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2019의 게시물 표시

문둥이가 퍼 준 물 한 그릇 (마진우 요셉 신부 作)

한참을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기가 마을인가 싶어서 달려가보면 오아시스의 환상이기를 여러차례... 그렇게 그 사람은 메말라갔고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솟아난 그는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물이었습니다! 그렇게나 간절히 찾아 다니던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이가 꽤나 깊어 보였습니다. 지금 기력으로 저 우물벽을 타고 내려갔다가는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이 야밤에 우물을 길러 온 모양입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에게 물 한 그릇만 퍼주시오!” 그러자 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이 가진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서 건네 주었습니다. 심하게 목이 말랐던 그는 그 물을 받아서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두레박에 얼굴을 파묻고 물을 마시던 그는 그제야 혼미하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그 물을 건네준 이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고맙... 아, 아니! 당신은!” 은은한 달빛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쪽 눈은 눈이 있었던 빈 자국만 남아 있었고 얼굴 피부는 흐느적거리는 고무를 얹어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팔은 더러운 붕대로 얼기설기 휘감아 있었는데 손가락은 엄지와 검지 뿐이었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둥이잖아! 에이 제길!” 그 사람은 갑자기 성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이 온 몸을 쓸어 내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문둥이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런 취급은 그에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나그네는 이내 길을 멈춰 섰습니다. 왜냐하면 이 밤에 자신은 길을 모르고 있었고 그 문둥이는 이 야밤에 물을 길러 나온 걸로 보아 마을까지 가는 길을 알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우

빛과 어둠

빛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어둠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어둠을 사랑하면서 그 어둠을 드러내면 주변에서 눈치를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어두움을 감추고 선한 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 빛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근원지가 빛이고 따라서 빛을 기반으로 자신의 약함의 무게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의 내면에 어둠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 앞에서 '에이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악은 실존하는 것이며 각자의 내면의 영혼의 선택적 수용에 따라서 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은 '교묘하기' 때문에 선의 자녀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빛으로 위장한 뒤에 선의 자녀들을 이용해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의 자녀들은 그런 상황이 가능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때로 이런 상황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부모가 악에 사로잡혀 있거나 반대로 자녀가 악에 물들어 버린 경우입니다. 그러면 혈연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부모가 어둠이고 자녀에게 빛이 발하기 시작할 때 어린시절 내내 겪어오는 부모의 이해못할 행동 앞에서 자녀는 시달리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때가 이르러 그 각자에게 분명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면서 걸어갑니다. 빛의 자녀는 '지혜'를 배워 나가면서 어둠을 적절히 피하고 또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법도 훈련해 나갑니다. 반면 어둠을 본격적으로 선택한 이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들이 다방면으로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쥐고 선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욱 자신의 어둠에 잠겨 드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때가 차면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

[악보] 그런 일은 없어요

모래시계

모래시계는 참 재미난 도구입니다. 안의 모래는 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던 모래가 다 차면 모래시계를 뒤집을 뿐입니다. 그러면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지요. 변화의 시도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아내에게서 마음이 떠난 남편을 어떤 종류의 굴레로 구속시킨다고 해서 그가 멈추게 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의 끌림 자체가 아내 아닌 존재에게로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세상에 많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본당에서 뭔가 바뀌길 바라면서 변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은 결국 모래시계의 방향을 바꾸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모래는 결국 내려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요소 가운데에는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영역을 바꾸면 마치 모래시계에서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모래가 공기보다 가벼워져서 도리어 위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가르친'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내면 속에 세상을 향한 방향이 하늘을 향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했던 것이고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네,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틀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흐르는 것들의 진정한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림시기 동안 이루어야 하는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자선

