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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의 게시물 표시

선포하는 사람, 선포를 듣는 사람

결국 받는 것은 모두 똑같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요. 구원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는 우리가 쌓은 것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선물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선포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선포를 들어서 영원한 나라에 가는 것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일까요? 먼저 '선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이해한 사람, 주님의 사명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편의성에 따른 삶이 아닌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사랑하고 즐기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더욱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포하려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말씀 선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선포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편한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포의 고생스러움을 겪으면서도 그에 대한 열정을 쏟는 것은 그 일이 더 마음에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서 더욱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선포'하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물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분명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 까닭으로 인해서 선포를 꾸준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수련'을 하게 됩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말하는 '수덕생활'이라는 것이 말씀선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덕을 실천할 수 있지만 오랜 동안 꾸준히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은 이, 인내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에 항구하고 꾸준하게 머물러 온 이의 내적 힘은 상당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는 흔히 반대가 찾아오고 그것을 이겨내면서도 묵묵하고 꾸준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영적인 힘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이사 29,19-21) 원래 소송이라는 것은 공정을 회복하는 것인데, '남을 지게'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잘못 이용하면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가 되어서 법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한 이들이 그것을 통해서 악인들의 손을 들어 주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법정에서는 바로 이 법의 맹점을 이용해서 '남을 지게' 만드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그 이득을 빨아먹고 살지요.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은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에게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올가미'가 필요합니다. 계획된 덫, 상대의 약점을 노려 그것을 쥐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계략, 획책, 속임수 등등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고자 시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무죄한 이들의 권리를 뒤틀어 버려야 합니다. 있는 이의 주머니돈을 보전하기 위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정반대도 가능합니다. 정당하게 벌어들인 몫을 빼앗으려고 죄 없는 그의 권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런 이들의 기본적인 성향 안에는 '포악함'이 숨어 있습니다. 사나운 성향을 지니고 있고 악한 의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또한 그들은 빈정대기를 즐깁니다. 정면에서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내용을 뒤에 가서 여론을 형성하고 상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반쪽짜리 믿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마태 9,29-31) 하나는 알고 다른 하나는 몰랐던 이들. 육체의 눈을 떠버렸지만 마음의 눈을 올바로 뜨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지 않고 반대로 실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사람의 위대한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 신뢰로 인해서 자신의 감겨져 있던 육체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주님의 명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훗날 옳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일이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그분의 일에 맞서는 내적인 힘을 형성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마태 9,34) 우리는 때로 겉으로 일어난 일에 집착한 나머지 그 일의 내적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이 외적 성공을 거두면 자연스레 그 내적인 도전이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연예인이 아주 어린 나이에 성공을 하면 그 결과로 다가오는 인기와 부에 취해서 타락의 길로 초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지하고 미리 예방할 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그래서 성공 후에 다가오는 여러 유혹들에 시달리고 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눈 먼 이를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일, 죽은 이를 일으키는 일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에 우리를 바로잡아 줄 인도자가 필수적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 역할을 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예로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

자신이 쓰려고 돈을 번다.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이 쓰지도 않을 걸 기를 쓰고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헌데 그러다보니 '잉여분'이 생긴다. 내 일상의 필요를 넘어서서 돈이 점점 모이고 축적된다. 그래서 '소유'의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이미 있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자기 한 몸 쉴 만한 그 이상을 찾아서 물건들이 가득차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돈이 남는다. 통장에 숫자가 늘어난다. 더 큰 숫자가 되어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 통장의 숫자는 늘수록 더 갈증이 생긴다. 항상 나보다 더 잘 사는 이가 보이고 나보다 더 멋지고 여유로운 사람이 보인다. 온통 타인의 '좋아 보이는 점'만 뒤쫓으니 돈은 항상 부족해 보인다. 이미 하루에 일정액을 써도 죽을 때가지 쓰고도 남을 돈을 축적해 두고도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투자를 한다. 그러다가 때가 다가온다. 죽음이다. 자신의 마음을 축적해 놓은 것에 빼앗긴 나머지 죽음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늘어가는 주름을 감추려고 값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실력이 좋다는 의사를 찾아가 시술을 받는다. 온갖 건강식품을 죄다 먹어보고 몸에 좋다는 건 찾아 다니며 한다. 그러나 죽음은 멈추지 않고 다가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축적된 재물을 노리는 수많은 이들, 가까운 이들, 먼 이들... 심지어 자식들도 돈 앞에서 하이에나가 되어간다. 이제쯤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헌신했던가. 그제야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생의 촛불은 꺼져가고 그의 손에 남아 있는 재물이 스스로를 고소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생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대로 생은 마감되고 만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거절했고, 정의에 따라 그 결과는 그에게 돌아간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

