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8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은총에 깨어 있어라

다른 힘이 모든 것을 다 해 준다면 참 쉽고 편하겠지만 결국 우리에게 남아 있을 자유가 없기에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 그 모든 덕과 공은 그 일을 한 힘의 주체가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 반대로 우리 각자가 모두 해내야 한다면 이건 또 이것대로 힘든 일입니다 .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교의 절묘함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 우리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 은총 ' 으로만 일을 추진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그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 모든 것이 우리 외부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 ,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전적으로 위의 힘이 작용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주장을 조심해야 합니다 . 반면 우리는 자력으로 구원되지도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반드시 우리보다 뛰어나고 영원한 존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이겨내고 스스로 구원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은총의 강한 힘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 그러나 그런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그 은총의 힘이 끊이지 않을 수 있도록 나날이 스스로를 더 완성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 우리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 완벽 ' 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 하지만 언제나 더 나은 완전을 향해서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 그렇게 우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완전을 향해서 성실하게 나아가면 때가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이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가 '사제직'이지만 하나는 일종의 '일'로, '직무'로 주어지는 사제직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보편적'인 사제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제직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그 사제직을 자신의 고유한 직무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봉사'를 위해서 주어집니다. 자신이 마음껏 쓰고 누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에 합당하게 봉사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신자들을 기분좋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양떼를 돌보고,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 사제직을 지닌 이들도 자신의 사제직의 가치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즉 그들은 '성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기도를 거행하고 세상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오류는 하느님의 탓도, 그 사제직의 탓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주어진 선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사제들은 봉사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불어 넣고 틀어진 관계를 다시 엮어주고 가르치고 충고하고 격려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적으로 맡고 있는 양떼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먹거리를 마련해 주고 세례의 샘으로 또 성령의 샘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그저 있는 신자들과 어울려서 화려한 놀이나 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라고 주어진 직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직분을 나누어 맡은 사람으로서 직무상의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의 위기

  새하얀 옷이 염료로 인해서 물이 들 듯이 인간의 영혼도 ‘ 사상 ’ 으로 인해서 물이 듭니다 .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그에 합당한 물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 아름다운 색으로 옷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염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옷감을 상하게 만들고 더럽히는 것들도 있습니다 . 우리는 아름다운 색을 분별하고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합니다 .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생각과 사상은 우리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 이교 사상 ’ 에 대적해 와야 했습니다 . 그런 생각들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진리를 흐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엇나가게 만들기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영원을 희망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게 도와줍니다 . 하지만 이교 사상들은 그런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고 광신이나 맹신에 빠져들게 만들곤 했습니다 .   성경 안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말하듯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진리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 문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요 .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의 삶과 사랑으로 구체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 교도권 ’ 이라고 부르고 교회 공동체의 삶과 그렇게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전승을 합쳐서 ‘ 성전 ( 聖傳 )’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때마다 사상의 공격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바로 지금 현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 특히나 이 인터넷이라는 수단으로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엉뚱한 사상에 물들기가 너무나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강론(포도밭 일꾼의 비유)

  복음에서 등장하는 주인은 ‘ 돈을 벌고자 ’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그의 면모에서는 ‘ 효율성 ’ 을 중요시하는 면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만일 주인이 효율성을 따졌을 것 같으면 종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주인은 후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적인 계산에 몰두하는 약삭빠른 일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투덜거립니다 .   “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 ‘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 하고 말하였다 .” ( 마태 20,11-12)   주인은 실리를 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주인의 의도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선물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 , 즉 은총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늦게나마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초대하는 것 , 그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가능한 더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하느님은 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 아니면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 마태 20,14-15)   하지만 이 본질적 사명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 효율성 ’ 을 겨루는 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서 더 많은 신자의 수를 보유하고 재정 규모가 큰 본당이 일종의 ‘ 좋은 본당 ’ 이 되고 한 사제가 성실하게 복음을 펼치지만 그 규모가 작고 보잘 것 없는 본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본당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  

선과 악

선한 이들은 악한 이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고 악해질 수 있는 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물인 악은 도무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악함에 빠져들고 물들어가는 그가 자행하는 악이라는 것은 빛마저 빨아당기는 '블랙홀'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온전한 선, 완전한 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선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색채를 벗어나서 얼마든지 선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고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종교에 몸담고 있어도 실천하는 행위가 악하다면 그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즉 선에 대해서 무지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 '무지함'은 순수한 상태의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무지입니다. 즉 선을 보아도 그 선을 선택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고립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기성'이 바로 그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저만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일종의 빛인데 이 이기성의 극단을 달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빨아 당기기만 할 뿐, 자신에게서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나오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반응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계산된' 반응을 합니다. 즉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올 때에 타인에게 '투자'하는 식의 선을 실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이들은 배려, 선의, 호의, 친절, 사랑, 온유, 겸손과 같은 가치들이 나날이 늘어갑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그것이

안정된 신앙?

