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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의 게시물 표시

인간의 존재 목적

핸들이 빠진 차는 그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는 곳마다 들이 받으며 상처를 입힙니다. 물론 속도를 줄이거나 범퍼를 키워 충격을 예방할 수는 있겠지만 방향 자체가 상실되어 있기에 결국 어디든 가서 들이받게 되는 현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아무리 인격을 함양하고 아무리 속도를 제어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 일은 일어나고 맙니다.

자동차는 어디를 가기 위한 뚜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의 고유한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홀로 창조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라고 창조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채우는 사람이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외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아무 가치도 없게 됩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데 아무리 훌륭한 다이아몬드를 가져온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맛있는 빵을 위해서는 질 좋은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분명 목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에게 여쭈어 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 목적을 뚜렷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방황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올바로 깨닫고 나아가 아직 그 초대를 듣지 못한 이들을 열심히 초대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열심히 사랑을 키워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내버려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제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내버려 두지 마세요.”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습니다. 배우자가 신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일 미사는 겨우 나오는데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버려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내버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분은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시더군요.

우리는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싫다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의 성에 차지 않는 조급한 마음을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서 상대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의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상대에게 적합한지 아닌지 우리는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내 성미에 못 이겨서 상대를 끌어당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초대와 끌어당김을 내려놓지만 그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다른 방향의 초대를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기도’를 해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도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 안에서는 기도가 굉장히 나약해 보이고 미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버려두지 말고 영적으로 상대를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상대가 숨막혀 하지 않게 내버려 두십시오. 본인 스스로의 조급한 마음도 내버려 두십시오. 하지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더욱 긴밀하게 영적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갈구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에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난한 이를 속이는 자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아모스 8,4-6)

제가 언제나 말하듯이 성경은 ‘영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표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빈곤하고 가난한 이들은 영혼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짓밟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영혼의 가르침을 기다리는데 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가뜩이나 힘든 현실을 더욱 힘든 환경으로 조성해 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이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곡식을 내다 팔기 위해서 초하루가 지나야 하고, 밀을 내놓기 위해서 안식일이 빨리 지나야 합니다. 초하루와 안식일은 유대 교회의 고유한 절기로 거룩한 시간들을 의미합니다. 즉, 이들은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시기보다 오히려 놀러 다니고 자신의 쾌락을 채우는 활동을 하기를 더욱 기다리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억지로 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에파와 세켈, 그리고 가짜저울이 의미하는 것은 측량 단위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이들을 속이기 위해서 언제든지 거짓된 위선과 허풍을 떨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값도 나가지 않는 것을 값이 나가는 것으로 만들고 반대로 값이 나가는 것을 값이 나가지 않는 것으로 뒤바꾸어 버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렇게 하면 정말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은 헐값에 팔아치우고 하느님 앞에 소중하지도 않은 것을 크게 부풀려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 참된 하느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내어드리는 것을 가로막고 속이는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힘없는 자와 빈곤한 자를 값도 안되는 것으로 사들여서 제 맘대로 부리려고 들고, 또 정작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없는 지스러기…

(중요) 미움을 자행하는 이와 미움을 받는 이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미움, 미워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된 말입니다.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이 없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상대를 향한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파괴되고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라져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상대가 내 범주에 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손이 느끼는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손이 신경이 마비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즉 그 손은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움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워할 수 있는 수십가지 이유를 누군가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미움을 실행하는 이는 우리 자신의 의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의지’이듯이 미움 역시도 일종의 ‘의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기를 결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미움’은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하는 내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언제 어떻게 일어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요소인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는 역으로 미워할 만한 100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서 역으로 더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약한 이에게 사랑은 ‘조력’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잘못을 의지적으로 자행하는 이에게는 ‘충고’ 또는 ‘경고’로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소중한 ‘돌봄’, ‘사랑’, ‘애정’과 같은 보물을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는 돼지들이나 개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같은 보물을 받고도 그것을 물어뜯고 도리어 우리를 공…

구원은 진행중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래서 특정 종류의 일은 ‘불가능’하게 상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제가 ‘마라톤’을 완주한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일어날 일이 미래에 있는 일이고 나에게 그것을 준비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결과는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오늘부터 작정을 하고 운동에 돌입한다면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는 마라톤을 뛸 만한 충분한 체력과 자심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을 이루어내겠지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라는 것이 요원한 일처럼 보여집니다. 여전히 우리는 악습에 사로잡혀 있고 선이라고는 제대로 실천해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드높은 목표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루하루 자신의 악습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해 나가는 사람과, 자신의 악습을 끊어내려고 노력하고 작게나마 성공을 이루는 사람은 훗날 자신들이 집중하는 그 노력이 시간이 흘렀을 때에 어마어마한 격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수술을 받고 한동안 맛있는 음식과 충분한 휴식으로 인해서 몸이 91키로에 육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무게가 그 정도 나가자 만성피로와 무기력증이 끝도없이 밀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몸무게는 제 복음선포의 열정을 넘어뜨릴 수는 없었고 그 와중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건강이 필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술을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약소하나마 운동도 하고 가능하면 음식도 건강한 음식으로 섭취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노력은 훗날 결실을 맺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활기차게 전할 수 있는 육체적 준비를 갖추어 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상정한 몸무게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에, 저의 노력이 결실로 드러나…

날더러 수도자가 되란 말인가?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편 30,6)

하느님은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의 악행을 마냥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를 시험하는 악인들은 언젠가는 그분의 진노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진노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꾸준한 자비가 존재하고, 또한 언제라도 인간이 뉘우침을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분의 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자비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은 자신이 도대체 누구 앞에 대적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눈을 가려 버립니다. 그래서 자비를 갈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주님의 진노를 앞당기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진노는 당연히 주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진노로 인해서 다른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다시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아침이 새로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언제 하더라도 얼마나 하더라도 부족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체험해 본 결과로는 사람들은 그 말을 질려하고 예전의 이집트에서 먹던 맛난 음식들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더러 수도자가 되란 말인가?”

