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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위기

  교회는 예로부터 '가정'이라는 단위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돌볼 수 있도록 애를 썼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얽매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고 부수어뜨리려 했고 당연히 가정 안에서의 그 질서 역시도 하나의 '굴레'로 치부하면서 파괴가 이루어졌습니다. 악마는 가정 안에 돈을 우선시하는 관념을 불어 넣었습니다. 자녀를 돌보는 데에도 돈이 들고 부모를 돌보는 데에도 돈이 드니 자연히 자녀 계획이라는 명분 하에 낙태가 당연시되고 나아가 안락사 찬반까지 거론되는 상황입니다. 어른들이 자살당하는 시대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악마는 나아가 아예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지 않기를 종용합니다. 인류가 멸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녀의 축복을 부담으로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사랑과 정성에 쏟을 시간과 능력을 소위 '자기계발'이라는 것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스스로 멋들어진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자녀와 함께 도전을 이겨내는 경험에서는 역으로 멀어지게 되고 나아가 인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멸망해 가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반대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자녀를 갖지 못해서 애가 타는 어미를 보여주고 또 가정 안에 돈이 아닌 '가치'를 불어 넣으려고 애를 씁니다.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와 같은 아름다운 덕은 가정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가정 안에서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내의 남편을 향한 순종 2.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 3.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 4.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심지어 예수님도 자신의 세상의 부모에게는 순종을 하고 지냈다는 것이 복음에 드러납니다. 다만 예수님의 신성 앞에서는 역으로 부모가 예수님에게 순명해야 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가정 공동체의 질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契約 (맺을 계, 묶을 약) 約束(맺을 약, 묶을 속) 약속이라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반면 신뢰가 없다면 약속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공약'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실질적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표를 쥐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잠깐의 환각적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은 '약속'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큰 두 권으로 나누면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취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파스카 약속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왕을 주겠다는 약속도 다윗을 통해서 이루어졌지요. 물론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약속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압니다. 반면 신약의 약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 하늘 나라에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고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주시겠다고 하고서 빼앗아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우리 측에서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시고 꾸준하신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시작부터 의심을 하는 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시당초 하느님이 계실까를 의심하고 살거나 아예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느님과 상관 없는 삶의 행보를 보이는 이도 많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와 어떻게 '신뢰'를 형성하겠습니까?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의

저를 받으옵소서

제물, 예물, 번제물, 속죄 제물... 이러한 것들은 '만들어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펙과 같은 것이고 원하면 돈으로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재력이 좋고 집안이 좋다면 시작하면서부터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일찍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고 또 누군가는 순교자의 집안이라고, 몇 대 째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세례는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받는 것이고 또 그 선물에 합당한 자격을 성실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는 이는 모두 천국에 갈 것이고 세례만 받으면 굳이 착하게 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세례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 매를 덜 맞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구원을 '보장'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보장할 수 있는 대체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물들이었습니다. 이는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돈을 많이 벌어 예물을 많이 내겠노라고 그래서 하느님에게 잘 보여 보겠노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오직 나날이 채워가는 성실한 삶으로 살아가셨으며 심지어는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아내며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남겨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남겨 하느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삶, 거짓없고 진실한 삶 자체가 당신의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바치셨고 하느님은 그것을 기꺼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필요한 건 제물이나 예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누구의 아들, 어느 지역 사람, 어느 학교 출신 등등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는 통에 그 사람의 내면의 본질은 흔히 감춰집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믿었더니 뒷통수를 얻어 맞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하찮은 곳 출신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면이 튼실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영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와 예언자의 신원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상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 혹은 관점은 훈련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칼날을 벼리면 더 섬세하고도 예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도 더 깊은 곳을 파고드는 훈련을 통해서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1-12) 사람들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르쳐지지 않았고 또 근본적으로 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납니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친구보다 꾸준하고 성실한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에 달디 단 말을 쏟아내는 이를 흔히 더 쉽게 사랑해 버립니다. 그러나 내면의 충실이 없는 그들은 지금은 단 말을 꺼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쓴 말도 잔뜩 쏟아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메시아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품고 사는 예언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이들을 '함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합니다.

파견, 선포, 들음, 믿음, 받들어 부름

  선포자의 영역    // 피선포자의 영역 파견, 선포(그리스도의 말씀) // 들음, 믿음, 받들어 부름 1. 선포자의 영역 1) 파견을 인식하는가? 2) 선포하고 있는가? (말씀, 진리에 충실한가?) ============================ 2. 피선포자의 영역 1) 듣고 있는가? 2) 믿고 있는가? 3) 받들어 부르고 있는가? 피선포자의 영역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듣고 있는가? 무언가를 듣는 행위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아무리 들어봐야 그 말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선포되고 있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이해해야 비로소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성경적 표현이나 교리적 지식의 전달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남이 나에게 하면 싫겠다는 것의 구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듣지 못하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구체적인 교리 진리를 듣지 못하는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은 누구에게나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마 10,18) 하지만 주님의 메세지는 더욱 명확한 형태로 알기 쉽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은 알기 쉽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이 사명을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형태로도 분명 그리 될 것입니다. 2) 믿고 있는가? 말씀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선포된다면 보다 중요해지는 주제는 바로 두 번째 항목이 됩니다. 즉, '믿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선포되지만 그 말씀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방향을 따라 나서고 있는가 아닌가 하

