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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19의 게시물 표시

폭행 당하는 하늘나라

필요를 조장해서 행복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상입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없어서 아직 행복을 만끽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그것을 얻도록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하고는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목표점을 정해서 그리로 달려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을 살아가고 '지금'을 거의 누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시간은 '현재'입니다. 그리고 그 현재라는 시간은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시간을 선으로 채워넣고 그 채워넣은 현재가 과거의 영역으로 가서 선이 가득한 과거가 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도 지금의 선의 결심을 통해서 현재로 구현될 때에 선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선이 가득한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기성'을 선택하고 참된 기쁨, 포근한 평화보다는 쾌락적인 요소를 탐하면서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언제나 긴장된 상태로 살아가며 나아가 하느님 자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분은 없는 존재로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자신이 뿌리 내려야 할 땅 자체를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땅에서 뽑혀난 식물의 운명은 말라죽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어떤 근본적인 기쁨도 없는 그 죽음의 문화 안에서 유일하게 사람에게 일시적인 충족감을 주는 것은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쓰면서 거기에 더해 명예와 권력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낙원에서 쫓겨난 사탄은 그런 이들을 유혹하여 더욱 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들, 참된 평화를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그들의 참된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가려는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이미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신뢰

우리는 기본적인 신뢰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카페에 가방을 두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정도는 한국의 기본적인 신뢰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한국을 벗어나서는 결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런 '교양'에서 나오는 상호간의 신뢰와 얕은 친교에서 나오는 신뢰는 엄연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의 신뢰는 '상호신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고 자신이 설정한 한계치를 벗어나면 쉽게 수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해줄거야 하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부탁을 거절당할 때에 우리는 배신감을 느끼곤 하지만 실은 그 정도의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선이 상대에게는 이미 선을 넘은 것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성실성과 진실함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라서 남은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만큼 하느님의 신뢰를 퍼내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역에서 실패를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신앙 안에서 진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은 서로 간에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혼인성사'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많이 엇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와 두려움을 지닌 이는 결코 그분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닌 두 사람의 혼인은 나날이 단단하게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관계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신앙이 없는 껍데기 신자들이 교회의 사회적인 면을 이용하기 위해서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외적으로' 거

사탕발린 말의 위험성

입에 사탕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타인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분명한 목적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말을 할 이유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하게 만들고 싶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평판을 좋게 만들어 두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상대를 '써먹겠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타인을 공격하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온유하고 친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두가지 덕목은 '진실함'을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온유하고 친절하기 위해서 허풍을 떨거나 위선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없는 일을 만들어내거나 과장하고 허풍을 떠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말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당연히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꼭 필요한 말을 하고 진실된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기름통을 지고 불에 다가서면 가지 말라고 충고해 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기를 얻으려는 욕구는 그들이 가진 거짓과 부당함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 인간적인 애정을 내려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박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지요. 인간의 찬사는 부질없습니다. 오늘은 유명 가수에게 환호하다가 내일은 인터넷의 호기심거리에 집착하고 또 다른날은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인기를 얻으려는 시도는 너무나 부질없는 짓입니다. 하느님을 앞에 두고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평화

사람은 내면의 생각이 그를 지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외적 힘이 세더라도 내면에 누군가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실제로 그에게 져버리고 맙니다. 생의 고뇌가 아무리 극심해도 묵묵하게 이겨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수난에도 힘들고 괴롭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화를 누릴 사람은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아무리 안전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내면이 불안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기 한마리에 성가심을 느끼면서 평화를 깨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볼리비아에서 아무리 힘든 하루를 보내도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나면 개운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리 깨끗하고 안전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사람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궁극의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바로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다가오는 삶의 도전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마태 10,11-13)

영리한 상인 이야기

한 영리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들에게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보라며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계획하는 일을 드러내며 자신을 뽐내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한 자'로 취급되는 것이 그의 상품을 팔아 이득을 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함'과 '성실함'을 열심히 광고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료 상인에게 작은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인은 평소에 그렇게나 훌륭한 일을 말하고 다니는 그에게 다가가 그 소박한 필요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주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자신에게 그 어떤 이득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작은 기회를 통해서 결국 그가 무엇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가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선을 통해서 얻어지는 현세적 이득에만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영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한 모습을 지니는 것이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화폐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니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신앙의 결단 앞에서 사람들은 주저하곤 합니다. 그 신실한 행위가 현세적인 그 어떤 결과도 내어놓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결국 세상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이지만 시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믿음이 입증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에 우리는 일부러 우리의 믿음을 '광고'하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묵묵히 성실히 오늘 하루도 길을 걸으면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훗날 하느님은 약속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