자선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우리가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은 '가난한 이에게는 돈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자선에 연관된 활동이 거기에 촛점이 맞추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선이라는 활동을 너무나 소극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1. 가난한 이가 필요한 도움 일단 명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돈이 필요한가? 네, 당연합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돈인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정말 기본적인 생활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도움인지 아니면 이미 충분히 존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에게 우리가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해서 던져주는 것인지는 중요한 성찰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가난한 이를 돕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망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도움은 반드시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서 그가 이미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다음에 주려는 도움은 그의 탐욕을 키우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위탁 도움의 문제점 그리고, 우리가 돕기를 바라면서 위탁하는 주체의 성실성도 문제가 됩니다. 정말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실제로는 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광고효과를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전혀 엉뚱한 목적으로 재정이 사용된다는 그것은 또 어찌할 것입니까? 예컨대 본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빨랑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금액들이 행여 다른 누군가의 술값으로 계산되고 있다면 그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이런 요소들을 알고 자선의 대상자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자선의 방식을 올바로 선택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3. 다양한 자선 그리고 과연 다른 이를 돕는 것이 '물질' 뿐인가도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우리 주변에서 정말 기본 생활이 부족한 사람을 찾

사람들의 진정한 힘

사람들의 힘이 모이면 큰 힘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힘의 내부 속성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기업은 '소비주체'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소비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으면 소송도 불사하면서 그의 권리를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정치권력은 '지지자'에게 충실합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흘리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정보를 바탕으로 지지자들이 즐기는 고착된 사고를 심어줄 수 있고 더 큰 지지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 자기 편이 아닌 이, 또는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하면서 그 밖의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에게는 적대감을 쉽게 드러냅니다. 연예계는 '팬층'에서 얻는 인기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면 아무리 자극적인 요소라도 기꺼이 실행하곤 합니다. 심지어는 비윤리적인 요소라도 사람들 사이에 이슈가 될 수 있으면 기꺼이 선을 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섹시한 의상을 입히고 야릇한 춤을 추게 만드는 건 기본이고 그 밖에도 이슈가 될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실행하고 퍼뜨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별다른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 이들은 연예인들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런 영적 전쟁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은 이 가운데에서 당신을 찾는 이들을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사람들의 힘이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에게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는 달리 이 사랑이라는 것은 특정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

영적인 고통이 찾아오는 날

육체의 질병은 확연하게 눈에 드러나게 됩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병을 고치러 의사를 찾아갑니다 . 차에 부딪혀 부러진 다리를 그냥 방치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 그 통증과 외적 기괴함은 하루빨리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 영적인 면 ' 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 당장 밥 먹고 살아가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 탐욕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더 교만해지기 시작하고 더 성마르고 사악해지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리고 그 헛된 갈망과 허전함을 다시 세상의 안락과 사치로 채우려고 듭니다 .   그러다가 그 갈망의 마지막에 통증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그릇되이 살아왔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 영적인 통증은 육체의 통증과 달라서 굉장히 늦게서야 그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 세속적인 친교가 즐거움이라고 여겨왔던 그들은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고 또 나름 흥청대는 친교 속에서 가깝게 지내왔다고 생각한 사람이 하나씩 둘씩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다툼의 관계가 되고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 또 자기가 벌어들이고자 생을 헌신한 돈이라는 것이 딱히 생의 위안이 되지 않고 지리멸렬함으로 변하고 또 뜻하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후회를 하게 됩니다 .   예수님은 당대의 실제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 , 그리고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 가장 기본적인 필요는 채워져야 마땅한 것이고 그들에게는 그 일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의 그런 해방감으로 인해서 얻어지게 될 기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 내적인 해방 ', 즉 그들 개개인의 죄악에서 해방을 선물해 주

진리가 무엇이냐?

