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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진정한 축복의 자리

세례자 요한의 삶은 비극으로만 보입니다. 그는 제대로 된 옷 한 번 입어보지 못하였고, 제대로 된 음식 한 번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도 없이 광야에서 살았으며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과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죽음의 순간도 비극적으로 맞이합니다. 수를 다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증오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헌데 오늘 1독서는 적대자와 맞서는 하느님의 용사의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반드시 그를 구한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건 우리가 지켜보기에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지켰더라면 하느님에게 충실했던 요한은 축복을 가득히 받고 그의 마지막도 풍요로워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좋은 것’에 대한 이미지를 올바로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께 충실한 삶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상급이 반드시 세상의 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하느님에게 충실한 사람이 세상에서 입을 수 있는 불행을 정면으로 제시하시지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참된 행복인가?’ 하고 말이지요.

우리가 맞서야 하는 적대자는 세상적 가난, 세상적 불명예, 세상적 천시이기보다는 보다 내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적합자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상실할 때에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지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쓸모없는 이, 바람에 나부끼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지니고 있다면 비록 온 세상이 대적하여 우리와 맞서고 우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복된 이들이 된다는 것을 독서와 복음은 말합니다. 물론 이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예수님의 메신저에게 일어난 극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일은 …

이방 여인 룻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삭을 주워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곤궁한 생활이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자신이 찾던 대로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가 바로 보아즈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그녀의 덕행은 이스라엘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리하여 보아즈에게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룻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고 그로 인해서 장차 왕이 될 다윗의 선조가 됩니다.

우리는 이 룻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하느님의 혈통에 대한 이해를 돕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방인이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을  품은 이에게 축복을 전하고 심지어 당신의 혈통 안으로 맞아 들이신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부심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가톨릭이 나름 한국 사회 안에서 힘 있는 종교라서 그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뿌듯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르치는 바 대로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우리가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해서 남달리 보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많으니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서 드러내는 행실이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할 때에 사람들은 실망을 하고 우리를 천시합니다.

룻이 하느님의 자녀인 시어머니를 따르고 그분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축복을 얻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따르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히 외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굳게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낮추어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축복을 입은 왕의 자손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디로 오는가?

하느님의 뜻을 찾겠노라고 자신을 높은 자리로 들어올리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하느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야만, 높은 수준의 신학 과정을 거쳐야만, 고위 성직자들을 알아야만 만날 수 있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이름이자 약속이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찾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공기를 숨쉬는 방법은 더 맑은 공기, 더 높은 산의 공기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그 공기를 더 많이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지요. 열심히 숨을 쉬고 그리고 더욱 힘차게 숨을 쉬어 그 공기를 받아들일 폐를 준비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더 많은 공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공기는 오히려 지상의 높은 곳으로 갈수록 희박해집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욱 농도가 짙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도 비슷한 방향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폐를 훈련시키고 더 많은 공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 역시도 낮은 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낮은 곳은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으려 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우리 일상의 자리이며 우리가 봉사하는 자리이고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자리를 싫어합니다. 특히나 요즘 세상에 저마다 자신을 드러내고 드높이고 많이 알려져야 하는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은 ‘현대인의 본성’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드러낼 때에 도리어 그분을 거부합니다. 이는 분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12)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녀들의 역할

자본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히 소비가 미덕이라고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소비야 말로 자본이 유통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과 많이 소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잘 사는 사람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언론 매체들과 광고들은 이것이 당연한 삶의 진리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정당하게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정말 자본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합당한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행복과 직결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더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다는 말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많이 소비하면서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이미 주입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이 틀에서 올바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준 요소들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선물을 받아서 행복했던가 아니면 그 선물을 해 준 이의 선한 마음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검토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수많은 자본이 자동으로 수많은 선을 양산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선을 충분히 지닌 사람이 다른 이의 필요를 살피는 법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공식 가운데에는 세상이 우리가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의도된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절대로 ‘선한 의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은 우리 개개인을 이용해 먹으려고 든다. 우리가 순한 노예처럼 말을 잘 듣고 그 법칙에 따라 주어야 세상이 설정한 법칙이 운용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돈을 벌고 쓰는 기계가 필요하다.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과한 생산품을 모두 소비해내어야 하고 사람들이 쾌락에 젖어서 더 많은 상품들을 원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 즉 신앙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하느…

기도의 지향(志向)에 대해서

우리는 곧잘 누구를 위해서 무언가를 바친다고 합니다. 특히 사제의 축일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런 일이 더 잦아지지요. 과연 지향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야 올바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바치는 기도, 나의 필요와 요구를 위해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뜻을 두고 바치는 기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치지요.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아 뜻을 두고 바칠 수 있는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뜻을 두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꾸준히 이루어 질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원의에서 벗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진실하게 기원하는 것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행위가 됩니다.

