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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애니어그램의 위험성,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둡시다.

 애니어그램 대 가톨릭 교회 릭 케파트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의 여러가지 것들을 닮아가는 것은 꽤나 일반적인 일이다. 그리스도교계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있어왔다. 실례로 "Easter"(부활절)라는 단어는 이교도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다른 종교의 것들을 취하고 그리스도교화 하는 것은 유용한 일이고 다양성을 더하는 건강한 일이다. 다른 종교가 가톨릭에서 요소를 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도 있었다. 부두교가 그렇게 했다. 가톨릭을 아프리카 민간 신앙과 뒤섞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해가 없는 예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가 가톨릭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취해서 선한 이들을 기만하고 속여서 그들의 종교로 끌어 들이려는 노력이 있을 때도 있다. 뉴에이지가 이런 일을 한다. 마녀들을 시중드는 영들은 전통적으로 검은 고양이였으며 "정령(심부름 마귀)"으로 불리어왔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은 고양이 대신에 날개와 긴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령의 사진을 두고 "정령"이라 부르지 않고 "천사"라고 부르면 가톨릭 신자들은 속아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는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서 수정 피라미드를 쓴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멍청한 신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테지만, 수정을 대신해서 루르드의 물병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즉시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을 얻게 된다. 훌륭한 가톨릭 신자들은 천사와 루르드, 또는 창조나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내용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뉴에이지 종교 시스템 안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가톨릭 신자들이, 심지어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죄와 그 해소라고 볼 수 있는 용서에 대한 메커니즘이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이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빚지면 100만원을 갚으면 그걸로 해방되는 식이라면 정확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무언가가 되겠지요.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그런 물질적인 거래의 메커니즘을 살아갑니다. 죄와 용서는 그런 물질적인 거래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물질적인 손해만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과 그리고 그 영혼의 의지와 관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또다른 '의지'로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그 잘못을 철두철미하게 뉘우치는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야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물질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입니다. 그 사람은 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고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용서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는 그와 연계된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느님과 연계된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 용서를 하고 하지 않는 것이 물리적인 거래가 아니라 영혼의 작용이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즉, 용서는 조건을 채워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저울에 무게를 달아서 그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실으면 저울이 움직이는 식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는 용서하도록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전히 뉘우쳤고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드러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부족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 받아들여지고자 한다면 기꺼이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의지의 작용입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여전히

삶으로 드러내기

 개신교 신자분들의 '오해'와 '곡해'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릴 때에 그릇된 지식을 습득한 아이가 자신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시선에는 우리가 '그릇된 종교'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나름으로는 우리를 그 그릇된 종교에서 꺼내 '구원'으로 다가가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이 신념이 꽤나 두텁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생활해오고 머물러 온 종교적인 문화권 안에서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된 관념이 아니라 꽤나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세뇌를 당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섣부르게 그들의 그 관점을 돌리려고 한들 잘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들을 설득할 만한 올바른 교리 지식이나 교양 정보가 없기도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보완될 수 있고 보충될 수 있어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 나갈 수 있겠지만 개신교 측에서는 항상 새로운 논쟁거리를 만들고 더 애매하고 곤란한 상황을 조성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지고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듣고 싶어하는 귀가 열린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대부분 우리를 이기고 싶어서 나서는 것이지 진정한 대화를 하고자 다가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저들의 일종의 논쟁 시도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내미는 설득의 시도에 부정적인 반응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할 수 없는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을 진실로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해서 그들이 우리의 생활을 보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말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심지어는 거짓과 사기를 칠 수도 있지만

전대사

대사라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 죄를 용서받은 뒤에 남게 되는 벌을 ‘면제’해주는 교회가 허락하는 은총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 아이가 쓰레기를 버리는 습성이 있는데 자신의 그런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이미 버려져 있는 쓰레기가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치워야 하는데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에 아이보다 정리정돈과 청소를 잘 하는 어른이 그 아이의 부족한 능력을 보완해서 쓰레기를 치워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이에게는 뉘우치는 것으로 충분하니 들어가 쉬라고 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죄와 관련해서도 일어나는 이런 일을 교회가 ‘대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사에는 벌의 일부를 없애는 ‘한대사’(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올바로 보고 포항 흥해성당을 성지순례 하고 정해진 기도를 바치면 주교님이 부여하신 권한으로 한대사를 얻습니다)와 우리가 이맘때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대사’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가톨릭 사전에 담겨 있는 전대사에 대한 항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지, 혹은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실제 전대사를 은행창구에서 대출 이자를 받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즉 교회가 정한 외적 조건을 이행하기만 하면 절로 그 전대사라는 값비싼 어음을 받는데 그

자녀를 거룩하게 키우기

흔히 자녀를 키운다고 할 때에 우리는 먹고 입히고 재우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일차적인 돌봄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더욱이 ‘미성년자’ 즉 보호자가 없이는 자신의 앞가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는 필수적이자 부모의 의무입니다. 이 첫 돌봄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치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녀가 마땅히 누릴 권리를 우리가 베푸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자녀가 그에 대해서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섭섭함을 지니기 시작하는 부모가 존재합니다. 두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나친 돌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돌봄의 수준이 아닌 다른 부모와의 경쟁 구도로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서로 비교하고 누가 더 좋은 옷을 입히고 더 잘 먹이는지를 비교하기 시작할 때에 과열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자녀의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른의 만족도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꾸로 자녀는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이 마치 어른의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바라는 것은 지나치고 과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만 하더라도 그것을 따스한 애정으로 할 때에 자녀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거룩한 돌봄입니다. 자녀의 내면 안에는 하나의 영혼이 씨앗처럼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영혼은 또 다른 하나의 어른이 되고 영원 안에서 나의 벗이 될 존재라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현재의 관계로 살아갈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은 결국 우리의 형제가 될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입히고 먹이는 수준으로 책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영적인 돌봄을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 부모의 거룩한 의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