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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17의 게시물 표시

하늘나라와 희망

하늘나라는 시작되었으나 완료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하늘나라에 아직 참여하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일단 시작만 되면 성장하게 될 하늘나라이지만 그 시작을 이루지 못한 채로 스스로는 나름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늘나라에 참여했다는 것을 외적인 종교 예식으로 국한할 수 없다. 하늘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좀 더 내밀한 영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사랑을 배운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겠노라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다가설 때에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씨앗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로서 씨앗에 대한 정보를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씨앗을 가진 게 아니다. 씨앗은 두 손으로 받아야 하고 밭에 심어져야 하며 그에 합당한 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성당에 다닌다면서 선하지 않은 이들, 여전히 세속적인 욕구가 내면에 가득하면서도 자신은 본당에서 중요 직분을 맡고 있으니 훌륭한 신자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훗날 하느님 나라의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흐리멍덩한 분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정의를 만드신 분이 ‘정의’를 무시하실 리가 없다. 다만 그 정의가 우리의 짧은 생애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희망’을 지닌 이들은 이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이다. 즉, 억눌려 있던 이의 권위를 세우시고 교만한 자들을 내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단 하나의 것은 바로 겸손한 마음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 낮춰진 마음 뿐이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안식일의 치유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카 13,14) 우리가 걱정하는 대상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적지 않은 경우에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과 속박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안위’입니다. 본당에서 발언이 대체로 강하고 말이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진정으로 참된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을 찾아보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 대상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의 생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뭔가 바꾸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입장이 뒤바뀌어 반대로 내가 주장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이권을 도로 까먹는 일이라면 입을 다물어버릴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는 통에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은 목소리 한 번 내지도 못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성당에 이런 저런 제약 없이 나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성사에 참여하는 것인데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경우를 종종 관찰할 수 있습니다. 행사 날짜를 중순으로 잡아야 하는지, 후반으로 잡아야 하는지를 두고 한참을 다투다 보면 정작 가난한 이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들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 버리고 말지요. 예수님은 아무 주저없이 열여덟 해를 고생한 여인의 허리를 고쳐 주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당장에게는 크나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고수하고 외쳐온 안식일 준수의 율법에 상당히 어긋나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라는 핵심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연예 산업

연예계는 엄연한 ‘산업’입니다. 여러가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을 생산해 내는 생산자와 그것들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이루어져 있지요. 생산자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민감하고, 또는 그 기호를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렇게 생산된 것들을 열심히 소비하고 또 스스로 마케팅의 일원이 되어서 주변에 그런 소식을 열심히 전하곤 합니다. 생산 대상에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예외가 없습니다. 유명 배우의 혼인 생활, 아역배우의 근황, 어느 배우의 성형 전후 등등 무엇이든 그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바로 그러한 소비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만 할래.’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대중의 관심을 사고 나면 자신에게 마지막 관심을 두는 대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또는 나중에라도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될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역학관계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일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인간의 기본권과 사생활 존중을 원하더라도 대중의 시선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내용이면 어디든지 파고들 테니까요. 사실 거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일종의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연예인이 아닌 우리는 ‘소비자’로서 그 산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기사글 가운데에서 연예인의 스캔들 기사를 클릭하는 순간, 바로 그 산업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관심이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정말 내가 그의 노래를 좋아하거나 연기를 좋아하던 누군가의 근황이 궁금한 것과, 잘나가던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기사에 은근히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분별을 가지고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한 관심과 대중의 사랑인지,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우리의 내면의 어지러움과

신자들 간의 대출과 상환의 문제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탈출 22,24) 우리는 막연히 구약이 잔인하고 미성숙한 가르침을 담은 성경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 안에서 나오는 피가 튀는 살인의 장면이나 전쟁, 또는 이해하기 힘든 불륜과 복수의 장면들은 누가 읽더라도 그런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하지만 구약은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책마다 그 진행과정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전체의 흐름과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내면의 뜻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안에는 그 뚜렷한 가르침 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의 부분입니다. 특히나 ‘돈’에 민감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은행에서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자체로 정당한 이윤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들 안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른 면모로 간주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의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신자들 사이에서도 돈을 꾸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누구에게 어떻게 꾸어주는 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10억원짜리 집에서 사는 이들 가운데 8억원짜리 집에 산다고 가난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 돈 없다, 가난하다’라는 표현을 바로 이런 상대적인 빈곤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사실 ‘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에 비교하면 본인은 가난한 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라는 것은 정말 생활이 걱정되는 이, 즉 의식주 가