천만에요, 그렇게 되지를 바라지도 않고 또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은 그렇게 될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와서 지금의 소위 ‘위선적 거룩함’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거룩한 이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이런 제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다해서 이런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침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하느님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물론 가장 큰 주도권을 쥐신 분은 하느님이시지요. 하느님께서 의도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하느님은 각자의 개인의 응답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각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각 개인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철저히 봉사하시는 분이시지요.

이는 마치 회사의 사장님이 자신의 회사를 통해서 이윤을 뽑으려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행복해지도록 직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며 직원들이 성실히 일하기를 인내롭고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물론 수많은 회사들이 이를 표방하겠지만 실제로 이윤에 대한 그 어떤 욕심도 없이 그 일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회사라는 것은 기본 이윤을 얻기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이윤이 바로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의 참된 행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기는 힘든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는 중에도 우리를 쉽게 내치시지 못하고 또 기회를 주시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마치 무능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일 집구석에서 내가 방을 어지르기만 해도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아 그 피드백을 얻게 되는데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 자신의 피조물의 엇나감 앞에서도 그것을 그 즉시 처벌하지 않으시니 우리의 무지함은 그분을 마치 없는 존재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실 그러하십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은 이 지상에서는 우리의 회개와 뉘우침을 위해서 열심히 기회를 제공하시는 자비를 드러내시지만 훗날 우리가 마주해야 할 하느님은 정의로움으로 …

성장

물론 대부분은 스스로 클 생각조차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가 생각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한 영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실 때에 그 영혼에게 ‘시련’이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 영혼이 쉬거나 뒤로 물러서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그때마다 ‘네’라고 그 시련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키워 나갑니다. 

물론 때로는 ‘아니오’를 외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느님은 인내로이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그 영혼이 사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계산보다는 하느님의 분별이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하느님의 부르심보다는 우리 인간의 여러가지 현실적 환경에 기울고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오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길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예를 외치고 응답하는 사람과 아니오를 외치고 머무는 사람들이지요.

때로는 누군가가 사제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고 수도자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이 나뉩니다. 되고자 하는 사람,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람은 역경이 다가와도 ‘예’를 외치고 난관을 극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또 자신만의 새로운 부르심이 다가옵니다.

응답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은 멈추지 않습니다. 또 새로운 과제를 내어주시면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리로 나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더 큰 기쁨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지상에서는 거의 주어지지 않고 영원 안에 마련된 참된 기쁨입니다.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들어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들어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어야 하는 과업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 앞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분별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16)

이리들도 옷차림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옷차림은 지극히 선한 외양으로도 차려 입을 수 있지요. 하지만 속내는 감출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결국 게걸 든 이리들인 것이지요.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옷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도 입을 수 있습니다. 속에 아무리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어도 우리는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넘어오게 만들 수 있지요.

결국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물론 무엇이 열매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역시 의미없는 일이 되겠지요.

열매는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내는 일의 결과물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치, 평화, 사랑, 인내, 겸손, 희생, 봉사, 절제, 친절, 선행과 같은 일들입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본인들 스스로 이런 열매를 맺고 다른 이들도 이런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욕구는 자신들의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고 결국 이런 개인의 탐욕스러움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과 늘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주변이 시끌시끌하게 되지요.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추진력, 즉 엔진을 지니고 있더라도 분별력이 없으면 핸들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엔진을 단 차는 어딘가에 처박아 버리게 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

신앙은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 신비는 꼭꼭 숨기려고 신비가 아니라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마치 대학생이 쓰는 교재를 들고 있는 어린이와 같지요. 하지만 그 어린이는 자라게 되고 나중에는 대학생이 되어서 그 교재를 읽을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신비는 더는 신비가 아닌 것이 됩니다.

교회는 신앙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꼭 숨기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신앙 안에서 충분히 자라서 얼른 그것을 알아내고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신앙의 신비가 그 신비를 지닌 이들(혹은 심지어 지니지도 못한 이들)의 손에 꼭꼭 숨겨져서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 관찰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교회는 신비를 잘 간직하고 올바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그 직분 자체를 무시하고 까내리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교도권을 존중하고 거기에서부터 생명의 말씀의 풀이가 다가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개개인에게서 일어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를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쓰려는 욕구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가르침을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을 혹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면들을 짚어 보자면, 신앙 생활을 인도해야 하는 이가 그것을 잘 모르는 초보자에게 은근히 으스대고 싶은 마음으로 신앙 생활에 대한 지시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본질은 그 대상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인데 무언가 으스대고 싶은 사람이 가르치는 신앙생활은 굉장히 어렵고 딱딱하고 초보자가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힘든데 그 선배는 열심히 하는 걸 보고 그 선배를 존경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신…

