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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일어나는 일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9)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합니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었고 구해 주셨지만 그의 육신은 적대자들의 음모와 죄악에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구원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세상의 고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니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지 세상 안의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놀려댈 것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믿는다더니 꼴이 좋구나!’ 하고 놀려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을 때에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오해와 왜곡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삶을 지속해 나갑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구원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참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통해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세상 안의 어느 지점이고 그것이 모든 이들의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도 그 길을 기꺼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고 그래서 오직 믿는 이들만이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들을 성인으로 추대하고 신앙인들은 그들을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맞서는 이들은 우리가 내적으로 지닌 진리와 성실과 책임감, 선함과 의로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식탁

잘 모르던 어떤 부자가 한 상에 100만원짜리 식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밥을 먹는 내내 옆에 종업원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접대를 하고 혹시 뭐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더 가져와야 하는 것은 없는지를 묻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걸 다 먹고 나니 배가 찢어질 듯 아프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리를 우리는 ‘가시방석’이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 식사의 자리는 외적 화려함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 하는 이들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사이라면 설령 음식이 치킨 하나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리는 편안하고 푸근하게 마련입니다.  남미에서 반미사를 드리고 미사를 마치면 그 미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집에서 소박한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가난한 참석자들이 다 똑같은 음식을 받아 먹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는 유쾌하고 재미납니다. 아이들은 나와 제 부모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치고 어머니들은 제 앞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라며 아이들을 부추기기도 하고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외운 주님의 기도를 옹알거리며 바칩니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식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유명 백화점의 옷가게를 아무리 둘러본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찾기 힘든 것을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해진 옷을 죄송스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진 영혼을 죄송스러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옷매무새를 고칠 줄 알면서 정작 영혼을 돌볼 줄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일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불가능을 이룰 수 있는 힘

여러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인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미리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이라는 근거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훌륭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가장 주도적인 힘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의지’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안 될 일도 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서면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손가락을 네 개 가진 소녀가 피아니스트가 되거나 두 팔을 잃은 이가 두 다리로만 일상을 유지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의지’를 통해서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의지를 자극시키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신앙’만큼 훌륭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의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케 생각하게 도와주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실천할 의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의지와 가장 강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곧 의지의 활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끌리는 사랑을 찾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심지어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케 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우리를 선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랑으로, 그것도 주님의 사랑으로 맞추어 나가고 훈련시켜 나갈 때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즉 저마다 자신의 이기성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당연히 다른 의지와 맞부딪히게 되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관점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과 따르지 않는 이들, 즉 하느님의 의지를 따르는 이들과 그에 반해서 자신들의 이기성을 추구하

심리학의 한계

현대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영역을 단순히 ‘학문’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듯이 대합니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딪히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합니다. 즉, 선과 악의 차이가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를 뿐이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며 그 안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 심리학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오류입니다. 이들은 흔히 서로의 성격 유형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걸 바탕으로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그 모든 학문적 영역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영역을 거기에 내던져버려도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한 선과 악의 추구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것이 악한 행동인 줄을 본인은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행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행동이 수치인 것을 알기에 그에 대한 수없는 변명을 하곤 합니다. 반면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악은 교묘하고 영리하고 기민합니다. 마치 양파처럼 몇 겹이나 자신을 둘러싸고 안에 들어있는 시커먼 욕구를 감추려고 하지요. 반면 선은 명료하고 뚜렷하고 천상의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숨길 것이 없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언뜻 남을 도우려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뜻 성경을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학적 교만을 채우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 생활에 충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다른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기초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어둠의 활동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선과 악의 방향은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은 저마다 그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

