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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6의 게시물 표시

부활 5주 목요일 강론

좋은 저녁입니다. 환희는 기쁨입니다.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묵상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 기쁨을 느낄까요? 어떤 분은 친구가 공짜로 술을 사줄 때에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하하하. 한 자매는 몸매를 이쁘게 가꾸게 도와 주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니까요. 어떤 기쁨이 더 있을까요? 한 남자가 이미 아내가 있는데도 어떤 이쁜 처자가 다가와서 ‘아저씨 우리 행복한 밤을 함께 보내용~’이라고 한다면 그는 기쁨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 성적 흥분으로 인해서 말이지요.

여러분은 왜 여기 있습니까? 무엇을 찾습니까? 미사에 왜 오신 것일까요? 저희들이 가르치는 환희(기쁨)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아직도 제가 말한 것과 같은 종류의 기쁨을 찾으신다면 잘못 찾아오신 셈입니다. 여기는 여러분이 술에 취하고 돈을 더 벌고 더 이뻐지고 아름다워지거나 더한 성적 흥분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꽤나 역설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키며) 여기 우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십자가가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지요?”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흐려져 있고 준비되어 있지 않지요. 아직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은 여전히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지요. 한 여인은 얼굴에 짙게 화장을 하면서 거기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여인은 영혼을 가꾸기보다 얼굴을 가꾸는 것이지요. 영혼을 가꾸는 것은 사실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얼굴을 열심히 꾸며서 잘생긴 남성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요. 혹은 새로운 물건을 구입해서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여전히 낮은 단계이고 지극히 세속적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하는 셈이지요.

복음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과연 요즘 세상에 누가 서로 사랑하고 있을까요? 모두들 ‘거래’를 합니…

모든 것에서 배우기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내 기분에 맞는가 아닌가, 그가 내 스타일에 맞는가 아닌가 중요할 뿐이지요.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토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우리는 그를 일종의 ‘적’으로 간주하고 맙니다.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그 부분에 집중을 하면서 나머지를 모두 무시하고 그가 나를 기분나쁘게 하는 그 부분에만 주목하고는 하지요.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집중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지요. 우리는 스스로의 불완전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상대의 불완전을 재고 자시고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상대의 티를 제거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른손은 왼손이 반지를 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발은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고 손에게 불평하지 않지요. 우리의 온 지체는 눈이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 몸은 같은 머리의 지시를 받고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준비된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기 위해서 주변에 언제나 자극이 필요한 셈입니다.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하느님은 가장 필요한 것을 우리 주변에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날이 배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좋은 것으로부터도 배우고 좋지 못한 것으로부터도 배워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교훈을 얻고 좋지 못한 것은 좋지 못한 것대로 교훈을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근본 바탕은 동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시니 우리로서는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는 셈이지요.

아마 사람들은 저마다 연합하고 다시 갈라지고 하면서 이런 저런 사건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손…

어느 9일기도

어제 저녁 미사를 마치고 사무원 아버지의 장례 9일기도를 주례하러 갔습니다. 같이 가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작은 차에 저 말고 6명이 같이 끼어타고 장례식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시작하는 예식을 하고 복음을 읽었습니다. 9일기도의 복음은 언제나 열처녀의 비유입니다.

“여러분, 간만에 9일기도를 하네요. 그동안 망자의 시신이 있는 장례만 치뤘는데 9일기도는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릴께요. 저는 9일기도를 망자 때문에 오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때문에 옵니다. 이제 한 분을 떠나보내는 마당에 우리의 삶을 반성하기 위함이지요.”





강론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9일기도 상 위에 있는 촛불을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여기 초가 보이시지요?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초는 불이 붙으면 그 빛으로 다른 이들을 밝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을 소비하지요. 그것이 초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삶을 헌신하고 희생해서 다른 이들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었지요. 누구든지 언젠가는 반드시 잃게 될 삶인데 하느님은 그 삶을 통해서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고 서로 돕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촛불을 껐습니다.

“우리가 불이 꺼지면 초는 스스로를 소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전하겠지요. 이처럼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지상의 삶을 보존하고 윤택하게 가꾸기 위해서 빛을 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초는 언젠가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될 테니까요. 빛을 내지 않고 스스로의 지상의 생명을 한동안 보존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게 말을 이어갔고 거의 40여분을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보다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었지요. 물론 죄스런 삶에서 회개하라고도 가르쳤습니다. 사무원을 아는 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9일기도에는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생각과 삶

가끔씩 닫힌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사고 안에 갇혀버린 불쌍한 사람이지요. 그는 철저하게 무장된 사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논리로는 공략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이론을 가져다 대더라도 곧바로 그와 반대되는 이론을 생각해내고 맞받아치지요. 그런 그 앞에서는 설명을 할 것이 아니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요.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 앞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되니까요. 그가 헤어날 유일한 방법은 그 앞에 드러나는 실제적인 ‘삶’ 뿐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머리는 잔뜩 키웠는데 삶이 하나도 뒷받침이 되지 못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로만 싸웁니다. 그러니 그 싸움은 도저히 끝이 나지를 않지요.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굳게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사소한 성가심도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위신만을 챙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만큼 삶이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생각으로만 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의인 죄인 악인

우리는 이 세가지 용어를 잘 구분해서 써야 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말합니다. 악인은 그 길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말하지요. 그리고 죄인은 죄를 지은 이들을 말합니다.

