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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6의 게시물 표시

고기 잡이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루카 5,4) 깊은 데로 가야 합니다. 얕은 곳이 아니라 깊은 데로 가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피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 가벼운 삶의 언저리에서 머무를 뿐, 깊은 곳으로 들어갈 시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물을 쳐야 합니다. 고기를 잡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물을 준비하지도 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그물인지도 모릅니다. 큰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그물코가 넉넉한 것을 준비해야 하고 잔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그물코가 작은 것을 준비해야 하지만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기들은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영혼을 잡는 그물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입니다. 돈도 거대한 건물도 아닌 ‘말씀’과 ‘사랑’이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실제로 베드로에게 고기를 선물 하십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러한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호수에 있지 않고 배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언저리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즉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그물을 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을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의심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내가 다른 이들의 영혼을 모아들일 자격이나 되는 사람일까를 의심합니다. 하지만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지닌 능력을 빌려 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배가 고기로 잔뜩 쌓인 것입니다. 아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을 신뢰하고 일

나는 전해야 한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사람들은 가치를 알지 못하면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치를 알기 시작하면 그것을 소유하려고 듭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와 무관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소중히 여기는 볼리비아의 수많은 이들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저를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고 떠올리고 기도해 주고 격려를 전해 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치를 알기에 그들을 소중히 여기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의 가치를 알기 시작하게 됩니다. 헌데 이때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소유’하고 싶어하니까요. 즉 그들이 오직 우리를 위해서만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소유의 성향은 모든 것에 두루 미쳐 있습니다. 길가다 보게 되는 아름다운 꽃은 우리가 바라보면서 즐기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싱싱하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도 그 꽃을 즐기게 되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 꽃을 꺾어서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럼 그 꽃은 그때부터 원래의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누군가 어떤 좋은 것을 지니고 있으면 그가 가진 그것을 더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헌데 그 재주를 ‘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으로 삼고자 욕심을 부리면 그는 원래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성심껏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래의 가치를 아예 알지 못하거나 또는 알고서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 전해지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쓰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선교에 헌신하지

선교의 의미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1코린 3,6-7) 무엇을 심고 어떤 물을 주고 무엇을 자라게 하는 것인가? 이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이들이 이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 ‘숫자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비자 숫자, 냉담자 회두 숫자, 교세 통계 등등이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한 척도를 차지했지요. 특히나 군대는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세례자를 배출한다는 명목이었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런 의견들은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숫자들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지 되살펴보게 되었지요. 우리가 진정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지요. 얻고 잃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뼈를 순식간에 뽑아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뼈는 날 때부터 존재해서 서서히 굳어가고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키워 나가고 성장시켜 나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뼈가 단숨에 사라지거나 없던 뼈가 일순간에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의 씨앗은 참으로 작습니다. 아주 작은 깨달음, 아주 작은 전교의 행위가 그 씨앗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주는 이들이 존재하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 끝에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씨앗을 심은 사람이 있으니 씨앗이 자라는 것 아닌가? 씨앗을 심은 사람은 마땅히 중요한 사람이 틀림없다.’라고 말이지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씨앗을 심기를

육적인 사람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1코린 3,3) 육적인 사람은 육으로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물질을 의미하지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결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우리에게 ‘소유’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내 것, 우리 것이라는 말은 곧 네 것, 너희 것을 그 반대 개념으로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나의 것으로 소유한 이상은 ‘시기’와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부부 사이에도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과 너의 것의 경계가 분명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시기하고 싸우게 되는 것은 육의 인간에게 영의 인간을 내어 맡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그 순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영을 따라서 몸이 움직여야 정상입니다. 몸을 따라서 영이 움직이면 그것은 엇나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육적 인간은 영적 인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영적 인간이 육적 인간에게 복종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술은 절제와 더불어 즐겨야 합니다. 하지만 몸이 술을 찾기 시작하고 우리의 영혼이 그것을 지나치게 허락하기 시작하면 결국 몸도 망가지고 영혼도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따라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는 기쁨과 평화, 침착함과 온유함, 인내와 겸손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육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시기와 다툼 중에 살아가게 되고 결국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

성전

성전 건물을 짓는 것과 영적 공동체인 성전을 건설하는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입니다. 때로는 외적 건물만 지어놓고 내적인 성전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반대의 경우로 내적 성전은 잘 이루지만 외적 성전이 미흡한 경우도 있습니다. 신설 본당에 발령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적 건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에 지을지 어떻게 지을지 땅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어떤 순서로 지을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쓰는 것은 내적인 성전입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고 하느님에게로 데려갈까 하는 것이 제가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성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겠지요. 마땅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것은 내적인 필요에 따라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사치들만 잔뜩 모인 곳은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시장’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이들이 모이면 나무 밑에 평상을 깔고 미사를 드리더라도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먼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하느님 아래에서 한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전이든 조립식 건물이든 천막이든 무언가가 마련이 되겠지요. 하지만 무엇이 마련되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1코린 6,19)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마르 13,1-2) “이 성전을

