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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6의 게시물 표시

너희가 주어라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말씀을 전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도대체 복음이라는 것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할 때가 많지요.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학 과목 수강 신청을 해야 한다고 억지로 떠미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그들을 모두 먹일 빵을 찾으라는 것은 ‘계산상’ 불가능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계산상으로는, 그들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오천명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절망하기보다는 그러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니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진 그 소박한 봉헌물을 받아들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닌 것이라고는 우리의 몸뚱아리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으로도 충분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내가 방안에만 틀어 박혀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봉헌하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그 소박한 봉헌물로 엄청난 것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부족한 이라고 해서 그 어떤 활동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스페인어도 몰랐고 볼리비아도 몰랐지만 일단 나가서 부딪혔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셨던 일을 이루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저는 한국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걱정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저를 하느님에게 내어 맡기려고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콜로 3,11) 과연 ‘그리스도’의 위치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이토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일까요?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편협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좋은 가치들을 배제하고 어리석게도 ‘그리스도’라는 용어에 일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올리면서 자연히 2000년 전의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실제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중요한 기회였지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방식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 그 이전부터 다가왔고 또 지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성을 지니고 있지만 신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영원 안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좀 더 이해를 시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생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이리저리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덕은 부족함이 있는 인간의 몫이지요.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영원하신 지혜이며 그분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생각 속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요?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가치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선과 사랑, 모든 가치들의 최고봉이 그분의 생각 안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 그분의 말씀입니다. 진실, 사랑, 친절, 온유, 평화, 기쁨, 인내, 순명, 겸손, 정의… 그 모든 것들이 모조리 모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생각이고 그것이 표현된 것이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사람이 되어 다가오셨지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모두가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와 불행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코헬 2,21) 그렇다면 허무와 불행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노력한 것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저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남겨 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런 사람도 바로 자신에게 좋은 것을 남겨두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스스로에게 주고는 싶은데 문제는 무엇이 나에게 좋은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사탕을 좋아하지만 사실 사탕은 적당히 먹지 않으면 전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단순히 그 단맛을 즐길 뿐이지요. 누군가가 곁에서 적절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입에 단 것을 찾아 마구 먹다가 건강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어른’에게도 일어납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두가 분별과 절제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듯이 어른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좋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놓으신 것들입니다. 영원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것들을 우리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당장의 우리 눈에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보다 거부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십자가’는 좋은 것일까요? 우리는 외적 표지의 십자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나의 삶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올 때에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 십자가가 나의 속을 썩이는 남편이라면, 그 십자가가 나의 시부모라면, 그 십자가가 내가 마땅히 해내야 할 나의 의무라면, 그 십

부유함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 (루카 12,21)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통상적인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 혹은 ‘자신이 유용할 재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기심’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서 ‘증오, 시기, 질투, 불화, 불행, 슬픔’과 같은 요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언제나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그 비교 대상도 언제나 자기보다 수준 높은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스스로 ‘불행’해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행복한 꼴을 올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전혀 다른 의미의 부자가 있으니 바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아낌없이 내어 바치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들은 돈이 많건 적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온유하며 평화롭고 기쁨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줄 알지요. 이들의 특징은 ‘이타심’이고 ‘겸손’입니다. 자신의 주제를 알고 또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누어 질 줄도 알지요. 그래서 이들은 늘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조화롭고 온유하며 친절하고 자비롭지요. 그래서 이들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넘쳐 흐릅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의미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작 소유한 것은 많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지요. 손에 돈이 있으면 돈을 내어줄 것이고,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 자신이 지닌 시간과 사랑을 내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본당에서 일을 해 보면 이 양측의 부자들이 얼마든지 드러나곤 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위해서 부자인 사람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어 봉사를 실천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어떻게든 때우려 하고 그마저도 아까워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이것만큼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참여하는 이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그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잘 안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어느 학교를 다니고, 어디 출신이고, 그의 가족 관계가 어떤지를 아는 것일 뿐, 정작 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도식화하고 통계화해서 수치를 산출해 냅니다. 그러나 한 인간 존재가 수치로 산출될 수 있는 것일까요? 한 인간의 내면은 무한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잘 알려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영혼을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만들지요. 무엇보다도 참된 사랑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떠난 채로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휴머니즘 마저도 하느님과의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딘가 구멍뚫린 것이 되고 말지요. 그러나 이 사랑을 숫제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가볍디 가벼워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지요. 그는 많이 ‘소유’하지만 ‘누리지’는 못합니다. 모든 곳을 여행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지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누구와도 진정한 친구가 되지는 못합니다. 특히나 자신에게서 재력이 사라지고 명예와 권력이 사라질 때에는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외톨이가 되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지옥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13,49-50) 오늘날 교회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성당에 오지 않는데 거기에다 대고 그런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주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이 과학의 시대에 지옥이니 불구덩이니 하는 말은 무식하게 들린다는 생각도 한 몫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분명한 발언을 하셨지요. 악한 이들이 들어갈 곳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 불이 실제로 있느냐, 온도는 어떠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꺼려하고 싫어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실제로 고통받을 것이며, 나아가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은 분명한 셈이지요. 그러나 현대인은 ‘증명’을 원합니다. 적어도 이해할 만한 영역의 설명을 원하지요. 과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옥이 물리적인 영역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물리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고 연구해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영혼의 무게를 재었다지만 그 영혼의 물리적인 무게가 우리를 선하게 하지도 악하게 하지도 못하니까요. 오히려 인간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진리의 길을 연구하는 것이 영혼 연구에 더욱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옥이라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물리적인 차원에서 연구하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이 짧은 문장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의 제자’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이 하느님의 제자가 된 이들, 즉 새로운 것을 배워 알게 된 이들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율법 학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옛 것, 즉 율법에 익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곳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가치들이 머무는 곳이지요. 익히 쌓은 덕도 그 곳간에 있고 새로이 쌓은 덕도 그 곳간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영혼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무언가를 담아 놓을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도 있습니다. 옛것 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옛것을 꺼내고, 새것 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새것을 꺼낼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 학자가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면 그 양자를 원하는 때에 꺼낼 수 있게 됩니다. 자, 이제 추상적인 이야기는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이제 실제적인 문제를 건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육을 지켜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만일 옛것에만 익숙한 율법학자라면 답은 간단합니다. 금육은 지켜야 하고, 연령은 몇 살부터 몇 살까지, 그리고 지키는 날짜는 무엇무엇이며 지켜야 할 항목은 이러저러한 종류의 육류이고 그 와중에 허락되는 종류의 음식은 이러저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전혀 다른 설명을 할 것입니다. 그는 질문자의 의도를 알 것이고, 그가 처한 상황을 알 것이며 여러가지 것들을 면밀히 살핀 후에 그에게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대답도 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사랑에서 나오는 대답을 말이지요. 그것은 금육에 대한 율법 규정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겠지요. 예컨대 연세가 드시고 치매끼가 있어서 정신이 오락가락