성령(주님의 영)의 일곱가지 은사

성령(주님의 영)의 일곱가지 은사 - 마진우 요셉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이사 11,2-3) 흔히 성령의 7가지 은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일차적으로 성경에 표현된 그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1, 경외2 한국말로 애매하게 표현되기에 서로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다음은 교리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스페인어로 각각에 대응하는 단어를 배열했습니다. 지혜(sabiduría) 통찰(inteligencia) 의견(prudencia) 굳셈(valentía) 지식(conocer) 공경(respetar) 경외심(temor) 지혜라는 것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뜻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의 시선 안에서 사건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혜를 지닐 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나도 인간은 조급해 하지 않을 수 있고 느긋하고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통찰, 다른 표현으로 깨달음, 영리함이라는 것은 그 지혜를 적용하는 영리함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그것을 막 다루면 결과가 엉망이 되듯이 우리가 지혜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찰이라는 것은 그런 영적인 영리함을 의미합니다. 의견이라는 것은 스페인어 해석에 따르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여정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더 나은 상황으로 보이는 요소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향인지를 잘 알아서 거기에 굳건히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굳셈이라는 것은 '용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

애니어그램의 위험성,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둡시다.

 애니어그램 대 가톨릭 교회 릭 케파트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의 여러가지 것들을 닮아가는 것은 꽤나 일반적인 일이다. 그리스도교계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있어왔다. 실례로 "Easter"(부활절)라는 단어는 이교도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다른 종교의 것들을 취하고 그리스도교화 하는 것은 유용한 일이고 다양성을 더하는 건강한 일이다. 다른 종교가 가톨릭에서 요소를 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도 있었다. 부두교가 그렇게 했다. 가톨릭을 아프리카 민간 신앙과 뒤섞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해가 없는 예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가 가톨릭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취해서 선한 이들을 기만하고 속여서 그들의 종교로 끌어 들이려는 노력이 있을 때도 있다. 뉴에이지가 이런 일을 한다. 마녀들을 시중드는 영들은 전통적으로 검은 고양이였으며 "정령(심부름 마귀)"으로 불리어왔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은 고양이 대신에 날개와 긴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령의 사진을 두고 "정령"이라 부르지 않고 "천사"라고 부르면 가톨릭 신자들은 속아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는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서 수정 피라미드를 쓴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멍청한 신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테지만, 수정을 대신해서 루르드의 물병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즉시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을 얻게 된다. 훌륭한 가톨릭 신자들은 천사와 루르드, 또는 창조나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내용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뉴에이지 종교 시스템 안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가톨릭 신자들이, 심지어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죄와 그 해소라고 볼 수 있는 용서에 대한 메커니즘이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이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빚지면 100만원을 갚으면 그걸로 해방되는 식이라면 정확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무언가가 되겠지요.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그런 물질적인 거래의 메커니즘을 살아갑니다. 죄와 용서는 그런 물질적인 거래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물질적인 손해만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과 그리고 그 영혼의 의지와 관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또다른 '의지'로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그 잘못을 철두철미하게 뉘우치는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야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물질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입니다. 그 사람은 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고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용서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는 그와 연계된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느님과 연계된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 용서를 하고 하지 않는 것이 물리적인 거래가 아니라 영혼의 작용이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즉, 용서는 조건을 채워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저울에 무게를 달아서 그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실으면 저울이 움직이는 식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는 용서하도록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전히 뉘우쳤고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드러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부족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 받아들여지고자 한다면 기꺼이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의지의 작용입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여전히

삶으로 드러내기

 개신교 신자분들의 '오해'와 '곡해'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릴 때에 그릇된 지식을 습득한 아이가 자신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시선에는 우리가 '그릇된 종교'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나름으로는 우리를 그 그릇된 종교에서 꺼내 '구원'으로 다가가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이 신념이 꽤나 두텁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생활해오고 머물러 온 종교적인 문화권 안에서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된 관념이 아니라 꽤나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세뇌를 당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섣부르게 그들의 그 관점을 돌리려고 한들 잘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들을 설득할 만한 올바른 교리 지식이나 교양 정보가 없기도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보완될 수 있고 보충될 수 있어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 나갈 수 있겠지만 개신교 측에서는 항상 새로운 논쟁거리를 만들고 더 애매하고 곤란한 상황을 조성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지고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듣고 싶어하는 귀가 열린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대부분 우리를 이기고 싶어서 나서는 것이지 진정한 대화를 하고자 다가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저들의 일종의 논쟁 시도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내미는 설득의 시도에 부정적인 반응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할 수 없는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을 진실로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해서 그들이 우리의 생활을 보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말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심지어는 거짓과 사기를 칠 수도 있지만

