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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정말 와보고 싶습니까?

사실 저야 익숙해져 그렇지만 만일 한국의 누군가를 갑자기 이리로 데려와서 제가 하고 있는 삶의 범위에 동참시키려 한다면 그에게는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을 것이며 대화도 힘들고 여러가지 문화적 차이로 불편하겠지요. 더군다나 제가 종종 올리곤 하는 식사 초대에 직접 데리고 가서 함께 음식을 나누게 하면 자신이 상상하던 사진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실제의 상황에 굉장히 힘들어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보지만 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종종 부러워하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지어는 제가 사는 환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인간이 온전히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여러가지 부정적인 모습과 불편이 싫어 세상에 나간다지만 그곳이라고 완전히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순히 하나의 지표를 놓고 보면 어느 나라인가 분명 나은 곳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한국은 치안 수준이 굉장히 높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지표를 놓고 보면 한국은 그야말로 헬조선이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건 우리의 외적 환경을 뒤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투덜대는 사람은 투덜댈 것이고, 어딜 가든 행복한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아마 지금의 시대는 이제 사람들이 내적인 충만을 꿈꾸고 영성을 찾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향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충만하게 해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보물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내적 충만함을 선물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영원을 바라보게 하고 모든 것들의 참된 가치를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지극히 작고 소박한 것으로도 감사하고 기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 보물을 누가 지니

두 영혼

내적 힘이 충만해서 빛을 발하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간신히 숨쉬는 죽은 듯이 살아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외면은 그것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충만한 영혼은 겸손으로 그것을 감추고, 거의 죽어가는 영혼은 온갖 치장으로 그것을 감춘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알고 있다.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이다.  충만한 영혼은 내적인 기쁨이 충만하다. 그의 외적 환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외적으로는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잠잠하고 고요하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 가까이에 머무르면서 쉴 수 있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되새김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외면은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언제나 문제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전혀 그런 문제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힘 닿는 데까지 주변을 돕는다.  반면 내면이 거의 죽어가는 영혼은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쾌락으로 가득하다. 그는 먹고 마시고 취하고 하는 일에 열의를 쏟는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흥을 위해서 언제나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는 모으고 쌓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공허해질 뿐이다. 그는 나눌 줄을 모르며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을 마치 자신의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것인 양 질색을 하곤 한다. 특히나 이런 미천한 처지의 사람들은 자신의 본질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장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면 길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조언하는 이들 마저도 공격적으로 대하기가 일쑤이다. 물론 그 조언은 내면이 충만한 자에게서 나온다. 내면이 충만한 이들은 애써 조심해서 조언을 하지만 번번이 그 조언이 내쳐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합당한 사랑을 받기는 커녕 도리어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경험을

복잡한 인생을 되돌리기

큐빅 블록을 정해진 법칙 없이 마구 돌리면 돌릴수록 더욱 수가 복잡해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길도 있는 법입니다. 그 조심해야 할 길을 마구잡이로 걸으면 우리는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되고 다시 되돌리기가 참으로 힘들어지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선의를 내비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십니다. 아무리 극악 무도한 죄인이라도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결국 최종적인 결단은 우리 스스로에게 달린 셈입니다. 지금 가는 길에서 다시 참된 길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그냥 우유부단하게 머무르면서 우리의 어둠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의 몫인 것이지요. 사제로 일하면서 도와 달라는 사람을 많이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이 사제를 찾는 것은 일이 진행되기 시작하는 때가 아니고 거의 결단이 난 무렵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즉,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면서 지혜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고 으깨져서 너무나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야 사제를 찾는 것이지요. 그나마 이곳 남미에서나 그렇게 합니다. 한국 같으면 이미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가’를 찾아 갔겠지요. 우리의 어두움은 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신에 비난을 돌리고 심리에 비난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

