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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7의 게시물 표시

가진 것을 다 판다는 의미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13,44) 세상에도 투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에 대해서 가진 것을 걸어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대상이 지닌 가치가 당장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투자한 만큼을 뽑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망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투자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정보이냐, 누가 그 정보를 주었느냐에 따라서 내 안의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 신뢰도 만큼 투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실할 수도 있고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의 모든 투자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그에 투자하는 일은 곧 약속된 것을 보장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보장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 이들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것을 내어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생애’이지요. 하지만 모든 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주저하고 또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어도 아까워하면서 내어주고 또 지극히 일부만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의심’에 대한 결과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일부만을 사려고 들다가는 엉뚱한 곳만 잔뜩 사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표현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말에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을 상실한다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진 것을 다 판다는 말이 우리더러 신학교를 들어 가라거나 수녀원에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가진 것을 다 팔고 난 뒤에 뒤따르는 여러가지 부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우리가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성경 안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더불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내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즉, 나는 오른손에게 유익을 준답시고 발가락을 부러트리는 행동 따위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지체의 고통을 잘 감지하고 있으면서 가능한 모든 몸에 유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고 이행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게 순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모든 이들을 동원해서 당신의 몸 전체를 보살피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순명할 때에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은 결코 우연히 만나는 법이 없으며 모든 만남과 활동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서로 지니고 있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 상대의 부족함을 메꾸고 일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와 반대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이간질을 하고 험담을 하고 서로 불목하고 증오하고 갈라서는 이들은 스스로 주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되고 그들은 제 아무리 올바른 생각으로 합당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전체의 선에 반대되는 결과를 야기시키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뚜렷한 본보기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한 분별력이 있으며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눈 뜬 장님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마태 13,17) 제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썩 잘생긴 얼굴일까요? 아니면 그분의 화려한 옷감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이 바라본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메시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다른 이들, 즉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해졌습니다. 즉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단순한 성가심과 시기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생겨납니다. 바로 눈 앞에 맛있는 케잌이 있어도 나의 후각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의 본질적인 가치를 올바로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 일이 이 세상에서도 벌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것’을 눈 앞에 두어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구 대하게 됩니다. 수많은 예언자들과 의인은 주 그리스도의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은총이 넘쳐 흐르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율법의 단편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가르침과 더 많은 자비를 얻고 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며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가온 지금의 시점에서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분에게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고 그분의 조언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유나 들을 뿐이었고 본질적인 가르침에 굶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득이 되는 무언가를 기를 쓰고 이루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갈망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반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

광야의 불평과 만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불평’을 시작합니다. 그 불평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들이 왜 광야에 나왔는지에 대한 과거의 망각이었고 또다른 한편으로 이전의 삶, 즉 이집트의 억압받던 삶을 동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지금의 하느님의 이끄심에 대한 현재의 망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들이 가 닿을 곳에 대해서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다가올 희망, 즉 미래에 대한 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 주십니다.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먹여 주시면서 그들의 아주 사소한 욕구 마저도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고 또한 만나를 먹여 주시면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여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재’라는 시간에 집중하게 만드셨습니다. 만나는 그 날 먹을 것 이상을 지닐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모으면 그것은 반드시 썩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루의 은총도 그날의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날의 행복 이상의 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에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곧잘 수많은 것들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쌓아 두었다가 ‘내 자녀들’에게 물려 주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훗날에 부패한 결과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일용할 양식을 늘 주시고 전혀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만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우리는 지나가 버린 과거에 미련을 두지도, 또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 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날 그날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오직 ‘감사’ 뿐입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절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기쁨은 계산이 아니라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이유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 악이 자신에게는 ‘선’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이성을 통해서 담배의 해악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담배가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담배를 태웁니다. 왜냐하면 담배가 가져다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이 다른 치명적인 결과보다도 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태우는 그에게 담배는 다른 선택의 여지보다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담배를 태우지 않는 그 즉시 생겨나는 금단 증상보다는 담배를 태우면서 순간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악을 저지르는 이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바탕으로 ‘영적 장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사물들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지요. 그들은 어둠의 소리만을 듣기 때문에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선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절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다가오라고 유혹하는 어둠의 소리에 따라서 절벽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지요. 악을 저지르는 이들은 모두 영적 장님의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지요. 하지만 도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움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그들 스스로 그 도움을 수용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움을 두고 오히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손상된다고 생각을 하며 그 도움을 거절하곤 합니다. 이런 꾸준한 자신의 자유의지의 그릇된 사용이 결국 자신의 내면에 모종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됩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가 선의 초대를 받을 때에 처음 어느 정도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거절을 하다가 나중에는