선택과 결정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 될 일을 미뤄두고 또 미루어 두다가 결국 그 일의 본질이 추구하는 바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비빔국수를 오른손으로 비벼야 할까 왼손으로 비벼야 할까? 도대체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될 것인가? 중요한 건 비비는 것이고 면이 불기 전에 먹는 게 중요한 법이다. 엉뚱한 것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면이 퉁퉁 불어버려 원래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불어터진 면을 억지로 먹어야 한다. 선을 실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의심없이 용기있게 실천하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고 더욱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면 될 문제이다. 하지만 선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마찬가지로 선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기도를 바칠 것인가 하는 것은 둘 중 뭐든 해보면 된다. 그래서 하나에서 일이 잘 안풀리면 다른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생활 안에서 사람들이 선택을 고민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선과 악의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라 교묘하게 뒤섞인 가치들의 선택의 문제이다. 남편에게 충고를 해 주는 게 좋을 것인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는 게 좋을 것인지는 그 두 행위를 하려는 근본적인 의도에 달려 있다. 둘 다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면 해보면 된다. 하지만 사실 그 안에 내가 답답해서 그걸 해소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거기서부터는 내 안의 욕구가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것인지를 살펴보면 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다. 아는데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힘들어서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부족한 것이다.

정말 힘든 문제일까?

초등학생 수학에나 사용되는 덧셈과 뺄셈의 오류를 우리가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카이스트에 다니는 대학생이나 알만한 내용의 오류를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교회 내의 영역 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때리면 되느냐 안되느냐를 두고 고민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 다단한 교회법에 해당하는 사연을 지닌 이가 다가와서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하는 유형의 질문은 당연히 복잡함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고차원적인 문제는 고차원적인 이들에게 맡겨서 도움을 얻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고차원적인 문제를 고심할 이유는 크게 없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쉬운 일인데 복잡하게 간주해서 손을 놓아버리는 경우’입니다. 직장 안에서는 복잡한 프로젝트에 매달려서 수많은 시간을 고심해서 일의 해결점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멀쩡한 사람이 성당에만 오면 초등학생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당장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분명한 일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주저하고 있게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펴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매진하면 됩니다. 헌데 그분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해 버리면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가 뒤섞여서 하느님의 일로 포장될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이 너무나 좋은 레지오 간부가 회원들에게 레지오 주회는 ‘끝까지’ 참석해야 한다면서 술자리를 종용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을 바탕으로 ‘레지오’라는 거룩한 신심행위를 더럽히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마주한 수많은 신앙 현안들이 반드시 전문가의 분별이 필요한 사안일까요? 아니면 그 일만큼은 내가 하기 싫어서 미뤄두는 것일까요? 성당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마태 3,9) 간단한 이야기를 한 번 해 봅시다. 여러분이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수박을 사기 위해서 수박이 늘어선 과일코너에 가지요. 그리고는 수박을 하나 집어듭니다. 왜냐고 물어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수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집어든 수박이 여러분이 상정한 기준에 합당하기를 바랍니다. 즉, 싱싱하고 맛이 들어 있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몇가지를 검증합니다. 두드려서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꼭지가 싱싱한가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금 갈라서 속의 내용물을 보기도 합니다. 헌데 여러분이 정한 그런 기준들에 부합하지 않는 수박이라면 여러분은 다시 그 수박을 내려놓고 다른 수박을 집어 들겠지요. 위의 성경 구절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물론 유대인들을 고르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는 그것을 검증하셨습니다. 헌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에 거꾸로 속이 곯아버린 수박이 되고 말았습니다. 쓸모없는 수박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이 두번째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이나 육욕에서 비롯되는 이들이 아니라 거룩한 영에서 태어나는 이들입니다. 영과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를 외적인 틀에 묶어두려고 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지요.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이어받아 지상에 세워진 저승의 세력도 무너뜨리지 못할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올바로 소속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 형식과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 살 때’ 가톨릭 교인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할 때

속을 들여다보기

로봇에게 센서를 달아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80년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센서를 달아준다고 해 보아야 그 수준에 맞는 센서를 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수준의 화면을 인지하는 센서를 가지게 되겠지요. 만일 오늘날 로봇에게 최신의 센서를 달아준다면 그 로봇은 수만가지의 색상을 분별하고 세밀한 모습을 분별하는 센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기술이 그때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분별력의 섬세함이 너무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영혼을 당신의 영혼으로 바로 바라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누가 따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내면이 변해가게 되고 영적인 정밀도도 더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을 더 쉽게 피하게 되고 반대