찰흙으로 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찰흙은 꾹꾹 눌려져서 형태가 빚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찰흙은 그 압박을 견뎌내어야 하지요. 그리고 불의 시련을 견뎌내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토기가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서 다가오는 시련들은 모두 그 의미가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라면 우리의 시련들은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우리의 시련들은 우리에게 훈련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시련이고 고통입니다. 이 문제를 붙들고 어찌할 줄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두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 대로, 또 힘든 것은 힘든 것 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진실로 당신의 찰흙을 다룰 줄 아는 장인이시니까요. 왜 모든 그릇이 똑같지 않으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컵으로 밥을 먹을 수 없고, 술병으로 국을 끓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마다의 용도가 분명히 있고 세상에 필요없는 그릇은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빚으시는 하느님에게 오직 감사드려야 할 뿐이지요. 때로는 우리가 겪는 불행이 남들의 불행보다 배나 힘들어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치를 잘 알고 계시며 저마다에게 합당한 몫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극심한 불행이 우리를 보다 큰 죄에서 보호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시련이 닥칠 때에는 우리가 절대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요.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여행자입니다. 순례객이지요. 우리의 여정은 긴 듯 하지만 영원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짧은 것입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고(믿음에서 사랑까지)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2베드 1,5-7)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믿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믿는 마음이 없이는 그 밖의 어떤 것도 우리 내면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하고 의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첫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에 덕스러운 생활을 더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믿으면서 사랑을 쌓아야 하고, 진리의 하느님을 믿으면서 정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굳게 믿는 바를 직접 삶으로 실천하면서 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알아 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활동에 전문 지식이 존재하듯이 신앙에도 알아야 할 많은 것이 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받고는 그 뒤로 전혀 신앙을 배우지 않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배워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다 더 충실하게 나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기계를 경험으로 다룰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모든 메뉴얼을 숙지하면 더 많은 기능을 발견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앎은 언제나 ‘교만’을 불러오곤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하며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에로 뻗어 나아가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언제나 절제를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정도 영적인 삶이 지속되면서 필요한 것은 꾸준한 인내입니다. 인내심이 없이는 마냥 돌고 도는 것 같아 보이는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막연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나사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더욱 깊이 박히듯이 우리의 삶도 더욱 깊이 박혀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나면 ‘신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상의 사정들만을 바라

소출의 얼마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마르 12,2) 포도밭은 포도를 내는 곳입니다. 마음밭은 마음을 내는 곳이지요. 포도밭이 마음밭의 비유로 쓰였다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씨앗과 밭을 비유로 삼아서 말씀이 심겨지고 열매가 맺는 것을 비유를 드셨지요. 하느님은 때로 우리에게서 소출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소출을 받아오라고 일꾼들을 보내시지요. 바로 당신의 예언자들이고 사도들이고 제자들입니다. 말씀에 봉사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소출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뿐더러, 나아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 탐욕과 이기심 속에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자들로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지게 되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은 그저 남녀간에 서로 이끌리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 예수님의 표현대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왜 자신이 희생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일종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대로 사랑을 하려면 내가 지닌 것을 내려놓고 나를 소모하지 않고는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닌 것을 온전히 보존하려고 들면 절대로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내어주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참된 용서는 일종의 자기 희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기를 힘들어 합니다. 세상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기에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을 다 기워 갚아야 용서라는 것을 비로소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바라는 용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참된 용서는 진정한 자기 희생이 되는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루카 9,16)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지상의 것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떠올릴 여유도 없는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온갖 지상의 일에는 정신을 쏟지요. 그야말로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은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상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천상은 지상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천상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고 보잘 것 없는 행동이라도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구하면 천상적인 행위로 변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진심으로 하고 성심껏 하고 사랑을 다해서 하면 심지어 밥을 먹는 행위 하나도 거룩한 행위로 변할 수 있게 되고 기적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빵을 수천배로 불리는 기적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기적은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기적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눌 줄은 모르는 채로 여전히 자신의 몫을 불리는 기적 만을 갈구합니다. 그러니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달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그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꼴이 됩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을 기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우리의 마음 안에 내려오게 되고 우리가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통해서 수많은 이들을 배불릴 수 있는 천상의 존재로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참 소중한 당신(2016년 5월)' 제5화 볼리비아 교회의 성소

