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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은총은 어디로 갈까요?

은총은 그것을 당기는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은총도 그에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무리 위중하고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중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절박함’이 없으면 은총은 다가가지 않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물 흐르듯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전하는 수단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성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웅장하고 성대한 전례에 참례하면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거룩하게 거행하는 전례 안에는 분명 더 많은 은총이 넘쳐 흐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으니 그저 그 곁에 머물러 있기만 해도 절로 그 은총이 나에게 흘러 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은총은 그 전례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가장 절박한 이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밀치고 북적대고 그분의 제단에 다가가 제대에 손을 대더라도 은총은 그 가운데 가장 겸손되이 머무르는 자에게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주교님과 친하다고 은총이 흘러오지는 않으며, 어느 신심 단체에 오래 참여했다고 신심이 흘러 넘치지 않습니다. 비록 단 한 번도 주교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겸손되이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시골 노파에게 은총이 더 많을 것이고, 글자도 읽지 못해 신심 단체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이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은총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사람들은 왜 모를까요? 왜 아직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밀쳐대면서 그 가운데 은총을 받게 된 하혈하는 여인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눈이 명예와 탐욕과 이기심에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날에 예수님에게 ‘주님 저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

무언가의 뒤에 숨기

무언가가 시작되고 만들어지고 난 뒤 그것의 뒤에 숨어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편안한 일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이런 편안함을 늘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무언가 잘못 되더라도 탓을 남에게, 즉 이전 것에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획기적인 새로운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이 이전에 해 오던 것에 어긋나는 것이면 그것은 그대로 묻혀 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는 전혀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움이 나오더라도 이전의 잣대로 모두 들이대어 보고 겨우 그 관문을 통과한 것이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그 처음의 신선함이 모두 너덜너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서서 일하기는 싫어하지만 대상을 두고 비판하는 것은 즐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자신은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빗대어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에도 이러한 일은 벌어지고 말았으니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또다시 이전의 계명들의 덕지덕지 붙은 장신구로 무거워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매번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시도를 벗어나서 또다시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사람들은 그런 새로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분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성전과 예절의 뒤에 숨어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 사랑을 쏟아야 하는 대상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 다녔다. 사람들이 모두 안식일법의 위중함에 짓눌려 있는 동안 예수님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버렸다. 예수님의 사랑의 새로움이 안식일 법 뒤에 숨어 있는 이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 일을 통해서 수난을 겪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의 뒤에 숨어 있는 이들을 꺼내오려는 시도는 반드시 반대의 물살을 견디어 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은 어떨까? 우리는 기술의 진보

슬픔과 기쁨

신부님은 힘든 일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왜 없을까요. 다만 어디에 집중하고 사느냐가 중요할 뿐이지요. 하루종일 투덜대려고 한다면 끝도 없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쁨 중에 슬픔을 지니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닌 슬픔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들을 슬프게 할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인생에는 늘 두가지 면모가 있기에 슬픔의 순간 뒤에는 다시 기쁨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슬픔에 절여진 사람은 기쁨이 다가와도 그것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말지요. 그러니 우리는 기쁨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헛된 착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뢰에서 나오는 굳건한 기쁨을 늘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유

하나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마음껏 짓고 나면 그 뒤에는 반드시 그 죄에 ‘종속’되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자유롭게 담배를 핀다고 하지만 나중에 중독이 되고 더군다나 폐병이 생기고 나면 벗어나고 싶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마땅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즉 우리가 자유를 통해 얻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가 참으로 행복해 질 수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자유는 오직 참된 ‘사랑’을 위해서 쓰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자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의 자유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짓게 되고 어둠에 빠져들게 되지요. 그리고 빛을 찾아 나설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자기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을 하겠지만 실제로는 가장 얽매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랑을 위해서 나를 내어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단계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시작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미혹되어 거짓 자유를 목표로 삼아 세상의 흐름에 따를 것인지의 선택의 여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시기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고 같은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이가 잘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기’를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대가 잘 된다는 의미는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이며 그가 그렇게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아름다운 은총이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기는 세상의 자녀들의 몫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서로 시기하고 또 빛의 자녀들을 시기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자신에게 이득이 되고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고 자신의 권력이 확장될 때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타인의 기쁨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이 ‘시기’의 악덕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자녀들은 타인의 잘 됨을 시기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이 그나마 가진 초라한 것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마저 빼앗기데 될 것이고 어둠 속에 던져져 가슴을 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행한 이에게 반감으로 드러나는 분노라는 감정과 달리 이 시기라는 것은 그 정도가 더 심한 반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기하는 대상은 나에게 행해진 악이 아니라 상대가 얻게 된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이들의 죄는 크고도 큽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적으로는 고상한 모습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자신들이 악을 당해서 처지가 무너져 있다면 그런 이들이 꺼내는 분노는 이해할 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기’라는 것은 전적으로 악일 뿐입니다. 기쁜 일을 겪는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어둠이며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일 따름이지요. 좀 심한 표현을 쓴다고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사람들은 올바로 이