네비게이션으로 어느 장소명을 선택을 하고 길을 찾는데 목적지가 한 10군데쯤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길을 찾아준 게 아니라 길을 잃은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영역을 제시하라고 하는데 한 100가지를 들이민다면 우리는 길을 잃은 셈입니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지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선다면 우리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목적이라 해도 길을 잃은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인 틀 안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만을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행위라고 착각하지는 맙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고 우리의 길을 점검하게 하는 데에 훌륭한 도움을 주는 수단이지 하느님에게로 무조건 다가가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참된 속성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고 다른 표현들로 진리, 생명, 영원과 같은 것들이지요. 우리가 바로 그 길을 따라갈 때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 이들이 되고 마음 속에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지니게 되며 바로 구원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러분에게 여러가지 길을 제시할 것이고 그 길의 숫자는 수백만가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길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화장품을 새로 나온 좋은 걸 써야 한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컴퓨터가 최고라고 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런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이런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의 욕구에서 그럴싸 해 보이는 것을 언급할 뿐이지 진정으로 그들이 길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길을 잃게 되고 또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이끄는

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헌데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와의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다시 그 상대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필요가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력해야 합니다. 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관계, 혹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다가옵니다. 고해사제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그로 인해서 또다시 그들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길을 선택하려

고해소 천태만상

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의외로 굉장히 적습니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때가 되어 오거나 외적 죄의 틀에 어긋난 행위를 구체적으로 했기 때문에 오거나 남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오거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그 모든 이들을 품어 안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품어 안는다는 것이 그들이 고해소 안에서 어떤 것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품어안음은 영혼에 대한 연민을 말합니다. 즉, 모든 죄를 고백하는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기본적인 관념이지요. 하지만 그 품어안음은 구체적인 면에서 서로 달라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위로’를 원할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아파하고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품고 교회 공동체 앞에도 그러하다면 그는 이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짐작하다시피 많은 이들은 이런 태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일찍부터 알고 계신 하느님과 논쟁을 벌이러 옵니다. 하느님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서 고해소를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논쟁은 고해소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 사제에게 자신이 하는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 받고 싶으면 고해소가 아니라 고해소 밖에서 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모종의 토론을 하고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던지 아니면 사제에게 설득 당하던지 해야 하겠지요. 헌데 사람들은 이러한 논쟁거리를 고해소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담판을 지으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서 죄가 없다고 믿는다면 고해소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고해소는 죄가 없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데 고해소에 들어와서 자신이 죄 없음을 끊임없이 항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해소를 무슨 사법기관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누구 앞에서 고해를 보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제는 여러분의 소송 내용을 듣고 판단을

살아있는 빵

배가 고픈 사람들은 빵을 찾습니다. 그 빵은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요소들입니다. 더 많은 재화,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권력과 같은 요소들입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빵이고, 그래서 자신들 앞에 있는 구세주, 이미 그들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 준 구세주에게도 그 빵을 더 내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곧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빵에로 다가와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몸에게 유익함을 주는 빵은 입으로 받아 삼키지만 하느님의 생명의 빵은 구체적인 실천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망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빵이 그들에게 즉각적인 즐거움과 삶의 안정을 주기는 커녕 도리어 십자가로 느껴지고 부담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빵을 구체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려면 그분이 살아가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빵을 거부하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그 빵은 여전히 우리 앞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원하는 이는 누구나 다가가서 믿으며 그 빵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생명의 빵을 원하고 그 생명의 빵이 우리에게 인도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진짜 빵만을 찾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안락하고 더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다보니 결국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맙니다. 하지만 그들의 안락함과 편안함은 그들의 육신과 함께 썩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노인 사목에 대한 소고