같은 말, 다른 반응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날이 많이 차가울 때,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 들어오면 몸의 온도와 손의 온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손으로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물이라도 몸에 갖다대면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의 온도는 같지만 받아들이는 영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곳에 특강을 다니면서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정반대의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전하는 말이 그때그때 다르다면 그 반응의 차이는 저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디를 가든 같은 목적의 말을 한다면 결국 그건 받아들이는 이들의 온도차이입니다.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 제가 하는 말의 취지입니다.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의 외아들의 십자가를 끌어안자는 것이 제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이제 이 노선을 바탕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전히 어둠의 행실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떻게 하면 어둠을 끊어버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십자가를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십자가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사람들은 흔히 양분되곤 하였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등경 위의 등불과 같아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사랑으로만 하는 신앙생활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삶을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가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빛은 언제나 빛의 속성 그대로 밝음으로 드러나고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둠은 언제나 그 속성대로 숨어 지냅니다. 진리는 모든 이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더라도 언제나 진리의 속성

분열을 일으키시는 주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예수님의 이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지껏 신앙생활을 '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마치 일치를 파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말마디 그 자체에 집착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된 의미의 일치, 진정한 의미의 일치라는 것은 그저 어중이 떠중이들을 끌어 모아 둔다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합지졸'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든다고 해서 그 군대가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여지지는 않습니다. 뚜렷한 같은 목적이 있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에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일치된 동작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분열'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간단한 질문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악'이 자행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 중의 그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에서까지 악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이곳에서 정화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분리'와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품고 살아가면서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따르고 세상의 악도 수용하는 식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언자를 기리는 일, 또는 한국적 환경으로는 순교자나 성인을 기리는 일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들의 참된 신앙을 상기하고 그것을 뒤따르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모든 것의 원래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 하에 파생되어 나오는 여러가지 다른 일도 있습니다. 즉, 여러가지 사업을 조성하고 기금을 모으고 건물을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속에 그들을 괴롭히고 사형을 언도하고 실행한 이들의 행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의 잔인성과 사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조성하는 이들의 의도와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도입니다. 성인들의 거룩한 영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순교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업'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지방 정부와 연계해서 일종의 '관광' 사업을 벌이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수난을 두고 사람들이 구경하게 만드는 돈벌이를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두 번째 차원이 개입됩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마음자세입니다. 누군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건 그곳을 찾는 발길이 진정 순교자와 성인들의 거룩한 여정을 조금이라도 닮으려는 의도라면 그들에게 남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그들은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그들의 고뇌와 아픔을 함께 나눌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지켜온 신앙의 뜨거움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가는 길에 맥주나 까고 술이 모자란다고 성질을 부리고 가서도 성지가 형편 없다느니, 모양새가 영 이쁘지 않다느니 다른 곳이 훨씬 낫다느니 품평회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진정한 성인을 맞닥뜨렸을 때에 예언자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삿밥이나 먹고 떠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

"이 방법 밖에 없었습니까?"

신앙생활에 올바르게 몸담아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아니 여러번 반복해서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과연 이 방법 뿐일까요? 워낙에 효율성을 좋아하고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들이라서 하느님의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정말 그 뿐이었을까요? 그분의 십자가 말고는 다른 구원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하나만 퉁기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는 식은 안되는 걸까요? 유다의 계획을 알고 있던 그분은 그를 사도단에서 일찍부터 제외시킬 수는 없던 것일까요? 인간의 지혜가 가 닿지 않는 그곳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시간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을 바탕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자원 밖에 없는 꼬마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부유한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두고 있는 자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난 범위의 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적 한계 속에서 아버지에게 청을 드렸습니다. 제발 이 잔을 치워 달라고 말이죠.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아들이 당신에게 의탁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여정을 우리는 오늘날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만그만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영적 강도와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추악한 악을 품고 음모를 짜는 이들부터 순진한 어린양 같은 이들까지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악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악인들이 자행하는 악의 결과를 맞닥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 그들의 증오와 어둠의 결과를 선한 이들이 '나누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하

변화는 언제 찾아오는가?

우리는 언제 깊은 감명을 받을까요? 그리고 그에 멈추지 않고 실제로 '변화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화려한 언변의 말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말은 다양한 존재가 내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의 구체적인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한 사람의 실질적인 삶의 모범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움직임이 많아질 때에 비로소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저 말뿐인 교회, 혹은 외적 겉치레에 신경쓰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칭송하고 공허한 친교로 서로 술잔이나 돌리고 있는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있는 재원을 깎아먹고 쇠잔해 갈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만의 잔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삶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이 맑은 이는 진리의 모범에 이끌리고, 반대로 어두움이 가득한 이는 그릇된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즉, 밝은 이들은 밝은 대상에 이끌리고 어둠이 가득한 이들은 어둠의 대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거짓을 즐기지 않는 이들은 진실한 사람의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되고 올바른 가치를 전하는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그들의 모범을 뒤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계략을 걸어서 그를 넘어뜨리고 싶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방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음험하고 어두운 계략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낮동안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반대로 바퀴벌레는 습하고 어두운 음지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변화'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내면에 설정된 가장 기초적인 방향에 근간을 둡니다. 빛으로 변화하고 싶은 이는 끊임없이 빛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암울해도 빛의 방향을 찾고 빛의 방식을 습득해 나갑니다. 반대로 어둠을 즐기는