전대사

대사라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 죄를 용서받은 뒤에 남게 되는 벌을 ‘면제’해주는 교회가 허락하는 은총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 아이가 쓰레기를 버리는 습성이 있는데 자신의 그런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이미 버려져 있는 쓰레기가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치워야 하는데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에 아이보다 정리정돈과 청소를 잘 하는 어른이 그 아이의 부족한 능력을 보완해서 쓰레기를 치워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이에게는 뉘우치는 것으로 충분하니 들어가 쉬라고 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죄와 관련해서도 일어나는 이런 일을 교회가 ‘대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사에는 벌의 일부를 없애는 ‘한대사’(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올바로 보고 포항 흥해성당을 성지순례 하고 정해진 기도를 바치면 주교님이 부여하신 권한으로 한대사를 얻습니다)와 우리가 이맘때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대사’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가톨릭 사전에 담겨 있는 전대사에 대한 항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지, 혹은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실제 전대사를 은행창구에서 대출 이자를 받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즉 교회가 정한 외적 조건을 이행하기만 하면 절로 그 전대사라는 값비싼 어음을 받는데 그

자녀를 거룩하게 키우기

흔히 자녀를 키운다고 할 때에 우리는 먹고 입히고 재우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일차적인 돌봄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더욱이 ‘미성년자’ 즉 보호자가 없이는 자신의 앞가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는 필수적이자 부모의 의무입니다. 이 첫 돌봄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치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녀가 마땅히 누릴 권리를 우리가 베푸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자녀가 그에 대해서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섭섭함을 지니기 시작하는 부모가 존재합니다. 두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나친 돌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돌봄의 수준이 아닌 다른 부모와의 경쟁 구도로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서로 비교하고 누가 더 좋은 옷을 입히고 더 잘 먹이는지를 비교하기 시작할 때에 과열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자녀의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른의 만족도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꾸로 자녀는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이 마치 어른의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바라는 것은 지나치고 과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만 하더라도 그것을 따스한 애정으로 할 때에 자녀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거룩한 돌봄입니다. 자녀의 내면 안에는 하나의 영혼이 씨앗처럼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영혼은 또 다른 하나의 어른이 되고 영원 안에서 나의 벗이 될 존재라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현재의 관계로 살아갈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은 결국 우리의 형제가 될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입히고 먹이는 수준으로 책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영적인 돌봄을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 부모의 거룩한 의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부

'할로윈' 기사 번역

https://www.aciprensa.com/noticias/el-padre-fortea-sobre-halloween-un-catolico-puede-disfrazarse-y-participar-75095#  할로윈에 대한 포르테아 신부님의 이야기 “천주교 신자가 변장을 하고 참석할 수 있는가?” (2020년 10월 27일 aciprensa 기사 번역) 할로윈이 멀지 않은 이때, 스페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악마론의 전문가인 호세 안토니오 포르테아 신부는 할로윈 축제에 천주교 신자가 참석하고 변장하고 사탕을 얻으러 다닐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알려왔다. ACI 방송과의 대화에서 포르테아 신부는 “답변이 간단하지만은 않네요.”라고 했다. “100년, 2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이 축제 자체는 나쁠 게 없습니다. 북아메리카와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50여년 전부터 변장을 하고 가정을 방문할 뿐이지요.” 이 시기와 관련해서 그는 말했다. “변장은 무척이나 무죄하고 순진한 것입니다. 누구는 당근으로 변장하고, 누구는 보안관, 누구는 소방관으로 변장하지요. 나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내용을 분명히 했다. “요 몇 수십년 동안 이 축제는 위험한 특성을 지닌 ‘마술’과 연계되는 면모를 조금씩 취하기 시작합니다. 비행사나 의사와 같이 순진하던 변장은 더이상 그렇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변장이 더욱 고어(gore)하게 피를 흘리게 되고 마술과 연관을 맺게 됩니다. 고어(gore)라는 말은 영화의 장르로서 피와 극도의 신체적 고통이 난무한 장면을 말한다. 신부는 “따라서 이 축제의 양상은 무척이나 부정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그리고 할로윈 축제 가운데 “매번 마술과 더욱 연계될수록 그 지배력이 드러나게 될 거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할로윈 축제 중에 변장을 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그걸 두고 딱히 악마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지요. 왜냐하면 그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고 훌륭한 가톨릭 신자이고 자녀들에게 좋은 의미의 변장을
 위키피디아 존 비 칼훈(John B. Calhoun) 생쥐 실험 1960년대 초, 국립 정신 건강 의회(NIMH) 메릴랜드 풀레즈빌 외각 시골에 자리를 마련한다. 그 연구소는 다양한 연구과제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칼훈이 주도한 연구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인 쥐 세계 실험이 창조된 곳이었다. 1968년 7월에 네 쌍의 쥐들이 거주지로 들어갔다. 그 거주지는 한 변이 2.7m 크기의 금속 우리였으며 높이는 1.4m 였다. 각각의 면은 수직으로 된 네 개의 금속망 터널이 있었다. 터널은 그들의 둥지 상자와 먹이상자, 식수통을 이어주었다. 먹이나 물, 거주지에 부족함은 없었다. 포식자도 없었다. 유일한 적은 공간의 한계였다. 처음에는 개체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매 55일마다 두배로 뛰었다. 315일째 되는 날 개체수는 620마리가 되었다. 그 뒤로 개체수 증가 추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매 145일마다 두배가 될 뿐이었다. 600일이 되자 마지막으로 생존하게 된 생쥐가 태어났다. 비록 실험 장치는 둥지를 마련할 공간에 따르면 3840마리의 생쥐가 살 수 있었지만 전개체수는 겨우 2200마리에 불과했다. 315일에서 600일 사이의 기간에 사회 구조와 일반적인 사회적 행동의 붕괴가 관찰되었다. 그들의 행동학적 기행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젖을 떼기도 전에 새끼를 쫓아내 버리고, 새끼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동성애 경향이 증가하고, 능력있는 수컷은 자신의 영역과 암컷을 꾸준히 방어하는 데에 무능해졌으며, 암컷은 흉포해졌고, 무능한 수컷은 소극적으로 변하고 점점 더 방어할 수 없는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600일이 지나자, 사회적 붕괴는 계속되었고 개체수는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암컷은 새끼를 낳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암컷의 짝은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구애를 하고 서로 싸우는 데에 애쓰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 필수적인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자신을 치장