다른 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선별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더는 예전의 구태의연한 것들이 먹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깨어났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것들이 공헌을 했지만 그 가운데 이 ‘인터넷 미디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방식을 알려면 그 비법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바닥부터 기어야 했습니다. 궃은 일부터 하면서 서서히 어느 정도에 위치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그 수준의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내부에 있는 요소들이 터져나오거나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안정성 있는 제도가 운영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신이 알게 된 소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것을 아는 이들의 집단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흐르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그에 따라 여러 면에서 그러한 것들을 점검할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는 꽤나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더는 숨겨진 것이나 감추어진 것이 없게 되었고 오히려 역으로 멀쩡한 것도 때로는 지나치게 파고드는 세상이 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때로는 상처가 아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고 시간을 두어야 하는 것까지도 다시 파고들어서 상처를 더욱 벌리고 사태를 극단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폐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인지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보와 소통의 도구를 올바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가르침과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양질의 컨텐츠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어디에 참된 빛이 있는지를 올바로 분간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우리의 눈과 귀로 쑤셔넣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턱대고 모든 것을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을 올바로 분별해서 찾아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아이(마진우 지음)

동네 꼬마아이가 우물 근처에서 놀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타지역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우물에서 건져 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급한대로 자신의 옷이라도 우물 곁의 기둥에 걸치고 그 옷을 잡고서라도 내려가서 아이를 구해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웃통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옷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이 말을 합니다.
“여보시오, 이 백주대낮에 우물가에서 무엇하는 짓이오?”
“우물에 아이가 빠졌습니다. 얼른 건져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르신이 곰방대를 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시오. 우물에서 뭔가를 건질 때는 그렇게 건지는 게 아니라오, 도르래라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있는데 그걸 써보시오.”
“좋습니다. 그걸 써보겠습니다. 헌데 그것은 어디 있고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동네 이장님 댁에 있는데 가서 사용하게 해 달라고 허락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 사람은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동네 이장님에게 도르래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이장님이 의심간다는 눈초리로 말을 합니다.
“이 도르래는 스무근 이상 무게가 나가는 것이 물에 빠졌을 때에 사용하는 용도입니다. 지금 물에 빠진 것이 스무근이 넘습니까?”
“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이 동네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흠… 그건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이 물건은 스무근 이하가 되는 일로는 써본 적이 없소이다.”
“어르신, 지금 물에 빠진 아이가 몇 근이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그 아이를 얼른 구해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장은 망설이기만 합니다. 그것을 내어 주었을 때에 동네 사람들이 훗날 공연한 일에 중요한 도르래를 내어 주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여 도르래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이장에게 도르래를 내어 달라고 사정을 하던 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얼른 달려와 우물에 가서 ‘자신이…

산골 마을로 가는 버스(마진우 지음)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콜롬비아의 험한 산길을 버스 한 대가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습니다. 과묵해 보이는 운전 기사 아저씨와 자리에 앉은 산골주민들이 있고 또 도시에서 친지를 찾아가는 이들도 함께 탑승해 있습니다.

산 중턱을 올라서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러자 외지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이봐요, 기사 아저씨 지금 우리는 산을 올라가는 중이에요. 헌데 이렇게 시야가 가리워져 있으니 안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갑시다.”

하지만 기사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주민들도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는 더욱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외지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합니다.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어요. 기사 아저씨. 보시라구요. 지금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잖아요. 얼른 차를 세우라구요!!!!”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도리어 더 속도를 냅니다. 기사 아저씨는 운전대에 올린 두 손을 꼭 쥐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입니다. 주민들의 얼굴에서도 비슷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안개 지역을 뚫고 달빛이 환한 지역으로 나왔습니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기사 아저씨가 입을 엽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통과했습니다.”

그 순간 주민들의 입에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외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입을 엽니다.

“이보슈. 저 기사는 우리가 가고 있는 산골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그만큼 길을 아는 사람은 없지요. 헌데 얼마 전부터 게릴라들이 주민들을 습격해서 약탈을 하곤 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저 안갯길이 그들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이지요. 거기에서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는 순간 그 버스는 약탈을 당하고 게릴라들의 총에 죽어간 사람도 숱하게 된다오. 하지만 우리 마을 주민들은 아직까지 그 약탈을 당해본 사람이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 기사가 그 곳을 지날 때면 오히려 더 속도를 내어서 통과를 …

봉사자

회사라는 곳은 이윤을 내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여러가지 인적 자원을 활용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고용한 인력에게 나누어주면 서로 쌤쌤이 맞는 것이지요. 합당한 이득만 잘 돌아간다면 별 탈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조금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어찌보면 굉장히 소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의 근본적인 의도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내어 쏟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봉사자가 모여들진 않습니다. 봉사자가 모여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 부르니까 거기에 응답해서 오는 것입니다.

최초의 봉사에로의 부르심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보내신 외아들이 세상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셨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이 부르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을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근본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이끌리게 되고 부르심을 느끼고 응답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싫다고 느끼고 귀찮고 성가시고 자신을 괴롭힌다고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누룩에 갇혀 있던 사람들, 자신들이 이미 얻게 된 기득권에 만족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귀찮고 성가신 것으로, 심지어는 위험한 것으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숙청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자신들의 ‘이익’과는 맞지 않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전해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피해서 다른 고을로 가셨습니다. 왜냐하…

새 자동차

자동차를 처음 사면 잘 나갑니다. 시트에서 새 차 냄새도 나고 아주 기분이 좋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차는 여러가지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기름도 넣고 세차도 해야 하고 윤활유도 갈아야 하며 타이어도 바꾸어야 하겠지요.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떤 경우에는 고장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손을 보아야 하겠지요. 그건 차를 소유한 이가 겪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고리입니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단체가 처음 출범하면 처음에는 비교적 잘 나가는 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목적도 잘 기억하고 있고 의욕있게 공동체를 이끌어나가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공동체는 삐걱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건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삐걱거리는 부분을 수정해 나갈 수 있는 구성원들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고 시간이 경과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부족함을 누군가는 채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일 위험한 건… 삐걱 거리는 데도 점검을 하지 않고 무리하게 달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너트 몇 번 조이면 될 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큰 사고로 마무리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때에는 인명에 손상을 입기도 할 것입니다.

