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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의인들이 부활할 때 받는 보답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2-14)

이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들은 어찌 보면 다 미리 계산된 행위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것마저도 우리는 그렇게 실천하곤 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 하지요.

사실 순수한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세’의 사정에 너무나도 익숙해지고 길들어져 버린 탓이지요.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정신으로 살다보니 모든 것에 그 주고 받음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것도 훗날에는 돌려받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돌려받게 될 것이고 그 보상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돌려받음의 시기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 돌려받음보다도 베푸는 것 자체를 즐기기 시작하게 됩니다. 꼭 누군가의 감사가 있어서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아직도 볼리비아에서 문자가 도착하고 안부가 전해지곤 합니다. 오늘도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전한 복음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었지요. 어쩌면 저는 이미 이것만으로도 현세에서 받을 상을 다 받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아짐의 훈련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자신을 높이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자신을 높이는 모습을 찾아내곤 합니다. 서로 가진 장난감을 자랑하면서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런 어린 시절의 모습은 단지 외적인 차원만 변화되어서 그대로 어른들에게도 드러납니다. 서로 가진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드러내려는 허영심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똑같은 쓰임새의 제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유명하고 이름값을 하는 무언가를 고르는 이유는 남들에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신제품을 자랑하고 신상 구두를 자랑하고 나중에는 남편의 재력을 자랑하고 훗날에는 자식 자랑을 하는 것은 우리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남들보다 더 나아지려는, 더 높아지려는 움직임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반대의 움직임, 즉 ‘낮아지려는 움직임’에 서투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높아지려고 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낮추려는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일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내면에 달려 있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낮은 사람, 즉 겸손한 사람은 절로 그 겸손이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아직 낮아져 있지 않은 사람이지요. 그런 이들은 외적인 낮아짐을 통해서 내적인 낮아짐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높아지려고 낮아지는 체 하는 것은 가식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낮아짐의 구체적인 실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가식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살짝 낮추면 다른 이들이 얼른 높여 준다는 걸 알고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높아지려는 의도를 애써 억누르는 것, 나아가서 낮은 자리를 스스로…

죄인의 집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루카 19,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회개하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죄인은 곧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율법 규정을 잘 지켰노라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의로움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은 결코 온전히 의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지혜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그런 우리들이 서로 상대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리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입니다.

흰 것을 희다 하고 검은 것을 검다 하는 것은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이런 저런 가능성이 있는 것을 두고 ‘저것은 검은 것이야 절대로 희게 바뀌지 않아’라고 하는 것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모든 죄인들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고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를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한 것을 모아서 자기네들끼리 잘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모아서 치유하고 고치고 힘을 북돋아 주어서 다시 일어나 가게 하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지나친 결벽증에 스스로 주님 앞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상태인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만나러 와 주실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7)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머무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근처에서 살아간 이들더러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성지 순례를 가고 심지어 예루살렘을 수십번 다녀온다고 해도 그 행위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자랑거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앎’은 굳이 가까이 머무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그 어느 곳도 순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은 예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헛된 명예에 빠져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더 많이 배웠다고 주님을 안다고 자부하며,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성지 순례를 몇차례나 다녀왔다며 예수님을 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장님입니다. 그들의 교만이 도리어 그들을 눈멀게 만든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눈 뜬 장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아는 자는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이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자 입니다. 훗날 누가 진정한 꼴찌이며 누가 진정한 첫째인지 똑똑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루카 13,18)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 무엇으로도 올바로 표현해 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을 아무리 묘사하더라도 그의 온 생을 모조리 나열할 수는 없는 것처럼 하늘 나라의 충만함과 완전함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올바르게 묘사해 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하늘 나라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충만함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비유로써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루어 낸다는 뜻이지요. 아주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소하고 약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것이 훗날 소중한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세상을 바라봅시다. 무엇이 미소하고 약한 것인가요? 무엇이 드러나지 않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인가요? 사실 반대쪽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무엇이 엄청나고 강한 것인가요? 무엇이 드러나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의미를 두는 것인가요?

성공, 권력, 명예, 재화, 미모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 외적 화려함을 알고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우리는 권력가들을 욕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부러워하고도 있으며 우리도 돈만 잔뜩 벌면 그들이 누리는 삶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것들이 있으니 진실, 선함, 정의, 기쁨, 온유, 친절, 선행, 선의, 관용, 용서, 사랑, 평화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으며 사람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를 바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분노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친절과 온유가 사람을 바꾸고, 악한 의도가 사람을 바꾸는 …

순종, 사랑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에페 5,24-25)