볼리비아의 제가 머무는 산타 크루즈 대교구에는 성소 부족이 큰 고민거리입니다. 비단 저희 교구 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제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동양인 사제까지 와서 선교를 하겠습니까. 이곳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사제성소를 꿈꾸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소 대상자 본인들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주 이른 시절부터 이성교제를 체험하고 성경험까지 있는 와중에 독신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가 젊은이들의 흥미를 끌 리가 없습니다. 아예 순진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혼자 살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은 정말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한 편으로 성소 대상자 가정의 문제도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자신의 자녀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집의 일꾼이 하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의 생각 안에는 자신의 자녀들은 일종의 미래를 향한 보험이고 투자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노인 연령층에 대한 복지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녀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보험인 셈이니까요. 그래서 가끔씩 일어나는 성소에 대한 바램도 부모의 선에서 적극적으로 차단 되곤 합니다. 나아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제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올바른 사제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술을 진탕 마시는 존재로, 결혼만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을 마음껏 하는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마주하는 사제에게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지지부진한 강론과 지루하게 반복 되기만 하는 전례, 무언가 영적인 양분을 얻고 기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오는 미사는 결국 성소의 싹을 그 씨앗부터 말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외국에서 오는 사제들은 정반대로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

'참 소중한 당신(2016년 4월)' 제4화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제4화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도시 빈민가라서 부자들이 오지 않는 곳입니다. 부자들은 겁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에게서 더러운 것이 묻을까 걱정하고 행여 이상한 병이라도 옮을까 주의하며 가난한 이들을 기본적인 교양도 없는 자신들이 지닌 재물에 탐을 내는 도둑이나 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해서 도둑과 강도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선입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도둑과 강도는 없는 이의 것을 착취하고도 나눌 줄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진짜 도둑과 강도는 오히려 부자들 사이에 더 많습니다. 우리 동네로 오는 길에는 아주 고급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곳이지요. 헌데 그 곳에서 망자를 위하여 장례를 집전해 줄 사제를 물색하다가 도시에서는 찾지 못하고(다들 귀찮아서 바쁜 척을 하니까요.) 결국 제가 사는 본당까지 찾아와서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서 장례예식을 거행해 주었지요. 헌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서 나름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지요. 어느 날, 그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느 부유한 가정이 하나 있는데 제가 가서 집 축복식도 해 주고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도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의아하긴 했지만 가보기로 했습니다. 알고보니 한 5살 정도 된 여자 아이가 죽었는데 그 가족들을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집은 보안업체에서 경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아주 값비싼 부자 마을이었습니다. 집도 2층 집이었지요. 헌데 아이가 집안에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놀다가 그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에 목이 걸려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성에 대해서, 영혼의 존재와 그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그 딸아이는 부모님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고 별다른 죄

받았다고 믿기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 11,24) 아버지의 전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청원은 이미 그 순간 아버지에게 들려진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사안이 절실한 것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시간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며, 만일 아버지가 보시기에 그 청원에 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 같으면 그 또한 그리될 것입니다. 천만원을 달라고 그래야 그 돈으로 내 처지가 나아질 수 있다고 우리는 분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선에는 전혀 다른 지혜가 이루어질 수 있고 따라서 전혀 다른 결론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소원을 이루기보다 전혀 다른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를 듣지 않아서 그 소원을 이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시는 셈입니다. 사탕에 맛이 들어 사탕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청원을 부모는 그 순간 듣지만 그 사탕을 매 순간 사다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를 도로 그릇되이 형성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요. 부모는 아이의 청원을 들었고 아이가 사탕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사탕을 사다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건강을 상하지 않게끔, 또 아이가 사탕에만 매달리지 않고 그 사탕을 통해서 또다른 더 소중한 가치를 배우게끔 준비할 수 있지요.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은 이미 받은 셈입니다. 물론 내가 바라는 그 자체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받는 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우리가 잘 된다는 기준이 때로는 너무 세속적이라서 아버지께서는 그 청원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수는 없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달라는 사람에게 성령을