하지만 이 지향이라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든 것입니다. 인간은 한 번에 하나씩을 신경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간절한 원의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지향은 순수해져야 합니다. 이것 저것 바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하나를 간절히 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화살을 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한 활에 화살 여러개를 재어 동시에 발사하려고 한다면 그 어느 것도 원하는 목적지에 가 닿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화살을 집중해서 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가 닿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지향을 나의 진실한 성찰과 의지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이렇게 하자고 해서 마지못해 그러한 다른 지향들을 덕지덕지 끼워 넣을 때에 일어납니다. 무턱대고 그런 모든 지향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다른 지향들은 결국 나의 절실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른 것들이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결국 가장 필요한 일을 분별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요.

우리의 기도의 …

하느님이 도구로 고르는 사람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판관 6,15)

사수성당을 짓고 나서 ‘임시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봉헌식도 대리구 식구들만 모아서 조촐하게 했습니다. 교구 전체에 알릴 거리가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대구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입니다. 아직도 밖에 나가서 ‘사수성당’에 있다고 하면 거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또 어떻습니까? 친척 중에 추기경님이나 주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재력이 대단하시거나 명예가 드높은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고위직 신부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근본없고 보잘 것 없는 신부인 셈이지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하느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데에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판관기의 기드온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씨족이었고 기드온 자신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였지만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판관으로 나서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을 선물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재력이나 위대한 권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당신이 쥐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달려가 그와 함께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하시지 않을까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대상은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고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대상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대상을 고르시어 그를 당신의 은총으로 축복하시고 사람들 앞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

잃은 것과 얻는 것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마태 19,27)

사도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랐으니 그에 상응하는 상급이 있을 것이고, 또 철저하게 내어 놓았으니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많이 돌아오는 것이 있겠노라고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라서 그들의 기대에 대답해 주십니다. 엄청난 것들을 마구마구 약속해 주시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들 안에는 숨은 뜻이 존재합니다.

1) 너희들이 받을 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받을 상은 이 세상에서 받을 대상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새 세상’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이해의 범주로 그 새 세상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커다란 기적을 보이시고 왕위를 받게 되는 날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말하는 새 세상의 도래는 당신의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고 제자들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 너희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자신들도 한 몫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첫째와 꼴찌의 변화로서 언급을 하십니다. 우리는 첫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하고 많이 지녀야 하고 명예를 얻어야 하는 등등의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어놓은 것은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올바로 지키고 따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 됩니다. 즉, 예수님은 주면서도 주지 않은 셈이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에 대한 분석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2,16-17)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좋은 것을 주셨으며 또 그들이 엇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에 합당한 도움도 주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죄악을 더욱 굳혀 갔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하느님을 두고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왜 모든 악을 없애 버리고 온 세상을 바로잡지 않느냐고 하지요. 그렇게 무능한 하느님이라면 자신들은 필요가 없다고도 합니다. 이런 말들은 언뜻 들으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 근본을 알고보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먼저는 인간이 지닌 소중한 보물인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유로움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거대한 기계 장치의 하나의 부품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자유가 없는 존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해 본들 그것은 다른 의지가 있는 존재가 시켜서 하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설령 죄를 짓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는 존재일 뿐인 것이지요.

사실 악마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고 주입을 시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좋은 일은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설령 나쁜 짓거리를 하더라고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환경 탓이다, 부모 탓이다, 심지어는 DNA의 탓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나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환경의 문제라고 탓을 돌리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하느님’입니다…