더러운 마귀의 영의 고백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루카 4,34)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만일 이 구절의 뒷부분만을 따로 떼어 내서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제시한다면 그는 ‘이것은 훌륭한 신앙 고백인 것 같습니다.’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고 입으로 고백하고는 있지만 그분을 따르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 듣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앞부분을 살펴보면 그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갑니다. 그들에게, 즉 악한 영에게 예수님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유사한 영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알면서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윤리 도덕이 없을까요? 아마 그들도 자기들 세계의 질서가 있고 그것을 지킬 것입니다. 깡패들도 자기들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다른 깡패의 구역을 함부로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질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이 누군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 사람들도 신호등은 지키고 법 규정은 지킵니다.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그 이상 무엇을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시자 그들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빼앗기고 절망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무언가를 빼앗긴다고 여기는 이들은 주변에서 크게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는 어떻게 겨우 나가지만 그 이상의 일은 죽어라고 피하는 이들이 있고, 성경에

하느님의 영과 현세적 인간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코린 2,14-15) 하느님의 영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해결할 방법을 찾고 해결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세적 인간에게 하느님의 영이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어리석음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영’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속을 열어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영은 거룩하고 내밀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활동은 영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의 영의 상태에 따라서 외적인 것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둠의 영을 지니고 있으면 그 영에 따라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은 빛을 꺼내지 못합니다. 언제나 어둠 앞에 파묻혀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꺼내는 모든 것은 어둠이지요. 반대로 우리가 빛의 영을 지니고 있으면 빛에 따라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빛에 따라서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을 즐기게 되지요. 그것들이 빛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 밖의 어떤 존재도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살아가는 이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두부로 칼을 자를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칼이 두부를 자르는 것이지요. 이리저리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자를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로 나무의 길이를 재어야 하지요. 이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이는 그렇지 못한 이를 분별할 수 있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그

헤로디아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르 6,19) 세례자 요한과 같이 올바른 뜻을 내면에 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헤로디아 처럼 앙심을 내면에 품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뿜어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선한 의지는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의지는 악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그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악인들이 악을 선택하는 이유는 선보다 악이 좋기 때문입니다. 선은 지루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악인들은 쉽고 편하고 자신에게(만) 득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술을 진탕 마시는 사람도 그렇고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의와 악의를 내면에 품고 있는 동안 온갖 기회들이 지나갑니다. 선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회와 악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회가 지나가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기회를 잡아서 선과 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선의를 지니고 있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인 선을 실천해야 하지요. 우리가 그런 기회들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더욱더 훈련된 사람이 되지요. 선을 자꾸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선의 기회가 다가오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단련이 됩니다. 반대로 악을 자꾸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많은 악에 노출되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더 극심한 악을 저지르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증오를 품은 이의 상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결국 뜻을 이루고 맙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선을 가득 품은 이의 상징과 같은 존재입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선을 실천했고 마침내 순교의 기회를 얻게 되지요. 물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자 요한은 그저 하나의 바

복음은 도전입니다.

육신을 때릴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입니다. 영신을 때릴 수 있는 것은 영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육신으로만 억압 당하고 고통 당 하는 것이 아니라 영신으로도 억압 당하고 고통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아무런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 수많은 영적 폭력을 허락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은 수많은 것들로 사람들의 정신과 영에 폭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사라는 강압을 세뇌하고 나와 다른 이를 비교하여 나에게 필요치 않은 것을 이루도록 강요하며 전혀 내가 아닌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내가 선을 행할 자유를 억압하여 세상의 평균 기준에 따르게 합니다. 그런 여러가지 폭력 속에서 우리는 길들어가며 무엇이 진정으로 선한 것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참되고 고귀한 것인지를 점차 잊어가기 시작하고 세상이 좋다는 것이 좋은 줄로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억압되어 있고 폭력을 당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상태에 변화의 의지 없이 만족하며 살게 됩니다. 바로 이를 깨뜨리는 것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정상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극명히 드러내어 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세대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말하고 세상 일을 걱정하는 세대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찾으라고 하며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복음은 도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쌍날칼과도 같아서 사람 속의 숨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에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니, 두려워합니다. 복음에 다가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신앙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괜히 복음에 다가섰다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이를 모두 알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

