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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가장 쉬운 기도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은 성호경을 알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알지요. 하지만 성호경은 단순히 기도 전후로 드리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기도랍니다. 그래서 성호경 하나만 제대로 그어도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호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먼저 왼손을 겸손하게 심장 위에 올려 둡시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이지만 모든 기도는 진심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성부와" 오른손을 펴서 이마를 짚어봅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가장 드높은 곳에 계시고 우리 모두를 이끄는 머리와 같은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묵상하면서 잠시 머물러 봅니다. "성자와" 이번에는 이마를 짚었던 오른손을 아랫쪽으로 가능하면 배꼽 근처로 가져가 봅시다. 드높으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던 분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다는 '강생'과 '육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죄가 없으신데도 '죄인'으로 취급 당하시면서 반대로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묵상하며 잠시 머물러 봅니다. "성령의"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갔던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 부근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어깨로 선을 그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위로자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이제는 직접 뵈옵고 만날 수 없지만 당신의 거룩한 영,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누구든지 원하는 이에게 다가오셔서 그와 함께 머무르시는 분으로서 우리는 이 성호경을 바치면서 성령께서 내 온 존재 안에 함께 하시기를 청해야 마땅합니다. 이 부분의 기

'악한 사람'은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 갈증은 너무나도 뿌리깊은 것이라서 그 무엇도 사실상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만족을 얻는 순간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관심을 끌어올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쉬운 수단은 '자기 피해자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의 관심을 끄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불쌍함에 동정이라는 관심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자신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스스로도 예상하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에게도 '미끼'를 던져줍니다. 즉 필요에 따라서 남들 칭찬도 해 주고, 선물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일한 목적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자녀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 쉽습니다. 자신의 부모인 사람이 '정의'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기준으로 자녀들의 행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위를 하면 칭찬을 얻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자녀들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두운 내면을 가진 부모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동시에 앞서 말한 '미끼'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부모가 항상 '불쌍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위선적'인 사람이며 심지어 '악한'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릇되이 형성된 이 관념은 깨어지기가 꽤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와 같은 인간관계는 선별할 수 있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오직

철없는 동생

 현대의 과학문명은 사춘기에 접어든 반항기 가득한 철없는 동생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제 겨우 차를 모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아버지 열쇠를 훔쳐서 차를 몰고 나가려는 것과 같지요. 차를 몰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펑크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사고가 났을 때 보험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사소한 기계 결함이 있을 때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저 차를 몰면서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도 되는 듯한 힘을 순간 느끼는 것 뿐이지요. 반면 성숙한 형은 여전히 아버지만큼의 지식과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직은 많이 모르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도 동생과 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겸허하게 대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낸 과학 기술이 마치 모든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이라도 해 줄 듯이 생각하고 자만하며 실제로는 많은 것을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영적으로는 미숙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겸손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은 만남

