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6월, 2017의 게시물 표시

단식

말 그대로는 음식을 끊는 것이지만, 그 깊은 의미에는 ‘세상의 즐거움을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누려오던 세상의 여러가지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그런 세상의 즐거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육신의 즐거움이겠지요. 무언가 맛있는 걸 먹어서 얻는 즐거움,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해 지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서적이고 지식적인 즐거움이 있겠지요. 정서적인 즐거움은 화려한 경관을 구경하는 데에서, 재미난 영화를 보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지식적인 즐거움은 몰랐던 정보를 깨닫고 아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단식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단절되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즐거움’이지요. 우리는 단식을 하지만 이 마지막 즐거움은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존재의 즐거움은 바로 이 영혼의 즐거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혼은 언제 즐거워할까요?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이 공급된 때에 육신이 즐거워지듯이 영혼도 영혼에 필요한 것이 공급될 때에 즐거워집니다.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은 바로 ‘사랑’이지요. 우리는 사랑받을 때에 영혼이 즐겁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인간에게서 갈구할 때에 우리는 마치 시한폭탄이 들어있는 곰인형을 사랑하는 것과 같게 됩니다. 곰인형의 겉모습은 아름답고 푹신하지만 결국 속에는 터져 버리고 말 폭탄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겉모습에 매료되어 다가섰다가 결국 터지고 마는 폭탄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사랑을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심지어 지상의 것들을 단식하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밀을 깨닫는 이는 참으로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 6,3)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의지하는 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지니고 있었지요. 그분의 수고와 희생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우리가 의지하는 존재가 변화하게 됩니다. 누구는 자신의 회사를 의지하게 되고 또다른 누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명예에 의지하게 되지요.

그 가운데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가 있습니다.

드러난 일만 볼 수 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세상의 아버지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세상의 아버지 앞에서는 그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실제 가정에서는 엉망 진창인 삶을 영위하면서 직장에만 가면 멋진 부장님으로 변모하는 경우, 평소 행실이 너무나 제멋대로이지만 연애를 하는 동안만은 매너 있게 변모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 순간 순간만 제대로 대처하면 실제 나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관없는 셈이지요.

그러나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는 이것들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분 앞에서는 수많은 가식적인 행위가 무색하게 됩니다. 그분 앞에서는 오직 우리의 진정으로 변화된 내적인 모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완전한 사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완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엉뚱한 것을 상상합니다. 우리는 완전함이라는 것을 정적이고 고요하고 꽉 찬 것으로 해석합니다. 마치 고정된 불변의 방정식과 같은 것, 어떤 충만한 에너지 따위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더이상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은 존재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완전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완전은 사랑의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이 더 큰 완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합니다.

헌데 과연 사랑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곧잘 ‘우리끼리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좋은 사람들끼리 좋은 자리에서 좋은 음식을 나누면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을 떠올리지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미흡함에서 드러난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부족’을 예비하고 그 부족을 향한 내뻗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에 꼭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만 있으라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그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사랑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남편과 아내가 있을 때에 그 어느 한 측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서로를 향한 증여가 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사건과 사고가 터지고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이 늘 생겨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우리의 하느님은 그러한 부족함을 채우는 넘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바로 그분이 우리의 완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무리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서기 힘들고 꺼려지는 이들에게 다가서서 손을 내미는 과정으로 우리의 완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야 합니다.

저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인생이 이렇고 저러한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겠느냐고 묻는 이들이지요. 헌데 그들은 제가 가진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가진 비밀은 바로 “답은 여러분들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삶은 어떤 외적 조치로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의 결심과 실행으로 나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 이상한 형태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릇된 결정을 내렸고 그릇된 실행을 반복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탓을 외부로 돌리려고 합니다.