새차를 타고 모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고장나서 신경을 써야 하고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은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을 무시하고 달리던지 아니면 남들이 그 일을 대신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돌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질 급한 사람들의 원성을 듣기도 합니다. 차를 타고 놀러를 가고 싶은데 생명이 중요하다고 차를 고치고 있는 모습을 견디기 힘든 것이지요. 하지만 훗날 그들은 차를 고치는 이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차를 고치는 것을 가로막은 걸 후회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일들은 역사 안에서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놀랄 일도 아…

사제생활

사제에게는 누가 찾아올까요? 물론 때로는 기쁨이 가득한 이들이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도 오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뭔가 속상하고 억울하고 풀리지 않고 괴롭고 힘든 이들이 찾아옵니다. 사제는 이런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헌데 이런 만남은 굉장히 내면을 소모하는 만남입니다. 즉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나아가 사랑을 쏟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제는 ‘재충전’이 필요한 때가 옵니다. 바로 이 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사제의 재충전은 두말할 여지 없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제가 다른 재충전의 기회들을 찾거나 구하기 시작할 때에 바로 엇나감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세상 안에서 정당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빈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톨릭 사제는 술, 담배, 고스톱을 즐기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드러나지 않은 곳의 문제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사실 신학교는 바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훈련하는 양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는 힘겨운 일이 될 수 있는 수많은 훈련 과정들이 존재합니다. 기도생활과 학업, 그리고 건전한 공동체 생활의 장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나 여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진중함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말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쏟아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곧잘 다른 이들의 반응을 더 끌어내기 위해서 과장을 섞기도 하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을 더 쏟아놓게 마련이지요. 그러다보면 신학교에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게 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이들이 고지식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과연 술사목은 정당한 것일까요?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조언

여러분 내면에 추상화되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어진 시간,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지요.

헌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나 다 하는 활동’으로 채워 버린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남들이 다 해 놓은 어떤 일의 복제품을 만드는 데에 쓰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활동이라는 것은 남들이 다 추구하고 남들이 다 거기에서 덕을 보려는 활동들을 말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누리고 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그리고 그에게서 파생된 세속적 활동들도 존재합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그 드라마에 대해서 몇시간을 떠들어대고, 같은 제품을 쓰면서 그 제품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그런 활동들에서 마음을 떼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카리스마가 있고 유일함이 존재합니다. 나 말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몫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해 내어야 합니다. 

그럼 그 일은 어떻게 찾아 나가는 것일까요?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좋은 전자제품이라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작동시키기 시작하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기계가 아무리 훌륭한 발전기를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가 시동을 걸지 않고서는 전기를 만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다른 질료와는 달리 세상의 것으로 자극받지 않습니다. 영혼은 오직 영적인 재료로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움직이는 자극은 아래로부터 오는 어둠의 자극과 위로부터 오는 빛의 자극이 있지요. 어둠의 자극을 받으면 사람은 증오, 원한, 시기, 분노와 같은 것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빛의 자극을 받으면…

어둠의 영들의 공격

어둠의 영들은 끊임없이 의인을 괴롭힙니다. 그 의인이 더욱 빛에 다가설수록 괴롭힘은 더욱 극심해지지요. 물론 의인은 의인대로 그렇게 심해지는 어두움에 저항할 힘을 키워 나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많은 성인전에는 성인들이 마치 자기 방에서 실제로 악마들과 싸웠다는 듯한 표현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을 배제하진 맙시다. 하지만 제가 아는 어둠의 영들은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아주 교묘하고 힘든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건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구체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어지럽힘으로써 일어나는 일입니다.

선을 거부하는 이들, 좋은 것을 시기하는 이들,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드러내는 이들… 여러가지 공격 수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의인이 하는 활동을 가로막으려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그 의인의 활동은 주변에 빛을 뿌리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어둠의 영들이 괴로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악을 조장하고 악을 이용해서 의인을 괴롭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적절한 제어를 통해서 의인이 자기 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괴로움을 당하게 놓아 두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의인은 더욱 하느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미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이 영적 전쟁의 생존자를 물색하고 계신 거지요.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우리는 그분이 보내시는 구조 헬기에 탑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명한 판단으로 이 멸망하는 세상 안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텃세와 합당한 충고에 관한 고찰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얻어지는 지위가 있다. 가족 안에서 나이가 든다거나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경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물론 ‘최소한’의 직무는 수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데 아무리 나이가 들어본들 그 자녀가 아버지를 존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최소한’만 한다면 어떻게든 그 지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지위가 차고 나면 심지어는 그 최소한도 하지 않아도 이미 기득권을 형성해 있기 때문에 안정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만 꿰차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설프게 일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공동선에 위배되는 시도를 하고 함께 추진해 나가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없애 버리고 마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만일 세상이라면 이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힘을 키워 나가서 ‘전복’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여건이 다르다. 교회에는 소위 선해지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최소한은 하겠지라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무책임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성경 안에는 ‘충고’에 관한 내용이 종종 등장을 한다. 즉,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가서 충고해 주기를 성경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에게나 대고 충고를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런 충고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남편이 아내의 엇나간 허영을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아내가 남편의 지나친 세속적 욕구를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 가정 안에는 불화의 씨앗이 자라나 크나큰 나무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을 정립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그릇되이 행하는 걸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하고 방…

나는 삶의 보람을 어디에서 추구하는가?