옹기장이와 진흙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예레 18,4) 그렇습니다. 옹기장이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진흙을 반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옹기장이의 일이고 또 권리이기도 하지요. 옹기는 자신을 빚는 이에게 저항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진흙에 너무나 많은 이물질이 들어 있다면 옹기장이는 그 진흙을 내려두고 다른 진흙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은 우리가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 자체는 하나의 빚음의 과정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이런 저런 작업을 하십니다. ‘명작’을 만들기 위한 시도이지요. 우리는 그때마다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그 손길이 싫다고 저항하고 작업대에서 떨어져 바닥의 쓰레기를 묻혀 버리면 하느님은 다른 진흙을 쓰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것이지요.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때로는 강한 손길이 우리를 다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마냥 좋은 일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결국 하느님은 명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품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달린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결국 당신이 원하신 일을 하시겠지만 그 거룩한 순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닌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린 몫이지요. 성당에 나가는 게 지겹다고, 작고 큰 시련 거리가 있다고 해서 이 길에서 스스로를 포기해 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셈이지요. 인내를 가지십시오.

예언자의 위상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백성에게 맞서,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예레 15,19-20) 사람들이 예언자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돌아갈 순 없습니다. 그것은 역방향이 되는 것이지요. 예언자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이끌어야 합니다. 바로 이 방향성이 헷갈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그것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우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 능력이 없었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질 않아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야 했다는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의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 즉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그들과 흥청망청 어울리고 술을 진탕 마셔댄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2차로 노래방에 가고 기억까지 가물가물해지면서 그것이 양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그건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자고 할 용기가 없었을 뿐더러, 스스로에게도 세상의 쾌락을 그만두게 할 자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한 남편의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화를 낼 만한 행동이면 마땅히 사제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술도 절제해서 즐기면서 마실 줄 알고, 담배는 가급적이면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예언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를 마치 청동 벽처럼 만들어 그 누구도 그를 이겨내지 못하게 도와 주십니다. 하지만 이 싸움이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싸움은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이지요. 영적인 청동 벽을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사제가 영적으로 준비되면 그는 인내 속에서 희망을 키워 나가고, 온유와 친절, 기도와 희생,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그에게서 흠잡을 거리를 발견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즉 그의 흠없는 삶이 그를 청동 벽처럼

보물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 13,44) 이 비유를 재산에 비유한다면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더 좋은 가치를 가진 것을 거의 무상으로 얻을 기회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쇼핑 센터에서는 온갖 할인 행사를 합니다.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이것이 영적 차원으로 접어들면 사람들은 그러려니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싸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요. 사실 영적 의미로 무엇이 ‘보물’인지 전혀 알아 차리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막연히 보물은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지요. 얼마나 좋은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셈입니다. 영적 차원의 보물이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가르침들을 말합니다. 물론 가장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보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진리를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이해를 해서 다가서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 길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보물을 보물로 인지하는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보물을 사려고 하고 그 보물이 뭍힌 밭을 사려고 합니다. 그것이 보물을 발견한 자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그 보물을 의심하는 이, 그 보물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는 그런 희생을 치를 마음이 없습니다. 단순히 신앙을 지녔다는 표현이 ‘보물’을 올바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물을 만난 사람은 분명히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즉, 가진 것을 팔아 치우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이 지닌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보물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희생을 두려워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잃는 것을 두

