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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사람을 사로잡는 악마적인 수단

악마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방법은 ‘공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공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속박 당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악마는 바로 그 공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구속시키는 것입니다.

악마적인 수단에 익숙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공포로 제압하려고 합니다. 헌데 이 악마적인 수단은 극단적인 수단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공포의 수단은 일상의 압박으로 이루어집니다. 엄마들이 자녀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억압에 길들어가기 시작할 때에 그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 엄마는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 안에서 가장 악마적인 수단을 계속해서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화하는 것보다 겁박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쉽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악마적인 방식은 ‘기만’입니다. 속임수를 써서 상대의 선한 의지를 얻어내어 자기 목적대로 사용해 버리는 것이지요. 악마는 가장 거룩한 이들에게도 빛의 천사를 가장해서 원하는 목적,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목적을 달성하곤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로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아픈 척을 하면 다른 이들이 신경써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아픔을 과장하는 것, 바로 기만의 한 방법이고 악마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식의 방식에 길들게 되면 일상이 늘 허품과 과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아프지 않은데 아픔을 과장하고 실제로 받은 피해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과장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악마적인 방식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그래서 언제나 뭔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억압당하는 이들은 당연히 느끼는 것이고 기만당하는 이들도 사랑으로 뭔가를 해주기는 하지만 알지못할 찜찜함이 남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

성경을 읽는 법

성경을 올바로 읽으려면 당연히 그것을 쓴 사람의 의중을 올바로 분별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수천년 전에 죽은 이들에게 가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성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바로 ‘성령’과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됩니다.

성경은 언제나 출발점을 하느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가장 완전하신 분, 오류가 없으신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그 출발점을 찾아서 읽어 나가야 하고 의문나는 점이 있을 때에는 가장 완전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출발점을 삼아서 그 의문에 대한 해소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크게 어긋남 없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여러분의 지혜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질투하는 하느님’(탈출 20,5)에 대해서 읽으면 우리는 곧잘 그 출발점을 우리 자신에게 둡니다. 헌데 우리는 질투라는 것을 굉장히 어두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질투’라는 단어 자체를 어두운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질투하는 하느님’을 해석하면서 하느님 자체를 추한 행위를 하는 분으로 간주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오류의 근본에는 ‘나 자신의 합리성’에 대한 굳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출발점을 가장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느님에게서 시작한다면 이 ‘질투하는 하느님’에 대한 부분을 전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질투라는 단어의 올바른 이해와 더불어서 하느님의 질투 자체가 당위성을 지닐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지요. 원래 하느님의 몫이었던 당신 백성에 대해서 하느님은 질투를 할 수 있고 당신의 질투는 거룩하고 선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출발점이 완전히 다르기에 전혀 다른 이해가 도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지만 성경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 합당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학위가 높다고 해…

기적과 재앙

기적은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기계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어느 수준에 이르러 반드시 기적이 필요한 때가 되어 하느님이 반드시 해 줘야 하는 기적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순리’에 맡겨져 있습니다. 물론 그 ‘순리’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의 순리에 따른 결과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악을 실천하는 이도 악의 순리에 따른 결과를 입게 되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는 악이 선을 압도하는 듯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영원’의 결과물을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영원 안에서 악은 반드시 악의 결과물을 입게 되고 선은 선의 결과물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기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이 기적은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볼 줄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내 배우자가 무사히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기적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별다른 난항이 없이 진행되는 것도 기적의 손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해서 기적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곧잘 신기한 일, 기괴한 일을 바탕으로 기적을 가늠하려고 드니까요.

반대편에 ‘재앙’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재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앙은 순리에 따른 악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당신의 자비로 그것을 늦춰주고 계셨거나 참아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재앙의 이면에는 수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이미 벌써 자신을 소홀히 돌보아 온 결과로 죽어 마땅한 생명인데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헌데 그들은 그런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에 재앙이 닥쳤다고 투덜대지만 …

자녀를 사랑스러이 바라보는 하느님

오늘 찾아온 분에게 ‘신앙’에 대해서 알려 드려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는 중에 갈길을 잃고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사용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시면 어떠세요? 때로는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어머니는 인내로이 아이들을 지켜봐 주시지요.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하는 일이 악에서 나온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아이들은 원래 미흡하고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기 때문이에요. 바로 그 어머니 자신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배우시게 되기를 바래요. 하느님은 우리를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봐 주시니까요.