모든 의인은 한 때 죄인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성모님만이 죄를 짓지 않으셨지요. 어쩌면 세례자 요한 성인에게도 죄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잘못이 존재하고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셈입니다.

하지만 회개가 시작되면서 한 인간은 죄에서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벗어남이 언제 완전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부족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모든 성인들은 스스로를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인식합니다. 참된 겸손의 표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의인은 결코 악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의 것이 완전히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의인이거나 혹은 악인일 뿐입니다. 어중간한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악인이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의인이 길을 벗어나서 악인이 될 수는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이 일단 의로움의 길을 선택하고 그리로 어느정도 나아가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을 향한 방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악을 선택하고 그리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기 시작해서 회개의 시도가 전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미적지근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큰 죄를 짓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선에로 나아가지도 않는 이들이지요. 사실 가장 큰 위험성은 이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악을 향해 달리다가 크게 부딪히고 깨달아 돌아올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미지근하게 삶을 유지하는 이들은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악의 유혹에 접어들어 영혼을 망쳐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가지 길

악인들은 서로 연합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지원사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음모를 꾸밉니다.

의인들은 진정한 일치를 이룹니다. 서로가 가는 방향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따로 다른 무언가가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도달하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로 돕습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같은 목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욕구가 목적이라서 각자 모두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맹, 연합’과 같은 개념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의 이익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동맹이 유지되지만 언제라도 자신들의 이익이 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로 변하게 됩니다.

악인들에게 의인들은 눈엣가시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의 모든 활동은 자신들이 계획하고 추구하는 것과 결국에는 맞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들 대놓고 비판할 수 없어서 숨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모임은 언제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면 의인들에게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공개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의인들이 숨기는 유일한 것은 자신이 지나치게 과장될 수 있는 의로운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행을 하더라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의인들이 무언가를 바로잡을 때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고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이 무언가를 비난할 때에는 자신이 기분이 나쁘거나 자신의 유익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이든 저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선인은 열매를 맺으면서 흘러가고 악인은 증오에 사로잡혀서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변함이 없고 최종 목적지도 그대로입니다. 저마다 제 길을 선택하는 법이지요.

누군가를 분별하는 방법

한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그의 복장의 화려함을 보십니까? 그의 용모의 준수함을 보시나요? 그의 말에서 지식을 보고 교육의 수준을 헤아리십니까?

인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첫인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외적인 용모에 따른 것입니다. 그가 멋진 수트를 입고 있는지 아니면 허름한 평상복을 입고 있는지, 혹은 넝마를 걸치고 있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을 순간적으로 분별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식의 정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현란한 말을 꺼내고 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꺼내는지를 살피곤 하지요. 그리고 자신과 수준이 맞는가 아닌가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의도’와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그가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는 우리가 좀처럼 쉽게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많은 위선자들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속이기도 하지요.

사기를 치는 사람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을 속여야 합니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사기치는 사람의 의도를 알아 버린다면 속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기를 치는 사람은 겉으로 꾸밀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꾸며서 내어 놓습니다. 물론 시나리오도 준비하지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의도를 아주 교묘하게 숨겨놓고 가려놓는 것입니다. 속는 사람이 속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선자의 가식을 올바로 분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위선자 본인도 자신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진면모를 알았다면 벌써 스스로 구역질을 느끼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은 장님들입니다. 그들은 선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악을 허용하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선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선을 이용하기도 …

예수님의 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예수님의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당연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와 장소를 이어주는 이 세상의 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지향하는 바, 그리고 당신이 우리를 이끄는 바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그 길을 잘못 오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길을 우겨대면서 자신의 길이 최고라고 내세우고 다른 이들이 걷는 길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서로 싸우곤 했지요.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길을 오해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이들이지요.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이 누구이시고 그분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이 갈리곤 했습니다.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삼고 그분에게로 나아간다면서 저마다의 사욕을 채우는 길로 나아가곤 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은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은 곧잘 누가 더 위대한가를 두고 다투곤 했지요. 자기들 중에 누가 더 나은 제자인가를 두고 언쟁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제자들도 그 길을 올바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것이 최고라고 하면서 서로 다투고 있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본래의 길에서 더욱더 멀어지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로 드러나지요. 장밋빛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어서 이루는 사랑, 자신을 무한히 낮추어서 이루는 사랑이지요. 겸손과 인내와 순명의 사랑인 것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사랑인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길을 내버려두고 전혀 엉…

기쁨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기쁨이라는 것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데에서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충만감입니다. 물론 이 충만감에서 외적인 기쁨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때로는 외적으로 큰 시련 중에 있어도 내적으로는 이 충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요.