우리의 몸은 하나입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의 지체로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역할들이 있으니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의 머리와 심장일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둘 중 하나가 죽어버리면 거의 그 즉시 생명을 잃게 됩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에 순명합니다. 그것이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리는 심장에서 피를 받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머리는 무엇보다도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심장은 머리에 피를 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 하나의 몸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부부는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세 순명해야 합니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으면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모든 것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순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나 오늘날과 같은 여성의 권위가 드높아지는 시대에 ‘순명’이라는 말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가정 안에 분명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 순환 고리가 깨어지면 서로는 서로를 비난하게 됩니다. 남편은 아내가 순명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또 서로는 서로의 위치를 무시하고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지배하려 하고 남편은 자신의 심장이 아닌 다른 심장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몸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

열심한 사람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에페 4,32-5,2)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가 종교적 색채를 잔뜩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에 열심한 사람을 손꼽으면서 ‘미사에 자주 나가는 사람,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는 사람, 여러 신학 강좌를 섭렵한 사람, 피정을 자주가고 성지순례를 자주 가는 사람, 단식과 금육재 등 교회의 규정들을 어김없이 지키는 사람’등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드러내는 외적인 모습은 내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외적인 모습이 거룩하다고 해서 내적인 모습도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정말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할머니가 어느 날 자기가 늘 앉는 자리에 물정 모르는 다른 할머니가 앉았다고 버럭 화를 낸다면 도대체 그 ‘열심한’ 할머니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했던 것일까요? 성당 봉사에 빠지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하게 난 한 자매가 정작 집안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소홀하게 대하고 제때 끼니도 챙겨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자매의 봉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이처럼 우리는 실제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몫은 오로지 하느님의 것일 뿐이지요.

다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하다는 의미는 위의 성경 구절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그럽고 자비로워야 하며 서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헌데 그 하느님은 드높고 거룩하신 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닮는다는 의미입…

적대자의 망신, 군중의 환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같은 말을 두고서 갈려 나온 두 가지 반응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두고서 갈려 나오는 두 가지 반응이기도 하지요. 왜냐면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훗날 받게 될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응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한 편은 망신과 수치와 굴욕과 패배감과 좌절감에 휩싸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기쁨과 환희와 영광과 경외를 느낄 것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보고 느끼게 되는 서로 상반된 반응, 그것이 우리를 곧 천국과 지옥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어딜 가도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을 기쁨으로 느끼는 자는 그곳이 곧 천국이 되고, 또 반대로 어딜 가도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을 피하고 싶은 이는 곧 지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대로 일을 하셨고 그 같은 말과 행동 앞에서 사람들은 두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사이에 시작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모든 것의 상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난 보도나 사건 사고 보도를 접하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위협을 앞에 두고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이라는 것을 단순히 육신의 생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삶의 기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누리고 만끽해야 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에 힘을 쏟게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수명을 한 치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지요. 인간의 모든 활동은 바로 거기에 촛점 지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다른 예비된 삶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실은 그 예비된 삶이 보다 진실한 삶이라면 말이지요. 아마 그 ‘만일’을 ‘믿음’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의 방식은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흘러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찰나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질을 중요시하게 되겠지요.

친구와 함께하는 식사에서 식사의 가격을 중요시 여기는 게 아니라 친구와의 우정을 더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무언가를 더 많이 소유하는 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진 것을 가치롭게 이용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단계의 ‘믿음’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여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물건 때문에 영혼을 다쳐가며 싸우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때이지요. 이제는 무언가를 헌신해서 정말 맺어야 하는 열매를 맺기에는 남은 것이 별로 없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젊은 시절 살아온 삶이 ‘관습’으로 남아 버려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지요.

안타까운 인간의 영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8-9)

주인의 말에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라 버리시라’고 합니다. 다만 자신의 책임 하에 시간을 조금만 더 연장해서 기회를 주자는 말입니다. 한 해라는 시간 동안 다시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 시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면 그때는 잘라 버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이 심은 나무들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여기 존재하는 나무들이지요. 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즉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여 내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을 키워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에서 명망 있고 알아주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과 위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오히려 자신의 교만과 탐욕으로 열매 맺는 나무도 질식시켜 버리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아버지에게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지금 잘라도 아무 하자가 없을 나무를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걸음에 주목하고 그 걸음걸음을 잘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저주하고 뽑아 버리자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럼 내가 한 번 더 해 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 만나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정성껏 보살피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이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사제들

사제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곧 기쁜 소식이고, 사제들이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쁜 것입니까? 아니면 외모가 아름다워져서 기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찰나적인 쾌락거리들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적인 것이고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에 머무를 때에 느끼는 내적 고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을 때에 느끼는 평온함이지요.