설령 주님의 기도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앞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우리는 서서히 배워나가게 될 테니까요.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보세요. 부족함이 있으면 도와주시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엉뚱한 걸 강요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서 있는 높은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불안하게 만들어요. 늘 우리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구원을 얻기에 모자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신앙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기쁨이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실천해 나가면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말마디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어린이 미사

부족한 과목이 있으면 그것만 따로 교육을 시키는 곳을 ‘학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학원은 원래 기본 교육이 제대로 되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기본 교육의 수준을 벗어나서 자녀들을 ‘특별히’ 더 잘 하게 만들어서 좋은 대학에 넣고 싶은 부모들의 욕심이 더해지는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학원’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학원이 없는 학교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래 미사는 하나입니다. 어린이 미사, 청소년 미사, 청년 미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미사는 하나의 동일한 미사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예식이고 기쁨과 감사의 축제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어느 미사를 가던지 미사는 모두 똑같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드릴 수 있습니다. 헌데 어느날에서부터인가 특정 대상을 위한 미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미사는 한 측의 미사와 다른 측의 미사가 너무도 달라 보여서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특별히 ‘어린이 미사’라는 것이 그 특이성을 한층 더해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드릴 수 있도록 허락된 어린이 예식서가 보편화되고 일상화되면서 그 ‘어린이 미사’가 전부인 양 치부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특화’된 미사를 선사하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역으로 어린이들이 소위 ‘어른 미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내게 되었습니다.

미사가 갈라지면서 당연히 가족들도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주일이면 가족들이 한데 모여 미사에 가던 풍경이 변하게 되었고 어린이는 어린이 미사에, 청소년은 청소년 미사에, 청년은 청년 미사에, 어른들은 교중미사에 ‘가야만’ 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오손도손 미사에 가려고 해도 제 또래의 미사가 아니면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신앙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교리교육은 ‘부가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들은 …

모든 것의 기초

우리가 배우자를 찾고자 상대를 바라볼 때에 많은 것들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조건’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사랑의 지속은 그 조건의 지속과도 같습니다. 조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사랑이 지속되는 것이고 그 조건에 심각한 피해가 가해지면 둘의 사랑은 흔들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가정에는 바닥을 드러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치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무너뜨리듯이 우리가 상정한 조건들을 이리 저리 흩어보면 그 바닥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그 바닥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너지지 않는 바닥’, 즉 ‘반석’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반석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최고의 조건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위태로운 건축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번지르르한 건물을 쌓는다고 해도 축대가 무너지면 그 건물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무너지고 말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튼튼한 축대를 기초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가정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뒤늦게서야 이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늦게라도 깨닫는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눈이 가리워진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상대가 가진 것을 사랑할 뿐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위태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인간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에 해당하기도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일이 최종적으로 나에게 어떤 것을 안겨줄지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높은 탑을 쌓더라도 근본이 무너져버릴 탑이라면 나에게 남는 것은 절망 뿐일테니까요.

여러분의 기초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 세속적 성공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보장한다고 믿으시는지요? 저는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의 이름에 희망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제 희망이 반드시 보상 받으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었을 터인데…

처음부터 미친듯이 엇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악한 영에 개방하여 그 영에게 주도권을 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강렬한 어둠의 영의 조종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미미한 조짐만이 보일 뿐입니다.

누구나 다 하는 것 정도의 탐욕과 이기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엇길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생겨난 탐욕과 이기심에 또다른 탐욕과 이기심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탐욕과 이기심을 꾸준히 유지하여 고착화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옷에 묻은 이물질을 금방 씻었으면 나아졌을 것을 그냥 그대로 두어 딱딱히 굳어버린 얼룩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음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심한 것들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마음은 곧잘 분노, 격분에 시달리게 되고 거짓을 밥먹듯이 하게 되며 선한 일에 둔해지고 악한 일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내면에서 서서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 크나큰 죄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내면에서 힘을 견디던 지지대가 뚝! 하고 부러지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뭔가 큰일이 났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하느님을 찾고 사제를 찾아서 방황을 시작합니다.