순명

하느님은 모세에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을 수행할 능력이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에게 있음을 상기 시킵니다. 모세에게 남은 것은 ‘순명’하는 것이었지요. 이 순명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순명’에는 ‘나의 뜻과 반대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사탕을 먹고 싶은데 내가 순명해야 할 분이 날더러 사탕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저항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대로 수행하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순명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탕을 먹고 싶은데 내가 순명해야 할 분은 내가 ‘쓴 약’을 먹기를 바란다면 바로 거기에서 순명의 충돌이 빚어지는 것이지요. 모세는 지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동포들에게도 또 이집트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헌데 하느님은 바로 그들에게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의 근거로 다른 무언가를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의 명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현대 세계의 흐름과 달리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교회가 민주주의였더라면 지금의 여러 제도와 위계 가운데 상당히 많은 것들이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성직 주의도 아닙니다. 무조건 신부님이 옳다거나 심지어 사제가 뚜렷한 악을 저지르는 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주의’입니다. 사실 이 두 단어, ‘하느님’과 ‘주의’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인데 ‘주의’라는 것은 어느 하나의 노선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그 자체로 오류입니다. 그저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와 신자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 어디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교회’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죄로 잃게 되는 것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모세는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존재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었습니다. 즉, 사제 집안인 레위 지파 출신이었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자신이 처한 세상의 현실 안에서 그는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노예들의 자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파라오의 딸에게 발탁되어 공주의 양아들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신분은 정반대로 변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동족에게 멸시를 당하고 더불어 파라오에게 죽음의 위협을 겪는 신세가 됩니다. 이는 곧 우리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서 우리는 가장 약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언제라도 세상의 위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요. 그런 우리가 세상 안에서 나름 살 길을 얻게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역량을 마구 펼치지요. 인간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릇된 자유의 사용으로 ‘죄’를 저지르게 되고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도 세상 안에서의 지위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라는 것은 두 가지 면모를 동시에 상실하게 합니다. 인간의 죄는 무엇보다도 그의 내면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빛을 꺼뜨리게 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느님을 상실하게 되지요. 그리고 하느님을 찾기는 커녕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나아가 이 죄는 사회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어서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게 됩니다. 죄에 물들어가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게 됩니다. 모세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그의 그런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온전히 당신의

기적과 회개

우리가 상시적으로 받는 은총이 있고 우리가 특별한 기회에 받는 은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은 모든 이가 똑같이 상시적으로 받는 은총이지만, 특별한 성사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그 특별한 상황으로 지금은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성체를 모실 수 있고 고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역으로 그러한 성사들의 가치가 더욱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좀처럼 성체 신심과 고해성사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문명의 이기가 더욱 편리해지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주변 성당에 갈 수 있지만 그것을 귀찮아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러나 예로부터 우리가 이러한 성사의 은혜를 늘상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사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제 자체가 귀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열망이 존재했고 그래서 그런 성사의 기회가 올 때에 다시 없을 기회로 보고 온 마음으로 그 성사를 받아 들였고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지닌 7가지 성사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하여 가장 귀한 순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나친 신심은 오늘날 지나친 성사의 과부하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 특별한 기회를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을 꾸짖기 시작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입고 있는 미사의 은총을 가난한 나라, 선교사가 한