냉담하는 이웃을 대하는 방법

‘너는 신자가 왜 성당을 가지 않니?’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지만, ‘요즘 힘든 일 있어?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 받기를 원하니까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특히나 소위 ‘골수’ 신앙인들은 다른 신앙인들 가운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성당을 쉬고 있는 이를 만나면 곧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그 부정적인 모습은 어찌보면 참으로 단순한 사고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세례 받음 - 성당 안나감 - 십계명 미준수 - 구원 자격 미달 - 천국 못감 그러니 골수 신앙인들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당에 가지 못한다는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닦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계명의 미준수가 곧 구원자격의 미달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미비하다는 것이지요. 아주 간단한 예로 예수님의 안식일 미준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일의 결말이 어찌 되는지 알고 있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부활로 입증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계명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계명, 율법의 아래에 흐르는 것이지요. 마치 얼굴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그 안에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얼굴 모양이 어떻든 중요한 건 피가 흘러야 그 사람이 살아있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까요. 단순히 한 사람의 외적 행태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구원을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지요. 즉 나름 열심한 신자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엉뚱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주일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해도 정작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이들이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관용과 자비와 기다림으로

마음 속 숨은 생각

누가 갑자기 다가와서 나에게 ‘당신의 피부조직의 일부를 찢겠소. 그리고 안에 있는 뼈도 깎아 내겠소. 최대한 마취는 하겠지만 그러고 난 후에 고통은 있을거요.’라고 한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묻겠지요. ‘도대체 왜요?’ 이유 없이 이루어지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행동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행동을 받아들일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헌데 만일 이렇게 대답한다면 어떨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서 다른 누군가를 도우려는 것이오.’ 과연 다른 이를 위해서 그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골수 기증과 같은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용기를 내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 하게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서 당신이 아름다워질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나서서 그 일을 합니다. 게다가 돈을 줘 가면서까지 그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미모’라는 것,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실천하는 것들 안에 숨어 있는 마음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이기성과 세속성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결한 마음을 찾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를 더한 이기성으로 몰아 붙입니다. 왜냐면 세상은 이기적인 사람이 많고 허영심에 빠진 사람이 많아져야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값비싼 향수를 만들어 파는데 과연 누가 그 향수를 살까요? 향수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향수를 구매할 능력을 갖춘 이들은 한정되어 있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향수를 광고해야 하고 마치 그 향수를 뿌리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처럼 우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야 하고 그들이 향수

주님의 제자들의 역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14-15) 예수님이 사도들을 뽑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목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 당신과 함께 머무르며 필요한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름 착하게 생활해 오긴 했지만 ‘빛’이 부족했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의 빛이 전적으로 부족했지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합니다. 제 나름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으로 착하게 살아갈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선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모터가 필요하고 그것은 바로 말씀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 진리를 배워 습득할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부딪혀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 단순히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고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끝까지 당신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세상 밖으로 뻗어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주하는’ 신앙을 꿈꾸곤 합니다. 그저 주일미사나 열심히 나오고 별다른 걱정 없이 마음의 평화나 찾는 그런 고요한 신앙을 바라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신앙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절대로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증거할 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야 하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해야 할 사명은 다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어야 한