흐르는 수돗물에 잠깐 옷을 빨면 되었을 일을 이제는 세제를 구하고 표백제를 구하고 특별한 세탁 기법을 써야 겨우 옷이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얼룩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옷을 빨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옷이 그렇게 더러워져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도대체 누구에게 자신의 옷을 맡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엉망이 된 마음을 이끌고 소위 ‘용하다는’ 사람은 모조리 찾아 다닙니다. 그렇게 더듬거리며 찾다가도 때로는 참된 예언자를 만나기는 하지만 정작 그를 만나도 신뢰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온통 거짓과 위선이 가득…

신앙을 잃었다는 이들

자기 심장을 잃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것도 그것이 제대로 형성되고 나면 잃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신앙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거나 혹은 참된 신앙이 아닌 엉뚱한 것을 '신앙'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을 놓아버린 사람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도대체 어디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까? 하지만 신앙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이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다른 경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은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지요. 이들의 경우는 조금은 복잡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이 교회를 왜 만드신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완벽한 교회를 만들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교회 구성원들이 늘 부족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부족함이 있는 교회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부족함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서 참된 가치들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케이스는 게으름이 섞인 이기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에는 열정적으로 임하지만 어떤 공동체에 소속이 되거나 의무를 다하는 데에는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취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고는 싶지만 그 구원에 필요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해방되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느님은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열매는 전혀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교회를 떠나서라도 참으로 진실된 사랑에 헌신하고 봉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을 되새긴다면 원하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게으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를 벗어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악습을 꾸준히 형성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영혼의 순수성

인간의 육체는 하자를 지니고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성향이 강화되거나 약화된 채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자유의지’는 어떨가요? 영혼에도 하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건 영혼의 창조자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온전히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세상’ 안에는 질병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서 바로 그 세상 안에 독이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지요. 그와 더불어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오류들도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선물하시는 영혼이 그 자체로 하자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손길을 의심하는 것이지요. 영혼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간에게 선물되고 남은 일은 우리가 그 영혼을 가꾸어 나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선한 의지를 꾸준히 실천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더욱 선한 일에 밝아지고 활성화되게 될 것이며 반대로 악한 의지에 마음을 쏟는다면 우리에게는 악이 더욱 활성화되게 될 것입니다.

그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담기는 육체와 정신에는 시작부터 부족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올바로 작용한다면 모든 부족함은 더욱 훌륭한 내적 가치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육체적 부족함은 그에 상응하는 영혼의 의지의 노력으로 더욱 훌륭한 내적 가치인 인내를 자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부족함을 악으로 수용해서 더욱 세상에 어두워지고 부정적인 영혼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완벽함’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곳에 태어날 수도 원하는 부모를 고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육신을 고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특정 영역을 반드시 수용하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여기서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

인간의 존재 목적

핸들이 빠진 차는 그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는 곳마다 들이 받으며 상처를 입힙니다. 물론 속도를 줄이거나 범퍼를 키워 충격을 예방할 수는 있겠지만 방향 자체가 상실되어 있기에 결국 어디든 가서 들이받게 되는 현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아무리 인격을 함양하고 아무리 속도를 제어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 일은 일어나고 맙니다.

자동차는 어디를 가기 위한 뚜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의 고유한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홀로 창조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라고 창조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채우는 사람이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외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아무 가치도 없게 됩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데 아무리 훌륭한 다이아몬드를 가져온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맛있는 빵을 위해서는 질 좋은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분명 목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에게 여쭈어 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 목적을 뚜렷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방황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올바로 깨닫고 나아가 아직 그 초대를 듣지 못한 이들을 열심히 초대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열심히 사랑을 키워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내버려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제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내버려 두지 마세요.”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습니다. 배우자가 신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일 미사는 겨우 나오는데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버려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내버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분은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시더군요.

우리는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싫다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의 성에 차지 않는 조급한 마음을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서 상대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의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상대에게 적합한지 아닌지 우리는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내 성미에 못 이겨서 상대를 끌어당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초대와 끌어당김을 내려놓지만 그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다른 방향의 초대를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기도’를 해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도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 안에서는 기도가 굉장히 나약해 보이고 미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버려두지 말고 영적으로 상대를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상대가 숨막혀 하지 않게 내버려 두십시오. 본인 스스로의 조급한 마음도 내버려 두십시오. 하지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더욱 긴밀하게 영적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갈구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에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난한 이를 속이는 자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아모스 8,4-6)