선교

선교라는 것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즉, 반드시 해내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선교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선교가 있습니다. 즉, 누군가 싫은 걸 억지로 끌어다가 당기는 느낌의 선교이지요. 그건 하느님도 하기 싫어하는 선교입니다. 하느님은 싫다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선교는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들이미는 선교의 양상을 드러내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심입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선교, 반대로 우리가 당하기 싫은 선교는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선교는 분명한 지상명령이고 반드시 해 내어야 하는 것인데 그럼 그 선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교의 모습을 원할까요? 우리는 다른 이에게서 어떤 취급을 받기를 원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이끌리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따스한 보살핌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선교를 하기 위해서 마찬가지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좋아할 만한 사랑과 관심, 애정을 쏟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엉뚱한 종교전쟁을 해대라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기다리는 사랑과 관심, 애정을 쏟으면 된다는 말이지요. 이 때문에 선교가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맞습니다. 우리가 꾸준한 사랑과 관심, 애정을 쏟는 데에는 아무래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 즉 상대가 죽어도 싫다는 것을 억지로 들이밀어야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선교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선교가 이루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남들…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은 잘 정돈된 신학이나 엄중한 전례, 또는 격한 감정의 움직임에서 오지 않습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내면 안에서 섬세하게 떨리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데에서 옵니다.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타오르는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을 통해서도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믿음을 전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순간 일어나는 용기가 예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꾸준한 신뢰와 믿음 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님을 믿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사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우리를 구하려고 다가오시는 그분더러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러대곤 하는 것입니다.

강렬한 맛에 중독된 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그 섬세함에 존재합니다. 강렬한 쾌락은 언제나 우리를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술에 중독된 사람이 아내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이의 내면을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는 법이지요.

믿음의 요소들은 언제나 나약해 보입니다. 차라리 돈을 주고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고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민수 11,13-14)

음식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 하지만 사람들은 곧잘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지만 그들의 배고픔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기’와 다채로운 먹거리가 없다는 불평이다.

만나를 먹고 하늘에 감사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저마다의 원성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고 나면 과일을 찾고 과일을 먹고 나면 채소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배고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엉망진창으로 튀어나온 욕구를 보기 때문이다.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고집 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제멋대로 제 길을 걸어갔다.” (시편81,23-13)

영적 지도자는 하늘의 만나를 얻어주는 사람이지 사람들의 저마다 엇나간 욕구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늘의 만나를 즐기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지금의 시대에 이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백성을 이끄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만나를 먹어야 하고 그 만나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 힘으로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자신들의 표양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엇나간 욕구에 따라서 저마다의 지도자를 이끌어들인다.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이들을 참된 지도자라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 것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길을 담아내고 있어서 사람들의 매력을 끌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느님을 올바로 담아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길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

우리들의 착각

우리가 지금 이 현세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고 다가올 그 날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반대로 우리가 소홀했던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으로 드러날 때에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생을 사는 목적은 진짜 소중한 것을 찾아나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 시절의 하찮은 취미거리 보다는 어른이 되어서 생을 꾸려나가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돈보다는 사람 생명이 소중하며, 사람의 현세 생명보다는 영원한 생명이 소중하다는 진리이지요.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에 소용되는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배워 알아야 합니다.

지구 주위를 돌던 태양이 실제로는 지구가 그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이해는 보다 완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상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재편성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보다 완전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깨달음을 올바로 얻기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벽과 마주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에게로 우리 영혼이 나아가기 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와 자아라는 벽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욕구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욕구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욕구를 합당한 수준까지 절제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 역시도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복병이 됩니다. 인간의 자아는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특유의 한계성 때문에 보다 참된 가르침을 가로막기도 하는 것이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늘 옳으니 심지어는 나의 뜻에 맞서는 것이 ‘하느님의 지혜’일지라도 그건 틀린 생각이 되는 것이지요.

구원을 얻는 방법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방법을 사람들은 너무나 과장하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회의 규율을 하나…

목격자의 증언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2베드 1,16)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우리는 간단히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교묘한 신화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생각이고 이런 생각은 세상 안에서 꽤나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 안의 온갖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또 교회에서 이루어진 비상식적인 일들을 다루면서 온 교회가 정신나간 집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진실성입니다. 비록 인간들의 오류가 곁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근본 가르침의 방향성이 진실하다는 것이고 그 진실성의 근본은 실제 사건을 목도한 이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앙을 직면하는 이들은 이 선택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하지요. 분명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들이 압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근본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다가설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그 근본 가르침을 넘어서는 것에 다가서야 할 때에 사람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능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신화처럼 느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을 접할 때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에 막연한 거부감에 사로잡히거나 별다른 중요성을 두지 않고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한 일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목격에 대한 증언은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편지글로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아니더라도 다른 내용들을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텔레비전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 (마태 13,52)