편함을 찾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

교회의 직분들은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자리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의 올바른 필요를 잘 바라볼 줄 알아야 올바른 봉사를 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오랜 시간을 일하다보면 성령의 힘을 기반으로 한 '봉사'가 어느새 개인의 '편의'위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슬슬 신음이 시작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편하게 하려면 다른 사람이 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유기적인 관계라서 하나가 소홀히 한 부분이 있으면 분명히 그 부담이 다른 곳에 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한 쪽 다리에 무게를 덜 두면 그 무게가 다른 쪽 다리에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제가 편함을 찾으면 신자들이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교사회장이 편함을 찾으면 교리교사들이 힘들어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단체의 장이든 그가 더이상 '봉사'가 아니라 '편함'을 찾기 시작할 때에 그 밑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마땅히 메꾸어야 했을 공백의 부담을 떠안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당연히 위로 올라가야 할 전달 사항이 전해지지 않고, 또 자신들에게 제때에 전해져야 할 지시 사항이 내려오지도 않습니다.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결정이 미루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결정이 올바른 의겸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윗선에 앉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런 일이 멈추어지면 공동체 사이의 소통이 멈추게 되고 결국 공동체는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봉사하기 위해서 파견받은 이들입니다 . 우리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안일함에 빠져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

지옥만 피하면 하늘나라에 가는가?

마음 안에서 우리가 즐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갈 방향입니다. 선한 이들에게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이득을 좋아하는 이들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이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는 이는 자기 스스로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지옥만 피한다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의 해악은 싫어하지만 결국 지옥스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에 동화되어 갑니다. 지옥의 고통이 싫은 거지 실은 지옥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면이 교만하고 세상의 쾌락을 주인으로 삼는 자들은 내면에 이미 지옥이 형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다만 그것이 구현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결정장애, 우유부단함은 선이 아닙니다. 참된 선은 이든 저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올바른 감각 속에 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향한 올바른 결정과 실행이 필요합니다. 하늘나라는 귀로 들어 가는 곳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 내어야 가는 곳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지옥만 피한다고 하늘나라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가 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38)

겉과 속

  오늘 복음은 겉과 속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모습이 있고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는 내적인 모습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적인 모습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엄청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꾸준히 광고하고 그렇게 해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실제로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복을 입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누군가를 믿고 돈을 맡겼다가 훗날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겉보다는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으며 그것을 얼마나 남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나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사람들 앞에 내어놓기 위한 외적 행위일 뿐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를 얼마나 진실되이 했으며 간절하게 했느냐를 하느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사는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기도에 빠져드는 이는 그것이 그의 향기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향기는 1독서에 등장하는 내적 열매들입니다. 이런 가치들은 절대로 변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와 같은 것은 늘면 늘수록 좋은 가치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풍기는 이 냄새를 이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 외적인 형태 그 자체로 내면을 드러내는 일들도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1독서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육의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일들은 굳이 숨길 것도 없이 영혼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행동들은 그 자체로 영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런 행동은 뉘우치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이지 그것을 두둔하고 변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짓고 짓고 또 짓고...

