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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6의 게시물 표시

그들이 화난 이유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루카 4,28) 예수님은 고향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적’ 차원으로만 보려 했지요. 즉 예전의 어린아이로만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교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고향 마을에서 놀던 어린아이로 간주하고 싶었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난 사람이라는 특권을 어떻게든 누리려고만 했을 뿐, 자신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요. 인간의 교만은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좋은 것들을 가로막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별다른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기득권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이 구원을 보장한다.’ 이것이 핵심이었지요. 즉, 고향 사람이라는 관계가 하느님을 아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이끌어간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만일에 같은 가르침을 가톨릭 신자들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예수님이 지금의 시대에 같은 가르침을 전해야 했다면 아마 이런 예를 드시지 않으셨을까요?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지만 하느님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머무르지 못하셨고 오히려 팔레스티나에 사는 선한 이슬람인을 돌보시고 그와 함께 머무르셨다. 이런 표현을 듣고 진실한 내면의 봉헌을 사랑하는 이라면 기뻐하겠지만, 자신의 가톨릭 신자의 외적 신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화를 내지 않을까요?

파라과이 본당 특강 정리

요한 복음 1장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성당을 나오는 이유 성당을 왜 나올까요? 이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성당을 왜 나올까요? 사실 성당을 나오는 이유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지요. 제가 한국에서 보좌 생활을 할 때에 본당에

서 있기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코린 10,12)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누워 있는지 모르는 이 이미 정신이 흐리멍덩해서 자신이 서 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가 있습니다. 그저 맛있는 것이나 먹고 좋은 옷이나 사 입고 돈이나 많이 벌면 그걸로 끝인 사람입니다. 그 밖의 것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영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 있지 않으면서 서 있다고 착각하는 이 실제로는 서 있지 않은데 스스로 서 있다고 착각하고 주저앉아 있는 이가 있습니다. 교만한 이들이고 율법주의적인 영혼들입니다. 이들은 법만 잘 지키면 만사 땡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판공을 거르지 않으면 자신은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주저앉아 있거나 심지어는 누워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위선적인 경우도 많지요. 낙타는 삼키고 바늘은 걸러내는 이들입니다. 서 있는 걸 알아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실제로 서 있으면서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조심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 다리에 힘이 붙지 않아서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서 있던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조심스레 일어나곤 합니다. 거룩한 이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영혼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이들이지요.

선조들의 모범

많은 사람들은 과거와 지금을 참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처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착각하곤 하지요. 특히나 그 세월의 격차가 십수년 정도가 아니라 수천년이 벌어지게 되면 마치 그들이 외계인이라도 되는 양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과 그 외적 생활양식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그 내면의 상태, 즉 영혼의 상태는 같은 처지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도 유혹을 겪었고 죄악에 빠져 들었으며 용서를 체험했고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개하다’고 치부해 버리고 말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미개하게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들이 비록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고 봉화로 메세지를 주고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의 생각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올바르게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50인치의 커다란 LED화면의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위업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수백마력의 엔진이 달린 자동차는 없었을지 몰라도 말을 타고 다니면서도 하느님에게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없게 마련입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역사적인 사실, 고고학적인 사실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과 가졌던 관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우리가 배우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코린 10,5-6) 수많은 선조들이 그릇된 길을 걸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영적으로 그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을까요? 아니면 더 메마르고 부족한 처지에 있을까요?

최후의 심판

루카 13,1-9 참조 포도밭의 무화과 나무 -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입니다.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이지요.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특별히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3년 동안 열매를 찾는 주인 - 심고 나서 바로 찾는 것도 아니고 무려 3년을 연달아 찾아와서 열매가 있나 살펴 보았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의 상징적 의미는 ‘완전’을 의미합니다. 3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도 세 분이시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훗날 세 번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주인으로서는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질 만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릴 운명 - 무화과주인은 재배인에게 말합니다. 이제 이 나무를 자르라고 말이지요. 무화과나무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잘림이고 멸망이지요. 포도 재배인의 청원 - 헌데 무화과나무와 그 주인 사이에 ‘포도 재배인’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포도를 가꾸는 사람입니다. 헌데 이 포도 재배인이 무화과나무를 돌보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둘레를 파고 거름까지 주겠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로서는 주인의 완전한 호의에 포도 재배인의 관심과 애정까지 받는 셈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 이는 완전한 결론입니다. 그렇게 사랑과 관심을 쏟았으면 하다못해 작은 응답이라도 있어야 마땅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에도 열매가 없으면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결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 결정을 포도 재배인이 중간에 자신의 간청으로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호의가 끝나는 날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비유이지만 확실한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지요. 이 비유 안에는 하느님의 심판과 우리 구원자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길을 우리가 걷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반항하는 무화과나무가 될 것인지, 열매를 맺

