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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최고의 가치

'가치'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에는 여러가지 '근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배웁니다. 즉, 뜨거운 게 싫다는 것, 추운 게 싫다는 것은 굳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경험과 체험으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싫어하게 됩니다. 기술도 배웁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더라도 똑같은 것입니다. 땅을 파는 기술을 삼촌에게서 배울 수도 있고 할아버지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 기술을 가진 누구라도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기능 교육, 지식 교육도 비슷합니다. 그것을 가진 누구든지 아직 배우지 못한 이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수준이 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르던 것을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서든 가능한 일입니다. 도둑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열쇠공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그가 선하고 악하고가 필요 없습니다. 기술만 잘 전해주면 그만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배웁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치'는 아무나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가치를 배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한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항상 진실될 것을 가르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진리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가치는 가르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살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분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어떠한 가르침도 전해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왜 악을 막지 않는가?

이 질문은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막으십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 안에 '양심'을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 우리를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그 악의 죄책보다 더 큰 쾌락이나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여러 '기회'를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준비된 가르침이 주변에 있습니다. 준비된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사실상 적극적으로 막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뚫고 어둠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막지 않으십니다. 결국 그렇게 쟁취한 악이 무르익어 그 썩은 열매가 터질 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금껏 성실히 달려온 악의 결실을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의'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시작부터 자유를 주신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스르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롭고 진실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 스스로 정한 길을 끝까지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 가담하고 계속되는 회개의 초대를 거부한 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 할 때에 정말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나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자각하고 알면서 악을 결행한 것인가요? 답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질문에 나는 내가 저지르는 일이 '악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그 무지에 상응하는 결과를 선

어린아이의 영혼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내재된 본성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엄마 젖을 찾아다닌다. 다만 그들의 '미형성된' 육신과 제대로 된 링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인간의 자녀들은 어떠할까? 우리는 어린아기를 보면서 '미숙하다'는 것을 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한다. 겨우 숨을 쉴 뿐이고 젖을 주면 빨아먹는 정도로 활동할 뿐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비록 어른처럼 말을 못하고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을 뿐, 그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그들의 고유한 '영혼'으로 느끼고 인지하고 있다. 동물들이 기본적인 동물의 본성을 타고나듯이 인간도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성숙한 표현을 못할 뿐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의식 안에서 그것을 정돈하고 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서 인지되고 관찰되고 있다. 어리다고 해서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함부로 대하면서 그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어른이 되어서 '기억'에 담겨져 있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영향은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에게 현재 가해지는 영향력으로 남는다. 이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영향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국 하느님에게 우리가 드리는 것이 된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그러니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선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한다. 반면 어린

고해성사의 현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인지와 연구는 고대로부터 진행되었지만 근대 심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적 영역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소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속깊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서 그에 대한 도움을 받는 일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고해성사'가 있었다. 고해성사는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적 효과 역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던 비밀스런 일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 해도 사람은 그 일을 다시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죄의 용서'를 확고하게 받으면서 얻게 되는 영혼의 안정과 더불어 심리적 안정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고해성사'가 너무 형식화되면서 사람들은 그 안의 풍성한 힘을 제대로 체험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그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에게도 일부분 탓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부드럽고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당연히 그에게 더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여유롭게 속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사 시작 10분 전에 이루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 여유를 기대할 수는 없고 따라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는 짧고 굵게 해야 하는 형식적인 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고해성사를 찾는 신자의 자세와 태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진실한 뉘우침을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고해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고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적 요소를 얻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을 따로 만날 약속을 한다던지 여유로운 시간을 선택한다던지 하는 수고를 어느 정도는 들여야 한다. 우리는 식당도 예약을 해서 맛있

