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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재미와 기쁨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즐거움이나 재미와는 전혀 다른 표현입니다. 성경의 기쁨은 보람참, 혹은 마음벅참과 비슷한 말입니다. 물론 더 심오한 깊이를 지니고 있지요. 단적인 예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지만 보람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차이가 우리의 시선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성당을 재미난 것을 찾아 오면 얼마간은 그 재미거리, 흥미거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머지 않아서 재미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건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재미난 게임이라 할지라도 나이 80을 먹고 10대때 하던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기쁨의 요소는 갈수록 그 심도를 더해갑니다. 처음에는 기쁨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눈 앞의 흥미거리만 찾던 이가 삶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기쁨'의 본질을 회복해가다 보면 남들이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도 기쁘게 해내곤 합니다. 전에는 봉사를 한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을 빼앗기고 나의 노력을 강탈당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봉사한다는 것의 색다른 기쁨을 이해하게 되고 오히려 봉사하지 않으면 아무리 흥미로운 일이 앞에 있어도 마음이 기쁘지 않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군대에 처음간 이등병에게 군생활의 모든 것이 힘들지만 훗날 상병이 되면 그런 힘든 군생활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도전적인 일에 매진하게 되는 적극성을 지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재미는 굉장히 피상적인 것입니다. 기쁨은 그것을 찾는 이에게 더 많은 것을 열어보이는 영혼의 요소입니다.

시편 이해하기

시편을 나름 '연구' 중입니다. '묵상'한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네요. 시편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그 운명이 서술됩니다. 의인은 정해진 상급을 받고 악인은 멸망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서술됩니다. 헌데 선은 악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선은 파괴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완성하고 돕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의 내면에는 '정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의가 바로 악인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정의'라는 것이 적용되면 악인은 자신이 저지른 악을 되받게 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바로 악인이 날을 세운 그 칼로 스스로 망한다는 전개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칼은 자기들 가슴을 꿰찌르고" (시편 37,15)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되어주는 그 되로 되받는다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될 벌도 상도 모두 우리가 현재 행하는 것들의 결과물들일 뿐입니다. 지금은 좀 힘들어도 악을 견디고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고 도리어 자비를 베풀고 축복을 빌어 주고 기도해 준다면 우리가 베푼 선은 고스란히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다시 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현세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보는 느낌이겠지만 결코 손해일 수가 없는 것이 시편 안에서는 '영원' 안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아무리 활개를 치더라도 금방 사라질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영원에 비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악인이 100세를 살면서 세속적인 온갖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죽고 나면 멸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악인은 없어지리라." (시편 37,10) 시편을 읽는 방법은 바로 그 초월성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지 않고서는 시편은 아

불편한 영상들

"요즘 인터넷에 도는 정치적인 영상들이 있잖아요. 그걸 보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왜냐하면 그 모든 이들이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는 하지만 그 근본 안에는 상대와 싸우고 이기려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어제 만난 한 분과 나눈 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영상 안에는 어떤 종류의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양들의 무리에 접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늑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 양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교묘하게도 양들의 탈을 뒤집어쓰고 접근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내비치는 것 같은 수많은 영상물들 안에 사실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깃들어 있어서 우리가 물건을 사게 하거나 자신들의 사상에 동조해서 그에 반대하는 이들과 대적하도록 해서 결국에는 우리의 내면에 '증오'와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을 지니기도 전에 그런 '사상'들, '이데올로기'들에 물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는 통에 정작 들어야 하는 진정한 지혜와 참된 일치를 지향하는 우리 주님의 목소리는 놓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이 이름 안에 우리를 위한 진정한 구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길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의지의 발로이고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경험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참된 평화를 우리에게

성지순례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간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 말의 올바른 의미를 잘 새겨 들어야 합니다. 성지순례의 참된 뜻은 그 성지를 방문함으로써 그 성지에서 살고 죽은 성인들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그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성지를 방문하는 이는 사실 많지 않습니다. 성당마다 하는 성지순례에는 '봄소풍', '가을소풍'의 개념이 많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인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도 바치고 성지에 가서 미사도 하는 등 '성지순례'의 구색은 외적으로 갖추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목적은 '소풍'이 주가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성지순례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선조 신앙인들이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워 걸어다녔던 길을 버스를 타고 순식간에 이동하면서 버스 안의 냉풍기가 작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버스의 냉방 시스템은 버스 회사에서 관리를 잘 해야 하겠지만 제가 말하려는 핵심은 그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근본 마음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안락에 대한 추구와 육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교묘히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성지 순례를 가고 또 가고자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지 순례 '상품'을 만들어내고 또 소비자인 신자들은 그것을 열심히 소비해대는 것입니다. 더 멀리 더 화려한 곳으로 더 재미나게 다녀오는 것이 주가 되고 갈수록 '성지'와 '순례'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버리고 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 머무르시는 곳에서 바로 성지순례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이 살아간 마음으로 일상을 대하고 성인들이 살아간 태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명을 훌륭하게 처신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성인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머무는 곳이 성지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성지 나

