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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8의 게시물 표시

무엇을 갈망하는가?

최고급 승용차를 산 사람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리고 그 부러움 가운데에는 '시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그 자랑하는 친구가 쫄딱 망해 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악한 마음도 포함된 셈이지요. 그래서 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자랑으로 주변 사람들의 악한 의도를 끌어당기는 셈입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것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다가오는 대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요소를 드러내면 세속적인 마음들이 다가옵니다. 반면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드러내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루한 미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에게는 그만한 은총의 수로가 따로 없지요. 남미에서 선교를 하면서 사제의 존재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방치된 공동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의 미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비록 자기네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제라도 큰 도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 양식을 누리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우리는 많은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만' 찾아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다가갔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을 목말라했지요. 그들의 힘든 삶에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미 잘 사는 이, 이미 누릴 게 많은 사람은 그러한 위로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을 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사제의 인격

교회가 세상 안에서 힘을 지니고 있을 때의 향수를 지닌 분들이 많습니다. 동네에서 신부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고 나름 지식있는 사람이었으며 동네의 유지이기도 한 시절이 있었지요. 아직도 대형본당에서는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당연히 신자를 수천이나 거느린 지역 유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세상도 많이 성장을 해서 더이상 예전처럼 주임 사제가 동네의 식견있는 어르신이자 유지로 간주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사제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제는 사제직 그 자체로 부여받는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서 ‘인격적 성숙’도 마땅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기본도 안 된 인간’으로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직도 신자 어르신들의 향수에 젖은 대우에 길들여져서 세상 안에서 기본도 되지 못한 인격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다가는 욕을 먹기가 일쑤입니다. 사제는 어르신들에게 공손해야 하고 신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 인내심을 갖추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덕성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단순히 오랜 기간을 신학교에서 공부해서 사제직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제는 크게 인정을 얻지 못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사제는 너무나 드높은 사제직에 늘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인격적 소홀함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부도 인간인데’라는 말이 사제직의 드높음에 부족하다는 표현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인간이 덜 된 것을 감싸주는 의미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고 지나치게 화려한 취미활동에 헌신하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비흡연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거침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21,2) 사람은 저마다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뚜렷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길’ 혹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싫은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기보다는 그냥 그것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차선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 자신에게는 ‘바른’ 길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악한 이들도 자신들이 하는 선택 만큼은 자신에게는 바른 선택이 됩니다. 자신이 지닌 내면이 바라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이의 마음을 당신의 선으로 살피십니다. 그리할 때에 당신의 마음에 드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나뉘게 됩니다. 바로 선과 악의 활동 영역이 나뉘는 거지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동안에는 우리가 선택하는 활동이 모두 ‘바른 활동’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부터 각자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는 마치 멈춰 있는 물 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던 물고기들이 강물에 던져지게 되면서 강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와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 물고기로 나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바름’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바름은 단순히 우리를 고생스럽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바름이 아니라 진정한 바름입니다. 그 바름에 익숙해져 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모든 것이 올바로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속에 든 것을 알아보기

차별을 하지 말자는 주장, 혹은 관용을 가지자는 주장이 옆길로 새면 ‘선과 악’에 구분을 두지 말자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진정한 어둠의 세력의 농간이 시작되지요.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서로가 다르기만 할 뿐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악’을 스스럼 없이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워낙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겉으로 알아차리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러한 분별에는 굉장한 내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주 어린 아이, 영이 맑은 아이, 혹은 영이 섬세한 어른은 그 즉시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금방 느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고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번은 한 사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하는 일 중에 어느 특정 영역에 집중하면서 그 진의를 가려내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나 자신의 이익에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독히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전체를 보지 않고, 보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마치 길게 그어진 선 가운데 한 부분을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고는 이 선은 뒤죽박죽이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선은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하고 잘 그어진 선이지요.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그 보고 싶은 것은 벌써 우리의 내면이 결정해 놓은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느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고 있는지를 보려는 사람은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됩니다. 세상에서 멋져 보이는 모든 의견이나 활동이 다 ‘선’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의견이나 활동 가운데에는 지독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금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다음에 훗날 크게 사기를 치려