성전의 올바른 정의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 2,20-21) 흔히들 성전이라고 하면 ‘건물’을 바로 떠올립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라고 하면 건물을 얼마나 높고 화려하고 값지게 짓는 가를 걱정하지요. 바로 거기에서 수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기도 합니다. 건물을 짓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힘들어하는 신자분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성당을 떠나게 되는 이들도 많지요. 진정한 ‘성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의 외적 건물은 공동체를 위해서 분명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것이 전혀 필요가 없다거나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공동체가 외적 환경으로부터(비, 바람, 추위, 더위) 피해서 모여 고요한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은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성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 성전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에 소요되는 것이 존재하지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바람직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 성전은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개인적인 차원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의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머무르셔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에 더러운 부착물을 허용하지 않고 성전 안에서 지나친 세속적인 일에 대한 것은 삼가는 것처럼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생각과 행동들을 올바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궁전으로 합당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욕을 한다거나 지나치게 과음을 한다거나 다투는 행위를 삼가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마지막 한 닢

본당 옆에서 절로 자라난 수박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58-59) 실제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증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의 관계에 있을 때에 이 현세 안에서 그것을 합당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그 내면의 증오가 ‘영원’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그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까지는 해방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든 부분일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관계’에 대한 문제이지요.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이든 저든 다른 이와 관계 속에서 충돌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증오와 원한이 싹이 틉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그 증오의 싹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로 그냥 한켠으로 치워두고 생활을 합니다. 나름 스스로는 ‘참았다’라고 표현을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무심코 내버린 씨앗에서 싹이 나서 열매가 맺히듯이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 한 켠에 치워둔 그 더러운 씨앗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서 참된 겸손으로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여 해소되지 않는 대부분의 씨앗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 씨앗들은 우리의 ‘인간성’에서 양분을 얻어 점점 더 자라납니다. 증오는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그 증오의 기반을 더욱 다지고 힘을 실어 나갑니다. 더더욱이 그 증오가 상대를 향해서 표출되어 더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때는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이는 마치 내 방은 내 마음대로 치울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의 아파트는 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야 치울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표현되는 ‘고소’에 대한 건은 이미 그 증오가 다른 누군가와

죄와 은총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20) 그래서 죄인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가 많다고 해서 구원의 기회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죄가 극심한 만큼 우리의 주님은 그 극심한 죄악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더 넓게 더 깊숙이 펼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죄인도, 그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도 주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멀어져 있었노라고 자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용서가 풍부히 내렸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사람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심판해 버린 것입니다. 나 같은 존재는 하느님의 용서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고 몇 번 돌이키려고 시도하다가 성에 차지 않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마지막 날숨이 작용하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까지 하느님은 당신의 한량업는 자비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잠깐, 하느님의 무한과 인간의 유한을 뒤섞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끝이 없지만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길을 벗어난 사람을 돌이키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의 무한성이 내 안에서 작용을 하고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과신을 해서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무리하게 시도하곤 합니다.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분별없이 수용하다가 결국 공동체를 망가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모쪼록 하느님의 선하신 자비가 모든 죄인들에게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독재자 아래에서 신음해 온 이들, 혹은 수장이라는 이들의 횡포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인 것이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체제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통하는 완전한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게임기를 사고 싶어 난리이고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마냥 응원해주기만 하는데 집안의 형편을 올바로 파악하는 아버지가 가장의 권위로 그에 대해서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정한 ‘공공선’은 자녀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더 잘 실천하고 있는 중인 셈입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한 학급의 대다수의 모든 아이들이 놀고 싶어하는 중에 선생님이 와서 아이들에게 절실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문제는 어떤 형식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참된 길을 걷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국가 체제는 민주주의이기에 그것이 올바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모든 국민들의 의사가 올바로 잘 반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국민들에게 이로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바탕이 교회에 적용될 때에 우리는 이상한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교회는 민주적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직자 중심일까요? 특히나 오늘날 국가의 수장이 탄핵되고 국민들의 의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드러나는 가운데 교회는 아무래도 뭔가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뜻 국가의 제도에 정반대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무너뜨리고 파괴되어야 할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만든 체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끼

