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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을 시험하다

시험은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높은 위치의 이들을 시험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유치원생이 대학생의 학력을 시험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반대로 대학생은 유치원생이 얼마나 성장해 있는지 언제든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맞는데 하느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모든 것이 바로잡혀야 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서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하고 손은 손의 역할을 발은 발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약한 부위일수록 더욱 조심히 다루고 강한 부위는 밖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어느 부위든지 심각한 상처가 나면 다른 일을 다 멈추고 그 곳을 먼저 추스르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일을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는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많은 것들을 무너뜨려 놓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멈출 줄 모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그런 영적 사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마리아의 사건을 알면서 '남몰래 조용히 파혼'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파혼은 필요한 조치였지만 마리아가 사람들의 시선에 뭇매를 맞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요셉의 마음을 알고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바로잡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미흡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고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

거룩한 이성

사실 신앙은 '비이성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반이성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이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 이성에 반대로 행동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다만 그 이성을 '신앙'의 범주 안에서 활용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십자가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범주 안에서는 십자가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맞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행위에 대해서 내가 그 책임을 안는다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가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영원의 가치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하는 기준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을 지닌 이라면 십자가의 내적 가치를 깨닫고 힘들지만 그 십자가를 감내하고자 애를 쓸 것이고 신앙을 지닌 흉내를 내는 사람, 즉 거짓 신앙인이라면 합리적인 세속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십자가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은 언뜻 신심있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마다의 세속적 계산이 다 들어가 있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지독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영은 거룩한 영, 즉 성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두고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 이들의 삶은 불가해한 것일 뿐입니다. 신앙의 어른들이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내 보속이다'라는 삶의 태도는 이성적인 이들에게는 거슬리는 말일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보속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녀들은 세상의 어두움을 함께 끌어안고 보속하듯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거

무조건 용서하는 하느님?

교회가 올바른 표지판이라면 사람들에게 다가올 일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그저 헛된 위안이나 위로로 감싸는 것은 답이 아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하느님에 대한 그저 막연하고 푸근하기만 한 이미지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실제로 들은 한 사람의 말은 이러했다.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이잖아?" 틀렸다. 하느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뉘우치는 이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아무런 뉘우침도 회개도 없는데 그가 한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그 잘못의 피해자가 되는 이에게는 계속 그 피해를 당하고 있으라는 선포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정의는 온데간데 없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어떠한 불의도 훗날 교정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영혼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분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지녀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는 이 힘을 상실해 버린 것 같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서 인원이 빠져나가고 교회의 세속적 힘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그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 정도로 소개하고 말아 버린다. 이는 강자의 복음이 되고 만다.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짖밟으면서도 영원 안에서도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거짓 복음인 셈이다. 참된 복음은 우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서게 도와준다. 그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바로잡도록 도와준다. 복음은 나약하지 않다. 복음은 짠 맛이며 힘이 있다.

고상한 신학?

내가 신학생 때에 나는 신학자들이 정말 현명하고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현란한 수식어와 고급진 단어들로 가득한 신학 서적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자신이 배운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저 어렵디 어려운 단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때로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의 커튼 뒤로 비겁하게 숨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신학자들이라는 사람이 순수하게 연구하는 분야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범주가 전혀 다르게 놀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리를 공부한다고 윤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성을 공부한다고 영성적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더 거룩해 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론이라는 것이 적지 않은 경우에 '가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일 이러이러 하다면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지적 놀이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때로는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는 것도 알았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만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신앙 안에는 초월적인 영역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의 이성의 범주를 월등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성은 신학에 충실히 봉사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진 이성은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고 산산조각난 신앙의 파편들은 그 원초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해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 신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 신앙을 구체화하고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내면과 외면

병원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술을 지나치게 먹어 간이 아프다고 합니다. 의사는 약물 처방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그 사람이 돌아옵니다. 헌데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증상에 이 약이면 일주일이면 낫고도 충분한 시간인데 왜 낫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검사를 시작합니다. 엑스레이며 CT 촬영이며 MRI까지 찍게 합니다. 피도 뽑고 초음파도 찍어 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 어디에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의사는 감을 잡습니다. 문제는 그의 몸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이유는 '선'과 '악'으로 양분됩니다. 선을 추구하면서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에 기대서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은 흔히 감추어지고 우리는 외견으로 평가 받습니다. 더러운 거래를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세속적으로 힘있으면서 영적으로 타락한 행위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서로간의 담합이나 비밀스런 협약과 거래 속에서 힘없는 이들은 고통 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의 내면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를 알고 그들의 훗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안다면 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차라리 연민을 품는 것이 더 나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내적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결과를 바라보는 부모는 그것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자녀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만 들어간다면 누구를 어떻게 짓밟든 누구에게 청탁을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한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영혼이 맑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에서 천덕꾸러기