응답하는 삶

계획이 삶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삶을 바꿉니다. 아무리 적의 성을 공략할 계획을 잘 짠다고 그 성이 공략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사들의 구체적인 전투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으로야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천으로 누가 그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생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실천 앞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거룩한 성인의 책을 읽는다고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아주 작은 영적 투쟁에서 훈련을 거듭할 때에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의 기본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이루어지는 나 혼자만의 극기로 인한 성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거룩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부르실 때에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르심이 어떤 특별한 기회에 특별한 모양으로 온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다가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동안, 즉 나의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의 진정한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분노와 적개심을 품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천둥과 번개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산들바람 가운데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부르심을 듣고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어느 교리교사의 글

제 이름은 OOO 이고 저는 23살입니다. 첫영성체에 3년 동안 교리교사로 봉사하고 있고, 청년 그룹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 본당에서 견진을 받고 난 뒤부터 본당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먼저 어떤 그룹에 속하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많은 이들이 이 본당에 속해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요. 제 교리교사는 OOO 아주머니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늘 저에게 조언해 주시고 제 결정에 도움을 주셨지요. 저의 부모님은 아직도 그 교사분을 알지 못하고 계셨고 저 역시도 허락을 청하거나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공허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늘 문제가 있었고 아직도 있습니다. 저는 곧잘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지요. 직장과 나의 공부, 부모님의 다툼,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성당의 한 일원이 되고나서부터 사람들이 아무런 보상이나 상급을 바라지 않은 채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저에게 힘을 실어주어 교리교육 안에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들 안에서 제가 첫영성체를 받을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요. 그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지식보다 애정을 나누어 주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사랑과 애정과 우정을 찾아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가 작은 어둠의 구석에 한 줄기의 빛이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구요? 아직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제 삶에 지니고 계신 계획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빛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쓰이지요. 우리는 홀로 따로 떨어진 이들이 아니며 하느님은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자비와 회개

우리는 ‘자비’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보듬어주는 아버지를 연상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곧잘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회개’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받는’ 데에 익숙해서 우리가 ‘내어주는’ 부분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자비와 당신의 모든 선물은 우리에게 선사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자비를 얻기 위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이런 신앙인들을 만나곤 합니다. “하느님은 다 용서하시잖아요?” 한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이 맞는 이유는 우리가 어떠한 큰 죄악 중에 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돌이키면 하느님은 그 모든 어두움을 없애 주신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이 표현이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결국에는 당신의 나라에 절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면 틀린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만들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원의 선물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선물되는, 수여되는 것입니다. 영원의 행복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행복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과 그것을 거부하는 방향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이 영원의 행복을 쏟아 주시려 해도 우리측에서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자유로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향해서 살아가지만 죽음을 거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고 나면 사랑을 실천하려고 해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재료가 없고, 덕을 쌓으려 해도 덕을 쌓을 수 있는 재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마음 속에 숨어 있던 본래의 성질이 그때에는

소출을 낸다는 것의 의미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마태 21,34) 사과를 가꾸는 밭이면 사과가 소출입니다. 논이라면 쌀이 소출이겠지요. 아주 간단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농장에서는 무엇이 소출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그저 미리 짜여진 메뉴얼만 따르려고 합니다. 그 메뉴얼은 ‘미사, 판공, 교무금, 재계’ 등등입니다. 그러한 것들만 ‘의무적으로’ 하고 나면 자동으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소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소출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메뉴얼의 근본 목적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 근본 목적을 잃은 방법론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차가 원하는 목적지에 가지 않는데 차량의 옵션이 최고인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헌데 증오하고 시기하고 탐욕을 부리면서 단지 방법론만 따른다고 해서 사랑이 자동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하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랑이 쏟아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을 하지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하느님의 외아들 앞에서 엉뚱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의 전문가로 자신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싸우고 다투고 간절히 욕구하지만 결과적으로 얻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을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침묵 중에 조용히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모든 것을 자진해서 내려놓지만 결국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