교회는 당연히 영적으로만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금도 필요하고 부동산도 필요합니다. 건물이 있어야 신자들이 추위나 더위도 피할 수 있고 비를 맞지 않고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외적 요소에만 집착하는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부수적인 요소가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다 보니 돌아다닐 교통수단도 필요하고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말씀을 듣고 나눌 장소도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이 근본 목적을 소홀히 한 채로 아무리 건물에 투자하고 외적인 인프라를 구축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번지르르한 집이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서로간의 존중과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라면 최소한의 요소만 갖추고도 화목을 꾀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를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이고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 그것이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그것만큼 교회의 성장률을 드러내는 지표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역에 신자수가 얼마인지, 그리고 성당 재정은 얼마인지, 성전의 신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릿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러나 정말 그 신자들이 행복한지, 목자는 얼마나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지, 그리고 그런 선한 이들이 얼마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와 같은 요소들은 '측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짓고 짓고 또 짓고...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지어야 할 건물은 영적인 건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많은 아침에 저 혼자 해보는 독백입니다.
천사 영적인 존재 영적인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영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영적인 면을 올바로 성찰하고 이해하게 될 때에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외양보다는 역할 천사가 어떤 모습이냐,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식의 질문들은 영적인 존재에 대한 올바른 관심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분명 영적인 존재로서 필요한 외양이 있겠지만 그 외적 형상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들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성실한 봉사자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이들입니다. 타락 천사들도 의지를 가지고 있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게 되면 원래 해야 하는 직무와 반대되는 일을 하는 이들이 됩니다. 즉, 우리 인간을 유혹하고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들을 사탄 또는 악마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적인 존재의 의미를 통해서 천사를 찾고 또 나아가 하느님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악마에게만 사로잡혀 그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나친 호기심은 금물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 천사가 존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전통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신심을 잘 받아들여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머무르기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루카 9,4) 우리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빠르게 변화하기를 바라고 그 변화의 기준점은 나 자신입니다. 즉 내가 편하면 좋은 것이고 내가 불편하면 싫은 것이 됩니다. 아주 즉각적이고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과연 올바른 기준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일이 될 것이며 우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일이 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친구 집단에서 아주 타락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다고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속한 단체가 뜻 있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이 나에게 불편을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머무르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히려면 묵묵하게 비와 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견뎌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파견 받은' 영역에서 묵묵히 머물러야 합니다. '떠날 때'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현세의 시점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의 생의 마지막 커튼이 벗겨질 때까지 우리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잠언 30,8) 복음 정신에서 '가난'을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경은 극심한 가난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에 쓰러질 군중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적 '가난'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탁하고 세상의 다른 영역(부귀영화, 명예, 권력 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다른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생의 요소들이 존재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존엄을 해치지 않을 정도이어야 합니다. 극심한 가난은 생존의 위협을 가져오고 생존이 위협은 인간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극단의 상황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이웃의 가장 기초적 필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애덕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는 저마다 '정해진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표현대로라면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필요가 모두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 일의 도구를 빼앗는 것은 그의 필요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허영과 사치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의 혼란이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필요한 물건'이 다른 이에게는 '사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친구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물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가 모두 '넉넉히' 가지기를 세뇌시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지도록 해서 낭비하고 허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

사상의 역사

사상의 역사를 대충 살펴보면 인간은 먼저 별다른 무리 없이 조화롭게 살아왔습니다. 오랜 기간을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살아왔습니다. 물론 서로 필요한 소통을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있었겠지요. 그건 지혜에서 지혜에로 전해져 내려왔고 당연히 나이가 많고 속 깊고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그런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상'이라는 것이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주장을 올바로 검증하는 문화가 생기고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고 생각되는 주장들이 힘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모여진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갔습니다. 당연히 보다 '이성적'인 것이 주목받고 각광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이라는 체계 안에서 생각들을 정돈해 갔지요. 그러다가 '기독교'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까지 지배적으로 작용해오던 이성을 바탕으로 하던 체계 안에서 소위 믿음의 학문, 곧 신학이 정립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리 올바른 사상과 생각이 있다고 해도 '죄'라는 것이 그것을 파괴하고 엉뚱한 결과물을 내어놓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오류에 물든 주류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하나의 중심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고유성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이성을 통해서 실천적인 '과학'도 발달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이루어내는 결과물에 인간 스스로 감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중세를 벗어나 근세로 가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했습니다. 주류의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각자가 주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모두 '올바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고 근본적으

