과 지위를 얻고자 그토록 애를 쓰지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현실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수녀원 강론

“여러분들이 수녀원에 산다는 것은 ‘선택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슨 특정한 일을 맡길 때에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을 골라서 맡기지요. 거짓말쟁이나 도둑질을 곧잘 하는 학생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최소한 맡기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수녀님들은 그런 의미로 선택된 사람들이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난에서 제외되어 이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요가 있고 기도에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워서 잘 알고 있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일을 해야지요. 열매를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페인어를 모른 채로 8년이 지나 지금은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거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말을 모르시나요? 아니면 입이 닫혀 있나요? 우리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이 일을 이미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큰 상급을 받게 되겠지요. 이미 충분히 상급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충만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 영광스럽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하지만 훗날 그 영광을 받을 때에 우리는 기쁨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씨 뿌리러 가는 이들은 울면서 씨를 뿌리러 가지만 훗날 수확물을 들고 돌아올 때에는 기쁨에 가득해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재산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재산이라는 것,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기적인 사람, 오직 자신의 소유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은 곧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을 지닌 사람, 즉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 안에 있는 재산이라는 것은 ‘위탁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사람이 재산을 다루는 방식은 천지차이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재산을 정말 현명하게 잘 다룹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산이 증식되는 것에 신중을 기하고 단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지요. 반면 하느님의 사람은 재산을 책임감있게 다룹니다. 하지만 이들은 돈을 버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재산이 합당하게 쓰여지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돈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하고, 또 하느님의 뜻이 가 닿는 곳이면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요. 물론 안타깝게도 이 두번째 부류의 사람을 만나기는 참으로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캐오는 이전의 이기적인 인물에서 이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구절과 같은 결심을 내비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돈의 액수를 따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의 비유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내면의 결단과 의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책임감 있게 하느님의 뜻대로 다루고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라도 더 내 소유로 집어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세례 받지 않은 아이의 죽음

부모가 가톨릭 신자인데 그들의 10살짜리 아이가 세례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요? 무엇보다도 부모가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무려 10년 동안 자녀의 신앙에 대해서 거의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되니까요.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10년이라는 시간은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동안 자녀에게 밥은 해 먹이고 옷은 해 입히면서도 신앙에 관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셈이지요. 가장 기본적인 세례조차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만일 그 기간 동안 정부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주는 혜택이 있었다면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서류를 준비해서 필요한 것을 받아 갔을 터입니다. 하지만 세례는 무심하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럼 그 아이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건 오직 하느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사목경험에 비추어 보면, 10살이라도 이미 본인의 내면에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고 나름의 선택을 해 오면서 살아온 셈입니다. 이미 그 나이에 거짓말과 도둑질에 도가 터 있는 영혼이 어두운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부모의 모범에 따라 기도생활로 다져진 건강한 영혼이 되어 있을 수도 있지요. 물론 후자의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경우에 따라 달린 문제이지만 세례도 받지 않은 채로 10살이나 된 아이의 내면이 천사처럼 순수하리라고 상상하는 데에는 좀 무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럼 교회는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부모가 신자로서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 권고해야 합니다.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전례 거행(미사)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을 방문해서 기도를 해 줄 수는 있지만(연도) 그 밖의 행위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을 줄 만하다고 분별이 되면 시행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함부로 미사를

영적으로 미개한 사람들

한국 사람들은 남미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뭔가 아직 미개하고 못배운 민족을 떠올립니다. 같은 취급을 우리도 미국이나 유럽 사람에게 당해 왔습니다. 여전히 미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이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보리죽이나 먹는 미개한 나라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미국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에게 또 유럽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 때에 같은 취급을 다른 민족에게 당해 왔을 것입니다. 아랍 문명이 한창 고도의 문명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에 유럽은 미개한 민족이었을테지요. 남미 사람들은 미개하지 않습니다. 만일 미개하다는 것이 ‘기술 문명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내면에는 하느님이 선물한 동일한 영이 깃들어 있고 우리가 갖추고 있는 모든 능력들이 잠재적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일깨워 준 사람이 없을 뿐이지요. 저는 이들에게 필요한 학교 교육, 의료 혜택을 제공할 순 없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천천히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들에게 내면의 교육을 얼마든지 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서버에 엄청난 양의 지식 정보를 저장해 놓을 수는 있겠지만 ‘선한 마음’이 없이는 그러한 정보들이 유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악용되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인간의 영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향성을 하느님에게로, 즉 선과 진리와 사랑에로 돌리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머리에 지식이 가득하지만 가난한 이를 도울 줄 모르는 못된 의사보다는 그저 자신이 가진 빵 한조각이라도 나누려는 가난한 할아버지가 더 소중한 법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의사를 ‘영적으로

모범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마카 6,25) 우리는 글로만 모든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모범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우리의 모범은 바로 부모님이었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하는 것은 당연히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고, 엄마가 성당에 가면 나도 성당에 따라 갔습니다. 반대로 아빠가 담배를 피우면 나도 담배에 호기심이 생기곤 했고, 엄마가 거짓말을 하면 나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고 ‘엄마도 그렇게 하잖아’라고 따질 줄도 알았습니다. 모범이라는 것은 꽤나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모범이라는 것은 그 인물의 중요성과 영향력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길가는 노숙인이 담배를 한 대 꺼내물고 피우는 것과 주교님이 공적인 자리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물고 피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행동입니다. 정신지체 아이가 자신도 모르는 상스런 말을 외고 다니는 것과 인지도 있는 중요 인사가 상스런 욕설을 쏟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동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나서서 하기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진리와 사랑과 정의에 정반대되는 악한 표양만이 아니라 우리의 직분에 합당하지 못한 모든 처신들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범에서 본을 받고 나아가서 우리도 그런 모범을 아직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양이 똥