책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치지'는 않습니다. 책은 독자에게 읽혀지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과거에는 책이라는 것은 저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읽히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 담겨 있고 아무리 지속되는 가치가 담긴 책이라도 예쁘지 않거나, 활자가 지나치게 작거나, 너무 두꺼우면 외면당하곤 하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책도 좀처럼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마다의 손에 들린 기기에서 활자 혹은 영상으로 된 '디지털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고 그 정보들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읽어 달라고 보아 달라고 외쳐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만 한눈을 팔다가도 엉뚱한 정보에 현혹되고 거짓 뉴스에 속아 넘어가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실제라고 믿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진리는 여전히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잔잔하게 제 몫을 성실히 실행합니다. 그리고 오직 '참된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내비치며 원하면 이리로 오라고 초대를 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이사 42,2)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만 하면 언제라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직장을 출근하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 속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의 힘찬 발걸음 속에, 홀로 악과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대의 수많은 신앙인들의 현실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박해받는 의인

악습에 깊이 빠져 그 악습을 즐기고 있는 이들은 자신을 악습에서 구해줄 모든 기회와 발언을 증오하게 됩니다. 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생활하고 실천하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증거할 따름입니다. 증오는 사랑을 적대시하고 경솔은 신중을 적대시하며 격분은 인내를 적대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내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하고 거룩한 삶의 족적을 뒤따르면서 당연히 세상 사람들, 저마다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은 눈엣가시 같아서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뽑아 버리고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박해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 박해는 직접적인 육체적인 제약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간접적인 명예의 실추나 그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과 험담과 같은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 현세 안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세 안에서는 세상의 자녀들, 악습에 가득하고 위선적이고 약삭빠르고 이기적이고 천박하고 사악한 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세상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승리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당히 내려오셔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하늘의 표징을 끌어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자시을 내어 바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악을 모두 소진시킬 때까지 그리 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 안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자리, 영원한 다스림의 자리로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악인들은 나날이 그들의 날수가 헤아려지고, 저울에 달려져 무게가 모자람이 확인되게 됩니다. 그들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중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세상에 빠져 있는 그들, 자신을

상호 존중의 길

"남성들 가운데 여성을 물건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하며 그런 체험으로 고통받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성들 가운데 남성을 물건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러하며 그런 체험으로 고통받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남성들 가운데 그런 나쁜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모든 남성에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여성들 가운데 그런 나쁜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모든 여성에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소위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개별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모든 경우에 적용 시키는 것이지요. 칼은 손잡이를 잡으면 도구가 되고 칼날을 잡으면 나를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손잡이를 늘 잡고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칼은 생활에 도움을 주는 너무나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서투른 동작에 손을 베거나 해서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반면 칼날을 잡아서 크게 다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멀쩡하게 칼을 다루는 사람을 곁에서 보기만 해도 불안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 만남은 정말 '순수하게' 서로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존중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젊은 날의 열정과 끌림에 때로는 충돌하며 때로는 조정해가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일까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투름이 많고 때로는 오류와 심지어는 죄를 짓기도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점점 더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다채로운 차원의 과정을 인정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전인적인 인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술해서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

부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거기에서 더 생각을 확장해서 그 번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올바로 정립해야 하고 그 최종목적을 위해서 나아가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악마는 교묘하게도 사람에게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구에만 사로잡히게 한 뒤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에 대한 이상을 지워 버려서 돈을 벌어도 즐겁지 않고 돈이 부족해도 괴로운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을 벌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면 그것으로 이미 방향은 정해진 것입니다. 바로 이기성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돈을 벌어서 타인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다면 그 목적은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여기에도 덫을 놓았습니다. 당신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면 될수록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벌이에 집중하는 만큼 '집착'이라는 것이 함께 생겨나고 '탐욕'이라는 것이 함께 성장합니다.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돈을 벌면서 자신이 최종적으로 정한 타인을 위한 헌신과는 정반대로 타인과의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돈벌이를 궁리하는 만큼 우리의 내적 자아는 참된 진리나 행복을 성찰하는 시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이고 타인을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실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로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서 그는 편협하고 고착화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집중하는 것에 점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보다 돈이라는 수단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그 주인의 하수인이 되고 맙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많은 이들은 신심있는 생활에 헌신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모아들일 수 있을까에 골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이런 시대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는 복음