좋은 스승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제자가 있을 때에 좋은 스승도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전해주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이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꽤나 저와 오랜 시간을 머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지요. 반면 아주 가끔 마주치는데도 저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만남의 실질적인 '시간'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수압이 세면 짧은 시간이라도 충분히 많은 물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해주려는 이와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만나면 적은 시간이라도 많은 가르침이 건너갑니다. 많은 걸 들어서 배운 게 아닙니다. 아는 걸 실천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고작 성경 몇 구절 밖에 외우지 못했지만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드높은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수많은 '수도회' 들의 저마다의 모토 역시도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영성의 '가난'이나 베네딕도회의 '기도와 노동' 처럼 정작 그들의 핵심 영성은 단어 몇 개로 추려집니다. 남은 것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실현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까요? 오늘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앞산 밑자락에 있는 공동 사제관을 나와서 아래로 10여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신천이 나온다. 신천에는 잘 조성된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로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면 의외로 볼거리가 많다. 물이끼가 잔뜩 끼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는 신천의 물, 그 위를 노니는 원앙 한 쌍, 목이 긴 새 한마리, 꽤나 몸집이 커서 멀리서도 보이는 잉어들... 하지만 그런 자연과 더불어 관찰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유달리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자 어르신들이었다. 언제나 장기판이 마련되어 있고 두 사람은 진지하게 그것을 쳐다보면서 다음 수를 생각하고 나머지 분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며 구경을 한다. 남성의 특징인걸까? 경쟁을 좋아하고 무리 생활을 즐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열심히 몸담아 오던 생활에서 벗어나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나이 많은 자매님들도 관찰할 수 있지만 자매님들은 그런 눈에 띄는 모임을 만들어 놓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소규모로 옹기종기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열심히 씰룩씰룩 걸어가면서 옆의 자매에게 쉴새 없이 떠드는 모습이 자주 관찰될 뿐이다. 성당에 자매님들이 유독 많은 것은 그 자리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르신 세대에는 주로 남성들이 일을 해 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성당에서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남자들의 경쟁 구도는 성당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해서 그래도 여윳돈이 좀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활기있게 성당 생활을 하는 반면, 밖으로만 나돌던 어르신이 성당에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을 듯 싶다. 반면 자매님들은 친교 관계를 성당에서 맺어 두기 때문에 성당에 나아오는 것이 훨씬 더 부담이 덜하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당에서 인정을 받으니 성당 나오는 재미가 쏠쏠할 듯 싶다. 심지어는 집안에서의 모습과 성당에서의 모습의 극적인 차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성당에 나오고 싶어하는 형제님들의 발길을

행복의 핵심 정리

행복을 찾으면 행복이 없다. 헌데 사랑을 찾으면 행복이 뒤따른다. 행복은 사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쾌락이 아니다. 쾌락은 찾을수록 더욱 목마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의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은 수고스럽고 사람들은 수고스러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해서 피하려고 한다. 훈련에 따르는 괴로움과 죄악의 결과물인 괴로움은 서로 다르다. 훈련을 잘 이겨내야 우리는 성장하고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더 행복해진다. 하지만 죄악의 결과물인 괴로움은 죄악을 피함으로써 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요한 3,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1.  어떤 구두장이가 처와 자식을 데리고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자기 소유라고는 집도, 땅도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으며 오직 구두를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곡식값은 비싸고 품삯은 헐하기 때문에 언제나 먹고 살기에 바빴다.  구두장이에게는 아내와 공동으로 입는 모피 외피가 한 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도 낡아서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벌써 2 년째나 양피(羊皮)를 사 가지고 새 외투 한 벌을 지어 입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가을이 되고, 구두장이에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장롱 속에 3 루우블의 지폐가 있었고, 마을 농부들에게 꾸어준 돈이 5 루우블하고도 25 꼬페까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날 구두장이는 아침부터 양피를 사러 마을에 갈 채비를 했다. 그는 조반을 마치고서, 셔츠 위에 그의 아내가 얼마 전에 자신이 입으려고 지은 무명 자켓을 껴입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주머니 속에 3 루우블을 넣고서, 나무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집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이르러 구두장이는 어느 농부의 집을 찾았지만 주인은 없었다. 그 부인되는 사람이 말하길 일주일 안으로 돈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두장이는 다른 농부를 찾아갔으나 그 농부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말하면서 장화 수선비 20 꼬페까 밖에 주지 않았다.  구두장이는 양피를 외상으로 사고자 했으나 가죽 장수는 외상으로 주려고 하지 않았다. "현금으로 사요. 그러면 좋은 걸

신앙과 영성

종교인들 사이에 한때 '영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뭔가 내면적인 것을 추구한다 싶으면 무조건 '영성'이라는 말만 붙이면 다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영성은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단어였으니까요. '신앙'은 뭔가 우리를 속박하고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느낌이라면 '영성'은 조금은 느슨한 느낌으로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유행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최근에도 어렵지 않게 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조금은 부드럽게 세상과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영성'이라는 것으로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런 움직임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일까요? 어떻게든 우리를 속박시키려는 것으로부터 모두 탈출하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헛된 종교적 틀은 예수님도 거부해 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기도 하시고 손을 씻지 않았다고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질을 찾는 움직임이 모든 '틀'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큰일납니다. 신앙의 고유한 영역 속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를 구속시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다보면 결국 '십자가'조차도 거부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의 오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영성은 경계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요가도 영성이고 도를 아시는 것도 영성이고 심리 프로그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영성이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화된 것들은 서로 뒤섞이기 쉽습니다. 그 말은 그 안에 내포된 좋은 것만 영성으

