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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정신없음

예상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면 전에는 크게 중요시 되지 않던 일들이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문서에 파묻히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아직 사무장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저런 온갖 잡다한 문서들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목숨은 구한다고 하였다. 잠시 짬을 내어 책을 읽고 싶지만 이 일을 하다보면 저 일이 발목을 잡고 저 일을 하다보면 이 일이 발목을 잡는다. 회계와 서류를 챙기다보니 영혼이 피폐해져가는 느낌이랄까? 볼리비아에서는 오히려 밖으로 열심히 나다니며 몸은 더 피곤했지만 영혼은 맑은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반대로 느껴진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똑같은 일을 해야 했다면 그들은 아마 지쳐 떨어져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세리 마태오나 돈주머니를 맡아 쥐던 유다 말고는 다른 제자들은 아마 요구되는 일에 상응하는 학력을 따라가지 못해 애초에 시작부터 자격미달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 일을 떠맡길 바라셨다. 그럼 이런 복잡다단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배울 게 있을 터이다. 어쩌면 나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시험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사람은 그 지위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원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다가올때는 도망쳐 버리고 만다. 주임 사제가 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떠맡고 있는 정신없음 속에서도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덜대기 시작하려면 모든 것에 투덜댈 수 있다. 반대로 다가오는 도전에 정면으로 부딪히면 그것을 극복하였을 때에 나의 힘은 부쩍 늘어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 사제로 살아가는 이상 한국에 적응해야 한다. 8년이라는 시간은 가난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가난 속에서 나는 행복했다. 이제는 문명과 발전,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메마름과 혼탁함을 체험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쳤을 때에 나는 또다른 깨달음을 얻는 이가 되어 있으리라 본다.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만물을 사랑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올바로 바라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지요.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를 원하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사랑 받으려는 욕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하며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추구합니다. 문제는 자신 안에 그런 욕구가 있는 만큼 타인에게도 그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내어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갇힌 물이 고이고 흐르는 물이 생생하듯이 우리 내면의 사랑은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랑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갇힌 사랑, 그것을 우리는 이기심이라고 부릅니다. 물을 받을 줄만 알지 내어줄 줄 모르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그 안에 고여드는 물, 즉 사랑은 썩기 시작하고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그의 자신만을 위한 사랑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올바로 알려면 사랑을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을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수많은 예언자들을 본보기로 주셨고 마침내는 당신의 외아들조차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좋은 모범을 바탕으로 우리도 하나의 사랑의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이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3-4)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으뜸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흔히 베드로라고 당연스레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수장의 역할을 담당했지요. 하지만 으뜸이라는 것이 꼭 직분상으로 우두머리를 맡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사랑의 으뜸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그리고 내적인 겸손으로도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제자입니다. 바로 베드로 곁에서 달려가는 다른 제자이지요. 요한 복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본문에서는 절대로 요한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제자’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이 다른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늙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다른 제자의 열정과 사랑이 더 뛰어났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또 그러한 것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될 때에 그리로 달려가는 법이니까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는 그러한 이들과 마주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고 반대로 돈만 밝히는 이는 돈에 관한 소식에 귀가 번쩍 뜨이지요. 그 다른 제자는 무덤에 먼저 도착하지만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이로써 자신의 겸손함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열정에 단순히 불타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겸손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절제와 인내와 더불어 사랑하는 법입니다. 흔히 교회의 본질을 운운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려는 시도를 하는 이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모습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기쁨의 원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원인은 우리 내면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받고 기뻐하는 이유는 그것을 내적으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내면에 있는 기대치가 그 물질을 통해서 충족되고 그래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요.  헌데 물질적인 것에 기대는 마음은 그 물질로 인해서 다시 손상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영원한 물질은 없기 때문이지요. 제 아무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잃을 위험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불안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내면의 탐욕(물질을 기다리는 마음)은 절대로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머지 않아 그 이상을 원하게 되지요. 그래서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 즉 탐욕스러운 마음은 절대로 만족을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그라들지 않는 기쁨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기쁨이라는 보물을 캐어낼 수 있고 그 보물은 나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