로마서의 조심해야 할 행동들

흥청대는 술잔치(진탕 먹고 마시기, 포식) orgies, banquetes 악마는 사람을 바로 악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처음에는 좋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이끌어서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연회, 잔치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잔치들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친교를 도외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임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로마 시대에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온갖 쾌락적 요소가 난무하는 연회가 벌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추잡한 연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1차로 끝나지 않는 잔치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죄스런 갈증을 채워 나갑니다.  만취(취함, 폭음) drunkenness, borracheras 술이라는 것은 '흥겨움'을 불러오는 음식이자 기호식품입니다. 하지만 취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술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에 그 술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의 술 문화는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한 목적의 음료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소비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취기를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술 그 자체가 고유하게 지닌 음식으로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취함은 언제나 우리를 올바른 사고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또 영적으로도 죄스러운 쾌락을 찾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취기는 언제나 영적인 타락과 이어져 있습니다. 음탕(음행)promiscuity, lujuria 우리의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어질 때에는 하느님의 축복된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을 쾌락 그 자체로만 이용하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우리가 성의 고유한 역할과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곧잘 성은 쾌락의 도구로만 이용되고 또 그 쾌락은 강렬하기 때문에 수

교회를 세우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음 속에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무너져 가는 교회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작은 경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목소리의 의미는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교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내면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눈이 감겨 있을 때는 엉뚱한 일을 두고 그것이 좋은 일인 양 매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무렵만 하더라도 좋은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마치 술을 잔뜩 많이 마시고도 취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잘 버티는 신학생이 좋은 신학생이라는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오죽하면 소주 한 잔 못 걸치고 고스톱 칠 줄 모르고 개고기 먹을 줄 모르면 신부가 아니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소위 술사목이라는 것이 활개를 치던 때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대기만하면 그 교회는 성장 하는 것이고 본당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흥청망청 원하는 대로 돈을 지출 할 수 있으면 좋은 교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교회를 드나 들었고 새로 지어지는 본당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기성세대 신앙 생활을 바라본 자녀들은 교회의 영적 가치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실망 해 버린 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는 짠맛을 잃게 되었고 아무 짝에 소용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에 돈만 생각하는 상인들이 가득하고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교회 한해가 다시 밝았습니다. 저 멀리서 주님의 빛이 새롭게 비추어 옵니다. 이제 우리의 감겨져 있던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 바라시는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친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죽마고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조금 가까워지나 싶으면 휙 이사를 가버리게 되고 결국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환경이 오히려 다른 시선을 갖게 도와 주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귀는 친구는 없지만 언제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친한 사람은 단순히 같은 공간을 오래도록 함께 공유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을 만나더라도 그와 나의 영혼의 지향점이 같다면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오래 살아왔지만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됩니다. 당장 이곳의 모습만 보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서 사람들을 연합했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과거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친했던 이들이 어느샌가 마음이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그래서 '친교'라는 의미를 새롭게 정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친교는 세상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목적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목적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친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가? 2. 그 목적은 변함없는 것인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이런 질문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이 우리를 진정한 친교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올바른 가르침을 전제로 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와 그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의 목표가 전혀 딴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측은 부자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하고 다른 측은 가난한 이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한다면 언뜻 비

저주 아래 있는 이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 3,10) 법은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길 때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줍니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법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고 경찰이 와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어기거나 차선을 어기면 와서 딱지를 끊어줍니다. 사제가 평일까지 열심히 강론을 열심히 준비한다고 교구에서 상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교회법적 근거를 따라서 사제를 교구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법 767조 2항 회중과 함께 거행하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강론을 하여야 하며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궐(생략)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이들, 혹은 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서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이들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수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런 법을 살펴보는 이들도 다른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율법 시대 못지 않은 수많은 규정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까지 해 온 바 그대로 따라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형성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씩 놀라는 건, 어르신들이 빈 땅을 하나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고추를 심을지 깨를 심을지, 야채를 심을지 잘 알아서 어떻게든 놀리는 땅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영혼의 텃밭'에