기도의 집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르 11,17) 강도들은 자기 소굴에서 무엇을 할까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일을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목표물을 물색할 것입니다. 어느 집이 돈이 많은지 어느 상인이 어떤 길을 자주 이용하는지 등등 자신이 지닌 정보들을 나누고 그것을 바탕으로 범행 대상을 고르겠지요. (비난, 증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짤 것입니다. 누가 앞장서서 망을 보고 누가 칼질을 잘하며 누가 경호원을 제압할 것인가 등등을 서로 계획하겠지요. (악의) 그리고 악행을 저지르고 돌아오면 전리품을 나누기도 할 것입니다. 강도질을 해 온 물품들을 서로 맡은 역할에 따라 몫을 나누겠지요. (탐욕) 때로는 술판과 온갖 향락이 벌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약탈하는 이유는 번 것으로 즐기기 위함이니까요. 그들은 잔뜩 먹고 마시고 취할 것입니다. (무절제) 그리고 서로 다투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더 높은 지위에 앉는 것이 목표이고 궁극적으로는 두목이 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하하고 시기하고 서로 간에 살인을 저지를 아주 음흉한 계획도 짤 것입니다. (시기, 증오) 기도하는 집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집을 찾습니다. 헌데 때로 이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모여서 수근대면서 누군가를 험담하고, 비록 재물을 빼앗지는 않더라도 그의 명성을 무너뜨리고 또 하찮은 감투와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세속적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셈입니다. 이는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전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릇된 의도를 품고 다니면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몸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셈입니다. 온갖 어둠의 영들이 그

육적인 욕망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1베드 2,11) 모든 육적인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필요한 욕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듬고 챙겨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모든 욕구를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정당하고 필요한 욕구들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생리욕, 수면욕 등등의 기본적인 모든 욕구들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책임있게 가꾸아 나가기 위해서 필요하고 정당한 욕구들입니다. 다만 그 욕구들이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걸어오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밥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몸에 적절하게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탐식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즉 미적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이미 배가 잔뜩 불러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음식들을 먹겠노라고 나서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욕구들을 대하면서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욕구는 무턱대고 나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종류의 욕구는 모조리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성적 문란을 야기하는 음란물은 안된다고 하면서 식욕 문란을 야기하는 음식 프로그램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찾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잔뜩 먹어 살이 찌고 나서는 다시 몸무게를 줄이는 방안을 찾으려고 난리를 치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영혼을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셈입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여러가지 미끼를 던집니다. 누군가는 성적인 것에 약할 수 있고 누군가는 다른 욕구들에 약할 수 있지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이라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까지 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모든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비집고 들어와서 우리를

참 소중한 당신(2016년 3월) 제3화 현실을 직시합시다.

선교지에서 살면서 자칫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변만 바라보고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언어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착각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이가 세금 내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차 할부금을 값을 걱정 없이 집에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차를 타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언젠가는 닥쳐올 현실인 것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현실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당에서 언제나 싹싹하고 다정다감해 보이며, 한인 사제들이 필요한 것을 늘 챙겨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에 대한 첫인상은 너무나 긍정적인 것이었지요. 한인 사제들이 보기에 그 아이는 아무런 흠도 티도 없는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아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지요. 그 아이는 보이는 데에서만 그렇게 활동하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원하는 것이 뚜렷한 아이였습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과의 밀착이었지요.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도 한 몫 했습니다. 한인 사제들이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한인 사제들이 하는 활동들이 꽤나 대외적이라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그 아이는 한인 사제들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이 아이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복사단 활동을 같이 하던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그 아이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고, 또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성가시거나 귀찮은 모임이 있을 때에 그 아이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재미나고 신나는 모임에는 언제든지 빠지지 않았지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만한 일이면 나서서 하다가도 청소라던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활동 앞에서는 도망가 버리곤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본색은 드러나고 말았지요. 그러나 여전히 기회가 닿는 대로 새로 오는 신부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는 듯한 모습을

'참 소중한 당신(2016년 2월)' 제2화 저는 선교사입니다.