상황의 직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상황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릇이 깨어져 있는데 아무리 향기로운 향유를 받아들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 새어 버리고 말겠지요. 먼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의 상태를 올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지독히 이기적인 상태인데 그것을 신앙이라는 활동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의 사소한 결함 하나도 견디지 못하면서 정작 나의 결함은 지나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것들을 올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어느 성인과 같은 정도로 간주하고 무턱대고 좋은 것에 대한 ‘메뉴얼’을 찾곤 하지요. 그러니 그러한 것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잠시 관심을 끌다가 그만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향 설정 다음으로는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어렴풋이 하느님이라는 분을 들어는 보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착한 것인지는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봉사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보다 중요한 것들을 망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향설정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하기도 해서 방향설정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사물들을 올바로 분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겸손과 순명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향 설정은 당연히 하느님과 그분의 선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그것

영혼의 정련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말라 3,2-3) 하느님을 정면으로 마주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힘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믿음이 커질수록 그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초등학생이 자기 삼촌이 어떤 직위의 사람인지 모르고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면서 한참을 까불다가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을 구하면서 삼촌이 실제적으로 지닌 지위를 깨닫고 숙연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헌데 그 하느님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당신의 위업으로 억누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이지요. 하느님은 한 사람을 진정한 자유로 이끄십니다. 헌데 그 과정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순물들이 떨어져 나가니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탐욕, 이기심, 교만, 원환과 같은 것들이 하느님을 만나면서 맹렬히 불타오르게 됩니다. 활활 타오르는 난로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모양새로 그러한 것들은 난로에 닿으면서 순식간에 끓어오르고 증발하게 되지요. 하지만 물을 머금은 과일이나 스펀지는 물이 완전히 빠져 나가 바삭하게 마를 때까지 김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난로를 만나 우리 안에 있던 불순물들을 증발시키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성경 말씀처럼 정련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올바르게 견디는 사람이라면 그는 순수함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것을 견디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에는 떨어져 나간 이들이 생기게 되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온전히 순수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흠도 티도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중독 상태의 현대인들

우리는 흔히 남탓을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책임’의 무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내가 책임지기 싫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은 그 가족의 무게를 책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한 사람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싶으면 자꾸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 주변을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릇된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유혹에 빠져들어 가정을 내팽개치고 자신이 즐기는 활동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의 수많은 직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게 된 이름들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요. 의사는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하지요. 그러나 신앙의 무게를 지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즉 자신의 자유의지의 동의로 이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즐기는 것이 있으니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법만 지키고 나면 나머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나는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니 저녁에는 술을 좀 과하게 먹어도 여전히 나는 신앙인으로 남아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그가 과하게 먹고 자신의 건강과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는 그 술로 인해서 그는 그가 참례한 주일미사의 의미마저도 퇴색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취’될 수 있고 ‘중독’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앞에 두고도 하느님이 없이 살아가는 ‘착란’상태에 머무를 수 있지요. 사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술과 담배만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한 활동과 관심도 사람을 중독시키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활동들은 우리를 중독 시킨다고 할 수 있지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허송세월을 하게 됩니

증언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요한 5,36) 증언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신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믿을 만한 이의 말입니다. 헌데 하느님에 대해서는 누가 증언할 것입니까? 그분에 대해서 합당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은 스스로에 대해서 증언할 뿐이지요. 그리고 증언이라는 것은 그의 행실에 부족함이 있을 때나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말보다는 그의 삶 자체로 그에 대한 신뢰성을 얻게 됩니다. 그가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 구태여 그에 대해서 따로 증언을 들을 필요가 없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삶 그 자체로 당신의 진실성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드러난 그 자체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습니다. 물론 그냥 의심만 한 것은 아니지요. 누군가는 시기를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증오를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은 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었으니까요. 탐욕스런 부자가 보는 앞에서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그 부자에게는 고통스런 일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삶 그 자체로, 십자가의 수난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마치 다른 어디에 또다른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어떤 처세술 책에, 어떤 심리학 저서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내적 곤경을 해소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증언은 이미 드러났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면 됩니다. 다른 증언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자신들의 삶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더이상 우리에게 합당한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