해처럼 빛나는 의인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43) 우리가 밝게 느끼는 이유는 ‘시신경’을 통해서입니다. 빛이라는 정보는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와 뇌로 전달되어 밝고 어두움, 그리고 색깔의 정보를 전해주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해서 밝은지 어두운지, 붉은지 푸른지를 분석해 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의 성질을 지닙니다. 밝은 소리가 있고 우중충한 소리가 있지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라면 장조가 있고 단조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청음력이 뛰어난 사람은 온갖 다양한 소리들 가운데에서 보다 밝고 아름다운 소리와 보다 어둡고 혼란하고 어지러운 소리를 찾아내고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을 마주하면서 눈과 귀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밝고 맑은 영혼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온갖 덕행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가지 가치들을 지니고 있는 영혼이지요. 위의 성경 구절은 바로 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해처럼 빛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러한 가치들에 헌신했고 하느님의 사랑의 빛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중충하고 어두운 영혼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겠지요. 그들의 내면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고 탐욕스럽고 기만하고 악의에 가득해서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영혼의 상태는 외적인 형태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만’과 ‘위선’이 판을 치게 됩니다. 영혼이 우중충한 사람이 외적으로는 화려한 차림새의 옷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고, 또 반대로 영혼이 밝고 맑은 사람이 실제로는 초라한 옷을 입고 다녀서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색은 어떠할까요? 영혼의 색은 ‘삶’으로,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영혼에 아름다운 색을 입혀야 합니다. 겸손하고 기도하는 삶으로, 인내로이 고통

무너진 왕국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예레 14,17-18) 예언자들의 말은 단순히 그 나라의 외적인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그들이 걱정하는 바는 인간의 내면에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며 울고 계십니다. 타락해가고 망해가는 자식을 보며 부모가 눈물을 흘리듯이 하느님도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며 슬퍼하시는 것이지요. 영적인 타격이 너무나도 커서 그 상처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들이라는 곳은 영토 밖을 말합니다. 수비대의 권한이 미치는 영역 밖을 말하지요.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방인들, 혹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다가 벗어난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상황은 처참합니다. 칼에 맞아 죽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외부 세력의 영향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회생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러 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죄악의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이들,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가운데 선의를 상실하고 물들어가고 있는 이들을 말하지요. 성읍 안, 즉 교회의 울타리 안이라고 상황이 더 낫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는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 뿐입니다. 올바로 잘 먹지 못해서 굶주려 있고, 병마가 다가왔는데 올바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메말라서 뭔가 먹거리를 찾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소화할 만한 것을 주지 못하고, 영적으로 세상사에 물들어가면서 병에 걸려 있는데 그 누구도 거기서 구해줄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예언자와 사제는 바로 성읍 안에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무지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사실 그들은 좋은

종말은 기회를 강조하기 위함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40-43) 흔히 예수님은 성인 군자라서 아주 자비로운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서 자비롭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할 때에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있으니, 예수님은 ‘정의롭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지닐 때가 있습니다. 마당에 나와서 쓰레기를 치우는 본당 신부님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장엄 미사에서 거룩한 전례를 집전하는 거룩한 대사제의 모습이 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실 때와, 천상에서 다시 재림하실 때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마련입니다. 종말의 때는 ‘기회가 다한 때’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더는 기회가 없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은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의 악으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보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섞여 사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여전히 세상에 악이 득세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만일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 모든 어둠들을 싸잡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지요. 지금은 기회의 시기이고, 우리의 온갖 부족함과 오류가 여전히 기회를 얻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그냥 ‘허비’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준비’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 동안 최선을

군림과 섬김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5-26) 말로는 이렇게 쉽게 표현되는 것이 실제로 실천하기는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내면에 이미 일종의 ‘경향’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흰 도화지에 색칠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미 물든 종이를 다시 표백하고 그것에 색을 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과연 우리가 서로를 섬기도록 교육을 받았는지 아니면 1등이 되어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도록 교육을 받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최고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최고의 의미를 올바로 곱씹어보지 않은 채로 최고가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이 말하는 최고는 산의 정상을 의미합니다. 그 꼭대기에 올라서야 최고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서 무의식중에 세뇌를 시키곤 하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는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형제이고 자매일 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지요. 자신이 가진 달란트대로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가진 달란트로 남에게 봉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서로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손은 다른 지체를 위해서, 발도 다른 지체를 위해서, 눈과 코와 입도 모두 다른 지체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몸이지요. 지체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들을 지배하려고 들면 엉뚱한 일이 일어납니다. 눈은 귀로부터 정보를 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면 캄캄한 밤에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또 귀와 눈은 코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가스가 새는 냄새는 눈으로도 귀로도 알 수

