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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0의 게시물 표시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교회의 역할

교회는 기본적으로 '만남'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는 말씀처럼 우리는 말씀을 직접적인 현장에서 삶으로 들려 주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빛과 짠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가 다가왔다.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인 사람의 접촉을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여행이 금지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보편화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어디서 어떻게 전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피치 못한 선택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전에 풍성하던 수많은 '만남'의 자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남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색다른 신앙 전파의 구체적인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 사실 만남이라는 것을 올바로 살펴본다면 그 안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심지어 가족들마저 서로 올바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 서로 간에도 별다른 대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고 그것을 당연시 여겨왔다. 집은 숙박하는 곳으로서의 기능 외에는 많은 기능을 상실해 오고 있었다. 코로나는 인간에게 자연을 되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인간에게 '가정'을 회복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의 앞으로의 키워드는 '가정 안에서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신앙감이 남아 있는 이들을 잘 먹여 충분히 신앙의 기쁨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그들이 저마다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참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특정 집단에게 미루어져야 할 과업이 아니다. 이는 교회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머리에 재를 뒤집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요한 17,14) 우리 교회는 오랜 기간을 이단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방법은 철학을 근본으로 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부분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보완해 왔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들을 얻게 되었고 아직도 연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책 속에 갇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은 구체화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살아있는 진리이시고 우리는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눈 앞에서 숨쉬고 살아있는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사형을 당할 아무런 탓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이 진리였지만 빌라도는 그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도 강했고 그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뚜렷한 방향을 지닙니다. 그것은 선이고 사랑이며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입니다. 그분의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신앙을 연구하고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영역은 바로 이 분명한 방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누려야 할 그들의 안락을 포기하도록 초대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었고 수많은 성인들을 박해의 현장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오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원치

신앙을 살아내고 있는가?

다이어트에 대한 수백장의 연구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실제적인 체중과 외모의 변화입니다. 회개에 대한 논문보다 강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실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론 안에서는 누구나 박사가 되고 누구나 감독이 되고 누구나 순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극단에서 이론을 전개해 나가면 둘 사이의 다툼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바탕으로 그것을 증거해 내는 사람의 말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펼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신앙을 실현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교회가 힘이 없다면 신앙을 증거해 내는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우리는 신앙은 이래야 한다는 현실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반드시 해야만 했던 것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여지를 찾아서 또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갈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가진 온 힘을 다해서 신앙을 증거해 온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것을 살아내려는 사람을 통해서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잘못된 생각 죄 - 법칙을 깨는 것, 규율을 어기는 것 의로움 - 법칙을 지키는 것, 규율을 지키는 것 심판 - 법칙을 지키고 깬 이들에 대한 최종 산술 계산(예시; 의로움5 - 죄3 = 의로움2) 죄 - 나를 믿지 않기에 잘못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나면 그분의 본연의 의미와 그 내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뜻, 즉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죄로 인식하게 된다. 의로움 -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을 꾸준히 볼 수 있으면 의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 의로움이 녹아들어 있고 그분이야말로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전통'을 넘어서는 참된 의로움을 예수님은 자주 행하셨다.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로움의 본질이다.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의로움에 더 가까운 행위이다.  심판 -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에 잘못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중에 그 가격을 계산하듯이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 동참을 시도하려는 모든 이들 역시도 동시에 심판을 이미 받은 셈이다. 물론 반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 역시도 이미 심판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영리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이미 그 내면의 근본적인 의도 자체에서 심판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을 '완성'해가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엄마가 된다는 것

사람들은 엄마가 된다는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 없이 수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소중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채로 이미 생물학적인 엄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긴밀히 연계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소중한 소명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돌봄을 하는 상위 개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인격'을 마주하고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적 올바른 성장은 물론 아이의 지적인 성장과 정서적 성장을 돌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아이의 영적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단순히 인큐베이터나 배양접시가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엄마'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 부분은 이제 지상의 사명을 다 마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 당신의 신적 권위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의 엄마가 되도록 사명을 맡기는 부분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만 돌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고 감성이 온전하도록 애써 보살피고 사랑해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안심하고 성모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을 올바로 사랑하고 그분의 참된 모습을 닮고자 노력할 때에 우리도 올바른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소명이고 거룩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소중한 직분으로서 '엄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