운명이라는 주제는 늘 알쏭달쏭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정해진 삶의 길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지? 무언가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내가 구태여 기를 쓰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고, 또 반대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애를 쓴다 한들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니까요. 예컨대 내가 사제가 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굳이 사제가 되려고 노력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 것이고 또 내가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다면 신학교에 들어간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운명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리를 하려고 작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요리에 관한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요. 하나의 운명이 정해진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확인하고 어떤 재료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그때그때 분별을 합니다. 된장째개를 끓이려고 두부를 찾는데 냉장고에 있는 두부가 썩어 있으면 그것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냥 두부를 빼고 끓이거나 가까운 슈퍼에 가서 두부를 사 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 나의 냉장고에 두부가 있었다고 무조건 넣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한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소위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의 ‘섭리’라고도 하지요. 하지만 그 뜻에 우리가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의 뜻을 내던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루카 7,29-30)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한 섭리로 우리에게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의 세세한 삶의 단계들을 모두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말마디의 축자적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나의 삶과 직결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되짚어보고 남들에게 그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학적 준비 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 준비가 필요하고 실천적 준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즉, 가르치는 것을 살지 않으면, 적어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은 ‘성경 강의’라는 제목을 붙이고도 실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씀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양심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하는 차선책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입니다. 단어를 분석하고 역사를 살펴보고 문화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양심과 충돌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연구는 성경의 본질을 꿰뚫어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성경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자와 맞선 복순이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 5,39) 어느 마을의 악덕 부자가 돈을 더 벌고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복순이네 집 뒤에다가 거름창고를 만들어 사람들이 가져오는 거름들을 모을 생각을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부자의 그 계획을 알고 나서는 껑충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가서 창고를 지을 일을 하러 오는 이들에게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창고를 짓는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맡긴 건 부자이고 자기들은 창고를 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열심히 싸워서 결국 그 일꾼들을 돌려보내고 일꾼들은 부자에게 난색을 표하고는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복순네는 자신들이 이룬 업적에 흐뭇해하면서 그날 밤은 발을 뻗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마음이 바뀐 게 아닙니다. 부자는 여전히 돈을 벌고 싶었고 더군다나 복순네가 괘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은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복순네가 일하는 논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논마지기를 값을 조금 더 쳐서라도 다 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부자는 그 논의 주인이 되어 복순네를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복순네에 대한 소문을 좋지 않게 내서 주변 사람들이 그 누구도 복순네를 신경쓰지 않도록 해 버렸습니다. 결국 복순네는 그 동네에서 살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났지요. 복순이네는 그렇게 그 마을을 떠나 왔습니다. 그리고 이웃 동네로 갔지요. 복순이네는 이번 일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 수 있었지요. 복순이네는 바닥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루 먹을 거리도 구하기 힘든 때가 있었지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좌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련하시는 분에게 간청하며

멋대로 다루어지는 주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2)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훈련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내면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진짜 황금이 들어있는 원석을 보고도 무엇인지 몰라서 무시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도금된 싸구려 쇳조각을 보고 황금인 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좋은 줄을 압니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 이 물질적인 세상 안에서 눈에 드러나는 결과를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선 무언가, 즉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헛된 선택을 많이 합니다. 보다 덜 중요한 것을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돈 몇 푼 더 벌고자 신의를 저버리고, 잠깐의 명예를 위해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우리 주님을 다루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은 그저 세상에 존재했던 위대한 위인 중의 한명일 뿐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예수는 가짜 예언자일 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마구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자신의 영적인 면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썼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분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마구 다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지요.

계명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사 48,18-19) 하지만 이제 너는 평화롭지 못하고 의로움도 간직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세상에서는 세도를 부리고 수많은 이들이 너에게 굽신거렸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무도 너를 기억해주지 않겠구나. 네가 나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교회의 규율과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복재를 지키느냐 금육을 지키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근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한 가치들을 진정으로 내 마음으로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선, 사랑, 용서, 친절, 인내, 겸손과 같은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을 이웃을 통해서 실천할 때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진실과 정의와 신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외적인 섬김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교만을 키우는 꼴입니다. ‘나는 묵주기도를 하루에 20단씩 바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니 너희 같은 천박한 이들과는 달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는 결코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가 바치는 기도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을 눈앞에 두고 그분을 시기하고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던 이들이었지요.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이 교회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

