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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같은 말, 다른 반응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날이 많이 차가울 때,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 들어오면 몸의 온도와 손의 온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손으로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물이라도 몸에 갖다대면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의 온도는 같지만 받아들이는 영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곳에 특강을 다니면서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정반대의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전하는 말이 그때그때 다르다면 그 반응의 차이는 저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디를 가든 같은 목적의 말을 한다면 결국 그건 받아들이는 이들의 온도차이입니다.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 제가 하는 말의 취지입니다.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의 외아들의 십자가를 끌어안자는 것이 제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이제 이 노선을 바탕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전히 어둠의 행실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떻게 하면 어둠을 끊어버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십자가를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십자가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사람들은 흔히 양분되곤 하였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등경 위의 등불과 같아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사랑으로만 하는 신앙생활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삶을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가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빛은 언제나 빛의 속성 그대로 밝음으로 드러나고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둠은 언제나 그 속성대로 숨어 지냅니다. 진리는 모든 이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더라도 언제나 진리의 속성

분열을 일으키시는 주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예수님의 이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지껏 신앙생활을 '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마치 일치를 파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말마디 그 자체에 집착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된 의미의 일치, 진정한 의미의 일치라는 것은 그저 어중이 떠중이들을 끌어 모아 둔다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합지졸'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든다고 해서 그 군대가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여지지는 않습니다. 뚜렷한 같은 목적이 있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에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일치된 동작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분열'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간단한 질문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악'이 자행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 중의 그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에서까지 악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이곳에서 정화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분리'와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품고 살아가면서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따르고 세상의 악도 수용하는 식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언자를 기리는 일, 또는 한국적 환경으로는 순교자나 성인을 기리는 일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들의 참된 신앙을 상기하고 그것을 뒤따르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모든 것의 원래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 하에 파생되어 나오는 여러가지 다른 일도 있습니다. 즉, 여러가지 사업을 조성하고 기금을 모으고 건물을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속에 그들을 괴롭히고 사형을 언도하고 실행한 이들의 행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의 잔인성과 사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조성하는 이들의 의도와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도입니다. 성인들의 거룩한 영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순교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업'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지방 정부와 연계해서 일종의 '관광' 사업을 벌이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수난을 두고 사람들이 구경하게 만드는 돈벌이를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두 번째 차원이 개입됩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마음자세입니다. 누군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건 그곳을 찾는 발길이 진정 순교자와 성인들의 거룩한 여정을 조금이라도 닮으려는 의도라면 그들에게 남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그들은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그들의 고뇌와 아픔을 함께 나눌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지켜온 신앙의 뜨거움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가는 길에 맥주나 까고 술이 모자란다고 성질을 부리고 가서도 성지가 형편 없다느니, 모양새가 영 이쁘지 않다느니 다른 곳이 훨씬 낫다느니 품평회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진정한 성인을 맞닥뜨렸을 때에 예언자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삿밥이나 먹고 떠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

"이 방법 밖에 없었습니까?"

신앙생활에 올바르게 몸담아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아니 여러번 반복해서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과연 이 방법 뿐일까요? 워낙에 효율성을 좋아하고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들이라서 하느님의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정말 그 뿐이었을까요? 그분의 십자가 말고는 다른 구원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하나만 퉁기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는 식은 안되는 걸까요? 유다의 계획을 알고 있던 그분은 그를 사도단에서 일찍부터 제외시킬 수는 없던 것일까요? 인간의 지혜가 가 닿지 않는 그곳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시간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을 바탕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자원 밖에 없는 꼬마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부유한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두고 있는 자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난 범위의 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적 한계 속에서 아버지에게 청을 드렸습니다. 제발 이 잔을 치워 달라고 말이죠.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아들이 당신에게 의탁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여정을 우리는 오늘날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만그만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영적 강도와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추악한 악을 품고 음모를 짜는 이들부터 순진한 어린양 같은 이들까지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악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악인들이 자행하는 악의 결과를 맞닥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 그들의 증오와 어둠의 결과를 선한 이들이 '나누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하

변화는 언제 찾아오는가?

우리는 언제 깊은 감명을 받을까요? 그리고 그에 멈추지 않고 실제로 '변화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화려한 언변의 말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말은 다양한 존재가 내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의 구체적인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한 사람의 실질적인 삶의 모범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움직임이 많아질 때에 비로소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저 말뿐인 교회, 혹은 외적 겉치레에 신경쓰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칭송하고 공허한 친교로 서로 술잔이나 돌리고 있는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있는 재원을 깎아먹고 쇠잔해 갈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만의 잔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삶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이 맑은 이는 진리의 모범에 이끌리고, 반대로 어두움이 가득한 이는 그릇된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즉, 밝은 이들은 밝은 대상에 이끌리고 어둠이 가득한 이들은 어둠의 대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거짓을 즐기지 않는 이들은 진실한 사람의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되고 올바른 가치를 전하는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그들의 모범을 뒤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계략을 걸어서 그를 넘어뜨리고 싶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방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음험하고 어두운 계략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낮동안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반대로 바퀴벌레는 습하고 어두운 음지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변화'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내면에 설정된 가장 기초적인 방향에 근간을 둡니다. 빛으로 변화하고 싶은 이는 끊임없이 빛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암울해도 빛의 방향을 찾고 빛의 방식을 습득해 나갑니다. 반대로 어둠을 즐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