인간이 가장 뛰어날 때

인간은 뛰어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근력을 키우고 움직이는 스킬을 배워서도 뛰어날 수 있고 지력을 한껏 끌어당겨서 뛰어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이 그 본연의 창조 원리에 기초해서 가장 뛰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에 가장 뛰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성장도 이 사랑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아무리 성장을 거듭해도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드릴까요. 서울대 법대를 합격하고 뛰어난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지적 영역의 성장은 그의 실천 앞에서 하찮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서 경제사범의 변호를 맡게 되었고 그를 어떻게든 법의 형량에서 빼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요. 그는 진리를 수호하는 사랑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가 있음을 알았지만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주변 인물들의 시선 속에서 '진리'를 수호할 용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손을 열심히 씻어 보지만 자신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성장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사랑은 특정 행동을 반복적으로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궁극의 선에 온전히 우리를 내어바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주제 앞에는 언제나 의지의 훈련이 내포되어 있고 그 의지는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힘든' 일이 됩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의 훈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라고 '십자가'를 주십니다. 즉 십자가는 사랑을 성장시키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되
 어둠의 결탁 어둠은 서로 결탁합니다. 하나의 어두움은 다른 어두움의 뒤를 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보호를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어두움은 서로 결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끈적한 기름이 다른 끈적함을 만나면 쉽게 들러붙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면 빛은 결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입니다. 빛은 가장 완전한 빛에서 나누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빛은 더해져도 같은 빛입니다. 어둠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증오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붙어 있을 뿐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밀쳐냅니다. 그리고 어둠의 속성 가운데에는 탐욕이 있어서 어둠은 근본적으로 '나눔'이라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분배할 뿐 진정한 의미의 '나눔'은 알지도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가리는 듯 합니다. 하지만 사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 자체는 가려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은 태우는 불입니다. 그래서 빛 가까이 다가가는 어둠은 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빛을 가리는 시늉을 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 '일시적'이라는 뜻이 때로는 한 사람의 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은 영원하기에 아무리 긴 시간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은 하느님에게는 어둠이 아무리 오래 장악하고 있어도 결국은 빛이 이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표현을 한다고 해서 어둠이 빛을 공격할 때에 그 공격성이 사그러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의 공격은 실천적입니다. 때로는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때로는 인격을 말살시키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 1,5)

잃을 것이 없는 분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9-30 옛날 맥가이버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오는 순간입니다. 주인공은 모든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맥가이버칼 하나로 뚝딱뚝딱 위기를 헤쳐나갈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고장난 차도 수리하고 심지어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만들어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쾌재를 외치곤 했지요. 예수님의 적대자들,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화가 엄청 났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불러 일으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 그들은 화나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좋지 않다는 소식이 남편이 담배를 끊기를 바라는 자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반대로 담배를 아직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가신 이야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했고 진리의 친구들은 그 말씀을 즐기지만 반대로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는 이를 증오하고 거부합니다. 가능하면 진리를 외치는 그 목소리를 없애고 싶어서 모든 수단을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 들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그들이기에 그들은 사람을 죽여도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필요하다면 낙태도 하고 필요하다면 안락사도 종용하고 사형도 찬성하고 하느님이 주인이신 생명을 말살하는 데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이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

눈먼 자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 23,17) 육신의 눈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뜨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눈을 감아서 하루 생활해 본다면 우리는 눈이 먼 상태의 불편함을 바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눈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영혼의 눈이 감겨졌는지 아니면 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육신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혼의 눈이 감겨 있다면 영혼의 불편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우리는 영혼의 눈의 상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0-23)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갈라 5,19-21) 이런 일들에 빠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눈은 멀어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너무나 자주 또 특별히 유혹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탐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탐욕을 신앙적인 자리에까지 끌고 들어와 아주 교묘한 가르침으로 변질시킵니다. 즉 마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인양 탐욕스러운 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격이 바로 복음에 나오는 성전과 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6절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이로 인해서 그들이 실제로 따르고 있는 주인이 드러나고 결국 가치관이 역전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구원의 역설

하느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임과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역설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헌신적'이라는 말은 피로의 누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은 자비롭고 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과를 뽐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타인을 눌러야 내가 올라서는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경쟁구도' 속에 들어 있고 한정된 자원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이보다 먼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누릴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버스에 한정된 자리가 있고 먼저 올라서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성경은 '타인을 위한 헌신'을 가르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와 성경의 구원에 후한 하느님의 사고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자 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열심히 일했으니 타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은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애좋은 형제는 서로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에 서로 축복을 전해 줍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지요. 마치 동생의 좋은 일이 형의 좋은 일인양 기뻐하고 반대로 형의 좋은 일은 동생이 그 영광을 입은 양 기뻐해 줍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내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와서가 아니라 나의 형제가 구원의 대열로 함께 들어서는 데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설명은 했지만 이러한 '공동체 정신&#

최고의 가치

'가치'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에는 여러가지 '근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배웁니다. 즉, 뜨거운 게 싫다는 것, 추운 게 싫다는 것은 굳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경험과 체험으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싫어하게 됩니다. 기술도 배웁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더라도 똑같은 것입니다. 땅을 파는 기술을 삼촌에게서 배울 수도 있고 할아버지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 기술을 가진 누구라도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기능 교육, 지식 교육도 비슷합니다. 그것을 가진 누구든지 아직 배우지 못한 이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수준이 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르던 것을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서든 가능한 일입니다. 도둑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열쇠공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그가 선하고 악하고가 필요 없습니다. 기술만 잘 전해주면 그만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배웁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치'는 아무나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가치를 배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한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항상 진실될 것을 가르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진리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가치는 가르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살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분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어떠한 가르침도 전해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왜 악을 막지 않는가?

