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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이용

'신뢰'를 기반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용'을 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뢰는 지향하는 내적인 뜻이 동일함에 바탕하는 것이고 '이용'은 나의 뜻을 위해서 상대를 써먹을 때에 드러나는 양상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사람들 가운데 '신뢰' 즉, '믿음'을 바탕으로 다가온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응답, 즉 하느님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응답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이용하러 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어두운 속내를 들켜버리기 일쑤였지요. 이러한 일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를 믿고 보듬어주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필요할 때에만 '이용'하려고 드는 나쁜 구성원도 존재합니다. 하나 재밌는 것은 '신뢰'하는 사람은 곧잘 다른 이들도 '신뢰'를 기반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나를 '이용'하리라는 생각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더 잘 이용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를 초보적 신뢰의 상태라고 표현하고 미숙한 믿음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훈련되어야 하고 식별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반면 타인을 '이용'하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도 '이용'하려고 듭니다. 그의 근간에는 스스로를 향한 이기심이 강하게 틀어박혀 있어서 '믿음'이 올바로 형성되기 힘듭니다. 그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고 애를 쓰고 결국 '신앙'의 영역도 이용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믿음을 이루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하도 자주 이용해 먹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모

내사랑, 지혜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지식을 '지혜'라고 부를 때에는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영역과 다른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반면 일상적으로 마주한 문제를 해쳐 나갈 방식은 '요령'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하지요. 그래서 요령을 잘 사용하는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유투브에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지식 정보'들 안에 과연 얼마만한 '지혜'가 녹아들 수 있을까요? 거의 대부분은 일상의 순간적인 곤란을 해결하는 '요령'을 발견할 뿐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지혜, 오랜 기간 영향을 미치며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진정한 지혜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새롭게 일깨워져야 합니다. 한 번 표현되었던 것이 다른 형태로 오늘날 사람들의 이해도에 맞게끔 새롭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지혜야말로 사람을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죽은 사건은 요령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의 지식에 밝아서 정치 구조를 알고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반응에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면 절대로 십자가에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지혜가 이끄는 방향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알면서도 나아갔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혼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자라는 이에게 묶여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고 나에게 내가 싫어하는 여러가지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결혼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요령'을 많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일까요? 생을 멀리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성가실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꾸준한 사랑으로 바뀔 때 누릴 수 있는 잔잔한 기쁨은 그 삶에 헌신하고 투신하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보상입니다. 사람의 생은 한 단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