조급한 마음

"이러이러한 현상은 큰일이다 바꾸고 개선 시켜야 한다!" 헌데 하느님은 무반응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장 바뀌어야 할 요소가 있는데 하느님은 느긋하게 관망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답답해집니다. 굉장히 초기부터 존재해 온 갈등입니다. 물론 결과가 예정되어 있는 갈등이지요. 하느님이 승리하시고 조급해하는 이들이 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과 찰나는 싸움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걸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까요?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시게 두면 되는 걸까요? 이러한 생각 역시 또다른 극단을 달리는 생각입니다. 모두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전형적인 흑백논리이지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고 사랑 그 자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자신의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며 또한 제자리에 멈춰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꾸준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개선시켜 나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이 우선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생각들은 저마다 천차만별이라서 누구는 하느님에게 불만을 갖고, 누구는 이웃에게 불만을 갖고, 누구는 사회구조에 불만을 갖고, 누구는 경제에 불만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항상 불안해하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언가가 합리적이지 않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잡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은 아이가 수술실에서 수술을 집도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야기됩니다. 수술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규교육을 올바로 받고 수많은 임상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는

주님의 길

창조주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들은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고 살아가겠지요.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서로 충돌시켜가면서 살게 될 것이고 거의 대부분은 '힘의 다툼'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더 강력한 이가 권력을 쥐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의 질서를 힘없는 이들이 따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구요. 반면 창조주의 존재를 수용하는 이라면, 그리고 그 창조주가 가장 전능하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가 만든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우리 역시도 '창조된' 이라면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당연히 뒤따라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온통 뒤섞여 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지니는 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들어높이며 서로 의견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분쟁'이나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시간낭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분명히 현존하는 세상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질서를 하나라도 더 알고 하루를 살면서 하나라도 더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잘 모르겠으니 도와 달라고 하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누군가가 채워 주기를 기다리기에 우리가 줄 수 있는 참된 믿음과 희망을 전해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확고히 믿는 '신념'을 바탕으로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이들과는 공연한 시간낭비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들이지 '모든 것을' 감싸안고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착함병'에 걸린 이들이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

행복을 누가 싫어하는가?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이신 분은 그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선물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에 그 선물은 당연히 영원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참된 행복은 당연히 '영원한 행복'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주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시 빼앗아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상대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이신 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고자 하십니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행복의 수준 차이가 생겨나게 됩니다. 지상에서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순간의 쾌락을 느끼는 것도 인간에게는 '순간이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 줍니다. 술도, 담배도, 마약도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나버릴 행복'은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탐하는 인간은 결국 꺼져버릴 행복을 소유하고, 혹은 희망하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가지기 전에는 가지지 못해서 불행하고, 반대로 가지고 나서는 잃어버릴까봐 걱정에 시달려야 하기에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지상에서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것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유이고 수많은 성인들의 순교의 열정을 칭송하는 이유가 됩니다. 영원한 행복에 대한 갈망과 실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들의 노력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 의지의 동의가 필요하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살릴 것인가?

귀금속 장신구를 잔뜩 지닌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구조요원이 뛰어들어서 물에 잠겨 들어가는 사람을 수면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급요원은 그의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낸 뒤에 그를 다시 물 속에 잠겨 들도록 버려두고 홀로 물가로 나옵니다. 그리고 건져낸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사람들 앞에 보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구해 내었습니다." 무엇을 구한 것일까요? 아니, 무엇을 구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물 밖에서 구조요원을 기다린 사람들은 어떤 것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되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이번 기회에 물에 빠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일찍부터 물 속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란트 하나를 땅에 묻어두고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땅 속에서 달란트는 녹슬어갔고 점점 그 하나 자체로도 쓸모없는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활용을 해야 했고 그것으로 다른 달란트를 벌어 들여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사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라질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기존 교회의 구조와 틀이 아닐까요? 성당의 재정과 인력 충원이 걱정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진정 살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두고 있을까요?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떤 수단들이 보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렇게 다가선다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더 쉽고 빠르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마련한다면 여전히 할 일은 많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껍데기를 쓴 컨텐츠를 양산해 내는 것은 또

공허한 정신에는 진리가 깃들 수 없습니다.

정신이 공허함에 빠져 있게 되면 올바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사탕을 더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이에게 식사를 하라고 초대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리는 가까이 있으나 우리가 그 진리에 다가서지 않는 이상 우리를 밀고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올바른 선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 정신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나서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피상성'에 젖어들게 됩니다. 즉 외적 껍데기로서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될 뿐 실속있는 신앙, 참된 신앙에 나아가지 못하는 찌뿌둥한 정신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지나치게 즐기는 사목자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는 하지만 그에 온전히 몸담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우리를 그릇됨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론상의 진리'가 아닌 실천적인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진리는 나이 많은 어르신부터 이제 갓 지력이 깨어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함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나 언어적 기원을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선한 것이 바람직하고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 세속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할 때에 이 기초적인 진리가 망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요약한 모든 율법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질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반대로 세속의 이끌림에 올바르게 저항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전혀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달리기 단상