깨어 있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의 상황에 대응하여 적절히 반응하고 있는 상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피하고 나에게 이득을 주는 것을 취하여 나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깨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챙겨 먹고 또 나의 일상의 모든 수단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 활동을 시작하지요. 반대로 자동차 사고가 나서 나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도록 경계를 하면서 운전을 하고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지나치게 더럽거나 상한 음식에는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 우리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대로 우리 영혼에 해악을 끼치는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정반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영혼에 유익한 수많은 도전의 기회들, 즉 나의 인내를 훈련하고 나의 사랑을 키워줄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도외시하고 반대로 우리의 영혼에 많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요소들, 즉 탐욕을 일으키는 수많은 볼거리, 온갖 사욕을 일으키는 기사와 호기심거리들, 시기와 증오를 조장하는 각종 뒷담화 모임을 우리는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만 깨어 있을 뿐, 영혼이 전혀 깨어 있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잠들어 있는 당신의 제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공허하게 메아리 치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이유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21) 우리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감을 올바로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성으로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받아들인 것을 ‘실제’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앞에 함정을 파 놓고 교묘히 덮어서 그것을 보이지 않게 해 두었을 때에 내 친구가 나서서 그리로 가지 말라고,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고 한다면 비록 나는 지금 당장 나의 지각으로는 그 함정을 볼 수 없지만 나의 친구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함정을 피해 다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세례를 받고 미사에도 나오지만 여전히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분에게 인색한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이유로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분을 올바로 사랑하지는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너무 커서 거기에 온 힘을 쏟고 나면 하느님에게 돌려드릴 사랑이 부족해지는 것이지요. 어떻게든 최종적인 결과물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서 재화를 온통 스스로를 위해서 모으든, 아니면 정말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감내해야 합니다. 투자한 것에 따르는 결과물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장님이라 우리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것이 어떤 결과물을 얻게 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을 그만 생각을 멈춰 버리고 맙니다. 결국 망해버리고 말 것이 분명한 회사에 투자를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탐욕에 대한 경계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3-14) 아닌게 아니라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사소송 문제를 사제 앞에 들고 와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곤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 애시당초 그 탐욕의 시작점을 올바로 분별하고 거기서부터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소송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이 탐욕에 너무나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움을 이미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옷에 신경을 지독하게 쓰는 사람, 단순히 단정함을 넘어서가 아니라 과하게 옷을 매번 바꿔입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허영’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늘 이야기의 주제가 음담패설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음란’이 가득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곧잘 분노하고 화를 내고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앞에 와서 누군가를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그 안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꺼내는 주제를 살펴보면 그의 내면을 이미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곧잘 빠져들게 되는 것은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불순종과 의심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 10,16)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마태 28,17) 함께 좋은 길을 가자는데 왜 거절할까요? 빛을 향해 나아가자는데 왜 그것을 거부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좋은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며 빛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서 내면에 형성된 것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서 기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이는 거짓에 익숙해지고 거짓스런 삶에 익숙해져서 진리를 거부하게 됩니다. 집에 돈이 많다고 속여온 사람은 그 삶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 거짓이 무너질 때에 자신이 당할 수치가 엄청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는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 즉, 자신의 거짓됨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피하려고 하고 그에 대해서 두려움을 품게 됩니다. 탐욕에 물든 사람은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에 다가설수록 자신이 지닌 탐욕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다가올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탐욕스런 생활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도록 종용하는 진리를 피해 도망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저마다의 행실대로 그것을 열심히 따를수도, 혹은 따르려고 노력할수도, 아니면 정반대로 그것에 거부감을 느낄수도, 또는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불리는 것 외에는 모두 피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들은 서로 영원한 친구가 없으며 일시적인 동맹을 형성할 뿐,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이가 있으면 그 즉시 그와의 친교를 깨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럴 수 있

하느님이 심판관이 되시는 때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사 2,4) 제가 정말 기다리는 세상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이신 분이 계셔서 그분이 모든 것을 살피시고 다스리시기에 사람들이 서로 다툴 일 없이 다만 서로 도와 열심히 일하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구절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는 이유는 서로의 이기성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성이 충돌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의 오른손과 왼손은 전혀 다투지 않습니다. 때로 오른손의 작업량이 왼손보다 많더라도 나의 오른손은 투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익숙한 그 손으로 나머지 몸이 이롭게 되도록 더 많은 일을 하지요. 우리가 훗날 이루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머리로 삼고 다른 모든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일치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전혀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나의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연상하면서 오류를 범하곤 하지요. 왜냐하면 결코 나의 지금의 이 지상에서의 뜻을 하느님의 고귀한 뜻과 일치시킬 수가 없는 탓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고 현명하고 세상의 가장 많은 지식을 품고 있는 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에 가 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무지하다면 우리의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쉽겠지만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을 어리석은 위치에 놓아 버리기 때문에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싸웁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사실 더 많이 싸웁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로마 10,10)

믿는다는 것을 지나치게 ‘추상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지극히 내적인 작용입니다. 그것은 물건을 이리 저리 옮기는 것과는 달리 내면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이지요. 하지만 그 믿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외적인 결과물을 동반합니다. 즉, 믿는 사람은 믿는 대로의 실천이 뒤따르는 법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성경의 ‘말마디’에 집착해서 ‘믿음이냐 행위냐’를 곧잘 따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세세하게 짚어보면 다음과 같은 세분화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 순수한 믿음 믿음이 있는 행위 1. 믿음이 없는 행위 먼저 살펴볼 것은 믿음이라는 근본을 두지 않은 행위들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동기’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헌데 인간은 그 동기를 얼마든지 자신의 이기성에서 끌어내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동기들을 ‘종교적인 형태’로 얼마든지 포장할 수 있지요. 누군가 성당을 열심히 나간다는 것이 무턱대고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가정사를 내팽개치고 성당활동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올바로 지도를 받아야 할 일이지요. 성당 안에서 여러가지 누리게 되는 혜택을 위해서 성당에 나갈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연애를 하기 위한 청년회 활동이라던지 아니면 같은 나이또래 끼리 어울려 즐기기 위한 교사회 활동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저마다의 인간적인 필요를 채우는 곳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모든 활동 가운데에서 믿음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2. 순수한 믿음 인간이 처음부터 믿음이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자격증과 같이 모종의 과정을 거치면 자동으로 수료해서 얻게 되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단 한 순간의 마음의 결심으로 얻어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얻게 되는 순간은