인내

그리스도교의 덕으로서 '인내'에 대해서 서술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왜 참아야 하는지 등등에 관해서 생각이 가 닿는 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인내는 다른 덕의 밑바탕이다. 인내는 가장 기초적인 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텃밭에서 다른 모든 덕들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인내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장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인내가 기본되어 있지 않으면서 다른 덕이 자라나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다른 덕이 살짝 뿌리를 내린다 하더라도 곧 그 덕에 반대되는 시련이 다가올 때에 인내의 부족으로 덕행의 씨앗이 말라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2) 무엇을 참아야 하는가? 인내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불편을 참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인내는 성장합니다. 나아가 다른 이의 어리석음도 참아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누군가의 공공연한 죄악도 일단은 인내와 더불어 살펴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덕이 우선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린 꼬마 아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일단은 내가 참아야지' 하면서 쳐다보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이를 폭력에서 구해 내는 것이 우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특별한 일은 잘 벌어지지 않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대상으로 '인내'를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다른 덕(분별, 정의, 용기 등)을 실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3) 왜 참아야 하는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내는 덕이며 참는 것이 나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인내를 통해서 다른 이에게 기회를 선물해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인내 안에서 그분의 정의와 그분의 질서에 동참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인내 그 자체이십니다.

의무인가 사랑인가?

군인은 나라를 지켜야 하고 의사는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월급을 받고 그들은 본인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월급이 끊길 때 그들의 의무도 더는 기대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그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수행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의무와 사랑의 경계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충분한 값을 치르고 있으니 그가 하는 일은 그가 아무리 성심껏 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의 '의무'에 종속된 일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에게 합당한 것이 돌아가지 않는데도 그가 성실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자발적인 사랑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피조물을 성실히 돌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창조에 따른 자연스러운 의무이지요. 그래서 자연물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서 순환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돌봄이 모든 곳에 미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하지만 '구원'은 하느님의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창조하셨으니 무조건 구원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시는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구원하시는 일이 우리가 마땅히 요구하고 당신이 반드시 해 내야만 하는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합당하지 않은 데도 막연히 구원을 기대하는 엉뚱한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느님은 결국 나를 구원하셔야 할 거야.'라는 막연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의무'였는지 '사랑'이었는지는 그가 일을 멈출 때에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가 해 온 일이 의무였던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해 온 것이 순전히 그가 베풀어 온 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신앙의 여정에는 [어둠에서 빠져나오는 여정]과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다른 방향이 아니며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 상승의 구조이고 구원을 지향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자신이 뭔가 배배 꼬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 기초적인 교만이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고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이 마치 이미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기라도 한 듯이 보다 거룩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다닌다.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기도나 새로운 형태의 신앙 자료들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묶여 있는 사슬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태가 대부분이다. 진정한 거룩함의 여정에 있는 이는 자신으로 야기된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큰 사랑에 이르지 못한 스스로의 모자람을 안타까워한다. 남을 더 돕지 못해서 더 사랑하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헛된 거룩함의 여정에 있는 이는 스스로의 오류도 수정하지 않은 채로 남들에게 더 드러낼만한 거룩함의 요소를 찾을 뿐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냄새나는 오물은 치우지 않은 채 어떤 향수를 더 발라야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사람인 셈이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이러저러한 구분이 의미없다. 하느님은 이미 시작부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헛된 거룩함'에 빠져드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변화는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이 겨자씨의 믿음조차 찾기 힘든 셈이다.