제2화 저는 선교사입니다. 과거 제가 선교에 대해서 지니고 있던 첫인상은 ‘부담스러움’이었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대놓고 길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성당에 가자고 졸라대는 제한된 모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길에 나가서 선교하자던 운동의 영향도 컸습니다. 참된 선교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제 마음 속에 그런 부담스러운 첫인상이 박혀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언제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 정말 용기가 엄청난 사람이 하는 특별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가득했었습니다. 다른 말해 선교는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했지요. 서품을 받고 나서 새 사제 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루 동안 교육을 받고 길거리에 나가서 선교를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저로서는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었습니다. 저부터도 길거리에서 저에게 다가와서 전단지를 불쑥 내미는 사람을 만나면 참 어색하고 부담스러움을 느꼈기에 당연히 제가 직접 나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선교책을 내미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해보고 나서는 이런 종류의 선교는 제 성격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의 각 부분이 저마다 맡은 역할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합당한 선교의 자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눈은 사물을 바라보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코는 냄새를 맡으라고 있는 것이지요. 손은 물건을 붙들고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고 발은 바닥을 디디고 온 몸을 떠받치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합당하게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온 몸은 같은 방향을 향해서 걸어가지만 그 걸어가는 동안 눈은 앞을 주시하고 코는 냄새를 감지하며 손은 필요한 일을 하고 발은 열심히 온 몸을 지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교를 하지만 누군가는 최

'참 소중한 당신(2016년 1월)' 제1화 볼리비아를 소개합니다.

제1화 볼리비아를 소개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마진우 요셉 신부라고 합니다. 저는 볼리비아라는 나라, 산타 크루즈라는 지역에 2008년 여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먼저는 여러분들이 제가 사는 배경인 볼리비아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간략한 소개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볼리비아는 북쪽에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남반구에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남아메리카(남미)라고 부르지요. 남아메리카에는 여러 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 마치 심장처럼 끼여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볼리비아이지요. 한국과의 시차는 13시간이고 언어는 스페인어를 씁니다. 주변으로 페루, 칠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둘러싸고 있고 따라서 바다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리 신선한 해산물과 바다생선회를 먹고 싶어도 구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기껏해야 냉동 연어를 구할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값이 비싸서 먹기가 힘이 듭니다. 볼리비아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제가 속속들이 다 다녀보진 못했지만 제가 사는 곳 주변만 대충 둘러봐도 우리나라의 70년대 정도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큰길에서 마차가 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곤 하지요. 하지만 묘한 것이 젊은이들은 벌써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생활이 가난한데 문화적인 수준은 급상승하는 셈이지요. 인터넷 안에는 무슨 정보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 양자의 격차가 얼마나 심할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요.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판자촌인데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문화와 정보는 미국의 헐리우드인 셈이니까요. 거기에서 비롯하는 세대간의 문화적 충돌도 적지 않습니다. 볼리비아의 이런 모습에는 그 배경에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미 전체가 수백년간 유럽의 식민지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럽 사람들은 이곳에 침입해 들어와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약탈했고 또 그들의 씨앗도 뿌려 놓았지요