우리가 보람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행태가 달라집니다. 노동을 마친 후에 그 노동의 가치로 얻은 비용을 써가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사람은 노동하는 내내 괴로움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마치고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 노동 그 자체에 일종의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그날 그날의 노동 안에서 보람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가 자신의 손이 일상적으로 이루어내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새로운 핸드백을 사거나 아니면 고급진 외식, 여행을 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들기 시작하면 크나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목적하는 즐거움을 위해서 일상을 희생하고 소비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녀는 다만 자신이 최종적으로 누리게 될 마지막 기쁨만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일 뿐이니까요. 불행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제가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 그 자체로 기쁨이 되지 않으면 그 사제는 불행합니다. 그 사제는 어떻게든 쉬는 날 놀아볼 생각 만으로 일을 하게 될 테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신자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더욱 그 사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사제는 더욱 더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게 되겠지요. 신자들은 부담이고 짐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신념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보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처음 느끼는 호흡 안에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오늘 하루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숨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을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할 것이고 바로 그런 자신의 열정과 성실성이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을 더욱 아름답…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의지의 훈련

깡패들 사이에도 추켜 세워지는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도둑질을 더 잘 한다거나 다른 이들을 더 잘 겁박해서 원하는 목적을 이루거나 하는 이들에 대해서 깡패 집단은 환호를 하게 될 것이고 그를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예를 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고 그가 빛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더한 어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가 지닌 모든 악습들을 떨쳐 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악습’이라고 표현되는 것 자체가 빛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형성된 습관과 악한 습관은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지요. 내가 그냥 코를 긁는 습관을 가지는 것과 긴장할 때면 담배를 몇 갑이나 피워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습관입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데에 길이 든 사람, 술을 과하게 마셔서 건강을 해치고 관계도 망가뜨리는 사람, 담배에 중독이 되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신이 원할 때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 사람… 이런 모든 악습들은 우리 안에서 정돈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습들이 형성되기 전단계를 이루는 내적 요소들도 많습니다. 게으름이라던지(영적 나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게으름을 말합니다.) 성실하지 못하거나 책임감에서 물러나려는 경향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미미한 내적 요소들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훗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선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듣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대로 실행하려고 할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결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제가 앞서 서술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의지의 훈련인 것이지요. 우리의 의지…

삶으로 드러나는 증언

증언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참되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도없는 말들을 쏟아놓지만 참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헌데 복음을 전할 기회부터 피하려고 든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고 안전하고 평온한 영역 안에만 머물러서는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입으로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회개의 기회는 참으로 많이도 주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삶’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에 좋은 강사를 두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수긍하게 되지만 그것을 실제로 살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나의 응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거기에 응답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구체적인 실천이 될 것입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응답,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다는 응답입니다.

사랑이 다가서게 한다

우리는 돈과 기술이 많은 것들을 단축시킨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실은 ‘사랑’이 그 수많은 것들을 극복하고 단축시킵니다.

한 사제를 찾아오는 일은 신경쓰이는 일이고 성가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마저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곤 합니다. 오죽했으면 전화나 인터넷으로 성사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 작정을 하고 누군가를 찾아오는 이유는 그 상대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물건을 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광고를 보지만 그것을 다 사버리진 않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내 마음이 꽂히게 된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고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투자해서 그것을 구입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이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만나야 하고 만나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도 같은 일이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성당의 거리나 신자 재교육의 부재와 같은 이유들이 아닙니다. 실은 ‘사랑의 메마름’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성당이 가깝고 교육의 기회가 많다 하더라도 정작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세상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면 나는 밤 12시에라도 야식집에는 전화를 걸 줄 알면서 정말 내가 보아야 하는 성사를 위해서 사제를 찾아가는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이 거리를 단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래야 하늘 나라의 거리가 단축되고 결국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새로운 ‘신심’을 추구하고 아무리 색다른 ‘교회 구조’를 배운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위선을 경계하기

때로 어떤 공동체의 나눔의 자리에 참석해보면 ‘아 이렇게 사랑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아름다운 말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우라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에 좋은 것을 꺼내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고 당신이 직접 사는 삶을 드러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같은 방식으로 사람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나마 참된 분별을 하려면 ‘와서 보아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드러나게 됩니다.