수군대는 이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루카 12,3-4)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군댈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말이 통한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수군대겠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 스스로도 훗날에는 서로 증오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수군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만일 그 수군대는 이유가 정말 그가 잘못한 것이라면 수군대기 보다는 정당하게 그에 대해서 고발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잘못에 대해서 합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니 수군대는 이유는 그가 무언가를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할 때에 사람들은 그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수군대다가 예수님이 활동할 때에 사람들은 먹보요 술꾼이라고 빈정대었습니다. 뭐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원한 건,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어떤 활동이든지 잘한다고 칭찬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뒷담화를 즐기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는 지금은 당신 앞에서 다른 제3자의 뒷담화를 하겠지만 머지 않아서 당신에 대한 뒷담화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하면서 그것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믿음이 없는 이들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믿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훗날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음침한 이야기가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고 따라서 성경에서 강조되는 이 부분이 자신들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합당한 두려움을 간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두려움에서 참된 지혜가 시작이 됩니다. 그 두려움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세상적인 학식이 가

행위와 믿음

유다인들에게는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즉 하느님 앞에 설 만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실천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담긴 것을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율법들 가운데에는 정말 당시에 필요해서 실천해야 할 요소들도 있었지만 후대에 가서는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들도 있고 올바른 해석을 통해서 시대에 합당하게끔 적용되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가량 예전에 없던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인터넷의 이용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한 셈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 율법 규정 자체에 사로잡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 안에서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할 인간들이 도리어 율법 안에서 구속되고 더욱 불안한 삶을 유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오신 하느님께서는 참된 율법을 전해 주기로 결심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참된 계명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법의 규율 안에 놓여진 죄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하시고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에만 매여 있을 뿐이지요. 바로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미리 얻어 놓으신 ‘의로움’의 상태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현실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힘을 잃은 자리에 우리는 또다른 것들을 채워 넣어서 본질을 흐려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 하는 것이지요. 묵주기도를 얼마를 바쳐야 거룩한 사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본도 안 된 사람… 특정 신심 운동에 참여해야 그래도 신자 생활을 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자격 미달인 사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여전히 외적 행위를 바탕으로 내적인 신앙을 가늠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성령대회와 방언

성령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익히 잘 아는 부분입니다. 늘 성호경 안에서 떠올리고 기억하는 분이시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선물하시고 우리 모두에게도 선물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부분이 등장을 합니다. (사도행전 2장 참조) 그리고 그때에 그들이 모두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대회에서 ‘방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흉내낸 부분이지요. 또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신령한 언어’를 언급을 합니다. 즉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성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령과 그 은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은사 중 하나인 ‘신령한 언어’에 대해서 그 증거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가톨릭 안에서 하고 있는 성령 운동은 어떠한 것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기도 형태들은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쇄신운동’은 다음과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쇄신운동의 시작 성령쇄신운동은 공의회가 끝난 다음 해인 1966년, 미국 듀케인(Dequesne)대학의 평신도 신학교수들과 젊은이들의 기도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성령강림을 청하며 주말 피정을 하던 그들은 마음 안에 넘치는 성령을 경험하기 시작하였고 이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은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령쇄신운동 1971년 한국에 들어온 성령쇄신운동은 1974년 평신도를 위한 첫 성령세미나를 개최 하였고, 2017년 현재 서울 대교구 총 230 본당 중 140 개 본당이 성령기도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령쇄신운동단체는 성령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로마 1,16)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건 무엇을 말할까요? 당연히 그저 쑥스러움이 많은 것을 가지고 복음을 부끄러워한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좀 더 심층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복음’ 자체에 대해서 수치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복음’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당에 오면서 느끼는 기쁨의 대상이 바로 ‘복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밝히셨듯이 이 세상에는 거짓된 예언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르 13,22) 그들은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는 것들,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기쁨을 속여서 신자들에게 이것이 신앙을 지니는 기쁨이라고 속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들은 헷갈려 하게 됩니다. 자신들은 이러 저러한 것들이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던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가 마음에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동안 그러한 것들을 잘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점점 자라남에 따라서 그 기쁜 소식은 다른 엉뚱한 소식들에 대체되게 됩니다. 즉,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기쁜 소식인 줄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옷을 화려하게 입고 외모를 잘 꾸미고 값비싼 음식을 먹고 인기를 많이 얻으면 기쁜 소식이라고 잘못 배워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엉뚱한 기쁜 소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당을 지어도 화려하게 지어야 하고 카페도 하나 집어넣어야 하고 쓰지도 않을 공간을 온통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 채워 넣어야 하고 사람들의 내면이야 어떻든 여러가지 외