달리기를 하면서 부쩍 안정되어가는 제 육체를 느낍니다. 항상 뭔가 찌뿌둥하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면서도 어딘가 아파오던 육체가 다시 탄탄하게 잡혀가고 생기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은 더 훈련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아침에 운동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피로감이 몰려 와서 다른 일을 손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500미터를 달리는 것만 해도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 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제 2키로 정도는 꾸준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이상을 넘어 달려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무리가 가는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번 한 주가 다르고 또 다음 한 주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달리기에는 호흡이 중요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숨을 쉬고 있다가는 어느 새 헐떡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호흡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면서 내가 하는 호흡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지만 딱히 숨을 특별히 따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쉬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산소가 부족하면 들이키는 것이고 들이켰으면 자동으로 내뱉을 뿐입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면 그 호흡이 느껴지게 되고 호흡을 가로막는 아주 작은 계기라도 전체의 몸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아침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간이 가장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점심을 먹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식사 후의 몸의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서 마냥 걷게 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아침이 좋은 이유는 그 특유의 시원함 때문입니다. 날씨가 점점 더 더워져가면서 그나마 덜 더운 아침 시간이 운동하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시간을 더 즐기게 됩니다. 뛰는 동안은 항상 의지와의 싸움입니다. 언제라도 멈춰 버리고 싶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몸이라는 녀석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언제나 더 편하고 쉬운 것으로 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가

신앙은 감정적 흥분이 아니다. 실천적 응답이다.

그것은 감정적 흥분의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명 연예인이 자연을 보호하자고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도 함께 감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수십평의 크기의 집에 가정부까지 두고 살아가는 엄청 부유한 연예인이 자신의 삶이 힘들다고 방송에 나와서 눈물을 보여도 실제 존재하고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직시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런 감정적 흥분의 상태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동시에 내 내면의 '자유의지'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진리의 총집합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 묶인 이를 풀어주고 억압된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진리의 행위 앞에서 우리는 '응답'을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앙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헛된 감정적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의 구체적 실천이 뒤따르게 됩니다. 즉 반대로 이야기해서 삶이 뒤따르지 않는 일시적인 동기부여의 상태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짠 맛을 잃어가고 빛을 잃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응답'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린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고 계시고 우리의 응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대답을 이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두려움을 조장하는 신심을 조심하십시오.

신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항상 존재하는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까지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나 '모자람'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기초적인 상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그릇된 신심 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모자라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면서 지나치게 과중한 심적 부담감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책임있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더한 열성을 내도록 강요하면서 결국 자신들이 주창하는 신심 행위에 전적으로 빠져들도록 만들어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으니 바로 '부자됨'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를 채찍질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벌어도 벌어도 항상 뭔가 부족한 듯이 느껴지도 항상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내가 가난하고 부족하다고만 생각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 자체가 이미 잘 살고 있고 충분히 인간으로서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비슷한 일이 '영성'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라선 계단보다 항상 한 걸음 정도만 더 높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합니다. 헌데 그릇된 형태의 신심은 우리에게 긴박감을 조성하고 우리가 하는 노력 자체를 부족함으로 치부하면서 지나치게 무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신심활동 단체에서도 때로 발견되는 오류이지만 그래도 지도 신부님이 계시고 교회와 연계를 맺고 있는 단체는 아무래도 심각한 오류에 빠져들기는 힘든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징표를 읽어라!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이라는 두려움으로 신앙인들을 붙들어온 지가 한참 되었다. 설레고 기뻐서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제외될까 두려워서 겨우 붙어 있던 시간들이었다. 코로나가 오고 이제는 교도권에서 먼저 관면을 주었다. '바이러스가 있는 동안은 주일 미사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헌데 이 바이러스가 사라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덕분에' 푹 쉬게 되었다. 그마나 지탱되어 오던 최후의 신앙감이 끊어지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 미사 참례율이 60%대로 뚝 떨어지게 되었다. 교회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미사를 '그리워 할' 것이라고. 그러나 일어난 일은 정반대이다. 사람들은 이 참에 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게 마련인데, 교회가 이부자리를 깔아 준 김에 깊이 잠들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신자들이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진 도구의 날을 세워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는다. 누군가 언젠가 무언가 하겠거니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성가시고 힘든 일을 맡길 뿐이다. 어떤 연구팀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겠거니 생각만 할 뿐 설령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더라도 참여할 의지가 별로 없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현실은 모든 이에게 어마어마한 도전이 되는 시기이고 이는 교회에도 마찬가지 현실이다. 우리는 이전의 동일한 수단과 방법만을 지니고서는 앞으로 다가오는 이 시기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 전에 하던 것을 조심스럽게만 반복해서 신앙감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복음 선포의 구체적 방식을 연구해야 할 시기이다. - 감염의 걱정 없이 마주할 수 있는 만남의 수단 강화(youtube, zoom 등 활용) - 성당이라는 영역에 국한되지 않은 복음 선포의 자리 재인식(직장, 친구 및 친지모임 등) -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신앙생활의 구체적 방식 마련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교회의 역할