사람들은 안정적인 걸 좋아합니다. 달리 말하면 '변화'를 크게 즐기지 않습니다. 언제 집에서 쫓겨날지 안절부절하기보다는 집 한 채를 사서 마음 편히 머무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의 현실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활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정도면 되었나 싶을 그때에 신앙은 우리를 또다른 현실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흔히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안정을 찾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형식, 격식, 규율'과 같은 것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그것을 충실하게 지킬 때에 훌륭한 신앙인이 된 듯한 착각과 함께 딱히 새로운 움직임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안정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영적 내집마련의 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내면을 경계하도록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닌게 아니라 사랑을 하려면 우리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늘 지나가던 길에 강도가 있으면 안정을 꽤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늘 하던 행동대로 그대로 지나가 버리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반면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준 것입니다. 신앙의 안정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성령은 감옥에 가두어 두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성령이 왕성히 활동하실 수 있도록 안정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이겨내야 합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살피고 오늘 하루 나를 사랑으로 초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직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돌봄과 이용

돌봄과 이용은 명백히 다른 두 가지입니다. 돌봄은 사랑에서 기인하고 이용은 이기심에서 기인합니다. 돌본다는 것은 그 돌봄의 대상이 잘 되도록 정성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용한다는 것은 나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 상대를 하나의 물건처럼 써 먹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이용'을 자주 써 먹는 사람은 상대가 그것을 올바로 파악해 내지 못하도록 연막작전을 폅니다. 즉, 상대는 자신은 돌봄을 당하고 있다고 믿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 작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언제나 '사실'에 기초해서 하는 말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한 가지의 일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상대를 돌보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용하는 이는 끊임없이 당근과 채찍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의 근본 속에는 자신의 이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기성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상대에게 잘 해 주기도 또 괴롭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잘 해 주는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사소한 것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작은 애정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상대에게 한껏 호의를 베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이가 상대를 억압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한데 과거의 잘못을 자꾸 꺼내서 양심을 괴롭게 하는 방법에서부터 반복해서 자기의 목적을 언급해서 세뇌를 시키는 방법, 심지어는 깽판을 치는 방법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이 모든 방법을 다채롭게 써서 결국에는 목적을 달성하고 마는 것입니다. 선한 이들은 이런 점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남을 괴롭힌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양심의 괴로움이기에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악한 이들은 자신의 이기성을 한껏 발휘해서 선한 이들이 양보하는 영역을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악의 문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게 무엇인가요? 바로 '악' 때문입니다. 선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선은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어긋나는 길을 고쳐줍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악'입니다. 악은 잘 가는 길도 비난하고 우리가 실패하거나 넘어졌을 때에 우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짓밟아 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악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악' 때문이고, 또 그 악에 물든 사람들 때문입니다. 악은 눈에 드러나는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곰팡이가 모든 음식물에 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어제까지 좋은 음식도 곰팡이가 피면 못먹는 음식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악도 모든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립니다. 멀쩡하던 아내의 마음에 '의심'이라는 것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서 남편을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이 편집증이 되고 남편을 지독히 못살게 괴롭하게 됩니다. 악은 이처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아주 작은 미묘한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열심히 일하던 사람에게 '좌절'이라는 것이 스며들게 되면 의욕을 상실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런 그는 분노와 증오로 주변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악은 끊임없이 인간의 내면에 작용해서 그를 파괴하고 주변을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악은 분별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겉으로 드러나기는 선하게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선하게 보이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악을 간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악을 지닌 사람은 굉장히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느 때에는 천사처럼 타인에게 다가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변장의 한계성에 다다르고 나면 다시 악을 뿜어댑니다. 그래서 악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말의 종류