신앙교육

제가 학생시절이던 무렵 성당에서 유행했던 학생 대상의 활동 가운데 대표격으로 '신앙학교'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대구에서는 '단체생활', '야영', '모닥불'에 곁들인 몇가지 신앙 프로그램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지요. 신앙학교의 핵심 출발점은 다름 아닌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야외활동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관점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활동은 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신앙'은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본질인 신앙보다 활동이 득세하게 됩니다. 올해는 이런 활동을 가져와서 해 보면 어떨까 또 다른 해에는 이런 활동이 어떨까 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대학생활이나 군대 생활 등등에서 재미있었던 것을 실험적으로 시도해보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여러 소년 활동들이 접목된 셈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스카우트 활동 가운데 야영생활이 상당 부분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카우트의 본질적 특성은 쏙 빼두고 멋있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만 잔뜩 가져왔기에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멋진 모닥불을 준비하려다 사건 사고도 많았지요. (참고로 저는 스카우트 상급 지도자 훈련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조금은 더 분별력 있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이 시작됩니다. 좋은 교리교사의 자질로 신앙적 헌신이 우선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기술적 능력을 발휘하는가, 얼마나 많은 외적 경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리교사로서 신앙을 얼마나 잘 전하는지는 측정될 수 없으니 뒤로 제쳐두고 신앙학교 같은 것을 얼마나 잘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와 같은 것이 더 중요한 지표가 된 셈입니다. 또한 젊은 세대가 점점 빠져나가게 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

신부님은 결혼 안해 보셨지요?

타국 생활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실제 그 생활을 해 보는 것입니다. 군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가 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경험으로써 대상을 잘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어떤 종류의 독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그 독을 먹고 마셔야 할까요? 그건 멍청한 짓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 스스로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독에 대한 사전지식을 배우고 그 독을 먹으려는 이를 가로막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현명한 일입니다. 사제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농담처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사회생활 안 해 보셨잖아요.', 또는 '신부님은 결혼 안 해 보셨잖아요.'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정당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이를 혹독하게 겪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독소가 인간을 파괴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위험 요소에 대해서 충분히 경고할 수 있고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의사는 그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병을 겪어야만 한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의사는 코로나에 걸려야 하고 산소통을 매달고 고생을 하다가 깨어나야 할 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의 핵심은 '대화'에 달려 있습니다. 두 인격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상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단연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도 대화 나름이지요. 건설적이고 아름다운 대화가 있는가 하면 상대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대화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화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문제는 초기에 다들 사랑으로 시작을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듯한 체험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순전히 '인간적 사랑'

인생의 핸들 - 분별

우리가 24시간 '선이냐 악이냐'를 분별하고 산다면 굉장히 피곤할 겁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딱히 판단을 사용하지 않고 흐름에 맡기며 살아가지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식입니다. 심지어는 일조차 '흐름'에 따라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근해야 하니 출근을 하고 퇴근해야 하니 퇴근을 하는 거지요. 하지만 이런 일상 가운데에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어떤 경우에는 조금 중대하게 또 여유와 더불어서 혹은 시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바쁜 가운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짜증스럽게 응대할지 아니면 부드럽게 응대할 지, 배우자가 건네오는 중요한 결정에 나의 사욕에 따라 결정할 지 아니면 올바른 조언을 해줘야 할 지와 같은 문제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분별의 순간이며 올바른 판단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 이런 하찮아 보이는 결정들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형성해' 갑니다. 우리가 하는 '올바른' 선택이 쌓이면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무심히' 선택을 하면 우리는 '무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선택을 하면 결국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학생 시절에 담배에 손을 댈지 말지, 그리고 그렇게 쌓인 습관을 끊을지 말지, 시간이 더 흘러 건강을 위해서라도 멈출지 말지... 이런 수많은 선택 속에서 '소홀한' 선택을 해 온 사람은 결국 '폐질환'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결국 두 사람 사이가 아름답게 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먹한 사이가 될 수도,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깨어 있으라'는 초대는