이 질문은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막으십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 안에 '양심'을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 우리를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그 악의 죄책보다 더 큰 쾌락이나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여러 '기회'를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준비된 가르침이 주변에 있습니다. 준비된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사실상 적극적으로 막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뚫고 어둠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막지 않으십니다. 결국 그렇게 쟁취한 악이 무르익어 그 썩은 열매가 터질 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금껏 성실히 달려온 악의 결실을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의'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시작부터 자유를 주신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스르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롭고 진실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 스스로 정한 길을 끝까지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 가담하고 계속되는 회개의 초대를 거부한 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 할 때에 정말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나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자각하고 알면서 악을 결행한 것인가요? 답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질문에 나는 내가 저지르는 일이 '악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그 무지에 상응하는 결과를 선

어린아이의 영혼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내재된 본성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엄마 젖을 찾아다닌다. 다만 그들의 '미형성된' 육신과 제대로 된 링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인간의 자녀들은 어떠할까? 우리는 어린아기를 보면서 '미숙하다'는 것을 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한다. 겨우 숨을 쉴 뿐이고 젖을 주면 빨아먹는 정도로 활동할 뿐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비록 어른처럼 말을 못하고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을 뿐, 그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그들의 고유한 '영혼'으로 느끼고 인지하고 있다. 동물들이 기본적인 동물의 본성을 타고나듯이 인간도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성숙한 표현을 못할 뿐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의식 안에서 그것을 정돈하고 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서 인지되고 관찰되고 있다. 어리다고 해서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함부로 대하면서 그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어른이 되어서 '기억'에 담겨져 있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영향은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에게 현재 가해지는 영향력으로 남는다. 이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영향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국 하느님에게 우리가 드리는 것이 된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그러니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선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한다. 반면 어린

고해성사의 현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인지와 연구는 고대로부터 진행되었지만 근대 심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적 영역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소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속깊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서 그에 대한 도움을 받는 일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고해성사'가 있었다. 고해성사는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적 효과 역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던 비밀스런 일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 해도 사람은 그 일을 다시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죄의 용서'를 확고하게 받으면서 얻게 되는 영혼의 안정과 더불어 심리적 안정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고해성사'가 너무 형식화되면서 사람들은 그 안의 풍성한 힘을 제대로 체험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그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에게도 일부분 탓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부드럽고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당연히 그에게 더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여유롭게 속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사 시작 10분 전에 이루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 여유를 기대할 수는 없고 따라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는 짧고 굵게 해야 하는 형식적인 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고해성사를 찾는 신자의 자세와 태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진실한 뉘우침을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고해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고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적 요소를 얻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을 따로 만날 약속을 한다던지 여유로운 시간을 선택한다던지 하는 수고를 어느 정도는 들여야 한다. 우리는 식당도 예약을 해서 맛있

존경스러운 어른

존경스러운 어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어른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미 우리가 실천하는 부분입니다.  존경스런 어른은 그 존재 자체로 존경이 우러러 나옵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존경은 그분의 삶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는 것입니다. 향수병에서 향기가 나듯이 그분의 삶에서 향기가 나기에 존경이 절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로 무언가 이렇다고 저렇다고 하지 않아도 곁에서 지켜보면 압니다. 교양있고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고 거기에 더해서 특별한 능력도 있으면서도 겸손하지요. 꾸밈이 없고 소탈하기도 합니다. 반면, 자신을 존경해 달라고 떼쓰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나마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존경이라도 할 터인데 정반대입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행동마다 역으로 존경을 까먹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굴하고 치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존경은 커녕 보기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헌데 문제는 그런 이가 '상사'로 존재할 때입니다. 솔직히 사람 보고 고르라고 하면 당장 때려치우겠지만 사회적 구조상 어쩔 수 없이 그 아래 속해 있어야 하니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와 때려 치우고 싶은 이유가 항상 속에서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간다고 절로 갖춰지는 덕이 아닙니다. 인격적 완성과 덕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꾸준히 성장시켜야 하는 요소입니다. 책임질 줄 알고 또 필요하다면 도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말'로 이러한 것들을 메꿀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꾸며낸 말로, 또 때로는 꾸며낸 행동으로 다른 이를 일순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잠시는 그렇게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들통이 나고 말지요. 신경질적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신경증을 감추고 살 수 없습니다.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은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특정한 요소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결국 숨겨오던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야 맙