쉬고 있는 분들에게

예전에 교리교사를 하던 지금은 소위 ‘냉담’ 즉 쉬고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늘 성당을 떠올린다고는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은 그가 맺고 있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과 막상 그것이 닥쳤을 때에 귀찮아서 실천하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해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신부님이 기도는 하겠지만, 그 기도가 절로 너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올바로 알아두어야 해. 결국 너 스스로가 선택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인은 끝까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로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영성 깊은 사제를 개인적으로 안다고 해서 그의 영성이 자동으로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에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것만큼 구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으로 자신들이 내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지요.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의 내면이 간절히 추구하는 무언가입니다. 버릇처럼 ‘나중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지금 그것을 성찰하고 묵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결정하고 실천하지 않는데 나중에 돌아오게 될 가능성은 더 희박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은 그냥 들판에 피어나는 풀꽃보다도 못한 삶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뿐입니다. 결심하려면 이 글을 마주하게 된 지금 결심해야 합니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이 쥐고 계신 시간입니다. 다행히 그분의 은총으로 그 나중이 주어

선한 이들은 선을 아는 이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돈 몇 푼 쥐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하는 충분한 목적이 있다면 어둠에 빠진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선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선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더이상 죄, 즉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맞서는 죄를 짓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오류’가 하나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오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들은 오히려 역작용을 해서 하느님께로 가까이 이끌어주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분별하는 이유는 딱히 거짓말을 심각하게 한 것도 아니요 신앙생활의 의무를 성실히 지키며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법을 어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에 대한 기준점은 그러한 바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점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안전지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즉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판공을 빠뜨린 적이 없으며 교무금도 꼬박꼬박 내고 교적 정리가 확실히 되어 있다고 해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결국 그는 어긋난 방향으로 서 있는 이들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성경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려고 모함을 하곤 했지요. 사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들, 곧 진정으로 선한 이들은 오히려 자신 안에서 너무나도 큰 부족함을 늘 체험하고 늘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며 묵묵히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 내곤 합니다. 여전히 수많은 종교 단체 안에는 선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칭 선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활동을 만들어내고 하지만 실제적인 ‘선에 도움이 되는 활동’은 참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자세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0-42) 때로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면서 어느 신부님이 자기 집에 자주 들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헌데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의 길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이 밤중에 스스럼없이 쳐들어 와서는 술을 진탕 먹고 가고 함께 고스톱을 치고 간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자매님의 버전을 들어보면 그 술자리의 안주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신부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마련한다고 신경 많이 썼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과연 그러한 이야기 안에는 사제를 사제로 맞아들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과 엄청 친한 친구가 ‘사제’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단순히 상대의 신분이 엄청나다고 해서 그를 그 신분의 본래의 위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 가셨을 때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내면 안에 사로잡힌 ‘선입견’의 벽과 ‘교만’의 벽을 깨부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성지순례를 갈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정말 성지순례를 그 의미 그대로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광’의 또다른 좋은 명목으로 가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이들은 갈 때는 엄청 거룩하고 진지한 듯이 보이지만 올 때는 모든 것을 풀어제끼고 놀아야 속이 시원해지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그들이 올바른 성지 순례를 했더라면 오히려 갈 때 보다 올 때에 더 하느님을 마음 속에 품고 거룩한 기쁨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

칼을 주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당연히 하느님이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마지막 목적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올바로 이루어지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은 ‘분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과정 속에 어쩔 수 없이 ‘분별’이라는 칼이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가오시지만 모든 이가 구원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우리의 동참이 없는 구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구원이 아니라 그저 원래부터 이루어져야 했던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가 거기에 참여를 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면 우리의 역할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구원에 동참을 할 수도 그 구원을 거부를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모든 이에게 선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다가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옴은 단순한 평화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고 살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자는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미 모두 구원을 살고 있다면 굳이 다가올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단순히 한 두 사람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모든 이들을 물들여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다가 오

