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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성모송 해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미사를 봉헌하면서 기다리는 것, 또 레지오 회합때마다 사제의 강복을 통해서 받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이 은총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 그리고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그 힘은 참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능력은 동물들의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습니다. 심지어 개미조차 자신의 몸무게에 몇십배나 되는 물건을 움직이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만한 능력이 없고 심지어는 외피에도 충분한 털이 없어서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문제가 생깁니다. 정신적인 능력도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질병 가운데 심리적인 질병은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합니다. 나아가 영적인 능력, 즉 사랑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부족하지요. 은총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남김없이 채워줄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이 현세 안에서 우리의 능력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은총에 힘입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이 가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조력이,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을 채우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렇게 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은총의 사명에 ‘네’라고 수긍하셨고 그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하셨으며 나아가 우리에게 그 은총을 나누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 우리가 묵주알을 굴릴 때, 바로 성모님께서 받으신 그 은총이 우리에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한 이들입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시간을 내어 고요한 가운데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는 시간 마련하시길 바랍니다.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인간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다른 말로는 ‘행복’이라고 하지요. 인간은 행복

주님의 기도 해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이라는 곳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위에 높이 펼쳐져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은 영적인 높이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드높은 곳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가까운 곳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기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은 천상의 하늘이 아니라 지상의 보다 높은 곳을 추구하기가 일쑤입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영예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렇게 올라간 높은 곳에서는 당연히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나이가 들면 노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조심조심 모아오던 재물이 일순간에 날아가는 일도 흔하지요. 학식을 통해 명예를 얻기 기대했지만 공부한 것을 잊어가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불명예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늘은 전혀 다른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하늘이라는 영역은 절대로 다른 요소에 의해서 침범될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잔인한 주인이나 엄격한 임금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만나게 되고 형성하게 된 아버지상과는 참으로 다른, 성경의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늘 창가에 서서 행여라도 돌아올지 모르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의 아버지, 돌아온 둘째 앞에서 짜증을 내는 첫째를 향해서 부드러운 충고를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는 선하고 자비로우며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신 분, 심지어 어머니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으실만큼 따뜻하고 정감있는 분이십니다. 이번 한 주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가서는 진실한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름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아지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강아지는 자

치워 버리기

현대인들은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들을 치워 버리는 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시도 그 대상이 됩니다. 자신의 악에 걸림돌을 놓고 가려는 멸망의 길을 자꾸 멈추게 하니 그것이 성가시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뜬다면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세상입니다. 온갖 종류의 쾌락에 탐닉하게 만들고 서로 다투고 싸우고 투쟁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세상이야말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뜬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눈이 감긴 이에게는 그저 코 앞의 향기로운 냄새에 이끌려 유혹을 당하는 장님과 같습니다. 그리로 가면 강도들이 목숨을 앚아 가려고 기다리고 있건만 눈이 먼 지라 분별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미사도 성가신 것, 고해성사도 얼른 해치워야만 하는 것, 그 밖의 모든 성당 활동도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이 그른 길인지 모르는 그들은 가능한 모든 십자가를 치워 버리게 됩니다. 영적인 면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의 형상 자체를 껄끄러워 하고 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가톨릭 집안에는 아예 십자고상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종교활동은 허울 좋은 계모임 수준으로 전락하고 모이면 죄스런 움직임 뿐입니다.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고, 자신의 입에 맞으면 먹고 쓰면 뱉어 버리는 행위가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그러니 타인에게 드러나는 신앙인의 모습도 망가진 상태로 드러나게 되고 당연히 그들은 신앙인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 집니다. 하느님이 복잡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악이 갈수록 그 복잡성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십자가입니다.

자비의 의미

대놓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라는 것은 죄인이 뉘우침을 가지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기꺼이 받아들여주는 것을 의미하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온갖 분탕질을 할 사람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무책임함'이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수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적인 기준의 자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즉 교회는 때로는 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죄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돌이켜 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교회 안의 선량한 이들은 때로 이 부분을 헷갈려 합니다. 무조건 잘 해주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나 '무분별한 수용'은 곧 그들 내부의 불화와 부패된 영을 야기시키곤 했습니다. 우는 아이는 달래는 게 맞지만 고집 피우는 아이에게는 훈육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일 뿐입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2티모 4,2-3)

신음과 악의

아픈 사람의 신음과 악한 사람의 악의는 올바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의 신음은 돌보아져야 하지만 악한 사람의 악의는 꾸짖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프던 사람이 악해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뉘우치고 아픔을 호소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혼란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종로에서 뺨맞은 사람이 한강에서 화풀이 하기는 쉽습니다. 한강은 한적하고 고성을 질러도 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로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다가는 당장 신고가 들어가고 심할 때는 경찰도 들이닥칠 것입니다. 완벽한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 모든 것 안에서 의인들을 당신의 길로 이끄십니다. 사람들은 약함과 유연함을 오인하곤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유연함, 즉 친절과 온유와 자비를 '약함'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의인은 오직 하나만 분별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강해 보임과 약해 보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최고의 강도를 지닌 용기를 또한 가장 큰 자비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라도 유연해질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의 무한한 전능한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순박하되 뱀처럼 영리하기를 명하시기도 했고, 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중한 것을 물어뜯고 공격해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과정

