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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천사 영적인 존재 영적인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영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영적인 면을 올바로 성찰하고 이해하게 될 때에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외양보다는 역할 천사가 어떤 모습이냐,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식의 질문들은 영적인 존재에 대한 올바른 관심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분명 영적인 존재로서 필요한 외양이 있겠지만 그 외적 형상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들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성실한 봉사자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이들입니다. 타락 천사들도 의지를 가지고 있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게 되면 원래 해야 하는 직무와 반대되는 일을 하는 이들이 됩니다. 즉, 우리 인간을 유혹하고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들을 사탄 또는 악마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적인 존재의 의미를 통해서 천사를 찾고 또 나아가 하느님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악마에게만 사로잡혀 그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나친 호기심은 금물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 천사가 존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전통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신심을 잘 받아들여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머무르기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루카 9,4) 우리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빠르게 변화하기를 바라고 그 변화의 기준점은 나 자신입니다. 즉 내가 편하면 좋은 것이고 내가 불편하면 싫은 것이 됩니다. 아주 즉각적이고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과연 올바른 기준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일이 될 것이며 우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일이 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친구 집단에서 아주 타락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다고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속한 단체가 뜻 있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이 나에게 불편을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머무르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히려면 묵묵하게 비와 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견뎌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파견 받은' 영역에서 묵묵히 머물러야 합니다. '떠날 때'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현세의 시점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의 생의 마지막 커튼이 벗겨질 때까지 우리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잠언 30,8) 복음 정신에서 '가난'을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경은 극심한 가난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에 쓰러질 군중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적 '가난'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탁하고 세상의 다른 영역(부귀영화, 명예, 권력 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다른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생의 요소들이 존재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존엄을 해치지 않을 정도이어야 합니다. 극심한 가난은 생존의 위협을 가져오고 생존이 위협은 인간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극단의 상황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이웃의 가장 기초적 필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애덕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는 저마다 '정해진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표현대로라면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필요가 모두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 일의 도구를 빼앗는 것은 그의 필요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허영과 사치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의 혼란이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필요한 물건'이 다른 이에게는 '사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친구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물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가 모두 '넉넉히' 가지기를 세뇌시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지도록 해서 낭비하고 허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