구조가 바뀌길 원하는 이들

단지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들의 내면에 같은 생각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키워나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증오와 원한을 키워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 안에 같이 머무른다고 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열렬히 따르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이라는 외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야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움직이지 않는 물은 고이게 되고 썩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맑은 물이었다 할지라도 그 물이 고여서 정체되어 버리면 썩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가도 그 신앙이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여서 ‘교만’과 ‘탐욕’에 젖어들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썩기 시작합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사랑이 절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물통을 아무리 높은 곳에 둔다고 절로 물이 움직여지는 게 아닙니다. 물은 흘러야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각자의 개인의 고유한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런 고유한 활동들이 모이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큰 틀을 뒤바꾼다고 해서 자동으로 움직임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법을 세우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틀을 바꾸면 개인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공포와 두려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손길을 받은 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사랑받는 이만이 사랑할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은 바로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겠다면서 성경을 들여다보지만 좀처럼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셨던 바를 찾아내고 그것을 뒤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큰 틀을 바꾸어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사

하느님 이거 해주세요

“우리 아들, 딸을 대학 붙게 해 주세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 청원입니다. 다만 문제는 다들 그렇게 기도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셔야 하지 않나요? 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두 나라가 싸웁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군대에 참전하고 있는 두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가 이기게 해 주세요.” 하지만 전쟁은 결론이 나고 결국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됩니다. 그럼 그들의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하느님은 승자의 기도에 손을 들어주고 패자의 기도는 내쳐버린 것일까요? 일단은 긍정적인 면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이 문제를 바라봅시다. 어려운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께 청원을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청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앞서 대학에 대한 기도나 싸움의 승리에 대한 기도나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지이고 본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잊혀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하는 행위와 하느님을 떠올리는 행위는 좋은 것이지만 그 다음 단계로 하느님을 떠올린 뒤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에 대한 주제에서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원기도는 장려됩니다. 우리가 누구나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누구나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서서히 ‘좌절감’을 체험하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본질적인 신

허용범위

깔끔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하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치웠는데도 매의 눈을 가진 엄마의 눈을 피하기는 힘듭니다. 사실 자녀들은 큰 쓰레기만 치워 놓으면 평소의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엄마의 결벽증을 견뎌낼 수는 없는 셈이지요.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 여성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또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시끌시끌합니다. 이런 종류의 목소리는 늘 있어왔고 세상은 그에 발맞추어 변화되어 왔습니다. 아픈곳에서는 신음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 신음을 듣게 되면 움직임이 시작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바뀌어야 할까요? 어느 선이 적정선일까요? 모든 이의 바람이 일시에 충족될 수 있을까요? 그 바람 자체는 정당한 것들일까요? 그런 여러 바람과 일들에도 하루는 지나가고 또 내일의 새로운 태양이 밝아옵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서 가장 활발히 일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하느님의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세상 안에서 인간의 ‘이기심’에 좌우되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활동 안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재앙’인 것도 포함이 됩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원래 정해진 힘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원래 그리 되도록 한 것인데 인간들이 탐욕으로 인해 뿜어대는 여러 결과물들이 거기에 영향을 미쳐서 재앙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진정한 의미의 재앙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뭐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사람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뭐가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삶을 필두로 무언가를 바꾸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고 자기 게시판에 온갖 정치적인 글로 도배를 한다고 나라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실제