기도에는 효율성이 없다.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것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래서 뭘 하든 이 효율성, 즉 작은 노력으로 큰 수확을 얻는 것을 즐기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아무리 효율성이 극대화 되더라도 인간의 내적 영역마저도 효율성에 입각해서 개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이 주제에 집중해 있으니 신앙 안에서도 이 효율성은 실제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따로 기도할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으니(솔직히 말하면 따로 기도할 시간을 내기는 싫으니) 다른 일을 하면서 기도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는 건성으로 변하게 되지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기도를 하는 데에 익숙해지고 그저 기도의 횟수만이 그 결과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앙 안에는 효율성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오직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가 생겨납니다. 한 레지오 단원이 레지오 모임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한 어린아이가 자기 전에 성호를 긋고 하느님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아빠와 엄마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나은 법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기도 안에 사랑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을 섞어 넣어 자신의 소박한 기도를 한없이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그 레지오 단원의 기도는 가식과 위선과 기도 자체에 대한 혐오를 섞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것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기도에는 효율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것에는 효율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즐기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숨은 것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백만장자이고 누가 나에게 선물을 주는데 엄청 비싼 무언가를 준다고 내가 기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

작은 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아버지는 ‘작은 이들’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이들은 비록 세상 안에서 천더기로 취급받는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우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작은 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턱대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둔갑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성경 안에 나오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이면 전부 나를 그 안에 집어넣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밖의 양이 있으면 우리 안의 양이 있듯이 작은 이가 있으면 큰 이가 있습니다. 또 양이 있으면 늑대도 있지요.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기본적으로 양으로 보아주는 것이지요.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은 우리 밖에 있는 양들입니다. 우리 밖에 있지만 양의 성질을 상실하지 않은 이들이지요. 비록 미숙함에 길을 잃었지만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쁨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 기쁜 소식을 듣게 되면 마음을 열고 다시 하느님 앞에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단, 늑대들을 조심하십시오. 목자의 목소리를 따르기는 커녕 다른 양들을 잡아 먹으려고 안달이 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영악하고 위선적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순진한 양을 유혹하려고 하기도 하지요.

열매 맺는 회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 3,8) 죄의 가책은 싫습니다. 하지만 내가 즐기던 그 죄의 달콤함을 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묵직한 양심의 무게는 싫고 벗어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죄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육적으로 느끼는 쾌락은 너무나도 황홀한 것이라 그 또한 내려놓기 싫은 것이지요. 이상한 표현이지만 죄를 싫어서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때에는 그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명예가 깎이고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당시에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도 그러한 행위 자체가 설레고 달콤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는 사랑하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죄를 짓고 난 뒤에 죄책이 다가오는 것은 싫은 것이지요. 죄를 짓기 전에는 맑았던 마음이 죄로 인해서 어두워져 있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가중되어서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다시 빛을 찾아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즉 울며 겨자먹기로 죄를 고백하러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죄를 사랑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죄를 벗어버려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죄 자체를 혐오하게 되어서 빛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빛과 맞닥뜨릴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둠을 벗어 버리려는 이들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이 하는 것도 일종의 ‘회개’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회개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고 피상적인 것입니다. 즉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열매가 없는 회개’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런 뉘우침, 즉 가식의 뉘우침을 거친 이들은 머지 않아 다시 똑같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사람들이 종교에 실망할 때는 하느님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껍데기에 대한 실망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에게 실망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착각을 할 뿐이지요.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올바로 접근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분을 담아내어야 하는 껍데기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본질에 접근하는 이에게 부수적인 요소는 그야말로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도 그분을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요. 지금의 기성 종교가 하느님을 올바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서 열심히 미사를 드리지만 그 영혼이 충만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있을까요? 정말 기쁜 소식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들이 복음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지지부진한 종교의 틀만을 꼭 쥐고 정작 복음은 상실하고 말았을까요?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복음을 생활화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고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이 존재하지 않고 또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 현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닌 문제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 때문에 교회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학술회를 열었지요. 또 심포지엄과 세미나도 많이 열었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과 방법론에 길들여진 교회는 연구를 많이 하면 신앙이 더욱 밝혀지고 늘어날 것이라고 착각한 셈