성경을 읽는 방법

- 신부님,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첫 인간이고 카인과 아벨이 그 자식인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랑 결혼하고 어떻게 살아가나요? - 창세기의 이야기는 역사나 과학적 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과 진리를 담고 있지요. 창세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우리의 육신은 흙이라는 재료에서 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 만물을 책임있게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것도 가르치지요. 또한 인간은 자신에게 허용된 수많은 것들을 다 제쳐두고 하느님에게 반항하는 어긋난 길을 선택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어요. 우리는 정당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두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고, 수많은 허용된 올바른 관계를 두고 간음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창세기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고 있는 같은 현실을 재조명하고 참된 진리로 서술해 둔 것이랍니다. 예컨대 부족 간의 전쟁도 마찬가지지요. 그 수많은 살육 안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세력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를 때와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때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세상의 유혹과 하느님을 향한 길 사이에서 거의 전쟁을 치르다시피 살고 있고, 그 가운데 하느님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는 사람의 운명과 그 길에서 벗어나 세상의 유혹을 따르다 멸망하는 이들의 운명을 잘 살펴볼 수 있지요. 성경은 그 안에 들어있는 영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학교를 다닐 때에 참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였습니다. 강의록은 굵기가 어마어마한데 결론은 ‘삼위일체는 신비의 영역이라 알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적 형식은 존재합니다. 즉 본체로서는 한 하느님이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다만 그 강의록은 거의 전체가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가 아니다’라는 호교론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럼 삼위일체는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할 때에 그러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어구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삼위일체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사랑할 때에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파서 날밤을 새우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심리 행동 분석과 통계적인 자료를 제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논문 작성자는 어머니의 마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셈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문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날밤을 새어볼 때에 비로소 그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삼위일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사랑은 빨대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적인 그 사랑의 빨대로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물을 끌어당기는 셈이지요. 사실 우리가 우리의 하찮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련한 의지는 하느님의 거대한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고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그 일을 도우려고 하지요. 삼위일체의 사랑이

(가칭)준모성범(원제 La Imitación de María)

1장 아베 마리아 1. 나의 모든 공적이 사라지고 나 스스로를 수많은 죄악의 수인(囚人)으로 여기면서 저를 주 예수님 당신 수난에 의탁하나이다. 또한 가장 영광스러운 동정녀이시자 당신의 어머니인 성 마리아의 공로에도 저를 의탁하나이다. 2. 성모님에 대해서 묵상하며 그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3. 그리하는 까닭은, 제가 도무지 누구이기에 허락도 없이 감히 마리아에게 다가갈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 나의 부당함을 잘 알고 있나이다. 성모님께서는 제가 다가가는 것을 얼마든지 가로막으실 수 있나이다. 성모님은 천사들이 감탄에 차서 공경하는 분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세상의 사막에서 오르는 이 분은 누구신가? 그분은 낙원의 기쁨에 가득 차 있으시네.” (Cant VIII-5) 5. 이로 인하여, 꿀같이 단 마리아여, 저는 당신의 영광과 순결,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가늠할 자격이 없나이다. 6. 왜냐하면 저는 먼지와 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먼지와 재보다도 미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죄인이고 악에 기울어 있기 때문이옵니다. 7. 반면 당신은 하늘보다 높은 분이시옵니다. 당신의 발판 아래 세상을 두고 계시나이다. 또한 당신 아들의 명성으로 인해서 모든 존경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8.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자비는 모든 인간적 계산을 초월하고 저를 당신에게로 끌어당기며 저의 애정을 사로잡나이다. 9. 이는 당신께서 슬픈 이들의 위로이시며 언제나 사랑스러이 비천한 죄인들을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10. 사실 저는 모든 종류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나이다. 특별히 당신 아들의 은총이 필요하나이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저를 돕기에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11. 하지만 당신은, 오 자애로우신 어머니시여, 행여라도 저의 초라함을 굽어 보실 수 있으시다면, 수많은 방법으로 저를 구

간음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르 10,11-12) 본당 신자들에게 간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 간음은 행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로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비록 혼인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미 한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고서 다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을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간음은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을 지니고 나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다른 것에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그 또한 일종의 간음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혼인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이것은 문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결혼한 두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또다시 새로운 관계를 탐닉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위중한 죄가 됩니다. 사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관계의 결과가 과연 어떠할지 말이지요. 한번 불충실한 사람이 새로이 충실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랑은 의지의 선택이고 헌신이지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번 조건을 따져서 선택을 변경하면 나중에 조건이 새로이 바뀔 때에 또다시 변경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잠깐 언급했지만 사랑은 헌신이고 결정입니다. 사랑은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나의 배우자를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어떤 상태이건,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건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화