세상 사람들은 기쁨을 찾아서 온 세상을 헤메고 다닙니다. 그들은 좋은 음식, 좋은 옷, 편안한 생활, 안락한 환경을 찾아 누리기 위해서 애를 쓰지요.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것을 얻었을 때에는 정작 그것을 누리지 못하지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에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좋지 못한 것은 그런대로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가장 근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으며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슬픔 속에서도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지요.

예수님은 곧 수난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고 따라서 언제나 기쁨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배척 당하고 수난 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둔 기쁨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지요.

아무리 유행어가 재미있고 코믹한 상황이 벌어져도 내면이 공허한 사람의 웃음은 결코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지요. 반면 내면이 충만한 사람은 외적으로 그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아주 사소한 기쁨의 요소를 놓치지 않고 찾아냅니다. 새들의 지저귐이나 아이들의 미소 한번으로도 그는 다시 기쁨의 빛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기도가 이루어지는 방법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사람이 과연 ‘주님, 당신의 수난이고 자시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어떤 고통도 당하지 않게 해주시고 제 사업 번창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미 기도 안에 그의 신앙이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은 채로 하느님에게 청하기 때문에 그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짧은 생각 안에서 나오는 청원이니까요. 누군가가 진실로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면 그의 청원은 전혀 색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수난을 나누어 지고 가는 영광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한마디로 더 고통받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하곤 했지요. 물론 타인의 고통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난이 자신에게 더해지기를 바랬지요.

우리가 청하는 것의 근본을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느님 안에서 청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원하는 것을 청해놓고는 하느님 안에서 청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건 아닌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렇게 제멋대로 청하고서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나중에 반드시 화를 내곤 합니다. 그들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합당하게 청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의 시종에게 뭔가를 청한 것과도 같은 이들입니다.

먼저 예수님 안에 굳건히 머무르십시오.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십시오.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 열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요한 15,5-6)

포도나무는 먹을 수 있는 포도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가지가 굵고 가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열려야 하지요.

예수님이 당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것은 그분에게 달려 있는 우리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더러 겉보기에 굵고 여러가지 장식이 되어 있는 가지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매를 맺을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든 자신들을 꾸밀 생각을 합니다. 마치 자신들을 잘 꾸며두면 열매가 저절로 생기기라고 할 듯이 착각을 하지요.

한번은 돈을 많이 벌면 자선을 하겠다고 나서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 친구가 돈을 그렇게나 많이 번다 하더라도 올바른 의미의 자선을 하지는 못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가진 작은 것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눌 줄 모르게 마련입니다. 설령 나눈다 할지라도 다른 무언가를 얻을 목적으로 나눌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기업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겉꾸민 자선을 베풀고 그것을 온 세상에 선전하는 것과도 비슷하지요.

열매를 맺는 것은 모든 우주의 에너지를 모아서 단숨에 이루어내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열매는 아주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나눔부터 시작해야 나중에는 큰 나눔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희생부터 시작해야 나중에는 큰 희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의 운명도 나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결국 밖에 던져져 메마르게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서 불에 태우게 됩니다. 별 의미 없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표현이지만…

방향과 방식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방향입니다. 그가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으면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령 조금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서로 양보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서로 방향이 다르면 충고해 주어야 합니다. 충고를 하지 않아 그가 그 길로 잘못 나가서 멸망해버리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충고를 했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탓이 되지요.

방향이 그릇되지 않았는데 방식이 다르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파랗게 되어 달라고 하는 것, 물고기더러 왜 너는 물 속에서만 헤엄을 치느냐고 나와서 나무도 기어올라가 보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단순히 옷에 묻은 먼지를 떼어 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요구인 셈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저마다에게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세상에서 이루라는 것이었지요. 누군가는 말을 잘하고 누군가는 잘 듣습니다. 또 누군가는 마르타처럼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데에 능숙할 수 있지요.

우리는 그가 무슨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도달하고자 하는 방향이 같다면 우리는 서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오직 우리 주님만이 완벽하실 뿐입니다. 오른손은 오른손대로 부족함이 있고 왼손은 왼손대로 부족함이 있는 것이지요. 다만 둘이 함께 힘을 모아 일할 때에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복잡다단한 것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버지에게 가는 예수님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요한 14,28)

세상에서 일을 하다보면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습니다. 잃는 것 없이 거저 얻는 법은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육체의 안락을 버려야 하는 법이지요. 만일 육체가 안락한데도 돈을 벌고 있다면 다른 무언가를 잃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양심을 잃던가 정직을 잃던가 하겠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잃게 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큼의 전혀 다른 보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얻게 되고, 또 그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지요.