끈기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루카 11,8)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기적인 청원을 드립니다. 보통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게 해 달라거나 많은 돈을 벌게 해 달라는 식이지요. 또는 지금 겪고 있는 곤란한 일을 피하게 해달라고도 청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청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들은 슬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만일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끈기’가 있다면 그의 청은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끈기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천만원을 달라고 하느님에게 떼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천만원이 당장 다가오지는 않더라도 그는 꾸준히 하느님에게 매달릴 수 있겠지요. 그러면 그 인고의 기간 동안 하느님을 향해 꾸준히 마음을 모으면서 결국에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천만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이미 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끈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할 때에 하느님을 찾다가 그 필요성이 없어지고 나면 잊어 버리고, 또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적반하장 격으로 하느님에게 화를 내곤 합니다.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설령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지헤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끈기’를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이 더 강하시고 우리보다 위대하시다는 믿음 안에서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창세 18,32)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단 열 명의 의인만 있더라도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지요. 그리고 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악을 보시기 이전에 우리의 선함을 보십니다. ‘희망’을 보시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였다면 아마 퍼센트로 보았을 것입니다. 즉 선인과 악인의 비율이 몇 퍼센트인가를 보고 악인이 더 많으면 그 도시를 멸망시켜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한 나라에 선인, 무죄한 이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정치인들과 정부 고관들이 그릇된 행동을 해서 그 나라가 악한 명성을 얻으면 우리는 그 나라를 쓸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흔히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는 나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그 나라들 안에 선인과 무죄한 이들,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국익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우리는 한 나라가 재난에 휩쓸려 망하기를 바라곤 합니다. 이는 한 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한 인간에게서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한 영혼에 대해서 심판을 내려 버리곤 하지요.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아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 조금 더 나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스스로 잘나서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에 단 열 명을 보아서라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흠집난 것을 잘라내어 내던져 버리고 깨끗함을 유지하는 분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예레 7,8-11) 다른 이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도둑질이지만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사실 스스로 별다른 죄악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죄악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늘릴 수단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늘릴 방법을 찾고, 그것을 특히나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이들의 몫을 쟁취함으로써 이루곤 합니다. 살인은 단순히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만 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에만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생명처럼 중요시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서 근거없는 험담을 하는 이도 일종의 살인을 저지르는 셈이지요. 간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부부간의 정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간음은 내적 신실함을 상실하는 것, 즉 하느님을 두고 다른 존재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의 헛된 주장들을 뒷받침하고자 헛된 맹세를 하고, 재물의 왕에게 헌신하겠다고 내적으로 다짐을 하며, 우리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신들을 따라가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우리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으며 ‘구원을 받았다’, ‘적어도 죽을 죄는 짓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하지요. 그러면서 지난 주일에 주일 미사 빠진 고해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면서 내적으로 저지른 온갖 불의에 대해서는 스스로 너그러이 용서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용서하는 것이 아니어서 곧잘 다시 같은 어둠의 행위를 반복하곤 하지요.

성전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예레 7,4) 성전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잡아야 합니다. 성전은 물리적인 장소 이상의 개념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성전의 올바른 정의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교회, 성당이라는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입니다. 따라서 그 성당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성전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셈입니다. 무조건 축복을 받았다고 아무것도 아닌 장소가 성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성당은 거기 모여드는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성당, 온갖 불의가 판을 치는 장소는 단순히 외적인 축복의 예식을 수행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성전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머무르는 성전이라는 장소, 즉 교회와 성당은 그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게 되면 자칫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가령 성전이 더럽혀진다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이를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예상해 봅시다. 이는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과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도하는 이들이고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더욱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은 단순한 장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도 나름의 세력이 형성되고 위계질서가 세워져서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지요. 우리가 지상에서 바라보는 것들은 모두 천상의 ‘예표’일 뿐입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원의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지상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성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

그냥 두어라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마태 13,29-30) 그냥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두는 게 아니지요.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일꾼들에게 일러 가라지를 걸러낼 것이라고 말이지요. 일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좀 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속전 속결 하려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결과를 보고 싶어하고 적어도 내 생이 끝나기 전에는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보면서 답답해 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중에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니 답답할 수 밖에요. 하지만 하느님은 보다 넓은 구도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에 합당한 기회를 선사하시고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나서 그 모든 기회들이 무산되었을 때에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죄악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또한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정의가 실현될 떼에 세상의 모든 의인들이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하느님은 ‘자비’의 모습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측에서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저 인간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 놓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시려는데 우리가 나서서 심판하려는 교만함에 사로잡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냥 두십시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그냥

주님을 만난 여인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세상에 흠뻑 젖어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냥 세상에 젖은 것이 아니라 죄에 빠져 있었고 거기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선과 진리와 사랑이신 분을 만났습니다. 물론 모든 단순한 만남이 한 사람을 참된 길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여인은 스스로의 의지를 다해서 그분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결국에는 그것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참으로 짧게 적었지만 꽤나 길고 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다시 그분을 잃게 됩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분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분이 돌연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증오했고 그분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슬픔에 젖어 듭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이 그녀를 부르실 때에 그녀는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녀는 ‘목격자’가 되고 또한 ‘증언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들, 영원 안에서 그분을 다시 만난 이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증언자가 됩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시도 세상에 물들어 있었고, 죄악의 시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참된 길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의지를 더해서 그 길로 나아가게 되지요. 그리고 정상 궤도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시련’이 다가오게 되지요. 다시 예수님을 잃게 됩니다. 물론 이번에는 우리가 잃고 싶어서 잃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상황이 그렇게 조성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 참된 방식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선포자’가 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한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전할래야 전할 거리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진실한