묵주기도와 단수 헤아리기

질문> 신부님 왜 레지오 에서는 단수를 헤아리는 건지요? 저는 하루 오단 많이라도 제대로 묵상 해도 될거 같은데요? 네, 그렇게 하셔도 되고, 사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성호경'을 바친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정성껏 바친다면 그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모든 기도가 같은 기준점에 놓여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와서 레지오에서 '단수'를 왜 헤아리는 걸까요? 저의 솔직한 답변은 '모른다'입니다. 그런 전통과 관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누가 시작한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몇 가지 유추할 뿐입니다. 기도를 헤아리면서 바치는 관습 자체는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묵주기도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없습니다. 그저 어느 성인에게 성모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던지 아니면 과거 사람들이 열심히 성모송을 바치던 습관 가운데에서 그것을 체크할 수 있도록 기도의 도구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백년 전의 과거에는 묵주기도를 체계적으로 바치는 일은 없었고 그저 주님의 기도와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아온 성경을 기반으로 한 성모님의 기도인 성모송을 사람들이 열심히 되뇌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좋은 시작이었고 아름다운 관습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무질서한 영역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전거가 고장났을 때에 그냥 고치던 일을 '메뉴얼'로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천상의 가르침이건 교회의 필요이건) 자리잡힌 묵주기도를 보다 더 체계화하고 지금의 성경의 각종 신비들을 묵상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빛의 신비'가 따로 추가된 것만 보더라도 이런 질서들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4개의 신비(환희, 고통, 빛, 영광)로 나뉘어진 묵주기도 체계를 갖추

개운한 하루를 위해(개방성, 최선의 실천)

한 사람의 인격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서 보고 듣고 깨달아가는 것을 확장하면서 서서히 이루어져 간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간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모든 문화가 그에게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한국에 살아도 부모의 종교에 따라서, 살고 있는 지역의 풍습에 따라서 전혀 다른 토대를 지닐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문화에 익숙해져 왔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가톨릭'의 가치체계 전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남미의 가톨릭 문화와 유럽의 가톨릭 문화, 그리고 아시아의 가톨릭 문화가 저마다 너무나도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모자람'과 더불어 인격을 함양시켜 나간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또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내제되어 있는 분별력은 항상 '더 나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가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가진 것이 '절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는 더이상의 '가르침'의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고 그는 자신이 설정한 틀에 고착화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내가 알게 된 최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현대는 특히나 사상의 홍수와도 같은 현실이다. 21세기 들어서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의 양은 과거에 비할 데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원하면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지식을 언제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는 '실천'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최선, 가장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성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

경험과 초월

오직 '초월'을 경험한 사람만이 한계를 벗어날 꿈을 꿀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비슷비슷한 경험 속에서 살아간다. 비슷한 시대를 살면서 탄생하고 동시대의 물질문명의 혜택 속에서 비슷한 체험을 나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경험을 어른들을 통해서 듣게 되고 또 미처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발명해내는 후대의 세대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을 공유하고 최신 개발된 물건과 또 앞으로 이루어질 발전상을 유투브 영상으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경험들은 유사한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최신 기술을 뽐내고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이 진정 '초월'을 이루어 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설령 영원히 사는 약을 발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 '초월'의 진정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을 뛰어넘은 존재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런 초월적 체험이야말로 인간을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누구도 뛰어보지 못한 점프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앙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정도로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미사와 성사 안에서 끊임없이 외쳐지는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해도 그 본연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세속적 부활에 대한 관념만을 얻을 뿐이다. 진짜 부활은 그 부활의 올바른 아이디어가 나로 인해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천할 때에 사람은 진정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를 더욱 상승세로 전환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일상의 예를 비유로 들어 보겠다.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이

6.25 - 아직도 갈라져 있는 우리

솔직히 들은 이야기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저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유산을 상속받은 셈인 나로서는 이 사회의 주된 사조를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하나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곳에서 가르쳐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의 소위 나쁜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순진했다. 고만고만한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저 가족이나 부양하고 입에 먹을 것 떨어지지 않는 정도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소위 위에 앉아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상, 저런 사상이 중요하고 상대의 사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전쟁을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싸우는 이들은 정작 그런 사상들이 뭔지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나 역시도 그냥 그 나이 되면 군대에 가야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알고 있었고 군대에 갔을 뿐이다. 군대에 갔으니 가르쳐주는 군대의 기술을 열심히 익혔을 뿐이고 복무 기간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뿐이다. 휴전이라는 교착 상태는 이런 식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이들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요소다. 우리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에 대한 기억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더 흐릿해져 갈 것이다. 물론 역사책 안에 남아 꾸준히 가르쳐지겠지만 세대가 거듭할수록 전쟁의 참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지금의 어르신 세대부터 일제시대의 참혹한 역사를 직접 체험한 분들은 서서히 세상을 떠나가고 없다. 누가 고구려 시대의 위기감을 기억하겠는가? 역사란 그런 것이다. 흘러가면 서서히 감각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전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를 직접 겪지 않는 다음에는 그 위기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본당이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역할과 입지를 여러가지 의미로 형성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아직도 몇몇 나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일상 생활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을 교회에 오면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또 교회에서 받는 인정이 곧 세상에서도 그 가치를 지닐 정도로 교회가 세상의 생활 속에서도 나름 중심이 된 위치였던 것이지요. 여전히 남미의 교회는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이 소박하고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열심히 활동하고 인정받는 사회성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에서도 한때 그러한 시기가 존재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고 인정받던 시기였지요. 교회의 부흥기였고 교회의 활동이 어마어마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가족 구성원 전원이 교회에 와서 뭐라도 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살다시피 했지요.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엄마는 자모회에 아빠는 레지오 단원들과 주일이면 성당이 바글바글할 정도로 모여들어 시간을 보내며 활기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도 시기적으로도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겪지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발전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굳이 무언가를 찾지 않아도 세상에서 비슷한 활동들을 왕성하게 하고 그것이 하나의 직업군을 형성해서 그것으로 돈을 벌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남들이 감히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나은 아이템을 찾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끌어모으는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그 반향으로 교회가 지금까지 해 오던 활동들이 지지부진하고 재미가 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교회의 기본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 본질적 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영역에서 절대로 메꾸어 줄 수 없는 교회만의 고유한 활동