물론 이런 내적 고요를 지녔다고 해서 외적으로 그 어떤 하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 문제는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처리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내적 평화는 외적인 문제와 상관없이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영들의 공격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사건을 뒤흔들어 내적인 면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주변에 자꾸 힘든 일을 조성해서 결국 그가 내적으로 흔들리게 만들어 버리지요. 그래서 사제 주변에는 시끄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에 적절히 대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응하려 들다가는 결국 내면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내적 평화로 이끌어주는 으뜸이야말로 기도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기도는 단순히 시간이 되어 반복하는 기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진실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배워 아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의 뜻’을 그분의 뜻 앞에 내려 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툭하면 올라오는 우리의 욕구들을 올바로 제어할 수 있기만 해도 큰 유혹에 빠져 내적인 평화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그 동기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이면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술을 과하게 마시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가담을 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복수하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배제시키고 말이지요.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한 척을 해도 결국 자신을 향한 방향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복에 둘러싸이고 드높은 수준의 생활을 유지한다고 해도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가지 이유들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겠지만 결국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노릇이지요.

언뜻 선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교묘히 자기 자신을 위한 방향을 숨겨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겉으로는 엉뚱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일 수도 있지요. 결국 사람은 서로를 심판할 수 없는 법입니다. 다만 서로의 선의를 믿고 열심히 돕는 수 밖에요.

물론 그 행위 자체로 나쁜 것들도 존재합니다. 흥청대는 술자리, 만취, 시기, 증오, 분열, 중상과 같은 행위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그런 것들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일들에서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하느님인지 자신의 이기성인지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이 주어진 동안 많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지니고 있고 좋은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욕구에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씌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평화와 분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정당함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분열을 일으킨 뒤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빛이 다가오면 어둠이 더 짙어지기에 예수님이 오면 세상의 숨어 있던 면모가 드러나고 진정한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비록 한 식구가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 숨긴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뒤에 무엇을 할 것입니까? 분열이 일어났으니 상대와 맞서 싸우고 그들을 파괴하고 없애 버릴 것입니까? 아니면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드러내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까지 당신을 못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분열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열이 있고 나서 우리는 사랑하고 품어 안고 끌어 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사람은 그런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자기 스스로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열 뒤에 그들을 내쳐 버린다면 그들에게 변명거리를 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에페 3,17)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우리의 내면에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뿌리 내려 그 사랑을 우리의 기초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악을 즐기는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악을 완성하는 도구로 쓰이게 됩니다. 싸우고 다투고 갈라서기를 즐기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기초적인 이해조차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잃어…

파괴하려는 이들

우리가 하느님을 잃으면 거짓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은 파괴적인 것이 됩니다.

세상에는 ‘인본주의’를 표방한 것들이 많습니다. 휴머니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은 인간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이는 일들을 합니다. 소위 잃어버린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인본주의는 그 가장 밑바탕에 ‘무엇이 선이고 사랑이고 진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길을 잃고 맙니다. 한 부류의 집단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집단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은 이데올로기, 즉 하나의 이념으로 남게 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그 이념을 위해서 다른 이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이고 또 위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과 사랑과 진리에 기반한 그리스도인, 즉 하느님을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은 파괴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살리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가톨릭’을 표방한 사람들이 파괴하고 부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에 기반한 것인지 알고 있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해서 다른 이를 향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부수고 무너뜨리려 하지만 그 반대로 세우는 것이 없습니다. 세우는 일은 인내를 요구하고 고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반면 파괴하고 부수는 것은 금방입니다. 그들은 좋은 것을 무너뜨리고 그 재료로 아주 초라한 자신의 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아웅다웅 살아 왔습니다. 한 부류가 득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노리던 다른 부류가 득세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또다시 기득권 세력이 됩니다…

주님의 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아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지르는 불이 붙으면 사람은 타오르게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을 허울좋은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착각합니다. 신앙을 지닌다는 것이 우아한 성전에서 미사보를 쓰고 기도 드리고, 예쁜 묵주알을 굴리며, 나와서는 본당 근처 커피숍에서 우아하게 수다를 떠는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치열한 것이며 영적 전쟁과도 같습니다. 다만 우리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우리의 무기는 진실과 선, 정의와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갑옷은 겸손과 온유, 인내와 절제이지요.

우리는 이런 무기와 갑옷을 챙겨 입고서 세상에 싸우러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자신들과 한통속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리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시기, 질투, 탐욕, 분노, 증오와 같은 것들을 잔뜩 발휘하도록 하지요. 그런 세상에 대응해서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하고 또 그에 맞서서 선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은 ‘불’에 타오르게 됩니다. 그 불은 하느님의 거룩한 불이고 열정입니다. 즉 성령의 불이지요. 그리고 이 성령의 불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어둠에 빛을 비추면 어둠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빛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게 용기있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하고 편안한 것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그런 이들은 불편함을 감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불편함이 다가와도 곧잘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가 없습니다.

훗날 우리는 불의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헛된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영원할 것처럼 아끼고 보듬어 왔던 것들이 불을 …

모든 이를 위한 비유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루카 12,41)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서 그것을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고 적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깨달은 이들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부여되고 적게 깨달은 이에게는 적은 책임이 부여됩니다.