사랑하기도 모자란 시간

수많은 인류사의 결정들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과정들 속에는 인간 개개인의 ‘이기심’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뜻 회의를 하면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저마다의 잇속을 챙기려는 움직임이 서로 부딪힐 뿐입니다. 그래서 힘이 더 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지요. 여기서 힘이라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우수함을 비롯해서 사람들의 인기와 자신이 지닌 권력 등등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일치해 있다면 딱히 따로 회의가 필요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니 수장의 역할을 신뢰하고 그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지요. 그리고 지체들은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마땅히 그럴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든지 자신의 불편함을 희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요구가 있고 그것이 관철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과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불평하고 요구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따지고 들곤 합니다. 하느님은 일일이 대꾸하기 보다 묵묵히 드러내십니다. 비가 내리면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어 결국 바다로 스며들고, 드높던 산은 깎여 모래가 되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때로는 화산으로 인해 산이 생겨나기도 하고… 하느님은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더러 눈을 뜨고 보라 하십니다. 그러면 보일 것이라고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끼리 다투느라 바쁩니다. 그렇게 아둥대다 보면 한 생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참으로 부질없는 인생을 허비하는 셈이지요.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바보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로마 1,21-22)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두뇌에 쑤셔 넣는다고 해서 지혜로워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교만과 이기성의 발로일 뿐이지요. 사실 우리는 그런 예를 무수히 보고 있습니다. 저 수많은 정치인들은 저마다 나름으로는 내세울 만한 학식과 바탕이 있음에도 그들은 탐욕과 어리석음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즉 진리와 선과 사랑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 수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성으로 인해서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할 뿐입니다. 담배를 피는 모든 사람은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담배가 좋기 때문에 그것을 피우는 것이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심이 있어서 선한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이기성과 탐욕으로 인해서 조금씩 오류와 악에다 그 자리를 양보하면서 결국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욕심과 야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더더욱 교묘한 악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들은 주일미사에 꼬박꼬박 나오고 평일미사도 챙겨 나오겠지만 그들의 내면의 어두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은 그대로입니다. 결국 외적인 신앙의 격식이 내면을 늘 새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써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외적인 요소에 극도로 충실한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쉽게 심판하고 아주 사소한 불편도 참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종교 활동을 훌륭하고 고상한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밖에서 얼마든지 즐길 활동들을 신앙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어리석은 바리사이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루카 11,38) 우리가 흔히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고정관념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 그것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행위를 하는 일은 허다합니다. 그래서 기쁨과 감사가 없는 미사가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미사라는 것이 파스카의 축제이고 십자가 구원 사건의 기념일진대 우리에게는 기쁨도 감사도 없는 의무적인 외적 행위의 미사만 남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사제인 저에게 신앙의 여러 외적 행위들에 대해서 묻습니다. 금육은 몇 살 부터 지켜야 하는지, 미사 전 공복재는 몇 시간 전부터 지켜야 하는지 등등이지요. 하지만 금육을 한다면서 보다 값비싼 회를 사다먹고 공복재를 지킨답시고 위만 비울 줄 알았지 정신은 온통 흐트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바리사이들이 존재하고 그 바리사이들은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나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 아니라 심판의 눈길입니다. 행여라도 뭐가 하나 틀리는 게 있으면 그걸 두고 심각하게 비판하려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의로음과 학식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즉 바리사이는 예수님보다 위에 머무르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리사이는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으니까요.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지혜 그 자체이신 분이 그걸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깔보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3,39-41) 그들이 들은 말은 ‘어리석은 자들아’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지식으

믿음의 순종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로마 1,5) 사도직분은 ‘선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도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자’고 모여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직분도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직분과 그에 종사하는 이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수여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일반 사회에서는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일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인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대표자는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이 됩니다. 그래서 그 대표자는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하고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에 전체의 의견을 잘 반영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사회인 셈이지요. 하지만 교회는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구성원들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고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에 앞서는 우선과제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목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귀를 올바로 기울이고 거기에 충직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실패한다면 아무리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더라도 결국 그의 사명은 실패한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양자는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상충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닌 양심은 때로 마비되기도 하니까요. 모든 구성원이 돈을 좋아하고 모든 교회 내의 논리가 경제적인 논리, 효율성의 논리로 흘러갈 때에 사목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교회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는 착실히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멋대로 길을 결정해서 여기저기에서 부딪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제 갈 길을 잘 가는 사람들이야 그냥 놔두어도 잘 가겠지요. 문제는 이리 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조언’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지요. 자꾸 화를 내고 흥분을 하고 누군가와 다투고 싸우고 마음을 어지럽히고 용서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고 물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조언이 주어지고 나면 그때부터 다시 새로이 두 부류가 갈라지게 됩니다. 즉, 조언을 듣고 따르는 이들과 조언을 거부하는 이들이 그 대표적인 두 부류입니다. 조언을 따르는 이들은 더욱더 바람직한 조언과 도움으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수위를 조절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이제 막 큰 상처에서 회복한 이에게 무리한 운동을 시켜서는 안되고, 또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지푸라기나 옮기라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저마다에게 상응하는 조력을 주실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시작한 회개의 길을 잘 따라오면 됩니다. 문제는 조언을 듣고도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다가오는 조언을 한 번 거부할 때마다 그의 내면에 더 큰 공허가 생겨나게 되고 그 자리에 더 큰 악이 들어서게 됩니다. 합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에 더 큰 악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 세대’란 바로 이런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의 모범을 지니고 있고 그들을 배척한 백성의 어리석음을 눈 앞에 두고도 지금