공석에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그 사람은 남편에게 신경질적이고 자녀들에게 가시방석을 만들고 있으며 사석에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는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요.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히 남을 것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이 지닌 것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외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는 통에 순수한 만남이 사라지게 됩니다. 외적인 면모에 집착하느라 정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실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이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것, 우리의 순전한 본질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요소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차적으로 지닌 것, 옷을 비롯해서 학식과 명성 모든 것들은 덧붙여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지닌 육체마저도 훗날에는 상실하고 말 대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히 남을 것을 올바로 분별하고 그것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영원히 남을 것이 될까요?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가 추구할 만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물들의 형체라는 것은 ‘빛’이 없으면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해 내는 모습들이 결국 저마다의 사물의 형체를 구성해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 그 자체가 소중하고 그 빛을 드러내는 존재가 중요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영원의 빛이시고 인간은 오직 그 하느님에게서 빛을 받아 그것을 드러낼 때에만 의미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허황함은 계속될 것입니다. 세속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주입시킬 것이고 사람들은 그 흐름에 밀려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부표처럼 헤매이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길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의견에 쫓겨 다니지 마십시오. 묵묵히 우리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길에 참된 진리가 놓여 있고 우리의 구원과 진정한 행복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

한 여자아이가 아름다움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힘을 알게 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미모가 그 영향권의 세력 안에 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여자아이는 일종의 ‘유혹’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 미모를 이용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와 그 반대로 겸손하게 처신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의 내면에는 그것을 다스릴 내적 능력이 함양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지닌 외모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고 또 그 실행의 결과물이 자신의 내면에 ‘교만’이라는 형태로 점점 쌓이게 되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어가는 동안 어른들은 이 아이의 내면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해도 아이의 내면의 형성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아이에게 균형감각을 되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아이의 내적 성향을 강화시켜 주는 쪽으로 흘러가곤 합니다. 즉 아이의 허영을 채우는 것들을 잔뜩 사주고 또 아이의 외모에 대한 끝없는 칭찬으로 결국 아이가 그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강화하고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 아이는 크는 내내 자신의 미모에 집착하게 되고 또 다른 아이들과 일종의 경쟁 구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미모가 정점을 찍을 때에, 그 뒤로부터는 끊임없는 좌절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름은 늘어갈 것이고 피부는 본래의 빛깔을 잃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갈수록 절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과연 축복일까요? 날이 선 칼은 의사의 손길에서는 다른 환자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강도의 손에서는 흉기가 되어 버리지요. 외적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니 오직 그것을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일 때에, 자신의 외적 아름다움이 미칠 영향과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올바로 이용할 줄을…

성사와 자비

우리가 지닌 성사는 고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게 됩니다. 고해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그릇되이 이용하면 ‘모고해’라는 것이 되고 더 큰 죄가 되어 버립니다. 성체성사도 마찬가지로 올바로 참례하고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돌리고 정진해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심지어 중요한 내면의 거스름을 지니고도 모시게 되면 ‘모령성체’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사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세례 성사를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하느님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바로 그 가르쳐야 하는 주체가 그들을 비난하려고 드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알지만 가톨릭 교회의 풍성한 신앙 유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따뜻한 시선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이 하느님을 알도록 더 잘 도와줄 수 있고, 또 우리 스스로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

하느님에게 영광이 되는 일에 대해서 성찰해 봅시다. 성경 안에는 예수님께서 곧잘 영광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광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어떠한 일이 영광이 될까요? 어떤 일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신 가장 완전하신 분께 어떤 것을 돌려드려야 그분께 영광이 될까요?

그것은 단 하나 그분께서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영광’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조건 십자가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모든 종류의 일들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다만 그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통상적으로는 ‘십자가’가 뒤따를 뿐이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볼 때에, 내 배우자와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또 보전하려고 할 때에, 우리의 그 모든 ‘선의’에서 나오는 ‘사랑의 행동’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마음을 써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거창한 일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일, 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쓰면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일들 속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찾아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더 나아질 것이며 더 아름답게 가꾸어질 것입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이여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마르 11,18)

어리석은 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을 
죽여 없애려 하고 두려워하다니. 

하지만 그들은 장님에 귀머거리.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네.

그들이 겁내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며 모든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하느님은 알지 못하고 있다네

그들은 샘을 내고 서로 다투어가며 
남들보다 뛰어난 척 하려 하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라네
그건 바로 주인이 없는 세상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세상
현자들은 그곳을 일컬어 지옥이라 하였지.

들풀들은 사라지고 풀꽃은 스러지고
오직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나무만이 찬란할지니
그분은 바로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오소서 주님.
아멘.

모든 것에 존재하는 이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밀어닥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일은 나 자신을 바꿈으로써 해소가 됩니다. 내가 담배를 태워서 내 폐가 아픈 것이면 담배를 끊어야 하지요. 내가 곧잘 욕설을 해서 주변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지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싫은 감정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면 내가 욕설을 멈추면 됩니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낸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의 외부에서 나에게로 밀려드는 일이고 그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셨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한국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부모님을 선택하지도 않았지요. 헌데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바로 그 장소와 그 위치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기뻐하게 되지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나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재에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삶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 바로 우리가 이 짧은 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이지요.

되살아난 예수님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라 오늘날의 우리에게서는 기억에서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의 눈 앞에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보면서도 정작 못박은 이를 용서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그분 안에 존재하는 힘의 근원을 따르려고 노력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소위 ‘사건’은 2000년 전에 그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끝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 일어난 일을 오늘날 우리들이 ‘재현’하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불의에 맞서서 우리의 사랑으로 그 불의를 끄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에 생생히 살아있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들의 힘에 상응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니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에게 삶의 보람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지, 얼마나 많은 몰이해에 부딪히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세상은 변덕스럽고 심지어는 악하기까지 해서 선의 빛을 보는 족족 꺼버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할 테니까요. 여러분 내면에 존재하는 선의 힘을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더욱 더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인의 괴로움

그 의인은 그들 가운데에 살면서 무도한 행실들을 보고 듣느라고 그 의로운 영혼이 날마다 괴로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2베드 2,8)