싸우지 마십시오

악인도 눈치라는 것이 있어서 완전 백프로 무결한 사람에게 좀처럼 대들지 않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에게 일어났지요.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소소한 오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흠도 티도 없이 소송에까지 휘말리는 일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뭔가 일이 있었는데 나의 탓이 그리 크지 않은데 상대가 우길 수는 있겠지요. 악인들도 자신들이 크게 성가시지 않은 이상은 크게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악한 의도와 더불어서 ‘게으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어떤 일에 자신의 악을 본격적으로 저지르는 것은 상대의 어느 부분에 자신의 악이 부딪혀서 충돌을 빚어내게 될 때 시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공기’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기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을 그 자체로 감싸 안아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정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일종의 ‘영적인 공기’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상대의 모든 영적 활동을 기꺼이 감싸주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은 거의 충돌 없이 지냅니다. 충돌 그 자체가 신앙의 미성숙성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충돌을 일으킨 사람은 곧잘 ‘정의’를 들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즉, 참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싸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왜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든 부당한 고발에 대해서 조목조목 정의를 들며 따지지 않고 차라리 침묵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뭘 몰라서 그래, 내가 더 똑똑해. 그래서 나는 참된 정의를 위해서 이 싸움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루어내고 말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두십시오. 그가 시작하는 싸움을 그가 스스로 마치게 두십시오. 사람들 사이의 모든 싸움은

신앙의 활동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오해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동성과 공동체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해서도 오해가 존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로 하는 모든 활동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반대의 주의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공동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지요. 동양 문화권은 예로부터 ‘관계’를 중시해왔고 그 관계 안에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외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것이 미덕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늘 두각을 나타내고 그 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늘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 활발한 활동은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활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도 얼마든지 활발한 활동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내적 활동에서 외적 활동이 기인해야 합니다. 역으로 외적으로는 활발히 움직이는데 실제로 내적으로는 지독히 고여있는 썩은 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에서 기도는 줄줄이 나오지만 그 기도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은 채로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 외적으로 활동은 하는데 그 외적 활동이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면 그는 내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진정한 ‘공동체성’은 모두가 무언가에 열중해서 다같이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의 몸’ 신

체험된 신앙

자신에게 없는 이야기는 만들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작 며칠을 남미 여행을 다녀와서 마치 남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과장될 수 있고 허풍을 떨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정작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로 남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양분은 그것을 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체험으로만 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보고 여러 위험요소를 알고 난 뒤에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조언이 있지요. 그런 구체적인 체험이 없이는 소설을 쓰게 되고 그런 소설을 읽은 사람은 환상에 사로잡혀 여행을 하다가 큰 일을 당하곤 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오직 체험으로만 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내 안의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위해 노력해 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 이의 인도를 따를 때에 많은 것들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고 쓸데없는 노력 없이 신앙 안에서 진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은 자신이 추상적으로 연구한 것들을 진리라고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외적 권위만을 보고 그런 것을 따라가다가 낭패를 보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야고 2,18)

증언

우리는 ‘증언’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가령 제가 이 글에서 저만이 체험한 어떤 것을 꺼내 놓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양분될 것입니다. ‘저 신부님이 말하는 것이 정말일까?’ ‘저 신부님은 그런 면에서는 거짓을 말할 분이 아니니 사실이라 믿어’라는 식이지요.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 증거를 보기를 바랍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의 향연을 보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기적을 본다고 해서 믿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의심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심은 때로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참되고 올바른 증언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고 맙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돈이 최고가 아닐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모두 살아낼 순 없어. 사람은 적당히 사는거야.’ 라는 식으로 점점 변질되어 가는 내면을 지니게 됩니다. 타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뢰의 나약함은 나 자신의 이기성에 비례합니다. 내가 이기적인 만큼 나는 오직 나의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외적인 관계는 존재하지만 내적인 연계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에 신뢰를 두지 못하게 됩니다. 성인들은 통공을 나누고 함께 친교를 이룹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한 이웃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있는데 제가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먼저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걱정은 그 자체로 시기상조입니다.  하지만 행여 누군가가 하늘나라에 간다 해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그들에게 선의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우리가 이해하게 됩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력이 작용하여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면이 어둠으로 가득한 이, 하느님의 빛에 대한 수많은 기회를 모조리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 이가 제 갈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의 분별에 대한 굳은 신뢰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머무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분별이 완전하고 참되다는 굳은 신뢰를 하고 하느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그분이 결정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들을 통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기까지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을 책임감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금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