가르치는 일

사제라는 이유로 피치 못하게 이런 저런 것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사제직분은 가르치는 직분이니까요. 헌데 가르치다보면 그 가르침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만에 대해서 가르치면 교만한 자들이 걸려 넘어지고 탐욕에 대해서 가르치면 탐욕스런 자들이 걸려 넘어지고 이기심과 증오에 대해서 가르치면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걸려 넘어지게 되지요. 그러면 그들이 아프다고 합니다. 걸려 넘어졌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프겠지요. 하지만 사제가 그런 이들의 아픔과 그들의 투덜거림이 두려워서 입을 닫아버리면 정작 자신의 내면에 자라고 있는 그 어둠의 씨앗들이 열매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 사람들을 해칠 때에는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는 마냥 요람에 누워 자고 싶어하겠지만 부모는 일으켜서 젖도 먹이고 걸음마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의 장래에 자신이 원하는 걸음을 제대로 걷게 될 테니까요. 그런 일을 제대로 하는 사제는 보석과 같은 이들입니다. 반대로 그저 사람들의 인기나 얻으려고 애쓰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예언의 능력이 사라져가게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곧잘 싸움이 일어나는 가정에서 가장이 탐욕에 더 빠져 돈을 밝히면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자녀들에게 탐욕에 대해서 경계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수시로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 대는 아내가 무슨 면목으로 자녀들에게 ‘정직’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무슨 길을 선택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하겠지요.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몰이해가 갈수록 쌓여 가겠지만 먼 훗날에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바오로의 환난?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필리 4,12-14) 바오로가 말하는 ‘환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어렵거나 지위가 낮아서 고생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바오로 사도는 앞서 그러한 것들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밝히고 있으니까요. 바오로 사도의 환난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선을 실천하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악을 저질러서 그 결과물을 받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선을 실천하더라도 사람들로부터 환난을 겪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당신 그렇게 하면 안된다’를 가르치면 그렇게 하고 있는 이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는 이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몰라서 하기보다는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돈을 좋아하는 이들을 돈을 쫓아갑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면 무엇하겠습니까? 증오하는 이들은 서로 증오할 뿐입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서로 유익한 말을 하고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은 피하라고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언제나 뒤에서 험담을 하는 사람은 험담을 하게 마련인 것을요. 그렇게 어둠을 실천하는 이들 앞에서 빛에 대해서 증언을 하면 그들은 빛을 받아서 감사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눈이 부시다고 괴로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최대한 어둠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괴롭지 않도록 조심해서 빛을 비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지막 때의 모습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와서 밟아라. 포도 확이 가득 찼다. 확마다 넘쳐흐른다. 그들의 악이 크다. (요엘 4,13) 우리는 곧잘 세상의 종말을 궁금해 합니다. 그 때는 언제일 것이며 그 모양새는 어떨 것인지 참으로 궁금해 하지요. 하지만 그 종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성경에서 드러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성경구절은 종말의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열매는 익으면 땁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은 차면 비우는 것이지요. 즉 그 시기라는 것은 무슨 년도 몇 월 며칠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전체 공동체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반대로 각 개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대학에 갈 학식이 준비되어야 대학에 갑니다. 하지만 어느 도시에 어느 정도의 인구가 존재해야 대학이 생겨날 수 있지요.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 그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폭행하고,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요엘 4,18-19) 요엘 예언서의 이 두 번째 구절은 종말의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종말의 모습이 무슨 운석 충돌이나 엄청난 대재앙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상상하는 외적인 종말입니다. 진정한 종말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축복을 받고 반대로 어둠의 자녀들이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준주 성범에는 양심이 바른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고 나서 자신에게 다가올 상급을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양심이 어긋나 있는 이는 죽음 이후에 다가올 일이 두렵기만 할 것입니다. 설령 그가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아 그의 장

너무나 세속적인 우리의 생각

우리의 무뎌진 정신은 ‘청하라’라는 말만 들으면 세속적인 요소를 떠올리곤 합니다. ‘청하라니 그럼 내가 필요한 돈을 청하면 된다는 말인가보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논리를 신도들에게 적용한 거짓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곧 청하면 뭐든 주신다는 성공의 신앙을 논리로 내세우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본래의 자리에 두고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의 천박한 원의와 갈망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드높으신 자리로 내면을 들어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돈, 명예, 권력, 성공, 미모 등등)입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바꿔 봅시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바로 이 생각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청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좋음’의 범위가 상상을 초월해서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납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생이 생일날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인형을 받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그 아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난감을 준비한 것과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지요. 우리는 청하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비록 우리가 자격이 없더라도 꾸준히 청하고 또 청하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이들은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또 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유산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언급한 것들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실제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생각을 들어높이다가도 어느샌가 현실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웅얼대는