구체적인 실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마르 6,18) 옳고 그름을 아는 것과 옳고 그름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입니다. 전자는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후자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옳은 일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갓난쟁이 순진한 아이를 때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아이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은 비겁함입니다. 그때는 나서서 ‘그러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고 도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철없는 아이를 보호해 주어야 하지요. 우리는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 앞에서 때로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의 범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엉뚱한 과용을 부리기도 하지요. 즉, 자기 자신의 가족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인터넷 상의 기사들을 읽고 흥분하고 그 투사가 되겠노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마주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세상 그 어떤 이도 올바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올바로 직시하고 개선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를 바꾸는 데에는 ‘구체적인 실천’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용기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그른 일인지를 알고 그것을 나 자신과 내 주변, 즉 내가 구체적으로 만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변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명함은 나를 절제하게 도와주고 공연히 신경쓰는 일을 막아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더욱 집중하게 도와줍니다. 사실 이 일만 해도 산더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구체적으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히브 12,22-24) 저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할 것입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그 이미지가 저마다의 선호 대상에서 비롯한다는 것이지요. 즉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에 과일을 둘 것이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에 꽃을 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마주하게 될 천국은 전혀 다른 것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히브리서 말씀의 내용이지요.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서 모든 것을 마련해 두시겠지만 핵심이 전혀 달라지는 셈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지극히 피상적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 좋은 것들, 특히 나 개인에게 좋은 것들을 상상하지요. 하지만 천국은 보다 공동체적이고 신적이며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날마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다시 열매가 열리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이들이 사랑으로 일치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의 성경 표현을 읽으면 선뜻 그 말씀이 와 닿지 않습니다. 도대체 저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고 서로를 보듬고 아끼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위의 말씀은 그야말로 천상을 그대로 표현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기쁨을 느끼시나요? 인터넷 쇼핑몰에서 신상품을 구매 했을 때에 기쁨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와 참된 애정을 주고 받을 때에 기쁨을 느끼시나요?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쁨의 바탕이 존재하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헌데 문제는 천상에서 누릴 기쁨은 지극히 영적이고 내적인 것이

겸손과 교만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집회 3,20;28) 하느님의 권능과 그 능력이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거대한 폭포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낮은 곳을 향해서 흘러가는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그 물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 아래 서 있는 것들을 쓸어 버립니다. 유구한 세월 동안 바위도 뚫어 버리고 말지요. 그리고는 잠잠해져서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고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 하십니다.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 앞에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그 실행을 당장 이루지 않고 그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이 그것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드높이는 동안 아무 일도 없음을 보면서 더욱 기고만장해지곤 하지요. 그리고 그들이 더욱 교만해질 수록 훗날 이루어질 하느님의 정의는 더욱 쌓여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겸손한 이가 더욱 더 겸손해 질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를 오랜 시련으로 더욱 단련하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이가 그 내면에 더욱 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갈 수 있게 도와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거대한 능력의 폭포가 모두 다 담길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정의를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상선벌악, 즉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지극히 간단한 정의입니다. 다만 인간의 변덕을 참아 기다려주시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는 절대로 교만하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중독과 깨어남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변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들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텔레비전과 술이 있고, 담배,, 외모 가꾸기, 쇼핑하기, 인기를 얻기, 권력 지니기 등등이 뒤따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정한 이러한 기준들에 도달함으로써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것들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닥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두 가지 방향성이 나뉘게 됩니다. 더욱 더 그러한 것을 파고드는 ‘중독’의 상태와 본연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깨어남’의 상태로 나뉘는 것입니다. 중독의 결과는 심각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의미없이 그 행동을 반복할 뿐입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해 텔레비전을 틀고 멍하니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에 의존하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외모를 가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데에 중독되어 가는 이들도 있지요. 그리고 중독 상태에서 사람은 갈수록 내적으로 피폐해져 갈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그 중독을 견뎌내지 못하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텔레비전의 재미난 채널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 무료함에 스스로 무너지는 시기가 다가오게 되고, 미모를 아무리 가꾸어도 시간이 갈수록 진행되는 노화를 이겨내지 못하며, 술은 결국 건강을 해치고 말지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중독을 멈추어야 할 때에 인간은 ‘금단증상’을 겪게 됩니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시련이지요. 이것을 이겨낸다면 다행이지만 이겨내지 못한다면 사람은 완전히 망가지게 됩니다. 깨어나기 시작하는 이들은 행복의 본질을 찾아 나섭니다.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속이는 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 안에는 자신을 스승이요 인도자로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코린 1,17) “세례를 주는 게 복음을 전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세례는 중요한 성사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는 두가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전례가 그러합니다. 모든 전례는 그 외적 행위와 내적 행위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외적 행위가 부족하더라도 내적 행위가 충만하면 부족한 외적 행위는 충만한 내적 행위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완벽한 외적 행위를 이루더라도 내적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행위라면 그 행위는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 ‘회개’ 하였음을, 옛 생활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결심을 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그런 내적 행위는 전혀 채우지 않은 채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교리를 받고 세례 당일날 가서 이마에 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의 외적 행위를 채운 것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묘사되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 진정으로 행복하게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미난 코메디 프로를 보면 기쁠까요? 백화점에서 1억원치를 쇼핑하면 기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참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고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쁠 수 있는 이유는 기쁨의 근원이신 분에게 가까이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기에 기쁜 것이지요. 헌데 오늘날 사