편안한 신앙

두 단어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서로 어울리나요? 아니면 붙어있기가 껄끄러운 단어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 우리가 지금 있는 상태로 '안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고 다가와서 우리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하는지에 있어서는 '부드러움' 혹은 '온유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편안한 신앙'을 이야기할 때, 혹은 다른 표현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때에 언급되는 그 편안함은 그 어떤 성장도 거부하는 상태, '나태'와 가까운 상태를 의미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학업을 거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며 매일같이 몸을 상하게 하지만 자신의 입맛에 맛깔스런 해로운 음식을 먹고 머릿속을 텅텅 비우는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럴 때에 '편안한 신앙'은 독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우리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지 않은 무엇입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은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달음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1코린 9,24-25)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보면 어

그저 기도만 열심히?

"신부님,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기도 열심히 하면 되나요?" 만일에 이제 막 성당에 나온 예비자나 초등학생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하도록 하렴." 하지만 어느정도 신앙생활에 몸 담은 사람이 묻는다면 저는 다시 몇가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기도를 해 오셨고 지금 열심히 한다는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이마저도 질문의 수를 적게 물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잘 하려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인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순박하게 답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그런 것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의외로 복잡하고 그 내면이 순진하지만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정말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그 영적 여정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이들은 모두 순진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능구렁이 같은 이들도 있고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은 기쁘게 받아들여 주셨지만 그 의도가 불순한 이들에게는 위엄과 지혜로 대응하셨습니다. 사제에게 다가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한다고 소문난 이들 중에는 정말 내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지만 그런 이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고 나머지는 다양한 욕구를 지니고 다가오는 이들입니다. 악한 이들도 예수님에게 칭송을 던지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마태 22,16) 이 말은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는 제자가 한 말이 아니라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 아닌지를 질문하기 직전에 예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이 건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외형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은 썩어 있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외적

신앙은 부수적 요소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기에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있다. 먼저 과학의 발달을 살펴보자. 지금 우리는 전기 자동차 시대의 부흥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이 없다고 해서 인간이 '이동'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자동차 자체가 없던 시절도 있었고 바퀴가 생기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동'했다. 제 나름의 방식을 찾아서 이동해 온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편의와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이 부가적으로 더해져 왔을 뿐, 인간의 '이동' 자체는 변화가 없었다. 이제 '문화'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는 수많은 문화적 부흥기를 겪어왔다. 인간의 권리를 보다 더 확충해 왔고 모든 이가 평등한 시대로 나아가는 것 같다. 지금의 단계도 역시 '완성'된 것은 아니기에 앞으로는 또 어떤 변화를 겪을지 모른다. 과거에는 노예가 존재했고, 여성의 신분이 극적으로 달랐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그런 경향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제도가 개선되지 않은 시대에도 복음이 존재했고 인간의 구원은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가 없어도 '이동'이 가능했던 것처럼, 문화적 개선 이전에도 '구원'은 여전히 열려 있던 주제였다. 인간의 발전을 멈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현재의 불편을 반영해서 더 나은 쪽으로 끊임없이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근저에 인간의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영역에 구원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가 바뀌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신앙에 신경쓸 수 없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기 자동차가 없으니 나는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핑계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 가운데 사람들이 핑계를 대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콱 막혀서 내가 하느님께 가고 싶어

혼란의 교회에 올바른 질서를 주시는 분 - 성령

예수님의 주변에는 온갖 인물들이 들끓고 있었다. 일단 예수님이 당신의 기적들로 군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메세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산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러지 못했다. 제자들은 여전히 높낮이 다툼에 몸담기도 했고(누구에게 더 힘이 있는지를 다투는 권력 질서 중심의 보수성향), 또 그분이 로마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언제 뒤집을지 궁금해 하기도 했으며(상황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현실을 바꾸어 보려는 진보성향), 거룩한 변모를 보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지상에 붙들어 두려는 시도도 있었고,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기도 하셨다.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신앙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기가 달라지고 역사가 흐르면서 '껍데기'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주제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다. 한쪽은 지키려고 하고 한쪽은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의 진정한 메세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의도하신 것인가? '하느님의 뜻' 말고는 다른 적절한 답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뜻은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에게 열어보이는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로 완전히 파악해 낼 수는 없는 무엇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설정해 두고 살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도 우리는 모든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도 한정된 시간 안에 묶여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후대의 자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채 지금의 것들을 잔뜩 소비해 버리고 심지어는 자녀 세대에게 그 결과가 가기도 전

21세기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 것인가?