게으른 사람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히브 6,12) 우리가 통상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외적 일도 하지 않고 들어앉아 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실함은 일을 많이 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성실성의 징표는 바로 세상에서 드러나는 ‘결과물’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성실성과 게으름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이 바라보는 관점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향한 발걸음의 척도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서 나설 수 있습니다. “아, 이번 주는 정말 바쁘게 보냈어. 평일 미사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레지오 회합에서 3차까지 다 따라다녔지.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한 후배에게 성당을 오겠다는 확답을 얻어내기도 하고 말야. 아 정말 힘든 한주였어.”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얘야, 네가 드린 평일미사 안에서 너의 모습을 잘 살펴보거라. 너는 정말 미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사를 나온 횟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나왔다. 그리고 너희 3차까지 있었다던 레지오 회합은 그야말로 어둠의 잔치였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어두운 생각들이 난무하고 있었고 서로를 드러내려는 교만과 아둔함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술자리들에서는 이미 절제라는 가치가 사라져갔고 음란이라는 생각이 깃드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도 않았지. 그리고 네가 쫓아다닌 너의 그 후배는 너의 그 엉뚱한 끈질김 때문에 교회에 혐오감을 지니고 있으며 네가 지닌 그 우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한 것 뿐이었다. 그 부탁을 듣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앙을 전한다는 의미

신앙을 전한다는 것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누군가를 예비자 교리반에 집어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는 것으로 신앙 전파는 일단락 되지요.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신앙인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신앙을 쉬고 있는 이들, 즉 주일미사를 나오지 않는 이들에게 판공성사를 보게 하고 주일미사를 나오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대표적인 신앙 전파의 행동으로 간주합니다. 특별히 이 두번째 경우에는 ’냉담자 회두’라는 표현을 쓰지요. 하지만 신앙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 전파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앙을 전하는 기초 마련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즉, 어둠에 빠져 있는 이들을 그 어둠에서 꺼내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어둠을 인식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어둠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이들에게는 ‘어둠’을 드러내어 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저의 모든 활동의 가장 기초 단계이고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어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둠을 외적인 지표로 분별하려고 듭니다. 즉, 누가 주일미사에 나오면 빛의 자녀이고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으면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누가 레지오를 열심히 하면 빛의 자녀이고 레지오도 하지 않고 평일 미사도 잘 나오지 않으면 어둠의 자녀라고 분류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빛과 어둠은 보다 내밀한 곳에 있는 방향성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의 외적 표지가 빛의 표지라고 해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반대로 외적으로 어둠으로 분류되는 곳에

대화

대화라는 주제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미묘한 주제입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대화’의 부족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게 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자신이 쓰는 ‘의자’를 상대로 화내지는 않지요. 어쩌다 자신이 잘못해서 발가락을 부딪혀서 순간 화가 날 수는 있어도 의자를 앞에 두고 분노와 원한을 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자의 기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언어’를 선물하셨습니다. 바로 그 언어를 통해서 상대의 내면을 알아내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귀찮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방식대로 상대를 다루려고 하지요. 상대가 오늘은 오렌지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내일은 사과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노력을 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오렌지만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안에서 언제나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과 매일같이 대화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필요한 때에는 진중한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세세한 일거수 일투족까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요. 우리는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삶을 가꾸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하게 되는 것은 소위 ‘방향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더라도 방향이 같다면, 즉 목적지가 같다면 우리는 잘 가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방향성을 올바로 알고 신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이 방향성이 굉장히 불투명합니다. 그들은 나름의 ‘선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의의 궁극적 방향이 올바로 정해져 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오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상황이 다릅

이기성을 벗어나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간단한 이유는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이유는 사실 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의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태양의 중력과 지구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힘이 조금만 강해도 지구를 빨아들일 것이고, 반대로 지구의 원심력이 조금만 강해도 태양을 벗어나 버리고 말겠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으로 모아들이는 힘이 너무나 강해서 타인에게 나의 관심을 내어줄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이들은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돕지요. 예수님이 그 외적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분입니다. 즉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분이 되셨지요. 헌데 이전까지도 정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을 친구로 삼아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지요.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삶이 힘들다고 합니다. 힘이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바라보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아직도 감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음을 역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1코린 1,2) 신앙인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은 빛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가는 방향에 도움이 되어 줍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뒤처진 사람을 끌어주고, 뒤처진 사람은 앞서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요. 가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사실 조금 늦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방향만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출발을 하고 그래서 누구는 빨리 누구는 늦게 도착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곳은 같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지요. 다만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수단, 거룩하게 되는 길은 모두가 같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성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반발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를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그러나 이 질문은 올바로 물어봐야 합니다. ‘진리의 길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질문이 이렇게 바뀐다면 ‘네, 그렇습니다. 진리의 길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곧 진리를 안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에는 신중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아는 세례를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지적으로 아는 것과 실천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마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종교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것과 예수님을 실제로 알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문제입니다. 헌데 누군가가 ‘진리의 길을 알기 위해서 꼭 예수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자기 탓이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가 뭔가요?