우리는 모두 종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마태 24,45-47) 오늘 복음은 다른 이들을 돌볼 직분을 맡은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가르침이 되겠지요. 통상적으로는 사제단이 될 것이지만 평신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이고 공동체의 장을 맡고 있는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주인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종들 사이에 직분이 나누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종은 마당을 쓸고, 어느 종은 부엌일을 하고, 그리고 어느 종은 그런 종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을 맡은 것 뿐이지요. 우리는 모두 같은 종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들이지요. 헌데 이런 종들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뛰어난 존재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스스로를 주인의 위치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른 종들을 잘 돌보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주인의 존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상실한 그들은 저마다의 뜻이 가장 으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뜻, 즉 ‘이기심’에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들의 오만, 즉 갑질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한참 뛰어넘어 계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만 올바로 되새길 수 있어도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지

부르심을 받은 이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코린 1,2)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인사를 전합니다. 아주 짤막한 인사글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이들입니다. 다른 무언가로 거룩하게 되거나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좋은 성당이다, 아니다를 분별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아마 신자수, 성당의 크기, 성당의 양식, 사는 지역의 수준, 교무금 수준 등등을 공동체의 가치 기준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분별 기준일 뿐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오직 하나의 기준, 즉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 10명만 있어도 한 고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던 하느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동체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저런 ‘사업’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해야 할 핵심을 도와주기 위한 부수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단순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랑, 성실, 신의, 온유, 친절, 평화, 기쁨’과 같은 가치를 직접 살

어린양의 아내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묵시 21,9)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어린양은 과거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희생 제물로 쓰였고, 따라서 구약의 탈출 사건에서 그 피로 이스라엘의 죽음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으로 어린양이 사용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바로 구약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반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죄를 씻는 소중한 제사인 셈이지요. 헌데 이 어린양에게는 ‘신부(新婦)’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묵시록은 그 신부가 바로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서술하지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하느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상 예루살렘은 마찬가지로 거룩한 이들이 모이게 되는 곳, 즉 천상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시록은 마지막 때를 서술하면서 천상 예루살렘을 드러내지만 그 천상의 예루살렘은 이미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지상의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예표인 셈이지요. 하지만 지상의 교회라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면 지상의 외적 구조상의 교회는 수많은 이들이 분별 없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복음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원래 초대받은 이들이 초대를 거절하자 임금은 길거리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과 비슷한 셈이지요. 지금의 교회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다 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두루 섞여 있지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이 두루두루 섞여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천상 교회의 예표이지만 진행 중인 교회이며 미완성의 교회이고 순례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어린