실마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습니다. 아내와 늘 다투는 사람은 아내에게서 그 실책을 찾으려 하고 부족한 돈을 탓하려고 들며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닥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탓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좀처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부족한 이유를 온통 외부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최종 책임자는 늘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보시니 좋았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망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한 죄악이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외적인 조건들이 아닙니다. 실력이 없으면 서울대를 운좋게 들어가도 버텨내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정말 도전을 견딜 의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능력이 나의 취직에도 나의 결혼에도 나의 구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이 가져오는 문제를 조용히 듣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에게 비춰주는 것 뿐이지요. 그러면 답은 스스로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조종대를 잡고 있는데 차량 도색이 마음에 안든다고 그래서 목적지에 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모양새가 꽤나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지경이라며 찾아옵니다. 그러나 답은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아멘의 이유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곧 나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 합니다. (2코린 1,18-20)

하느님은 성실하셔서 우리에게 늘 ‘예’를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하느님의 약속은 이미 ‘예’, 즉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얻게 하겠노라고 하셨고 당신 외아들을 따르는 이들은 그 길의 끝에 준비되어 있는 영원한 상급을 얻게 하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순간, 그 길을 걷겠노라고 결심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시간이 더딜 뿐 반드시 이루어지는 약속인 것이지요.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응답은 쭈볏거리면서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라고 분명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에 대한 답변은 ‘예’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를 의미하는 교회적인 용어인 ‘아멘’으로 응답을 합니다.

그러나 일은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아멘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서 잔을 들고 ‘주님’을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아멘’을 외치는 것은 진정한 주님을 비꼬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올바른 의식을 품고 어디에다가 아멘을 외쳐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진정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사제들도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거울처럼 비추어내고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의인이 박해를 받는 이유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 5,10-12)

사람들은 어디에다 불만을 토로할까요? 그건 성격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오히려 말을 삼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불만은 그런 불만을 묵묵히 받아들여줄 사람 앞에서 합니다.

결국 착한 사람들이 불만을 들어줍니다. 성격이 온순하고 마음이 착한 이들이 상대의 불만을 묵묵히 들어줍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착한 이들에게는 세상의 짐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가 이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약아서 자신과 대등한 힘을 지닌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대 치면 두배로 얻어맞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의 악의 대상으로 약한 이들을 물색합니다. 그들은 맹수가 먹이를 공격하는 모양새로 은밀하고 으슥한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자신들의 근처를 지나가는 이들을 공략합니다.

착한 이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살이는 선한 이들에게는 참으로 곤욕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상에서부터 그런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지상의 위로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고충을 당하지만 양심만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맑은 양심은 훗날 영원 안에서 진정으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위로는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악인은 더욱 득세하고 선인은 더욱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지닌 이들은 세상 안에서 좀…

‘나는 그저 교회에서만 멀어졌을 뿐입니다’라구요?

교회는 그 자체로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러면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교회는 필요 없는가?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교회를 이루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참으로 헷갈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헷갈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교회상이 저마다 달라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외아들도 완전한 분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완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말인즉슨 그 구성원들이 ‘완전’하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그 안에 구성원이 되기 힘들게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은 딱히 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교만이 스스로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시작될 때부터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를 추억하지만 초대 교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오류를 저지르고 그릇됨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함께’ 모색해 나갔습니다. 공동체가 잘못 생겨 먹었다고 공동체를 떠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날 교회에 오류가 많다고 교회를 떠나서 홀로 하느님을 찾겠노라고 나서는 이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즉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는 교회가 그다지 필요없다는 식의 주장이지요.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스승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면 그 학교는 존재의 이유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사랑의 학교에 몸담고 있는 중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족한 가운데에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사랑을 점점 더 넓혀 나가는 …

본당 순례 (63차) : 우리 본당은요... (사수본당 편)

질문지 - 본당 순례 (63차) : 우리 본당은요... (사수본당 편)
   * 방송일 : 2017년 7월 01일(토) 오후 6:05 ~ 7:00    * 녹음요일과 시간 선택 :         - 6월 21일(수)이나 22일(목) 중에서 하루 선택        - 시간은 오전 10:30 이나 오후 3:00에 선택해 주십시오.          - 날짜만큼은 빨리 정해서 연락주시면 땡큐            김종헌신부 (010-5442-6112)    * 녹음 장소 : 대구 가톨릭 평화방송 A 스튜디오    * 참석자 : 주임신부님 외 평신도 5~6명     - 2017년 6월 25일자 주보에 본당 출연소식을 주보에 실어주시고       신자들이 많이 청취할 수 있도록 공지해 주십시오. 93.1 MHz    - 핸드폰에 Mobile App을 깔면 언제, 어디서나 들으실 수 있습니다.