그렇다면 적은 책임을 지기 위해서 적게 받아들이고 적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받아들이고 많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큰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다만 우리의 게으름이 그것을 가로막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똑똑하고 어떤 사람은 덜 똑똑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건강을 지니고 있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장애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들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똑똑한 사람이 말씀을 덜 받아들여 더 못된 사람일 때도 있고, 반대로 날 때 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더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설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저마다에게 책임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 책임은 ‘영혼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영혼을, 누군가에게는 더 적은 영혼을, 그리고 누군가는 그저 제 영혼이라도 챙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책임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사도들인 이유는 더 많은 영혼을 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의 고민에서 자유로운 한편 하느님에게 더 다가서야 하고 이웃들의 구령을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정신없이 바쁜 이들은 적어도 자기 영혼이라도 챙겨야 합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선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훗날 셈을 하실 것입니다.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더 많이 맡기셨고 누…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2티모 4,14-15)

바오로 사도에게 해를 입힌 이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바오로 사도는 그가 한 행동을 서술합니다. 그는 우리의 말, 즉 ‘사도들의 말’에 몹시 반대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요? 사도들은 복음, 즉 기쁜 소식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주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라 나서서 결국 영원한 영광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에 반대했고 또 바오로 사도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알렉산드로스에게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선포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그 길을 따라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이 현세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벌어들인 것은 우리가 써야 하고, 우리가 잃은 것도 채워야 하지요. 바로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이 반드시 그 결과를 드러낸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들에게 일찍 맞이하는 죽음은 재앙일 뿐이며 현세의 고통은 피하기만 해야 할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세를 사랑하고 또 현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삶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극단적이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차려 주는 음식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루카 10,8)

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들어가는 식재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 복음에서 한 번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요한 4,32)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4,34)

그렇습니다. 사람의 양식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의 양식이 더욱 소중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하니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어도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먹는가 하는 것이지 음식 자체는 사실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정말 꼬락서니가 맘에 안드는 직장 간부가 회식을 초대하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음식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거기 앉아서 먹을 뿐이지요. 아무리 입에 들어가는 것이 향기롭고 맛있다 하더라도 직장 간부가 독선적이고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면 긴장을 하느라고 음식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거기서 도망나가서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는 것이 더 속편하고 맛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어느 고을에 가던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복음 선포자가 받아들여야 하는 육신의 양식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선교사는 환경이 좋은 곳에 갈 수도 있고 환경이 나쁜 곳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차려진 것을 먹는 것, 즉 거기에 있는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한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차려진 음식을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 어떤 이든 다가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음식은 단단할 수도 부드러울 수도 있고, 잘 준비된 것일 수도, 아주 서투른 상태로 거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

성경의 목적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2티모 3,16)

성경의 목적을 간결하게 잘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이 성경을 전혀 엉뚱한 목적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더욱 교만에 빠져 들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는 방향성에 기인합니다. 즉, 내가 하느님에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나에게 끌어당길 것인가 하는 방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유익합니다. 성경은 그 길을 올바로 가르쳐 주지요. 하지만 하느님을 나에게 끌어당겨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정반대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지식은 그의 교만을 쌓는 데 도움을 주고 그는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지요.

이는 성경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이 변모하실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말처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으로 예수님을 초막에다 사로잡아 두려고 했었지요. 헌데 그런 어리석은 행위를 오늘날 우리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을 우리를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서 필요한 일을 하느님을 끌어다가 이루려고 하지요. 형제님들은 교회의 일이라는 핑계로 교회에서 ‘정당한’ 오락을 찾고, 자매님들도 집안 일에서 해방되려는 심정으로 교회에 열중하곤 합니다. 성당에서 틈만 나면 흥청대며 술을 마시는 게 일상화 되어 가고, 가정을 소홀히하고 성당에서 놀려는 자매님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그러면서도…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자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

“아니, 신부님. 그럼 왜 하느님은 지금 세상의 온갖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니요, 잘못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하기를 바라시는 분께서 마냥 쉬고 계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당신의 일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모든 기호를 다 맞추려고 끙끙대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의 종일 뿐입니다.

그럼 도대체 하느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협소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 전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예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편협한 생각에 하느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의로운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아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 상에서 신음하는 것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분 같아 보이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생각으로 재단된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리 저리 궁리해서 만들어 낸 하느님일 뿐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요. 부모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루종일 나가서 직장에서 고생을 하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데 고작 장난감 하나 사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부모님에게 해서는 안…

성령을 모독하는 자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10)

사람은 서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의 차이로 인해서 서로의 의도를 잘못 이해할 수 있지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기인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릇된 소문을 듣거나 해서 그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심지어 사람의 아들, 즉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해치려는 이를 두둔하고 남을 살리려는 이를 내친다면 이는 엄연한 우리의 내면의 방향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꼴이 됩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바로 이 내면의 움직임을 거부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감지할 수 있지요.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 선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도와줍니다. 헌데 그러한 성령의 움직임을 거슬러 행동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곤 합니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파괴하고 죽이고 무너뜨리는 것이면서 스스로는 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세뇌를 시키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악한 일을 계획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것이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또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우기는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이런 저런 의견을 표출할 수는 있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수난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사랑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활동을 인지하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루카 12,4-5)