빛으로 이끄는 복음의 말씀이 있고, 빛을 가장해서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 후에 결국은 어둠을 지향하게 의도하는 교묘한 거짓말이 있고, 듣는 것으로 사람을 기분나쁘게 만들고 내부로부터 악을 이끌어내려는 사악한 말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작정하고 퍼뜨리는 이들에 의해서 퍼져 나갑니다. 성당 안에서 듣는다고 다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서 비로소 전달되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이 주일에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와서 미사 해설을 하고 독서를 한다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복음을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실제 삶의 모습을 아는 이들은 그가 나서서 하는 성당일을 보고는 역으로 성당에 오고 싶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의 숫자는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포하는 것을 살아가는 이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말은 교묘한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말들은 들을 때에는 우리의 귀를 기분좋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 궁극 지향점 자체가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을 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상의 괴로움을 없애 주겠다는 허황한 약속, 현세적 축복이 가득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겠다는 말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 교묘한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력을 가동해서 그런 말을 전하는 이들의 거짓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박하지만 말고 뱀처럼 영리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나쁜 이들이지만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자가 없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 교묘한 거짓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에 따라서 자신에

신령한 언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령 기도회 교재에서 '신령한 언어'를 마치 만병 통치약인듯이 다루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감추고 덜 좋은 것을 내어 놓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의도적인 것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1코린 14장에서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1코린 14,5) 하지만 교재에서는 바로 첫번째 부분만 떼어내어 소개를 함으로써 바오로 사도의 의지가 우리가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를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은사를 두고서 다른 은사를 강조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언급합니다. "누가 신령한 언어로 말할 때에는 한 번에 둘이나 많아야 셋이서 차례로 하고, 또 한 사람이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석하는 이가 없으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혼자서 하느님께만 말해야 합니다." (1코린 14,27-28) 이처럼 신령한 언어는 조심스럽게 집행되어야 하는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은사입니다.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성장하게 합니다." (1코린 14,4) 신령한 언어에 대해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서간 14장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심리학의 위험

사람들 가운데에는 '죄'가 없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양심이 숨쉴 곳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 죄의 무거운 사슬이 자신을 계속 옭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날 길을 찾아서 '자기 합리화'나 '중독'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는 훌륭한 대체품은 바로 '심리학'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를 훌륭하게 대체해 줄 수 있는 과학스러운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악의 경향도 '~증후군', '~장애'라는 말을 붙이면 아주 훌륭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피는 양측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자기 자신이 그런 면모를 가질 때에 그것이 병증이라는 핑계 하에 스스로의 양심을 위로시킬 수 있고, 또 반대로 그것이 내 가까운 사람에게 드러날 때에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의 일종의 장애이기에 변화할 수 없다는 식의 회피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심리학의 유용성에 대해서 의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칼이라는 도구가 수술과 요리를 위해서 쓰일 때에는 사람의 생명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려고 할 때나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도구는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이라는 도구가 정말 사람을 살리려는 도구가 될 때에는 그의 심리적 영역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핑계로 '자유의지'가 해야 하는 역할을 회피하는 도구로 쓰기 시작할 때에는 위험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인간에게는 죄가 있고 그 죄로 인해서 악이 만연하고 그 악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사랑도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통해서 선을 이룰 수 있으며 그 선은 사람들의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탓을 돌리기를 즐기는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책무

부당함은 하느님의 탓?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흔히 하느님에게 탓을 돌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곤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니' 모든 이를 구해야 마땅하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지요. 하지만 당신의 전능과 선이 '정의'를 무시하고 집행될 수는 없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하느님을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선에 합당한 결과를 주지 않고 악을 못본체 하는 하느님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게 느껴지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부족함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십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이 무분별함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선을 한껏 발하지만 인간이 그 선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할 때에 그 선을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능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느님은 '한낱 피조물의 욕구'에 그 전능을 맡기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장 지혜롭고 가장 드높은 분별력에 그 전능의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내적 분별입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확장해도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악한 이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이 빛으로 돌아서려고 마음 먹을 때에 그에게 선으로 돌아설 만큼의 빛이 부족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렀을 때에는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정의의 때'가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기회들을 올바로 이용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악에 머물러 있는 이라면 하느님은 '정의'를 실행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은 '현세'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부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