만남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46) - 그는 학위도 없고, 출신도 유별나지 않고, 인맥도 없고, 고향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주변 것들로 보건데 그는 볼품없는 사람에 불과하군요. - 하지만 당신이 진리에 대한 뜻이 있다면 스스로 다가와서 그를 직접 보고 분별하십시오. 색깔을 알려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색깔을 듣는다고 해서 그 색깔을 분명히 알지는 못합니다. 소리를 알려면 그 소리를 직접 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진솔함과 책임감, 신뢰도를 알아보려면 그를 만나 보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어느 위대한 대기업 출신이거나 무슨 박사 학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그의 영혼을 알기 위해서는 그를 직접 만나 보아야 합니다. 나자렛에서도 진솔한 영혼이 나올 수 있고, 반대로 예루살렘에서도 타락한 영혼이 나올 수 있습니다.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볼리비아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이탈리아에서 깡패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외적인 것을 너무나도 중요시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내면을 분별해 버리고 맙니다.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를 만나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만날 줄을 모릅니다. 단지 같은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두 영혼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뉴스 이야기거나 드라마 이야기거나 서로의 자랑질 뿐이라면 그것은 전혀 만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서로 만났습니다. 기쁨 가운데 삶을 나누고 공유하였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만나지 않습니다. 거리마다 카페가 생겨나도 사람들이 득실득실하지만 우리는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참된 만남은 진솔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곳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1)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이 장면을 꿈으로 목격하고 그 곳에 하느님의 집을 지을 초석을 마련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셨고 당신 스스로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이 지은 성전은 외적 형태를 지닌 성전이 아니라 영혼의 성전, 영적 성전이었지요. 우리 역시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는 그에 합당한 모임 공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데 커다란 건물을 지어놓는 것만큼 공허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흩어져 있는 마음들, 그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 마음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맛을 보여 주어야 하겠지요.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의 향기를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맛과 향기는 ‘거룩함’이고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찾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그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모으려는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에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 거룩함과 사랑이 없는데 그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일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만남’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것을 건네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이로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바삐 돌아다녀도 되고 어느 한 장소를 정해서 모여들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하기 나름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복음 선포자를 만나게 되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테살 2,3) 속이는 이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속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찾기보다는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를 추구하다보면 그 욕구를 자극시키는 거짓 가르침을 만나게 되고 결국 거기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냥 물이 맛이 없다고 단물을 찾기 시작하면 그는 사실 목이 마르기보다는 ‘맛있는’ 것을 찾는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주면 감사히 마실 것입니다. 하지만 맛깔스러운 물을 찾는 이가 있으니 그런 이들은 수사학적이고 현학적인 말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물인가 아닌가보다 그것이 맛이 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셈이지요. 모든 고해성사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사제가 어떤 사람인가, 그가 어떤 보속을 주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지요. 밥을 먹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배가 고픈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을 욕구가 없는 상태에서 음식을 고르면 그 음식의 맛을 두고 따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이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죄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용서를 갈구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로 그 욕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고해 신부를 고르고 고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예전으로 돌아가서 말도 못하는 이방인 신부가 겨우 일년에 한 번, 혹은 5년에 한 번 고을을 방문 할까 말까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그 고해신부가 한국어도 제대로 못한다고 투덜댈 수 있을까요? (이는 여전히 남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음식에 독을 집어넣어 놓고 온갖 화학 조미료로 그 맛을 맛깔스럽게 꾸며 놓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더 중요한 것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마태 23,23) 그들은 왜 십일조를 중요시 여길까요? 보다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저버리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해야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내적인 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의로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채우려고 하고, 자비를 소중히 여기기 보다는 사사건건 따지고 들고 증오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며 신의를 지키기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고 약속을 어기기를 밥먹듯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이기성’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이들인 셈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그들에게 가장 소중해지는 것은 바로 ‘돈’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돈이라는 것에서 바로 자신들의 편의와 안락, 즉 자신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행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스스로 행복함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전혀 다른 행복관을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그들은 모으고 쌓고 착취해야 행복하고, 예수님은 나누고 누리고 베풀어야 행복한 셈입니다. 아마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변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 ‘어리석다’고 하겠지요. 과연 누가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갈 방향을 정했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말은 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완전하신 분이고 영원 속에서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이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 23,15)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이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에 우리는 때로 올바로 대답하지 못하곤 합니다. 주일 미사를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교무금을 내고 판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믿는다고 하지만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본연의 방향을 상실할 때에 우리에게는 부차적인 일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지니지 못한 것을 내어줄 순 없으니 역시 올바른 것을 전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의 행위를 베풀 수는 있지만 그를 참된 신앙의 길로는 이끌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가만 두었더라면 차라리 조용히 살아갈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괴로운 족쇄를 채우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직설적인 표현을 쏟아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이 좀 심한 것 같기는 합니다. ‘지옥의 자식’이라니요. 지옥은 어디일까요?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고 사탄이 우두머리인 곳입니다. 지옥은 일종의 감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없는 곳이지요. 지옥의 자식은 족쇄를 찬 이들을 말합니다. 단순히 외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적이고 은밀한 의미이지요. 지옥의 자식은 ‘죄’를 떠안고 살아가는 이들, 마음 깊은 곳에 족쇄가 채여져 있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그 본질적인 바를 알려주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에게 족쇄를 채우게 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이라는 족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의 일을 새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미사에 몇 분에 도착하는 가가 중

어리석음과 눈멀음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 23,17) 눈 앞에 금화를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탕을 선택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아직 ‘재물’에 대한 가치가 올바로 심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 시절의 선택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색깔을 선택하라는 것은 어리석은 주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고 있어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는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눈먼 이라고 합니다. 어리석고 눈먼 이들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어리석음과 눈멀음이 타인의 탓이라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눈멀음은 전적으로 그들의 탓입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것은 깨닫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이 눈멀은 것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것을 버리고 덜 중요한 것을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상적인 외적 사물들에 사로잡혀 내적인 것들을 올바로 바라보기를 잊어버렸습니다. 미모를 가꾸면서 내면을 가꾸지 못하는 이, 외적인 경력을 쌓으려 하지만 내적인 지혜를 갈구하진 않습니다. 재산을 늘리고 부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영혼들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싶어하지만 겸손의 덕을 찾지는 않으며 정의를 내세우고 누군가를 증오할 줄은 알면서 ‘용서’를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성전의 금과 성전의 중요성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생활 안에서 우리는 같은 오류를 얼마든지 저지