지금의 우리도 바로 그 부활신앙을 간직한 셈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잃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요. 신앙이 더욱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잃는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내어주고 봉헌하기를 희망하지요. 불편을 감수하고 내적인 충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머물렀던 이가 세상을 떠날 때에 물론 그의 상실을 슬퍼하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죽음 이후에 어디에 머무르게 될지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절망이요 처절한 패배일 뿐입니다.

평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예수님은 당신의 평화를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와 구분하십니다. 통상적인 평화라는 것은 싸움이 없는 정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반란과 폭동이 없고 잠잠하면 평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입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봅시다. 과연 그럴까요? 가난한 이들을 비참함에 짖눌려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할 뿐입니다. 병든 것 나약한 것은 모조리 시설에 수감되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일 뿐입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족들은 조용히 밥을 먹지만 실제로는 그 속내가 썩어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평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셈이지요.

예수님의 평화는 전혀 다른 의미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근본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언젠가는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 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이 내적인 평화를 간직한 이들의 외적인 모습은 치열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나날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직면해야 하고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의 활동을 시기하는 모든 이들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에 대한 언급 후에 ‘마음의 산란’과 ‘겁’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평화를 간직하려는 이들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적으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보장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악마에게 삼켜지는 이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1베드 5,8)

악마가 사람을 삼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모습을 보고 악마에게 삼켜졌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뭔가를 공격해서 집어 삼키려면 약한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심약하고 병약하고 뭔가에 집착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존재를 찾아야 하지요. 재물을 밝히거나 순명하지 않거나 전능하신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는 교만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악마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가 더욱 더 약해지고 엇나가도록 조종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믿게 만들고 하느님에게서 더욱 벗어나게 하지요.

어느정도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악마는 그를 삼키게 됩니다. 그가 궁극적인 오류를 범하게 해서 결코 다시는 회생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악마는 한 영혼을 삼켜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행복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비록 온전히 악마에게 삼켜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을 주변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세상 재물에 눈독을 들이는 이들이지요.

걱정하지 말기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1베드 5,6-7)

베드로 사도는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지요.

우리의 신앙의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지요. 우리가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아버지인 자녀들이 걱정을 한다는 것부터가 신앙이 미성숙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신앙의 미성숙은 우리를 엉뚱한 오류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걱정하기에 다른 대체 수단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하느님의 대체수단은 바로 ‘돈’입니다. 재물을 찾아서 자신의 안정을 추구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모으고 쌓지만 결국에는 모조리 잃어버리고 맙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물질적인 수단도 속수무책이니까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가는 비결은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걱정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도 가장 겸허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는 나머지 것을 하느님에게 맡겨 드려야 합니다.

하나됨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장소에 함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서로 마음이 다른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서 자는 부부가 서로 갈라져 있는 경우도 많지요.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작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 ‘연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연합할 수 있습니다. 우방국이 되었다가 적국이 되었다가 하지요. 저마다의 이득을 바탕으로 상대가 필요할 때에는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올바른 방식의 하나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하나됨은 진리와 정의와 선과 사랑 안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같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개개인의 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같은 곳에 머무른다고 서로 하나라고 착각합니다. 같은 학교,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하나라고 생각하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혀 하나가 아닙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저마다의 이득에 서로 도움이 된다고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을 두고 하나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언제라도 득실이 달라지게 되면 서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밖의 모든 거짓 하나됨은 무너져내리게 될 것입니다. 오직 진리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만이 모든 이를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진보 과정

가장 먼저는 일깨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구석에서 놀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새 옷을 입혀준 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새 옷을 입자 마자 다시 자신이 있는 더러운 곳에서 더럽혀 버리고 말 터인데요. 가장 먼저는 지금 머무르는 곳의 상황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그가 깨달을 수 있도록 충분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태의 심각성을 강조하다 보면 사람이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빛을 비추어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가 스스로 선택할 기반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알고 그리고 희망의 빛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본인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적절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죄악에 머무르기를 고집하게 된다면 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몰라서 그릇됨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는 알면서도 그릇됨에 머물러 있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억지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는 매서운 야수와 같이 ‘정보’를 취득하려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마음도 없으면서 배우기만 하려는 것이지요. 그는 교만에 잔뜩 부푼 사람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더욱 더 교만해 질 뿐이지요.

회개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에게는 진보에 필요한 수단들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계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등학생이 대학 교육 과정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아직 인내도 없는 이가 용서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용서는 기술이 아니라 인내를 바탕으로 지혜와 사랑을 통해서 이르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따라서 무척 신중하게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식별을 위해서 영적 지…

사라져 버리는 것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 21,4)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을 육신이 없어지게 되면 당연 죽음도 없어지게 되겠지요. 인간은 원래 멸망할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음이 들어온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고 나면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죽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전혀 다른 의미의 ‘죽음’이 존재합니다. 영혼에게는 하느님을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육신이 음식이 끊어지고 물이 끊어지면 서서히 죽어가듯이 영혼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나면 서서히 죽은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몸이 죽고 나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듯이 영혼도 죽고 나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영혼의 본래의 기능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영혼은 사랑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오해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의 근원이시고 그 사랑을 외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사랑을 이루셨지요. 사람들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자기들 중에 누가 더 높은가로 다투곤 했지요. 사람들은 자기만 사랑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지요.