돈이라는 것은 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이라는 것은 목마른 존재를 축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온 천지에 골고루 퍼지는 것이지요. 헌데 그 물을 자기 혼자 누리겠다고 꽁꽁 싸매고 있으면 그 물이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을 간직하는 이유는 가뭄에 나누기 위해서이지 고여 썩게 만들어 모기가 들끓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재화라는 것은 홀로 누리겠다고 간직하고 있으면 썩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썩은 물을 마시는 존재는 함께 파멸을 맞이하게 되지요. 물은 흘러야 하고 필요한 곳에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수지는 필요한 것이지만 가뭄에도 물을 나누지 못하고 온통 물을 꽁꽁 간직하고 있는 저수지는 썩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사랑이 거슬릴 때…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챙겨주고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랑이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예 다른 곳을 향해 가 있을 때에 그렇지요. 엄마는 우리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아이 시기를 벗어나면 그 사랑이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사랑 대신에 ‘간섭’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사랑을 벗어나려고 하지요. 상관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어떤 일에서도 멀어지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인간 사이에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랑에 미흡함이 있을 수 있고 그 미흡함으로 인해서 거슬리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 속에 ‘어두움’을 형성해 나가면서 하느님을 벗어나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 죄를 짓고, 그 죄가 축적되고 누적되면 우리는 어둠의 존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감미롭던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씁쓸한 맛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상에서 영원할 수 없고 그 어떤 부귀 영화도 마지막 순간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품으로 나아가서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마르 9,49) 소금이라는 것은 ‘짠 맛’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인의 짠 맛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불 소금은 하느님의 타오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짠 맛을 간직하고 있고 불 소금에 절여지게 된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짠 맛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불 소금을 만나게 되면 그만한 고통스러움도 없을 것입니다. 불 소금을 축복으로 간주하느냐, 자신에게 다가오는 괴로움으로 간주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

온 존재로 하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할 때 왜 ‘정신’만 들어높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은 우리의 온 존재로 사랑해야 하는 분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모든 감각과 상상력과 지력과 감정과 영혼을 모두 총 동원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몸으로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연물을 바라보면서 눈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고, 귀로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거나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이 마련하신 모든 지적 영역을 향유하면서도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묘사한 모든 화가들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바로 그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 존재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고리타분한 신학의 틀에만 가두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신학이 하느님을 배우는 영역이 되겠지만 일자 무식한 할머니라도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면서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교리책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

부자는 왜 부자일까요? 너무나 단순한 질문입니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서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먼저는 많은 것을 받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즉 본인이 의도한 바가 아닌데 많이 얻게 된 케이스가 있을 수 있지요. 반대로 자신이 간절히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으고 쌓아서 부자가 되려고 작정하고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럼 그 가진 것으로 과연 무엇을 할까요? 흔히 우리가 부자를 동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리는 사치와 쾌락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야고 5,5) 그들의 호화스러운 삶이 부러워 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쾌락과 안락을 향유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부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부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맡겨진 재물을 관리하는 이들입니다. 즉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이 맡은 동안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재물을 맡긴 이의 원의를 잘 알고 그에 따라서 재물을 책임감 있게 써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물론 통상적인 부자들 가운데 이런 인식을 지닌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이지만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우리는 가난한 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외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고 누구든지 만나서 어울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부자들의 초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나누었고 자캐오의 집에도 찾아 갔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것이 오직 자신에게만 쓰여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기적인 부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부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유함으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자와 죄 짓게 하는 자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때로 예수님의 말씀은 명백하고도 강력합니다. 예수님은 죄 짓게 하는 자들은 분명한 단죄를 받게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것도 연자매(가축이 돌리는 커다란 맷돌)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진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말이지요. 세상에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 악한 일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비록 그 행위가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제 보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르 9,41) 우리는 완벽하지 못하고 강하지 못하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것은 이미 선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선한 이가 하는 일을 막지 않고 그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선한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하느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이 하나라도 죄를 짓게 만드는 이는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죄짓게 하는 지체를 상실하더라도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하십니다. 때로는 자신이 악하고 악한 일을 조장하는 데도 스스로는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는 가르고 흩뜨리고 서로 싸우고 다투게 만드는 것인데 자기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지요. 아마 마지막 순간에 수많은 이들은 생각해 오던 것과 전혀 다른 자신의 실상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알면서 하지 않는 죄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좋은 일을 할 줄 알아서 좋은 일을 하는 이 좋은 일을 할 줄 몰라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그렇다고 악한 일도 하지 않는 이) ==================== 좋은 일을 할 줄 알지만 하지 않는 이 좋은 일을 할 줄 모르고 악한 일을 하는 이 위와 아래를 가르는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도’의 선입니다. 악한 의도가 존재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위와 아래의 의도가 나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할 줄 아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가가 중요합니다.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고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고 주임 신부를 알고 주교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신학 교육을 몇 년이나 받았고 어떤 졸업장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에서 선을 실천하는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기도가 정말 진실된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에 어떤 진실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꼬마 아이가 비록 어눌한 말이지만 정말로 진실되이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서 바치는 단 한 번의 묵주기도가 수많은 말로 치장된 다른 기도보다 나을 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된 것이고 어떤 것이 참된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는 이상 그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도리어 퇴보를 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머무른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됩니다. 반드시 죄를 지어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죄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심판 받을 이들 중의 상당수는 자기 스스로를 멀쩡한 신앙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이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 아름다움