하늘 나라의 신비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13,11-12) 사람들이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알기 싫어서 입니다. 즉 신비는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구미에 당기는 것을 보고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침에 잘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아침밥을 맛나게 먹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열심히 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그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푹 잘 수 있는 은총과,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라는 축복을 지니고 있고, 일할 수 있는 직장도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그 의미를 모조리 상실하게 됩니다. 즉, 부동산을 더 구입할 가능성이 있지만 투자할 돈이 모자라서 그 돈을 벌 궁리에 몰두한 사람이라면 그는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느라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신비의 영역은 우리의 영적인 영역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가장 값비싸고 유명한 음식을 탐욕스럽게 혼자서 먹는 것보다는 배가 고플 때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소박한 식사가 더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든 이들에게는 이 차이가 전혀 와 닿지 않지요. 그들은 기왕이면 더 값비싼 음식을 먹어야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으니까요. 바로 이런 이들, 즉 스스로의 문을 닫아버리는 이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자기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지요. 먼 훗날 우리는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하늘 나라의 참된 기쁨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값지다는 것도 하늘 나라의

열매

저마다 맺으려는 열매가 달라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열매’에 대한 올바른 개념만 잡고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그 같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참된 열매를 내던지는 형국입니다. 사과나무를 바라봅시다. 사과 나무의 열매는 당연히 사과일 것입니다. 헌데 어느 바퀴벌레가 자신은 사과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가 더 마음에 든다고 나무에 올라가서 잎사귀를 모조리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그 잎사귀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즐기며 그 냄새에 만족해 하지요. 그렇다면 이 나무는 버텨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작 맺어야 할 것은 사과인데 사과가 열리기도 전에 모든 잎사귀가 떨어져 나가 버려 결국 나무 전체가 죽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열매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심겨진 나무는 세상의 나무가 아니라서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세상의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열매는 안타깝게도 수많은 이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썩은 열매를 찾겠노라고 참된 열매를 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구를 접어두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보겠노라고 나서는 형편입니다. 마음을 가꾸기보다 얼굴과 외모를 가꾸고 외적 허영에 사로잡혀 명예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는 동안 참된 하느님으로부터의 평판에는 소홀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헛된 몸부림들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명이 다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아무런 열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심겨져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8-9)

우리 힘의 근원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 1,7-8) 예언자의 힘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유일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 혼자 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는 보호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살아남게 됩니다. 설령 어린 아이가 학교에서 힘 센 친구를 만난다 하더라도 보호자가 든든히 응원을 해 준다면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보호자의 힘을 믿고 자기에게도 없는 능력을 바탕으로 맞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뒷받침으로 삼는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게 됩니다. 죽음의 굴레 마저도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겁’을 집어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앞에 두고 겁을 냅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보잘것 없음을 보고 다가오는 세상 앞에서 겁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모든 이들은 이러한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기반을 세워 줄 것을 힘으로 삼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과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두려움을 상쇄시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안정’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세속적인 것들은 결국 사라지고 없어져 버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 안에서 진정한 뒷받침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안에 휩싸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영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시련이나 도전이 다가와도 평온하게 그에 맞설 수 있게

예수님의 형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9-50) 자녀들이 유산을 상속 받습니다. 동네 꼬마가 뜬금없이 유산을 상속받는 일은 없지요. 자녀가 되려면 적어도 입양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됨의 관계를 이루어주는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세상에 난 사람 중에 하느님이 선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은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헌데 오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이로써 자녀됨의 조건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누구든지 이를 이루면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당연히 예수님의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눌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그분의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오해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쥐고 있다면서 제 말만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이지요. 법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사람이 만든 규정을 하느님의 규정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려는 이들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가 맺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친절, 겸손, 일치, 온유, 관용, 인내, 기쁨, 사랑, 절제와 같은 것들이 그가 맺는 열매입니다.