'성체'라는 것은 말뜻 그대로 '거룩한 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분의 몸이라고 믿고 받아 모시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에 대해서 올바로 알기 전에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이 온통 장님 뿐이라면 사람들은 소리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헌데 그 가운데 눈을 뜬 한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줍니다. 헌데 한 장님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지요. 그리고 그 두 장님이 걸어가는 앞에는 벽이 있습니다. 소리로서는 감지되지 않는 벽이지요. 그리고 그 볼 수 있는 사람은 외칩니다. ‘그 앞에는 벽이 있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 가운데 믿는 사람에게는 그 벽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눈을 뜬 사람을 믿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게 되겠지요. 안타깝게도 믿지 못한 사람은 그 벽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만물을 받아 들이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는 것들을 신앙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기도’를 하기도 하고, ‘미사’라는 이상한 예식을 드리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아예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돈의 위력’과 같은 것들을 믿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종이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세상에 통용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고 서로 믿는 가운데 거래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지요. 그리고 신앙인들은 그 하느님께서 세상에 다가오셨다는 것을 믿습

발맞춰 나아가기

말씀이 다가왔지만 모두가 그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의 행실이 말씀을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내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니 우리는 얼마든지 속을 숨기고 멀쩡히 속과는 다른 외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품고 있는 이들은 같은 말씀의 결과에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것에 행복해 하고 사람들이 빛을 얻는 것에 행복해 합니다. 그것이 같은 말씀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누군가를 추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현실화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평화롭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고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일들이 올바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현실은 거칠고 때로는 온갖 풍랑이 몰아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의 사람들, 즉 같은 중심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저마다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같은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뜻 가장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헛된 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을 빼고 있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멋들어진 구호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연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것이 파괴되면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런 이들을 마주하면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마냥 받아들이자니 너무나도 힘이 들고, 또 내치자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배우는 사랑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받아들임에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받아들

속을 드러내는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 4,12-13) 다이아몬드는 그 가장 강력한 경도로 인해서 세상에 자르지 못할 물건이 없게 됩니다. 약한 것은 보다 강한 것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법이지요.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가장 맑고 투명한 진리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거짓과 속임수는 우리의 본질을 덮어 씌우지요. 아주 간단한 예로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앞에 ‘사랑해야 한다’, 또는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명령은 그의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기 싫고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갖가지 합당해 보이는 변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하지요. 하지만 침묵 속에 잠겨들면 결국 우리의 숨은 속내가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쇼핑에 매달리거나 술에 취하거나 외적인 활동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내면을 파고드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분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감추고 있던 것이 드러나고야 말겠지요. 그것이 빛인 사람은 영광을 입을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어둠이었던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를 속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독을 통해서 나 자신도 속일 수 있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진리의 잣대 앞에 나서게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히브 3,7-11) 듣지 못한 이들, 듣기를 싫어하는 이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선물을 받지 못한 이들, 선물 받기 거추장스러워하고 귀찮아서 받기를 거부하는 이들, 그리고 선물을 받아도 뜯어보지도 않고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입니다. 선물을 받지 못한 이에게는 선물을 주면 그만입니다. 선물의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가치를 알려주면 되지요. 하지만 받기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물론 받기를 싫어하는 이유도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선물의 가치를 알면서도 받기를 거부하는 이들, 그 선물을 주는 이 자체를 혐오해서 선물이 좋은 것인 줄을 알면서도 받지 않으려는 이들은 심각한 이들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좋아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얻어지는 세상의 매력들을 추구하지만 하느님은 거부하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아가라고 약속의 땅을 향해서 한걸음 나아가라고 주어지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해 버리고 맙니다. ‘제가 언제요?’라고 말할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건데 하느님을 사랑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았고, 판공을 제때 보았으며, 교회가 지키라는 것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습