율법 학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을 구축하고 그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릇됨에 빠져들지 않도록 온갖 제어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지요. 자동차를 사면 메뉴얼 책자를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그 모든 메뉴얼을 통해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 ‘운전’을 할 때에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할 때에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에 소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바로 ‘운전’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사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들이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랑을 할 때에 우리의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율법학자가 이 사랑을 하게 되면 이는 마치 운전을 하는 사람이 모든 메뉴얼을 다 꿰면서 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챙기면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지요. 깜빡이는 어떻게 켜고, 사이드미러는 어떻게 조정을 하며 내비게이션 설정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두 알면서 운전을 하기에 그의 운전은 더욱 세련되고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사랑을 하면서도 세세하게 모든 것을 잘 챙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서투른 사랑 때문에 많은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온유와 친절과 겸손과 더불어, 그리고 율법 안에서 사람들의 심성을 올바로 읽어가면서 진정한 사랑의 발걸음을 걷게 됩니다.

법적인 규정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는 그 법의 규율을 완화시켜 주기도 하고, 또 반대로 너무 망나니처럼 뛰는 이들에게는 적절한 견제를 통해서 규율을 세우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제는 바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이어야…

명령하신 대로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였다. (탈출 40,21)

모세가 뭘 알아서 장막을 설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모세에게 하라고 했더라면 더 많은 공을 들여서 더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세웠겠지요. 모세는 다만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서면서 자꾸 부딪히게 되는 이유는 때로는 주님의 명이 우리의 이성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더 나아보이는 무언가가 있는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 주님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때로는 너무나 엉뚱해 보이고 부족해 보이고 모자라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뜻이 아예 없을 만한 일, 즉 탐욕스런 일이나 거짓된 일에 동참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순명에 힘들어하는 것은 그러한 요인들이기보다는 책상을 만드는 데 오동나무를 쓰느냐 대추나무를 쓰느냐의 차이 정도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쫓기던 신세에서 자신의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백성을 영적으로 이끄는 이들은 바로 모세의 이 점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아무리 합당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우리의 원의를 내려놓고 하느님이 이끄시는 길에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비아를 전혀 몰라서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음에도 그리로 가라는 명에 순명하였고, 또 몸이 아파 돌아와서도 잠시 쉬어야 마땅할 터에 신설 본당을 지으라는 명에 순명하였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이성은 그에 반대되는 수백가지 이유를 쏟아놓지만 나의 의지는 이성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기에 나는 교회의 명에 나 자신을 순응 시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내가 원하고 좋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

거룩한 것에 대한 거부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탈출 34,30)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빛나는 대상에 다가섭니다. 무심히 땅을 보고 가다가도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으면 괜히 마음이 이끌려서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붙이 은붙이와 귀금속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빛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반짝이는 물질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왜 모세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 빛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영원에서 오는 것이었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은 거룩한 빛이었지요.

사람들은 한 편으로 거룩한 것을 동경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거룩한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은 거룩함을 향하여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인간의 죄스런 악습이 그 거룩함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방청소를 하지 않은 아이가 엄마가 집에 오는 것이 괜히 싫은 것처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우리들이 죄에 몸담고 있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기회를 멀리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를 같이 가자고, 성당에 같이 나가자고 초대를 할 때에 사람들이 그 초대를 그냥 받아들이기보다는 괜시리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거룩함에로 이끌 때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내민다고 해서 그들이 다가올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이 호기심을 느낄 만한 것부터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남에게 소중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그것에 대해서 올바로 배워 알지 못하는 이상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소중한 보물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어줄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거룩한 것을 짓밟은…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훗날 천사들이 거두어 내게 될 사람들의 목록입니다. 하나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을 참으로 많이 곡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죄라는 것을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올바른 정법을 어기는 것은 죄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올바른 정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죄를 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린아이들이 어떤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올바른 인지가 필요하고(이성적 이해), 그리고 그 행위에 의지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죄스런 일의 경중도 문제가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모기를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죄의 학구적인 탐구를 벗어나서 우리가 올비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죄인 것일까요?

바로 이 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설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죄 아닌 것을 죄라고 하고 또 반대로 죄인 것을 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죄라고 설정한 행위는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죄짓게 하는 행위를 자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게 마련입니다. 특히나 가톨릭의 전례 행위는 처음으로 성당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틀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이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