[녹음 내용] (주임신부님) “본당순례: 우리 본당은요/오늘은 ~~~  (전원) 사수본당입니다.
[자기 소개] 주임신부님부터 각자 돌아가면서 직책과 이름, 세례명을 말하고 한 사람 소개가 끝날 때마다 모든 출연자들이 박수를 쳐 줍니다.
저는 사수 본당 사목구 주임 사제인 마진우 요셉 신부입니다. 
[질문 내용] A. 사수본당의 소개    1. 이 프로그램을 애청하시는 분들이 여러분의 공동체를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한 마디로 사수본당을 소개하신다면? (‘사수본당은 000이다’ 이렇게 각자 한 마디로 본당을 소개한 후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요)
사수본당은 기적이다. - 주임 사제인 저부터 기적처럼 남미에서 오게 되고 또 기적처럼 일을 맡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하루 기적같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B. 사수본당의 어제      1) 본당의 역사를 누가 소개해 주시죠?  사수본당은 교구청의 발령 공문이 있기 이전에 일찍부터 준비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국의 신자분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분들의 기도가 하늘에 가 닿아 이역 만리 땅에서 선교하던 사제를 끌어낸 것이 …

우리에게 필요한 4가지 브레이크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적 인내와 관용과 온유와 겸손이 제대로 함양되지 못한 사람들이지요. 사람은 서로의 내면을 알기 위해서 많은 소통과 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현실이지요. 그래서 다른 이들과의 만남 가운데에서 나와 반대되는 것 같아 보이는 뜻을 지닌 사람을 마주하면 발끈 해 버리는 것입니다.

첫번째 브레이크는 인내입니다. 인내가 강한 사람은 완충장치의 허용 범위가 엄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그 어떤 급작스런 충격이 와도 견뎌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덕목은 ‘인내’가 됩니다.

다음으로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인내와 비슷한 덕목이지만 인내가 충격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면 관용은 충격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남의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에는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세번째 브레이크는 온유입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지요. 아무리 정당한 이야기라도 매섭게 해 버리면 그 자체로 또다른 공격 여건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한 태도로 상대에게 우리의 의견을 차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상대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근본적인 겸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늘 부족하다는 것, 우리 역시도 하느님으로부터 인내를 통해서 관용을 통해서 온유를 통해서 교육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성격이 매서운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기피하는 무엇이든 그 앞에서 발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앞서 서술한 여러 덕목들을 이용을 해서 우리 자신을 올바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에서 멀어진 이들

신앙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은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몰라서 다가오지 않는 이들.
2. 그릇되이 알아서 멀어져 있는 이들.
3. 알면서 의지적으로 멀어지는 이들.

1. 몰라서 신앙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은 알아가면 됩니다. 다만 누군가 초대를 해야 하지요.

2. 그릇되이 알고 있는 이들은 먼저 알고 있는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오해는 피상적이지 않고 뿌리가 깊은 경우도 있어서 때로는 그 뿌리를 캐어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열심히 곁에서 돕는다면 결국 그 뿌리가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3. 잘 알지만 의지적으로 실천적으로 멀어지는 이들은 자신들이 뉘우치고 마음을 바꾸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이미 알아야 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옆에서 신앙에 대해서 소개하고 가르침을 주고자 돕는 것이 크게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게는 ‘실천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하지요.