인류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사랑의 역사는 각 개개인마다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을 배우고 영원에 건너가게 됩니다. 물론 배움을 잘 마친 이들은 그 사랑을 바탕으로 행복 안에서 살아갈 것이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배우지 못한 이들은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은 마지막 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메세지를 건네고 있지요. 그 메세지는 늘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아버지를 뵙는 것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9)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가시적으로’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앞에 계신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법은 흰 수염을 달고 광채를 발하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법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진 이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외에 어디 다른 곳에 다른 존재가 선을 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등장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이는 같은 하느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봅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다른 이를 보면 기뻐합니다.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다른 이들의 손길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하느님의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선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제자들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당신을 충분히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표지를 받고 싶어합니다. 적어도 장미 향기 정도는 나야, 적어도 하늘의 구름이 십자가 모양은 되어야, 적어도 성모상이 피눈물은 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지극히 속된 마음이며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속임수에 걸려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느…

길은 그리로 가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길은 사라지게 되고 바르고 곧은 길은 남게 되지요. 필요하다면 그 길은 더 정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길이 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자주 왕래해서 길이 넓어지고 좋아졌다고 무조건 좋은 길은 아닙니다. 길이라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곳으로 이끌어야 비로소 진정한 길이 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걷고 싶어하고 실제로 걷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반해 무척이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으려는 길은 뚜렷합니다. 더 많이 가지는 길이고 더 높이 올라가는 길입니다. 더 이뻐지는 길이기도 하고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길이기도 하지요. 이 길은 워낙에 유명해서 억지로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 길을 걸으려 하니까요. 하지만 그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드뭅니다. 사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빨리 도달하기 위해 경쟁한다고 너무나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 끝에 시커먼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수많은 이들을 빨아들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저 그 길의 마지막에 다가가는 이들의 모습이 ‘세속적으로’ 활홀해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지요.

반대의 길은 걷는 사람이 적습니다. 길이 곧지도 않고 험하고 힘들어서 사람들이 좀처럼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들은 그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을 지니고 걸어가고 각 걸음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 길이 이끄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 길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끕니다. 헌데 그 길에는 수난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을 숫제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멀찍이 떨어져서 걸으려 합니다. 심지…

너희는 나보다 높지 않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주인의 왕좌는 십자가이고 그분의 왕관은 가시관입니다. 헌데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걸 원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자리는 십자가 아래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짐작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며 불의하게 다룰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님을 그렇게 다루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악의를 지니고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핍박하고 억압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겪게 될 일들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행복은 일시적이거나 안락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은 영원에 존재하며 세상 안에서의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는 데에서 비롯합니다. 마치 용수철이 눌려지면 더 튀어 오르듯이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꿋꿋하게 간직한 희망은 모두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잃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인내심을 끝까지 발휘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춰지거나 숨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애초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 그 상급을 지급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희망의 때이고 지금은 자비의 때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핍박과 억압 속에서 희망을 키우는 때이고 반대로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자들에게는 회개로 초대하기 위한 자비가 펼쳐지는 때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마음 속에 그 어떤 어두움도 간직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순수하고 정결하게 가꾸어 하느님 앞에 산제물로 바쳐지게 하십시오.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가끔 미사 때에 농담처럼 솔직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러고 있을까요? 왜 제가 이 머나먼 땅에 와서 말도 문화도 다른데 그것을 극복한다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러고 있는 걸까요? 저도 좋은 아가씨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 미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왜 저는 이토록 여러분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기를 쓰는 걸까요? 얼마든지 최소한의 의무만 하고도 살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그 최소한의 의무마저 하지 않으면 주교님이 저를 쫓아내실테니까 최소한도로 일은 하겠지요. 즉 미사만 재빨리 드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미사 이외의 시간은 내 책임이 아니라며 내칠 수 있겠지요. 누가 찾아와서 면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과외의 일이라며 거절하고, 미사 뒤의 성사도 얼른얼른 최소한 주고 말아 버릴 수도 있겠지요. 헌데 왜 저는 이렇게 강론에 힘을 쏟고 미사가 끝나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걸까요?”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정말 왜 저 눈이 찢어진 동양인 사제가 저러고 있을까 궁금하니까요. 그러면 그때서야 대답을 합니다. 뒤에 계신 분(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말이지요.