하느님의 자석

어린 시절 자석이 생기면 늘 했던 놀이가 있습니다. 바로 모래밭에 가서 모래 속에 자석을 집어넣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모래 속에 숨어 있던 철들이 자석에 새카맣게 붙곤 했습니다. 때가 이르면 하느님은 비슷한 일을 인간들 사이에서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석을 인간들 사이에 집어 넣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석에 이끌리는 이들을 모아 들이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떤 자석을 쓰실까요? 그리고 우리는 과연 무엇에 끌리게 될까요? 사실 우리가 끌리는 것은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화려함에 이끌리고 외적인 지위와 권력과 명예에 이끌리고 미모에 이끌리고 재물에 이끌리곤 합니다. 헌데 과연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려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선하고 의롭고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선과 정의와 진리를 통해서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을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단순한 연인들간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즉 시련을 견디어내고 영원에 이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이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영혼을 찾으시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들은 순종을 했고 그로 인해서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었지요.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그에 합당한 시험을 치르십니다. 바로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이 당신의 자석을 우리 가운데 밀어넣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다가서는 사람과 그것에서 도망가는 사람이 갈리게 됩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을 알아차리고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가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 시련이 성가시고 귀찮고 괴로워서 떠나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을 분별할

불의를 일삼는 자들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루카 13,26-27)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앙인들을 바라보시는 기준은 그가 의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한 기준과 사람들의 의로움에 대한 기준은 너무나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삶이 엉망 진창인 어느 무뢰한에게 성당 다니는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는 ‘성호’를 긋는 흉내를 낼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악인도 의로운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연의 의로움을 흉내낼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은 의롭게 살아야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의로움의 기준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 과정을 수료한다고 어느 특별 신심 프로그램을 졸업한다고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횟수와 기도 시간이 많다고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고해성사를 길게 보거나 자주 본다고 해서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모든 일들은 내적인 회개 없이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외적인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바라보거나 그분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의로움’이고 내적인 닮음입니다. 우리는 선한 외적 흉내를 낼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가식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그를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도와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나 수녀원에서는 수련 기간

말과 행동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2) 교회 안에서 때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장상이나 주임신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삶에 오류가 많다고 한들 공적인 자리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교회를 따라야 하니까요. 그들은 나름으로 숙고해서 가르침을 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가르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실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가르침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의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의사로서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해서 역설하겠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의 건강은 챙기지 못하는 의사이지요.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서 윤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윤리 선생님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의 이론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지요. 그들은 모두 자신이 가르치는 영역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있지요. 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실을 따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그들의 말과는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지요. 정반대로 비록 올바로 가르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찬란히 빛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런 이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좀처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드러나는 사람은 말이 많은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아는 바를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37-39)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한 계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계명인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계명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만큼 사랑하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엇나감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고 그저 우리 삶의 하나의 옵션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련된 것들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면 언제라도 거기에서 도망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미사 안 나가면 되지.’ ‘성당 안 다니면 되지.’ ‘여유를 좀 찾고 나갈께요.’ 우리는 이런 저런 도전들 앞에서 이런 말을 쉽게 쏟아냅니다. 그러나 위의 표현들을 세속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직장 안 구하면 되지.’ ‘밥 안 먹으면 되지.’ ‘여유를 찾고 돈 좀 벌께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세상 안에서 직분을 상실하거나 당장 우리의 육신에 양식을 주지 않으면 그 고통스러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다음으로 미뤄 두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한 결과는 꽤나 나중에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일상을 올바로 가꾸어 나가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어떤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과 사랑을 향한 나의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밖의 사랑도 올바른 형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떠할까요?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에제 37,1-2) 뼈는 죽은 이들의 잔재를 의미합니다. 곧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지요. 생명 있는 존재가 뼈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군다나 뼈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숨’이나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숨’을 생명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아담과 이브도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었지요. 이제 우리의 주변을 돌아봅시다. 사람들은 모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육신이 숨쉬고 걸어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있다고 단순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생과 사의 갈림길은 육신보다는 영혼에 더 큰 비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죽어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의 육신은 누구보다도 더 생기 발랄할지 모릅니다. 왜냐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잘 가꾸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영혼은 목말라하고 메말라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결과물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맑은 물을 받아들이면 촉촉해질 것이고, 반대로 악취가 가득 풍기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에게서도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육신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것들을 취하고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식사는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그 밖의 여러가지 정보를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살찌울 양식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리