믿음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로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확증’되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그래야 믿음이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눈 앞에 컴퓨터를 두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눈 앞에 확연히 드러나 있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만일 제가 정말 의심이 많아서 눈 앞에 컴퓨터가 실존하는지 아닌지까지 의심한다면 그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음에는 그냥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를 더해서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관계 안에서 우정이 쌓여가고 서로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줄 때에 우리는 아무에게나 빌려주지 않습니다. 관계가 형성이 되고 그의 평소 행동에서 그가 믿을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빌려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잃을 생각으로 적선해 주던가 아니면 빌려주지 않게 됩니다. 어느 아이가 필기 연습을 하는데 어느 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글을 대신 써 주면 그 아이에게 글을 쓰는 능력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글은 아이 스스로 써야 하고 그렇게 손가락의 힘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알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오늘날로 치면 사제들과 교리교사들의 가르침, 혹은 부모의 신앙 가르침 등등으로 바꾸어볼 수 있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 믿게 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방법을 써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에게는 의심하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고 올바른 것을 듣고 실천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스스로의 자기

빛을 전하는 이

눈을 뜨려 하지 않는 장님에게 빛과 색깔을 설명하는 것만큼 안타깝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이 사람들 한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시기하고 증오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눈으로는 빛을 보지만 마음으로는 선과 진리와 사랑과 거룩함을 보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존재만을 본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전혀 그럴 의도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그들의 시기가 영혼의 눈을 멀게 한 것이지요. 이러한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에도 여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이고 구원자로서 원래의 위치에서 대접을 받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탐내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고 하면서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거의 예수님을 생각지 않고 설령 생각 하더라도 아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을 하지요. 실제로 계신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도외시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는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눈 뜬 장님에게 빛을 전하려는 노력이지요. 그가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꾸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을 직접 보고 익숙해지고 즐길 수 있어야 하지요. 그 첫 시작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 이전 단계가 있으니 눈을 뜰 때까지 꾸준히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지요. 그 빛이 촛불이든 등잔이든 꾸준히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꾸준히 빛으로 남아있는 것, 거친 풍파 속에서도 빛을 꺼뜨리지 않고, 설령 꺼지더라도 다시 빛의 원천이신 주님께로 다가가 그 빛을 살리는 것, 그리고 아낌없이 가진 빛을 나누어 주는 것. 그러한 선작업이 있을 때에 그 빛을 받는 이가 비로소 자신의 의지로 눈을 뜰 수 있게 되고, 그리고 눈을 떴을 때에 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미 알고 실천하는 것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예레 17,9-10) 오늘 면담을 하면서 마지막에 강조한 내용과 똑같은 성경 구절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행실을 아시고 그대로 갚으신다고 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듯이 어둠에 한 번 빠져든 마음은 쉽게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경고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일도 없지요. 고집스런 사람의 마음만큼 단단한 것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한 번 굳어지면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신앙 교육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직 순수하고 맑을 때에 좋은 것을 많이 불어넣어 주어 신앙을 가르치고 가치들을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훗날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이겨낼 힘이 생기는 법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신앙을 배워도 시련은 피해갈 수 없는 법입니다. 인내를 기르기 위해서는 인내를 시험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랑을 기르기 위해서는 사랑을 시험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그런 종류의 덕들이 자라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 땅에 가라지들을 허락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밀을 더욱 성숙시키고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약속되었고 계획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합당한 것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받게 되고, 악한 행실을 한 사람은 악한 열매를 받게 되지요. 악인이 하늘나라에 가는 법도 없고, 선인이 지옥에 가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전혀 모르던 결과를 뜬금없이 받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계속하고 그 결과를

면담시 필요한 것들

믿음과 인내가 기본입니다. 무엇을 믿고 어디로 이끌고 갈지에 대한 지도가 없으면 아무리 열심히 끌어본 들 소용이 없고, 또 인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화를 해야 하는데 대뜸 화부터 내고 있으면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사목자의 기본은 인내입니다. 분별이 뒤따라옵니다. 이건지 저건지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며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고 그가 강조하는 것 뒤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흐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도 필요합니다. 필요한 때에는 분명하게 말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 주어야 할 말을 우물우물 씹고 있으면 면담자는 모든 것이 괜찮은 줄 생각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유가 필요합니다. 전해야 할 내용은 분명하고 용기있게 전하더라도 그것을 담는 그릇은 온유이어야 합니다. 온유함을 잃은 채로 전하는 직설적인 말은 감정적인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끈기도 필요합니다. 오늘만 해도 두 건의 면담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대화 같지만 그 안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요.