“바로 저분 때문입니다. 저분이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 일을 절더러 하라 하시니 그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저 분이 아니면 제가 이 일을 계속할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 분을 받아들여서 저와 함께 이 일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만나서 열심히 가르침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몫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구원관에 빠…

같은 빛을 바라보는 이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4-45)

신앙 안에 다른 두 빛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오는 이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성질의 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시각정보를 받아들이고 귀는 음성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귀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눈이 들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람이 세상의 것들에 반응하지 않고 또 지상의 사람이 하느님의 것에 반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우리가 지상의 사람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건너가는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약점’이 존재합니다.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지요. 유혹은 육의 인간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통해서 영의 인간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언제나 ‘유혹’을 통해서 인간을 꾀어내어 그를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영의 인간은 영의 목소리를 찾아서 자신을 드높입니다. 영은 영의 목소리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때에 귀가 솔깃해지고 마음이 이끌리게 되며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언제나 이 두가지가 내면에서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툼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 양자 한가운데에 서서 ‘결정’을 하는 것이지요.

만일 같은 일을 한다고 믿는 두 사람이 일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뭔가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절대로 영의 빛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반대로 육의 대상이 충돌을 하는 것이지요. 즉, 육이 영과 충돌을 하던가, 아니면 양측의 육적인 면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면 그는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10,25-26)

주님의 양이 아닌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마음을 굳건히 해 줄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드러나 있는 증거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생기기보다 의심이 늘어가는 셈입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제 뜻에 맞는 증거’이고 달리 이야기하면 그런 증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그런 이들이 찾는 증거를 조작하는 데에 능숙해서 그런 이들은 결국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면서 그것이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판을 치는 것들이 속이는 자들이고 그 속이는 자들에게 따라간 무리들이 형성하는 ‘이단’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드러나 있는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하는 말과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서 그분을 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말과 우리가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를 걱정해서 하는 말 속에 들어있는 진실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기적적인 일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은 술 많이 먹지 말고 일찍 들어오세요.’라고 부탁하는 아내의 말은 무시한 채로 세상의 종말이 닥쳐온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현상이 아니라 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한 사람이 어둠의 성향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기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영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진실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둑과 목자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말일까요?

훔치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있어야 합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몫이고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언제나 다가와서 하느님의 몫을 훔쳐내려고 합니다. 훔치는 행위는 언제나 몰래 이루어집니다. 누가 대놓고 보란 듯이 훔쳐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근슬쩍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지요. 보란 듯이 드러나는 악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은근슬쩍 이루어지는 은밀하고 내밀한 악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양들은 생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하느님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그 양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생명을 없애려고 합니다. 죽어있는 것을 다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받고 태어났고 우리의 순수와 맑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들은 언제나 그러한 것들이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생명력을 잃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멸망시킨다는 것은 굳건히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력을 잃고 파멸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철저히 생명과 정반대의 성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둑의 역할이지요. 그러나 도둑은 이 모든 과정을 몰락하는 본인이 알지 못하게 합니다. 

이미 살아있는 양들이 무슨 생명이 또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생명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행복감을 느낄 때에 내면으로 느끼는 그 생기가 바로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물론 이 생기를 전혀 다른 육체적 쾌락과 혼동하는 이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은 전…

성소주일

성소(聖召)는 ‘거룩한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또다시 특별한 역할에로 부르심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제와 수도자가 되는 이들이지요.

이 부르심은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에서 주도되는 것이고 인간이 응답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르는데 응답을 하기 싫어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 부르심을 받아야 하는 쪽에서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부르심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부르심은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사제의 ‘특권’처럼 보이는 것들을 부러워합니다.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은 참으로 고상해 보이고 또 편안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편안하고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부름받은 처지를 끊임없이 무시해야 하지요. 마치 게으른 종처럼 자신이 원래 해야 하는 일을 잊고 주인의 집에서 매일 먹고 마시고 취하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에게 결국 다가올 일을 잊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이유는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당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것이지요. 사제는 그 고유의 성사 거행과 가르침을 통해서, 또 수도자는 기도와 봉헌의 생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만일 한 사제가 진정으로 성사를 거행하려고 하고 가르침을 전하려고 한다면 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가르침을 확고히 하려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지키지도 않는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수…

세상에 기대하지 않기

세상이 모든 선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부터 비롯합니다. 우리가 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을 반영해 내기 때문이지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선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몫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고도 ‘저희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합당한 자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막 대하시는 분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자리에 앉히고 당신이 나서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실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약점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약점을 핑계 삼아서 악을 행하는 사람도 있지요.

여전히 사람들은 이를 올바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상대가 하는 일의 근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지요. 오히려 그가 나와 코드가 맞는가 아닌가를 먼저 살핍니다. 하지만 그 코드라는 것이 진실과 정의에 바탕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준점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지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세상 안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작이고 그것이 마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인정을 요구하는 사람은 점점 세상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길을 엇나가게 됩니다.

