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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일은 바로 그 사명을 핵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일선 본당에서는 바로 그 핵심 목적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균형있게 짜여져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튼튼해야 하기에 잘 먹이고 돌보아져야 한다. 그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성사인 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미사, 즉 성찬례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돌봄이고 먹임이다. 그러나 그 직무 수행 만으로 이루어지는 '사효성'(일 자체로 얻어지는 은총)외에도 우리는 그 직무에 성심을 다해야 한다. 그 성찬례를 맑은 마음으로 거행하도록 고해성사도 정성껏 주어야 하고 그 밖의 성사적 직무들도 문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에도 참가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본당의 나머지 일들은 이제 잘 먹은 구성원들의 내면을 다지고 거룩한 지식을 심화시키는 영역, 서로의 친교를 나누는 영역, 나가서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영역 등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이 선호하는 활동만을 치중해서 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즉, 구성원들의 내면을 다지고 거룩한 지식을 심화시키는 영역은 제대로 준비하기도 힘들고 막상 그것을 하면 '재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즉 사람들은 놀러 다니고 싶지 무언가를 성실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교회 내의 여러가지 구체적인 활동 면에서 '편식'이 심해지게 된다. 말 그대로 성당이 '놀음판'이 되는 것이다. 성당은 하느님을 알고 이웃과의 사랑을 훈련하는 곳인데 먹고 마시고 놀러다니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름만 거룩한 것이 붙은 행사들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성지순례'를 얼마나 자주 또 많이 다니는지 서로 단체별로 경쟁하듯 하는데 같은 성지순례를 진정한 순례의 의미로 다녀

입시생과 그리스도인

한 학생이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나 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은 묘하게 닮아 있다.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들어갈 곳에서 요구하는 것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영어를 잘 하기를 바라는 곳인데 수학 만을 준비해 가면 낭패가 될 것이 뻔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주님이 기다리시는 사랑을 많이 준비해 가야 하지 성당 안에서의 높은 지위나 많은 봉헌 같은 것을 준비해서 갔다가는 퇴짜를 맞을지도 모른다. 입시생은 끈기가 필요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외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있으면 시간을 들여 노력해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끈기가 필요하다. 성경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내적 가치가 있으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입시생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체력도 잘 관리해야 한다. 시험 전날 몸이 안좋아져서 무너지면 실컷 공부한 것이 소용이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 영적인 것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낼 현세의 삶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기도회만 열심히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역할도 바람직하게 세워 놓아야 한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거룩한 지식을 현세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 입시생에게 늘 좋은 환경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 윗층에서 아이들이 발구르는 소리가 날 수도 있고 독서실에서도 누군가가 떠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매달리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복음을 전하는 상황, 사랑을 실천하는 상황이 마냥 아름답고 좋으라는 법이 없다. 언제나 악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고 선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선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입시생의 기쁨은 합격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구원이다. 그러니 합격 이전에 생일이나 기념일이 있다고 긴장을 늦추고 지나치게 기념하고 있다가는 합격의 기쁨을 놓

신부님 어찌해야 하나요?

예) 마음이 우울합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그 우울함의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본인이 마땅히 대처해야 하는 현실의 십자가를 지는 게 힘들어서 우울하다면 그건 당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영역입니다. 외부적 악한 영의 활동에 의한 거라면 굳은 믿음을 기초로 한 기도나 은총의 통로인 고해성사나 미사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아픔이 있는 거라면 의학의 도움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심리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의사를 찾아가 보셔야 합니다. 이게 답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고려해보지 못한 전혀 색다른 영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이 딱 자신의 길을 정해 놓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지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솔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가 먼저 자신의 통증 부위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는데 대놓고 의사에게 와서 알아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영역이 스스로를 먼저 솔직하게 직시하는 데에서 해결이 됩니다. 적어도 '올바른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만한 이들이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수많은 악습에 찌들어 있는 이들이 자신이 지닌 것은 남들도 다 하는 '통상적'이라고 우겨댑니다. 그러는 통에 자신의 아픈 곳이 갈수록 더 썩어 들어가게 됩니다. 영혼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이는 이러한 상황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료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고 '진료과목'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들고 올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하느님에게 올바로 방향 지워 두어야 합니다. 그 기초가 사라져 버리면 그는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일하기 싫어하는 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1코린 4,8) 가난한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까탈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우고 또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 기뻐합니다. 반면 부자는 굉장히 까탈스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늘 편안하고 안락하고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살아온지라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이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일로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물질적 부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면의 부자됨'에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배가 불렀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더 맛깔스러운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가르침에서도 비슷하니 배가 부르면 더이상 본질의 가르침이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1코린 4,5)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일은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현재의 직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매진해야 하고 훗날 하느님 앞에서 그 사명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가 하는 것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에게 곧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쭐거리는 이들의 말이 아니라 힘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합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매를 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구매 욕구를 자극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새로운 것이 더 낫다는 '신조'아래에서 새로나온 물건을 소유하고 보란듯이 드러내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옛 것은 낡고 몹쓸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표주자는 당연히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적인 부모님의 모습, 어르신을 공경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낡은 것이 되었고 지금은 무엇이든 반발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것이 멋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낡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물건들 뒤에서 어둠의 영이 미소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새롭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