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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기사 번역

https://www.aciprensa.com/noticias/el-padre-fortea-sobre-halloween-un-catolico-puede-disfrazarse-y-participar-75095#  할로윈에 대한 포르테아 신부님의 이야기 “천주교 신자가 변장을 하고 참석할 수 있는가?” (2020년 10월 27일 aciprensa 기사 번역) 할로윈이 멀지 않은 이때, 스페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악마론의 전문가인 호세 안토니오 포르테아 신부는 할로윈 축제에 천주교 신자가 참석하고 변장하고 사탕을 얻으러 다닐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알려왔다. ACI 방송과의 대화에서 포르테아 신부는 “답변이 간단하지만은 않네요.”라고 했다. “100년, 2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이 축제 자체는 나쁠 게 없습니다. 북아메리카와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50여년 전부터 변장을 하고 가정을 방문할 뿐이지요.” 이 시기와 관련해서 그는 말했다. “변장은 무척이나 무죄하고 순진한 것입니다. 누구는 당근으로 변장하고, 누구는 보안관, 누구는 소방관으로 변장하지요. 나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내용을 분명히 했다. “요 몇 수십년 동안 이 축제는 위험한 특성을 지닌 ‘마술’과 연계되는 면모를 조금씩 취하기 시작합니다. 비행사나 의사와 같이 순진하던 변장은 더이상 그렇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변장이 더욱 고어(gore)하게 피를 흘리게 되고 마술과 연관을 맺게 됩니다. 고어(gore)라는 말은 영화의 장르로서 피와 극도의 신체적 고통이 난무한 장면을 말한다. 신부는 “따라서 이 축제의 양상은 무척이나 부정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그리고 할로윈 축제 가운데 “매번 마술과 더욱 연계될수록 그 지배력이 드러나게 될 거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할로윈 축제 중에 변장을 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그걸 두고 딱히 악마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지요. 왜냐하면 그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고 훌륭한 가톨릭 신자이고 자녀들에게 좋은 의미의 변장을
 위키피디아 존 비 칼훈(John B. Calhoun) 생쥐 실험 1960년대 초, 국립 정신 건강 의회(NIMH) 메릴랜드 풀레즈빌 외각 시골에 자리를 마련한다. 그 연구소는 다양한 연구과제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칼훈이 주도한 연구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인 쥐 세계 실험이 창조된 곳이었다. 1968년 7월에 네 쌍의 쥐들이 거주지로 들어갔다. 그 거주지는 한 변이 2.7m 크기의 금속 우리였으며 높이는 1.4m 였다. 각각의 면은 수직으로 된 네 개의 금속망 터널이 있었다. 터널은 그들의 둥지 상자와 먹이상자, 식수통을 이어주었다. 먹이나 물, 거주지에 부족함은 없었다. 포식자도 없었다. 유일한 적은 공간의 한계였다. 처음에는 개체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매 55일마다 두배로 뛰었다. 315일째 되는 날 개체수는 620마리가 되었다. 그 뒤로 개체수 증가 추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매 145일마다 두배가 될 뿐이었다. 600일이 되자 마지막으로 생존하게 된 생쥐가 태어났다. 비록 실험 장치는 둥지를 마련할 공간에 따르면 3840마리의 생쥐가 살 수 있었지만 전개체수는 겨우 2200마리에 불과했다. 315일에서 600일 사이의 기간에 사회 구조와 일반적인 사회적 행동의 붕괴가 관찰되었다. 그들의 행동학적 기행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젖을 떼기도 전에 새끼를 쫓아내 버리고, 새끼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동성애 경향이 증가하고, 능력있는 수컷은 자신의 영역과 암컷을 꾸준히 방어하는 데에 무능해졌으며, 암컷은 흉포해졌고, 무능한 수컷은 소극적으로 변하고 점점 더 방어할 수 없는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600일이 지나자, 사회적 붕괴는 계속되었고 개체수는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암컷은 새끼를 낳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암컷의 짝은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구애를 하고 서로 싸우는 데에 애쓰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 필수적인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자신을 치장