조언

진실하고 선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 잔뜩 모인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곳에서는 서로 부족함을 채워줄 줄 알고, 서로 감사할 줄 알고, 늘 기쁨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처럼 이 세상은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서로 속이고, 때로는 악하기도 하며, 서로 미워하면서도 그 증오를 감추고 낯빛을 바꾸어 위선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슬픔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알고서도 모르는 척 해 주고, 마음을 다해 충고해 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원초적인 무죄함과 악을 극복해 낸 무죄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원초적인 무죄함은 무균실에서의 무죄함이고, 악을 극복해 낸 무죄함은 항체가 생긴 무죄함이지요. 그 항체의 이름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한데 모이면 엄청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지상에 희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원에 있으며 지상의 삶은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상의 삶은 사랑을 키우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한껏 인내심을 발휘해서 이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훗날 누리게 될 더 큰 영광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요.

관계

관계 중에는 우리가 원해서 맺는 관계가 있고 주어진 관계가 있습니다. 주어진 관계는 우리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빠나 엄마, 형제나 자매와 같은 관계는 주어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이나 친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이를 보면 우정으로 충고해 줄 수 있지만 계속 반복해서 같은 오류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전혀 뉘우치지도 않는다면 그때에는 관계 정립을 위해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지요. 우리의 소중한 사랑을 밑빠진 독에 부어 넣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정이라는 것은 서로를 충만히 이루어나가는 발전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이와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가족, 또는 주어진 관계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 관계는 우리가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품어 안고 가야 하고, 또 평화로이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형제간의 관계는 또다른 차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아야 하고, 반대로 자녀는 부모를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가 엇나간다 하더라도 부모는 자녀를 끝까지 품어 안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엇나가는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올바른 사랑을 충분히 받은 자녀가 엇나갈 일은 지극히 드물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형제간에는 이 절대적인 책임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편입니다. 형제간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형제가 올바로 성장하지 않은 것이 다른 형제의 탓은 아닙니다. 만일 형제 가운데 큰 문제를 일으키는 이가 있다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를 최대한 돕고 그와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같은 집에 살아가는 이상 가능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요.

손엘디 형제님과 나눔글

믿음은 익숙해지는 것 믿음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치 자동차처럼 그것을 가지는 순간부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오히려 ‘내밀한 결심’입니다. 알아듣기 쉽도록 비유로 설명을 드리지요. 제가 볼리비아에 처음 왔을 때에는 이 동네의 ‘치즈(queso)’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그 맛과 향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먹는 치즈는 저에게는 쉽지 않은 음식 중의 하나였지요. 그 강한 맛과 향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신자 가정에 초대받을 때마다 조금씩 대접받는 그 치즈를 울며 겨자먹기로 조금씩 먹으면서 맛을 들이다보니 어느새인가 그 치즈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전과는 달리 그 치즈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치즈 종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대충 알고 어떤 치즈가 향과 맛과 식감이 풍부한 좋은 치즈인지 어떤 치즈가 짜고 형편없는 치즈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째로 어떤 사물처럼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경향’으로 초대받고 거기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노력 안에는 ‘믿으려는 노력’이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샌가 나의 내면에 훌륭한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계기를 바탕으로 갑자기 신앙이 생기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갑자기 하느님을 향하게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다이어트를 급하게 한 사람처럼 갑자기 요요 현상이 오기도 합니다. 급하고 갑작스럽게 받아들이 신앙인만큼 뿌리가 약해서 금방 무너지는 신앙이기도 한 것이지요.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받아들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세상적인 일이 생기면 또다시 무너지기도 하는 신앙인 셈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자발적 선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온 것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난에 대해서 잘 알고 그것을 기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첫 발걸음은 무언가 인간적인 좋은 것이 계기가 됩니다. 좋은 교우 관계, 연도 예절, 마음의 평화와 안식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아름다운 이미지 등등이 계기가 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치워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약점이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마음이 엇나가고 독선적이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교회라는 것이 천사들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거의 모든 곳에서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환상적일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정작 현실을 체험하고 실망한다던가, 대기업에만 들어가면 만사 땡일줄 알았던 이가 들어가서 벌어지는 여러 현실들 앞에서 좌절한다던가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요. 하지만 특히 교회의 현실은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과는 조금은 다른 기대감을 지니고 들어오니까요. 그래서 그 실망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발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첫 환상을 깨고 나서도 교회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교회의 영적 보화를 누리고 또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둠의 시련들을 참아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마태 20,18-19) 예수님은 당

