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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가정의 위기

  교회는 예로부터 '가정'이라는 단위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돌볼 수 있도록 애를 썼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얽매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고 부수어뜨리려 했고 당연히 가정 안에서의 그 질서 역시도 하나의 '굴레'로 치부하면서 파괴가 이루어졌습니다. 악마는 가정 안에 돈을 우선시하는 관념을 불어 넣었습니다. 자녀를 돌보는 데에도 돈이 들고 부모를 돌보는 데에도 돈이 드니 자연히 자녀 계획이라는 명분 하에 낙태가 당연시되고 나아가 안락사 찬반까지 거론되는 상황입니다. 어른들이 자살당하는 시대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악마는 나아가 아예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지 않기를 종용합니다. 인류가 멸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녀의 축복을 부담으로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사랑과 정성에 쏟을 시간과 능력을 소위 '자기계발'이라는 것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스스로 멋들어진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자녀와 함께 도전을 이겨내는 경험에서는 역으로 멀어지게 되고 나아가 인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멸망해 가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반대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자녀를 갖지 못해서 애가 타는 어미를 보여주고 또 가정 안에 돈이 아닌 '가치'를 불어 넣으려고 애를 씁니다.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와 같은 아름다운 덕은 가정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가정 안에서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내의 남편을 향한 순종 2.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 3.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 4.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심지어 예수님도 자신의 세상의 부모에게는 순종을 하고 지냈다는 것이 복음에 드러납니다. 다만 예수님의 신성 앞에서는 역으로 부모가 예수님에게 순명해야 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가정 공동체의 질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契約 (맺을 계, 묶을 약) 約束(맺을 약, 묶을 속) 약속이라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반면 신뢰가 없다면 약속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공약'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실질적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표를 쥐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잠깐의 환각적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은 '약속'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큰 두 권으로 나누면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취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파스카 약속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왕을 주겠다는 약속도 다윗을 통해서 이루어졌지요. 물론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약속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압니다. 반면 신약의 약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 하늘 나라에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고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주시겠다고 하고서 빼앗아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우리 측에서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시고 꾸준하신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시작부터 의심을 하는 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시당초 하느님이 계실까를 의심하고 살거나 아예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느님과 상관 없는 삶의 행보를 보이는 이도 많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와 어떻게 '신뢰'를 형성하겠습니까?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의

저를 받으옵소서

제물, 예물, 번제물, 속죄 제물... 이러한 것들은 '만들어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펙과 같은 것이고 원하면 돈으로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재력이 좋고 집안이 좋다면 시작하면서부터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일찍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고 또 누군가는 순교자의 집안이라고, 몇 대 째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세례는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받는 것이고 또 그 선물에 합당한 자격을 성실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는 이는 모두 천국에 갈 것이고 세례만 받으면 굳이 착하게 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세례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 매를 덜 맞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구원을 '보장'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보장할 수 있는 대체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물들이었습니다. 이는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돈을 많이 벌어 예물을 많이 내겠노라고 그래서 하느님에게 잘 보여 보겠노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오직 나날이 채워가는 성실한 삶으로 살아가셨으며 심지어는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아내며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남겨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남겨 하느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삶, 거짓없고 진실한 삶 자체가 당신의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바치셨고 하느님은 그것을 기꺼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필요한 건 제물이나 예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누구의 아들, 어느 지역 사람, 어느 학교 출신 등등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는 통에 그 사람의 내면의 본질은 흔히 감춰집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믿었더니 뒷통수를 얻어 맞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하찮은 곳 출신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면이 튼실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영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와 예언자의 신원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상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 혹은 관점은 훈련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칼날을 벼리면 더 섬세하고도 예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도 더 깊은 곳을 파고드는 훈련을 통해서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1-12) 사람들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르쳐지지 않았고 또 근본적으로 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납니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친구보다 꾸준하고 성실한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에 달디 단 말을 쏟아내는 이를 흔히 더 쉽게 사랑해 버립니다. 그러나 내면의 충실이 없는 그들은 지금은 단 말을 꺼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쓴 말도 잔뜩 쏟아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메시아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품고 사는 예언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이들을 '함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