헤로데의 경배방식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마태 2,7)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말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증오하는 헤로데 왕의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떠올리며 동방의 박사들에게 헤로데왕이 전한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 즉 이기심을 완벽하게 채우기 위해서 ‘거룩함’을 꾸미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으면서 말이지요. 교회 안에는, 즉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는 이런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언뜻 안에 몸담고 있는듯 보이고 예수님을 경배하려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 예수님을 만나면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지요.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뜻이고,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절대로 다른 왕을 모실 생각이 없습니다. 이들의 진정한 왕은 바로 ‘자기 자신의 뜻’입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남들의 지시를 받거나 명령을 받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교묘하게 감추어진 이기성을 드러내고 교만과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는 이들이지요. 물론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직접 만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만날 수도 있겠지요. 마치 헤로데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그분을 찾는 동방 박사들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빛이신 그분을 따르던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고착되던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헤로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를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실행합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한 채로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 하찮은 인간의 영리함을 훨씬

식별

남자들더러 ‘자기야, 오늘 내 모습 바뀐 거 어때?’라고 묻는 것은 사실 별 의미 없는 것입니다.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가거나 갑자기 얼굴에 멍이 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별다른 차이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남성들은 소소한 변화에 무심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관심을 두는 것이 크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메니큐어를 칠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손톱에 관심이 갈 것이고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여러가지 면모들이 보일 것입니다. 손톱 관리 상태며 그 길이, 그리고 평소에 칠하고 다니는 메니큐어의 종류와 꾸미는 정도가 금방 눈에 들어오겠지요. 이처럼 인간의 내면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표정과 행동은 의식적으로 꾸밀 수는 있지만 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사람이 밝은 표정을 잠시 지어보일 수는 있지만 그의 삶 전체를 밝은 것으로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반대로 마음이 기쁜 사람이 장례식장에 가서 잠시 그들의 마음에 동참할 수는 있겠지만 평소에 지닌 활달함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내면이 보이게 됩니다. 그가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니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지. 뭐가 배배 꼬인 사람인지, 아니면 맑은 사람인지가 드러나지요. 그리고 마치 모니터의 해상도가 높아지면 더 세세한 부분이 보이는 것처럼 영혼을 식별하는 해상도가 높아지면 한 사람의 내면도 더 식별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그가 인내가 있는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온유한 사람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무지막지한 사람인지 등등이 잘 드러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는 가장 꽁꽁 감추어져 있고 또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몫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속이 꽉 찬 신앙생활

우리가 수박을 사먹을 때에는 ‘잘 익은 것’을 고르려고 신경을 씁니다. 그 껍데기는 잘 익었다는 것을 분별하는 데에 최소한의 도움을 줄 뿐입니다. 바깥의 색깔이 연하거나 하면 속도 덜 익었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하지만 핵심은 속이지 겉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박을 파는 이들은 속을 잘라서 보여줍니다. 겉과는 아무 상관 없이 속의 색과 맛을 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조각들을 베어물어 보고는 그 수박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속이 익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술을 익히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신앙생활도 일종의 기술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성호를 어떻게 긋는지부터 시작해서 마치 군대 선임이 후임에게, 사수가 부사수에게 임무를 전수하듯이 일을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지만 정작 전쟁이 났을 때에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셈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다양한 외적인 면모들, 갖가지 신심 활동들과 여러가지 외적인 활동들을 섭렵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하지 못하면 그 모든 신앙의 외적인 면모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컨대 레지오를 하는 것이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일진데 정작 힘든 일은 다 빠지려고만 하고 레지오에서 오는 명예로움은 얻으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신앙생활은 구체적인 사랑 속에서 익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한 사람은 삶에서 향기가 납니다. 반대로 헛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자꾸만 엉뚱한 길로 흘러가서 그의 곁에 가면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감돌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예전보다 더욱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박은 익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내적인 충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척도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깊어갈수록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히 사