예수님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씀을 하십니다. 육신을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육신의 죽음’을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기를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죽음인지 잘 알고 있지요. 육신은 당연히 죽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순환 고리 안에 있는 것이지요. 진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진짜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한번은 죽는 인생인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삶을 오래 질질 끌다가 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죽었지만 성녀가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복된 삶이었다고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탐욕에 가득찬 늙은이가 90살까지 질질 삶을 끌고 가다가 결국 죽으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영혼의 생기입니다. 영혼의 생기라는 것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된 영혼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생생히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어떤 외적인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이 오더라도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굳게 지니고 있겠지요.

하지만 영혼이 이미 죽어있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그들의 육신이 죽음을 겪을 때에는 진정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상이 하느님과 거리를 두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외’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포…

독한 앙심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루카 11,53-54)

그림자는 빛이 존재할 때 있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빛이 없으면 그림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추위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기가 없는 상태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빛과 열이지 그림자와 추위가 아닙니다.

빛을 가로막으면 생기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그분을 가로막는 자들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자들입니다. 빛은 즐기고 누려야 마땅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상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빛 그 자체이신 분 앞에서 그들은 왜 그렇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것일까요?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때로는 그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에 충돌할 때에 우리는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죄는 이러한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는 바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법적 규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법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그 모든 율법을 알면서도 가장 핵심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핵심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심지어는 율법적 지식을 동원해서까지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근본 방향에서부터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죽임 당하고 박해 받는 이들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1,49)

선한 이들은 때로 자신들의 오류에 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하는 충고를 들으면 그 충고에 감사해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바꾸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악한 이들은 충고 자체를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을 하고 복수를 하고자 합니다.

예언자와 사도들(물론 하느님의 진정한 예언자와 사도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지요.)은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들입니다. 사명을 지닌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헌데 그 말씀은 선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라는 것이 아니었지요. 아니,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더욱 전파되어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이들, 죄악에 빠져 있는 이들을 위해서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이제는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복수’를 할 수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위해서 해코지를 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들이었지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쳤고 때로는 충고를 때로는 훈계를 때로는 조언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는 이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오류를 바라보고 고치기는 커녕 그러한 것들을 지적하는 그들에 대해서 분노했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 심지어는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곱상하게 차려입고 깔끔한 교리실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둠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 선포는 수고와 피로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신앙…

드러나지 않는 무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루카 11,44)

우리나라의 무덤은 무덤이라는 것이 확실히 표가 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 집처럼 꾸며 놓거나 아니면 아예 바닥에 매립해서 바닥을 매끈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회칠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깔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시신이 서서히 부패되어 가고 있을 테지요. 최근에 만들어진 무덤은 더욱 깔끔하겠지만 그 안에는 더욱 악취가 풍기는 시신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외모에 신경을 씁니다. 그닥 잘나지는 못하더라도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이지는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요. 물론 가능하다면 이리 저리 뭔가를 얼굴에 바르고 이쁘다는 옷을 입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살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외모 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내면의 상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선하게’ 보이고 싶어합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에게 호감을 가지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행위 내면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그러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선으로의 추구가 없는 이상 우리가 하는 행위는 ‘가식’이 되고 ‘위선’이 될 뿐입니다. 즉, 내면에 썩은 시신을 품은 채로 겉만 멀쩡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특히나 외적인 존경이 중요시되는 사람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 즉 사람들로부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정작 자신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람들의 인기를 유지하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하는 일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외적 모습을 보고 그들을 칭찬하곤 하겠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말씀을 바탕으로 적은 글에 한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요지는 ‘만취, 흥청대는 술판’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뜻인가 아니면 다른 숨은 뜻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당연히 문자 그대로입니다. 물론 굳이 영적으로 해석하면 그에 상응하는 내용들을 분별해 낼 수 있겠지만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 교회는 술에 대해서 관대한 편입니다. 특히나 신부님들부터 술을 마시는 데에 주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술판 때문에 가정에서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술이라는 것은 절제와 더불어 즐기지 않으면 그 즉시 독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절제의 기준이라는 것이 서로 남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있지요.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지 않으면 절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합당한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술은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것이고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과한 술은 언제나 몸에 독소를 남기고 서서히 사람을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지를 점점 약하게 만들어서 결국 술의 노예가 되게 하지요.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마시는 것은 절제를 하는 게 아니라 간을 보는 것입니다. 내 몸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간의 해독능력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술은 절대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 마셔서는 안되며, 또한 꾸준히 마셔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서 술자리 문화는 적지 않은 경우에 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마시고 또 많이 마십니다. 아예 시작부터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랑거리나 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무슨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술을 못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도 억지로 술을 먹이고 고주망태가 되는 모습을 즐기는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삶이 고된 나머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짐을 지우고 손가락도 까딱 않는 이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6)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것은 외적인 요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힘든 일에 도전하곤 합니다. 사실 한국의 고3 수험생들이 죽자고 공부에 파고드는 이유는 ‘대학’이라는 것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외적인 프로젝트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내적인 요소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본인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본인의 의지에 반대되는 일’입니다.