이 세 가지의 경우에서 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이들이 바로 ‘믿는 이들’이어야 하지요. 우리는 초대하고, 가르치고, 실제로 살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 되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토빗 3,16)

의미없이 반복하는 말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간절함과 진실성에 기반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추진력을 갖습니다. 마치 추진제가 부족한 로켓이 하늘로 올라가려다 다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간절함’과 ‘진실성’이라는 두 추진제로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 집니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즉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하느님의 최종적인 보상은 ‘영원한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아버지이시며 의인들은 죽어도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 땅에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이 입은 은혜를 통해서 하느님을 배워 알고 하느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설령 좋은 것,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별다른 간절함 없이 건성으로 청해서도 안됩니다.

고3학생의 부모가 자녀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 자녀가 설령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더라도 잘 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3학생의 부모가 성당에 정성을 드린다면서 100일 미사를 넣고 그러면서 자녀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 즉 자녀가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데 좋은 대학에 어떻게든 보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간절하지만 진실성이 없는 기도’가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보편지향기도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너무나 합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거기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고 그저…

나는 잘못이 없다?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뭔가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했을까요? 사람들이 나쁘고 못돼 먹었고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전혀 몸담지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쓰레기가 버려져 있고 그것이 더럽다고 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쓰레기가 더럽다는 표현을 사정없이 해 대면서 오히려 쓰레기를 버리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상대는 더럽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면서 그들과 우리를 철저히 분리시키려 하고 그러면서 적대감을 더욱 늘린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대단하신 이유는 청소를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실과 사랑과 온유와 친절로 세상의 악을 홀로 끌어 안으시기를 자청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다가서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나도 부족한 이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할 줄은 알았지만 그 맘에 들지 않는 남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내어 줄 정도의 희생을 감내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사랑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은 신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이는 자신의 안에서 사랑의 신비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만 잘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아서 잘못하는 것입니다.

광고의 영적인 의미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당신은 어느 회사의 사장입니다. 당신이 행복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부와 명예는 당신이 판매하는 상품에 달려 있지요. 헌데 그만그만한 상품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당신의 상품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 이상의 물건은 좀처럼 구입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경우에 여러분은 어떠한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광고를 해야 하지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판매하는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내가 파는 상품이 다른 상품보다 더 낫다고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판매하는 상품의 이런 저런 장점만을 내세우고 강조한 광고를 만들어냅니다. 반면 그 상품의 단점은 가능한 한 철저히 감취지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별 필요도 없는 상품들을 광고들을 보고 생겨난 욕구로 인해서 구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회사 역시도 광고를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광고는 더욱 자극적이 되고 정당한 ‘소개’의 수준을 갈수록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광고의 기본은 제품에 대한 정당한 소개가 아니라 구매욕구를 자극시키는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진행단계인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날의 한 단면입니다. 결국 소비는 미덕이 되고 더 많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이가 더 잘 사는 이, 더 행복한 이로 포장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기에 헌신하는 만큼 본질적인 행복에서는 더욱 더 멀어져가게 됩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분별력을 지니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단순한 지식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끌어 당기려는 의지가 잔뜩 들어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 미술관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려는 지하 감옥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선물인 시간

“내가 시간 내 볼께”라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선물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큰 사건 사고가 일어날 수 있고 당장 내일이라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느님이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하루’라는 시간을 선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넣을 수 있는 그릇처럼 주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그 선물 그릇을 달콤한 사탕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쓰디쓴 쓸개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루의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채워갑니다.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에서 비롯한 결과물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나의 현재가 모여서 완성하게 될 무엇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하루는 소중합니다.

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에게서 받은 하루에 대해서 왜 감사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아침을 어제의 찌뿌둥함으로 채우려고 합니까? 왜 필요치 않은 숙취를 남겨 여러분의 몸을 오늘 더욱 피곤하게 만듭니까?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하느님에게 감사 드릴 수 있다면, 그리고 긍정적이고 바른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하루는 분명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저녁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어야 하며 지나온 삶에 감사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는 감사로 채워지는 것이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