시간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기에 시간이 존재하며 시간은 곧 움직임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과거는 이전에 머물던 영역이고 현재는 지금 움직이는 것이며 미래는 앞으로 나아갈 영역을 의미한다. 시작되었기에 마침이 있다. 우주는 시작점이 있고 따라서 종말이 존재한다. 우리의 육체는 태어났기에 죽음을 기다린다. 이 지구도 시작이 있기에 마침이 있다. 태양도 마찬가지이고 온 우주의 운명이 그러하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것이라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라서 끝없이 움직이는 분이고 따라서 그분에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그 움직임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그분에게는 '찰나'와도 같다.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시간은 그분에게는 '현재' 그 자체이다. 하느님은 모든 순간을 인지하고 계시며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지혜를 선물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고 모든 시간을 현재로 살아가시는 분,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사이비(유사종교)에 대한 단상

사람은 언제나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지요. 우리가 사기를 당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했지만 그 선택지 안에 교묘한 속임수가 들어 있어서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기에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似而非)에 빠져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교 결과 더 나아 보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현실에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정보조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아닌 이상은 사실 기성 종교가 가르치는 것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구매자가 제품을 살 때에 그 제품을 써보고 사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 판매자가 하는 말, 즉 광고를 신뢰하거나 일시적인 판촉 행사에 매료되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1년을 써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식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은 무엇이라도 좋아 보이기에 구입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 사이비가 좋아보여서 그렇게 합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생각만큼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폐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러나 제품 구매 후 리뷰가 차단되어 있다면 이 제품의 실사용자들이 어떤 체험들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계속해서 광고와 포장에 매료되어서 사는 사람들이 줄지어설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이비, 유사종교들의 실태는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기성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신앙의 기쁨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보다 확고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에 실효성이 여러 차례 검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아무런 흠도

할로윈에 대한 단상

문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국인의 문화가 있고 남미인은 남미인의 문화가, 또 더 세부적으로는 경상도의 문화, 전라도의 문화, 어느 학교의 유행, 어느 나이대의 공통된 관심사 등등 참으로 다양하게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요소를 피하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이름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활동들이 '식별'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학교에서 '왕따'가 문화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피해자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문화에는 긍정적이고 살려 나가야 하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정적이고 도태되어야 하는 문화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의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음주문화는 여러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할 문화이고 한국 사회의 고유하던 전통 문화도 좋은 것은 살리고 그릇된 것은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할로윈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조금은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과 2000년 전에만 해도 한국 내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문화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영역이 '상업성'에 물들어 있고 또 분별력이 모자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올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할로윈이라는 새로운 문화 안에는 적지 않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중하게 살피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별을 올바로 적용해 보기도 전에 이미 '유행'

좁은 문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그 길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목적이 분명할 때에는 수고스러운 고생도 얼마든지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욕구 하나로 형제간에 소송을 걸고 다툼을 하는 일은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소송이 꽤나 지루하고 힘든 일임에도 돈에 대한 탐욕으로 기꺼이 그것을 형제라고 불렀던 이에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한 아내가 지금의 모자란 모습의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수고스러움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한 아내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남편을 섬긴다면 훗날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성실함과 꾸준한 선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 훗날의 미래상을 올바로 그려내지 못하고 따라서 현재의 인내의 시간을 참아 견디지 못해 화를 쏟아붓고 주변에 남편 욕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가올 미래는 더욱 암울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최종적인 올바른 목적지를 아는 데에서 나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변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열성인지는 스스로 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뜻을 모른 채로 거짓된 열성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나아가 이웃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시는데 정작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고 이웃에는 그릇된 모범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외적인 잣대로 열심해 보인다는 활동만 열심히 하면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 줄 알았던 것입니다. 평일 미사를 열심히 나가고 기도 횟수를 늘리고 사람들의 시선에 좋아 보이는 일을 잔뜩 하면 하느님이 인정해 줄 줄 알았지만 실제로 하느님이 원했던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들어갈 것이라고

"신부님은 아무나 되나요?"

