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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선포하는 사람, 선포를 듣는 사람

결국 받는 것은 모두 똑같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요. 구원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는 우리가 쌓은 것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선물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선포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선포를 들어서 영원한 나라에 가는 것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일까요? 먼저 '선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이해한 사람, 주님의 사명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편의성에 따른 삶이 아닌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사랑하고 즐기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더욱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포하려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말씀 선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선포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편한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포의 고생스러움을 겪으면서도 그에 대한 열정을 쏟는 것은 그 일이 더 마음에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서 더욱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선포'하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물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분명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 까닭으로 인해서 선포를 꾸준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수련'을 하게 됩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말하는 '수덕생활'이라는 것이 말씀선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덕을 실천할 수 있지만 오랜 동안 꾸준히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은 이, 인내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에 항구하고 꾸준하게 머물러 온 이의 내적 힘은 상당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는 흔히 반대가 찾아오고 그것을 이겨내면서도 묵묵하고 꾸준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영적인 힘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이사 29,19-21) 원래 소송이라는 것은 공정을 회복하는 것인데, '남을 지게'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잘못 이용하면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가 되어서 법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한 이들이 그것을 통해서 악인들의 손을 들어 주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법정에서는 바로 이 법의 맹점을 이용해서 '남을 지게' 만드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그 이득을 빨아먹고 살지요.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은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에게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올가미'가 필요합니다. 계획된 덫, 상대의 약점을 노려 그것을 쥐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계략, 획책, 속임수 등등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고자 시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무죄한 이들의 권리를 뒤틀어 버려야 합니다. 있는 이의 주머니돈을 보전하기 위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정반대도 가능합니다. 정당하게 벌어들인 몫을 빼앗으려고 죄 없는 그의 권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런 이들의 기본적인 성향 안에는 '포악함'이 숨어 있습니다. 사나운 성향을 지니고 있고 악한 의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또한 그들은 빈정대기를 즐깁니다. 정면에서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내용을 뒤에 가서 여론을 형성하고 상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반쪽짜리 믿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마태 9,29-31) 하나는 알고 다른 하나는 몰랐던 이들. 육체의 눈을 떠버렸지만 마음의 눈을 올바로 뜨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지 않고 반대로 실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사람의 위대한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 신뢰로 인해서 자신의 감겨져 있던 육체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주님의 명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훗날 옳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일이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그분의 일에 맞서는 내적인 힘을 형성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마태 9,34) 우리는 때로 겉으로 일어난 일에 집착한 나머지 그 일의 내적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이 외적 성공을 거두면 자연스레 그 내적인 도전이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연예인이 아주 어린 나이에 성공을 하면 그 결과로 다가오는 인기와 부에 취해서 타락의 길로 초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지하고 미리 예방할 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그래서 성공 후에 다가오는 여러 유혹들에 시달리고 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눈 먼 이를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일, 죽은 이를 일으키는 일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에 우리를 바로잡아 줄 인도자가 필수적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 역할을 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예로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

자신이 쓰려고 돈을 번다.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이 쓰지도 않을 걸 기를 쓰고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헌데 그러다보니 '잉여분'이 생긴다. 내 일상의 필요를 넘어서서 돈이 점점 모이고 축적된다. 그래서 '소유'의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이미 있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자기 한 몸 쉴 만한 그 이상을 찾아서 물건들이 가득차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돈이 남는다. 통장에 숫자가 늘어난다. 더 큰 숫자가 되어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 통장의 숫자는 늘수록 더 갈증이 생긴다. 항상 나보다 더 잘 사는 이가 보이고 나보다 더 멋지고 여유로운 사람이 보인다. 온통 타인의 '좋아 보이는 점'만 뒤쫓으니 돈은 항상 부족해 보인다. 이미 하루에 일정액을 써도 죽을 때가지 쓰고도 남을 돈을 축적해 두고도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투자를 한다. 그러다가 때가 다가온다. 죽음이다. 자신의 마음을 축적해 놓은 것에 빼앗긴 나머지 죽음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늘어가는 주름을 감추려고 값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실력이 좋다는 의사를 찾아가 시술을 받는다. 온갖 건강식품을 죄다 먹어보고 몸에 좋다는 건 찾아 다니며 한다. 그러나 죽음은 멈추지 않고 다가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축적된 재물을 노리는 수많은 이들, 가까운 이들, 먼 이들... 심지어 자식들도 돈 앞에서 하이에나가 되어간다. 이제쯤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헌신했던가. 그제야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생의 촛불은 꺼져가고 그의 손에 남아 있는 재물이 스스로를 고소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생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대로 생은 마감되고 만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거절했고, 정의에 따라 그 결과는 그에게 돌아간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

성령(주님의 영)의 일곱가지 은사

성령(주님의 영)의 일곱가지 은사 - 마진우 요셉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이사 11,2-3) 흔히 성령의 7가지 은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일차적으로 성경에 표현된 그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1, 경외2 한국말로 애매하게 표현되기에 서로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다음은 교리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스페인어로 각각에 대응하는 단어를 배열했습니다. 지혜(sabiduría) 통찰(inteligencia) 의견(prudencia) 굳셈(valentía) 지식(conocer) 공경(respetar) 경외심(temor) 지혜라는 것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뜻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의 시선 안에서 사건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혜를 지닐 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나도 인간은 조급해 하지 않을 수 있고 느긋하고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통찰, 다른 표현으로 깨달음, 영리함이라는 것은 그 지혜를 적용하는 영리함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그것을 막 다루면 결과가 엉망이 되듯이 우리가 지혜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찰이라는 것은 그런 영적인 영리함을 의미합니다. 의견이라는 것은 스페인어 해석에 따르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여정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더 나은 상황으로 보이는 요소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향인지를 잘 알아서 거기에 굳건히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굳셈이라는 것은 '용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