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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지혜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제 다루었으니 오늘은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내적 일치의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똑똑하다, 혹은 영리하다는 것과 전혀 다른 내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서울대를 나온 사람은 '똑똑하다, 영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억력이 좋고 시험문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렇게 좋은 머리로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중요 직분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지혜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영리함이 더할수록 지혜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 똑똑하다는 친구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처리까지도 똑똑하고 영리하게, 즉 세상이 추구하는 바대로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는 잘 돌보는 척을 하다가 어느 정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에는 가차없이 냉혹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용적으로 효율적이고 똑똑하고 영리한 일처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쓸 줄 알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어리석은 이들, 지혜롭지 못한 이들이 됩니다. 그래서 지혜롭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치,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는 항상 꾸준하고 성실하며 가식과 위선을 배제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면에 똥을 감춘 상자는 그 똥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일시적인 향수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춘 똥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냄새를 풍기고 다니게 됩니다. 반면 내면에 향기를 지닌 이는 그 향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향에 이끌리는 이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지혜를 흉내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고요함을 찾아서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세속을 떠나 고요함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이번 한 주간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에게는 피정이라는 것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들어간 바로 그 날에 연락을 받았고 한 신자분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 짐을 꾸려 본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흙과 뒤섞어 놓은 물이 고요함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혼이 고요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무심코 지나치고 간과하고 있었던 마음 속의 어두움이 보이기도 하고 또 잊고 있었던 방향이 보다 뚜렷해지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고요함을 스스로 없애 버리는 데에 선수들입니다. 현대인은 꽉꽉 채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현란한 악보의 오케스트라도 쉼표가 있어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라는 악보를 온갖 음표로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떼를 돌보고 이리떼를 막아야 합니다.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사명이 더욱 뚜렷이 보이게 됩니다. 아무거나 집어먹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에게 관심이 있고 그분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내어서 그를 도와 주어야 하고 반대로 하느님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다른 욕망과 욕구로 다가선 이들을 가로막아야 합니다. 초전성당이라는 곳은 언뜻 외견적으로는 굉장히 고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게 되면 여러가지 면에서 엄청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심을 잘 잡고 있는 사제가 필요합니다. 어