레위 지파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따로 가려내셔서,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동족과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다. 그 대신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신명 10,8-9) 레위 지파는 사제의 직분을 맡은 지파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궤를 메고 다니면서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함께 나누어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다만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날 사제들은 성찬례를 거행하고 나머지 성사들을 집전하면서 하느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세상 사람들이 헌신하고 추구하는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나고 또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보상들에서도 제외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성경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제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미흡함과 부족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제들은 한 가지 점에서는 옛 사제들을 고스란히 닮아 있습니다. 바로 일상의 짐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처자식도 없고 또 세상 사람들이 안달하듯이 노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잃으면 안달복달하지만 우리는 때가 되면 수시로 임지가 바뀌어 버리고 특별한 잘못이 없는 이상은 절대로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제들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걱정’에서 자유로운 만큼 우리가 마땅히 신경써야 할 일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는 일, 즉 하느님의 거룩한 성사를 다루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하고, 또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만을 보상으로 기다리는 일입니다. 헌데 그렇지 않을 때에 문제가 생기기

겸손과 가난에 대한 찬양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이사 29,19-21) 겸손과 가난에 대한 찬양, 그리고 포악함, 빈정거림, 죄지을 기회를 찾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올바로 아는 사람이고 일부러 헛된 드높임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제자리에 충실한 사람은 훗날 우리가 들어높여질 자리에 가서는 엄청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마치 제가 원래 한국에 있었더라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기쁨을 볼리비아라는 곳에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면서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가지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은 필요한 것조차 쉽게 가질 수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단순히 재물의 유무가 아니라 내면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가질 마음이 없는 이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참된 소유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얻게 되겠지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과 마주하게 될 때에 가난한 이들은 그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반대의 자리입니다. 포악한 자들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 즉 자신의 지배욕과 이기심을 참지 못하고 타인들을 짓누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위치, 즉 나약한 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면서 괴로워할 것입니다. 빈정대는 자들은 타인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고 또 옳은 일에도 시기와 질투로 반발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빈정대면서 올바른 일을 하려는 이의 의기를 꺾곤 하지요. 이런

세미나 교회

한국 교회에서는 툭하면 세미나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대두되면 일단 그에 관련한 세미나를 열고 봅니다. 물론 문제를 파악하고 접근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왜 곧잘 세미나만 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 즉 마음에 부담이 덜 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열면 패널들이 초청되고 그들을 통해서 의견들이 정돈되어 하나의 메뉴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뉴얼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일단은 뭐든 했다는 안도감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즉 문제의 본질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로 그에 상응하는 메뉴얼, 규정집, 강의록을 지니고 있다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똑똑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 사회는 똑똑한 사람은 넘쳐 흐르는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신학 세미나를 열면 신앙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에 불이 나도록 그런 곳을 다녀봐야 느는 것은 ‘지식’ 뿐이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크려면 신앙을 키우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건 하기 싫은 것이지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긴 싫고 ‘호랑이를 잡는 법’에 관해서 호랑이에 대해서 배운 서울대 동물 행동학 교수(그마저도 호랑이를 본 적은 없는 사람)를 만나서 호랑이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배우고 그 메뉴얼을 받으면 이미 호랑이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호랑이는 학위도 없는 무식한 사냥꾼이 용기있게 직접 동굴에 가서 잡아 버리는 것이지요. 이제 대림 9일기도의 시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통해서 신앙을 키우기를 원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것은 그러한 특별한 강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실천입니다. 사실 우리는 필요한 지식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누가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일곱 번에 일흔 번을 용

믿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 9,29-30) 성경 안에서 등장하는 소경은 단순히 육신의 눈이 먼 이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소경’을 대변하는 이들로 보아야 합니다. 소경들이 아직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에 대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쓸 줄 알았던 것은 그들이 비록 눈은 멀어 있지만 귀는 열려 있었고 많은 것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듣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믿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에 믿음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잡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스포츠에 관해서 관심이 없으면 야구 승부가 어떻게 되고 축구가 어느 팀이 승리하는 팀인지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옆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관심두는 것이 근처에서 들리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찾고 더 듣고자 노력하게 되지요. 소경들은 비록 눈이 가리워져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찾으려는 마음’마저 눈이 먼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들음으로써 다윗의 자손을 알아보았고 그를 뒤따라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유일한 전제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집까지 따라온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을까요? 우리가 믿는 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을 영원에로 나아가게 하는 길로 믿고 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어떤 특정 종교 지도자로 알고 있을까요? 신자라고 해서 가톨릭 교회에 오래 몸담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다른 활동을 하는 것보다 고상하고 나아 보이기에 하는 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