존경스러운 어른

존경스러운 어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어른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미 우리가 실천하는 부분입니다.  존경스런 어른은 그 존재 자체로 존경이 우러러 나옵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존경은 그분의 삶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는 것입니다. 향수병에서 향기가 나듯이 그분의 삶에서 향기가 나기에 존경이 절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로 무언가 이렇다고 저렇다고 하지 않아도 곁에서 지켜보면 압니다. 교양있고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고 거기에 더해서 특별한 능력도 있으면서도 겸손하지요. 꾸밈이 없고 소탈하기도 합니다. 반면, 자신을 존경해 달라고 떼쓰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나마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존경이라도 할 터인데 정반대입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행동마다 역으로 존경을 까먹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굴하고 치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존경은 커녕 보기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헌데 문제는 그런 이가 '상사'로 존재할 때입니다. 솔직히 사람 보고 고르라고 하면 당장 때려치우겠지만 사회적 구조상 어쩔 수 없이 그 아래 속해 있어야 하니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와 때려 치우고 싶은 이유가 항상 속에서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간다고 절로 갖춰지는 덕이 아닙니다. 인격적 완성과 덕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꾸준히 성장시켜야 하는 요소입니다. 책임질 줄 알고 또 필요하다면 도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말'로 이러한 것들을 메꿀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꾸며낸 말로, 또 때로는 꾸며낸 행동으로 다른 이를 일순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잠시는 그렇게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들통이 나고 말지요. 신경질적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신경증을 감추고 살 수 없습니다.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은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특정한 요소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결국 숨겨오던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야 맙

묵주기도와 단수 헤아리기

질문> 신부님 왜 레지오 에서는 단수를 헤아리는 건지요? 저는 하루 오단 많이라도 제대로 묵상 해도 될거 같은데요? 네, 그렇게 하셔도 되고, 사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성호경'을 바친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정성껏 바친다면 그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모든 기도가 같은 기준점에 놓여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와서 레지오에서 '단수'를 왜 헤아리는 걸까요? 저의 솔직한 답변은 '모른다'입니다. 그런 전통과 관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누가 시작한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몇 가지 유추할 뿐입니다. 기도를 헤아리면서 바치는 관습 자체는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묵주기도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없습니다. 그저 어느 성인에게 성모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던지 아니면 과거 사람들이 열심히 성모송을 바치던 습관 가운데에서 그것을 체크할 수 있도록 기도의 도구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백년 전의 과거에는 묵주기도를 체계적으로 바치는 일은 없었고 그저 주님의 기도와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아온 성경을 기반으로 한 성모님의 기도인 성모송을 사람들이 열심히 되뇌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좋은 시작이었고 아름다운 관습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무질서한 영역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전거가 고장났을 때에 그냥 고치던 일을 '메뉴얼'로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천상의 가르침이건 교회의 필요이건) 자리잡힌 묵주기도를 보다 더 체계화하고 지금의 성경의 각종 신비들을 묵상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빛의 신비'가 따로 추가된 것만 보더라도 이런 질서들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4개의 신비(환희, 고통, 빛, 영광)로 나뉘어진 묵주기도 체계를 갖추

개운한 하루를 위해(개방성, 최선의 실천)

한 사람의 인격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서 보고 듣고 깨달아가는 것을 확장하면서 서서히 이루어져 간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간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모든 문화가 그에게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한국에 살아도 부모의 종교에 따라서, 살고 있는 지역의 풍습에 따라서 전혀 다른 토대를 지닐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문화에 익숙해져 왔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가톨릭'의 가치체계 전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남미의 가톨릭 문화와 유럽의 가톨릭 문화, 그리고 아시아의 가톨릭 문화가 저마다 너무나도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모자람'과 더불어 인격을 함양시켜 나간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또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내제되어 있는 분별력은 항상 '더 나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가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가진 것이 '절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는 더이상의 '가르침'의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고 그는 자신이 설정한 틀에 고착화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내가 알게 된 최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현대는 특히나 사상의 홍수와도 같은 현실이다. 21세기 들어서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의 양은 과거에 비할 데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원하면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지식을 언제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는 '실천'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최선, 가장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성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