듣기 - 나를 비춰보는 거울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타인에게 시선을 두고 그를 열심히 평가하지만 그와 유사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두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주제가 정치이건 연예계 스캔들이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서 열렬히 비판을 가하고 수정을 가하고자 하는 사람 치고 정작 그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에게 스스럼없이 수정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온전히 '합당하고 이성적이고 올바르다'는 헛된 근거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곁에 사람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는데 그 수와는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없다는 공통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가진 힘으로 인해서 그에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이 몰려 있거나 아니면 그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거나 하는 극단적 형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어떠한지를 비추어주는 '거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와 함께 하는 모임에서 그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참고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재미난 건 그 사람은 그 어떤 사소한 수정도 용납하지 못해서 곁의 사람들이 두어번 수정의 시도를 하고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가족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는 근본적으로 '외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타파하고자 관계에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몇 번 만나보게 되는 사람은 그의 본질을 머지 않아 깨닫고 더욱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그는 더한 외로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도 '인내'가 요구되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교회는 잘 듣는 것의 미덕을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많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

갈증을 느끼시나요?

믿음은 주고 받을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 안에 공존하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쉽게 나누어 줄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도 가능합니다. 멀쩡하던 믿음에 그 반대되는 요소를 끊임없이 강요함으로써 숨막히게 하고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언가를 확실히 본다고 그 순간부터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이의 근육을 떠올리는 게 더 낫습니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훈련을 하면 미약하게 성장해서 탄탄해지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어느날부터 운동을 멈춰 버리면 서서히 줄어들다가 결국 무기력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믿음은 그 핵심이 영혼의 내면에 달려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상황과 조건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감각할 수 있는 주변의 사건들을 통해서 꾸준히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은 약화되어 있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교회가 성사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성사적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크나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실망스러운 일들은 우리의 믿음에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근본적인 영역은 외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내면과, 즉 자유의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성당을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조치로 실시간 미사라도 대송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런 조치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치'일 뿐입니다. 충분히 양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스켓 하나로 견디라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이 장기화되다 보면 분명히 조금씩 신앙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힘을

영혼과 시간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저 봄볕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짧디 짧은 꿈이 어마어마한 인생사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영역에서의 '시간'은 무엇보다도 지구의 자전운동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어서 그 큰 움직임에 따라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변동이 거의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정신 안에서의 시간은 이 지상의 시간 개념과는 상관없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고통이 너무나 오래 느껴지고 또 반대로 너무 재미있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과학계에서도 여전히 그 의미가 올바로 밝혀지지 않은 대상입니다. 과학은 시간을 사용하지만 여전히 그 올바른 규정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움직임이 있기에 시간이 의미를 갖습니다. 움직임이 없다면 시간도 그 힘을 잃겠지요. 헌데 육신의 움직임은 일정한 질서와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신의 움직임은 육신의 가능성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움직이게 되고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옥과 지옥에서 우리의 영혼이 느끼게 될 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이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괴로워도 해가 지고 나면 잠이 들고 다음날이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지상의 요소들과 분리된 채 머무르게 되는 영혼에게 있어서 자신의 시간을 측정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뇌는 '영원'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작 지상에서는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고통 중에 있는 영혼에게는 1000년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몸'이라는 유한성 속에 갇혀 그 질서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던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정신적 움직임은 초월적인 움직임 속에서 '일장춘몽'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에서는

스스로 불러들이는 심판

세상에 '순도 100%의 악' 이런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악의 출발점은 선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신에게 좋은 것'은 압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그들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선을 아는 그들이기에 선을 선택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악은 그 자체의 본질로 인해서 '선택'하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언제든지 정반대인 선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악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중인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더욱 거기에 빠져들기 때문에 스스로의 책임이 더욱 가중된다는 것을 그들은 압니다. '이러면 안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렇게 뒤따라오는 것이 '죄책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내면의 중압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악을 망각하기 위해서 다른 쾌락의 중독에 빠지거나 현실을 회피하고 도피하는 선택을 합니다. 또 가능하다면 가까이 있는 선한 이에게 탓을 돌리는 사악한 계략을 쓰기도 합니다. 자신의 탓을 덮어씌우기 위한 희생자를 찾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악은 더욱 짙고 어두워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로잡혀가는 악의 어두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요. 복음의 메세지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함이지만 그들은 복음의 흉내를 낼 뿐 실제 복음의 생수를 마시지는 않습니다. 그저 겉도는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악인들은 그 행실로써 죽음을 부르고 의인을 미워하는 자 멸망하리라. (시편 34,21)