영혼의 부유함을 함께 나누다

부유함의 영역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기본은 '돈'입니다.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름을 품지 않은 부는 죄가 됩니다. 즉 자신이 가진 그 많은 것을 올바른 목적에 사용하려는 의지 없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무턱대고 모으기만 하고 다른 이 앞에 으스대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돈벌이는 커녕  그러나 사람이 돈으로만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양한 것으로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식도 가질 수 있고 재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죄스런 부유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닌 것으로 '교만'을 형성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부족하게 아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영적 교만이 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유명 연예인이 되어서 자신을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색다른 '부유함'에 대해서 묵상하게 이끕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부유함입니다. 즉 자신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 그런 신앙의 기쁨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영역을 오직 자신들의 놀이터로만 만들기 시작하는 이들입니다. 사실상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늘 해 오던 일상의 습관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의 정신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이들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하느님은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외아들을

의인

의인이 의인인 이유는 자신에게 잘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리한 선택보다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돈 많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힘 있는 이들에게 굽신거리면서 나의 안락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영리한 선택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만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여도 하느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의인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운명지워져 있다. 고통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의인들은 그 모든 면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가난함도 견뎌야 하고 외로움도 이겨내야 하며 영적으로도 버림받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단련이야말로 그들의 내면의 보석을 진정으로 빛내게 된다. 의인들이 기다리는 영광은 지상의 영광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취직자리를 얻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결국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그래서 의인은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영원하신 분과의 만남의 순간에 온전하게 얻게 되는 것이다. 의인들은 오직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의로움에 마음을 둔 이에게 세상은 그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속에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내면을 보게 되면 의인은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더욱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리라 하는 희망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바로 곁을 지나쳐가는 구세주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기회를 상실하고 자신이 가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어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의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고, 나아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력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자신을 버리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저 자신을 막 대하고 소홀히 여기고 자신의 모든 욕구를 없애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그저 나 자신을 없는 것 취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로 버리려면 그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엄마가 책상을 치우라고 합니다. 그 말이 책상에 있는 모든 기자재를 싹 다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먼지를 닦으라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신을 버린다는 말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에서 우리를 이끄는 힘은 바로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입니다. 인간은 욕구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욕구가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뿐입니다.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무언가를 이루거나 성취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생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욕구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우리의 이 욕구가 누구 때문에 형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서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의 욕구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되고, 반면 우리의 욕구가 내가 아닌 존재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나는 비로소 나를 버린 사람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20) 성모님도 당신을 버리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고백을 통해 성모님은 당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성령으로

바쁨을 찬양하는 시대

우리는 바쁨을 자랑합니다.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여줘야 마치 나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의지대로 시간을 배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환경에서 미친듯이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를 위해서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저마다의 밭에 뿌리고 거기에서 열매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게임을 한다고 정신없이 바쁘다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피식 비웃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지나치게 헌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을 두고 지나가고 나면 그닥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칠일째 날에 거룩한 휴식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결국 영혼을 갉아먹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으며 나의 걸음은 올바른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정처없이 달리다가 큰 사고가 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를 때에 바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고 그분이 부르실 때에 ‘네’ 하고 응답할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우리 가까이 다가온 구원의 기회를 잃게 될까 걱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피해야 할 '현세적인 것들' 목록

불륜은 올바른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와 놀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물론 부부 사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실질적인 불륜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충실한 배우자이신 하느님을 두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 불륜이 저질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죄는 불륜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다른 것과 놀아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은 육체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더러워져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더러움은 영혼에서 일어납니다. 영혼은 '죄'로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이 더러움을 느낍니다.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죄스러움에 빠져들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이미 느끼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오랫동안 더러운 환경에서 살면 그곳에 익숙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오랫동안 더러워져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느끼기를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대신해 줄 헛된 향수를 찾습니다. 그 향수는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더욱 더러움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이미 영혼에서 냄새가 나는 데 정작 자신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쁜 욕망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욕망' 자체가 죄가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가 있는 욕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욕망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도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갖 세속 욕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영혼은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욕망은 영혼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핸들입니다. 엔진이 좋은 차가 상가로 돌진하면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듯이 강한 욕망에 그릇된 방향이 설정되면 자기 자신을 비롯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됩니다. 탐욕은 필요 이상의 것을 과하게 욕

초주검이 된 영혼

율법 교사의 의도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더 능력있는 이가 덜 능력있는 이의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상대가 그만한 실력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헌데 지금 한낱 교만에 사로잡힌 이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시험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 율법 교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율법 교사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즉, 내가 가진 합리적 사고에 하느님이 들어오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일쑤입니다. 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런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실천'하시는지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 결과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 다루듯 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다고 우겨대고 싶어합니다. 비슷한 인물로 '욥'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억울함에 대해서 하느님이 동조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욥 앞에서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 안에서 오직 정의로운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 앞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당하고자 한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고 실천할 때에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도 당한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골목골목을 찾아 다니면서 이 강도 당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도 당한 사람을 이웃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만한 확률로 일어날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처신하라