우리들은 마구 소비하며 살아왔다. 더 많이 구입하고 더 많이 사용하고 더 많이 체험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상의 소중함과 이미 갖추고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상실해 갔다. 언제나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했고 더 새로운 물건에 열광했다. 2020년, 코로나가 왔다. 코로나는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가장 극단적으로 마스크가 일상화 되었고 늘 마시던 공기를 힘들게 들이쉬게 되었다. 편안히 걷던 산책길이 불편하게 되었다. 일상의 모든 영역을 재검토하게 되었고 항상 '감염의 위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인류는 공통된 진통을 겪기 시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전에 더욱 자유로웠던 이들일수록 더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질병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2021년, 코로나는 장기화 되어 가고 있고 우리는 이제 코로나와 함께 하는 일상에 어느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사회의 많은 영역이 리셋되고 있는 중이다. 교회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활발하게 진행해 오던 많은 행사, 일들이 멈춰지고 '이 시국에 이게 정말 필요한 일인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영역이 남게 된다. 사회의 각 영역도 비슷하다. 무엇이 가장 필요한 일일까? 그것은 코로나가 아무리 심해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무엇이 거품이었을까? 코로나를 앞에 두고 멈출 수 있는 일이면 거품이다. 코로나가 와도 밥은 먹어야 하지만 지나친 관광을 가는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일은 해야 하지만 굳이 회의실에 모여서 공연히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다. 생존에 필수적인 일들이 있고 부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여전히 이 구분점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유흥시설이 여전히 활성화된 가운데 코로나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퍼져나간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소비와 잡다한 활동이 멈춰진 이곳

살아있는 말씀 - 성경

"아차차이루는 노란색이다."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말을 외웠다고 한다면 그는 이 말을 '이해'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한 암기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뜻은 여전히 가리워져 있습니다. '노란색'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고 문장 안에 있는 무언가가 노란색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아차차이루'가 도대체 뭔지 알 도리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공부도 비슷합니다. 누군가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구절을 반복해 적고 외우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가 그에게 온전히 흡수된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는 성경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정보를 담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도'하는 바가 있고 우리가 그것에 가 닿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물론 성경을 가까이 두고 열심히 읽고 가능하다면 써보기도 하면 좋겠지만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성경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분히 실천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이 의도하는 바를 충실히 살고 있다면 설령 성경의 세부적인 내용을 모른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 성경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라면 주님의 계명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고 모든 율법서가 의도하는 것을 잘 이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의 몇 항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침해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 정작 율법의 본질적 가르침은 거부하고 있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

단순하고 순진한 신앙의 아름다움

잠자리를 보고는 그 나는 모습에 경탄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우리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그 아이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더는 경탄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곤충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과학자'는 잠자리를 한마리 잡아서 온통 뜯어놓고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박제를 해서 자신의 연구를 완료했다고 우쭐대겠지만 정작 아이가 바라보던 그 생명력 가득한 잠자리를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고 그 신비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고 참여하는 만큼 드러나고 밝혀지기도 합니다. 물론 절대로 그 깊은 신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어린 아이의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에서 경탄하게 되는 신비의 아름다움도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는 그 신비를 열심히 연구해서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도 순진한 아이의 시선에서 더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탄하기를 그쳐버린 신앙, 이미 성당 문턱을 닳도록 다녔다고 해서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버리는 상태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미온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의 이기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신앙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의 각종 제도와 구체적인 인물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래 보물의 빛 자체를 상실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보석은 여전히 보석이라서 먼지만 좀 털어내고 나면 다시 예전의 그 찬란함을 빛내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던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 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찾아내고 얻어내야 하는

가장 쉬운 기도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은 성호경을 알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알지요. 하지만 성호경은 단순히 기도 전후로 드리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기도랍니다. 그래서 성호경 하나만 제대로 그어도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호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먼저 왼손을 겸손하게 심장 위에 올려 둡시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이지만 모든 기도는 진심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성부와" 오른손을 펴서 이마를 짚어봅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가장 드높은 곳에 계시고 우리 모두를 이끄는 머리와 같은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묵상하면서 잠시 머물러 봅니다. "성자와" 이번에는 이마를 짚었던 오른손을 아랫쪽으로 가능하면 배꼽 근처로 가져가 봅시다. 드높으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던 분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다는 '강생'과 '육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죄가 없으신데도 '죄인'으로 취급 당하시면서 반대로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묵상하며 잠시 머물러 봅니다. "성령의"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갔던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 부근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어깨로 선을 그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위로자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이제는 직접 뵈옵고 만날 수 없지만 당신의 거룩한 영,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누구든지 원하는 이에게 다가오셔서 그와 함께 머무르시는 분으로서 우리는 이 성호경을 바치면서 성령께서 내 온 존재 안에 함께 하시기를 청해야 마땅합니다. 이 부분의 기

'악한 사람'은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 갈증은 너무나도 뿌리깊은 것이라서 그 무엇도 사실상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만족을 얻는 순간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관심을 끌어올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쉬운 수단은 '자기 피해자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의 관심을 끄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불쌍함에 동정이라는 관심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자신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스스로도 예상하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에게도 '미끼'를 던져줍니다. 즉 필요에 따라서 남들 칭찬도 해 주고, 선물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일한 목적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자녀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 쉽습니다. 자신의 부모인 사람이 '정의'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기준으로 자녀들의 행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위를 하면 칭찬을 얻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자녀들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두운 내면을 가진 부모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동시에 앞서 말한 '미끼'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부모가 항상 '불쌍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위선적'인 사람이며 심지어 '악한'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릇되이 형성된 이 관념은 깨어지기가 꽤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와 같은 인간관계는 선별할 수 있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오직