사제로 살아오면서 이런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사제직의 특별함을 인식하는 신자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 안에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제직의 권리 바오로 사도는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잘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이 눈꺼풀에 싸여 있고 눈물샘이 늘 눈을 적시는 것처럼 중요한 지체는 약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많은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사제직은 '특별해' 보이게 됩니다. 사제는 늘 신자분들이 사랑해 주시고 챙겨 주십니다. 이는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필요한 것을 취하듯 사제로 살아가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영역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음의 조건이 뒤따릅니다. 사제직의 책임 사제가 사제인 이유는 '사제로서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신자들을 돌보아야 하고 신자들을 위해서 헌신, 봉사해야 합니다. 이 직무에 헌신하기에 신자들이 사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받는 것 이상으로 많이 내어 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피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음을 전할 상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또 구체적인 사랑으로 응답하는 신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의미가 마냥 술자리의 흥취나 즐기고 고급진 운동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일은 바로 그 사명을 핵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일선 본당에서는 바로 그 핵심 목적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균형있게 짜여져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튼튼해야 하기에 잘 먹이고 돌보아져야 한다. 그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성사인 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미사, 즉 성찬례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돌봄이고 먹임이다. 그러나 그 직무 수행 만으로 이루어지는 '사효성'(일 자체로 얻어지는 은총)외에도 우리는 그 직무에 성심을 다해야 한다. 그 성찬례를 맑은 마음으로 거행하도록 고해성사도 정성껏 주어야 하고 그 밖의 성사적 직무들도 문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에도 참가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본당의 나머지 일들은 이제 잘 먹은 구성원들의 내면을 다지고 거룩한 지식을 심화시키는 영역, 서로의 친교를 나누는 영역, 나가서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영역 등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이 선호하는 활동만을 치중해서 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즉, 구성원들의 내면을 다지고 거룩한 지식을 심화시키는 영역은 제대로 준비하기도 힘들고 막상 그것을 하면 '재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즉 사람들은 놀러 다니고 싶지 무언가를 성실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교회 내의 여러가지 구체적인 활동 면에서 '편식'이 심해지게 된다. 말 그대로 성당이 '놀음판'이 되는 것이다. 성당은 하느님을 알고 이웃과의 사랑을 훈련하는 곳인데 먹고 마시고 놀러다니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름만 거룩한 것이 붙은 행사들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성지순례'를 얼마나 자주 또 많이 다니는지 서로 단체별로 경쟁하듯 하는데 같은 성지순례를 진정한 순례의 의미로 다녀

입시생과 그리스도인

한 학생이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나 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은 묘하게 닮아 있다.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들어갈 곳에서 요구하는 것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영어를 잘 하기를 바라는 곳인데 수학 만을 준비해 가면 낭패가 될 것이 뻔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주님이 기다리시는 사랑을 많이 준비해 가야 하지 성당 안에서의 높은 지위나 많은 봉헌 같은 것을 준비해서 갔다가는 퇴짜를 맞을지도 모른다. 입시생은 끈기가 필요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외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있으면 시간을 들여 노력해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끈기가 필요하다. 성경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내적 가치가 있으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입시생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체력도 잘 관리해야 한다. 시험 전날 몸이 안좋아져서 무너지면 실컷 공부한 것이 소용이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 영적인 것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낼 현세의 삶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기도회만 열심히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역할도 바람직하게 세워 놓아야 한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거룩한 지식을 현세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 입시생에게 늘 좋은 환경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 윗층에서 아이들이 발구르는 소리가 날 수도 있고 독서실에서도 누군가가 떠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매달리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복음을 전하는 상황, 사랑을 실천하는 상황이 마냥 아름답고 좋으라는 법이 없다. 언제나 악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고 선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선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입시생의 기쁨은 합격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구원이다. 그러니 합격 이전에 생일이나 기념일이 있다고 긴장을 늦추고 지나치게 기념하고 있다가는 합격의 기쁨을 놓

신부님 어찌해야 하나요?