이방인의 나라에서 선교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미 이 세상은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힘들게 만들고 있고, 더욱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이미 태초부…

환난을 겪은 이들의 지복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요한 7,14-17)

묵시록은 희망에 대한 서사시입니다. 물론 전부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적은 것이지만 지금의 지상의 우리들이 이해할 수준으로 적힌 것이지요. 물론 그마저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수두룩하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큰 재난을 겪은 사람들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환난을 겪어낸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즉 자신들은 큰 선의를 지니고 다른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악해서 쓰디쓴 고난을 겪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큰 사고가 나서 희생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큰 일이 없더라도 환난을 겪는 이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곧잘 자기네들 기준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그것을 떠들어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정한 영웅적인 내면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고 사회적인 이슈가 된 문제에 관심을 갖지요. 이란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도 별 관심이 없다가도 자기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불의한 일을 당하면 들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환난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불행한 이들이 아닙니다. 참된 환난은 온갖 거짓과 불의 속에서 하느님을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신…

구원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사도 13,46-47)

바오로 사도의 이 선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1. 말씀은 누구에게나 전해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전해집니다. 이 말이 곧 사제가 모든 이를 찾아가서 교리서를 들고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고 이 진리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전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마시는 아빠에게 어린 아들이 가서 ‘아빠, 이제 술 좀 그만 드세요.’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진리와 사랑에서 기인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이는 그 말을 더 귀담아 들을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어두움 속에 사는 이들은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2.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다.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을 배척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에서 그 누구도 제외 시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배척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이루는 핵심 역할을 담당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3. 호의는 거두어지고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하느님도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 선택된 백성이 어느날 이방인이 될 수 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이방인이던 이들이 어느날 새로이 선택된 백성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고정적인 선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담뿍 받은 이들이 그것을 누차 거절하면 결국 그 사랑은 다른…

진정한 이를 알아보는 방법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69)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기초적으로 그의 외모를 살필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옷은 어떻게 입고 있는지, 어떤 메이커를 입고 있는지. 그리고 용모는 단정한지 아니면 뭔가 흠이 있는지 등등이 있겠지요.

다음으로는 그가 지닌 지식의 범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술술 풀어내는지를 살펴볼 수 있겠지요. 또 감정적으로도 안정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건건 흥분을 하고 화를 내는지 아니면 침착하고 상냥한지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마지막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부분이고 영원에 관계된 부분이지요. 이 부분은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드러내는 곳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는 쪽도 중요합니다.

영혼의 진실성, 영혼의 본모습은 단순히 한 사람이 그것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합당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올바르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을 보여줘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면 그것이 올바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한 이가 본심을 숨기고 자신을 드러낼 때에 받아들이는 이는 별다른 생각과 의심 없이 그 겉모습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래서 ‘위선’이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했고, 또다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으며 오직 당신의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보았을 뿐입니다.

참된 것을 알아보는 방법은 먼저 우리의 눈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혼을 알아보는 방법은 우선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진정…

세월호

멀리 산다고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마음이 차가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죄없는 아이들이 생매장을 당했는데 그걸 떠올려보며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매번 기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유심히 읽어보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에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을 찾아 보았지요.

재난이나 사고는 늘 터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터지는가가 문제겠지요. 누구나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일이 벌어지는 것에는 전혀 다른 요인이 있는 법입니다.

세월호는 가슴 아픈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원치 않은 임신으로 태어나서 둘 다에게 버림을 받고 할머니 손에서 길러지다가 같은 가족인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렇게 자라서 이미 어른이 된 이를 저는 이곳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곤 합니다. 그러면 제가 할 일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신앙을 전하며 그 슬픔 속에 숨겨진 희망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비록 세월호 가족의 손을 잡아줄 순 없지만, 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세월호’ 가족들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강론대에 서서 힘있는 자들의 교만을 꺾고 가난하고 미천한 이들을 들어높이고 나면 미사가 끝나고 그에 도움을 받은 이들의 미소를 얻고, 또 고해소 안에서는 그동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이들의 뉘우침을 듣게 됩니다.

세월호를 보살피고 재발을 막는 방법은 매번 드러나는 기사에 그때마다 흥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삶을 정의롭고 선하고 책임감 있게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무능한 정부를 욕하면서도 정작 나의 가족이나 공동체에 사건이 일어나서 내가 가장으로서 또는 엄마로서 무능하게 대처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다른 유형의 세월호 피해자를 양산하는 셈이 됩니다.

세월호가 가슴 아프다면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다른 이들이 가슴 아프지 않게 돌봐야 합니다.…

인간의 찬사를 바라지 않기

우리가 육신을 지닌 인간인 이상 공간적인 존재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 이상 한 사람이 두 공간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누군가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와 함께 머물러 있는 이들과 그와 함께 머무르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추상적으로 말해서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예를 들어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좌 신부님을 가운데 두고 늘 교사회와 청년회가 다투곤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많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갈림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보좌 신부님이 동시에 두 공동체를 보살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측이 분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양자를 보살피거나 아니면 아예 양측 모두에 관심줄을 끊거나 할 수 있습니다. 어정쩡하게 하다가는 언제나 군소리가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간인 이상 상투를 틀고 어깨춤을 추더라도 모든 이의 기대를 완벽하게 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대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목자는 언제나 실패하게 됩니다. 모든 이에게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목자는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원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일할 때에는 일을 하고 놀 때는 놀고 도움을 청하는 이에게는 도움을 주고 충고가 필요한 이에게는 충고를 하면 됩니다.