외적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고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으며 영적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입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것이지요. 좋은 그림이나 아름다운 경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좋은 연극을 볼 때 느끼는 감정적인 아름다움, 또 학적으로 깔끔하게 처리된 논문을 볼 때에 느끼는 지적인 기쁨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거의 대부분의 활동을 바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지요. 외모를 가꾸고 지적 수준을 높이고 문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아름다움인 영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오직 ‘선’에서 비롯합니다. 물론 다른 여러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요. 사랑, 자유, 정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가치를 마주하면 영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아름다움은 모든 것에 깃들 수 있습니다. 외적인 미모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가 더욱 선량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을 때에는 더욱 아름답게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입에서 더러운 말이 나오고 그가 보이는 행동이 지독히도 천박할 때에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감소시키게 되지요. 우리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 영적인 아름다움은 우리가 추구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꾸고 다듬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선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인 아름다움의 근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적으로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무슨 기술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가장 가까이에서 하느님을 비춰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공허한 외적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예수님은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은 오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선언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선언이기도 기원이기도 한 인사입니다. 평화를 이미 누리고 있는 이에게는 선언이고 다른 한 편으로 평화가 없는 이에게는 기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화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평화를 얻겠다고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무력으로 상대를 억누르고 우리의 힘을 과시하면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의 힘이 남들보다 더 클 때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억압상태일 뿐입니다. 억압을 당하는 쪽이 힘이 없어서 짓눌려 있을 뿐이지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직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만물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시는 분이시고 그 일을 이루도록 초대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을 하는 사람은 평화 중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는 오직 우리가 하느님에게 기댈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가장 힘든 시련과 환난 중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화의 근원이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길을 잃어도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난처한 상황에 있어도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에게 돌리기 위해서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바로 그 사명을 수행하면 됩니다. 우리

성령

차에는 모터가 필요하고 동물에게는 심장이 필요합니다. 구동의 핵심이 되는 존재이지요. 이처럼 사람에게는 ‘영’이라는 것이 있어 모든 것을 가장 근본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영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람은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며 그에 따라서 자신의 온 존재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영을 지닌 사람은 선한 말과 행위를 하게 되고, 악한 영을 지닌 사람은 악한 말과 행위를 하게 됩니다. 지극히 간단한 논리이지요. 헌데 인간의 영이라는 것에는 마지막까지 ‘자유’라는 것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선한 영이라도 스스로의 결정으로 악하게 변질될 수 있고, 또 반대로 악한 영은 선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변화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언제나 ‘가능성’의 상태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거룩한 영이라 칭하고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이 영을 지니고 살아가셨지요. 하느님과 예수님은 같은 영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영은 같은 성질의 것이라서 우리의 영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일체의 행위는 거룩한 것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성령이 하는 역할은 우리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것이고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느님에게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마치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듯이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고질적인 ‘이기성’이 있어서 나 이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