예) 마음이 우울합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그 우울함의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본인이 마땅히 대처해야 하는 현실의 십자가를 지는 게 힘들어서 우울하다면 그건 당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영역입니다. 외부적 악한 영의 활동에 의한 거라면 굳은 믿음을 기초로 한 기도나 은총의 통로인 고해성사나 미사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아픔이 있는 거라면 의학의 도움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심리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의사를 찾아가 보셔야 합니다. 이게 답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고려해보지 못한 전혀 색다른 영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이 딱 자신의 길을 정해 놓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지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솔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가 먼저 자신의 통증 부위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는데 대놓고 의사에게 와서 알아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영역이 스스로를 먼저 솔직하게 직시하는 데에서 해결이 됩니다. 적어도 '올바른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만한 이들이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수많은 악습에 찌들어 있는 이들이 자신이 지닌 것은 남들도 다 하는 '통상적'이라고 우겨댑니다. 그러는 통에 자신의 아픈 곳이 갈수록 더 썩어 들어가게 됩니다. 영혼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이는 이러한 상황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료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고 '진료과목'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들고 올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하느님에게 올바로 방향 지워 두어야 합니다. 그 기초가 사라져 버리면 그는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일하기 싫어하는 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1코린 4,8) 가난한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까탈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우고 또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 기뻐합니다. 반면 부자는 굉장히 까탈스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늘 편안하고 안락하고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살아온지라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이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일로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물질적 부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면의 부자됨'에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배가 불렀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더 맛깔스러운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가르침에서도 비슷하니 배가 부르면 더이상 본질의 가르침이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1코린 4,5)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일은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현재의 직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매진해야 하고 훗날 하느님 앞에서 그 사명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가 하는 것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에게 곧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쭐거리는 이들의 말이 아니라 힘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합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매를 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구매 욕구를 자극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새로운 것이 더 낫다는 '신조'아래에서 새로나온 물건을 소유하고 보란듯이 드러내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옛 것은 낡고 몹쓸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표주자는 당연히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적인 부모님의 모습, 어르신을 공경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낡은 것이 되었고 지금은 무엇이든 반발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것이 멋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낡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물건들 뒤에서 어둠의 영이 미소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새롭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에 깨어 있어라

다른 힘이 모든 것을 다 해 준다면 참 쉽고 편하겠지만 결국 우리에게 남아 있을 자유가 없기에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 그 모든 덕과 공은 그 일을 한 힘의 주체가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 반대로 우리 각자가 모두 해내야 한다면 이건 또 이것대로 힘든 일입니다 .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교의 절묘함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 우리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 은총 ' 으로만 일을 추진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그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 모든 것이 우리 외부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 ,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전적으로 위의 힘이 작용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주장을 조심해야 합니다 . 반면 우리는 자력으로 구원되지도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반드시 우리보다 뛰어나고 영원한 존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이겨내고 스스로 구원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은총의 강한 힘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 그러나 그런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그 은총의 힘이 끊이지 않을 수 있도록 나날이 스스로를 더 완성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 우리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 완벽 ' 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 하지만 언제나 더 나은 완전을 향해서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 그렇게 우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완전을 향해서 성실하게 나아가면 때가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이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가 '사제직'이지만 하나는 일종의 '일'로, '직무'로 주어지는 사제직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보편적'인 사제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제직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그 사제직을 자신의 고유한 직무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봉사'를 위해서 주어집니다. 자신이 마음껏 쓰고 누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에 합당하게 봉사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신자들을 기분좋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양떼를 돌보고,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 사제직을 지닌 이들도 자신의 사제직의 가치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즉 그들은 '성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기도를 거행하고 세상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오류는 하느님의 탓도, 그 사제직의 탓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주어진 선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사제들은 봉사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불어 넣고 틀어진 관계를 다시 엮어주고 가르치고 충고하고 격려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적으로 맡고 있는 양떼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먹거리를 마련해 주고 세례의 샘으로 또 성령의 샘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그저 있는 신자들과 어울려서 화려한 놀이나 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라고 주어진 직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직분을 나누어 맡은 사람으로서 직무상의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의 위기