용서는 외부에서 강압에 의해서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흔히 '은총'이라고 표현되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지만, 그 용서를 올바로 얻어내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회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폭포수 밑에 빈 병을 들고갑니다. 하지만 그 빈 병에 뚜껑이 덮여 있다면 폭포가 아무리 거대하고 수량이 많더라도 병 속에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병이 뒤집어져 있다면 그나마 병 속에 조금 있던 물마저도 밖으로 빠져 나갈 것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병 주둥이를 폭포가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야 하고 또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폭포수가 그 안에 쏟아져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용서의 현실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매번의 고해성사, 한국에서는 '판공성사'를 통해서 합당하게 용서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위의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를 보는 그 순간마저도 사실은 죄를 그칠 의도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때가 되어서 판공을 보러 온 것이라면 과연 그 용서가 올바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합당한 의심이 들게 됩니다. 물론, '고해성사' 그 자체를 통해서 병의 뚜껑이 열릴 수도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면담성사'를 원합니다. 면담의 과정을 통해서 사제의 영적 능력으로 자신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요소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원래 본인이 해야 할 의지의 변화가 사제를 통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회개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아무리 좋아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바란다면 먼저 우리를 살펴보고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외적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 내가 간절히 원하던 '도구'들이 오늘날 아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고 편하게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 도구를 구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이 필요했는데 오늘날에는 타블렛만 있으면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또 컴퓨터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비용의 컴퓨터와 프로그램이 필요했고 가상악기와 음원 소스가 필요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나도 쉽고 편하게 만질 수 있는 도구로 제공되어 있습니다. 결국 도구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하려는 의지입니다. 세상의 발전은 우리가 쥘 수 있는 도구의 편리함을 더해주지만 정작 그 훌륭한 도구들을 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도구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돌판에 석탄을 들고서도 예술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컴퓨터를 들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외적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그걸 방해하는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처럼 성전에 양을 갖다 바쳐야 하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본받아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약한 '의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그것을 주변부의 탓으로 돌려 버리곤 합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성지순례를 못가서, 내가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그가 나의 여러가지를 가로막아서 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신명 30,14)

그리스도의 향기

우리는 '지상'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상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저 몇몇 단편들로 전해들을 뿐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가면 행복해질거라고 하는데 과연 그 행복감이 어떤 것인지 거의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소위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지요. 아무리 고상한 외견으로 꾸민다고는 하지만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쾌락 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성질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명예가 드높아도 아무리 권력이 드세도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허황된 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수치와 오욕이 찾아오면 인간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설령 지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더라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어갈 것이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편에 전혀 다른 기쁨의 요소가 존재합니다. 천상적인 기쁨, 영적인 기쁨이라고 흔히 일컫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가 닿기에는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도 지상적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너무나도 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영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이해하는 것에 모든 관건이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이해함에 따라 우리의 시선이 드높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시당초 쳐다보지를 않습니다. 그 구리뱀을 보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보여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우리가 지닌 선교 사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매력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지, 얼마나 친절하고 인내롭고 겸손하고 자비로우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의 삶을 살아가고 그분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면서도 부활의 희망을 놓치지 않는 데에서 다른 이들이 우리의

기억의 상처와 자국

우리가 어제를 잊을 수 있다면 많은 정서적 요소들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책도 없고 원한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행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같은 영역에 빠져들 위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상처'로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자국'으로 지니고 있는지는 바로 오늘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치유해야 합니다. 즉, 내가 당한 기억이 있다면 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고 또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이 있다면 용서 받아서 그 아픔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이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역시도 다른 이가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너그러움을 지닐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이상적인 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용서 청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서로의 내면의 어두움과 복잡 다단함을 유지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어두움을 생각지도 않은 영역에서 이끌어내기도 하고 또 가장 죄없는 존재에게 그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치유받지 못한 상처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손길, 거룩한 영역에서 직접 전달되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통해서 용서를 청하기도 하고 또 용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사랑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의 상처에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억들이 그저 '자국'으로만 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급진 사람, 교양있는 사람, 거룩한 사람

고급진 사람은 외적 화려함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값비싼 장신구와 화려한 옷, 그리고 공들인 화장과 심지어는 성형까지도 서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느 동네에 살고 어느 아파트에 살며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등등이 주요한 관심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모두 외부에서 들러붙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가장 드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흔히 속이 텅텅 빈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순식간에 부자가 된 이들 가운데 많이 발견되는 유형입니다. 교양있는 사람은 내적인 면이 채워진 이를 말합니다. 즉 학식이 있고 예의 범절에 대해서 훈련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관계 안에서 살아갈 줄을 알고 자신이 내적으로 쌓은 기본적인 가치들을 바탕으로 우아하게 상대를 대합니다. 이런 교양은 단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기를 거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교양있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마찬가지의 교양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교양있게 처신은 하더라도 가장 근본 내면이 썩어 있는 이들도 적지않게 발견됩니다. 사람을 우아하게 대하지만 그만큼 더한 영리함으로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싸우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이들은 더욱 사악하게 사람을 이용해 먹을 줄도 압니다. 자신의 교양을 이용해서 타인을 조종하는 것이지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은 밝고 맑고 책임감 있으며 성실하고 선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많습니다. 이들은 속임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가 있더라도 침묵을 지킬 줄 압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진정으로 지혜롭습니다. 흔히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민감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줄 알아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삼가고 또 하기 힘든 일도 거뜬히 해내곤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숨겨져 있어서 가난한 모습으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