교회는 기본적으로 '만남'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는 말씀처럼 우리는 말씀을 직접적인 현장에서 삶으로 들려 주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빛과 짠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가 다가왔다.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인 사람의 접촉을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여행이 금지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보편화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어디서 어떻게 전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피치 못한 선택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전에 풍성하던 수많은 '만남'의 자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남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색다른 신앙 전파의 구체적인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 사실 만남이라는 것을 올바로 살펴본다면 그 안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심지어 가족들마저 서로 올바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 서로 간에도 별다른 대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고 그것을 당연시 여겨왔다. 집은 숙박하는 곳으로서의 기능 외에는 많은 기능을 상실해 오고 있었다. 코로나는 인간에게 자연을 되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인간에게 '가정'을 회복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의 앞으로의 키워드는 '가정 안에서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신앙감이 남아 있는 이들을 잘 먹여 충분히 신앙의 기쁨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그들이 저마다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참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특정 집단에게 미루어져야 할 과업이 아니다. 이는 교회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머리에 재를 뒤집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요한 17,14) 우리 교회는 오랜 기간을 이단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방법은 철학을 근본으로 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부분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보완해 왔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들을 얻게 되었고 아직도 연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책 속에 갇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은 구체화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살아있는 진리이시고 우리는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눈 앞에서 숨쉬고 살아있는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사형을 당할 아무런 탓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이 진리였지만 빌라도는 그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도 강했고 그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뚜렷한 방향을 지닙니다. 그것은 선이고 사랑이며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입니다. 그분의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신앙을 연구하고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영역은 바로 이 분명한 방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누려야 할 그들의 안락을 포기하도록 초대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었고 수많은 성인들을 박해의 현장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오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원치

신앙을 살아내고 있는가?

다이어트에 대한 수백장의 연구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실제적인 체중과 외모의 변화입니다. 회개에 대한 논문보다 강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실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론 안에서는 누구나 박사가 되고 누구나 감독이 되고 누구나 순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극단에서 이론을 전개해 나가면 둘 사이의 다툼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바탕으로 그것을 증거해 내는 사람의 말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펼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신앙을 실현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교회가 힘이 없다면 신앙을 증거해 내는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우리는 신앙은 이래야 한다는 현실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반드시 해야만 했던 것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여지를 찾아서 또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갈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가진 온 힘을 다해서 신앙을 증거해 온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것을 살아내려는 사람을 통해서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잘못된 생각 죄 - 법칙을 깨는 것, 규율을 어기는 것 의로움 - 법칙을 지키는 것, 규율을 지키는 것 심판 - 법칙을 지키고 깬 이들에 대한 최종 산술 계산(예시; 의로움5 - 죄3 = 의로움2) 죄 - 나를 믿지 않기에 잘못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나면 그분의 본연의 의미와 그 내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뜻, 즉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죄로 인식하게 된다. 의로움 -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을 꾸준히 볼 수 있으면 의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 의로움이 녹아들어 있고 그분이야말로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전통'을 넘어서는 참된 의로움을 예수님은 자주 행하셨다.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로움의 본질이다.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의로움에 더 가까운 행위이다.  심판 -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에 잘못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중에 그 가격을 계산하듯이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 동참을 시도하려는 모든 이들 역시도 동시에 심판을 이미 받은 셈이다. 물론 반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 역시도 이미 심판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영리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이미 그 내면의 근본적인 의도 자체에서 심판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을 '완성'해가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엄마가 된다는 것

사람들은 엄마가 된다는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 없이 수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소중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채로 이미 생물학적인 엄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긴밀히 연계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소중한 소명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돌봄을 하는 상위 개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인격'을 마주하고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적 올바른 성장은 물론 아이의 지적인 성장과 정서적 성장을 돌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아이의 영적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단순히 인큐베이터나 배양접시가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엄마'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 부분은 이제 지상의 사명을 다 마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 당신의 신적 권위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의 엄마가 되도록 사명을 맡기는 부분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만 돌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고 감성이 온전하도록 애써 보살피고 사랑해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안심하고 성모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을 올바로 사랑하고 그분의 참된 모습을 닮고자 노력할 때에 우리도 올바른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소명이고 거룩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소중한 직분으로서 '엄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