다양한 사건들

하느님께서는 저를 다양한 환경에 두셨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체험하게 해 주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길을 다져 주셨으며 그와 더불어 당신께 나아가려는 모든 이들을 이끌 여지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만일 저에게 그런 일련의 체험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른 채로 삶을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들은 때에 맞추어 일어났고 저에게 '체험'이라는 형태로 쌓이게 되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저에게는 수많은 체험들이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이유로 구미라는 동네에서 대구로 나와야 했던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불안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 새로이 적응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적응하는 과정에 가장 절실한 요소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어야만 했고 결국 '신앙'만이 최종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국가를 바꿔 가면서까지 저를 '이동'시키셨고 그 가운데 최종적으로 하느님 당신 말고는 그 어디에도 나를 내어 맡기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나를 온전히 차지하실 수 있고 나에게 절대적인 안정을 선사하실 수 있는 분이셨지요. 저는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살아볼 수 있었습니다. 임대 주택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십평의 넓은 아파트로, 그리고 신학교의 기숙사에서 재건축이 이루어지기 전의 좁은 보좌 신부의 방으로, 또 볼리비아라는 극적인 환경에서 다시 한국이라는 익숙하고 풍요로운 환경으로 다양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물질'이라는 것이 굉장히 상대적이고 많이 가진다고 유익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많이 가져서 도리어 생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참으로 다채로웠고 그 모두에게서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주기

들어주기만 해도 많은 충돌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싸움이든지 맞서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의견의 사소한 충돌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질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을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들어줄 작정만 제대로 하더라도 많은 투쟁이 종식됩니다. 듣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입니다. 그냥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말을 듣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리석음을 그대로 감안하고 들어야 하기도 하고 또 상대가 악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을 캐치하고 적절히 자리를 뜨는 법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 초심자로서 일단 듣는 것을 훈련하기만 해도 내면에서 많은 인내가 피어나게 됩니다. 묵묵히 말없이 상대의 말을 들어주다보면 어느새 상대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고 저마다의 생각을 밀어 넣으려고 했기에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저마다 살아온 환경을 바탕으로 쏟아내어 놓고 싶은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안락함에 기댄 정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불의'가 시작된다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편안함이 파괴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삶의 편안함 안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이건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하고 나서서 거기에 동의해서 그 일을 하기보다는 그 일이 자신의 '더 안락한' 삶을 위해서 도움이 될 때에 동조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그 일이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도 내 생활을 도리어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면 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돕자고 하지만 그것은 부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서 그렇게 될 때에는 동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 내 주변의 가난한 사람을 내가 도와야 할 때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계산을 하게 되고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떨어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다못해 내가 선하다는 평판이라도 조금 늘어야 그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결국 가난한 이는 없고 계산하는 나만 있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정의롭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모든 이의 균등한 공동선을 걱정하시는 분, 그분만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내어 맡겨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고 실천하려는 것에는 우리의 '이기심'이 잔뜩 들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비유

당신은 의사입니다. 환자 하나가 찾아왔는데 그가 내보이는 증세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배워온 의술로 환자를 진단하자 환자의 내면에 더 중한 병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생명과 직결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자가 내비친 증세는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고 먼저는 중한 병을 돌보고 난 뒤에 치료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치료제를 지금 썼다가는 중한 병이 더 심각해 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치료를 시작합니다. 더 중한 병을 돌보고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치료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환자는 투덜대기만 합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증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의사는 엉뚱한 짓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이 더 심각한지 알고 그것을 돌보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피상적인 것만 일시적으로 해소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보다 심각한 질병이 있을 때에 그것을 치유하는 훌륭한 수단은 우리 삶에 다가오는 시련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련들을 재빨리 없애고 삶의 안락에 잠겨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입니다.

무엇이 더 위험한가?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할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회사는 '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최대한 이익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법의 허점을 찾아 다닐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유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 때에 우리는 '고객님'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호갱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적게 지출하고 많이 버는 것 그것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선익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당신을 깎아내면서도 다가오는 이들의 영적 선익을 추구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움직임과는 정반대되는 움직임을 추구하는 분,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죄많은 인간을 당신의 나라에 이끌어 들이고자 노력하신 분, 당신의 생명을 헌신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정반대로 다가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치 자신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는 인물로 간주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들을 없애 버리십니다.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마음과 탐욕을 잠재우고 죄악을 없애 버리십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러붙어 있던 사람은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사라지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과연 더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나에게서 어둠이 빠져 나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어둠을 쥐고 누군가와 죄스런 관계에 빠져들어서 극도로 증오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따라서 지혜는 당신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에 따라서 스승을 고르고 진정한 지혜를 외면하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침 마무리에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