늑대와 양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16) 이리들은 굶주려 있고 양들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이리와 같은 이들’은 늘 굶주려 있고 ‘양과 같은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지요.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리와 같은 이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이리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이리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비인 이유는 우리가 그 이유를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내적 선택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악은 그 원인을 올바로 알아낼 수 없으며 그래서 ‘신비로운’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그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망각된 상태인 경우가 많겠지요.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의 시작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우리는 때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괴로움만을 바라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 시작하는 지점이 존재를 합니다. 우리가 심리 치료를 받으러 가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지요. 원인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늑대’로 변해버린 존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늑대가 으르렁 거리듯이 늘 불쾌하고 빈정대며 타인에 대해 험담을 하고 악습을 즐기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자신들끼리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서로의 악함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공연히 같은 늑대를 공격했다가는 늑대의 무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행여 나보다 힘 센 늑대를 공격했다가는 내가 갈기갈기 찢겨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을, 양과 같은 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양과 같은 이는 순진하고 착하고 맑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다른 이를 언제나 배려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지요. 이런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때

평화를 원치 않는 고을의 운명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 10,12-15) 참으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진리와 선과 사랑’을 원치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지요. 즉, 그런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집단을 이루어 ‘진리와 선과 사랑’, 곧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이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들은 언뜻 꽁꽁 뭉쳐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투쟁하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뭉쳐 있는 이유는 다른 집단과 상충되는 이해관계 때문이고 결국 그 다른 집단과의 갈등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그들 안에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과 사랑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은 바로 그 같은 진리와 같은 선과 같은 사랑 안에서 하나로 뭉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과 아무리 달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 간직한 같은 진리와 선과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가 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 면모를 올바로 살펴야 합니다. 1)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우리는 참된 복음을 지니고 있는가?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진정한 진리와 선과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는가? 2) 받아들이는 이들은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는가? 먼저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서면서 진정한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내비치는 것이 이미 많이 삐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것과 종교적인 전통과 관습을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전통을 전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공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거저 받은 것은 거저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일들은 ‘거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제들은 그것을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 10,9) 사도들에게 그 어떤 재화나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일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어찌보면 서로 상충되는 두 구절인 것 같아 보입니다. 한 측은 거저 주라고 하고 다른 한 측은 일했으니 먹을 것을 받으라고 하니 말이지요. 그래서 이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도들, 오늘날의 주교와 사제들이 실천하는 모든 성사의 일들은 오직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그 은총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아서 집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은총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데에 있어서 무언가 상응하는 것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한 편, 사제도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그도 입고 먹고 잘 곳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먹을 것은 일하는 곳에서 충당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먹을 것을 벗어난 범주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운행하기에 충분한 차를 두고 최고급, 최신 모델을 뽑겠다고 나서는 것은 먹을 것을 벗어난 범주입니다. 신자들은 그러한 것을 챙겨줄 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성당에서는 ‘교무금’, ‘봉헌금’, ’미사 예물’이라는 것을 받습니다. 교무금과 매 주일 봉헌금은 교구와 본당의 운영을 돕고 교회의 녹을 받아 먹고 사는 이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바로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입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신자로서 이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먹거리를 찾아서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창세 41,56-57) 세상에 기근이 심해질 때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나아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은 ‘요셉’이 들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에는 먹을 것이 풍족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꼭 입으로만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종류의 먹을 것이 있으니 정보도 습득하고 감정적인 위안도 찾게 마련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영적인 음식’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지요. 그래서 이 배고픔을 느끼는 이들은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지요. 그런 이들을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먹을거리, 즉 하느님의 계명과 가르침,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 본래의 목적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꾸 세상에서 먹던 음식을 먹이려 하지요. 온갖 재미나고 흥미를 끄는 활동으로 교회를 치장하려고 합니다. 명칭만 ‘성지순례’를 붙여서 세상 어디나 다 가는 야유회를 가고 명칭만 ‘주일학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세상이 다 하는 흥미거리를 전해주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지친 삶을 벗어버리는 방법을,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그분의 멍에를 메고 올바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제대로 먹이실 수 있는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서 그분의 곡식 창고에서 음식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바로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그분의 거룩