인간적인 찬사를 받기 위해 아둥바둥대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쓸데 없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구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지금의 생활과 가장 밀착된 비유를 쓰곤 하셨지요. 당시에 포도나무는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포도나무의 비유는 제자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포도나무가 어떻게 생겨 먹은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 사명이 우리 사제들에게 전해진 셈이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알아듣기 쉬운 방법을 강구하고 찾아내어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휴대폰과 같은 수단으로 비슷한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스마트폰은 거의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비슷한 비유를 들 수 있겠지요.
쳐냄과 손질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의 운명과 열매를 맺는 가지의 운명을 다르게 표현하십니다. 하나는 쳐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질하는 것입니다. 가지를 쳐내고 나면 그 가지는 더는 줄기의 수액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메말라가고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게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열매, 즉 사랑의 열매를 합당하게 맺지 못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쳐내 버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갈수록 메말라가는 것이지요. 반면 손질하는 것은 더 훌륭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손질 당하는 가지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잎새가 잘리고 잔가지들도 잘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더욱 훌륭한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지상의 것들을 희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됨 예수님은 당신의 말로 제자들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끗하게 할 때에는 주로 ‘물’을 사용합니다. 맑은 물을 부어서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지요. 마찬가지 작용이 영혼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은 물과 같은 가르침을 얻게 되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

예수님과 함께 다닐 수 없는 이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 6,66)

사실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비되어 있던 일이 때가 되어 일어났을 뿐입니다.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둠은 어둠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빛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에 어둠은 빛으로 변모하지 못하고 더 큰 어두움으로 돌아설 뿐입니다.

성당에 나온다고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사람은 결정을 하게 되고 하느님을 따르던지 아니면 세상에 남던지 하게 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보면 그분의 외모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 그분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는 일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겉모습과 행위와 더불어 드러나는 그분의 핵심적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아야 할지를 분명히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양심의 영역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생활, 아니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상하게 성전에 들어가서 고요를 즐기고 나와서는 우아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봉사 활동까지 참여하지만 근본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함부로 내려놓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정적인 때가 되면 가면을 벗게 됩니다.

과연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표현이지만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에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원수마저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소한 용서조차도 하지 못하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

영과 육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3)

어떤 아버지가 아들 생일날이 되어서 백화점에 가서 가장 비싼 선물을 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에게 던지듯이 선물을 주고는 ‘그거 제일 비싼 거다’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이런 선물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다만 아버지의 작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 아버지는 육적인 선물만을 줄 줄 알았지 영을 보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영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모든 육적인 것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앞의 비유로 돌아와 봅시다.

어떤 아버지가 영적으로 자녀를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생일날이 다가오면서 아들에게 미리 다가가서 평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아들은 평소에 늘 하던 대화이기에 스스럼없이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기억 속에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생일이 되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특별한 날을 준비합니다. 아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물건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초대하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집에 들어서는 아들을 꼭 안아줍니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육으로 두 배의 열심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육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래를 하지요. 만일 전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반항하는 모습을 보면 당장에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니, 내가 백화점에서 가장 비싼 선물을 줬는데(나는 아들에게 값을 지불했는데),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거야?(아들은 나에게 이런 상품을 판매하는 거야?)’
아버지의 생각은 거래일 뿐입니다. 사랑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 놓으셨고 여전히 내어놓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도 모든 것을 다 쏟아서 그분을 돕고 있지요. 우리는 영으로 하나인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영은 생명을 …

내 몸을 먹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3-56)

과연 예수님은 어느 선까지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당신의 살과 피를 마시라는 것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일 뿐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마셔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가톨릭 신앙의 중심에는 ‘미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 미사 안에서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고 굳게 믿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마태 26,26)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마르 14,22)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

이로써 당신이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빵’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몸을 직접 먹으라고 내어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에 있습니다. 과연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이 빵을 제대로 모시고 있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의 빵이고 신앙의 빵을 단순히 육적인 빵으로만 모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외아들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간단한 예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우리 집에 모신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분을 집에 초대하게 된 이는 집을 어떻게 준비할까요? 지극히 정성스럽게 꾸밀 것입니다. 당연히 더러운 것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겠지요. 그분이 와서 머무는 자리마다 꽃으로 치장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외아들이 들어오시는 우리는 어떤 상태에 머물러야 할까요? 우리는 내면을 깨끗이 청소해 두어야 합니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