죄책감

내가 금속 장인이라면 상한 놋그릇을 다시 녹여서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상복귀됩니다. 내가 디자인하고 만든 것이니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술이 없다면 우리는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영혼이 깨집니다. 인간은 영혼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추스를지 모릅니다.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고 그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놓으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데 문제는 물건의 단순한 이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훔친 순간 나의 영혼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물건을 아무리 돌려놓아도 나의 내면에는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죄책감'이라고 부릅니다. 영혼의 흠인 셈이지요. 영혼을 만드신 분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용서'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용서'의 과정을 형식화 시켜 버립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한 진정한 용서가 아닌 교회법적 절차를 거쳐서 원금상환을 하는 개념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어떻게든 고해소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자동 청소'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죄책을 메꾸려고 봉헌도 해보고, 봉사도 열심히 해보는데 뭔가 개운치 않습니다.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서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가 미비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외적인 척도로 재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통독을 10번 하면 자동으로 회개가 되고 하는 식의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내가 진정으로 잘못함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뉘우치는 깊은 내면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외적으로 측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죄를 메꾸기 위해서 엄청 힘든 외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가 쉽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넘기 힘든 벽은 내가 스스

말씀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것은 '음성'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뜻이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이라는 말이 나올 때에는 이 '의미'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음성이 없어도 행동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표정이나 태도를 통해서도 말이 전달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음성으로 이루어진 말은 속이기 쉽습니다. 속의 뜻을 숨기고 겉으로 착한 척을 할 수도 있고 속의 좋은 뜻이 겉으로 곡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유투브를 하고 난 이후로 댓글로 성질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은 제가 영상 안에서 전하는 의미를 파악한 게 아니라 말마디 하나에 거슬려서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불필요한 말은 삼가하려고 합니다. 말을 적게 해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습니다. 많은 말을 했을 때에 별 일이 없으면 다행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그가 드러내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데 무의미한 사람이 있고,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데에도 그 안에 의미를 풍부히 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책을 하며 자연 안에서 말씀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고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자신을 상실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꺼내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생각이 말로 드러납니다. 말씀 안에 살아가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항상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만 열면 자기 자랑과 돈걱정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본질인 셈입니다. 말씀이 언제나 환영받을 리가 없습니다. 허무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의미를 두려워합니다.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허구가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다른 표현으로 거짓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하기 싫은 일

필요와 과도함 사이에서

건물을 키우고 싶은 사람은 건물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반면 영혼을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은 영혼을 성장시킬 능력이 있는 분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이 차이가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지도자를 만들어 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아한 성당'을 짓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갑니다. 여기에 혼돈이 존재합니다. 멋진 성당을 짓는다고 신앙이 절로 자라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버립니다. 자칫 성당을 화려하게 짓는 것이 좋은 신앙을 드러내는 듯이 가르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봉헌금을 내는 것이 곧 열심한 신앙을 증거한다는 듯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열심한 신앙이 재산의 축복을 불러온다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 아무것도 없이, 한 푼도 없이 살 수 있느냐?' 아니오. 그렇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듣는 양들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봉헌 예물이 될 것입니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화려함이 담긴 과도한 건축물을 변명하기 위해서 돈의 필요를 과장해서 말하는 것도 오류입니다. 우리는 금전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필요에 따른 것이 있고 우리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내면이 부실한 사람은 언제나 외면으로 그것을 메꾸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소박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삽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화려함은 피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목매다는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우리의 존재가치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또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그 자체로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라디오는 그 자체로는 고철 덩어리일 뿐이지만 주파수를 받아서 온갖 목소리를 내듯이 인간도 그 자체로는 상등의 동물일 뿐이지만 영원과 맞닿은 영역에서 감도를 받아서 영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본연의 가치, 영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영원에서 올 때에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의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즉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연계를 맺고 그분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구나 하는 지상의 일상적 활동에 또 한 번 나 자신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영원과 맞닿은 곳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역할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