철없는 동생

 현대의 과학문명은 사춘기에 접어든 반항기 가득한 철없는 동생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제 겨우 차를 모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아버지 열쇠를 훔쳐서 차를 몰고 나가려는 것과 같지요. 차를 몰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펑크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사고가 났을 때 보험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사소한 기계 결함이 있을 때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저 차를 몰면서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도 되는 듯한 힘을 순간 느끼는 것 뿐이지요. 반면 성숙한 형은 여전히 아버지만큼의 지식과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직은 많이 모르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도 동생과 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겸허하게 대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낸 과학 기술이 마치 모든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이라도 해 줄 듯이 생각하고 자만하며 실제로는 많은 것을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영적으로는 미숙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겸손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은 만남

좋은 스승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제자가 있을 때에 좋은 스승도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전해주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이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꽤나 저와 오랜 시간을 머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지요. 반면 아주 가끔 마주치는데도 저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만남의 실질적인 '시간'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수압이 세면 짧은 시간이라도 충분히 많은 물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해주려는 이와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만나면 적은 시간이라도 많은 가르침이 건너갑니다. 많은 걸 들어서 배운 게 아닙니다. 아는 걸 실천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고작 성경 몇 구절 밖에 외우지 못했지만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드높은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수많은 '수도회' 들의 저마다의 모토 역시도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영성의 '가난'이나 베네딕도회의 '기도와 노동' 처럼 정작 그들의 핵심 영성은 단어 몇 개로 추려집니다. 남은 것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실현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까요? 오늘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앞산 밑자락에 있는 공동 사제관을 나와서 아래로 10여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신천이 나온다. 신천에는 잘 조성된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로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면 의외로 볼거리가 많다. 물이끼가 잔뜩 끼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는 신천의 물, 그 위를 노니는 원앙 한 쌍, 목이 긴 새 한마리, 꽤나 몸집이 커서 멀리서도 보이는 잉어들... 하지만 그런 자연과 더불어 관찰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유달리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자 어르신들이었다. 언제나 장기판이 마련되어 있고 두 사람은 진지하게 그것을 쳐다보면서 다음 수를 생각하고 나머지 분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며 구경을 한다. 남성의 특징인걸까? 경쟁을 좋아하고 무리 생활을 즐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열심히 몸담아 오던 생활에서 벗어나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나이 많은 자매님들도 관찰할 수 있지만 자매님들은 그런 눈에 띄는 모임을 만들어 놓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소규모로 옹기종기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열심히 씰룩씰룩 걸어가면서 옆의 자매에게 쉴새 없이 떠드는 모습이 자주 관찰될 뿐이다. 성당에 자매님들이 유독 많은 것은 그 자리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르신 세대에는 주로 남성들이 일을 해 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성당에서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남자들의 경쟁 구도는 성당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해서 그래도 여윳돈이 좀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활기있게 성당 생활을 하는 반면, 밖으로만 나돌던 어르신이 성당에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을 듯 싶다. 반면 자매님들은 친교 관계를 성당에서 맺어 두기 때문에 성당에 나아오는 것이 훨씬 더 부담이 덜하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당에서 인정을 받으니 성당 나오는 재미가 쏠쏠할 듯 싶다. 심지어는 집안에서의 모습과 성당에서의 모습의 극적인 차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성당에 나오고 싶어하는 형제님들의 발길을

행복의 핵심 정리

행복을 찾으면 행복이 없다. 헌데 사랑을 찾으면 행복이 뒤따른다. 행복은 사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쾌락이 아니다. 쾌락은 찾을수록 더욱 목마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의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은 수고스럽고 사람들은 수고스러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해서 피하려고 한다. 훈련에 따르는 괴로움과 죄악의 결과물인 괴로움은 서로 다르다. 훈련을 잘 이겨내야 우리는 성장하고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더 행복해진다. 하지만 죄악의 결과물인 괴로움은 죄악을 피함으로써 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요한 3,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1.  어떤 구두장이가 처와 자식을 데리고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자기 소유라고는 집도, 땅도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으며 오직 구두를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곡식값은 비싸고 품삯은 헐하기 때문에 언제나 먹고 살기에 바빴다.  구두장이에게는 아내와 공동으로 입는 모피 외피가 한 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도 낡아서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벌써 2 년째나 양피(羊皮)를 사 가지고 새 외투 한 벌을 지어 입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가을이 되고, 구두장이에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장롱 속에 3 루우블의 지폐가 있었고, 마을 농부들에게 꾸어준 돈이 5 루우블하고도 25 꼬페까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날 구두장이는 아침부터 양피를 사러 마을에 갈 채비를 했다. 그는 조반을 마치고서, 셔츠 위에 그의 아내가 얼마 전에 자신이 입으려고 지은 무명 자켓을 껴입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주머니 속에 3 루우블을 넣고서, 나무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집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이르러 구두장이는 어느 농부의 집을 찾았지만 주인은 없었다. 그 부인되는 사람이 말하길 일주일 안으로 돈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두장이는 다른 농부를 찾아갔으나 그 농부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말하면서 장화 수선비 20 꼬페까 밖에 주지 않았다.  구두장이는 양피를 외상으로 사고자 했으나 가죽 장수는 외상으로 주려고 하지 않았다. "현금으로 사요. 그러면 좋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