하느님의 지혜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제 다루었으니 오늘은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내적 일치의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똑똑하다, 혹은 영리하다는 것과 전혀 다른 내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서울대를 나온 사람은 '똑똑하다, 영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억력이 좋고 시험문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렇게 좋은 머리로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중요 직분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지혜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영리함이 더할수록 지혜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 똑똑하다는 친구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처리까지도 똑똑하고 영리하게, 즉 세상이 추구하는 바대로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는 잘 돌보는 척을 하다가 어느 정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에는 가차없이 냉혹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용적으로 효율적이고 똑똑하고 영리한 일처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쓸 줄 알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어리석은 이들, 지혜롭지 못한 이들이 됩니다. 그래서 지혜롭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치,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는 항상 꾸준하고 성실하며 가식과 위선을 배제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면에 똥을 감춘 상자는 그 똥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일시적인 향수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춘 똥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냄새를 풍기고 다니게 됩니다. 반면 내면에 향기를 지닌 이는 그 향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향에 이끌리는 이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지혜를 흉내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고요함을 찾아서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세속을 떠나 고요함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이번 한 주간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에게는 피정이라는 것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들어간 바로 그 날에 연락을 받았고 한 신자분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 짐을 꾸려 본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흙과 뒤섞어 놓은 물이 고요함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혼이 고요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무심코 지나치고 간과하고 있었던 마음 속의 어두움이 보이기도 하고 또 잊고 있었던 방향이 보다 뚜렷해지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고요함을 스스로 없애 버리는 데에 선수들입니다. 현대인은 꽉꽉 채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현란한 악보의 오케스트라도 쉼표가 있어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라는 악보를 온갖 음표로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떼를 돌보고 이리떼를 막아야 합니다.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사명이 더욱 뚜렷이 보이게 됩니다. 아무거나 집어먹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에게 관심이 있고 그분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내어서 그를 도와 주어야 하고 반대로 하느님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다른 욕망과 욕구로 다가선 이들을 가로막아야 합니다. 초전성당이라는 곳은 언뜻 외견적으로는 굉장히 고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게 되면 여러가지 면에서 엄청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심을 잘 잡고 있는 사제가 필요합니다. 어

더 나은 상태

더 나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요? 아무리 해 본들 모든 것이 똑같은 것일 뿐이라면 왜 애를 쓰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루하루 애를 쓰면서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물건보다는 깨끗한 물건이 더 낫다는 것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게도 비슷한 것이 적용됩니다. 파괴된 영혼이 있는가 하면 더 나은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올바로 구분해야 하고 더 나은 영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낮은 단계부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1) 파괴적인 영혼 파괴적인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멀쩡한 주변의 요소들을 파괴합니다. 바로 악을 저지르는 영혼이고 죄에 빠져 있는 영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즐기는 영혼입니다. 거짓말을 즐기고 허영심에 빠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떠는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결과는 그의 주변에서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합니다. 이 영혼에게 오직 하나 필요한 덕은 바로 '회개'입니다. 2) 세속적인 영혼 세속 정신에 물든 영혼입니다. 악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언제나 악 가까이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그의 영혼은 언제나 죄지을 기회를 살피지만 죄가 가져오는 수치의 위험을 인지는 하고 있기에 드러나게 큰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양이 울타리 주위를 서성이면서 달디단 독초의 향기에 마음을 사로잡히듯이 그 영혼은 세상 언저리를 헤메이면서 어떻게 하면 드러나지 않게 죄를 지을 수 있을지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런 내면의 욕구는 언제나 유혹의 근거로 작용하고 결국 죄로 쉽게 빠져드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 좋은 가치에 눈 뜬 영혼 이 영혼은 세상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가치에 눈을 뜬 영혼입니다. 그래서 좋은 평판을 찾

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우리는 우리가 하는 걸 다른 이들이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으스대고 싶은 것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세상이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세상이야말로 그 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올바로 알아야 세상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세상은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예수님이 알려 주시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 2.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 첫번째 항목부터 심도깊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는 과연 모든 것에 앞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보다 아버지를, 우리의 가족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단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랑의 대상의 될 수는 없습니다. 길을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면 ‘올바름’ 안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가족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마저도 감싸 안는 걸 그들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관계가 튼튼한 시골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서로의 뒤를 봐준다’는 언뜻 들으면 상부상조 같은 말마디 속에 때로는 올바르지 않은 일까지도 서로 뒤를 봐주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하느님에게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소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챙기고 나머지를 운용하고 있을까요? 이 역시 ‘그렇다’ 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챙길