우리가 책임져야 할 영역

우리는 우리가 끌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가장 근본 기준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찾는가 어둠을 찾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숨어들어 있는 것이지요. 한편 우리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빛에 대해서 배우고 어둠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그리고 빛을 추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어둠을 벗어나도록 가르침을 받지요.  만일 이 가르침이 올바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고 그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이며, 그 부족한 가르침을 전해받은 이는 책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서로 증오하고 서로를 배척하면서도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는 법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제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제가 부족했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그런 부족한 이들이 모인 교회에 함께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눈에 띈다고 해서 교회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원래부터 완벽한 단체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런 교회를 선물받은 것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서로를 도와야 하는 공동체이지요.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딘가는 반드시 부족함이 있게 마련이지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성을 분별할 수 있고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부족한 것을 열심히 메꾸어 가며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저의 분별이고 동시에 결심인 셈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호를 찾아 나섭니다. 때로는 교회의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교회 전체를 떠나기도 하고, 또 자신 안에 숨겨진 어둠을 선호하는 경향에 따라서 어둠을 찾아 나서기도 하지요. 빛을 찾는다고 나섰다가 속는 경우도 있고, 또 어둠에 머물러 있다가 뒤

세상을 이기는 사람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1요한 5,5-8) 물은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우리의 육신을 의미하지요. 피는 생명을 부여하는 내적인 면모들을 의미합니다. 동물도 이 피의 영역을 지니고 있지요. 바로 지성과 감정의 영역을 말합니다. 이 물과 피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피’는 한 동물의 ‘생명’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피가 다 빠지고 나면 생명력도 함께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느님에게서 나온 거룩한 영, 그분을 알게 하고 그분을 뒤따르게 도와주는 거룩한 영입니다. 바로 이 영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이 없이는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으며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금수보다도 못하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은 자유의 공간이며 그 자유를 선으로 이끌지 못하면 반대로 악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무언가에 집착하여 살게 되지요. 우리는 선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선을 반사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선의 빛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에게서 선이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물의 성실성, 즉 구체적인 삶의 성실성으로 당신을 증언하시고, 또 피의 성실성, 그 내면의 선하심과 좋은 것들로 자신을 증언하시며, 마지막으로 성령의 증언,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증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진실성을 알아보고 그분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분을 믿을

진실함을 분별하는 방법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그 진실성을 분별합니다. 언제나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가 하는 말은 얼마든지 믿을 수 있게 마련이고 반대로 거짓말쟁이나 권위가 없는 이가 하는 말은 믿어서는 안되지요. 우리는 통상적으로 누군가의 말을 듣기 이전에 이미 먼저 그 진실성의 여부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의 말을 듣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성을 두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진실성을 도대체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이나 생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그의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외모가 말끔하고 준수한 사람은 어쩐지 좀 더 신뢰가 가는 것 같고 반대로 외모가 후줄근하고 볼품없는 사람은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한때 홍콩 무술 영화가 한창일 때, 무협의 주인공은 늘 스승을 찾아 다니다가 어떤 이상한 할아버지 한 사람을 만나고 그를 무시합니다. 헌데 나중에 보면 그가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외모가 깔끔하고 준수해서 믿고 이런 저런 것들을 맡겼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사기꾼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진실성의 근본을 찾아야 마땅한 자리에서 그것을 찾지 않고 진실성과는 상관 없는 곳에서 그것을 찾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입니다. 진실함은 ‘외모’나 ‘학벌’, 그가 지닌 외적 ‘권력’이나 ‘명예’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진실함은 오직 그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목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끝에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박사학위가 그의 인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시골 무식한 촌로보다도 더 형편없는 인성을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교만함과 독선과 아집이 그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고 다가오면 그에게 얼른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건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 신뢰를 두기 때문입니다. 어딜가든지 ‘경력’을 제시하도

