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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빵을 배불리 먹있기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월요일 복음 중에서) 표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은 그 내면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의미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버는 것을 멋진 일로 치부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낼 수도 있고 정반대로 온갖 편법과 거짓으로 원래는 쌓이면 안되는 이득을 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외견을 지녔다고, 사제복을 입고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모두 자동으로 거룩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미 신자들은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지만 뒤에서 수근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솔한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고 언제나 속으로 되뇌이는 것을 꺼낼 뿐이니까요. 교회 가까이 살기만 한다고 해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성당 주변의 모든 상점들의 주인들은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 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오히려 그들의 신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성당에 와서 얻을 것도 없고 누릴 것도 없는 곳이라면 그들이 오는 이유는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재산도 벌어들일 수 있고 정치적 세력도 규합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내면에 진정한 신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성당에 즐겁게 오던 이유를 없애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당만 오면 술판을 벌일 수 있고 고스톱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오던 사람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볼리비아에 가기 전 한 당돌한 청년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그 질문을 받고는 저는 순간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저였지만 정작 저 자신이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제 마음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화되지 않은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미 선교를 마치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그때 한 질문에 대해서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행복해."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점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자녀'라는 행복이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위해서 나날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기초에서 나오는 행복이었습니다. 그건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남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었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가난한 음식을 즐기면서도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했기에 그 행복의 진실성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용서'받습니다. 단순히 '용서'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생명은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서를 넘어선 구체적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녀를 돌로 치려던 이들은 여러 면에서 불행합니다.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도 불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모두 실패하고 나서 어쩌면 더욱 분노에 차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여인을 심판하고자 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모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악행을 잠시 멈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행복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