현대 사회는 노인을 마치 기운이 다 빠져버린 더는 쓸모없는 존재처럼 간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노인의 시기야말로 한 개인이 신앙에서 가장 활짝 꽃필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관점을 올바로 인지시켜 주는 곳은 없지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노인 사목의 방향도 단순히 교회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해서 그 시간을 메꾸어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진정한 ‘복음화’에로 노인들을 이끌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화와 죽음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껴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영적 갈증을 메꾸어줄만한 의식있는 지도자들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서 교회의 노인 사목은 세상의 노인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소한 노인 프로그램으로 대체되거나 동아리활동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실 이는 단순히 ‘노인 사목’의 현실이기보다는 교회 전체가 맞닥뜨리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 참된 빛과 짠맛이 없을 때에는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외적인 형태에만 치중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마련이니까요. 어르신들이 진정으로 복음화되고 일상의 삶 안에서 그 복음을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분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면서 행복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기쁘게 체험하는 신앙을 다음 세대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전파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가족 전체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일 텃밭이 되어 가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르신들을 올바로 사목하는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노인 사목에 대한 의견을 댓글에 달아주세요. ^^)

예언에 대해서

예언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질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적인 범주 안에서 예를 들자면,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대는 사람에게 건강이 상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주는 것이 바로 예언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일상적인 범주의 미흡함이 가중되면 사회적인 결점이 되는 것이고 결국 공동체 전체에 해를 입히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어 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릇된 점을 돌이키도록 도와주는 것도 예언이지만 참된 길을 걷고 있는 이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도 예언입니다. 즉, 신앙 안에서 인내하며 현재의 고난을 견디고 있는 이에게 이 고난이 지나가고 반드시 밝은 미래가 펼쳐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훌륭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언자는 입으로만 예언하지는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서 그 예언의 실행을 도와야 합니다. 예언이랍시고 점집이나 찾아가는 것은 절대로 삼가해야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 성령 기도회 같은 곳에서 으스대면서 다른 이에게 예언을 해주겠다고 하는 이의 말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예언을 하기보다는 눈 앞에 있는 절박한 필요의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그런 이들은 참된 하느님의 길을 그 앞에 펼쳐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유명세가 확장되기를 바라면서 헛된 예언을 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정이 모난 나머지 남편과 하도 싸워서 이혼을 준비하려는 여인에게 훌륭한 예언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정을 지키라는 것이지 몇 월 며칠에 갈라서면 딱 좋다는 식으로 말을 해 주는 것은 그저 그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에 따라서 자신들을 이끌어 줄 헛된 예언자들을 찾아다니기 일쑤입니다.

맞닿은 시간

여러분이 누군가를 미워하려고 할 때에 여러분의 시간은 같은 행위를 실천하려고 하는 다른 이들과 맞닿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전에 반복했던 오류를 여러분들이 반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겠노라고 결심할 때에 여러분들의 시간은 과거에 같은 행위를 실천한 이들, 또 미래에 같은 행위를 실천하게 될 이들과 맞닿아 있게 됩니다. 예언자가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언자에게 물을 건네면서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 물을 건네게 되면 그는 예언자가 받는 상급을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은 거룩한 시간에 맞닿아 있게 되는 것만큼 축복된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하느님을 전해주는 이들을 찾게 되지요. 그리고 그 둘은 만나게 됩니다.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기뻐하는 이유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저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저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오면 그들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우리의 공간은 초월적인 것이라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고 다른 세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간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시간을 시작해야 하고, 예수님과 가까이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의 시간으로 이끄실 것이고 영원한 나라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시간과 장소에 머무르는 만큼 그분을 더 이해하게 되고 그분이 이끄시는 방향을 기꺼이 수용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신앙생활

내가 전혀 기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을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런 상태에서 뭔가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코미디 프로에서 발견하게 되는 계산된 발작성 웃음일 뿐입니다. 오로지 참된 기쁨만이 다른 이에게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실패하는 영역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를 기쁨으로 인도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그 기쁨을 줄 수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고 그분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타인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쁘지 않은 신앙인들은 신앙생활도 전혀 기쁘지는 않으면서도 뭔가 ‘성취하는 느낌’을 주는 신앙생활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은 기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음식을 입으로 우겨넣는 것처럼 신앙에 대해서 딱히 간절함이 없더라도 그런 종류의 생활은 내 생활 곳곳에 우겨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의미없이 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마음 없는 헛된 제물’이 당신께는 필요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외적 행위들을 가중시키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우겨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기쁨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었지요. 우리가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부족함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는 ‘은총’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은총을 우리에게 건네기 위해서 구세주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기쁨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