회사에서 정말 고된 일을 무리없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집에 돌아와 아내를 위해서 설거지 한 번 하는 것이 죽도록 힘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이행하는 과제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 ‘의지’와 부합하는 일이지만 집에서 아내를 돕기 위해 실천하는 설거지는 자신의 의지와 정반대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런 내면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활동 가운데 가장 으뜸이 바로 복음화에 종사하는 이들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도록’ 가르치고 자신을 추구하는 이기성에서 벗어나서 영원하신 분에게로, 또 그분을 통해서 이웃들에게로 사랑을 확장하라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에 나가서 성서학 박사를 따고 온 사람이면 그 권위 만으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제자들의 무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화는 단순한 성경 지식의 전파와는 다른 것입니다. 복음화는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로는 말을 듣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

육의 행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갈라 5,19-21)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핑계 거리를 찾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둘러댈 것이고, 적개심을 지니고 분쟁거리를 찾는 이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은 정당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에 진정한 의로움을 주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시며 그들이 하는 일의 근본을 분명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원래의 목적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행위들이 있으니 바로 바오로 사도가 열거한 위의 내용들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 5,22-23)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는 반대로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들이며 이러한 행위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를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보다 한 번의 미사를 나가더라도 기쁘게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심 수단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교만해지느니 차라리 평화로이 설거지를 하는 것이 더 나은 법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엉뚱한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성령의 열매들을 전혀 맺지 못하고 오히려 소위 그 ‘거룩하다는 행위’를 바탕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격분하고 시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별력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육의 행실을 멀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함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39-41)

이 짧은 말 속에는 참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고 그것을 깨끗이 하고자 노력합니다. 또 외적으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사람을 보면 기피하고 꺼려하지요.

사실 저만 해도 그랬습니다. 제가 볼리비아라는 곳을 알기 전, 저에게 가난한 이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배우지 못해서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지독한 편견일 뿐이었습니다. 물론 수돗물을 아껴서 써야 하기에 제대로 씻지 못하고 또 옷이 낡은 것은 사실이며 합당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교양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깨끗함’이 그들에게는 존재했습니다.

사실 더럽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옷이 더러운 옷일까요? 원래의 옷에 다른 이물질이 가득 묻은 옷을 더럽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원래의 순수한 마음에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으면 그 마음은 더러운 마음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서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르게 향해 있을 때에 마음은 깨끗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음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지저분한 마음이 됩니다. 탐욕, 이기심, 증오, 원한과 같은 것들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오히려 내적으로 깨끗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있는 이들, 외적인 것들을 갖춘 이들이 내적으로는 더욱 어지럽고 지저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말씀을 전해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 특유의 순수함으로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있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의 장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어느 정도의 학식을 지니고 있는가? 그의 말은 믿을 만 …

어둠의 영의 떡밥

어둠의 영은 언제나 떡밥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중에 우리가 덥석 무는 것으로 어둠의 영들은 우리의 기호를 파악하게 되고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이를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한 사람이 죄에 빠져드는 것, 어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단순히 한 인간의 외부의 어둠의 세력의 작용 때문만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도 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원하는 것들을 키워나가면서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만일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했다면,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했다면, 참된 가치들을 바탕으로 이웃들에게 헌신하기를 원했다면 우리가 유혹에 빠져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달콤한 것들을 원하기에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어둠의 영들이 원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 의지는 통상적으로는 선을 향해 있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한 인간의 선한 의지가 수많은 시달림을 겪게 되면 그 안에서 악한 의지가 자라나게 되기도 합니다. 남을 해코지 할 생각이 전혀 없던 의지가 수도 없이 사기를 당하면서 그 자신도 남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요.

이 내면의 은밀한 변화 과정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예전의 도덕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아직도 본인 스스로는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이미 타인을 위한 공격의 수준이 도를 넘어 섰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양선한 인간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적잖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혀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에 옳다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게 됩니다.

우…

악한 세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안에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보고싶다’는 마음입니다. 즉, 우리의 ‘이기성’이 숨어 있지요.