구속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2,13) 때로 복음서를 보면 좀 심하다 싶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혼인잔치에서 쫓아내면 될 것을 왜 굳이 손과 발을 묶는 것일까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게 될 일은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일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손과 발을 묶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억압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마음이 사로잡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걱정이나 근심에 사로잡혀 가만히 의자에 앉아만 있어도 한숨을 쉰 적이 있으신지요? 그것을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만 구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적으로도 얼마든지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기쁘게 살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을 때에는 기쁘고 즐겁지요. 어린이가 그 맑은 마음으로 기쁘고 천진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속에 있을 때에는 그 마음이 즐겁고 기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그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기성에 사로잡혀 어두움에 빠지게 되면 그 즐거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단순히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고 억압받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사실 영적인 부분에서는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죄를 짓는 이를 보고 기뻐하고 그가 더 죄를 지을 수 있도록 더 큰 유혹으로 종용합니다. 우리가 한 번 엇나가는 길을 걷기 시작하면 전에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도 작은 죄들에 익숙해지면서 더욱 쉽게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우리의 자유의지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이는 구속을 당하고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심한 비유를 드는 이유는 그것을 듣고 깨달아 그

혼인 예복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마태 22,12) 혼인 예복은 간단히 말하면 믿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당을 다니면 믿음이 있습니까? 십자 성호를 그을 줄 알면 믿음이 있나요? 주님의 기도를 외우거나 묵주기도를 바치면 믿음이 있는 것일까요? 만일 정말 사악한 사람, 즉 아내를 밤마다 두드려패고 온갖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의 재산을 탐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위에 열거한 외적 행위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외적으로 자신의 평판을 낫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하려고 하지요. 믿음은 외적 표지로 간단하게 있다 없다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밀한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을 올바로 갖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예 그 개념조차 좀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신뢰한다는 표현입니다. 즉,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는 없지만 그 상대가 그것을 이룰 힘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내가 무언가를 믿고 맡긴다고 할 때에 그 상대에게 내가 맡기는 것을 관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눈에 드러나는 지표는 당장에는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신뢰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안에서는 그러다가 뒷통수를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고 맡겼는데 그것을 엉망으로 해서 돌려 받는 경우도 있지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뢰를 쌓아 간다는 것, 믿음을 형성해 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행동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첫인상을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요. 빠른 시간 안에 믿음을 형성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큰 건을 벌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형성하고 그 믿음이 무너

첫째와 꼴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 20,15-16) 마태오 복음의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갑일 때에는 마음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을일 때에는 너무나 기쁜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를 가정할 때에는 성질이 나는 비유이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미천한 위치에 놓으면 기쁨에 찰 수 있는 비유인 것이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흔히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과대평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이미 포도밭에서 고생을 하며 일해 온 사람인 양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의미하는 숨어있는 바는 우리가 하느님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자신의 의미, 그리고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너무나도 쉽게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과대평가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채로 본질을 망각한 채 우리가 드리는 외적인 형태가 모두인 것으로 착각하지요. 즉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훌륭한 신자가 되고, 주일 미사 후에 어느 술집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셔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양팔을 들고 묵주기도를 바친 후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식이지요. 그런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실제로는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내면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런 헛똑똑이와 헛열심이를 두고 꼴찌를 첫째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즉, 겸손하고 무너진 마음을 최고의 제물로 삼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을’의 위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때가 되면 세상의 꼴찌들을 첫째의 자리에 놓아두실 것입니다. (신부님, 첫째가

자기들만 먹는 목자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에제 34,2-6)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이들, 양 떼를 모으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직분을 맡은 이들의 사명이지요. 그가 사제이건 평신도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모종의 직분을 맡게 되면 목자의 일을 나누어 맡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의 일이라는 것은 양 떼를 모으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일입니다. 헌데 그 일은 소홀히 하고 오히려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고,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리고, 양 떼를 흩어버리는’ 목자가 있어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를 보냅니다. 양들의 젖을 짜 먹는다는 것은 그들의 소출을 갈취한다는 것입니다. 일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재물을 누린다는 뜻이지요.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은 공연한 명예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 본연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덮어 쓴 양들의 명예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살진 놈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양들 가운데 가장 통통하게 살이 오른, 즉 참으로 신심이 깊고 열심한 신앙인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그 반대, 즉 온유와 친절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끌어 당기고 겁을 집어먹게 하고 횡포를 부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나아가 그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실