가치

올바른 가치를 배우는 것과 잡다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이라는 미명 하에 정말 많은 지식 정보들을 습득해 왔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 배움의 범위는 넓어져만 갔습니다. 지금은 아주 어린 꼬마 아이들도 나날이 듣고 보는 수많은 영상물 속에서 '지식'이 한껏 넒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치'는 좀처럼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배울수록 나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느낌을 받지만 '가치'는 배우는 데에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또 그것을 배워서 당장 효과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지식'에 집중하지만 '가치'에서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대표적인 가치 교육의 장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공동체부터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집안에서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 연쇄적으로 다른 가치들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학교에서도 가치가 사라지고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던 신앙의 영역에서조차도 가치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점점 더 공공연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성당을 다닌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인간관계의 장으로서 종교적 단체가 존재할 뿐, 신앙적 가치는 갈수록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치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존재하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다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 뿐입니다. 문명의 이기라고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던 많은 것들이 역으로 우리의 내면을 공격해 들어와서 가치를 파괴하는 무기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세상의 진보는 역으로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내적 가치를 올바로 세우는 데에 헌신해야 합니다

빵을 배불리 먹있기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월요일 복음 중에서) 표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은 그 내면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의미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버는 것을 멋진 일로 치부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낼 수도 있고 정반대로 온갖 편법과 거짓으로 원래는 쌓이면 안되는 이득을 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외견을 지녔다고, 사제복을 입고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모두 자동으로 거룩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미 신자들은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지만 뒤에서 수근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솔한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고 언제나 속으로 되뇌이는 것을 꺼낼 뿐이니까요. 교회 가까이 살기만 한다고 해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성당 주변의 모든 상점들의 주인들은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 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오히려 그들의 신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성당에 와서 얻을 것도 없고 누릴 것도 없는 곳이라면 그들이 오는 이유는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재산도 벌어들일 수 있고 정치적 세력도 규합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내면에 진정한 신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성당에 즐겁게 오던 이유를 없애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당만 오면 술판을 벌일 수 있고 고스톱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오던 사람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볼리비아에 가기 전 한 당돌한 청년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그 질문을 받고는 저는 순간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저였지만 정작 저 자신이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제 마음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화되지 않은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미 선교를 마치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그때 한 질문에 대해서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행복해."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점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자녀'라는 행복이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위해서 나날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기초에서 나오는 행복이었습니다. 그건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남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었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가난한 음식을 즐기면서도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했기에 그 행복의 진실성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용서'받습니다. 단순히 '용서'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생명은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서를 넘어선 구체적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녀를 돌로 치려던 이들은 여러 면에서 불행합니다.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도 불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모두 실패하고 나서 어쩌면 더욱 분노에 차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여인을 심판하고자 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모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악행을 잠시 멈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행복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진실과 거짓 - 영혼의 빛과 어둠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다니 13,59)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의 빛으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배우는 사람일수록 숨겨진 진실을 올바로 바라보게 됩니다. 반면 사탄은 언제나 어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거부한 그 이유로 인해서 영혼의 빛이 꺼져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영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을 정도로 영리합니다. 그래서 아둔한 인간이 걸려 넘어지도록 온갖 술수를 계획합니다. 소위 음모를 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험담할 때에 그 자리에는 멍청한 사람들만 모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이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들고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술수를 짭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어둠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장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고 그 거짓으로 사람의 영혼을 어둡게 물들여 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거짓의 방패막이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는 이들은 언제나 거짓을 방패로 삼으려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 사랑을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온갖 거짓을 아내에게 꺼내야 합니다. 거짓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모든 농담도 사실은 허구이고 일종의 거짓입니다. 그러나 농담을 했다고 해서 누군가 다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루고 있는 사안이 중요할수록 거짓의 위중함도 더해갑니다. 친구에게 농담을 하는 것과 사제에게 중요한 사안을 거짓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더군다나 다른 이의 목숨을 가지고 말하는 이들은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연중   제 4 주일 “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 오늘  2 독서는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우리에게   전합니다 .  “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  뽐내지   않으며 ,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  성을   내지   않고 ,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  모든   것을   믿으며 ,  모든   것을   바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그러나   이어서   복음에   예수님의   현실적   처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  앞서   말한   모든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시는   것이 분명한   예수님은 ,  정작   현실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모습을   보입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는  ‘ 화가 잔뜩   났다 ’ 고   표현하며   심지어는   살인의   시도까지   합니다 .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그분을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  그러나   정작   그분은   유유자적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뒤에   그들을   떠나   버립니다 .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했던   걸까요 ?  그럴리는   없습니다 .  행여라도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그분이   성부   성자   성령의   한   분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  그분은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