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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성요셉

우리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자식들이 하나도 없으면서 '아버지', 즉 영혼의 아버지인 신부라고 불립니다. 옷을 사입히고 밥을 사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버지가 할 역할이지만 사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에 대해서 단순한 육체적 돌봄만 행한다고 자동으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라는 역할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권위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올바른 권위가 아니라 '지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리 누르려는 시도를 합니다. 돈과 권력을 쥐고 있고 정보를 장악하고 있으면 다른 이들의 숨통을 막고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소유' 즉 가질 수 있는 영역을 늘려 가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세상 안의 모든 것이 소유 가능한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심지어는 관계까지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요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권위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 권위있는 아버지는 가족들을 내리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끌고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요셉이라는 인물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특징입니다. 요셉 성인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드러나는 그의 첫째 덕목은 '의로움'입니다. 그는 내면에 의로움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올바름은 냉철한 칼날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요셉 성인은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의로움을 적용은 하되 결코 날카로운 칼로 들이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잘 된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이 요셉 성인이 지니고 있던 '아버지'로서의 면모였습니다. 또 하나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요셉 성인의 '초월성'입니다. 바로 하

보이지 않는 도움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다채로운 차원들로 이루어집니다. 육체는 실질적인 도움의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실제 배가 고픈데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질문은 아무 짝에 소용이 없습니다. 국밥이라도 한그릇 사다 주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초적인 욕구의 충족을 벗어나서 인간은 다른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상 편지를 통해서 감동을 느끼는 것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받는 게 없지만 그런 영상편지나 손편지와 같은 것을 통해서 작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그러한 요소들이 감성을 자극해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성도 '가르침'을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전달해 줄 수 있고 그러면 무지에 잠겨 있던 이들이 배우게 됩니다. 이성을 통한 훌륭한 도움의 수단입니다. 헌데 '영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도움을 주고 받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사랑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수단으로 오고 갑니다. 따스한 손길을 통해서도 사랑이 오갈 수 있고 사랑을 가득 담은 물건들이나 편지를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헌데 이 영혼의 도움 가운데에는 특별히 '보이지 않는 도움'이 존재합니다.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그 햇빛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빛은 여전히 존재하고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눈을 감고 뜨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보지 않고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은총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기도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바탕으로 그 기도의 대상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기도를 받는 사람도 흔히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그 대상자에게 어떤 힘을 미칠 수 있을까 의심을 가

회개와 은총

구부러진 자로 바른 재단을 할 수가 없듯이 어지러워져 있는 우리의 마음으로 '바른 회개'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는 데에는 위로부터의 손길, 즉 은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도 은총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은총이 우리가 할 일을 모두 대신해서 회개를 이루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열이 나면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러면 부모님이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보고 병원으로 데려가 의사 선생님에게 맡기듯이, 자신에게 무언가 이상 증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에 자신을 맡기는 그 최초의 움직임은 다른 이가 알아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적인 면에서 모든 것은 은총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은총으로 우리를 되돌리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금가락지도 화려한 옷도 송아지도 모두 아버지에게서 무상 제공 되는 것이지만 그 돌아서겠다는 결심은 오로지 아들의 몫이었습니다.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은 단순히 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그 내면에는 사람들의 내적 영역이 긴밀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비리가 일어나는 것은 탐욕 때문이고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증오와 죄악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것들이 내면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내면의 힘을 바로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우리는 그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리워진 것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상상으로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떠올리는 순간 그것이 현재화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내적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적 공간은 무한하며 그 무한함 속에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유한함을 바탕으로 창조되었지만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 영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쏟아부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던 과거의 모든 사건들을 현재처럼 체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기억을 나누어 받고 영원을 살아오고 있는 천사들의 기억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죽음 이후에 육체의 장막이 한계를 잃어버린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나누면서 그것을 새롭게 '현재화'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그곳에서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어둠의 요소는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곳은 승리한 이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그래서 모든 아픈 기억들도 치유된 형태로 우리에게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기쁨을 현재화해서 나눌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선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한'을 품은 이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가서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는 지금 이 순간도 숨겨진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자연은 그분 앞에서 순명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고 원한을 남기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숨길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

니네베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요나 이야기

  우리는 흔히 요나 이야기를 요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봅니다 . 그러면 파란만장한 예언자의 삶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복잡다단한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 그러나 반대로 니네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요나 이야기는 의외로 굉장히 단순합니다 .   어느날 나타나 자신들의 일상을 파고든 한 인물이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 "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 뭔가 드라마틱한 일도 의미심장한 사건도 없이 단지 한 인물이 그들 가운데 서서 주님으로부터 전해진 예언의 말을 전한 것입니다 .   니네베 사람들이 남달랐던 것은 바로 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메세지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들은 그 메세지를 신중하게 들었고 진지하게 응답했습니다 .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자신들의 그릇된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 자신의 일상을 파고든 이 소소한 메세지에 자신의 길을 재점검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   지금의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크게 신경쓰고 살지 않습니다 .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며 이런 것이 대세라고 하면서 재물과 인기와 권력을 탐하고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악습을 실행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 예언자 ’ 를 보내십니다 . 그러나 그 예언자의 메시지는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라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다 .   표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표징은 하느님이 드러내고 싶은 것이 표징입니다 . 표징이 주어지지 않아서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읽을 생각이 없어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표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시고 우리가 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