축복

우리는 축복이라는 것을 흔히 그릇에 담겨진 푸딩 처럼 이해를 하곤 합니다. 즉 이미 완제품을 담아서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것을 받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든 상관없이 축복을 건네면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축복이 전해지는 방식은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칩니다. 축복은 그것을 특별히 수여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단지 축복을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이 전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 잘 준비되어 있을 수는 있을 테지요.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복을 주어도 내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가게 축복식을 간다고 합시다. 그 신부님은 정성을 다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정한 축복을 건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집주인은 ‘돈을 더 벌 궁리’만을 하면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사제가 건네는 그 축복은 전혀 전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서 퍼줄 수 있지만 받으려는 사람이 아무런 그릇도 준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물은 바닥에 흘러내려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매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는 신자들을 강복합니다. 그때 우리는 복을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 준비 자체가 바로 ‘미사’이지요. 우리는 미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복을 받을 준비를 하는 셈이고 미사를 마칠 때에 그 복을 온전히 담아 가는 것입니다. 헌데 그 미사를 소홀히 하고는 마지막에 정신 차려 복을 받으려고 한다고 그 복이 온전히 전해질 리가 만무합니다. 우리가 주고 받는 성물(聖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물을 주고 받을 때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성물을 하찮게 대할 사람에게 함부로 성물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그 성물의 의미를 올바로 분별하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성물을 주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축복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상존하는 것입니다.

버리기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 19,29) 버린다는 의미는 여러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버린다는 것을 못쓰게 되어 내던진다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음식물을 버리고 물건을 버리는 통상적인 행위 안에서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 버린다는 의미는 ‘내려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지요.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버리는 행위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접 손에 들고 있어도 그 물건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물건을 매일같이 사용하면서도 정작 그 물건에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우리는 사실 많은 것을 이런 식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루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실제로는 마음에 담고 가지고 싶어 하지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탐욕은 우리의 ‘이기심’에 근거하고 있지요. 내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모든 것은 나에게 속할 때에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올바로 지니지 못하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아껴야 할 것을 내던지기 일쑤입니다.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 우정을 내던지고, 신의를 내던지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예수님은 위에 언급한 것들, 즉 집,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 자녀, 토지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의 마음에서 내려 놓으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릇되이 해석해서 자신이 속한 모든 관계에서 도망쳐 나오라는 말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새로이 관계 정립을 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부가 되었다고 부모님을 내던져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예전의 세속적 생각으로 부모님에게 집착하는 것이

교만한 사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에제 28,2)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짓는 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보다 스스로를 뛰어난 사람으로 보는 것, 혹은 하느님이 없다고 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죄는 이렇게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을 때,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전능하신 분을 늘 곁에 모시고 산다면 그분의 뜻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하고 찾으려고 노력하겠지요. 비록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 이가 죄를 짓는 일은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가장 높은 자리, 즉 신의 자리에 놓는 것이지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오류가 많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잘 성질내고 참을성이 없고 어긋난 생각에 빠져들곤 하는데 그런 우리를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중심 자리에 놓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그는 하느님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데 그 하느님을 잃게 되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가 지니게 될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신의 의지이지요. 그러나 그가 지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그가 하느님 대신에 기쁨으로 삼을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워줄 것들을 일시적으로 지니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재물과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 소중한 셈이지요

진정한 권력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1코린 15,24) 누군가가 한 고을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대로 그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수도에 보고하고 그 수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대로 이행을 합니다. 그럼 그는 그 도성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부에 내어 맡기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이런 이들은 낮추어 볼 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성적인 의미에서 이런 이들, 즉 자신의 결정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는 이들은 참으로 훌륭한 이들, 그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아랫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력을 쥐려 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기를 쓰는 것입니다. 코린토서에서 표현하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한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진정한 권력은 오직 하느님 뿐이고 그분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어떤 권력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결국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앞에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 유한한 인간이 세상 안에서 온갖 힘을 자랑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인들, 특히 미천하고 낮은 이들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특별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좀 더 가졌다고, 좀 더 나은 신분을 지녔다고 해서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이 모든 ‘교만’들을 깎아 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본래의 자리에 놓아 두실 것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 될 것

성모님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 성모님은 당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의 이 구절에서만큼은 당신이 내면에 품고 있던 것을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로 드러내십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장 드높은 영성가셨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담을 그릇을 아무것이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최고의 작품을 그린 화가가 그 작품을 쓰레기통에 담아 보관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작품에 걸맞는 액자를 만들어 그 액자 속에다 보관하여 사람들이 그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할 것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로 선택된 분이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낼 만한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고르고 또 고르신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성모님이 선택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모습은 성경 안에서 많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루카 복음의 성모 찬송가는 그 하나 만으로도 성모님의 깊은 생각을 맛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겸손의 여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이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드러나는 겸손이지요. 우리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겸손된 인간을 반대로 가장 드높이 들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찬송가에는 상반되는 두 부류가 드러납니다. 한 부류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하고, 다른 이들을 통치하려고 하며, 부유한 이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이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이고 영적인 표현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두 부류의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 부류는 그 생각이 참으로 교만하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