표징은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물론 볼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보고서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실천하는 삶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를 올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표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흘리는 성상을 보고, 눈물 흘리는 동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언뜻 감동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원하던 호기심의 욕구를 채우고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들어가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실제의 표징은 그런 이상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 안에, 내 삶의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겠다는 말입니까? 내 배우자의 수고로움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데 세상 그 어떤 곳에서 하느님의 성실함을 찾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엇나간 마음들을 향해서 어둠은 언제나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외적 표징을 찾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이기성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다른 표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 말고는 다른 표징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며, 또 예수님을 보아도 그분의 참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 4,2)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무조건 좋다고 들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반대의 일까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좋은 말은 모두 제쳐두고 당신의 성량, 발음, 문장구조, 배경 혹은 사상을 비판하면서 나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루해 하기도 할 것입니다. 술집에서는 절대로 지루해 하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말씀 앞에서는 지루해 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공부방에 데려다 놓으면 잠이 오는 법이니까요.

행여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게 된다면 당신의 일은 성공한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에 파고 들어간 그 말씀은 씨앗이 되어 자라날 테니까요. 우리는 씨를 심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향한 무한한 신뢰 안에 씨앗을 심으면 됩니다.

사실 복음을 실제로 전하려고 노력해 본 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정신을 팔고 곧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말지요. 그리고 그러한 이들 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들을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하기 위해서 미사에 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노리는 것이 존재합니다. 고3 수험생을 둔 엄마는 자녀의 대학 합격이라는 세속적 바램으로 나올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성당 공동체 안에서 맺고 있는 인맥관계 때문에 나올 것이며, 다른 이들은 연애질을 하러, 또 누구는 취미활동 삼아 성당에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 가운데에서 말씀에 귀를 여는 이들은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고 아닌 이들은 때가 되면 떨어져 나가게 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그 어떤 여자는 통상적인 행복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그 거룩함을 통한 사람들의 찬사와 칭송을 들으면서 그 여인은 당연히 그 모친의 영광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적으로 크게 엇나가는 생각이 아니지요. 자녀가 잘 되면 어느 부모나 그 영광을 나눠 받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그 말에 수긍하지 않고 전혀 다른 표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한 차원 더 높이 이끌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이를 생물학적으로 낳은 부모는 그 외적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거룩한 이를 누리는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는 내용을 특별히 강조 하십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가면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거기에 가면 일단 예수님이 머물렀던 곳이고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그곳은 어쩐지 뭔가 더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에서 드리는 미사가 그곳에서 드리는 미사보다 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미사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미사는 다만 우리가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뿐이지요. 만일 동일한 구성원이 한국에서 같은 마음으로 미사를 집중해서 드릴 수 있다면 결국 미사는 같은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많이 바친다고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정성되이 진심으로 바치느냐가 그 묵주기도의 중요도를 가늠하게 됩니다. 즉, 묵주기도의 횟수는 우리가 세상에서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지만 묵주기도의 열성은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설령 두 팔을 들고 기도를 바친다고 해도 그것이 남들에게 보란 듯이 바치는 기도라면 그 기도는…

율법의 감시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라 3,24-26)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그 이전의 시대(율법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믿음의 시대)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 존재했던 율법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율법을 쥐고, 혹은 율법 속에 갇혀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자유로이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이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바오로 사도의 설명은 지금의 현실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율법 안에서 산다는 것은 법을 중심으로 그것을 지키며 산다는 것, 즉 외적인 것에 치중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적으로는 전혀 마음이 없지만 외적으로 그것을 지키는 삶을 말하지요. 미사에 나오기 싫은데 성사는 보기 싫으니까 억지로 나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경우가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그러한 삶에는 참된 기쁨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규정 자체가 스스로에게 짐이 됩니다. 신학교 안의 대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떠들고 싶어 죽겠는데 ‘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지켜야 해서 조용히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사에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미사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정말 미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가치들이 소중하게 다가와서 그것을 거듭 거듭 체험하고자 미사에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고요가 필요해서 외적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데 ‘다행히도’ 신학교 안에 대침묵이라는 규정이 있어서 말하기 좋아하는…

바오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2티모 2,8)

바오로 사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식을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 그분의 죽음과 부활만큼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 저 나름으로 기쁠 수 있는 소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부자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기와 명예를 얻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생명’과 더불어 모든 것은 끝나 버린다는 엄연한 진리이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얻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의 최악의 독침인 죽음을 예수님은 극복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영원의 빛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것을 단순한 ‘생명의 연장’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마치 오늘날 광고 카피에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단순히 지상의 삶이 영원히 늘어나는 것이 부활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생명의 연장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을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분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선을 알고 의로움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로 변화되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부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최종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충만한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최대치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이런 표현들은 추상적으로 남을 뿐이며 비…

감사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 17,15-16)

어제는 같이 사는 신부님을 위한 뒤늦은 축하 잔치로 백숙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앉으면서 이미 깔려 있는 반찬을 보고 저는 감탄을 했습니다. 헌데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신부님은 제가 참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아?”
“네.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이지만 볼리비아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요.”