편함을 찾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

교회의 직분들은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자리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의 올바른 필요를 잘 바라볼 줄 알아야 올바른 봉사를 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오랜 시간을 일하다보면 성령의 힘을 기반으로 한 '봉사'가 어느새 개인의 '편의'위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슬슬 신음이 시작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편하게 하려면 다른 사람이 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유기적인 관계라서 하나가 소홀히 한 부분이 있으면 분명히 그 부담이 다른 곳에 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한 쪽 다리에 무게를 덜 두면 그 무게가 다른 쪽 다리에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제가 편함을 찾으면 신자들이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교사회장이 편함을 찾으면 교리교사들이 힘들어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단체의 장이든 그가 더이상 '봉사'가 아니라 '편함'을 찾기 시작할 때에 그 밑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마땅히 메꾸어야 했을 공백의 부담을 떠안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당연히 위로 올라가야 할 전달 사항이 전해지지 않고, 또 자신들에게 제때에 전해져야 할 지시 사항이 내려오지도 않습니다.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결정이 미루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결정이 올바른 의겸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윗선에 앉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런 일이 멈추어지면 공동체 사이의 소통이 멈추게 되고 결국 공동체는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봉사하기 위해서 파견받은 이들입니다 . 우리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안일함에 빠져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

지옥만 피하면 하늘나라에 가는가?

마음 안에서 우리가 즐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갈 방향입니다. 선한 이들에게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이득을 좋아하는 이들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이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는 이는 자기 스스로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지옥만 피한다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의 해악은 싫어하지만 결국 지옥스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에 동화되어 갑니다. 지옥의 고통이 싫은 거지 실은 지옥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면이 교만하고 세상의 쾌락을 주인으로 삼는 자들은 내면에 이미 지옥이 형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다만 그것이 구현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결정장애, 우유부단함은 선이 아닙니다. 참된 선은 이든 저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올바른 감각 속에 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향한 올바른 결정과 실행이 필요합니다. 하늘나라는 귀로 들어 가는 곳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 내어야 가는 곳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지옥만 피한다고 하늘나라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가 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38)

겉과 속

  오늘 복음은 겉과 속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모습이 있고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는 내적인 모습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적인 모습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엄청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꾸준히 광고하고 그렇게 해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실제로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복을 입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누군가를 믿고 돈을 맡겼다가 훗날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겉보다는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으며 그것을 얼마나 남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나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사람들 앞에 내어놓기 위한 외적 행위일 뿐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를 얼마나 진실되이 했으며 간절하게 했느냐를 하느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사는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기도에 빠져드는 이는 그것이 그의 향기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향기는 1독서에 등장하는 내적 열매들입니다. 이런 가치들은 절대로 변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와 같은 것은 늘면 늘수록 좋은 가치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풍기는 이 냄새를 이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 외적인 형태 그 자체로 내면을 드러내는 일들도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1독서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육의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일들은 굳이 숨길 것도 없이 영혼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행동들은 그 자체로 영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런 행동은 뉘우치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이지 그것을 두둔하고 변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짓고 짓고 또 짓고...

교회는 당연히 영적으로만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금도 필요하고 부동산도 필요합니다. 건물이 있어야 신자들이 추위나 더위도 피할 수 있고 비를 맞지 않고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외적 요소에만 집착하는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부수적인 요소가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다 보니 돌아다닐 교통수단도 필요하고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말씀을 듣고 나눌 장소도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이 근본 목적을 소홀히 한 채로 아무리 건물에 투자하고 외적인 인프라를 구축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번지르르한 집이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서로간의 존중과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라면 최소한의 요소만 갖추고도 화목을 꾀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를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이고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 그것이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그것만큼 교회의 성장률을 드러내는 지표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역에 신자수가 얼마인지, 그리고 성당 재정은 얼마인지, 성전의 신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릿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러나 정말 그 신자들이 행복한지, 목자는 얼마나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지, 그리고 그런 선한 이들이 얼마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와 같은 요소들은 '측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짓고 짓고 또 짓고...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지어야 할 건물은 영적인 건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많은 아침에 저 혼자 해보는 독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