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9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인간이 가장 뛰어날 때

인간은 뛰어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근력을 키우고 움직이는 스킬을 배워서도 뛰어날 수 있고 지력을 한껏 끌어당겨서 뛰어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이 그 본연의 창조 원리에 기초해서 가장 뛰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에 가장 뛰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성장도 이 사랑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아무리 성장을 거듭해도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드릴까요. 서울대 법대를 합격하고 뛰어난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지적 영역의 성장은 그의 실천 앞에서 하찮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서 경제사범의 변호를 맡게 되었고 그를 어떻게든 법의 형량에서 빼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요. 그는 진리를 수호하는 사랑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가 있음을 알았지만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주변 인물들의 시선 속에서 '진리'를 수호할 용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손을 열심히 씻어 보지만 자신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성장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사랑은 특정 행동을 반복적으로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궁극의 선에 온전히 우리를 내어바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주제 앞에는 언제나 의지의 훈련이 내포되어 있고 그 의지는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힘든' 일이 됩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의 훈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라고 '십자가'를 주십니다. 즉 십자가는 사랑을 성장시키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되
 어둠의 결탁 어둠은 서로 결탁합니다. 하나의 어두움은 다른 어두움의 뒤를 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보호를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어두움은 서로 결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끈적한 기름이 다른 끈적함을 만나면 쉽게 들러붙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면 빛은 결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입니다. 빛은 가장 완전한 빛에서 나누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빛은 더해져도 같은 빛입니다. 어둠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증오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붙어 있을 뿐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밀쳐냅니다. 그리고 어둠의 속성 가운데에는 탐욕이 있어서 어둠은 근본적으로 '나눔'이라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분배할 뿐 진정한 의미의 '나눔'은 알지도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가리는 듯 합니다. 하지만 사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 자체는 가려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은 태우는 불입니다. 그래서 빛 가까이 다가가는 어둠은 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빛을 가리는 시늉을 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 '일시적'이라는 뜻이 때로는 한 사람의 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은 영원하기에 아무리 긴 시간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은 하느님에게는 어둠이 아무리 오래 장악하고 있어도 결국은 빛이 이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표현을 한다고 해서 어둠이 빛을 공격할 때에 그 공격성이 사그러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의 공격은 실천적입니다. 때로는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때로는 인격을 말살시키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