정돈된 한국

지난 주일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근처 본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했습니다. 공동 집전을 했지요. 역시 한국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제의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강론대 위에 있는 물잔이며 거의 완벽하게 다림질된 제대보와 주일이라고 제대 양쪽으로 3개씩 놓여 있는 촛대며 모든 것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지요. 신자들은 조용하고 정숙하고 경건했습니다. 어쩌면 시골 본당이라 어르신들이 더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손은 모두 가지런했고 거의 모든 신자들이 빠짐없이 성체를 모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가대의 준비된 노래, 멋들어진 오르간 소리, 시편 성가의 아름다운 선율, 제단 양 옆의 플랜카드, 장궤틀이 모두 달린 깔끔한 장의자…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었지만 실은 저로서는 뭔가 허전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돈된 나머지 그 안에서 쉽사리 머무를 수 없는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었지요. 다이나믹함, 생동감이 부족했습니다. 틀리지 않고 틀려서는 안되고 틀리면 비난을 받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부족하고 힘든 이들이 함부로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행여 어느 꼬마가 철없이 장난을 치다가 큰 소리라도 내면 모두가 성가시다는 얼굴로 뒤돌아보며 그 아이를 노려볼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물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아방’이 따로 있어서 모든 잠재적인 소음의 문제를 일으킬 아이들은 따로 수용이 되니까요. 볼리비아 처럼 미사 중에 젖달라고 우는 아이나 제대 앞에 나와서 바닥에 엎드려 노는 아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돈됨과 깔끔함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여유와 이해와 관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평화의 인사 때에 제대 위에 올라와서 손을 내밀 수 있는 아이의 천진함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설교를 듣고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 12,41) 요나가 대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대단하신 분이었지요. 하느님은 요나의 약함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를 니네베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니네베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고 회개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 과연 누가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일까요? 선과 정의를 사랑하는 이, 진실과 공정을 실천하는 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은 그들의 삶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들이 맺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는 기쁨, 사랑, 일치, 평화, 온유, 겸손과 같은 덕목들입니다. 이러한 열매들로 그들을 분별해야 하고, 그렇게 좋은 것들을 지닌 이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전하는 이들도 부족할 뿐더러, 듣는 이들에게서도 문제가 발견됩니다. 무엇을 듣고 싶어할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귀에 달디단 말을 듣기를 선호합니다. 욕심이 많은 이에게는 그 욕심을 북돋우는 말이 달콤하게 들리고, 권력과 명예에 물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보장하는 말들이 달콤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만 잠시 쳐다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익숙한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 자체가 소음이지만 세상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달콤한 향연으로 들리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과연 올바른 말을 듣고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제대로 듣는다면 올바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올바로 생각한다면 올바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로 살고 있지 못하다면 올바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올바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올바로 듣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여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콜로 1,28) 교회의 일꾼들을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실제적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과연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응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위의 성경 구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다해서 사람들을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사명인 것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일들은 이 핵심이 되는 일을 보완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병원을 운영할 수도, 학교를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활동의 근본에는 바로 ‘복음선포’의 사명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느 모토로서의 복음선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러한 기타의 일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기관이든 ‘예수님’을 상실하고 그분의 말씀 선포를 상실하는 순간 세상의 여느 기관과 별다른 차이를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이 진실로 발전하는 것은 바로 내면이 성숙할 때입니다. 단순히 전에는 쓰지 않던 기술을 새로 개발해 쓴다고 해서 인간이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신형 휴대폰이 한 인간의 인격을 개발시키지는 못합니다. 한 인간은 오직 그 내면의 영혼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개선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가장 내면의 영혼이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있어도 인격적으로 미성숙하다면 그는 성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정한 스승에게로 다가서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만이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로 다가서야 합니다. 우리는 배워야

아브라함이 기다린 이들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들을 만나고 자식을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날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천막 안에 늘어져 있지 않고 밖에 나와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여 대접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늘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기다림 중에 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을 진실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안타까운 기다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다릴 가치가 없는 것들을 기다리다가 공연히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우리는 현세적이고 외적인 삶의 개선을 기다리다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 버리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친절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기다렸고, 선한 마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서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만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다른 이들이라면 자신의 재산을 축내는 존재라고 무시했을 사람들을 아브라함은 기다리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봉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서서 봉사했고, 그 봉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같은 사람을 보아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같은 예수님을 보아도 누군가는 정치범을 바라보고, 또다른 누군가는 사회적인 리더를, 그리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 바라보는 관점 하에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되지요. 우리는 어떤 시선을 지니고 있을까요? 우리의 눈은 우리의 등불입니다. 우리의 눈이 바라보는 것이 어두움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오직 어두움만이 차지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빛을 갈구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빛이

필요한 것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먼저 잘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올바로 듣지 못하면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공연한 분주함이 가중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필요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상당수의 행동은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우리가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올바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 끌리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무엇에 끌릴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끌리는 것은 감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고 들리는 것에 끌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하고 값비싼 것에 너무나도 쉽게 끌립니다. 그래서 자연 공허한 것을 원하게 되고 그러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분주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것에 마음을 열고 거기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눈과 귀를 빼앗아 끊임없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빵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그 밖의 것은 모두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모든 계명은 이 두가지로 모아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걱정이 많습니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고, 헛된 바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온유한 목자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마태 12,20) 예수님은 착한 목자입니다. 착하다는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오해를 하곤 합니다. 결정력이 없는 우유부단함을 두고도 사람들은 때로는 ‘착하다’는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뭐든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올바로 인식하면서도 온유함을 지니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뱡향성이 없이 그저 모든 충돌을 ‘회피’하는 것은 절대로 착함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책임함이고 우유부단함이며 비겁함이고 나약함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야 할 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양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분명하게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강한 힘으로 이루어 내셨습니다. 다만, 그분은 온유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마태 12,20 참조) 것이지요. 그분은 단순히 패기 있게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 그치지 않으시고 쓰러진 것들을 보살피시고 뒤처지는 것들을 기다려 주시고 엇나간 것들을 어깨에 매고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유약해지지 말아야 하고, 힘을 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온유함을 잃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는 다가서서 빛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과학