  새하얀 옷이 염료로 인해서 물이 들 듯이 인간의 영혼도 ‘ 사상 ’ 으로 인해서 물이 듭니다 .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그에 합당한 물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 아름다운 색으로 옷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염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옷감을 상하게 만들고 더럽히는 것들도 있습니다 . 우리는 아름다운 색을 분별하고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합니다 .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생각과 사상은 우리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 이교 사상 ’ 에 대적해 와야 했습니다 . 그런 생각들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진리를 흐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엇나가게 만들기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영원을 희망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게 도와줍니다 . 하지만 이교 사상들은 그런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고 광신이나 맹신에 빠져들게 만들곤 했습니다 .   성경 안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말하듯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진리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 문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요 .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의 삶과 사랑으로 구체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 교도권 ’ 이라고 부르고 교회 공동체의 삶과 그렇게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전승을 합쳐서 ‘ 성전 ( 聖傳 )’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때마다 사상의 공격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바로 지금 현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 특히나 이 인터넷이라는 수단으로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엉뚱한 사상에 물들기가 너무나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강론(포도밭 일꾼의 비유)

  복음에서 등장하는 주인은 ‘ 돈을 벌고자 ’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그의 면모에서는 ‘ 효율성 ’ 을 중요시하는 면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만일 주인이 효율성을 따졌을 것 같으면 종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주인은 후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적인 계산에 몰두하는 약삭빠른 일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투덜거립니다 .   “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 ‘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 하고 말하였다 .” ( 마태 20,11-12)   주인은 실리를 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주인의 의도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선물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 , 즉 은총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늦게나마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초대하는 것 , 그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가능한 더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하느님은 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 아니면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 마태 20,14-15)   하지만 이 본질적 사명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 효율성 ’ 을 겨루는 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서 더 많은 신자의 수를 보유하고 재정 규모가 큰 본당이 일종의 ‘ 좋은 본당 ’ 이 되고 한 사제가 성실하게 복음을 펼치지만 그 규모가 작고 보잘 것 없는 본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본당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  

선과 악

선한 이들은 악한 이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고 악해질 수 있는 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물인 악은 도무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악함에 빠져들고 물들어가는 그가 자행하는 악이라는 것은 빛마저 빨아당기는 '블랙홀'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온전한 선, 완전한 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선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색채를 벗어나서 얼마든지 선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고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종교에 몸담고 있어도 실천하는 행위가 악하다면 그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즉 선에 대해서 무지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 '무지함'은 순수한 상태의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무지입니다. 즉 선을 보아도 그 선을 선택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고립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기성'이 바로 그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저만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일종의 빛인데 이 이기성의 극단을 달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빨아 당기기만 할 뿐, 자신에게서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나오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반응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계산된' 반응을 합니다. 즉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올 때에 타인에게 '투자'하는 식의 선을 실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이들은 배려, 선의, 호의, 친절, 사랑, 온유, 겸손과 같은 가치들이 나날이 늘어갑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그것이

안정된 신앙?

사람들은 안정적인 걸 좋아합니다. 달리 말하면 '변화'를 크게 즐기지 않습니다. 언제 집에서 쫓겨날지 안절부절하기보다는 집 한 채를 사서 마음 편히 머무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의 현실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활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정도면 되었나 싶을 그때에 신앙은 우리를 또다른 현실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흔히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안정을 찾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형식, 격식, 규율'과 같은 것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그것을 충실하게 지킬 때에 훌륭한 신앙인이 된 듯한 착각과 함께 딱히 새로운 움직임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안정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영적 내집마련의 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내면을 경계하도록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닌게 아니라 사랑을 하려면 우리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늘 지나가던 길에 강도가 있으면 안정을 꽤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늘 하던 행동대로 그대로 지나가 버리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반면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준 것입니다. 신앙의 안정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성령은 감옥에 가두어 두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성령이 왕성히 활동하실 수 있도록 안정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이겨내야 합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살피고 오늘 하루 나를 사랑으로 초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직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