의인의 괴로움은 자기 자신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조성해 낸 어두움에 힘들어하지만 의인은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문제로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반면 의인들은 주변 사람들이 조성해 낸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일단은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도 힘든 일입니다. 어리석은 이가 벽에다가 자기 머리를 찧으면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만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남도 괴롭힙니다. 이런 모든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의인들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의인은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살아가지 않습니다. 과거 유대 지역에는 악인들에게서 멀어지겠노라고 분리되어 살아간 에세네파 사람들이 있었지요. 유명한 성경 사본인 사해 문서는 바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성경이었습니다. 그토록 분리되어 생활한 탓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삶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리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구요.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세상과 잡탕으로 뒤섞여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분을 올바로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에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 세상 안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그 괴로움에서 반드시 구해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희망으로 지금 여기서부터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어쩌면 삼위일체라는 말마디 자체가 지나치게 무겁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셋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게 핵심인데 말마디가 너무 고상해서 듣는 순간 우리가 긴장하게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나됨, 그럼에도 고유함을 간직함이 핵심입니다. 물론 이는 물리학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지상의 질서에는 맞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느님께서 이 물리의 세상을 만들어 내신 창조주인데 굳이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법칙에 종속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하느님의 하나됨은 보다 천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고 다가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 자체도 물리의 법칙을 넘어서는 내밀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영’이라고 부르지요.

두 물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두 진흙을 한데 ‘뒤섞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두고 완전히 하나 되었다고 하는 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두 영혼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질료가 없고 순수해서 얼마든지 하나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하나되는 데에 핵심은 그 영혼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이 하나되는 데에 관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는 서로의 의지를 같은 것으로 만들 때에 하나될 수 있습니다. 성부가 의도하는 것을 성자가 그대로 이행하려 하고 성자가 의도하는 것을 성령이 따라 수행할 때에,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성령께서 하시려는 대로 내어맡길 때에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오늘 내가 일하는 중에 짜증나고 화나는 부분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바람직한 모습을 성찰하고 그런 나의 부정적인 면모를 줄여나갈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의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행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나는 삼위일체와 일치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실천하는 것이…

치와와 이야기

어린 시절 놀러간 친척집에는 치와와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듯이 나역시도 그랬다. 헌데 어느날 찾아간 친척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치와와가 코너에 몰려 앞다리를 들고 벌벌 떨고 있었고 그 앞에서 친척 어른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뭘 하는 거냐고 물으니 ‘교육’을 시키는 중이라고 했다. 강아지가 집안에 싸 놓은 똥을 두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라고 혼쭐을 내는 중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마음의 아픔을 견뎌가면서 어른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다. 헌데 이제 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장면을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건 그 어른의 미숙함에 불과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수많은 방법 중에 호통과 질책과 공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들으면 넘어가고 말을 듣지 않으면 사정없이 혼을 내는 방식…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이 그 장면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건 좋지 않은 장면이라고 말해주고 있었고 다른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어린 나의 마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 역시도 미숙한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적지 않은 수많은 요소들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미숙함이 또다른 어두움을 양산해 내고 그 어두움으로 피해를 보는 무죄하고 나약한 이들이 존재하게 되는 구조. 그래서 신앙인들이 필요하다. 신앙인들은 십자가로부터 사랑을 배워 다른 이들을 구해 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질책과 힐난은 어떤 잘못을 당장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그 내면 안에 무언가 부당하고 억눌린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남아 어떤 성향, 또는 성격을 만들어내게 된다. 미숙함을 사랑으로 보듬어 스스로 분별하고 고치게 되는 것과 미숙함을 일단 ‘정지’ 시켜 놓은 사람의 훗날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우리는 완벽한 이들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

야고보 사도의 열정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야고 4,2-4)

야고보 사도의 이런 구절을 들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건 같은 말씀을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미 선하게 살고 있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악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기쁨으로 와 닿는 말이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삶이 악으로 기우는 이들, 세상의 유혹들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이들에게는 거슬림으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조금은 강한 듯한 표현들은 듣는 이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와 닿게 마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바오로 사도 못지 않게 열정이 대단한 사도였습니다. 그의 열정은 복음서 어디에 특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가 저술한 편지글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들을 구하겠노라는 열정에 가득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바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들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뚜렷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 청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가감없이 솔직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장 근본에 올바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를 반복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은 좋은데 사실 그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엮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교만이 드러…

방언/심령기도/새로운 언어

방언 / 성령을 받은 신자가 황홀 상태에서 말하는 내용 불명의 말(개신교에서 주로 쓰는 말)

심령기도(신령한 언어) / 방언의 뜻과 거의 비슷하나 추가하자면 성령을 받은 신자들이 자신을 개방하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훈련이자 드러나는 외적 기도 형태(정해진 틀은 존재하지 않으나 구체적인 소리를 내고 혀를 다양하게 놀리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해석의 은사가 뒤따른 이들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으며 잡다한 엉뚱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말’이다. 또한 그것이 올바로 들리지 않는 때도 있으며 그러한 때에는 반드시 해석의 은사를 입은 이가 이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 근거]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4)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 2,11)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도 10,46)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사도 19,6)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1코린 14,2)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1코린 14,5)

* 코린토1서 14장에 신령한 언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주된 의견이 나오니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언어 / 전에 사용하지 않던 언어. 우리가 믿음의 본격적인 생활에 이르기 전에는 낡은 언어, 즉 이해관계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세상의 언어를 하게 되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난 후부터는 성령과 사랑에 근…