과학이라는 것을 보이는 물질 세계 안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삶 안에 적용시켜서 여러가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영성 안에도 과학이 있습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과학’에 치중된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흐름 역시도 엄연히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물질적인 세계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는 그 저변에는 언제나 내적인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내적이고 영적인 이유들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술을 마시는 데에 길들어져 있다면 그는 친구들이 초대하는 술자리를 거절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중력이 바닥을 향해서 작용하고 있어서 아무리 가벼운 종이라도 결국에는 그 무게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단, 그 종이에 역방향으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움직임도 그 주된 ‘욕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다른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 이상은 그 방향 그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된 내면의 힘의 작용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로의 방향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방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향성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에로 향하는 움직임을 따라 살아가게끔 되어 있지요. 필요하다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 해서라도 이 방향성을 고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방향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자각하게 되면서 무언가를 느끼게 됩니다. 즉, 다른 이들의 방향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지요.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채우되 다른 이들의 욕구도 존중해야 나의 욕구도 존중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게 싫으면 나도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한국 교회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아직도 ‘규정’을 궁금해 합니다. 단식에 대한 규정은 어떻게 되는지, 미사에는 어느 대목부터 참례해야 유효한가 하는 등등을 묻곤 하지요.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의 신자들에게도 잘 모르고 있던 주제이고, 또 새로 탄생한 신자들에게도 궁금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잊고 그러한 규정을 챙기곤 하지요. 소를 잃었는데 외양간을 정비해 본들 소용이 없는 셈이지요.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막연한 종교적 활동의 이행은 그 무엇도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더욱 굳고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요. 즉 우리가 실천하는 일련의 규정 이행을 실천하지 않는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언자들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양이나 잡아서 대신 바치려는 위선적인 이들을 비판하고는 했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규정만 준수한 채로 나의 근본적인 내면은 여전히 이기적으로 두는 것이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훨씬 쉬운 셈이지요. 주일 미사만 참례하고 나면, 그 의무 규정만 지키고 나면 나머지 주일은 내 멋대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규정의 본질이 아닌데 말이지요. 주일은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함의 규정’ 즉 한 마리의 양을 잡아 바치고는 나머지를 하느님에게서 빼앗아 내 멋대로 쓰고자 하는 것입니

정의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이사 26,9) 우리는 가장 냉혹할 때 가장 정의롭다고 착각을 하곤 합니다. 즉 우리의 정의는 차가운 정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사랑 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미에 맞을 때에만 받아 삼키고 그렇지 않으면 내뱉기가 일쑤입니다. 다른 지역에 뭔가 좋지 않은 게 들어선다고 할 때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바라보다가 그것이 우리 지역에 이루어진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나서서 반대합니다. 결국 우리는 참된 정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가장 넓은 시선을 지니고 계시고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어느 단체에 유익을 따지기 전에 모든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계시고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정치나 다른 권력의 영향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내면의 변화, 즉 회개를 통해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정치 사범으로 낙인을 찍혔지만 실제로 그분이 하신 일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정치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이지 예수님은 정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고 소박한 일상적인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도록 도와주신 셈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정의는 너무나 범위가 크고 또한 무한한 자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분의 정의는 전혀 실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분은 악인에게 마저도 당신의 자비의 손길을 뻗치시고 그가 뉘우쳐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 하느님은 그 어

안식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머지 않아 사람들은 무료하다고 난리를 피울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과연 우리는 언제 이런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수많은 ‘여가 활동’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름으로서는 쉰다는 활동들이지요. 하지만 때로 바로 그 활동 때문에 도리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취미로 시작한 활동에 얽매여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도리어 스트레스를 쌓아 가는 것이지요. 사람이 진정으로 쉬려면 영혼이 편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휴식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영혼은 오직 ‘사랑’ 속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에 영혼은 비로 휴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찾지 못하기에 자신들이 사랑할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온갖 취미 활동이 생겨난 이유들은 바로 우리가 마음 둘 곳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여러가지 활동들과 만남들 속에서 결국에는 사랑을 찾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휴식’으로 다가오십니다. 즉,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또한 우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정으로 사랑을 내어 드릴 수 있는 분으로서 다가오시는 것이지요. 그분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영혼이 쉴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분을 쉽게 얻어 만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마음 속에 그분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피상적인 것에서 온갖 위로를 찾고 심지어는 사주와 타로에서 마저도 마음 둘 곳을 찾지만 정작 ‘예수님’이라는 실존하는 인격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감춰진 뜻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5-26) 아버지는 무엇을 드러내신 것일까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지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난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이었지요.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스스로의 지혜를 동원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영리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영리한 머리보다는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맑은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 가질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맑은 마음을 ‘소유’하려고 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로 우리의 지혜와 슬기를 대변하는 것이지요. 맑은 마음은 어떤 물건처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린이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일 뿐입니다. 어린이는 그 천성으로 어린이인 것이지요. 굳이 어린이가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나이를 먹고 지혜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무언가를 가지고 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지니고 소유하고 얻어냄으로써 어린이가 된다면 그것을 잃을 때에 어린이가 되는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되어감으로 어린이가 된다면 그것은 함부로 잃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셈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도구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이사 10,5-7) 아시리아는 거대한 힘과 권력을 지닌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했지요. 아시리아는 당신에게 반역하는 선택된 민족을 다스리는 도구로 선발된 민족이었고 그리하여 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제 스스로 잘난 맛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지닌 자신의 힘과 권력이 바로 자기 스스로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아시리아 역시 제압할 계획을 세우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흔히 힘과 권력의 구도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많은 재산을 지니고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지배하고 정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달린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한 제 위치에 있는 것이지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 어떤 존재라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그에 합당한 조치가 내려지게 됩니다. 인간은 영원하지 못하고 풀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단 일 분 일 초도 버티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뉴스에 민감합니다. 세상의 권력 구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촉각을 세우고 바라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과 공연한 걱정을 24시간 싸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은 하느님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생각을 거기에 집중해서 하지 않아도