선과 악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말라 3,19-20) 성경에 매번 드러나는 분명한 예고, 그것은 선은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고 악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흐리멍덩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드러내어 밝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악을 저지를 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의 충고는 언제나 부담스러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충고가 다가올 때에 도리어 귀를 닫고 몸을 숨겨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양심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혀 엉뚱한 이들의 허황된 소리를 충고랍시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로 전혀 양심을 찌르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우리를 더 위대하게 느껴지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조리 얼굴에 흉터가 있고 괴팍한 자라고 상상하면 안됩니다.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악을 교묘하게 저지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악’이 무엇인지 또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1000만원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가 그 돈을 미리 나에게 주어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중에 자신이 저지르려는 악을 실행하려는 도구로 삼는다면 어떨까요? 제가 남미에 있을 적에 한 자매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시기에 남편 몰래 외간 남자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그 남자의 집요한 성적 요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은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는 것이고 악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배우자 선택

우리는 배우자를 어떻게 고르고 있을까요? 배우자의 외모가 너무나 준수해서 상대를 골랐는데 그가 그런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살다보면 때로는 모습이 헝클어질 때도 있을텐데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외모가 망가지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터인데 그런 경우에 그는 어떤 성격을 드러내게 될까요? 우리는 소위 ‘만남’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내면에 선이 기본으로 깔린 사람인지, 아니면 선한 척을 하는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아니면 늘 자신을 최고로 내세우는 사람인지. 소소한 일에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인지. 우리는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도 얼마 쓰지도 않을 물건을 꼼꼼하게 점검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에 대해서 눈 먼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뒤늦게 후회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나만 챙겨주는 사람’을 찾아 다니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정말 상대에게 눈이 멀어서 상대가 좋은 일을 권하든 나쁜 일을 권하든 뭐든 수긍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상대에게 보조를 맞춰 주는 아주 영리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성적인 사람’,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을 만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올바른 신앙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올바른 신앙이란 종교활동에 광적으로 매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겸손을 지니고 선과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나열한 것은 모두 이상일 뿐입니다. 현실에서는 전혀 엉뚱한 조건으로 상대를 고르고 만나서는(돈, 지위, 명예, 외모, 집안 등등) 뒤늦게 서로의 마음이 냉냉하게 식어버리는 상태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기 뒤에 그늘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직분도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면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그에 상응하는 신경써야 하고 성가시고 귀찮은 부분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미디어가 발달을 하고 ‘연예인’이라는 직분이 어린 아이들을 위시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리얼 다큐’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양산되고 있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채우지 못하는 욕구를 그렇게 다른 이들의 삶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재밌게 여행 다니지 못하니 다른 이들이 여행 다니는 걸 쳐다보고, 내가 맛난 걸 먹지 못하니 다른 이들이 맛나게 먹는 걸 보고,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연예인들의 삶을 카메라를 통해서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다는 것은 그에 뒤따르는 부귀 영화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에 기업들도 관심을 두니 때에 따라서는 광고를 찍을 수도 있고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하면 사람들이 그 인지도로 인해서 그런 식당이나 물건들을 구입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사람들의 시선은 늘 그들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될 것입니다. 온갖 집안의 개인사까지도 오늘날에는 모조리 밝혀지고 드러나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박하고 기쁘고 평범한 일보다는 그들이 당하는 부정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쏟게 될 것입니다. 남들이 잘 되는 것에 박수치기보다는 잘 살던 이들이 무너질 때에 고소해 하는 것이 세상 감추고 있는 은밀한 면이니까요. 삶의 치열한 수레바퀴는 어디에나 작동하는 법입니다. 화려한 외모와 인기 뒤로 그들의 공허한 삶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기가 거품처럼 모두 빠지고 났을 때에 그들의 내면에 별다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들은 무너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르신

저마다의 자리에서 ‘어르신’이 있습니다. 자신 보다 높은 위치에 머무르는 이라면 누구나 어르신이 될 수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 어르신의 성향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어르신이 술을 좋아하면 뭔가 선물할 때에 술을 가져다 드립니다. 또 어르신이 사납고 매서우면 무언가 고할 것이 있어도 어르신에게 직접 가지 않고 다른 수단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르신’의 이미지를 우리 부모님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해 오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나 남편에게 호되게 당한 여인은 모든 남성들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이 나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가장 좋은 분이십니다. 성경 표현대로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아무리 스스로 선함을 지니고 계시고 그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신하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다보는 사람이 그렇게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주려고 노력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아예 다가오지도 않는 다음에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 안에서 만나 본 모든 종류의 권력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러한 것이었으니까요. 거기에는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고 억압과 폭력 뿐이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자신을 산산조각 찢기도록 내어바치면서도 우리에게 드러내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교회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이 다가오도록 가만 내버려 둘까요? 우리가 선점한 자리라고 뒤늦게 들어오는 이들에게 사납고 매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를 ‘어르신’의 자리에 올리려고 시