이론과 삶

이론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기 힘이 듭니다. 구체적인 삶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삶으로 살아내어서 그것을 입증해 보여야 가능합니다. 효율성이라는 이론에 반대 이론으로 다른 가치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입증해 낼 수는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실제로 돈을 좋아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난한 이들과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직접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가르침을 삶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은 채로 백성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우고 있었지요. 인터넷의 맹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인터넷은 철저히 자신의 삶을 숨기고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죄를 없애시는 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죄에 대한 이해를 굳혔으니 이제는 죄를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죄라는 것은 앞서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어떤 행위 그 자체의 결과보다는 그 내적 방향성이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없애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행위를 한다고 죄가 없어진다기 보다는 내적으로 방향전환을 이룰 때에 죄가 없어지게 됩니다. 진흙탕에 들어가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꺼내서 옷을 씻긴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흙을 좋아하는 아이의 내적인 면모를 변화시켜서 깨끗한 것을 좋아하게 해야 진정으로 그 아이가 깨끗해지는 것이지요.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옷을 씻겨도 다시 진흙탕에 빠져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아이의 옷을 한 번 세탁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더러움을 스스로 분별하고 깨끗함을 선호하게 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 꾸준히 깨끗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사랑할 때까지 몇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 어린양인 이유는 그분이 당신의 삶 자체로 하느님이라는 빛을 드러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빛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을 올바로 체험한 이면 누구나 하느님을 알게 되기에 예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분이 되시는 것이지요. 아직은 설명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싶은 어머리를 떠올려 봅시다. 헌데 이 어머니는 당장 자녀들이 성당에 가지 않는 것이 불만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볼때마다 안쓰러운 표정, 일그러지고 슬퍼하는 표정으로 성당에 가라고 합니다. 헌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가 더욱 싫어지고 어머니를 기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실 문제는 자녀들에게만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1요한 3,6) 우리는 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아닌 것을 죄로 간주하고 또 죄인 것을 죄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로 ‘주일미사 참례 여부’는 현 고해성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을 차지합니다. 사실 수많은 신자들이 판공을 보러 오거나 아니면 미사 전에 급하게 뛰어와서 ‘지난 주 미사를 빠졌다’거나 혹은 ‘몇 주 동안 미사를 쉬었다’는 식의 고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그 계명의 어김이 가장 큰 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미사에 빠진 그들은 말 그대로 죄인일 수도, 혹은 죄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주일미사의 물리적 참여 여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볼리비아 시골에 차를 타고 흙길을 따라 2시간을 넘게 들어가야 하는 곳에 공소가 있고 사제가 한 달에 한 번 겨우 찾아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 있는 신자들에게 ‘왜 당신은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소?’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사제나 교회의 일원이 매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해야 마땅하지요. 그런 이들에게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 아니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의무는 전혀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어느 어르신이 주일에 일어났는데 평소에 앓던 류머티즘이 도져서 하루를 꼼짝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집안에 머물렀다가 다음 주가 되어서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미사에 나갔는데 과연 그 할머니가 죄를 고백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죄이기에 말입니까? 그 할머니는 죄를 고백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잠시의 건강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일미사를 거르더라도 죄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

- 신부님, 이성은 바람직하고 좋은 걸 생각을 하는데 감정이 정리가 안되요. 언제쯤이면 감정을 다스리는 게 가능해 질까요? - 글쎄요. 저도 궁금하네요. 언제쯤이면 그게 될까요? (앞에 연세가 있으신 다른 자매님에게) 언제쯤이면 그게 되던가요? - (웃으시면서) 안됩니다. 아마 평생을 가도 그건 안될걸요. 그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도전거리가 있을 것이고 그런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우리의 이성은 언제나 바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감정을 추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훈련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훈련할 수 있고 우리의 지성도 훈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합당한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인내’라는 덕목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해서 감정의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인내라는 덕을 바탕으로 쌓지 않으면 금새 튀어나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요. 인내는 즉각적인 반응을 삼가하게 도와주고 우리가 하려는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시간을 벌어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대부분 우리가 하려던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은 그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이유는 ‘공격 받았다’고 생각하고  ‘억울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인내가 자리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신앙’이라는 덕목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억울함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해야 할 분이 별다른 저항 없이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내가 처한 현

배우려는 이와 가르치려는 이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자신 안에 답을 정해놓고 따지듯이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기에 그에 합당한 것을 전해 주어야 하지만 이미 자신 안에 무언가가 정해져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답을 주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겸손하고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지만 두번째 사람은 교만하고 모든 것을 내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대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초등학생과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망가진 어른의 마음보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서 배울 것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리함은 천상의 지혜를 어리석음으로 간주합니다. 얼마든지 따지고 싸우고 이길 수 있는 판에 ‘십자가’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