공동 운명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마태 10,23) 예수님은 도시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그 도시들이 대화의 상대자인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즉, 그 도시 자체가 인격이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계시지요. 우리들은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운명을 같이 합니다. 저마다의 고을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 책임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공동체는 우리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볼리비아의 본당에 머무르는 동안, 저는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제가 맡은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엄연히 제가 머무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성화의 의무를 다해야 했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했지요. 만일 그 공동체가 칭찬을 받는다면 그건 당연히 나의 몫이기도 했고, 반대로 그 공동체가 욕을 먹는다면 그 역시 나의 몫이기도 한 셈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족에 책임이 있고,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만 구원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공동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주변에 책임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나 혼자 거룩한 법은 없습니다. 가능한 한 이웃의 성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상황이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기도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드러나는 내면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마태 10,26) 모든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만천하에 드러나 있지요. 우리가 숨겨야 하는 것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겸손되이 감추는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은 드러나는 그 순간 그 자체로 우리에게 징벌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랑스러운 일은 드러나는 그때에 우리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겉으로 꾸미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안에 가득 찬 것이 밖으로 배어나오게 해야 합니다. 속에 든 것이 없을 때에 우리는 겉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나는 전혀 착하지 않은데 착한 척을 합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내어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머지 않아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니까요. 우리는 내면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창고에 향기 나는 과일이 가득 들어 있으면 문을 열 때마다 그 향기가 퍼져 나가고, 반대로 창고에 썩은 과일이 가득 들어 있으면 문을 열 때마다 그 향기가 퍼져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선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그 선이 퍼져 나가고, 반대로 우리의 영혼에 악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아무리 주변에 ‘위선’이라는 향수를 뿌려도 결국에는 그 악함이 퍼져 나가게 마련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알아 주시고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실천하는 정당함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루카 10,29) 하느님만이 정당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올바르십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배워 나가야 하는 존재들이고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교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그들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즉 정당함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당한 것은 가장 사랑하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실로 사랑하실 수 있고 진실로 정당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당할 수 있는 것은 ‘이론’ 뿐입니다. 사실 가장 표독스런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함을 가장 내세웁니다. 그들의 정당함은 상처를 입히는 정당함이고 남을 살리는 정당함이 아니라 남을 해치는 정당함입니다. 그들의 이론상의 정당함은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로 정당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 교사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는 진실로 정당함을 찾은 게 아니라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들은 실천 앞에서 말을 잃고 맙니다. 이들의 이론은 실제 앞에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공허 속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아무런 권위도 지닐 수가 없었습니다. 즉 반대로 우리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책을 10권 써내는 사람보다는 견디기 힘든 가족 구성원을 참아 견디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이 더 위대한 법입니다.

인간이 움직이는 근본 원인

사람은 욕구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원하지 않으면 활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원할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육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합니다. 배가 고프고, 잠을 잘 자고 싶고, 춥거나 덥지 않기를 바라지요. 고통을 겪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욕구에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즉 ‘생존’이라는 활동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일을 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노동을 하지는 않더라도 아무리 게을러도 밥을 입에 떠넣기는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비로소 두번째 욕구가 시작되게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호기심이 있는 존재이지요. 동물들도 호기심이 있습니다. 고양이를 새로운 장소에 놓아두면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탐색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교육이라는 활동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상 안에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주고 받고, 또 온갖 것들을 바라보고 듣고 하면서 매순간 무언가를 정신에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내면에는 숨겨져 있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유의지와 상관이 있으며 우리가 결정하는 욕구입니다. 이 깊은 내면의 방향성 속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아닌 전능한 존재’를 향한 외적인 방향과 ‘순전히 나’를 향한 이기적인 방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정을 하고 두 방향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도 이미 내적으로 일종의 잣대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아무리 배우지 못한 아이라도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된다는 것, 즉 내가 다른 아이를 때려서 울리고 내가 그것을 보고 낄낄대고 웃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