카파르나움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루카 10,15) 카파르나움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저도 성경의 역사 문화적 배경 지식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파르나움은 자기 스스로 대단한 곳이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이 지닌 외적인 어떤 분별 가치로 자신을 드높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인물이 좋거나 학식이 드높거나 다른 이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특별한 체험을 하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런 이들은 기본 ‘겸손’이 결여된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위선적이고 가식적으로 겸손을 꾸민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감탄을 그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제 아무리 자신의 가치를 드높여 평가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하느님 앞에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6) 우리는 곧잘 사람들의 칭찬을 갈구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좋게 말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의 그러한 성향 때문에 그들은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고 전혀 엉뚱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길은 사람들이 흔히 좋아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파르나움은 바로 그런 의미로 스스로를 하늘까지 오를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 도시의 거주민들은 자신들을 외적으로 화려하게 가꾸고 온갖 값지고 좋은 것으로 치장을 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에게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 정의, 순명, 인내, 겸손, 희망, 신의, 사랑과 같은 것들은 소홀히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위해서 일을 할

제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동포 가운데 제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레 13,17) 특정 신심에 몸담은 여성들 가운데 소위 신비한 언어에 대한 해석과 예언을 한답시고 나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은 언뜻 달콤하지만 결국 그런 말들을 통해서 그들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대로 예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예언하는 이였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온갖 허언과 잡스런 호기심거리들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싶을 때에 예언을 하는 척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여인들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끼리끼리 모이는 법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말에 의미를 두고 장차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스스로 믿으며 그들에게 더욱 믿음을 줍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도 그런 헛된 일에 끌어들이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허영과 교만입니다. 그들은 언뜻 권위에 순종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 반하는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동에 특정한 제한을 받거나 하면 죽기 살기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성당 안에서만 거룩한 척을 하고 실제 생활은 무질서하고 남편과 자녀들을 내팽개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둠의 일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생에 대한 찬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외모는 번지르르 하며 그들의 행동거지는 내세울 수 있는 행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반면 그들은 인내가 없고 겸손이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의 혀가 얼마나 날랜지 듣는 이

개와 돼지

가치를 모르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이에게 좋은 선물을 억지로 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는 그 선물을 방치하고 망가뜨릴 뿐입니다. 좋은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이미 여러번 언급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요.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또 한 번 시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가 받아들일 만한 것을 선별해서 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대학교재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면 그 아이의 수준에 합당한 것을 건네어야 합니다. 혹은, 그 아이의 수준에 합당한 보살핌과 충고를 해 주어야 하지요. 사랑은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반드시 상대를 살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는 제3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그 당사자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3자는 그가 깨달음을 얻게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선물을 이미 여러차례 내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는 같은 선물을 주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선사하신 아름다운 것을 그가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지 못할 때에 그가 겉으로는 아무리 번지르르한 옷을 입고 입으로 교양있는 말을 쏟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짐승’에 대한 표현은 실제로 네 발로 걸어다니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그래서 그분의 선과 드높은 사랑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것은 그 거룩한 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참된 변화

사람들이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그들이 다 정의롭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들은 가장 손쉬운 사랑의 일도 하려고 들지 않는 이들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은 다만 인터넷 기사를 읽고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구체적인 정의는 이론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소한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 대해서 실제로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그에 상응하는 똑같은 취급을 나보다 경제력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에게 했다고 해서 흥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자리에 올라설 때에 결국 우리도 똑같은 짓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정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정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 안에서 배우는 것들은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변을 정돈하고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들을 더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움직임이 커져서 세상도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점을 망각한 채로 거대한 테두리를 변화시키면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로마가 망하면 자신들의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지금 완전히 멸망했음에도 여전히 세상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신음과 아픔이 존재합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전혀 접할 수 없는 곳에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감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조금씩 그 나라의 규율에 맞춰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바로 눈 앞에 있어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그 안에 내재된 의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의도로 나뉘게 됩니다. 바로 선의 의도와 악의 의도이지요. 물론 정상적인 범주에 사는 사람에게는 ‘악의 의도’, 다시 말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의 의도’, 곧 참된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하는 이들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즉, 자신에게 득이 되면 하고 반대로 득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자신의 이 향한 기본 방향성은 곧잘 이기적인 방향으로 변해서 ‘악의 의도’로 변질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에게 해가 미치더라도 그리 큰 상관을 않게 되는 것이지요.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서 가난한 영세민들의 기본 인권이 큰 상관이 없게 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예언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의도를 닮아 살아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이들이지요. 이들의 생활 모습은 일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지닙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오류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파수를 하느님에게 맞추고자 노력하고 그분이 전하려는 선한 의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 또 나아가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 말씀을 전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말이 올바로 전해졌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무시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반대로 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