오늘 고양이 똥을 치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좋은 것만을 취하려 하고 책임을 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젊은 연인 관계에서 서로 기대하는 것은 흥분을 느끼고 즐기려는 것이지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워도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귀여운 고양이의 모습을 즐기려는 것이지 그 고양이가 싸대는 똥과 오줌을 치우려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의 좋은 면모 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해당되는 모든 것에 본분을 다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은 서로를책임질 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고, 자녀의 입양이든 동물의 입양이든 모두 책임을 질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고양이를 맡겠노라고 했을 때에 저에게는 그 책임을 질 마음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나의 삶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고양이와 노는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라 똥도 치우고 박스 청소도 하고, 사료도 제때에 주고, 물도 떨어지지 않게 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제가 본당 주임 사제가 된다는 것은 본당에서 일어나는 아름답고 행복한 일만을 맡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안에서 성가시고 귀찮고 신경쓰이는 일도 성심을 다해서 맡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 속에서도 신뢰와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런 신중한 분별 속에서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이들인 것이지요. 좋은 것만을 취하려는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 안에는 좋고 나쁜 것이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오너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혼자 힘으로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자캐오의 작은 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의미하고, 자캐오가 올라선 나무는 세상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들이지요. 우리의 키는 생각만큼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자그마한 존재들입니다. 바람이 불면 날라가 버리고 마는 먼지와 같은 존재들이지요. 헌데 우리는 때로 다른 이들을 밟고 일어섭니다. 다른 것들에 힘입어 높은 곳에 올라가곤 하지요. 그리고 그런 가운데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 그대로 얼른 내려와 주님을 집에 모십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우리들은 위로부터 오는 부르심을 들을 때에 너무나도 쉽게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부르심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복음의 모습처럼 실제 예수님을 한 사람이 다가와서 불러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그 어느 신학생도 그런 부르심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르심은 참으로 소박한 일상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한참 탐욕 속에 빠져 있을 때에 부르심은 친구의 소박한 권고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라고 말이지요. 누군가 어둠의 길을 가려고 할 때에 부르심은 아내의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내려와야 합니다. 올라선 자리에서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닐고 계시는데 우리는 권력의 자리에, 명예의 자리에, 부유함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내려와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교만하면 친구가 없는 법입니다.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선을 가장할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마타 1,54) 이와 비슷한 구절이 신약에도 등장합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마르 13,14) 과거에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제물을 불살라 바치는 신성한 장소로 취급 되었지요. 물론 오늘날에도 성당마다 제단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지시한 일을 말이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른 성전을 세우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통한 세로운 교회를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참된 마음의 성소에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제단’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참된 제단은 이전처럼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나날이 바치는 곳이 진정한 제단이 되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실제로 들어서곤 했습니다. 이상한 이단적 상징물이 제단 위에 떡하니 버티고 서곤 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전혀 다른 제단 위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탐욕과 이기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하느님의 몫이 되어야 하고 그분의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 곳입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의 이기성과 탐욕으로 그 안에 전혀 엉뚱한 것을 집어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황폐하게 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마는 법이니까요. 여전히 사람들은 일상 안에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사랑을 마음 속에

우리가 바라는 것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피상적인 요구만을 쏟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필요하답니다. 헌데 왜 필요할까요?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정말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내가 정한 부동산을 구입하고 돈을 막대하게 벌어들이는 데에 지장이 있어서 일정량의 돈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고 합니다. 정말 나에게는 지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만한 합당한 능력이 갖춰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실력이 안되는데 기적의 힘을 빌어 운수 좋게 들어가 보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에게 들어높이는 기도는 무엇이든 다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즉, 기도하되 무엇이든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음 구절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과연 무엇을 원할까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전능에 힘입어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자녀가 사탕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1년 내내 사탕을 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녀를 망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더라도 ‘

일하는 이와 일하지 않는 이

어제는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이 오셨고 예식은 성대하게 치루어졌지요. 하지만 가만 보면 늘 일을 하는 사람만 일을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리 저리 눈치만 보면서 이름 나는 일에는 최대한 앞으로 나서지요.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일들, 화장실 청소, 의자 치우기, 강당 청소와 같은 일들에는 전혀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일들은 언제나 일하는 이들의 몫이 되지요. 그러나 그런 위선자들의 안락함은 거짓 안락함입니다. 그들은 일을 기피하는 그 순간은 육체적으로 편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더욱 바쁘지요. 자신이 그 일에 다가서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자리를 피해야 하고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어야 하니까요. 그러니 그들은 정신적으로 더 피곤한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 순진하게 일할 거리를 앞에 두고 일을 하는 사람은 육신은 조금 수고스러울지라도 마음은 편안한 셈입니다. 할 일을 할 뿐이니까요. 다만 때로 일어나는 일들 중의 하나가 ‘분노’입니다. 일하는 이들이 일하지 않는 이들을 보고 그들의 게으름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릇된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이들이 얻는 것과 일하지 않는 이들이 결과적으로 얻는 것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이게 과연 무슨 말일까요? 일하는 이들, 즉 일거리를 앞에 두고는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은 그렇게 일하는 동안 자신의 내면 안에 소중한 가치들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인내, 겸손, 온유, 사랑과 같은 가치들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신의 내적 경향은 일상 안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자신이 쌓아온 내적 가치들은 찬란히 빛을 발하고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이름나는 일에만 자신을 내세우고 나머지 일들을 요리조리 피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도 그렇게 꾸려 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집 밖에서는 ‘위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