낮은 단계부터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5-7) 결국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결국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연수’라는 것을 갔다오고 나면 일종의 환상에 잔뜩 부풀어 있게 됩니다. 그 연수에서의 충만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다 해낼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꾸르실료를 다녀온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머지 않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적절한 실천의 범위가 요구됩니다. 처음부터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영역부터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이들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인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미 많은 신자들이 존재했고 지금은 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집안의 사람들이지요.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고 그 가르침을 따라 걷기도 했던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서서 하늘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그 일만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다른 민족들에게도 가게 될 것이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의미하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갈아엎어져 있고 고랑이 지어져 있어서 씨만 뿌리면 되는 밭과 달리 준비되지 않은 밭에는 때로는 큰 돌도 있고 때로는 뿌리가 깊은 나무도 있어서 그것을 골라내고 솎아내는 데에 엄청난 힘이 든다는 것이지

시달리고 기가 꺾인 양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양들이 시달리고 기가 꺾이는 이유는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있다면 목자의 볼호를 받아 늑대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또 목자의 인도를 통해서 좋은 풀밭을 찾아서 실컷 배를 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자가 없기 때문에 늘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목자가 없는 것이 목자 탓이겠습니까? 목자는 얼마든지 양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줄 것입니다. 목자의 부족은 목자의 탓이 아니라 양들의 탓입니다. 즉, 양들에게 목자를 전해 주어야 할 양들의 탓이며, 그러한 양들이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다른 모든 양들의 탓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 37-38) 양들이 일꾼을 청하기만 하면 보내주실 주인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청을 드리는 양들이 없습니다. 그나마 있는 일꾼도 힘을 빼버리는 양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일을 하러 온 일꾼들을 진탕 술에 취하게 하고 그 고귀한 사명에서 정신을 팔게 해서 자신들이 먹는 해로운 독초에 맛을 들이게 하는 양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양들에게 목자를 전해 주겠다는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 그들은 그렇게 독초에 물들어갑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이들이 아니라 양들의 털을 깎아 옷을 해 입고 양의 젖을 짜서 마시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에 양들은 지치게 되고 더욱 시달리며 기가 꺾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시작합니다. 즉,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일꾼을 보내 달라고 말이지요. 우리가 그러한 순수한 청을 드리기 시작할 때에 그 기도는 하느님에게 가 닿게 되고,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바로 그 기도를 드리는 이들을 통

쉬지 못하는 이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은 하고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하느님에게 맡기기 때문에 평화를 누립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하지 못하는 것은 맡기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쉬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않으려 하고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자가 최면을 걸면서 그걸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일하는 영역과 부족한 것을 채우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바로 노동과 휴식이지요.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배합되어 한 사람의 생을 꾸려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규형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늘 노동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대로 ‘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신경은 곤두서있고 늘 불쾌하며 다른 이를 향해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자가 먹잇감을 찾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 즉 채워지지 않은 만족감으로 인해서 타인들에게 표독스럽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가정에서 늘 불화를 조장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늘 분쟁을 야기합니다. 그들은 모으고 화해시키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주변에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해서 그들은 갈수록 고립되어 가지요. 그리고 그들의 표독스러움으로 인해서 ‘진정한 충고자’도 점점 상실해 갑니다. 그로 인해서 스스로는 모든 것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 진실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뿐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지닌 일부의 재능으로 인해서 그들은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능이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자가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극도로 단련해서 세상 안에서 성곽을 쌓을 것이고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이야말로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성의 이름은 ‘바벨탑’이기 때문입니다.

