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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문둥이가 퍼 준 물 한 그릇 (마진우 요셉 신부 作)

한참을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기가 마을인가 싶어서 달려가보면 오아시스의 환상이기를 여러차례... 그렇게 그 사람은 메말라갔고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솟아난 그는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물이었습니다! 그렇게나 간절히 찾아 다니던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이가 꽤나 깊어 보였습니다. 지금 기력으로 저 우물벽을 타고 내려갔다가는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이 야밤에 우물을 길러 온 모양입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에게 물 한 그릇만 퍼주시오!” 그러자 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이 가진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서 건네 주었습니다. 심하게 목이 말랐던 그는 그 물을 받아서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두레박에 얼굴을 파묻고 물을 마시던 그는 그제야 혼미하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그 물을 건네준 이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고맙... 아, 아니! 당신은!” 은은한 달빛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쪽 눈은 눈이 있었던 빈 자국만 남아 있었고 얼굴 피부는 흐느적거리는 고무를 얹어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팔은 더러운 붕대로 얼기설기 휘감아 있었는데 손가락은 엄지와 검지 뿐이었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둥이잖아! 에이 제길!” 그 사람은 갑자기 성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이 온 몸을 쓸어 내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문둥이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런 취급은 그에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나그네는 이내 길을 멈춰 섰습니다. 왜냐하면 이 밤에 자신은 길을 모르고 있었고 그 문둥이는 이 야밤에 물을 길러 나온 걸로 보아 마을까지 가는 길을 알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우

빛과 어둠

빛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어둠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어둠을 사랑하면서 그 어둠을 드러내면 주변에서 눈치를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어두움을 감추고 선한 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 빛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근원지가 빛이고 따라서 빛을 기반으로 자신의 약함의 무게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의 내면에 어둠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 앞에서 '에이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악은 실존하는 것이며 각자의 내면의 영혼의 선택적 수용에 따라서 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은 '교묘하기' 때문에 선의 자녀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빛으로 위장한 뒤에 선의 자녀들을 이용해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의 자녀들은 그런 상황이 가능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때로 이런 상황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부모가 악에 사로잡혀 있거나 반대로 자녀가 악에 물들어 버린 경우입니다. 그러면 혈연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부모가 어둠이고 자녀에게 빛이 발하기 시작할 때 어린시절 내내 겪어오는 부모의 이해못할 행동 앞에서 자녀는 시달리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때가 이르러 그 각자에게 분명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면서 걸어갑니다. 빛의 자녀는 '지혜'를 배워 나가면서 어둠을 적절히 피하고 또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법도 훈련해 나갑니다. 반면 어둠을 본격적으로 선택한 이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들이 다방면으로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쥐고 선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욱 자신의 어둠에 잠겨 드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때가 차면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

[악보] 그런 일은 없어요

모래시계

모래시계는 참 재미난 도구입니다. 안의 모래는 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던 모래가 다 차면 모래시계를 뒤집을 뿐입니다. 그러면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지요. 변화의 시도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아내에게서 마음이 떠난 남편을 어떤 종류의 굴레로 구속시킨다고 해서 그가 멈추게 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의 끌림 자체가 아내 아닌 존재에게로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세상에 많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본당에서 뭔가 바뀌길 바라면서 변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은 결국 모래시계의 방향을 바꾸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모래는 결국 내려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요소 가운데에는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영역을 바꾸면 마치 모래시계에서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모래가 공기보다 가벼워져서 도리어 위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가르친'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내면 속에 세상을 향한 방향이 하늘을 향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했던 것이고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네,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틀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흐르는 것들의 진정한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림시기 동안 이루어야 하는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자선

자선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우리가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은 '가난한 이에게는 돈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자선에 연관된 활동이 거기에 촛점이 맞추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선이라는 활동을 너무나 소극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1. 가난한 이가 필요한 도움 일단 명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돈이 필요한가? 네, 당연합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돈인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정말 기본적인 생활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도움인지 아니면 이미 충분히 존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에게 우리가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해서 던져주는 것인지는 중요한 성찰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가난한 이를 돕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망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도움은 반드시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서 그가 이미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다음에 주려는 도움은 그의 탐욕을 키우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위탁 도움의 문제점 그리고, 우리가 돕기를 바라면서 위탁하는 주체의 성실성도 문제가 됩니다. 정말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실제로는 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광고효과를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전혀 엉뚱한 목적으로 재정이 사용된다는 그것은 또 어찌할 것입니까? 예컨대 본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빨랑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금액들이 행여 다른 누군가의 술값으로 계산되고 있다면 그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이런 요소들을 알고 자선의 대상자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자선의 방식을 올바로 선택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3. 다양한 자선 그리고 과연 다른 이를 돕는 것이 '물질' 뿐인가도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우리 주변에서 정말 기본 생활이 부족한 사람을 찾

사람들의 진정한 힘

사람들의 힘이 모이면 큰 힘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힘의 내부 속성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기업은 '소비주체'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소비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으면 소송도 불사하면서 그의 권리를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정치권력은 '지지자'에게 충실합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흘리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정보를 바탕으로 지지자들이 즐기는 고착된 사고를 심어줄 수 있고 더 큰 지지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 자기 편이 아닌 이, 또는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하면서 그 밖의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에게는 적대감을 쉽게 드러냅니다. 연예계는 '팬층'에서 얻는 인기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면 아무리 자극적인 요소라도 기꺼이 실행하곤 합니다. 심지어는 비윤리적인 요소라도 사람들 사이에 이슈가 될 수 있으면 기꺼이 선을 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섹시한 의상을 입히고 야릇한 춤을 추게 만드는 건 기본이고 그 밖에도 이슈가 될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실행하고 퍼뜨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별다른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 이들은 연예인들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런 영적 전쟁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은 이 가운데에서 당신을 찾는 이들을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사람들의 힘이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에게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는 달리 이 사랑이라는 것은 특정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

영적인 고통이 찾아오는 날

육체의 질병은 확연하게 눈에 드러나게 됩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병을 고치러 의사를 찾아갑니다 . 차에 부딪혀 부러진 다리를 그냥 방치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 그 통증과 외적 기괴함은 하루빨리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 영적인 면 ' 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 당장 밥 먹고 살아가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 탐욕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더 교만해지기 시작하고 더 성마르고 사악해지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리고 그 헛된 갈망과 허전함을 다시 세상의 안락과 사치로 채우려고 듭니다 .   그러다가 그 갈망의 마지막에 통증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그릇되이 살아왔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 영적인 통증은 육체의 통증과 달라서 굉장히 늦게서야 그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 세속적인 친교가 즐거움이라고 여겨왔던 그들은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고 또 나름 흥청대는 친교 속에서 가깝게 지내왔다고 생각한 사람이 하나씩 둘씩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다툼의 관계가 되고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 또 자기가 벌어들이고자 생을 헌신한 돈이라는 것이 딱히 생의 위안이 되지 않고 지리멸렬함으로 변하고 또 뜻하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후회를 하게 됩니다 .   예수님은 당대의 실제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 , 그리고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 가장 기본적인 필요는 채워져야 마땅한 것이고 그들에게는 그 일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의 그런 해방감으로 인해서 얻어지게 될 기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 내적인 해방 ', 즉 그들 개개인의 죄악에서 해방을 선물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