질문의 의도

정말 무언가가 궁금해서 더 알려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된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떠보려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측에는 반응을 하지 않고 흘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강한 주장을 밀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던지는 자극적인 질문에 반응해주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공격적 의도가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덜 형성되었다’는 것이고 또 심한 경우에는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줄여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닌 그 영적 어두움은 스스로를 눈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르려는 악을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서 그것에 상대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또 거기에 상응해서 역으로 반응하면서 점점 싸움의 강도와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영’이 무엇인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면 우리는 그만 우리의 의지를 거기에 맡겨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옳다’고 믿고 행동했던 것이 최종적인 결과물로 어둠의 영이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둠의 영의 하수인의 노릇을 하게 된 셈이지요.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참아줍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칭하는 이들은 자신의 의로움이 진정 하느님에게서 오는 참된 의로움인지 아닌지를 늘 깨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허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난다는 이 간단 명료한 사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사실이다. 죽음이 전제되고 나면 사람은 두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죽음을 끌어안고 함께 절멸해 버리던가 아니면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맞이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의 혼란스러움이 그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떼어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죽음의 모습을, 죽음의 향기를 만날 수 밖에 없다.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에서, 마주하게 되는 병자들의 모습에서, 또 죽은 친지들과 친구들에게서 인간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으면 그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고 애써 다른 대체물들로 그 빈공간을 메꾸려고 한다.

그렇게 다들 살다가 죽어간다. 흩날리는 먼지처럼 공허한 삶이다. 저마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 외쳐대려 하지만 결국 공허로 돌아가는 삶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올바로 성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공허한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이런 공허 가운데에서 희망의 속삭임을 들려준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뒤에 오히려 본질적인 생이 시작된다고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무지와 교만은 스스로를 가장 현명한 이로 생각하게 만들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고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 안에는 어둠의 영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이 공허의 세상 속에서 참된 충만함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세상에는 영원을 살아가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영원에 초대하고 계신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체험적인 지식

제가 지금껏 선교사로서 또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말씀 선포자로서 현장에서 느껴온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람들의 영적 갈증
사람들은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목마르지 않아서 아무것도 찾지 않거나 단순히 게으르고 무지해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목마름을 느끼고 갈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내어주는 손길이 부족해서 그 상태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2. 복음의 기쁨
복음에 대한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말 그대로 복되고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는 물론 받아들이는 대상자에게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이지만 먼저는 선포하는 이가 복음의 순수성과 핵심을 올바로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여러가지 가르침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의무적인 것’, ‘기피하고 싶은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쁨을 올바로 회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부족한 자각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능력이 없다고 느낍니다. 즉, 복음을 알고 전하는 데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 부류에게만 복음을 알고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알게 된 모든 이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 실천자,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각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4. 능동적인 선포
선포는 더이상 수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선포는 한 지점을 정해두고 기다리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당 안에 모여 들어야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지닌 이가 다가서는 모든 곳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다가서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복음에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가서는 시기는 이미 흘러가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소통을 하기 위한 과학 기술은 늘어…

나는 나를 아는가?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숨어 있습니다. 물건의 가격을 묻는 사람은 그것을 사고 싶은 의향을 이미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관심도 없는데 공연히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 산란한 사람이거나 의도적으로 주제를 흐리려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대화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로는 그 사람의 중심 생각이지요. 그가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가 일상 대화 안에서 거의 드러납니다.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것을 대뜸 주제로 꺼내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의 영적 생활을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그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음식 이야기 하나로 몇시간 동안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정작 자기 자신의 참된 내면에 대해서 전혀 드러낼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내면은 음식에 대한 욕구 말고는 드러낼 것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안에서 사 먹는 음식이나, 보아야 하는 영화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일들은 우리가 드러내기 꺼려하는 영역 안에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의 영적 영역입니다. 인간의 소홀함과 오류가 쌓여 삶의 괴로움이 형성되는 부분이지요.

우리는 이런 숨어 있는 영역들을 서로 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주제들 뒤로 정말 자신들이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할 부분들을 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드러내기 힘든 영역, 과연 우리는 누구와 그것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의 관심사가 온통 잡다한 것들에 …

저만 알던 거인 - 오스카 와일드

아이들은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거인의 정원에 가 놀았다. 그 정원은 푸른 잔디가 깔린 넓고도 매력적인 정원이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꽃이 되었고 별이 되었다. 12그루의 배나무가 있어 봄에는 분홍빛, 진주빛 꽃망울이 터졌고 가을에는 달콤한 과일이 열렸다. 새들은 나무에 앉아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그 노래를 듣곤 하였다. "정말 행복해!" 아이들은 서로서로 외쳤다.
어느 날 거인이 돌아왔다. 그는 7년전 친구인 코니시 가(家)를 방문했었고 거기에 머물렀었다. 그 7년간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하겠다고. 그리고 그러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는거야?" 거칠게 소리 질렀고 아이들은 도말쳤다.
"내 정원은 나만의 정원이야. 나외에는 아무도 놀 수 없어.".
그래서 그는 정원 주위에 높은 담을 쌓았고 게시문을 붙였다. [무단침입자는 고소함] 그 거인은 매우 이기적이었다.
이제 불쌍한 아이들은 놀 곳이 없었다. 길에서 놀려고 했지만 너무나 더럽고 돌 투성이였다. 그래서 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방과후에는 높은 담 주위를 배회하며 저 안의 아름다운 정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저기가 좋았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