전례의 본질

전례라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찬미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례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어떻게든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싶은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필요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함께 모여 하느님께 감사 드리면서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행위였지요. 하지만 그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했고 그래서 예식 중에 그분의 말씀을 되뇌이기 시작했으며 또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더 예의바를 것이다’라는 행동들이 덧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현대의 전례를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한국적인 전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제대에 인사를 드릴 때에 한쪽 무릎을 꿇지만 한국에서는 ‘절’을 합니다. 그 밖에도 소소하게 한국적인 요소들이 여러 성사와 축복 예절 속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연도’가 있겠지요. 외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 만의 고유한 풍습입니다. 헌데 이런 더해짐이 때로는 ‘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각 본당마다 자신들의 해석에 따라서 더해지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기도 합니다. 이건 이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저건 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이 예식은 반드시 해야 하고 저런 행위는 반드시 전례 중에 끼워넣어져야 한다는 식이지요. 헌데 그 근거자료를 찾아보면 사실은 딱히 필요치 않은 행위들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경우가 많습니다. 복사단이라고는 4명 밖에 없는 본당에서 매일매일 복사를 세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마을 주민이라고는 허리가 구부정한 어르신들 밖에 없는 곳에서 이런 저런 전례를 모두 채우기 위한 봉사자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핵심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기념입니다. 우리는 전례 중에 이러한 것들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육의 행실의 보충설명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 8,12-13)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 5,19-23) 성경은 서로 설명합니다. 육의 행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내어 주고 있지요. 육의 행실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살 것이며 그들이 하려는 행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둠에 속해 있을 때에 이런 종류의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즉, 술을 좋아하는 데 흥청대는 술판을 조심하라는 글귀를 읽는다든지, 아니면 누구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격분하고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런 성경구절을 만나게 되면 상당한 내적 불편함을 느끼지요.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생활에서 멀어져 헛된 신앙생활에 빠져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헛된 신앙생활은 신앙의 외적 틀은 유지하지만 내적인 요소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신앙생활, 아니 종교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류의 종교활동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유지해 오던 것이고 절대로 성령의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따라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이들의 도움은 거

우리가 키운 이사악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아이였습니다.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태어난 분명한 하느님의 기적과도 같은 아이였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바로 그 아이를 다시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된 요즘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분의 선과 자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필요할 때에만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라는 것은 자신의 욕구입니다. 즉, 하느님을 저마다의 욕구대로 휘어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합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그분을 나름으로는 열심히 믿고 있다고 착각하지요. 그러나 그 착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그에게 소중했던 무언가가 손해를 입을 때에 드러나는 그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돈이 소중했던 사람, 건강이 소중했던 사람, 명예가 소중했던 사람, 권력이 소중했던 사람들의 모든 실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하느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채워지니 잠시 마음을 둔 것 뿐이지요.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려고 할 때에 그 주변에 서서 소위 하느님을 사랑한답시고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던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은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소위 성당에 열심하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의심하고 이간질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봉사한답시고 성당에 와서 살다시피 하긴 하는데 결국 바로 그 봉사 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고

풍랑 속에서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마태 8,24-25) 주님, 당신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지금의 이 풍랑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 당신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잠만 주무시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바쁜 것처럼 당신도 바쁜 척을 해 주시고 뭐라도 우리 눈에 드러나는 도움을 좀 주십시오. 하다 못해 줄이라도 잡고 매듭이라도 지어 보십시오. 제발 눈을 뜨고 우리가 내킬만한 무언가를 좀 해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은 일어나 이야기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너희들은 왜 겁을 내느냐? 무엇이 두려우냐? 저 몰아닥치는 폭풍우가 너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너희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 고요하다면 왜 죽음이 너희를 불안하게 하고 현세적인 손해가 너희를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것이냐? 그러니 너희는 믿음이 너무나도 나약하구나. 믿는다고 이 길을 나섰지만 지금 지닌 믿음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구나. 예수님은 단 한 번의 꾸짖음으로 호수와 바람을 잠잠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우리의 삶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창세 19,17) 롯의 가족은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 들판의 어디에서도 멈추어 설 수 없었다. 그들의 길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산’으로 가야 했다. 지상에서 높은 곳, 자신을 드높일 수 있는 곳으로 가야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상의 삶, 이 들판의 삶을 살면서 곧잘 멈추어서곤 한다. 즉 우리의 마음이 어딘가에 꽂혀 그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뒤돌아본다. 이미 지나온 삶의 흔적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모두 제 값을 받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가 높은 곳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결국 롯의 아내는 두고 온 것들이 너무나 아쉬웠던 나머지 뒤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만다. 소금 기둥, 뒤를 돌아다 본 이들의 상징. 그들의 허무한 삶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소금 기둥들이 있다. 내노라 하며 이 땅에서 살아간 이들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소금 기둥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다시 산을 향해서 방향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재앙이 밀어닥치고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재앙 속에서도 믿음의 자녀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장 지금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현세적 위협들을 떠올린다. 지진, 화재, 경제적 붕괴 등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재앙에서 살아남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이는 관점이 잘못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지상의 삶에는 위협이 다가오게 마련이고 우리는 가진 것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는 바로 영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영혼을 영혼의 산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평화를 누리는 방법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0,26) 부활 후에 예수님의 인사는 ‘평화’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간직하거나 누릴 줄을 몰랐고 이는 부활이 있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선언하시고 기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평화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다투고 싸우고 하면서 평화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폭풍우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적인 차이점이 그분의 평화를 제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즉,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 모두를 선으로 만드시어 그분을 찾는 누구에게나 당신을 내어 보이시고 길을 인도하시며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신다는 그 근본적인 신뢰에서 평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 속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평화가 머무를 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 상황에 민감하여 뭐든 조금만 자신의 성미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금세 불안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들은 평화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 믿음에서 진정한 평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그 믿음, 우리의 지상의 이 삶이 하나의 순례의 기간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서 우리의 평화가 비롯됩니다.