무시당하는 예언자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예레 18,18)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에 순한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솔깃한 말만을 지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환심을 사게 됩니다. 반면 진정한 예언자는 언제나 찬밥 신세입니다. 때로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때가 되어 자기 차례가 오면, 즉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두움을 지적당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그때 사람들은 또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자신의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언자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는 마치 연필처럼 자신을 깎아 나가야 하고 심이 닳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말씀을 받아적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그 도구는 몽당연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장식되어 지나치게 무거워 글씨를 쓸 수 없는 장식용 필기도구보다 하느님은 몽당연필에 볼펜대를 끼워서 쓰기를 선호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몽당연필은 여전히 글씨를 적는 사명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예레미야는 공격을 당합니다. 모함을 당하고 중상을 당했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곤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예레

일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머릿속으로는 만리장성도 계획하고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는 거지요. 사람은 생각으로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등산가도 될 수 있고, 축구 감독이 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실제로 하는가 하는 게 문제입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일하는 일꾼이 필요한 셈이지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고 건의는 했고 그것이 좋은 의견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누가 그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의견을 제시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들 하느님에게로 나아가야 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때가 되어 그것을 실천해야 할 때에는 저마다 꼬리를 내려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실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꾼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다방면의 지식과 경력이 아니라 첫 삽을 뜨는 의지입니다. 투덜거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느 면담

본당의 한 친구가 아침부터 면담을 하자며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약간 흥분한 얼굴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신부님, 본당에 위선자가 한 명 있어요. 제가 그 밑에서 일을 했는데요, 이런 저런 일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성당에 나와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달라요. 그는 위선자에요.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 맞아. 성당에 그런 사람들 있어. 사실 위선자들이 많아. 어떡할까? 다 내쫓을까? 그러니 그 아이가 저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 일단은 너 스스로를 잘 살펴봐야 해. 그의 악이 너의 마음에 악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조심해. 지금 너는 나와 함께 있고 물리적으로 아무런 위해도 당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속으로 흥분해 있고 조금 화가 나 있지. 그 화를 계속 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너에게 달린 문제야. 그리고 너 그 사람 때문에 성당 이제는 안나올거니? 미사 안나올거야? 그러자 그 아이가 고개를 가로젖습니다. - 그래. 누군가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저버릴 필요는 없어. 그건 어리석은 행동이고 비신앙적인 행동이야.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성당을 나오는 게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나오는 거라구.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네가 알게 된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을 바탕으로 그는 주변에 자꾸 어두움을 뿌리겠지. 그러다가 스스로 된통 당하기도 할거야. 그리고는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겠지. 뉘우칠 수 있는 기회 말야. 만일 그가 그 기회를 잡아서 스스로 뉘우친다면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 될거야.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자신의 악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영혼인거지. 그러니 우리로서는 그의 어두움 때문에 우리 안에서 어두움을 끌어낼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거야.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조언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는

낮아짐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5-28) 복음서는 꾸준히 같은 것을 가르칩니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꾸준히 그 모범을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또 지금의 우리들에게 이는 너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온 세상은 ‘이기도록’ 가르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요. 물론 예수님도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은 영예를 누리는 것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거룩한 내적 가치를 더 많이 지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예를 누리는 이를 더 나은 사람이라고 가르치면서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겸손하고 가난하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남들을 섬기는 사랑을 할 것을 가르칩니다.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하기 싫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들을 이기고 싶고 뛰어나고 싶으니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유혹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라고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착각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어긋난 욕구를 지니게 되지요.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예수님을 잃는 순간, 그는 자신의 오류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의 주님은 섬기러 오셨고, 다른 이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 이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택시 회사 축복식 강론

제가 만일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중국 사람이었다면 아마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를 겁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님이 저에게 이 축복식 책을 건네준다 하더라도 저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제 손에 물을 부었을 때에 손에 힘을 주어 잘 오무라져 있다면 물을 간직하겠지만 반대로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손가락이 벌어지고 물이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잘 추스리고 있다면 하느님의 축복이 머무를 것이고 반대로 우리의 마음에 구멍이 나 있다면 축복은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별로 없지요. 저마다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한 어린 여자아이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 당했습니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지요. 달콤한 것으로 포장을 해서 속에는 독이 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술을 진탕 마시면 그 순간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건강을 상하게 되고 가족 관계가 파괴될 수도 있지요. 바람을 피우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자녀들의 존경을 몽땅 잃어버리고 외토리가 되고 말지요. 이처럼 거짓스런 행복이 있으니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순간적인 쾌락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내면의 충실성, 평화 중에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지요. 바로 그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고 진실하고 사랑할 줄 알 때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섬길 줄 알 때에 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돈을 마구 버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