제가 언제나 말하듯이 성경은 ‘영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표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빈곤하고 가난한 이들은 영혼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짓밟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영혼의 가르침을 기다리는데 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가뜩이나 힘든 현실을 더욱 힘든 환경으로 조성해 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이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곡식을 내다 팔기 위해서 초하루가 지나야 하고, 밀을 내놓기 위해서 안식일이 빨리 지나야 합니다. 초하루와 안식일은 유대 교회의 고유한 절기로 거룩한 시간들을 의미합니다. 즉, 이들은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시기보다 오히려 놀러 다니고 자신의 쾌락을 채우는 활동을 하기를 더욱 기다리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억지로 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에파와 세켈, 그리고 가짜저울이 의미하는 것은 측량 단위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이들을 속이기 위해서 언제든지 거짓된 위선과 허풍을 떨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값도 나가지 않는 것을 값이 나가는 것으로 만들고 반대로 값이 나가는 것을 값이 나가지 않는 것으로 뒤바꾸어 버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렇게 하면 정말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은 헐값에 팔아치우고 하느님 앞에 소중하지도 않은 것을 크게 부풀려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 참된 하느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내어드리는 것을 가로막고 속이는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힘없는 자와 빈곤한 자를 값도 안되는 것으로 사들여서 제 맘대로 부리려고 들고, 또 정작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없는 지스러기…

(중요) 미움을 자행하는 이와 미움을 받는 이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미움, 미워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된 말입니다.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이 없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상대를 향한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파괴되고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라져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상대가 내 범주에 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손이 느끼는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손이 신경이 마비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즉 그 손은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움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워할 수 있는 수십가지 이유를 누군가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미움을 실행하는 이는 우리 자신의 의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의지’이듯이 미움 역시도 일종의 ‘의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기를 결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미움’은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하는 내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언제 어떻게 일어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요소인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는 역으로 미워할 만한 100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서 역으로 더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약한 이에게 사랑은 ‘조력’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잘못을 의지적으로 자행하는 이에게는 ‘충고’ 또는 ‘경고’로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소중한 ‘돌봄’, ‘사랑’, ‘애정’과 같은 보물을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는 돼지들이나 개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같은 보물을 받고도 그것을 물어뜯고 도리어 우리를 공…

구원은 진행중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래서 특정 종류의 일은 ‘불가능’하게 상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제가 ‘마라톤’을 완주한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일어날 일이 미래에 있는 일이고 나에게 그것을 준비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결과는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오늘부터 작정을 하고 운동에 돌입한다면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는 마라톤을 뛸 만한 충분한 체력과 자심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을 이루어내겠지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라는 것이 요원한 일처럼 보여집니다. 여전히 우리는 악습에 사로잡혀 있고 선이라고는 제대로 실천해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드높은 목표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루하루 자신의 악습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해 나가는 사람과, 자신의 악습을 끊어내려고 노력하고 작게나마 성공을 이루는 사람은 훗날 자신들이 집중하는 그 노력이 시간이 흘렀을 때에 어마어마한 격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수술을 받고 한동안 맛있는 음식과 충분한 휴식으로 인해서 몸이 91키로에 육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무게가 그 정도 나가자 만성피로와 무기력증이 끝도없이 밀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몸무게는 제 복음선포의 열정을 넘어뜨릴 수는 없었고 그 와중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건강이 필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술을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약소하나마 운동도 하고 가능하면 음식도 건강한 음식으로 섭취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노력은 훗날 결실을 맺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활기차게 전할 수 있는 육체적 준비를 갖추어 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상정한 몸무게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에, 저의 노력이 결실로 드러나…

날더러 수도자가 되란 말인가?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편 30,6)

하느님은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의 악행을 마냥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를 시험하는 악인들은 언젠가는 그분의 진노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진노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꾸준한 자비가 존재하고, 또한 언제라도 인간이 뉘우침을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분의 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자비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은 자신이 도대체 누구 앞에 대적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눈을 가려 버립니다. 그래서 자비를 갈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주님의 진노를 앞당기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진노는 당연히 주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진노로 인해서 다른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다시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아침이 새로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언제 하더라도 얼마나 하더라도 부족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체험해 본 결과로는 사람들은 그 말을 질려하고 예전의 이집트에서 먹던 맛난 음식들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더러 수도자가 되란 말인가?”

천만에요, 그렇게 되지를 바라지도 않고 또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은 그렇게 될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와서 지금의 소위 ‘위선적 거룩함’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거룩한 이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이런 제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다해서 이런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침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