여행유감

남미에 있으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행을 다닐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현대의 세태에 대해서 말하자면, 지금 젊은이들이 막연히 떠올리는 꿈만 같은 여행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멋들어진 여행지에 가서 조용히 기쁘게 머물다가 오는 것, 그것은 여러가지 난점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가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공항에서의 여러가지 성가심과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 겪는 언어적인 문제와 현지인들과의 문화적 충돌, 그리고 뭐든 먹어야 하기 때문에 들러야 하는 현지 식당에서의 구체적인 여러 소소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여행을 추천하는 방송이나 서적 따위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여행 상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적어 놓은 여행 서적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예쁘고 좋은 것만 묘사하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진정한 여행이라는 것은 나 자신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사실 다른 나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의 환경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부터 내가 다른 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또 무엇이든 배울 마음이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을 여행하듯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한 차에 행여라도 다른 나라를 체험할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그 다른 문화에로 나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면을 준비하지 않은 채로 그저 환경만 바꾼다고 그것이 여행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여행 내내 투덜거리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미에서 살다와서 모든 것이 좋아 보이기만 하는데 그는 더 좋은 나라에 살다 와서 지금 머무는 여행이 너무나 맘에 안드는 것이었지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파랑새는 결국 집

친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

우리의 친교는 점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한 자리에 함께 모여 있다거나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같은 체험을 나누고 같이 행동한다고 친교가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친교에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물론 같은 영으로 나아가는 전단계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로서 아무런 만남도 없이 서로 친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만남의 목적은 뚜렷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즐거움에 머무르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에 서로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만나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드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세상의 어떤 드높은 곳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드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는 이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를 짓밟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높은 곳, 즉 하느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 일치하고 돕고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뒤쳐져 있다고 해서 그를 내버려두고 우리끼리만 앞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기다려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나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악습에 젖어 있는 친구의 무리가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늘상 술을 즐기고 유치하고 더러운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을 즐깁니다. 깨달은 자로서 나는 이 무리에 다가서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무리에 다가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무리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얻는 이들과 잃는 자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8,11-12)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하늘나라의 상속권이 있다고 막연히 믿어오던 이들은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들, 너무나 먼 곳에 머물러 있어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들이 다가와서 잔칫상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일은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누차 경고했고 미리 밝히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이 말에 큰 심각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일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초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제단 가장 가까이 머무르면서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잔치에 골몰하고 있었지요. 저마다의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원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반면 자신들이 처한 괴로운 현실 때문에 하느님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현실의 여러가지 장벽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원했고 그분에게로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되었고 나아가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백인대장은 로마인이요 유다의 전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소중한 존재를 알아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그대로 보고 믿었고 또 적용할 줄을 알았습니다. 반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입 안에 용서의 상징 그 자체인 성체를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