똑같은 반찬이 누군가에게는 무료한 일상의 한 단면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한한 감사의 원인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겸손이 있다면, 즉 하느님 앞에 진정한 겸손의 자세가 있다면 우리는 생명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는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나병 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이루어 준 분을 다시금 떠올리고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미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서 진정 감사를 드리는 경우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미사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을 감싸고 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러한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건강한 신체에 대한 감사, 삼시세끼에 대한 감사, 비를 맞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거에 대한 감사… 우리는 원한다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고 그 감사는 우리에게 기쁨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들어높여진 이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원래부터 마땅히 주어져야 했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가…

울타리와 장벽

안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은 울타리이지만 바깥 것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은 장벽입니다. 울타리인가 장벽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두 가지는 언제나 동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안의 것이 나가기 힘든 만큼 바깥의 것도 들어오기 힘든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가로막는가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외아들은 잃은 것을 찾으러 왔는데 잃은 것은 바깥에 있습니다. 반면 잃은 것들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장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미명 하에 지나친 두려움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고, 또 반대로 들어오려는 이들, 스스로를 구하려는 이들을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때로 ‘율법’의 벽을 넘으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안식일에도 해야 할 일을 하셨고, 단식을 지키지 않느냐는 주변의 핀잔에 혼인 잔치에 와 있는 이들은 단식을 지킬 수가 없다고도 하셨지요. 그 밖에도 많은 벽을 넘어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또 양들이 돌아오고자 할 때에는 장벽을 낮추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다 들킨 여인에게 단죄하지 않겠노라고 하시고 친구들에게 실려 온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한다고도 하셨지요.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과격주의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신경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소중한 것이고 계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본래의 목적대로 쓰이게 도와야 하는 것이지요.

울타리와 장벽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약한 양들이 나가 떨어져 죽게 두어서도 안되고, 또 늑대들이 들어와 양들을 해치게 가만 두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울타리를 사수하고 있는 문지기는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려는 이가 왜 나가려 하고, 들어오는 이가 왜 들어오려고 하는지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열쇠를 맡기신 것…

영(靈)

예수님은 꾸준히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가 늘 소홀히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현대는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모든 것을 없는 듯이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이 없는 듯이 살아가지요.

하지만 전혀 다른 이면에 사람들은 엉뚱한 것을 찾아 헤매곤 합니다. 사주와 타로카드 그리고 인터넷 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운세 맞추기 게임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지요. 과학의 시대라고 그러한 것들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내면으로는 그러한 것들을 느끼고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하시고 또 악령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악령을 배척할 필요가 있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당신이 직접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기도 하고, 또 수많은 악령 들린 이를 구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보이는 것들만 신경 쓰고 살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누군가가 선물이라고 값비싼 물건을 들고 오면 겉으로 보기에는 좋지만 그 속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에게 좋은 것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능력 안에서 할 만한 것들을 하고 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제에 맞지도 않는 것을 추구하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입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재난은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시력의 키워서 영의 분별을 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떤 영들을 받아들여야 마땅하고 어떤 영들은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은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내면에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셨지요.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도와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영들을 올바로 분별하고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우…

무엇을 청할 것인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청할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한에서 그러합니다.

바로 여기에 청원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살피지 않고 청하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청은 전혀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청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청을 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을 드릴 때에 분명히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분별을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떤 것은 그 자체로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또 어떤 것은 합당하긴 하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청을 들어주시긴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청원은 그 나름의 응답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하고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 응답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요구에 전혀 응답을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내어주고 싶어하는 것 가운데 으뜸은 바로 ‘성령’입니다. 거룩한 영이지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심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성령을 청하면 하느님은 그것을 지체없이 주십니다. 다만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전혀 인지를 못할 뿐입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거룩해집니다. 그의 생각이 하느님스럽게 바뀌고 자연 그의 말과 행동도 바뀌게 됩니다.

청하십시오. 그리고 받으십시오. 우리의 영 안에 성령을 가득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

필요한 것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그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만 알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즉 ‘지복직관’을 누리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언뜻 듣기에 이는 정말 지겨워 보이는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이 멍하니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적이 표현을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순간에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아들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르타가 사람들의 시중을 들면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르타는 그 순간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즉, 마르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등대를 향해 모여드는 모든 배들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배가 오른쪽에 있든 왼쪽에 있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배는 결국…

사람들의 지지와 하느님의 지지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갈라 1,10)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재물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명예에 욕심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이 욕구 역시 다른 모든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수 있지요.

인간이 가장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다른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지지가 없이 얻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지지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한 지지는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것일 뿐이지요. 어느 가수가 유투브에서 수천억회의 조회수를 달성한다고 해도 그뿐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그를 개선시키는 것은 아니지요. 그가 인기가 있다는 것이 그를 선하고 의롭게 만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최고의 명예가 무엇인지 올바로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으로부터의 인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풀이해서 말하면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삶에서 오는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보아 주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로움과 선 자체를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행여 그 때문에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말이지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외아들이고 우리는 그분에게서 은총을 얻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세상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롭고 선한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신기하고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광대도 주목을 받고 잘 생긴 강도도 주목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이는 결국 어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